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35화 (110/686)

第三十四章 ― 신뢰불신뢰(信賴不信賴)

고민하는 운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언해 준 장기린은 주방을 나서자마자 의외의 문제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풍운객잔은 다른 객잔들과 달리 술을 팔지 않기 때문에 일찍 문을 닫는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쿵! 쿵! 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니 뭔가 다급함이 느껴졌다.

장기린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취객인가?’

이 시간에 대문을 두드릴 사람은 그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풍운객잔이야 주루(酒樓)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지만, 금선로의 다른 객잔들은 당연히 그 역할을 겸하고 있다.

얼마 없는 돈으로 호화로운 객잔에서 술을 진탕마신 뒤, 한잔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만만한 풍운객잔의 대문을 두드리는 일도 흔하진 않지만 종종 있는 일인 것이다.

끼이익―

“어……?”

취객이라면 앞머리를 젖히고 눈빛을 보여서라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던 장기린은, 야밤의 방문객을 보는 순간 놀라서 탄성을 흘렸다. 이지적인 눈매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장기린은 겁을 줘서 쫓아내기는커녕 친절히 몸을 비켜 입구를 열어 주고 말았다.

방문객 또한 그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까딱해 인사하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도중에 몸이 스치는 순간, 은은한 모란꽃 향기가 났다.

지금 이 시각에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방문객.

사내처럼 바지와 장포를 입고 머리까지 짧게 자른 그녀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장 가가,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남궁휴의 동생이자, 남궁세가의 뇌안각(雷眼閣) 항주지부를 맡고 있는 능력 있는 여인.

남궁연이 찾아온 것이다.

톡. 톡. 토톡.

남궁연은 곧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남장을 해도 숨길 수 없는 미모 위로 서릿발처럼 냉랭한 기세가 한층 덮여 있다. 귀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카락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무심코 손가락을 쳐다보자 검지와 중지에 붙어 있는 굳은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붓질을 많이 했다는 뜻이겠지.’

장기린은 두꺼운 굳은살을 통해 그동안 남궁연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검지와 중지 안쪽에 생기는 굳은살은 보통 학문에 매진하는 문사(文士)나 학사(學士) 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흔적이다.

하루에 수백, 수천 글자의 문자를 쓰면서 하루 종일 붓을 잡고 살아야만 만들어지는 영광의 상처인 것이다.

그런 것을 갖고 있으니, 남궁세가의 정보 집단을 맡고 있는 여인으로서 남궁연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서찰을 받고, 또 서찰을 써서 보냈는지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그녀의 손은 그녀의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장 가가.”

고개를 들자 남궁연의 지적인 눈매가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왜 제 말을 듣지 않으셨죠?”

“무슨 말이야?”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허름한 몰골의 수상한 남자가 혼자서 찾아오면 절대로 상대하지 말라고요. 그자는 위험한 인물이에요. 가가도 그때 충분히 알아들으셨을 텐데요?”

장기린은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반야혼에 관한 이야기다.

남궁연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장기린과 객잔 식구들을 걱정해서 미리 그에 관해 경고했었고, 위험천만한 인물과 관련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장기린은 그 조언을 내팽개치고 반야혼과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가가, 이번 일은 황실에서 동창을 소집할 정도로 큰일이라고요. 그뿐이 아니라 주변의 무림 문파나 관리들에게 계엄령(戒嚴令)이 떨어졌어요. 함부로 엮였다간 그저 곤란한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줄줄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대사건이라고요.”

“…….”

“가가는 모르겠지만 최근 이틀간 벌써 스무 명이나 죽었어요. 그중 열여덟 명은 각종 단체에서 보낸 추포인(追捕人). 나머지 두 명은 그자가 옷이나 전낭을 노리고 죽인 평범한 사람들이죠. 그자는 절제라는 걸 몰라요. 자신을 귀찮게 하거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죽여서 빼앗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 마치 짐승 같은 인간이죠.”

장기린의 머릿속에 반야혼의 옷차림이 떠올랐다.

첫 번째 만났을 때는 치수가 맞지 않는 듯한 황토색 옷에 죽립.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질 좋은 자줏빛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남궁연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이 그 옷 때문에 죽었다. 단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반야혼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정말, 터무니없는 녀석이군…….”

장기린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자신도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붙잡기 위해 쫓아오는 추포인들은 그렇다 쳐도,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일이다.

기본적인 인성(人性)에 큰 문제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혹시 그 추포인들 중에 남궁세가의 사람도 있는 건가?”

“…….”

기밀 사항인 건지 남궁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것 자체가 남궁세가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는 자백이나 다름없을 터.

“그런가.”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연은 싸늘하게 낯빛을 굳히더니, 정보 집단의 장(長)다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만, 만적(萬敵)은 지금껏 우리의 추적을 우습게 여기며 활개를 치고 다녔어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거예요. 추포에 나선 모두가 협력하기로 한 이상, 그자도 손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하겠죠.”

“……그래?”

“네. 그러니 장 가가도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그자와는 어떤 대화를 나눈 거죠?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눴기에 그 짐승이 이곳에 두 번씩이나 찾아온 거죠?”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떻게 반야혼이 객잔에 찾아왔던 것을 알고 있냐고는 묻지 않았다.

남궁연은 이미 반야혼이 누구의 옷을 빼앗아 입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껏 들어온 뇌안각의 능력이라면, 그 옷차림을 한 자의 행적을 쫓아 풍운객잔까지 도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대화라…….’

장기린은 고민해야만 했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남궁연에게 거짓말로 핑계를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반야혼과의 오묘한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로를 동류라고 인식하는 관계?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관찰하는 듯한 관계?

말은 쉽지만, 그렇게 설명하는 순간, 장기린이 만적 반야혼에 못지않은 피투성이 인생을 겪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하게 된다.

‘그래, 설명하자.’

장기린은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남궁연이라면 장기린이 평범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군인이라는 정체만 밝히지 않는다면,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 녀석 못지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네?”

“만적 반야혼. 너희 뇌안각이 쫓고 있는 그 녀석 말이야.”

남궁연의 지적인 눈매가 살포시 일그러졌다.

“나는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을 죽였어. 그건 아마 반야혼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정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인생은 온통 피투성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

남궁연은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믿지 않는 얼굴이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아 보였지만, 그녀는 일단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지 장기린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는 거다. 그 녀석도 나를 보면서 똑같이 느낀 듯하지만. 그 녀석과 나는 서로 상당히 많이 닮았다. 즉, 동류(同類)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지.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어.”

“…….”

“그래서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녀석을 버릴 수가 없고, 무작정 적대하기엔 위험한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 녀석이 갑자기 다시 한 번 찾아온 거다.”

남궁연은 아직까지 납득이 가지 않은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동류……? 아니, 그보다 갑자기 다시 찾아온 거라고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래.”

“……좋아요, 좋다구요. 설령 장 가가의 과거가 범상치 않았고, 그 때문에 그자와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고 쳐요. 하지만 어찌 됐건 간에 위험한 인물이에요. 장 가가도 그걸 알고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저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으신 거예요? 한 사람보단 열 사람이 낫다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요?”

장기린은 차분하게 남궁연을 응시했다.

“나는 그 녀석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이야기를 했다면?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반야혼을 붙잡을 자신이 있나?”

“그건……!”

“잡을 수 없을 테지?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알린 것 때문에 반야혼이 객잔 식구들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면? 그것도 막아 줄 수 있었을까?”

“……!!”

남궁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장기린이 그녀에게 반야혼이 찾아왔던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장기린이 직접 나서서 반야혼을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군가에게 알리는 순간, 반야혼은 장기린을 적으로 인식할 테고, 그는 곧장 장기린의 둥지를 부수려고 들 테니까.

그걸 막을 수 있는 것은 장기린 본인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두 번째로 왔다는 건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거겠죠? 그렇다면 저희에게 알려야 하잖아요? 우리 입장에선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는 거나 다름없어요. 아니, 그건 둘째 친다고 하더라도, 장 가가는 그자가 계속해서 객잔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건가요?”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장 가가!”

남궁연은 화를 냈다. 이지적인 얼굴을 무너뜨릴 정도로 격렬하게.

“그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난폭한 호랑이가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가만히 두고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래. 아마 그게 정론이겠지.”

“그렇다면……!”

“하지만, 난 그 녀석을 버릴 수 없어. 만약 또 온다면 그대로 음식을 팔고 대화를 나눌 거다.”

남궁연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장기린은 문득 ‘호랑이가 토끼들 사이에서 뒹굴며 노는 격’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남궁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랑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호랑이뿐.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장기린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중간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반야혼을 돕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방해를 하고 적대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궁연의 편을 들 수는 없다.

“장 가가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네요.”

“…….”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둘게요. 장 가가는 그자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자와는 다르다구요. 그것만은 확실히 알아 두세요.”

장기린은 남궁연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지만, 그녀의 이지적인 눈빛은 단호함을 품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장 가가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죠? 아뇨, 잘못 말했네요. 스스로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은 아니었죠?”

“…….”

“하지만 만적은 달라요. 스스로 죽이고 싶어서 죽입니다. 스스로 살인자가 되길 원해서 행동하고 있어요.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는 것처럼 손쉽게 사람을 죽이죠. 그건 매우 큰 차이예요. 그 차이 때문에, 만적은 이제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와줄 필요도 없다고.

남궁연은 냉정하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안각 항주지부의 장(長)다운 단호한 태도였다.

“장 가가의 생각이 그렇다면, 더 이상 말씀드리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그자와 동질감을 느낄수록, 진정으로 장 가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저는, 언제든 풍운객잔을 돕는 일을 우선시할 거예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남궁연.

뚜벅. 뚜벅.

멀어지는 가죽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장기린은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남궁연이 한 말.

장기린이 진정으로 반야혼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을 뿐.

너무나도 서툴러서 사람과의 관계를 다지지 못하던 반야혼. 자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애써 인간관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던 반야혼.

하지만 객잔에서의 대화중에 즐거운 기색을 내보이던 반야혼.

아무리 변할 수 있다 해도 이미 늦은 것일까?

과거에 저지른 죄가 너무나 많기에, 반야혼은 이미 사람답게 살 자격이 없는 것일까?

“자살(自殺).”

스스로를 죽인다.

그 말은 자기 자신과 똑같은 것을 죽이는 것에도 통용되는 말일 터.

장기린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이 찾아와 다시 해가 뜨는 그 순간까지도, 장기린은 고민했다.

☆ ☆ ☆

다음날, 개점을 준비하기 위해 대문을 열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였다.

건너편 객잔의 앞마당을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하인이 쓸고 있다. 옆 객잔의 지붕 위를 건장한 사내 둘이 수리하고 있었고, 대문에서 불과 다섯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떤 떠돌이 당과 장수 하나가 좌판을 벌려 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광경.

그리고 그들은 하는 일에 비해 지나치게 몸이 건장했다.

‘남궁연의 사람들인가?’

감시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알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객잔을 감시하겠다는 속셈일 것이 분명했다.

잠시 대문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어느새 세안까지 마치고 깔끔한 인상이 된 아칠과 아팔이 대문 앞을 쓸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객주님?”

“여기에 계시다니, 어쩐 일이세요?”

장기린은 감시인들로부터 시선을 떼어 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아, 어제 잠을 설쳐서.”

“엇? 그럼 아예 잠을 못 주무신 거예요?”

“뭐, 그런 셈이야.”

아칠과 아팔은 동시에 똑같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래선 안 되죠―!”

“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어요.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쉬세요.”

“네! 맞아요. 어차피 객주님은 아침에 할 일이 없으시잖아요.”

“맞아, 맞아.”

두 사람은 순식간에 단합하여 장기린을 휴식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묘하게 서글픈 말이었다.

“너희, 나도 하는 일은 있다고? 그 많은 식 재료를 누가 다 다듬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운찬이 혼자 다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앗! 그, 그랬나요?”

아칠과 아팔은 티 나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시선을 옮겼다.

“……몰랐던 거냐.”

“무, 무, 물론 알았죠!”

“그럼요, 그럼요. 객주님께선 당연히 강 숙수님을 도와주실 거라고 알고 있었어요!”

“객주님이 얼마나 공평한 분이신데요!”

“우리가 일하는 걸 보고만 있으실 리가 없죠!”

목소리는 떨리고 눈빛은 방황한다. 여전히 거짓말이 서투른 녀석들이었다.

장기린은 말없이 손을 뻗어 아칠과 아팔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부비부비.

가지런히 빗어둔 머리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머리처럼 사방으로 뻗친다.

아칠과 아팔은 울상이 되었지만, 이내 피식 웃고 있는 장기린과 얼굴이 마주치곤 배시시 웃으며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장기린은 그런 두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자, 그럼 일 시작하자.”

“네!”

“네!”

힘찬 대답과 함께 대문 앞을 쓱싹거리며 쓸기 시작하는 두 사람.

고개를 들자 이쪽을 슬쩍 주시하고 있던 감시인들이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뭐, 나쁠 건 없겠지.”

장기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밤을 새웠더니 차가운 물 한 잔이 입에서 당기고 있었다.

☆ ☆ ☆

“으음.”

그 뒤로, 사흘이 지났다.

장기린은 고풍스런 족자에 붙어 있는 정갈한 난(蘭) 그림을 한 번 쳐다본 뒤, 그 족자의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손님들의 주문과 매상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휘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휘연이 없었다면 객잔을 운영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사와 경영이라는 것은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범선에서 누군가가 돛을 다뤄야만 배가 똑바로 움직이듯이, 휘연이 객잔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중재해 주지 않았다면, 객잔은 지금 이렇게 손님들을 끌어모으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이번 달엔 분명히 이득을 볼 수 있겠지?’

손님들로 가득 찬 탁자들을 보면 분명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동전 열 문이라는 저렴한 가격.

가격에 비해 파격적이라는 평까지 듣는 신천지 소면.

그리고 그 요리를 하는 것은 얼마 전에 항주 요리 경연에서 우승을 차지한 파격의 신예 숙수 강운찬이다.

풍운객잔의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 점점 퍼지는가 싶더니, 이젠 식사 시간엔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대성황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휘연은 객잔이 순이익을 얻으려면 삼십 일간 삼천오백 그릇 이상의 소면을 팔아야만 한다고 말했었다.

삼십 일간 삼천오백 그릇.

즉, 열흘에 천백칠십 그릇이고, 하루로 따지면 백이십 그릇 정도가 된다.

‘뭐야, 계산해 보니 여유잖아.’

장기린은 놀라 버렸다.

객잔에 있는 탁자는 열 개.

탁자 하나에 앉을 수 있는 사람 수는 네 명.

즉, 지금처럼 손님들이 많을 때는 단번에 소면 사십 그릇을 팔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손님이 많은 것은 정오 근처와 저녁 시간 근처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간간이 오는 손님까지 합하면, 대략 하루에 사백 명 정도는 손님이 오고 있었다.

하루 백이십 그릇을 어떻게 채우냐고 생각하며 놀랐던 게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 두 배 이상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객잔이 번창한 것이다.

‘하루에 백이십 그릇. 아니, 그 뒤로 휴가 들어와서 휴의 월봉도 계산해야 하니까, 대충 백오십 그릇으로 하자. 그럼 백오십 그릇 이상 팔리는 소면은 무조건 순이익이라는 뜻인데……. 하루에 사백 그릇이 팔리면, 그중에 순이익이 되는 것은 나머지 이백오십 그릇. 한 그릇에 동전 열 문이니까 총 금액은 이천오백 문. 즉…… 하루에 은자 한 냥 이상을 순이익으로 버는 건가?’

은자 한 냥은 동전으로 이천 문이다.

물론 소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비는 포함하지 않았으니 그보다는 좀 적어지겠지만, 그래도 하루에 은자 한 냥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장기린은 놀라 버렸다.

아칠과 아팔, 두 사람에게 주는 월봉이 은자 두 냥이다.

즉, 이틀만 장사를 하면 아칠과 아팔 두 사람의 월봉만큼의 돈을 순이익으로 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사해서 열흘이면 은자로 열 냥. 삼십 일이면 은자로 서른 냥인가?’

문득, 휘연과의 약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월봉을 안 받는 대신, 순수익의 일 할을 달라고 했었던 그녀.

즉, 지금 장기린이 삼십 일에 은자 서른 냥을 벌고 있으니, 그녀에게 줄 금액은 은자 세 냥이 된 것이다.

물론, 나머지 스물일곱 냥은 장기린의 돈이 된다.

‘생각보다 훨씬 큰돈을 버는군. 나중에 이 이상으로 장사가 잘되게 된다면, 휘연이 받을 금액도 점점 올라가겠지?’

그렇다고 해서 아깝지는 않다.

객잔이 이만큼이나 번창한 것은 휘연의 공이 구 할 이상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오히려 더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장기린에게 빚을 진 거나 다름없는 은자 삼백스물다섯 냥부터 갚겠다고 했으니, 아마 휘연은 한동안 그 돈마저 받지 않을 것이다.

즉, 은자 서른 냥은 몽땅 장기린의 수익이 된다.

“장사라는 거, 생각보다 대단한 거였군.”

무심코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주판을 튕기던 휘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객주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니야. 그보다 휘연, 이젠 슬슬 순이익이 나겠지?”

휘연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예요.”

“만약 거기서 순이익이 난다면, 그 돈으로 뭘하면 좋을까?”

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객주님이 평소에 하고 싶으셨던 거나, 사고 싶으셨던 걸 사면 되지 않을까요?”

“사고 싶은 거?”

“네. 뭔가 갖고 싶으셨던 것 없으세요?”

아마 그게 일반적인 경우일 테지만, 장기린의 입장에선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장기린은 평생 동안 뭔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하게 바란 게 있다면, 평범한 삶 정도일까.

그나마도 지금 서서히 얻어 가는 중이다.

“으음, 바라는 게 없는데.”

“그런가요?”

휘연은 ‘과연’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그녀의 입장에선 납득이 되는 대답이었던 듯했다.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예전에 진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대형! 제가 어릴 적에 대륙 제일 거상이신 석 대인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돈을 창고에 쌓아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답니다. 돈은 밖으로 내돌아야만 돈의 가치가 생기는 거라나요? 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무튼 장사로 얻은 돈은 장사로 써야지, 그냥 품에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 같았어요. 헤헤. 장사로 얻은 돈은 곧장 장사에 다시 투자해서 사업을 키운다! 그게 제 지론이 된 거죠!”

“장사에 다시 그 돈을 쓸 수는 없을까?”

“아……!”

휘연은 장기린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놀란 표정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린 모습이 꼭 새끼 고양이처럼 보였다.

“사실, 제가 객주님께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지금의 이득을 장사에 투자하면, 다음번엔 더 큰 이득을 볼 것 같았거든요. 장사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과거에 장사를 하고 싶어 하던 동생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아…… 그랬군요. 아무튼 제 생각은 이래요. 식사 시간엔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많잖아요? 원래 기다리는 손님이 많으면 포기하고 돌아가는 손님들도 그만큼 많을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데 가서 먹는 손님도 있을 거구요.”

“분명, 그럴 수도 있겠군.”

“네. 그러니 그 손님들도 모두 끌어모으려면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해요.”

장기린은 시끌벅적한 객잔 안을 쭉 살펴보았다.

탁자 열 개가 놓인 공간.

휘연의 말은 맞지만 그 이상 공간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객잔을 아예 허물고 다시 지으면 모를까.’

하지만 얼마 전에 개축 공사를 한 입장에서 또다시 증축을 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더는 넓힐 공간이 없어 보이는데?”

휘연은 그게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척하니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풍운객잔의 대문 너머. 통칭 앞마당이라 불리는 곳이다.

“객잔을 증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탁자를 사서 밖에 더 가져다 놓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손님의 숫자가 늘어날 거예요. 그러면 우리 객잔의 수익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이야기죠.”

휘연은 ‘어때요?’라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응시했다.

장기린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다.

휘연이 항상 이런 식으로 장사를 발전시킬 생각들을 해내니 객잔이 점점 성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좋은 생각 같다.”

“네. 그럼 보름이 지날 때쯤 수익을 결산해서 진행해 볼게요.”

“보름? 보름으로 충분한 건가?”

“으응……. 점점 손님이 느는 추세니까요. 그쯤이면 충분할 거예요.”

장기린은 방긋 웃는 휘연을 보자, 어쩌면 자신의 계산보다 더 많은 수익이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너한테 맡기겠어.”

“맡겨 주세요.”

휘연은 자신감 있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역시 휘연은 풍운객잔의 보물이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는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각이다.

금선로에 물건을 대는 상인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이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객잔의 사정상, 근처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오시는 되어야 슬슬 잠에서 깨어나 식사를 찾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선 풍운객잔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집이나 일하는 객잔에서 얻어먹자니 겨우 맛없는 주먹밥 하나가 전부.

하지만 풍운객잔에 가면 동전 열 문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매우 맛있는 소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줄을 서서라도 풍운객잔을 찾아올 수밖에 없다.

대문 앞에서 시작된 줄이 삼 장이나 늘어져 있는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감시인도 그대로고.’

장기린은 소란스러운 가운데 너무나도 차분하게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몇 명을 확인했다.

건너편 객잔 앞을 청소하는 하인. 옆에서 당과를 팔고 있는 장사치. 근처 지붕을 고치는 것처럼 땜질을 하고 있는 공인(工人) 둘.

모두 며칠 전부터 뿌리라도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풍운객잔을 감시하는 장본인들이었다.

그 배후가 남궁연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터.

장기린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당과를 파는 장사치의 근처로 다가가 옆에 털썩 앉았다.

“많이 팔리시오?”

“……팔리기는커녕 당과를 사줄 만한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려.”

당과를 자르는데 쓰는 뭉툭한 칼을 휙휙 돌려 가며 장사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당과를 사줄 만한 사람.

그게 아마 반야혼을 뜻하는 은어일 것이다.

“혹시 형씨는 그 사람이 언제 올지 아시오?”

장사치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붙임성 좋게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나도 모르겠소.”

“나도 모르고, 형씨도 모르면 누가 알 수 있겠소?”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어떤 도사가 자기는 벼락을 맞으면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던데.”

“…….”

당과를 파는 장사치는 그 말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는 다시는 열지 않았다.

슬쩍 이쪽의 정보를 캐내려고 한 모양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장기린이 아니다.

남궁세가를 연상시킬 수 있는 번개를 이용해 한마디 찌르자 장사치는 결국 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로,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경계하는 자세였다.

“그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소?”

장기린은 입 모양이 눈에 띄지 않게 주변을 의식하며 물었다.

풍운객잔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있는 곳으로 쏠려 있다가 황급히 흩어졌다.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소?”

남궁연이 꽤나 자신하기에 혹시나 했건만, 역시 반야혼은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니었다.

“예. 그리고 지부장님께서, 만약 객주님께서 말을 걸어오실 경우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장사치로 변장한 뇌안각의 요원이 슬쩍 당과를 하나 뚝뚝 끊어 가며 대답했다.

“짐승은 아직 항주에 있다고. 그러니 그동안은 좀 불편해도 참아야만 할 거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

“전언이 있으십니까?”

아마 남궁연에게 할 말이 있다면 전해 줄 모양이었지만, 장기린으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없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위험할 것 같소만.”

당과를 파는 곳은 풍운객잔에 가장 가까운 위치.

만약 누군가가 객잔에 침투할 계획을 세운다면 가장 먼저 노릴 사람은 이 장사치가 될 것이다.

당과를 파는 장사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어딘들 안전하겠습니까?”

“하긴.”

장기린은 그 말에 웃고 말았다.

생각보다 담이 큰 자였다. 인상도 호감이 가게 생겼고, 붙임성 좋게 대화를 받아 줄줄도 아니, 이 사람 정도면 객잔 앞에 죽치고 있게 놔둬도 괜찮을 듯했다.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지금 여기에 있는 네 명은 전부 당신과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이오?”

건너편에서 청소를 하는 한 사람.

당과를 파는 한 사람.

지붕 위에 있는 두 사람.

그렇게 도합 네 사람이다.

장사치는 잠시 눈을 끔뻑거리더니, 작게 잘라 놓은 당과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으면서 대답했다.

“건너편 사람은 함께 벼락 맞을 사람이고, 지붕 위의 두 사람은 잘만 기도하면 비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사람이지요.”

“흐음.”

장기린은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끝까지 암호를 사용한다.

어지간히 조심스럽고 철저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 그냥 말장난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벼락 맞을 사람은 남궁세가의 뇌안각이라는 뜻이고, 비바람도 부를 수 있다는 건…… 황궁인가?’

비바람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용(龍).

그리고 용이 상징하는 것은 황제. 황실이다.

장기린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연은 황실과 근처의 유력한 단체들이 모두 반야혼을 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뇌안각은 분명 황실과도 연계를 맺고 있으리라.

“그걸 바로 알아듣는 것을 보니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는 장사치.

이런 말에 답할 말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평범한 객잔 주인일 뿐이오.”

“하하, 그렇습니까?”

장사치는 유쾌하게 웃더니 대나무 잎사귀로 만든 넓적한 접시에 당과를 듬뿍 담기 시작했다.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기린으로서는 혼자선 도저히 다 못 먹을 양이 담긴다.

그리고는 말없이 넘겨주기에 무심코 받았더니, 장사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척하니 내밀었다.

“동전 열 문입니다.”

“……허?”

“저도 신천지 소면이라는 걸 한번 먹어 보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넉살 좋게 씩 웃는 얼굴이 밉지 않았다.

장기린은 웃으며 전낭을 꺼내 동전 서른 문을 넘겨주었다.

“우리 객잔 침모가, 하나만 주면 정 없는 거라고 하더군.”

“하하, 감사합니다.”

당과 장수는 사양의 말도 하지 않은 채 넙죽 동전 서른 개를 받아 챙기며 허리를 굽혔다.

아무리 큰 세가의 정보원이라도 원래 아랫사람은 가난하고 고달픈 법.

게다가 정보값으로 동전 서른 개라면 싼 것이다. 더군다나 그 돈으로 객잔의 소면을 사 먹을 예정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장기린은 당과 장수의 극진한 인사를 받으며 객잔 안으로 돌아갔다.

객잔 안은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탁자들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고, 아칠과 아팔은 여기저기서 주문을 받고 요리들을 배달하느라 물 한 잔 마실 틈도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휘연은 계산을 하며 장부에 적고, 거스름돈을 챙겨 주느라 바빴고, 지나가면서 슬쩍 들여다본 주방 안은 운찬과 휴가 함께 요리를 만드느라 전쟁터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다.

바쁜 광경.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는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다.

우뚝.

그렇게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보았을 때, 장기린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제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정하고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었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마치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뒤쪽으로 멀어진다.

탁!

복도의 문을 닫은 뒤 장기린은 별채 쪽 마당에 발을 딛은 채, 쳐다보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당과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당과, 좋아하나?”

대답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큭! 그럴 리가.”

‘휙!’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무색할 만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몸놀림으로 한 사내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어둠을 실로 뽑아내 옷으로 지은 것 같은 새카만 야행복을 입은 사내였다.

손과 발도 온통 검은색 천으로 덮여 있고, 검은색 두건 앞으로는 마치 전진교도들이 그러듯이 네모난 천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네모난 천도 검은색이었다.

“옷이 또 바뀌었군.”

장기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아, 이거? 밤에 움직일 때는 이게 좋을 것 같더라고. 눈이 안 좋은 것들한테는 이런 얄팍한 수단도 잘 통하는 것 같아.”

사내는 친구에게 새로 산 옷을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장기린은 그런 사내를 가만히 응시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옷의 주인도 죽었나?”

“음? 아아, 죽었지. 몰래 내 뒤를 따라오던 놈인데, 이 옷이 마음에 들어서 뺏으려니까 좀 까다로웠어. 피가 묻으면 옷이 찝찝해지잖아? 그래서 기절시켜 놓고 옷을 벗긴 다음에 죽였지.”

“이봐, 반야혼.”

“뭐야? 장기린.”

장기린은 곧장 되받아치는 반야혼을 보며 가슴속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분노와 비슷하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 처음에 느꼈던 동질감이 잃어버렸던 가족을 되찾은 듯한 아련함이었다면, 지금 느끼는 것은 아주아주 못생기게 변한 자신의 얼굴을 동경으로 보는 듯한, 그런 종류의 극렬한 자기혐오였다.

“인간의 목숨이 가볍지?”

“응?”

“손만 내뻗으면 목이 툭툭 부러지고, 뭔가를 잡고 휘두르면 개미처럼 으깨 버릴 수 있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백 명, 천 명도 죽일 수 있어. 눈을 부라리면서 살기만 조금 뿜어내면, 전부 호랑이 앞에 놓인 쥐새끼처럼 얼어붙어 버리니까. 그깟 건 일도 아니지.”

반야혼은 장기린의 말을 듣자마자 큰소리로 웃으며 반색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큭큭! 역시 알아주는 놈은 너뿐이군!”

“하지만!”

장기린은 격한 감정을 담아 단호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짐승 같은 반야혼도 그 감정은 느낀 것인지 몸을 멈칫거렸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가벼워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매일같이 죽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지. 그런데 잊고 있는 게 뭔 줄 아나? 나도 사람이라는 거야. 내 손에 죽는 사람의 목숨이 가벼운 만큼 내 목숨도 가벼워진다는 거다.”

“……나는, 아니, 우리는 달라.”

“다르다? 어떻게 다르지? 너랑 나는 신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반야혼이 뭔가를 대답하려다가 움찔 멈춰 섰다. ‘그렇다’라고 대답을 하고 싶은 듯한 모양새였다.

“황제는 손짓 하나로 수백, 수천 명이 사는 마을을 없애 버릴 수 있지. 그래서 하늘의 핏줄이요, 살아 있는 신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너나 나는 알고 있을 텐데? 그게 얼마나 개소리인지?”

“…….”

“결국 황제도 사람.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다. 네가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만큼 네 목숨도 그만큼 우스워지는 거다. 알아듣겠나?”

장기린은 화가 났다.

그가 혼자 깨달은 사실을 반야혼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났고, 그런 말을 들으며 병신같이 묵묵히 서 있는 반야혼이 꼭 자신처럼 느껴져서 더욱 화가 났다.

“나는 그 가벼움이 싫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멈췄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면서 돈도 벌고, 가족도 만들면서 내 목숨을 무겁게 만들고 싶었다. 내 목숨이 무겁다는 걸 알면, 다른 사람의 목숨이 무겁다는 것도 알게 되니까. 나를 그렇게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너도 그걸 깨달아라. 앞으로 평범하게 살겠다고, 그래서 목숨을 무겁게 여기겠다고 약속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만들어 낸 하늘에 맹세컨데…….”

장기린은 반야혼을 똑바로 응시했다.

모든 감정을 죽이고, 오로지 이성적인 판단으로, 냉정한 결단을 내린 채 반야혼에게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널 죽이겠다.”

‘확!’하고 막혔던 둑이 터지듯 주변의 공기가 바깥으로 쓸려 나갔다.

깊고 무거운 장기린의 존재감이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보통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아마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걸로 장기린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반야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야혼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극도의 혼란스러움을 보이며 그저 한 걸음을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껏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개가 주인에게 걷어차이고 뒤로 도망가는 꼴이다.

동정심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린은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서 있었다.

그는 남궁연과 대화를 나눈 후에 밤을 새우며 고민하면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즐거웠다.

표현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단 두 번 만났을 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을 주고받았다.

마치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던 혈족을 가진 듯한 기분에 기뻤고,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반야혼이 자신의 ‘못난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 장기린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뿐인 것이다.

약속을 받고 갱생시키거나, 잘못된 존재를 책임지고 말살시키거나.

“……큭큭! 큭큭큭!”

장기린은 그르렁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반야혼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반야혼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검은 천을 두건 너머로 젖히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이젠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는 남궁연의 수하들이 눈치를 챌까 봐 걱정을 해야 할 정도다.

반야혼의 웃음소리는 무려 반 각 가까이나 계속된 후에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큭큭! 이해가 안 돼.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반야혼은 늑대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사람 따윈 믿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죽을 때도 혼자일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그쪽의 말을 듣고 공감을 하고 있어.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라고 마음속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라고 생각했다.

반야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로 반야혼은 갱생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럼, 약속을 하겠다는 건가?”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속……. 약속이라…….”

반야혼은 ‘큭!’ 하고 웃더니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은 거절이야.”

장기린은 잠시 들떴던 마음속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지?”

“난 만적(萬敵)이야. 만인의 적 반야혼.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짐승이었으며,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

반야혼의 눈이 귀신처럼 번뜩였다.

“내 목숨이 가벼우면 어때? 가볍게 살다가 죽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쪽이 했던 말 기억나? 너는 네 인생을 사는 거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거라고 했었지? 바로 그거야. 난 이제 와서 방향을 바꾸기엔 너무 멀리 왔어.”

반야혼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처럼 번뜩이는 눈.

짐승처럼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웃음.

그렇다. 그게 반야혼이다.

야성이 사라진 존재는 반야혼이 아니다.

“너…….”

장기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반야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면 자신의 목숨도 가볍게 된다는 것을.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이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반야혼은 ‘반군’에 속해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장기린처럼 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지금껏 그 원칙대로 살아오고 있다.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반야혼을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길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반야혼은 그 방법을 몰라서 지금껏 짐승처럼 살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만약에 내가 그쪽한테, 지금껏 만들어 놓은 가족이랑 둥지를 모두 버리고 같이 사냥을 다니자고 하면 좋겠어? 대륙이 좁다 하고 날뛰면서, 황제든 뭐든 눈치 보지 말고 멋대로 살아 보자고 하면, 그럴 수 있겠어?”

반야혼은 씩 웃는 얼굴로 다시 천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귀신같은 눈빛. 짐승 같은 웃음이 천에 가려 사라졌다.

“그럴 수 없지? 나도 똑같아. 큭큭! 우리 둘은 같지만, 또한 전혀 다르지. 절대로 함께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슬픈 제안은 하지 말라고. 괜히 마음만 뒤숭숭해지니까.”

반야혼은 그 말과 함께 당당하게 등을 돌리고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기린에게 등을 보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마치, 장기린이 지금의 그에게 절대로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또는 장기린에게는 공격을 받고 죽어도 괜찮다는 것처럼.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좀 봐줘. 난 아직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반야혼은 가볍게 몸을 띄워 별채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온통 새카만 야행복을 입은 탓일까. 해가 쨍쨍한 대낮인데도 반야혼의 모습이 눈에 잘 안 보이는 듯했다.

“이걸로 마지막은 아니야. 이 동네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한번 오겠어. 만약 그쪽이 그때까지도 나를 죽여야겠다 싶으면…… 큭큭! 결판은 그때 내자고.”

“…….”

장기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야혼은 몸을 돌리려고 했다.

아니, 몸을 돌리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데…….”

펄럭거리는 검은 천 사이로 반야혼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는 얼굴이 드러난다.

장기린은 아마 앞으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얼굴을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당과를 내려놓는 게 좋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반야혼의 몸이 별채의 지붕 너머로 훌쩍 사라져 버린다.

휑하니 황량해진 별채의 마당에서 장기린은 멍하니 자신의 왼쪽 손에 들린 당과 한 접시를 내려다봤다.

분위기가 진지해져서 잊고 있었다.

그는 달달한 당과를 잔뜩 들고 상대를 죽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분위기 잡고 선언했던 것이다.

“나 참…….”

한참이나 굳어 있었던 장기린은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반야혼이 농담을 했다는 사실도 웃기고, 그가 이런 얼빠진 짓거리를 했다는 것도 웃기다.

자신은 당과를 들고 도대체 뭘하려 했던 것인가?

당과를 던져서 죽이려고? 아니면 단 걸 잔뜩 먹여서 미각을 마비시키려고?

“하핫! 나 참…….”

겉으론 아닌 척해도 반야혼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마음속으로는 상당히 부담이 됐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 ☆ ☆

다음날 아침, 아직 아칠과 아팔이 대문 앞을 쓸지도 않은 이른 시각에 남궁연이 찾아왔다.

그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지와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데다 마치 며칠 밤을 꼬박 샌 것처럼 눈 밑이 거멓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사건으로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장기린은 그녀를 자리로 안내한 뒤 휘연에게 부탁해 찻물을 따라 주었다.

남궁연은 사양하지 않고 한숨 돌리는 듯한 표정으로 따뜻한 차를 받아 마셨다.

“하아, 조금 살 것 같네요.”

남궁연은 손으로 이마를 꾹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기린은 활달한 그녀가 이 정도로 지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네에. 그 때문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밤새 뛰어다녀야 했죠.”

가끔은 궁금해도 참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장기린이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주자, 남궁연은 감사한 눈빛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하, 후우……. 만적이 항주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뭐……!?”

“너무 놀라시네요. 혹시 저희 몰래 무슨 이야기라도 하셨던 건가요?”

뇌안각의 지부장답게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고 대번에 눈을 가늘게 뜨는 남궁연.

장기린은 속으로 조금 뜨끔했으나, 얼굴로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항주 밖으로 빠져나간 게 확실한 건가?”

“네. 확실해요. 뭐, 모습을 감추고 몰래 나갔으면 모르겠는데……. 자신만만하게 북문 대로를 통해 걸어 나갔는데, 착각할 수가 없죠.”

반야혼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얼마나 당당하게 걸어 나갔을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쫓던 자들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장기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쫓는 자들의 입장에선 아무리 황당해도 가만히 두고 봤을 리는 없다.

분명히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고, 항주의 성문밖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피해가 있었겠지?”

“…….”

여기서 남궁연은 잠시 침묵.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속을 뭔가 해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삼백 명이 죽었어요.”

한 사람 대 수백 명의 대결. 거기서 진 것은 수백 명 쪽이었다.

“그중에 이백 명 이상은 무공을 제대로 익힌 무인이었다면…… 믿어지세요?”

“……그런가.”

“그런가로 끝날 일이 아니에요. 그중에는 본가(本家)에서 보내 준 뇌정대의 대원들도 백 명이나 있었어요. 무슨 오선(五仙)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뇌정대 백 명이 한 사람을 상대로 몰살당한 건 지금껏 남궁세가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요.”

남궁연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걸로 무림이 떠들썩해질 거예요. 인근의 무림 문파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만적을 잡으려 할 거고, 명예를 노리는 낭인들도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겠죠. 황실은 황실대로 군사들을 보내서 뒤를 쫓을 거구요. 하아…… 그 뒤처리를 할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그 정도로 일이 커진 건가?”

“황실과 무림이 동시에 같은 사람을 쫓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게다가 그자, 터무니없게도 지금 대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장기린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휙 들었다.

“북쪽이라면…….”

항주에서 북쪽.

대로를 통해 이어지는 커다란 길은, 명 제국의 심장을 향해 곧장 뻗어 있다.

“북경이죠.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황실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고 있다구요.”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반야혼은 장기린의 또 다른 모습. 그러니 그가 북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할 일이 있다는 게…… 그거였나?’

이 동네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오겠다던 말은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장기린은 반야혼을 신뢰했는가?

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야혼은 장기린을 신뢰했는가?

그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듯하다.

신뢰불신뢰(信賴不信賴).

서로를 너무나 잘 알지만, 또 한편으론 서로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나 잘 알기에 오히려 신뢰할 수 없다.

다시는 볼 수 없다.

속았다.

만약 반야혼이 자신이 하려는 일을 설명했다면, 장기린은 아마 그 자리에서 반야혼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보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반야혼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고, 장기린은 그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믿었다.

‘바보 같은…….’

장기린은 탄식했다.

지금 반야혼이 생각하는 일은 설령 반야혼과 똑같은 인물이 세 명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황제의 곁엔, 그가 있어.’

해태라고 불리는 자.

대륙의 주인인 황제에게만 보인다고 하며, 이 세상에서 황제에게 조언하고 황제를 야단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살아 숨 쉬는 인간임과 동시에 신수(神獸)로 떠받들어지는 그가 있기에, 황제는 황제로서 존재한다.

‘그걸로 끝이었던가.’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제의 그 만남이, 장기린과 반야혼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린은 반야혼과의 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변덕을 부린다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대문에 감시인이 몰래 서 있는 것도 이젠 끝이겠군.”

남궁연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장기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이제부터 고생 시작인데,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동안 꽤 불편했어. 당과를 팔던 녀석은 정이 좀 들었지만.”

“아, 그 사람은 나도 눈여겨보고 있어요. 사람들과 친해지는 능력이 뛰어나더군요.”

남궁연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다가, 다시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하아, 그자를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할 텐데……. 이제 본가에서 닦달을 할 걸 생각하니, 큰일이네요.”

“괜한 고생할 거 없어. 반야혼은 다른 곳에는 절대로 잡히지 않을 테니까.”

“네……?”

“반야혼의 이야기는…… 옆에서 나서지 않아도 자연히 황실에서 끝이 날 거다.”

장기린은 단언했다.

“……하지만 그건 장 가가가 무림 문파들의 힘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남궁연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북경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잡힐 것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장기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옆에서 휘연이 따라 준 찻물만 조용히 들이켰다.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다.

장기린은 분명히 예감하고 있었다. 반야혼은 북경에 도착할 것이고, 모든 방어를 뚫고 황제와 대면할 것이며, 그곳에서 만적이라 불리던 그의 이름은 끝이 날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자살(自殺).

만적 반야혼다운, 장렬한 최후.

‘잘 가라, 반야혼.’

장기린은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평범한 생활을 원하는 마음 깊숙한 곳, 전장을 누비며 살아가던 또 다른 장기린이 반야혼과 함께 사라져 간다.

장기린은 오늘, 자신의 일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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