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三章 ― 재료풍운(材料風雲)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옷차림이었다. 빌려 입은 것처럼 치수가 맞지 않았던 황토색 옷 대신 오늘의 그는 부잣집 둘째 도련님의 것 같은 자줏빛의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다. 치렁치렁해서 쇠사슬 자국이 남아 있던 손목을 가려 주는 데다, 건장한 몸도 선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좋은 재질이었다.
반야혼은 거기다가 기루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한량들이나 쓸 법한 문사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런 복장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멧돼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호랑이라는 말이 있지. 사냥감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사냥의 기본이야.”
반야혼은 장기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처럼 표현하는 점도 그렇고, 아무도 믿지 않는 늑대 같은 말투도 그렇고, 반야혼은 모습만 달라졌을 뿐이지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앞머리는 나를 보고 배운 건가?”
“큭큭! 뭐, 그렇지. 다른 건 다 위장할 수 있겠는데, 눈만큼은 어떻게 못 하겠어서 말이야.”
오늘의 반야혼은 살벌한 눈동자를 죽립 대신 앞머리로 가리고 있었다.
문사건에 죽립을 쓰는 건 너무나도 이상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그 때문에 졸지에 이 탁자에는 앞머리로 눈을 가린 수상한 사내가 둘씩이나 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반야혼도 그 상황을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다가, 갑자기 뚝 하고 웃음을 그친다.
“관청에 알리지 않았더군.”
장기린은 반야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지막에 위협했잖아? 네 둥지 따윈 언제든지 엎어 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었는데……. 그래서 난 솔직히 그쪽이 그에 대한 대책으로 나를 관청에 밀고할 줄 알았거든.”
반야혼은 여전히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장기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이 땅에 떨어진 먹이를 앞에 두고, 이게 미끼인지 아닌지 경계하는 야생동물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공격을 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렇게 판단되자 장기린은 경직된 얼굴을 풀고서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이곳에 이렇게 손님으로 와 있지는 않았겠지.”
“……큭! 이젠 농담까지? 내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인 모양인데.”
“분명,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나 보더군. 사람을 만 명 넘게 죽이고, 호송대까지 몰살시켰으니, 황실에서 추적자를 보내는 것도 이해가 돼.”
장기린은 남들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했다.
반야혼이 놀란 듯 잠시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으르렁 거리듯이 아랫니를 드러냈다.
“꽤나 많이 알고 있군.”
“그쪽을 쫓는 추적자가 우리 객잔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아침에 떠났다. 몇 가지 호의를 베풀었더니 자세히 이야기해 주던데.”
“여기서 자고 갔다고……?”
“그래.”
반야혼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장기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관청에 밀고를 했다면, 너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있는 곳을 우선해서 공격했을 테지?”
“큭! 역시 잘 알고 있는데? 난 나를 귀찮게 한 놈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거든.”
“그게 무서워서라기보단……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차마 너를 버리지 못했다는 거다. 내가 먼저 나서서 너를 공격할 수는 없지. 넌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니까.”
그 말엔 반야혼도 침묵을 지켰다.
아마 마음 깊이 동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장기린의 마음속에선 다른 생각이 불쑥 들었다.
장기린의 입장에선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반야혼에게 동정이 가고, 일방적으로 배신할 수는 없는 그런 인연의 끈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반야혼의 입장에서 보는 장기린의 모습은 어떠할까?
서로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니, 반야혼 역시 장기린을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말로는 모든 것이 어리석은 장난이고, 반드시 마지막엔 후회할 거라는 듯이 말하지만, 내심은 어떨까? 그 누구보다 장기린이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반야혼이 아닐까?
두 사람은 극히 짧은 시간밖에 만나 보지 않았지만, 서로를 깊이 동감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이미 수많은 괴로움을 겪고, 그 최후에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을 꿈으로 가졌다.
겉으로 강하고 고고한 척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속은 약해 빠진 경우가 많은 것처럼, 누가 보든 평범하게 사는 거야말로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장기린은 반야혼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그저 추측이고, 물론 직접 물어봐야 당연히 아니라는 듯한 허세로 가득한 대답을 할 테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가게로 직접 다시 찾아온 것이 큰 증거다.
반야혼은 지금 장기린의 삶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큭…… 잘못 보였군. 한참 잘못 보였어.”
반야혼은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는 그런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버리긴 누가 버려? 누가 버리지 말아 달라고 했던가? 서로 닮은 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알 텐데. 그래도 위험을 감수하시겠다?”
장기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위험을 감수한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가 맞지.”
“…….”
“너는 네 인생이 있는 거다. 나는 내 인생이 있는 거고. 난 딱히 너에게 뭔가를 가르칠 생각도, 간섭할 생각도 없어. 그러니 추적자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뿐인 이야기야.”
반야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마치 바위가 되어 버린 듯이 굳어 있다.
장기린은 자신의 말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반야혼이 첫인상 때처럼 난폭하고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투를 뿐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서투르고,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서투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장기린의 삶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를 생소하게 느끼고 있다.
“큭! 그것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지 않겠어.”
“아아, 물론.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좋아. 나도 마음이 훨씬 편하군. 그쪽한테 빚을 지는 건 사양이야.”
반야혼은 팔짱을 풀고 자세를 조금 느긋하게 바꾸었다.
“그럼, 이제 마음도 편해졌으니, 앞으로 종종 찾아오도록 하지.”
“……너, 쫓기고 있는 것 아니었나?”
온갖 놈들이 그를 쫓는 중인데, 그럴 여유가 있나 싶었다.
“쫓겨? 내가? 큭! 쫓기는 건 약한 것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엄청난 자신감이군.”
“큭! 난 그만큼 특별하니까. 괜찮은 거다.”
추적자 따윈 상관없다는 듯 자신감 있게 씩 웃는 그 모습은 분명 황실을 긴장시킬 만한 인물다웠다.
“그래서, 여길 종종 찾아와서 뭘 어쩔 거지?”
“…….”
“한 가지 말해 두자면, 이미 황실에선 네가 항주로 향했다는 걸 다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밖으로 나섰다던 그 추적자의 실력 또한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지.”
“계속 한곳에서 얼쩡대면 귀찮아질 수도 있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그래.”
“내가? 아니면, 그쪽이?”
“글쎄, 그건 네가 하는 행동에 달렸지. 상관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는 했지만, 이쪽 ‘둥지’를 건드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반응해야 할 테니까.”
객잔 가족들을 건드리거나, 이쪽을 쓸데없는 소동에 휘말리게 한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야생동물과의 대화는 즐겁지만, 그 송곳니에 물려 다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으면 안 된다. 야생동물은 길들인 가축과는 다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언제 마음이 변해서 사람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이쪽에서 선을 긋는 말을 하자, 반야혼은 정말로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히려 이런 쪽이 더 익숙하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반응이 너무 없어서야 내가 찾아오는 보람이 없지.”
“…….”
“아! 하지만 오늘은 음식을 먹어 보려고 온 거다. 마침 음식이 나오는군.”
반야혼의 말대로 마침 아칠이 오향장육이 푸짐하게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두툼하게 썰린 돼지 뒷다리 살과 오향(五香)의 양념이 듬뿍 배어 있는 국물, 그 위로 따끈따끈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데, 돈은 있나?”
“큭! 이거 말인가?”
반야혼은 품 안에서 장포와 똑같은 자줏빛의 전낭을 꺼내 들었다. 슬쩍 열어젖힌 전낭 속엔 반짝거리는 은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못해도 스무 냥은 들어 있을 듯했다.
아마 그 돈의 출처는 장포의 주인과 동일할 것이다.
“그럼, 손님이군.”
“큭큭! 당연하지.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다.”
객잔에 와서 돈만 제대로 낸다면 장기린이 뭐라 할 말은 없다.
그사이, 아칠이 요리가 담긴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 주문하신 오향장육이 나왔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숙수님이 자신하는 요리이고, 그만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어? 객주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달변을 토해 내던 아칠이 느닷없이 손님의 탁자에 앉아 있는 장기린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얼마나 놀랐는지 뒤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혼자 고군분투 중인 아팔이 아칠을 세 번이나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흐음, 이게 그 돼지 요리인가?”
반야혼은 그런 아칠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통에 꽂혀 있던 저금을 뽑아 오향장육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진한 빛의 양념이 듬뿍 배인 뜨끈뜨끈한 고기.
반야혼은 마치 독이 든 음식을 보는 것처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 요리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고기 조각을 씹더니 ‘탁!’하고 저금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맛없어.”
“뭣?”
장기린은 깜짝 놀랐고, 아칠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운찬의 요리를 먹고 맛없다고 평가한 사람은 지금까지 처음이다.
반야혼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거만하게 팔짱을 끼었다.
“인간의 맛이 나.”
“……네놈도 인간이다.”
당연한 지적을 해 주자, 반야혼은 조금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큭! 인간인가…….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얼굴로,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했다.
“애초에 요리라는 건 전혀 필요 없는 행위지. 재료의 맛을 그대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식도락이다.”
반야혼은 아칠을 향해 말았다.
“가서 숙수한테 전해.”
“예?”
“이건 쓰레기라고. 요리가 아니라고 전해.”
살짝 이를 드러내며 말하는 반야혼의 목소리는 만월의 밤공기처럼 섬뜩하다.
보통 같았으면 발끈 화를 낼 아칠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덜덜 떨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
장기린이 눈치를 주자 기세를 내뿜는 건 그만뒀지만, 반야혼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료를 고르는 눈이 틀려먹었어. 재료가 살아 있지를 않아. 분명 이 돼지고기가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돼지는 적어도 죽은 지 사흘은 됐다. 고기가 죽었어.”
“아…….”
“아무튼, 난 이제 안 먹는다. 괜히 입맛만 버렸군.”
반야혼은 혀를 쯧쯧 차더니 전낭에서 은자를 하나 꺼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떠나려는 반야혼을 장기린이 붙잡았다.
“아칠.”
“……예?”
“오향장육이 한 접시에 얼마지?”
“사, 사십 문이에요.”
“가서 잔돈 가지고 와.”
반야혼이 내놓은 은자를 아칠에게 건네자, 아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허둥지둥 잔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은자 한 냥이 동전으로 이천 문.
즉, 잔돈은 천구백육십 문이다.
“이렇게 잔돈이 많으면 귀찮은데…….”
반야혼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잔돈 주머니를 쳐다봤다. 갖고 가기가 싫은 눈치다.
“가지고 가.”
“왜? 돈 많이 내고 가면 좋은 거 아닌가?”
“맛있다면 모를까, 맛도 없다는 놈한테 돈을 더 받아 봐야 기분만 나쁘다.”
반야혼은 피식 웃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잔돈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작별의 인사는 없었다. 자줏빛 장포를 입은 도령은 그대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객잔 밖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출귀몰.
이제 다시 객잔을 찾을 때까진 반야혼을 볼 수 없으리라.
장기린은 팔짱을 낀 채 반야혼이 사라져 간 방향을 묵묵히 응시했다.
어째서일까?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반야혼이 왠지 밉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곳에서 온갖 감정을 드러내며 대화를 나눌 때의 반야혼은…… 꽤나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저, 저기 객주님…….”
“음? 뭐지?”
“저 사람은…… 누구죠?”
아칠은 이제야 강렬했던 첫인상이 가신 듯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아칠과 아팔은 운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운찬의 요리 솜씨를 정면으로 부정당했으니, 분명 속으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모르는 사람이다.”
“……예?”
“모르는 사람이야. 아칠, 너도 모르는 사람이고. 알겠어?”
아칠은 눈치가 빠르다. 더 이상 장기린에게 캐묻지 않고 위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죽은 얼굴이 안타까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제서야 아칠은 조금 기분이 풀리더니 근처 손님들의 주문을 받은 뒤 주방 안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머, 뭐어어―!”
우당탕 하고 뭔가가 엎어지고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운찬이 구르듯이 뛰어나왔다.
굳이 말로 안 해도 왜 나왔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주방의 열기로 벌겋게 익은 팔뚝, 손에는 국수를 반죽하느라 하얀 전분이 붙어 있다.
운찬은 그 상태로 숨을 씩씩거리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야혼이 앉아 있던 탁자를 쏘아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탁자 위에 덩그렇게 놓인 오향장육을 쏘아봤다.
“어디 갔어?”
“이미 가셨어요.”
“크윽! 뭐라고 그랬다고? 쓰레기? 고기가 신선하지 않고, 죽었다고?”
신천지 소면을 먹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운찬도 그걸 느꼈는지 ‘끄응’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잠시 화를 죽이고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맛이 어떻기에…….”
운찬은 반야혼이 내려놓은 저금을 들고 오향장육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개를 위로 들고 입을 쩍 벌린 뒤, 마치 우물에 돌을 던지듯 고기를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그러더니 딱 굳어서 눈을 감고 입도 다문다.
꿀꺽.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삼킨 뒤, 운찬은 눈을 번쩍 떴다.
“맛있잖아!”
저금을 탁자 위에 내던지고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은, 차라리 자신의 요리가 맛이 없기를 바랐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만족을 못 했지? 왜 맛이 없다고 했지? 고기의 신선도? 이 정도면 괜찮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문제가 명확하면 해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면, 해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며 끝없이 의문에 빠져드는 운찬.
그는 요리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소명 의식(召命意識)이 있기 때문에 이번 일이 더욱 충격인 듯했다.
“수, 숙수님?”
옆에서 아칠이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새로 들어온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운찬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운찬.”
“……도대체 왜, 맛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운찬!”
낮고 강하게 부르자 운찬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아, 아! 객주님.”
“신경 쓸 것 없다. 방금 와서 악담을 하고 간 놈은 이 세상에 둘도 없이 특이한 놈이야. 보통 사람과는 다른 미각을 갖고 있는 놈이니, 굳이 네 기준을 맞출 필요는 없어.”
운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혼란에 빠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단호한 얼굴이었다.
“아뇨! 그럴 수록 더 맞춰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은 나이, 성별, 국경까지 초월한다고 했어요. 제 오향장육이 완벽했다면 그분도 맛있게 느꼈어야 해요.”
“……그놈은 다르다니까.”
“아뇨, 같아요!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신선도…… 신선도……. 고기의 신선도라…….”
운찬은 주변의 상황도 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타고난 숙수라는 건 이런 걸까?
언제 어디서건 요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요리 경연에서 우승할 만큼의 실력을 쌓을 수 있었으리라.
“운찬.”
“고기가…… 예?”
“아마 그 녀석은 사냥감을 직접 잡고, 그 고기를 날것으로 뜯어먹으면서 맛있다고 느끼는 놈일 거야. 즉, 네가 어떤 요리를 해도 맛있다고 느끼기는 힘들다는 뜻이지.”
운찬이 멍한 얼굴로 장기린을 쳐다본다.
쉽게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냥꾼들 중에 미신적인 의미로 늑대의 심장이라거나 매의 눈알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날것으로 먹는 경우는 있지만, ‘맛’을 느끼기 위해 먹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그, 그렇습니까? 과연, 그래서…….”
하지만 운찬은 납득했다.
오히려 그 말을 듣자 이해가 된다는 듯이.
“그 정도로 신선한 육질만을 먹어 왔다면, 오향장육의 육질이 죽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과연…… 안목이 넓어진 느낌이에요.”
운찬의 눈이 번쩍 빛을 냈다.
“객주님, 가끔 고기에서 ‘고기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고, 생선이나 해산물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해서 싫어하는 손님들이 있잖아요? 그게 왜 그런 줄 아시나요?”
“글쎄. 예민해서 그런 것 아닌가?”
“아뇨. 재료가 신선하지 못해서예요. 신선하지 못한 생선을 먹을 때 비린내가 나고, 신선하지 못한 고기를 먹을 때 고기 냄새가 진해지는 법이죠. 갓 잡은 물고기나 갓 도살한 소의 고기는 생으로 씹어도 역한 맛이 안 난다고 해요. 오히려 향긋하고 달게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장기린은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류의 냄새와 신선도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과연. 그런 거였어요. 저는 재료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예요. 크윽! 숙수 실격입니다. 저란 놈은 숙수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요.”
갑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괴로워하는 운찬.
장기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뒤쪽에서 서서히 손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더 이상 기다리게 했다가는 정말로 안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것 같았다. 이젠 수습을 해야 했다.
“운찬.”
“예?”
“일해.”
잠시 순진한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는 운찬. 하지만 이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반응을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앗! 그, 그게…….”
“이 문제는 나중에 함께 해결하자. 일단은 얼른 주방으로 돌아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운찬이 허둥지둥 주방으로 돌아가고, 불과 반 각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소면들이 줄줄이 손님들의 탁자로 배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칠과 아팔은 다시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한 시진 동안은 식사를 원하는 손님들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객잔은 무사히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장기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왠지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단 말이지.’
반야혼을 처음 만난 날, 왠지 그와의 인연이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다. 요리를 지적받은 운찬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느라 딴생각을 못 하고 있지만, 조만간 그 문제를 다시 고민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항상 그래 왔듯이, 이런 문제는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바람 잘날이 없구먼.”
어쩌면 풍운(風雲)객잔이라는 이름을 잘못 지었다고, 그 때문에 이렇게나 객잔에 풍운이 그칠 날이 없다고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 ☆ ☆
그날 저녁의 장사가 끝나고 슬슬 탁자에 앉은 손님이 사라져 갈 때쯤, 아니나 다를까 운찬은 이상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장기린이 그 사태를 발견한 것은, 아칠과 아팔이 데워 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왔을 때였다.
그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야시장에서 푸릇푸릇한 야채들이 한가득 들어 있는 망태기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운찬을 목격한 것이다.
“이 시간에 식 재료를……?”
장기린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방의 식 재료를 관리하는 책임도 맡고 있는 운찬은 자신만의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야채는 닷새에 한 번, 육류는 사흘에 한 번씩 장터에 가서 재료를 사는 것인데, 그것도 항상 새벽 시장에 나가서 대량으로 구매해 창고에 쌓아 두고 썼던 것이다.
오늘은 육류든 야채든 식 재료를 사 오는 날이 아니다.
게다가 무려 자정이 되어 가는 이런 시각에, 혼자서 망태기에 채소를 한가득 담아 사 오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장기린은 호기심을 느끼며 주방으로 향했다.
운찬의 행동이 그 ‘재료 문제’와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게 이 시각에 채소를 사 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상상이 안 되었던 것이다.
통. 통. 통. 통.
주방에선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그밖에도 물이 끓는 듯 보글거리는 소리, 기름에 뭔가를 튀기는 듯한 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알싸하면서 향긋한 채소 향이 넘실넘실 코끝으로 흘러 들어왔다.
“허어?”
주방의 문을 소리 나게 열었음에도, 운찬은 장기린이 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썰고 데치고, 지지고 볶으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로 사용되는 것은 무와 배추. 그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야채들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에 운찬의 입에선 신랄한 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시금치!!”
철퍽!
방금 뜨거운 물에서 빠져나온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금치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자세히 보면 녹색의 이파리들이 주방 바닥 여기저기에 젖은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다.
운찬은 화가 났는지 숨을 씩씩거린다. 옆에서 보기엔 연유를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시금치가 미칠 수 있는지, 말을 걸어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뭘하고 있는 거야?’
장기린은 운찬이 뭘 생각하는지 심히 궁금했으나, 일단 섣불리 말을 걸지 않고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운찬은 미친 시금치에 집착하지 않고, 곧장 다음 재료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꺼낸 것은 새하얗고 매끈한 몸통에 개나리색 머리를 가진 채소.
그는 미리 준비해 둔 토기에서 그것을 한 움큼 집어 꺼내더니, 그중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퉤!”
그리고는 그것을 가래침처럼 내뱉은 뒤 ‘크윽!’하고 분노의 신음을 토했다.
“이런 지조 없는 숙주나물 같으니!!”
운찬은 들고 있던 숙주나물을 다시 토기 안에 휙 집어던진 뒤, 분노로 발을 동동 굴렀다.
몸통이 하얗고 개나리색 머리를 가진 채소.
콩나물과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끝에 콩이 달리지 않은 채소.
운찬은 숙주나물을 향해 “왜 변하니?”, “도대체 왜 변하는 거야!”라고 절규했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겉보기엔 숙주나물이 지조를 지키지 않고 운찬 몰래 바람을 핀 것 같았다.
“이번엔…….”
운찬은 결국 미친 시금치에, 지조 없는 숙주나물마저 포기한 뒤, 마지막 채소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번엔 지글거리는 기름 속이다.
그는 구멍이 숭숭 뚫린 뜰채를 이용해 기름 속에서 주먹만 한 뭔가를 꺼내 들고 있었다.
이번엔 채소가 아니라 뿌리였다. 황갈색의, 노릇노릇하게 아주 잘 익어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물건이었다.
운찬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것을 조심스레 도마 위에 올려놓은 뒤,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칼로 얇게 포를 뜨듯이 썰었다. 황갈색 표면의 안쪽은 짙은 노란색인 것을 보니, 겉과 속의 익은 정도가 다른 모양이었다.
“후― 후―.”
운찬은 뜨겁지 않게 후후 불면서 얇게 썰어 둔 그것을 큼직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우물우물.
오래지 않아 입에 든 것을 꿀꺽 삼켰으나, 맛은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 미치는 모양이었는지 운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런, 막돼먹은 고구마!”
툭.
손에 들린 고구마의 남은 부분이 도마 위로 떨어진다.
운찬은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흙냄새가 왜 나는 거야! 씹을 때의 촉감은 왜 이리 또 퍽퍽하고. 막돼먹었어! 막돼먹었다고!”
꼬리를 밟힌 뱀처럼 몸을 뒤트는 운찬.
장기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친 시금치. 지조 없는 숙주나물, 게다가 이제는 막돼먹은 고구마란다.
야채계의 패륜 삼인방이다.
뭘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이, 운찬.”
이름을 불리자 괴로워하던 운찬의 움직임이 딱 멈춰 섰다.
“개, 객주님?”
“도대체 뭐하는 거야?”
“아, 그게…….”
운찬은 우울한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야채가…… 신선하지 않아요.”
“……뭐?”
“요리가 끝나도 야채가 신선해질 수 있도록 만들고 싶은데……. 그게 좀처럼 되지가 않아요. 일부러 갓 채취한 채소를 사 오려고, 이 시간에 농지가 있는 곳까지 직접 다녀온 건데…….”
장기린은 그제야 운찬이 왜 이 시간에 나가서 야채를 사 온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농부들이 야채를 캐는 것은 보통 오후 시간대.
그리고 그 야채는 다음날 새벽에 장터로 운반되어 팔린다.
운찬은 새벽까지 기다리는 것조차 아까워서 갓 수확한 야채를 구하러 이 시간에 농지까지 직접 다녀온 것이다.
‘그 말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군.’
재료의 신선도를 지적받은 것이 숙수로서는 꽤나 큰일이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로 신경을 쓸 거라곤 장기린도 생각지 못했었다.
‘아니, 운찬이 섬세한 건가?’
너무 섬세한 나머지, 이번 일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진 계속해서 이런 일을 반복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풍운객잔의 주인으로서, 운찬이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면 도울 수 있는 데까진 도와야 했다.
“어차피 조리 과정을 거치면 재료는 신선함을 잃지 않나?”
“그거야 그렇죠…….”
“그럼 지금 하는 건 뭘 바라고 하는 거야? 어차피 날것으로 먹지 않는 이상 신선도는 떨어질 텐데.”
운찬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미친 시금치와 지조 없는 숙주나물, 막돼먹은 고구마를 차례차례 가리키며 말했다.
“삶는 법, 소금과 간장에 절이는 법, 기름에 튀기는 법. 셋 다 요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법들이에요. 육류는 새벽에 나오기 때문에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채소들로 시험해 보니, 이런 방법으론 절대 신선도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야 그렇겠지.”
“제가 알기로 최고의 숙수는 조리를 끝낸 뒤에도 식 재료의 싱싱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예를 들면 황실의 주방을 맡고 계신 대륙 최고의 숙수이신 용화성 대령숙수님은 도미를 기름에 튀긴 뒤에도 도미가 살아서 펄떡댄다고 하더라고요.”
장기린의 어깨가 티 나지 않게 움찔 움직였다.
용화성 대령숙수는 장기린의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공손 대장군과 절친한 친우 사이였고, 적룡기마대의 동생들과도 안면을 터놓고 지냈다.
그러니 과거를 숨기고 있는 장기린으로서는 이름만 들어도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즉, 대령숙수와 같은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싶다는 건가?”
당황을 감추고 질문은 던지자, 운찬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으윽! 그렇게 말하면 엄청 건방져 보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닮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실마리라도 찾았으면 좋겠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아니, 그것도 아닌가? 아, 아무튼 앞으로 노력해야 할 방향을 알았으면 좋겠달까……요?”
“그러니까, 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거지?”
“아, 네! 그거예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운찬은 꼭 주인에게 칭찬받은 강아지 같았다.
“대령숙수님 정도의 솜씨가 있다면…… 오늘의 그 특이한 손님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으셨겠죠? 그 생각을 하니 아쉬워서요.”
“……뭐든지 한 번에 정상까지 갈 수는 없는 법이지. 네가 재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는 거다.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익혀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야.”
“네, 그렇겠죠.”
운찬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본래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하나의 단계를 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그 벽을 뛰어넘어 버리기에 재능(才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초급의 기술은 어깨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배워 내고, 중급 이상의 기술은 솥을 잡고 직접 시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따라 해 낸다.
하지만 고급 이상의 기술.
쉽게 말해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솜씨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식칼과 솥을 잡아 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오랜 시간의 연륜이 있어야만 넘을 수 있는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운찬은 지금 그 경지로부터 한 발짝 앞에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벽의 존재에 암담해하고 있었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
하지만 분명히 위에 더 높은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데도 더 이상 올라갈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수련을 해도 실력은 더 이상 늘지 않고, 어떤 수련을 해야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을지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때의 암담함.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은 막막함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으리라.
“운찬.”
장기린은 격려해 주기 위해 그런 운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던 일에 충실하는 게 좋아.”
“지금 하던 일……이요?”
“그래.”
운찬은 장기린의 말뜻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인지 조금 불만스런 얼굴이 되어 있었다.
“주방 일에 충실하라는 뜻인가요?”
“아니, 그것 말고.”
“네?”
“지금까지 연습해 오던 것에서 뭔가를 깨우치면, 그걸로 새로운 문제도 해결이 될 거라는 뜻이야.”
운찬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화, 활검 말씀이신가요?”
“그래.”
운찬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몇 번이고 변했다.
왜 이런 간단한 것을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나 하는 자괴감에서부터, 암담한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한 기쁨까지.
운찬은 존경과 경외를 담아 장기린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활검을 익히면 재료의 맛이 살아나죠. 죽은 지 오래된 식 재료도 방금 사 온 것처럼 싱싱해질 거예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왜 저는 지금껏 그걸 생각지 못했던 걸까요?”
“이제 해결이 된 건가?”
“네! 물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방법을 알았으니 됐어요. 이대로 노력하면……!”
운찬은 결연한 눈으로 하늘, 아니 하늘이 있을 주방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야혼 같은 특이한 인물마저 만족을 시킬 것이다.
언젠가는 용화성 대령숙수처럼 흠잡을 것 하나 없이 완벽한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는 게 얼굴에 뻔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됐다.”
장기린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방을 나서기 직전,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방을 치우는 것은 잊지 말고.”
“예……?”
“아칠과 아팔은 잠들었어. 설마 애들 잠을 깨워서 일을 시키려는 것은 아닐 테지?”
운찬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아차!’하는 표정으로 주방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은 미친 시금치.
여러 가지 식기에 종류대로 담겨 있는 것은 지조 없는 숙주나물.
그리고 주방 이곳저곳에 기름을 묻혀 놓고 뻔뻔하게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건 막돼먹은 고구마다.
전체적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주방의 참상을 보며 운찬은 혀를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결국 야채계의 패륜 삼인방에게 한 방을 먹은 것이다.
“다 치우고 잘 거지?”
“……예에.”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운찬.
장기린은 웃는 얼굴로 주방을 빠져나왔다.
배움에는 항상 대가가 있다.
재능 있는 자들은 깨우치기 힘든 그것을, 운찬은 오늘 확실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