소설리스트

풍운객잔-33화 (31/686)

5권

第三十二章 ― 동족혐오(同族嫌惡)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막연한 위화감.

그다음은 경악했고, 그다음엔 불신했다.

커다란 동경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를 비춰 보는 기분이었다.

범상치 않은 과거를 살아왔으며,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 수많은 원혼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

그런 자가 자신 말고 이 세상에 또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하얀 토끼 백 마리 사이에 늑대 한 마리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하?”

그리고 그런 기분은 상대방 쪽도 마찬가지인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을 내뱉더니, 뚫어져라 이쪽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전심전력으로 살기를 뿜어냈다.

화아악―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다. 천 개의 검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참을성이 없는 놈이군.’

워낙 강한 살기라 옆으로도 새어 나갔는지, 휘연과 소녀가 한기를 느끼고 움찔 몸을 떨었다.

장기린은 재빨리 그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는 뒤쪽으로 밀었다.

“휘연, 그 아이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 있어.”

휘연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야 장기린은 양손을 편안하게 늘어뜨렸다.

자연체(自然體).

장기린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 자세였다.

상대는 동류(同類)다.

즉, 자신만큼 위험하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상대방을 자세히 관찰했다.

얼굴은 죽립으로 가려 두었고, 머리는 몇 달간 씻지 않은 것처럼 빳빳하게 뻗쳐 있다. 옷은 평범한 황토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치수가 작아 팔뚝이 다 드러났다. 그 덕분에 쇠사슬 같은 것에 꽁꽁 묶여 있었던 것 같은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딘가에 잡혀 있었나?’

죄수, 또는 포로 쪽으로 짐작이 된다.

눈앞의 사내는 장기린의 시선을 느꼈는지 별로 감추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역모죄로 잡혀 있었지.”

죽립 아래쪽으로 드러난 입술이 씩 웃는 것이 보였다.

“그쪽은 어디서 그렇게 피를 묻혔지? 왠지 느낌으로는 군문(軍門) 쪽 같은데?”

놀랍도록 날카로운 안목이었다.

서로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일까.

장기린도 그 사내가 그동안 겪어 온 삶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생존을 위한 투쟁. 매일같이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했던 싸움들.

지겨움.

무료함.

하지만 전체적으로 닮아 있는 가운데, 단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장기린은 군에 들어가면서 동생들과 동료들이 생겼다. 함께 싸우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 주며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배웠다.

사내에겐 그게 빠져 있었다.

사내는 오직 혼자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간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이를 드러내고, 물어뜯어 목숨을 끊어 놓아야 만족한다.

절대적인 고독.

스스로 만들어 내는 외로움.

그게 사내가 살아가는 세계다.

“다르군.”

“달라.”

거의 동시에 서로의 입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둘은 같지만, 또한 다르다.

죽립 너머 사내의 웃음이 짙어졌다.

“난 만 명 정도인데, 그쪽은 어떻지?”

그 숫자가 사람을 죽인 숫자라는 것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세어 보지 않았다.”

“큭큭! 나보다 나이도 많은 것 같고. 그 분위기로 봐선 뭐, 대충 나보다 많겠지.”

사내의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얼굴로 나이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장기린이 보기에도 자신보다는 서너 살 어린 듯한 느낌이다.

“마음 같아선 확 여기서 한번 붙어 보고 싶은데…….”

사내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보다는 다른 호기심이 더 커. 나랑 같은 걸 본 것은 처음이거든. 표정을 보아하니 그쪽도 그런 것 같지만.”

사내는 큭큭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듯 장기린의 어깨 너머를 넘겨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을 지켰지?”

사내의 시선이 굳게 닫혀 있는 풍운객잔의 대문으로 향한다.

장기린은 그런 사내의 시선을 가로막듯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휘연과 소녀를 ‘그것’이라고 표현하는 사내에게는 시선조차 허락할 수 없다.

“흐음, 꽤나 애정을 갖고 있는데? 혹시 뻐꾸기인가?”

“뻐꾸기?”

“왜, 모르나?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지.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새끼는 다른 새의 새끼들과 한 가족처럼 자라지만, 결국은 다른 새끼들을 다 둥지에서 떠밀어서 죽여 버리고 혼자서 살아남는다. 교활하게 동족으로 위장하는 포식자라고나 할까.”

사내는 시선으로 ‘너도 그런 거 아냐?’라고 묻는다.

장기린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다.”

“하! 평범?”

“그래.”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웃더니, 이내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평범? 평범하게 산다고?”

사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 눌렀다.

“나는 특별하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으로 장기린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쪽도 특별하다.”

장기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자신과 꼭 닮은 사내로부터 그런 말을 듣자, 자신의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건 즉, 넌 절대로 평범해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데 말이지. 우린 포식자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호랑이가 토끼 떼와 어울려서 바닥을 뒹굴거리는 것과 같다고. 이상하지 않아?”

“글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생각하기 나름? 웃기는군. 뱀이랑 개구리가 같이 놀고 있는데, 그게 생각하기 나름이 되는 거냐? 자기 분수를 몰라도 정도가 있는 거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포식자가 먹잇감들과 같이 논다? 뭐, 배가 부르면 잠시 살려 둘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거, 언젠가는 반드시 파탄이 난다고? 호랑이가 장난을 치기 위해 깨물어도 토끼는 죽는다. 그만큼의 차이가 있어. 설마 그런데도 영원히 함께 행복할 거라는, 그런 전래 민화 같은 이야기를 진짜로 믿고 있는 거냐?”

“…….”

“정신 차려. 장난질도 정도껏 하라고.”

사내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장기린 역시도 화가 났지만, 이내 머릿속이 다시 차분해졌다.

이 사내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장기린은 가족을 믿는다.

그 차이다.

“난 피를 보며 사는 것이 지겨워졌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함께 사는 가족들을 믿는다.”

“……사람을 믿는다고?”

“장난을 치는 게 아냐. 진심이다. 나는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사내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 갔다.

실망에서 분노,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그 사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두 사람 근처를 상인들로 보이는 한 떼의 사람들과 관청의 나졸들이 스쳐 지나갔다. 웅성거리며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그들이 이쪽을 슬쩍 바라보자, 사내는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죽립을 좀 더 내려썼다.

“……재미 있군.”

사내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반야혼이다. 그쪽은?”

“장기린.”

사내는 기린이라는 특이한 이름에 웃지도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다고. 충고하는데,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간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

“큭큭! 세상이 험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네 둥지를 잘 지키라고.”

반야혼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입술을 말아 올리고 이가 보이는 웃음. 굶주린 늑대처럼 보이는 웃음이었다.

장기린은 반야혼이 나졸들이 지나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와 너무나도 비슷하지만, 또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예전에 휘연이 낭화를 보면서, 까딱 잘못했더라면 자신이 낭화와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었다고 했던가?

그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린도 만약 공손웅 장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분명 지금쯤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반야혼…….”

장기린은 사내의 이름을 나직하게 되뇌어 보았다.

불길했다.

어쩐지 반야혼과의 만남이 이걸로 끝이 아닌 듯했던 것이다.

☆ ☆ ☆

그 후,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온 장기린에게 휘연으로부터 여러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처음 만난 녀석이다. 자신과 똑 닮은 동류라는 것과, 만 명을 죽인 무시무시한 살인마라는 것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위험한 녀석이니 조심하라는 말만 되풀이하자, 휘연도 거기서 납득했다.

장기린이 휘연과 함께 객잔 안을 정돈하는 사이, 자신이 난(蘭)을 쳐 주는 대신 하룻밤을 재워 달라던 당돌한 소녀는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오라버니’를 데리고 돌아왔다.

한참 동안 시장통을 뛰어다닌 듯 땀 냄새와 먼지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청년이었다.

“으음, 저기, 화매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신세를 져도 될지……. 아앗! 알았어, 화매. 자기소개부터 할 테니까 꼬집지 마! 크흠, 저는 백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 먼지투성이가 되어 버린 청색 장삼을 입고 순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그는 화매라고 불린 소녀의 말대로 정말 ‘착해 빠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으로, 장기린의 또래로 보였다.

허리에 나무 검집을 가진 장검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눈에 뻔히 보이는 데도 그가 검을 차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했다.

원래 무기를 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예기(銳氣)를 뿜어내게 된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난폭함이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제 막 창을 잡은 신병에게도 예기는 뿜어지는 법인데, 무당파 출신이라던 백연에게선 그런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이다. 고의로 그런 기세를 ‘없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녀석…… 묘하군.’

장기린은 유심히 백연을 살펴보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갑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듯한 녀석이었다.

물론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기세를 뜻하는 얘기로, 언제 어떤 방향에서, 심지어 등 뒤에서 불시의 기습을 날려도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 낼 것 같은 방어기(防禦氣)가 흐르는 것이다.

‘흐음, 억지로 뚫으려면 뚫을 수 있을 테지만…….’

하지만 역시, 막상 부딪치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저기…….”

장기린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음인가.

백연은 장기린을 쳐다보며 잠시 당황해했다.

옆에서 화매라고 불린 소녀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화매의 말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빼앗긴 전낭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해서……. 곤란한 상황인데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연은 ‘반드시 이 은혜는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숙박의 대가는 일을 하는 것으로 갚기로 했으니, 딱히 은혜로 생각할 필요 없소.”

“아니,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만 해도 은혜이지요.”

“대가는 받을 거요.”

“네. 그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백연은 의외로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안 그래도 여쭤 보려던 참입니다만, 제가 어떤 일을 도와드리는 게 좋으시겠습니까? 힘을 쓸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든…….”

“아니. 할 일에 대해서도 이미 저 아이와 이야기를 끝냈소.”

“예? 화매가요……?”

백연은 그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는지 놀란 얼굴로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화매가, 어떤……?”

백연의 얼굴엔 불안이 가득하다. 소녀를 전혀 신용하지 못하는 느낌이라 왠지 웃음이 나왔다.

“잘하는 게 있다고 해서, 그걸로 하라고 했소.”

“잘하는 것이라니…….”

“난(蘭)을 아주 잘 친다고 자부하던데.”

순간 이해가 안 되는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던 것도 잠시, 백연은 잘 익은 문어처럼 새빨간 얼굴이 되었다.

“나, 난입니까? 난을 치는 걸 대가로 한 것입니까?!”

“아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백연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가 있었다.

백연은 휙하고 몸을 돌려 소녀를 추궁했다.

“화매! 난을 쳐 주기로 하고 방을 얻어 낸 거야?”

“네? 네, 맞아요. 그렇게 약속했어요.”

소녀는 백연이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갑자기 추궁을 당하자 당황해했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네? 어째서요?”

“화매가 화선지에 그린 난이 돈이 될 리가 없잖아!”

“윽! 실례예요! 아버님께선 항상 제가 친 난을 보며 은자 백 냥의 가치가 있다면서 좋아하셨다구요!”

오히려 자신이 거스름돈을 받아야 하는 거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소녀.

백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건 가주님이 화매의 아버지니까 그런 거야.”

“흥! 믿지 않아요. 아버님은 매사에 공정해서 절대로 가족이라고 편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세요.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아니, 나도 지금까진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장기린은 툭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특이하면서도 정겨운 한 쌍이 아닌가.

백연은 장기린의 앞으로 달려와 좀 전보다 더욱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못난 화매가 폐를 끼쳤습니다.”

“오라버니! 못나다뇨!”

“가만히 있어, 화매! 난을 치는 걸론 보답이 되지 않는다니까.”

“왜 안 돼요! 분명 제 난은 은자 백 냥의 가치가……!”

“글쎄, 은자 백 냥의 가치가 없다니까! 가주님도 참. 어차피 칭찬하실 거면, 금자 십만 냥 같은 허황된 말로 하실 것이지, 왜 하필 은자 백 냥처럼 묘하게 그럴듯한 숫자로…….”

백연은 난감해하며 장기린에게 매우 미안해했다.

보다 못한 휘연이 옆에서 눈짓을 보낸다.

장기린이 마음껏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휘연은 그제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우리도 소저(小姐)가 난을 치는 건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폐가 됩니다. 특히, 화매의 숙박은 그걸로 된다고 쳐도, 제가 아무런 일도 안 하고 호의를 받는 것은 곤란합니다.”

장기린도 한마디했다.

“정말로 괜찮소. 그럼 숙박비를 다음에 와서 내는 걸로 하면 되지.”

“아뇨. 그렇게 해서야 지나친 폐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언제 다시 올 거라는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집을 부리면서도 난감해하는 백연.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휘연은 그렇게 말하며 별채를 청소 중이던 휴를 불렀다.

“침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휴는 백연과 소녀를 한 번 쳐다본 뒤 휘연에게 물었다.

“오늘 강 숙수님이 채소가 들어올 거라고 하시던데, 양이 많아서 혼자서는 옮기기 힘들 거라고 하시더군요. 맞나요?”

“예. 안 그래도 청소를 끝내고 제가 돕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이분이 일을 도와주실 거예요.”

“예?”

휴는 의아해했다. 하긴,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객잔 일을 도울 거라고 말하면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했다.

“채소가 담긴 상자를 나르는 일입니다. 그만하면 숙박료로는 충분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아, 네. 물론입니다.”

그제야 백연의 얼굴이 밝아진다.

신기했다. 힘든 일을 떠맡게 되었건만, 오히려 무거운 짐을 덜은 것처럼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휴는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예. 그러죠.”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기 말을 안 들었다며 씩씩거리던 소녀는 휘연이 달래 주었다. 도도하고 까탈스런 소녀 같았으나, 휘연이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놀랄 만큼 차분해진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자매를 보는 듯한 기분.

휘연은 마치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소녀를 달래면서 장기린을 향해 웃음을 보냈다.

“이 세상에 갚을 수 없는 은혜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없어요. 뭔가 호의를 베풀었다면, 그것을 갚을 기회도 주는 것이 올바른 거예요.”

그 말이 장기린을 향해 하는 거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여간…….’

휘연은 당해 낼 수가 없다. 장기린은 웃고 말았다.

그날 저녁.

채소 상자를 잔뜩 옮기고 방에서 씻고 나온 백연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만큼 몰라보게 깨끗하고 단정해져 있었다.

귀밑까지 오는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겼고, 뽀얗고 순박한 얼굴은 장기린이 빌려 준 백창의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어딘가 깊은 산중에서 도학을 갈고닦는 청년 도사 같은 느낌이다. 이제야 무당파의 무인이라는 것이 믿어졌다.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아, 예. 알겠습니다.”

백연은 두말 않고 승낙한 뒤 장기린을 따라나섰다.

아직 신시(申時:오후3∼5시)밖에 안 되었음에도 계절이 겨울인지라 벌써 하늘이 까맣게 저물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한가득 보일 만큼 맑은 날씨였다. 춥다기보다는 상쾌하다.

장기린은 다른 객잔 식구들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만한 곳으로 가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는 게 어떻소?”

“예.”

백연은 이제 막 깨끗한 백창의로 갈아입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앉았다. 소탈한 성격인 듯했다.

“아까 작은 소저의 말로는 누군가를 쫓아서 왔다던데, 사실이오?”

장기린이 백연을 이곳까지 불러내서 묻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 그는 인생에 두 번 없을 충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바로 그날, 누군가 위험한 인물을 쫓는다는 청년이 항주에 도착했다는 것은 왠지 우연이 아닌 듯했던 것이다.

“아…… 저기, 화매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습니까?”

백연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기밀이지만…… 사실 기밀일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맞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쫓으라는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명령이라면, 사문의?”

“아뇨. 황실의 명입니다.”

백연은 별반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황실……?”

장기린은 동요했다.

그러고 보니 반야혼은 처음에 자신이 역모죄로 잡혀 있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저의 사문인 무당파는 현재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입니다. 종종 제자들을 내보내 황실의 일을 도와주고, 대신 관의 지원을 받는 그런 관계인데……. 최근에 황실은 보통 병사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악한이 나타나서 곤란한 듯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불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자, 대단한 인물인가 보군.”

“예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의 정반대가 있다면, 그런 자가 아닐까 싶더군요.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고 할까요.”

백연의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인물입니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에 끼어서, 마치 축제를 즐기듯이 매번, 매번 사람을 죽여 왔다더군요.”

“만 명……?”

“예. 믿기지가 않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장군들이 명령을 내리면 수천수만이 죽을 수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그것과는 달리 단 한 사람이 직접 만 명이 넘는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가 않잖습니까?”

“…….”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 그자가 탈출했던 호송대를 보았는데…….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습니다.”

백연의 기세가 변한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른다.

장기린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백연처럼 순박하고 정의로운 성격으론 절대로 그 현장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인정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남는 것은 오직 분노.

그리고 그 부조리한 존재를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뿐이다.

“……온전하게 남은 시신은 단 한 구도 없었지요. 그 모습을 보자 정말로 그자가 만 명을 죽였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저도 죄인이 탈주를 하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싸우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이자는 다릅니다. 전의를 잃고 도망치려는 사람마저, 마치 사냥하듯이 철저하게 뒤를 덮쳐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이자는 살인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분명 느꼈습니다.”

백연은 울분을 토해 내듯 말을 쏟아 내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장기린은 백연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고 싶어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백연의 올곧은 성격상 저런 사실을 혼자서 품고 있는 것은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 장기린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을 테고, 지금은 마치 울화가 풀린 듯 한결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아, 제가 말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백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괜찮소.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습니까?”

장기린은 백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아마 백연이라면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자를 찾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예?”

“아직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보지 않은 듯한데. 그자를 죽일 수 있겠소?”

꽈악.

백연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움켜쥔다. 눈이 놀란 강아지처럼 동그랗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엇을 말이오?”

“제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과거를 추억하듯이…….

“사람을 죽여 봤으니까.”

“……예?”

“죽여 본 사람 입장에선, 죽여 본 적이 없는 사람 정도는 구별해 낼 수 있는 거요.”

장기린은 과거에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백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목숨을 빼앗았다.

“아…….”

백연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죽였는가. 몇 명을 죽였는가.

그런 것을 묻고 싶겠지만, 또한 그런 걸 물어서 대답을 들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을 터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백연은 장기린의 질문에 대답했다.

“황실에서 명령한 것은, 죄인을 황실로 잡아 올 것. 즉 생포(生捕)입니다.”

잔뜩 경직된 백연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듯했다.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의 신념이 있는 것은 좋지만, 황실에서 내린 명은 그것뿐이 아닐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

“예?”

“호송대를 몰살시키고 탈주할 만큼 대단한 죄인이라면, 황실에서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을 것이오. 아마 그를 쫓는 추포인(追捕人)들에겐 생포를 우선시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죽여도 좋다는 생살여탈권을 주었을 테지.”

“정말로,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

백연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객주님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만.”

“내 정체는 풍운객잔의 주인이오.”

백연은 한차례 소리 내어 웃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 명을 죽였다……라고 했소?”

“예.”

“그리고, 호송대의 결박을 풀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지. 그럼 그만큼 강하다는 뜻 아니오?”

“예. 그는 분명 강합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게 가능하오?”

“…….”

“상대를 산채로 사로잡으려면, 그 상대보다 훨씬 강해야만 가능할 텐데?”

백연의 표정이 흐려진다.

“분명 힘들겠지요.”

“음…….”

“하지만 상대를 무사히 제압하는 것에는 익숙합니다. 힘들지만 가능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할 때의 백연은 무모하다기보단,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꽤 많은 싸움을 겪어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

장기린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묵묵히 수긍했다. 다만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런데, 애초에 그자는 어떻게 잡힌 것이오?”

“예? 무슨 뜻이신지…….”

“잡혔다는 것은 패배했다는 뜻. 즉, 누군가와의 싸움에서 졌다는 뜻 아니오? 그걸 떠올려 보면, 다시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소?”

“아……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백연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듯 볼을 긁적였다.

“황실 측에선 그자를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듣기로는 난을 일으킨 반군 쪽에서도 그자를 ‘짐승’으로 부르고, 맹수처럼 취급한다더군요.”

“짐승…….”

반야혼과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싸움이든, 한쪽이 몰살당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도망치는 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가 잡혔던 때도 그랬습니다. 이미 반군은 모두 도망치거나 죽었는데, 혼자서 반군의 우두머리가 도망칠 수 있도록 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상대로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그때의 활약은 엄청났지만, 결국엔 힘이 빠져서 잡히고 말았다더군요.”

“아…….”

“그러니 ‘누구’에게 졌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숫자’에 진 겁니다.”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자신은 대장이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벌어야 한다.

상대는 일만(一萬). 주변은 이미 병사들로 새카맣게 포위된 채다. 그걸 혼자서 어떻게 막아야 할까?

‘흑룡을 타고, 철갑을 입고, 내 창(槍)도 있다면……. 아마 바깥쪽을 빙빙 돌면서 차츰차츰 숫자를 갉아먹었겠지. 그러다가 여의치 않으면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공격하는 선택지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만, 그래도 반야혼처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생각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 명을 상대로 정면으로 쳐들어가, 주먹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을 때까지 장렬하게 싸운다.

‘너야말로 재밌는 녀석이었군.’

장기린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피식 웃었다.

“그밖에도 전략적인 함정이나 계략 쪽엔 약한 듯하지만…… 어차피 제가 쓸 수 있을 만한 방법은 없겠지요.”

“……그렇군.”

“어차피 혼자서 정면으로 맞붙어 사로잡아야 합니다.”

백연은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듯한 눈빛이었다.

부대가 몰살당할 것을 알고도 출전해야만 하는 장수처럼.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단한 성품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뜻한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겠소.”

툭툭.

장기린은 먼지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

백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연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그 범인은 이곳 항주로 도주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키가 육 척이 넘고 건장하며, 짧고 뻗친 머리에 손목에 쇠사슬에 묶인 자국을 가진 사내를 본다면 즉시 인근의 관청에 알려 주십시오.”

“……알겠소.”

“말이 나온 김에 여쭤 보는 겁니다만, 혹시 그런 인상을 가진 사내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맑은 시냇물처럼 투명한 백연의 눈빛이 장기린을 응시한다.

장기린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모르겠소.”

라고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백연은 그 말에 안심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의구심을 가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마지막엔 웃는 낯을 보이며 객잔으로 돌아갔다.

아마, 이젠 잠을 자러 방으로 갈 것이다.

여태까지의 힘든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앞으로 있을 큰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장기린은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여기서는 열이면 열, 모두 백연의 편을 들 것이다. 낮에 반야혼을 만난 일이며, 그와 나눈 대화며, 심지어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것 같다는 말까지 다 해 주어서 백연을 도와줘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마치 장기린의 또 다른 미래처럼 보였던 반야혼.

불행한 과거를 살았으며, 지금도, 그리고 미래도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홀로 살아갈 존재를 일방적으로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반야혼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 역모에 가담한 반야혼을 도울 수는 없을 테지만, 설령 그가 만 명이 넘는 생명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장기린은 그를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중간이다.

백연을 돕지는 못할 테지만 방해하진 않는다.

반야혼을 버리진 못하지만, 돕지도 않는다.

장기린은 스스로의 마음을 그렇게 정했다.

☆ ☆ ☆

다음날 아침.

춘절의 연휴가 끝나고 다시 영업을 준비하느라 한창 분주할 때, 백연과 구양화는 다시 길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느새 친해진 것인지 아칠과 아팔은 구양화를 향해 아쉬운 눈빛을 보냈고, 휘연 또한 구양화의 작은 단풍잎 같은 손을 한참 동안이나 꼭 잡고 있었다.

“떠나는 것이 아쉽지만…… 왠지 이걸로 끝이 아닐 듯한 기분이 듭니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겠습니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백연의 옆에서, 구양화는 등을 돌린 채 단 한 번도 휘연을 쳐다보지 않았다.

섭섭하면 섭섭하다고 하면 될 텐데…….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소녀였다.

백연은 이 은혜는 다음번에 반드시 갚겠다고 말하며 떠나는 내내 손을 흔들었다. 물론 한쪽 손으로는 소녀의 손을 꼭 움켜쥔 채로.

두 사람이 금선교 너머로 사라지자, 휘연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이미 보답을 받은 것 같아요.”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침에 화매가 난을 그려 주었거든요? 그런데 화매의 아버지의 말이 맞았어요. 화매의 그림은 은자 백 냥이 아깝지 않아요.”

장기린은 크게 놀랐다.

그럼 그 진담 같던 농담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단 말인가!

촤르륵―

휘연은 동그랗게 말아 두었던 화선지를 평평하게 펴서 보여 주었다.

장기린이 워낙 그런 쪽으론 소양이 없어서 그런지, 척 보기에도 군더더기 없이 잘 그린 난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은 느낄 수 없었다.

휘연은 상기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시작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절조를 갖고 뻗어 나가는 길이. 그 속에서 따스함을 느끼게 만드는 전체의 형태까지. 분명 명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솜씨예요. 옆에 인장 대신 써 놓은 서명에서도 기품이 느껴지는걸요?”

“……그래?”

“네. 이름이 구양화……. 그 ‘구양 가(家)’일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나중에 화매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정말로 비싼 그림이 될지도 몰라요.”

휘연은 구양화가 그려 준 난을 높게 평가하며 조심스럽게 말아 두꺼운 천으로 감싸 놓았다.

“그럼 휘연이 잘 가지고 있어.”

“그럴까요?”

“그래. 어차피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니까.”

“음……. 그럼 제가 족자에 넣어서 객잔에 걸어 둘게요.”

휘연은 그게 좋겠다는 듯 스스로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관하는 게 아니라?”

“좋은 작품은 혼자서 간직하는 게 아니라, 내보이는 거예요. 제가 항상 장부를 정리하는 곳에 걸어 놓고 관리할 게요.”

휘연은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장 족자를 맞추러 나가 버렸다.

부유한 상가(商家)의 외동딸로 자라며 고급스러운 취미가 하나쯤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마 난(蘭) 치기가 그것인 모양이다.

조만간 문방구(文房具)라도 사다 줄까 생각하며 피식 웃고 있는 사이, 아칠과 아팔이 다가와 개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려 왔다.

“아아, 그래. 그럼 시작하자고.”

아칠과 아팔의 힘찬 대답과 함께 객잔의 대문이 열렸다.

빼 두었던 현판을 다시 걸고 휴업(休業)이라 써 두었던 종이를 떼어 냈다.

그걸로, 신년 이후 첫 장사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 신천지 소면 둘이요―!”

정오가 가까워지자 소면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객잔은 만원을 이루었다. 활기찬 소음이 와글거리는 가운데, 사람 수만큼의 주문이 한여름의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객잔에 있는 탁자의 수는 열 개.

각 탁자마다 네 사람까지 앉을 수 있으니,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손님은 사십 명까지였다.

물론 지금 탁자에는 각자 두 명 정도씩만 앉아 있으니, 대략 스무 명 정도지만.

손님들 대부분의 주문은 신천지 소면.

가격은 동전 열 문.

그리고 다 먹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각 전후였다.

즉, 스무 명이 일각 동안 각각 신천지 소면을 먹는다고 할 때, 들어오는 수입은 동전 이백 문.

그와 같은 속도로 반 시진 동안 장사를 하면 동전 팔백 문이다.

은자 한 냥이 동전으로 이천 문이니, 대략 한 시진하고 이각 동안 장사를 하면 은자 한 냥을 버는 셈.

물론 순이익으로 따진다면 그보다 훨씬 적어지지만, 그래도 적은 수입은 아니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이번엔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질 수 있으려나?’

다른 객잔의 일꾼들보다 많이 지급하고 있는 월봉.

이번에 객잔을 개장하느라 쓴 비용.

그리고 주방에 들어가는 식비와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저금이라던가, 가벼운 그릇들 같은 집기들의 가격까지.

그동안은 들어간 돈이 너무 커서 항상 수익보단 적자가 더 컸지만, 이번 달만큼은 수익이 나는 것을 노려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칠! 여기 물 한 잔만 갖다 줘!”

“아칠! 아니, 아팔인가? 여기 소면 두 개 시킨 지 꽤 된 것 같은데!”

“여기―! 소면 말고 담담면으로 바꿔 줘!”

원래 손님들은 음식만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음식을 더 추가할 수도 있고, 저금이나 잔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쏟아지는 주문들을 어린아이 두 사람이 처리하는 것은 사실 힘든 일.

하지만 아칠과 아팔은 예전의 아칠과 아팔이 아니었다.

장기린으로부터 ‘숨 쉬는 법’과 ‘걷는 법’을 배웠고, 지금까지도 매일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을 시작한 지 삼 개월이 지나자, 아칠과 아팔의 몸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도 피곤하지 않았다. 장기린이 가르친 숨 쉬는 법만 신경 써서 운용하면, 설령 엉거주춤한 마보 자세로 세 시진을 버티는 것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객잔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쟁반에 무거운 음식과 그릇 들을 잔뜩 올려놓아도 절대 힘들지 않았고, 심지어 그 쟁반을 들고 엄지발가락 하나만으로도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균형 감각이 발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육체에 여유가 생기자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애초부터 아칠과 아팔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했었지만, 이번 수련을 거치며 두 사람의 정신력은 어떤 일이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게 발전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탁자에서 빈 그릇을 수거하고, 두 번째 탁자에 물을 갖다 주며, 세 번째 탁자에서 새로운 주문을 받는, 그런 일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낼 수 있게 변한 것이다.

예전의 두 사람은 세 가지는커녕 한 가지씩 일을 하는 것에도 급급해서 실수를 연발했었으니, 지금은 얼마나 큰 발전을 한 것인가.

올해로 아칠과 아팔의 나이는 십삼 세.

두 사람은 아직 모르지만, 정통 무파(武派)의 어린 제자들도 그 나이에 두 사람만큼의 정신과 신체를 가지지는 못했다.

아니, 신체는 가졌을 수 있지만, 정신만큼은 훨씬 부족하다.

산에서 어려운 무공 비급만 읽으면서 갇혀 살았던 아이와, 험한 세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금껏 거칠게 살아온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차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에―! 갑니다!”

“자자, 가져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아, 강 아저씨 또 오셨네요. 오늘도 신천지 소면으로 드릴까요?”

아칠과 아팔은 방긋방긋 웃으며 손님들을 능숙하게 접대하고 있었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배달하고, 빈 그릇을 치워 주고, 중간 중간에 더러워진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렇게나 많은 일을 하면서도, 지금껏 객잔에 들어와서 나갈 때 웃지 않고 나간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어린 점소이에서 이젠 숙련된 점소이가 아칠과 아팔.

장기린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아칠과 아팔은 이제 의심할 바 없는, 풍운객잔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딸랑― 딸랑―

“어서 오세요―!”

“어? 처음 보는 분이시네요. 혼자 오셨으면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한 사내가 방긋방긋 웃는 아칠의 안내를 받아 구석진 곳의 탁자에 털썩 앉는다.

구석진 곳에 앉는 바람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행동거지만 놓고 봐도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런 복잡한 객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딱히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을 둘러보고 의자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도록 경직되어 있는 행동이 묘하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저건……!’

그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장기린.

그는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객주님……?”

마침 창고에서 청경채 한 상자를 주방으로 가져가던 휴가 그런 장기린을 보며 의아하게 물었지만, 장기린은 대답조차 해 주지 못했다.

그저 괜찮다는 뜻으로 손만 한 번 흔들어 준 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동요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머릿속은 뜻밖의 상황에 대한 당황과 분노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님들을 지나치고, 탁자 사이를 통과해, 아칠이 마침 주문을 받고 있는 그 탁자에까지 도착했다.

“고기…… 고기라면……. 아! 오향장육은 어떠세요? 오늘 강 숙수님께서 돼지고기가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들었거든요. 헤헤, 강 숙수님이 해 주시는 요리는 뭐든지 맛있지만, 오향장육은 특히나 대단하다는 것만 미리 말씀드릴게요.”

사내는 아칠의 달변에 감화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로.”

“네에―! 반 시진 안에 나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소면을 제외하고, 오늘의 첫 요리를 주문받은 아칠은 기분이 정말 좋아 보였다.

아칠이 주문을 주방에 전달하기 위해 기분 좋게 뛰어간 뒤, 장기린은 오향장육을 주문한 사내의 앞자리에 앉았다.

영업시간에 손님이 앉는 자리에 앉은 것은 이걸로 두 번째.

첫 번째는 입으로 우모침을 쏘아 대던 살수였지만, 두 번째는 지금껏 만 명 이상을 죽였다는 희대의 죄인이다.

“큭큭! 한눈에 알아보는군.”

사내 반야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늑대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반야혼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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