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40화 (35/686)

6권

外章 ― 만적지로(萬敵之路)(1)

만적이라 함은 만인의 적.

사람[人]이라 불리는 모든 자들의 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호를 가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기호는 다양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만큼 누구에게는 좋은 친구라도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찢어 죽일 원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야혼은 그 칭호를 얻었다.

이름 모를 무덤가에서 살아간 십수 년.

짐승처럼 살아가고,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역모를 꾸미는 무리에 속해서 수많은 정쟁(政爭)에 끼어들어 싸움을 겪고 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를 만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제법 모였군. 삼 일이나 쉰 탓에 귀찮아졌어.’

반야혼은 서호의 관문 밖, 까맣게 몰려들어 길목을 봉쇄하고 있는 병력을 보며 혀를 찼다.

사실 호송대를 탈출했다면 곧바로 종적이 끊길 만큼 먼 곳으로 도주를 했어야만 했다.

황제의 명이었던 만큼 추적대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일.

항주 최고의 번화가에서 삼 일이나 여유를 부리니 순식간에 천 단위의 병력이 집결해 버린 것이다.

‘큭큭, 재밌어졌군. 이제야 해볼 만하겠어.’

반야혼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삼 일간 장기린을 만나 즐거웠다.

눌러앉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충실한 시간을 보냈고, 그것은 짐승처럼 살아온 반야혼에게 있어 일생에 다시없을 귀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은 끝났다.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을 살아가야 하듯이, 이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나는 만적 반야혼. 모두에게 경외받는 만인의 적이다.’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늑대의 웃음.

끌어 올리는 입꼬리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쓰고 있던 인간의 탈을 벗고 홀로 존재하는 짐승으로 돌아갔다.

풍운객잔 주변의 포위망을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야혼은 일부러 흔적을 드러냈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대략 일다경 정도의 시간을 뒤처진 채 흔적을 따라 쫓아왔다.

반야혼은 누가 그를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서 쫓아오는지 알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건 야생 생활을 통해 자연스레 길러진 능력으로, 시선과 기척,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제육감(六感)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반야혼은 경계를 서는 병사들 몰래 성벽을 뛰어넘은 뒤, 대로를 사용하지 않고 그 옆의 울창한 수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음을 틈탄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은밀해서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종적을 놓칠 정도였다.

실제로 수풀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 세 명은 그가 바로 다섯 걸음 옆을 기어서 지나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수림 속에 들어가자마자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는 나무뿌리들을 가볍게 뛰어넘고, 땅이 고르지 않을 경우엔 성성이처럼 능숙하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흔히 야생동물들이 남기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포위망을 탈출하는 데 익숙한 반야혼으로선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뭐, 이 정도인가.’

뒤따르던 추적자들은 따돌렸지만 반야혼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수림 속의 대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주변의 정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호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안휘, 하남 쪽 방향으로 가는 서로(西路)와 산둥 쪽 방향으로 통하는 동로(東路).

반야혼이 보기엔 양쪽 다 이미 병사들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로 쪽의 강변은 달빛이 수면에 닿는 월광이 반사되지 않고 있었고, 서로 쪽의 숲에선 연신 새 떼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앉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둘 다 백 이상 오천 미만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반야혼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책임자인지는 몰라도 제법이야. 공을 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주변 지역에 다 연락을 해서 병사들을 모았어. 빠져나가기는 두 배로 힘들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이해하려 하고 있다.’

반야혼에겐 북경으로 가 당금의 황제를 죽인다는 거대한 목표가 있었다.

호송대를 탈출하자마자 북상했다고는 해도 그걸 알아채고 정확하게 북경으로 가는 길목만 차단했다는 점이 대단하지 않은가?

“좋아. 해보지.”

만적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만적은 적의 두려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다.

반야혼은 천천히 숨을 죽이며 은밀하게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의 기척은 순식간에 모두의 감각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남궁세가 뇌안각 항주지부 책임자, 남궁연은 현재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와 함께 군사적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지휘사사는 한 지방의 군사를 총괄하는 높은 직위.

일만 명 이상의 병사를 통괄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 전장이라면 장군이나 다름없는 직책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단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밤중에 직접 나선 것만 보아도 현재 황실이 만적의 탈출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본인은 이번 사태를 단순히 역모 죄인의 탈옥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소. 만적이라는 자는 일만 군사의 가치가 있다고 평해지는 바. 그러니 본인도 일만의 병사가 항주에 침입했다라고 생각할 것이오.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겠소.”

도지휘사사의 낯빛은 심각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역모범 포획에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양옆에서 도지휘사사를 향해 깊이 포권을 취하는 두 사람은 각각 항주 군사 실무를 담당하는 도사(都司)와 가까운 곳에 본가가 있는 진주 언가의 가주 언진명(혇振明)이었다.

도사는 항주의 지부 대인인 문표의 밑에서 일하는 자였고, 언진명은 최근 들어 군부와 줄을 대서 가문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오천의 병력이 하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고, 삼천의 병력이 산둥 쪽 길목에 있습니다. 나머지 병력은 현재 항주의 모든 관문을 봉쇄하고 있지요.”

“저희 진주 언가의 영랑대(英狼隊)가 모두 나와 병사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만 명을 상대하는 자라고요? 하하, 병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다 허세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무림인이 나서면 그런 자들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지요. 저희 진주 언가가 진정한 무림인의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언 가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영랑대의 대원들이 어찌나 듬직해 보이는지, 함께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합니다.”

“하하, 도사님이 관리하시는 병사들은 어떻고요? 척 봐도 용맹한 병사들이라는 것을 알겠더군요.”

도사와 언진명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추켜세워 주었다.

“두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오. 이번에는 만적을 꼭 잡을 수 있을 것 같소.”

“물론입니다!”

“꼭 잡아야만 하오. 지부 대인은 물론이고 황실에서도 지엄한 명령이 떨어진 터라…….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소?”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언진명의 이름을 걸고 만적을 사로잡아 보이겠습니다.”

“언 가주께서 그리 말해 주니 정말 마음이 놓이오.”

세 사람의 대화에 남궁연이 낄 자리는 없었다.

남궁연은 속으로 세 사람의 무지함을 비웃었으나,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내색하지 않았다.

‘참으로 뻔뻔하다. 공을 세우려고 서로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모습이 우습네.’

사실 서로와 동로에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은 남궁연의 생각이었고, 진주 언가의 지원을 받아 만적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는 무림인을 배치해 두자는 것도 남궁연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세 사람은 그런 남궁연의 공로는 쏙 빼어 놓은 채, 자신들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양 뻔뻔하게 굴고 있는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 띄워 주고 위로해 주기에 바쁘고, 어쩌다가 남궁연이 의견을 내놓으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불만을 내뱉어 놓고는 나중엔 결국 그 의견을 슬쩍 자기 것인 양 사용했다.

‘불만은 많지만 어쩔 수 없지. 본가에선 항주에 진출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쩐 이유에선지 남궁세가는 항주에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항주에 관해 윗선에서 뭔가가 약속이 된 것 같은데…… 지금의 남궁연의 위치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진주 언가를 개입시켜 버린 것이다.

무림인은 필요했고, 남궁세가에선 정보를 얻는 데 쓰이는 소수의 무인들 말고는 절대로 지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궁연은 이번 일에서 철저한 조연이었다.

누구보다 만적을 붙잡고 싶었으나, 남궁연에겐 나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어. 이런 인간들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을 테니까.’

남궁연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세 사람도 남궁세가의 위신이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게 내버려 두긴 했으나, 딱히 그녀에게 의견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럼 일단 회의는 이걸로…… 또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그때 다시 상의하는 걸로 하지요.”

회의가 끝난 후 밖으로 나가려는 남궁연을 언진명이 불러 세웠다.

“이보게, 남궁 소저.”

“가주님, 뇌안각의 지부장이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딱딱하게 굴지 말게. 남.궁.소.저. 소저를 소저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른단 말인가.”

짐짓 호탕하고 마음이 넓은 척 연기하고 있으나, 언진명은 음흉하고 여인을 우습게 보며 야심만 깊은 자였다.

그리고 소저라는 말이 싫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소저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심성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궁연은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용건을 물었다.

“아니, 그게 말이야. 어째서 남궁 소저가 이곳에 와 있는가 묻고 싶어서 말이야. 본래 이런 곳엔 지부장 이상의 책임자가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남궁세가의 입장을 걸고 발언할 수 있는 책임자 말일세.”

언진명의 뱀처럼 가느다란 눈이 탐탁지 않다는 듯 남궁연의 전신을 훑었다.

“제가 바로 항주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그 ‘지부장’입니다만.”

“아니, 아니. 내 말은 진짜 책임자 말일세. 남궁 소저처럼 일의 경험을 쌓으려고 형식적으로 올려놓은 책임자 말고 말이야.”

“예? 그게 무슨……?”

“이번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닐세. 군부와도 엮이는 일인데 자칫 가벼운 처신으로 도지휘사사가 남궁세가는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라고 느끼기라도 하면 큰 손해가 아닌가?”

“…….”

“커험, 다 자네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도지휘사사의 미움을 받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관심이 없으면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아요. 어때? 알겠나? 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유익한 충고를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남궁연은 격한 분노를 억누르느라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제가 여인이라서 제대로 된 책임자가 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이군요. 천조검각의 검후님이나 아미신승께서 언 가주님의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커허험!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나. 난, 다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검후나 아미신승의 이야기가 나오자 언진명은 슬쩍 한발 물러섰다.

“그 걱정은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여인이지만’ 세가의 믿음을 받고 있고, 세가의 이름을 걸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제 말에 대한 책임은 확실히 지겠습니다.”

“……쯧, 그런가?”

언진명은 얼마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혀를 찼다.

“이건, 소저가 내 딸 같아서 충고하는 건데 말이야. 여인이란 자고로 좋은 남자를 만나서 시집을 잘 가야 하는 법이지. 괜히 남궁세가의 세력권도 아닌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 게다가 소저는 남궁가의 직계 아닌가?”

“…….”

“어때? 우리 언가에도 괜찮은 사내들이 많다네. 소저만 생각이 있다면 내가 매파자가 좀 되어 주지!”

쉽게 말해 여자가 거치적거리게 이런 곳에 있지 말고 좋은 남자랑 선이나 보라는 말이었다.

남궁연은 언진명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너무나 화가 났다.

특히, 그 말을 할 때 사람을 깔아 보는 눈초리란…….

남궁연은 당장이라도 큰소리를 칠 것 같은 자신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좋은 사내라…… 예, 언 가주님만 봐도 잘 알 수 있네요.”

“하하! 물론이지. 우리 언가의 청년들은 나만큼 뛰어나다네.”

언진명은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는지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됐습니다. 언 가주님은 제 아버님이 아니시니까요. 저는 아버님께서 말씀을 꺼내기 전까진 혼약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그래?”

“예. 그리고 가주님과 같은 정도인으로서 한 가지만 충고해 드리죠.”

“호오, 충고?”

“만적은 만만치 않습니다. 전력을 다하시는 게 나중에 후회가 없을 거예요.”

언진명은 끝까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남궁연은 뇌안각의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만적을 잡을 때 사용해야 할 작전과 ‘이만 항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서찰을 도지휘사사에게 남긴 뒤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호감이 가지 않는 세 명 때문에 그녀는 이번만큼은 만적을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난 이제 만적을 잡는 데 손을 쓰지 않겠어.’

어차피 본가는 그녀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쯤해서 돌아간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궁연은 뇌안각의 무인들을 모두 이끌고 돌아갔다.

만적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이때는 그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 ☆ ☆

사사삭―!

“어……?”

진주 언가의 영랑대 무인 한 명과 병사 스무 명으로 구성된 수색조는 걸음을 멈춘 채 제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항주에서 하남 쪽으로 향하는 서로(西路) 초입.

아직 항주 관문이 돌파당했다는 신호가 오질 않았으니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근처에서 범상치 않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어서 나를 중심으로 원진을 짜! 둥그렇게 모여서 주변을 경계한다!”

언가 무인의 일방적인 하대에 병사 스무 명을 통괄하는 조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 보시오. 우린 나라의 녹을 먹는 병사지, 그쪽한테 명령을 들을 이유는…….”

“죽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해! 난 정식 무공을 익힌 무인이야!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적이란 놈은 내가 잡아야 한다고. 알겠어?”

“…….”

“빨리 원진을 짜라니까!”

조장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였으나 일단은 군말 없이 언가 무인을 중심으로 원진을 짜 주었다.

절차나 위계야 어찌 됐건 일단 원진을 짜서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후두두둑―

“으음…….”

근처의 나뭇잎들이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근처에 있던 새들이 겁을 먹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때는 어두운 저녁.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언가 무인을 중심으로 제각각 바깥쪽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한참이나 아무 일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헛짚은 거 아냐?”

“아무래도 그놈은 아닌 듯싶은…… 허억!”

순간, 으적! 하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있던 활엽수의 나뭇잎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병사들은 깜짝 놀라 창을 들어 올렸다.

아무 기척도 없는 나무를 향해 창을 겨눈 채 딱딱하게 굳어서는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잠깐, 긴장 풀어. 뭔가가 이상하다.”

조장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창끝을 살짝 내렸다.

조장은 자신이 먼저 앞으로 나서서 인기척이 느껴진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조심조심.

언제 무엇이 덮칠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나무에 다가간 조장은 나무둥치 위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주변의 병사들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조장? 뭡니까?”

“그놈입니까? 혹시 다 죽어 갑니까?”

조장은 고개를 저었다.

나무둥치 위로 손을 쭉 뻗었던 조장은 손에 제법 큼직한 너구리 한 마리를 들고 있었다.

“범인은 이놈이다.”

병사들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아…….”

“그럼 그렇지. 깜짝 놀랐네.”

“이봐요. 언가 무인, 당신은 이거 몰랐었습니까?”

“그래, 무공을 익혔다면서 왜 이런 걸 모릅니까?”

병사들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재수 없게 굴던 언가 무인에게 한 마디씩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고소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조장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어째 잔소리를 듣고 있는 언가 무인의 동태가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보시오. 괜찮…… 허억?!”

“으어엇?!”

가까이 다가가 언가 무인의 어깨를 붙잡았던 조장은 물론이고,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다들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모, 목이……!”

“언제? 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거냐!”

“모, 모릅니다! 눈을 뗀 건 잠시뿐이었는데……!”

병사들의 얼굴이 모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건방지던 언가 무인은 그들이 흔들리는 나뭇잎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에 목이 부러져 있었다.

조장이 어깨에 손을 대자 툭 하고 목이 떨어지는 모습은 이야기로만 듣던 괴담이나 다름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병사들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이건……!’

특히, 가까이서 사체를 본 조장은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가 무인의 목은 마치 진흙 반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끊어 낸 것과 같은 모양으로 끊어져 있었다.

사람의 목을 이렇게 만들려면 손의 악력이 얼마나 강해야 할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소리도 못 들을 수 있나?”

“그래, 목이 부러지는 소리는 크게 들릴 텐데.”

“설마……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순간 목도 부러진 건가?”

“그럴 리가…….”

“만약 그렇다면, 몸이 얼마나 빨라야 하는 거야?”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는 순간, 병사들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만약 의문의 적이 그 정도로 몸이 빠르다면, 이렇게 스무 명이 모여 있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후, 후퇴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언가 무인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우리로선 역부족이야 이 사태를 알려야 한다.”

조장은 재빨리 그렇게 정리한 뒤, 병사들을 모아 본진이 있는 방향으로 거의 뛰는 것처럼 걸어갔다.

바스락―

“…….”

그런 병사들의 뒤편에서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뭐, 뭐야? 무원이 죽었다고?”

언가 무인의 사망 소식을 전해 주자마자 그 책임자라는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 억하심정을 품고 암습해서 죽인 게 아니냐는 억울한 음모까지 들먹일 정도였다.

그런 의구심은 조장이 힘겹게 어깨에 짊어지고 온 언가 무인의 시신을 넘겨주자 풀릴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엔 다른 이유로 책임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어흔이 하나도 없다니……! 게다가 상처는 목이 부러진 것 하나! 무원을 이렇게 쉽게 죽이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거지……?”

언가 무인들의 책임자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뛰어가, 이번 싸움의 총책임자나 다름없는 언가 직계의 둘째 아들 언중현을 찾아갔다.

“뭐라고? 무원이 죽어?”

“예! 보시다시피 정체를 알 수 없는 수공(手功)으로 목을 쥐어짜서…….”

“이런……!”

“아무래도 놈은 이쪽으로 온 것 같습니다.”

“알겠어. 일단 아버님이 계신 쪽으로 전갈을 날린다! 그리고 포위망을 좀 더 북쪽으로 옮기고, 영랑대 호출해! 이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공격한다!”

“예!”

전서구가 날아오르고, 병사들이 움직였다.

서로(西路)는 소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 서로에서 우리 가문 무사가 당했다고?”

“예! 지금 본진에서 서로 쪽에 지원 병력을 더 보낸다고 난리랍니다.”

“끄응…… 헛다리를 짚은 건가.”

언가 직계의 다섯째 아들 언휘현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언가는 가주를 중심으로 힘이 뭉쳐 있다.

가주는 본부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는 여섯 명의 여인으로부터 낳은 자식들을 직계와 방계로 나눠서 차별하지 않았다.

다만 철저한 능력주의.

공을 세우면 대접받고, 능력이 없으면 하인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는다.

게다가 가주 언진명은 최후의 후계자 자리 또한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자식에게 주겠다고 공표한 탓에, 열세 명이 넘는 가주의 자식들은 항상 공을 먼저 세우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언휘현은 세 번째 첩으로부터 낳은 가주의 다섯 번째 자식이었다.

나이로는 중간. 무공도 아직 뛰어나지 않은 탓에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기에, 그에게는 이번 일이 특히 중요한 기회였다.

이번에 가주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단번에 후계자 후보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언휘현은 더욱 조바심이 났다.

“안 되겠어. 이동하자.”

“예?”

“이쪽 동로에는 영랑대가 백 명쯤 있지? 다 모아. 서로의 추격전에 합류할 테니까.”

“저기, 오 공자님. 위에 묻지 않고 이동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우린 군부에 속한 게 아니니까. 우린 진주 언가를 위해 싸우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언가의 무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언휘현은 강경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이내 도지휘사사의 병사들만 남겨 둔 채, 언휘현은 영랑대의 무인 백 명을 데리고 서로(西路)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중간의 숲을 가로지르는 일직선 통로를 이용했다.

대략 이 다경쯤 지났을까?

숲의 중간은 온통 대나무뿐인 죽림이었는데, 마치 벽처럼 촘촘하게 자라고 있는 대나무 틈 사이로 음산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끄윽……!”

갑자기 뒤쪽에서 신음이 들려오는 순간, 언휘현을 필두로 한 영랑대의 무인들이 모두 걸음을 멈췄다.

“뭐냐!”

“맨 뒤에 있던 한 명이 없어졌습니다!”

“뭐……?”

그 말이 들려오는 순간, 모든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 기척도 없었습니다!”

언휘현은 문득 전율을 느꼈다.

만약 만적이라는 놈이 서로에서 사고를 친 건 미끼고, 본래는 동로 쪽의 도주로를 노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서로에서 동로로 오는 경로상에 딱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기회다!!’

눈이 반짝 빛난 언휘현은 다른 무사들에게 나직하게 소리쳤다.

“적이다! 모두 준비해! 우리가 만적을 잡는다!”

“……!”

영랑대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떠올랐다.

백여 명의 영랑대. 언가의 정예 무사인 그들은 각자 손을 보호하는 철수투를 낀 채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진주 언가라고 하면 언가권.

그것도 외공(外功)을 중심으로 한 강권(强拳)이 유명하다.

그들이 언휘현을 중간에 놓고 원진을 만들려는 순간, 갑자기 이번엔 가장 선두 쪽에 있던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컥……!”

“잡아! 저기 있다!”

뭔가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덮친다 싶은 순간,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무인은 양쪽 무릎이 박살 난 채 제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커헛……!”

아니, 무릎이 부서진 무인은 바닥에 쓰러질 틈도 없이, 목이 콱 붙들린 채 쏜살같이 죽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촤자자작―

“엇……! 도, 도망친다!”

“잡아! 쫓아라!”

무인을 끌고 간 그림자를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건장한 체격과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긴 머리는 뒤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만적이다. 확실해. 초상화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겼어.’

언휘현은 그 뒤를 쫓으며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일 조 조장! 일 조를 데리고 왼쪽! 이 조 조장! 이 조를 데리고 오른쪽!”

“예!”

“예!”

일 조와 이 조의 조장이 각각 서른 명씩을 데리고 좌우로 흩어졌다.

“삼 조는 나를 따라와!”

“예!”

언휘현은 전력으로 달렸지만, 만적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바닥엔 굵은 나무뿌리가 장애물처럼 솟아 있고, 사방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덤불들뿐임에도 만적은 드넓은 평야를 뛰노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흥, 그래 봤자지. 듣자하니 짐승처럼 자랐다던데. 사냥하듯이 몰아넣으면 결국 궁지에 몰리게 되어 있어.’

언휘현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이 근처의 지형은 머릿속에 넣어 둔 뒤였다.

이대로 쭉 몰아넣으면 끝에 막다른 길이 있는 깊고 험준한 협곡이 나타난다.

거기까지만 몰아넣으면 도망칠 수도 없을 테니, 숫자가 많은 이쪽의 승리일 것이 분명했다.

“어엇?”

그런데 불과 열 걸음 뒤에서 쫓아가던 언휘현이 눈앞을 가리는 대나무 잎사귀를 쳐 내는 순간, 만적의 등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다?’

언휘현은 만적의 등이 사라져 버린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만적이 무릎을 부순 채 끌고 가던 무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휘현은 곧바로 접근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공기가 이상해.’

언휘현은 직접 가지 않고 뒤따라온 삼 조의 조원들을 보내 무인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시켰다.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의식이 불분명합니다!”

“어서 데리고 의원에게 돌아가야 할…… 으아악!”

촤르르륵―!

보고하고 있던 무인 한 명이 갑자기 발목이 잡힌 채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사냥꾼이 만들어 둔 함정. 특별한 장치도 없는 단순한 올가미였다.

“뭐야, 이건. 깜짝 놀랐잖아?”

언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엔 긴장했으나 별거 아닌 물건이었다.

올가미에 걸린 본인도, 무공을 익힌 무인답게 공중에서 허리를 접더니 발에 묶인 매듭을 손으로 풀고 스스로 빠져나왔다.

“어……?”

바로 그 순간 환상처럼 나타났다.

마치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머리를 산발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야수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나무 위……?’

높이가 십 장은 될 법한 커다란 대나무 위.

그 꼭대기에서 한 사람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휘리리릭―

“어엇?!”

퍼엉!

영랑대의 대원 세 사람이 곧바로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으나, 십 장 높이의 대나무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공격을 피해 냈다.

피해 낸 것으로 끝이 아니다.

대체 어떤 수를 쓴 것인지, 공격을 피해 내는 것과 동시에 주먹을 날린 세 사람의 목이 공중으로 뎅겅 잘려 올라갔다.

푸화아악―!

“뭐, 뭐야?!”

언휘현은 그 순간 깨달았다.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만인을 상대할 수 있느니, 온갖 정치적 거물을 척살한 놈이라느니 하던 만적 반야혼에 대한 이야기는 허세가 아니었고, 이놈은 ‘진짜배기’ 물건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끄아아악―!!”

그 순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듯 만적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어느새 오른쪽 구석에 있던 무인 세 사람의 목을 손으로 부러뜨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비명은 오히려 공격당한 무인의 주변에서 나오고 있었다.

일방적이다.

학살이다.

진주 언가의 정예인 영랑대가 손도 못 써 보고 일방적으로 목이 부러지고 있었다.

“아, 아아…….”

가장 먼저 달려들어야 마땅한 언휘현의 다리가 땅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추위라도 타는 것처럼 덜덜덜 떨렸다.

“오 공자! 명령을!”

“이러다가 몰살당합니다! 오 공자!”

“일단 후퇴를……! 이대론 안…… 끄륵!”

첨언을 올리던 조원 하나가 목이 부러진 채 옆으로 휙 던져져서 죽림에 처박혔다.

아직은 살아 있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목이 부러졌으니 오래갈 리가 없었다.

“끄아악―!”

“공격해! 죽어라, 이 자식!”

삼 조의 조원들이 가시를 잔뜩 세운 수투를 휘두르며 달려들지만, 만적은 그런 수투를 맨손으로 잡아 버렸다.

콰드드득―!

“끄아아아……!”

엄청난 악력에, 오히려 철로 만들어진 수투가 주먹과 함께 찌그러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력.

그리고 아무리 밤중이라고 해도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몸놀림.

이 순간, 만적 반야혼은 인간의 땅에 강림한 지옥의 야차 같았다.

검은 그림자가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맹수의 이빨보다 더욱 날카로운 양쪽 손으로 영랑대의 목을 물어뜯었다.

휘이잉―

서른 명의 영랑대가 바닥에 몸을 눕히는 것은 불과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생존자.

아니, 만적이 마지막으로 ‘살려 준’ 언휘현은 뭔가에 홀린 듯이 물었다.

“도, 도대체 왜……?”

어째서 자신은 살려 두느냐?

그걸 묻고 싶었으나, 공포에 얼어붙은 혓바닥은 잘 움직여 주지 않았다.

“궁금한가?”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

살인마의 것이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가 언휘현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어차피 넌 도망칠 수 없어.”

“……!”

“따라와라. 사냥은 끝내야지.”

짧은 말에 쿵― 하고 심장이 얼어붙었다.

“만적이 하는 말엔 요력(妖力)이 깃들어 있어서 사람의 심혼(心魂)을 제압하고, 정신을 제 맘대로 조종한다.”

만적과 적대했던 금의위나 동창이라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다.

그것이 호송대가 반야혼의 입을 밧줄로 틀어막았던 이유였고, 어쩌다 살아남은 반야혼의 적들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광자(狂者)가 되어 버리는 이유였다.

터벅. 터벅.

반야혼은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언휘현을 뒤로 내버려 둔 채, 언휘현이 공격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빈틈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하지만 언휘현은 그의 빈틈에 공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애초에 언휘현이 그를 몰아넣으려던 방향이다.

사냥?

누가 누구를 사냥한다는 건가?

언휘현은 속으로 실소하면서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반야혼의 뒤를 따라갔다.

반야혼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그는 도망칠 수 없다.

가주인 언진명은 자신의 처첩들과 자식들을 그저 장기판의 졸(卒) 정도로만 보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독단으로 영랑대를 움직이고, 게다가 한 조를 괴멸시키기까지 했으니, 이대로는 가문에 돌아간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가문에서 쫓겨날 뿐이다.

‘저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는 궁금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사로(死路)였다.

그저 끝까지 따라가서 영랑대와 함께 죽는 것만이 그나마 어머니를 살리는 길일 뿐.

“오 공자님……?”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서 포위망을 좁혀 온 일 조와 이 조는 언휘현이 아무도 없는 협곡의 끝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의아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에 언휘현은 삼 조와 함께 만적을 쫓고 있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안색이 창백하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삼 조는 어디에 있고요?”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오 공자님!”

일 조장과 이 조장이 어깨를 흔들어도 언휘현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그는 마치 시체처럼 흐려진 동공으로 정면의 막다른 협곡을 응시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오 공자님……?”

“너희 전부,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는 되었겠지?”

일 조장과 이 조장은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다.”

언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됐어.”

“오 공자님……?”

“걱정 마. 나도 목숨은 내놓고 싸울 테니까. 너희들만 보내지는 않는다.”

일 조장과 이 조장.

두 사람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오 공자의 태도에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겠다는 말을 듣고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삼 조는 어딘가 정찰을 보냈겠지.’

‘매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오 공자가 목숨을 걸 정도로 의욕을 보이다니, 잘된 일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교환하는 사이, 언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 조와 이 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언휘현의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그렇게 반각 정도를 걸었을까?

기묘한 긴장감을 느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움직이는 가운데, 유난히 큰 발소리가 뒤쪽으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대열의 걸음이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어……?”

“어엇?!”

산발한 머리를 흩날리는 그림자.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만적 반야혼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전투를 준비했다.

일 조장과 이 조장은 언휘현을 보호하는 듯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육십여 명의 조원들은 강한 의지로 눈빛을 불태웠다.

“만적 반야혼!”

“네 악행도 여기서 끝이다!”

“우리 언가의 무사들이 너를 붙잡아 주마!”

일 조와 이 조는 언가권을 익힌 권사들이 절반, 대도를 든 도객들이 절반 정도 되었다.

반야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늑대 같은 웃음을 지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희는 본보기다.”

“뭐……?”

무인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를 쫓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만적 반야혼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본보기란 말이다.”

반야혼의 말은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감각이 좋은 몇 명은 그 말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무인들은 대부분 반야혼의 말에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반야혼이 무림인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그들로선 반야혼의 이름값이나 지금껏 해 온 업적들을 다 과장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우릴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오늘 잡히는 건 너다! 도대체 뭘 착각하고 있는 거야?”

언가의 무사들은 낄낄 웃었다.

“그래?”

그 말에 다시 한 번 씨익 웃는 반야혼.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언휘현이 있다.

반야혼은 양손을 앞으로 들어 올리고 우두둑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꺾었다.

“그럼, 누가 착각을 하고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보지.”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오르는 순간, 휙 하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반야혼.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뭐…… 라고? 믿을 수가 없군. 다시 한 번 말해 봐.”

급격하게 흥분한 진주 언가의 가주 언진명은 급보를 가지고 온 언가의 무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오, 오 공자님께서 영랑대 백 명을 이끌고 동로에서 서로 쪽 방향으로 이동하셨고, 그사이에 만적을 만나…… 사망하셨습니다.”

침통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으나, 언진명의 분노는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그놈이 문제가 아냐! 영랑대 백 명은! 영랑대 백 명은 어찌 되었지?”

언진명은 자식의 목숨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비정한 아버지였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잠시 질린 표정을 지었던 언가의 무사는 꿋꿋이 질문에 대답했다.

“전멸입니다. 전령의 말로는 사건이 일어난 협곡 안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처참한 지경이라고……. 그래도 딱 한 명 살아남았는데, 이지(理智)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망가졌습니다. 오로지 ‘본보기’라는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본보기……?”

“아무래도 무인들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죽인 건 그런 이유인 듯합니다.”

“……어떻게 잔혹하게 죽어 있나?”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놓았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지휘사사와 도사에게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맨손으로 사람을 찢다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엄청난 힘이군. 인간이긴 한 건가?”

“게다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과연 만적이랄까…… 그런 자를 상대하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요……?”

언진명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영랑대 백 명이라니. 그놈들을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휘현, 이 멍청한 놈! 죽으려면 제 혼자 죽지 왜 사고를 치고 죽느냔 말이다!”

쿠웅―!

언진명이 분노해서 발을 구르자, 땅이 무너질 것처럼 진동했다.

아무리 음흉한 심성을 가졌어도, 어쨌거나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세가의 가주.

언진명은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훅― 하고 뿜어지는 뜨거운 기세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 언진명으로부터 조금 물러섰다.

“그래서 그놈은?”

“예……?”

“그놈 말이다! 만적이라는 놈.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언가의 무사는 긴장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게, 마지막에 동로 쪽에서 북상한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동로에서 북상하고 있단 말이지……!”

언진명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급보입니다!”

“음? 무슨 일인가?”

“서로 쪽에서 전령입니다. 지금 만적을 발견했는데, 하남으로 들어서는 관문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통과했다고 합니다. 중무장한 병사들 백여 명이 덤볐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고…….”

“뭐, 뭐야?”

도지휘사사는 경악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천 병력이 길목을 구석구석 차단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벌써 관문까지 도착했다는 건가!”

“그, 그건 저도 잘…….”

“모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냐! 동로에 나타났다가, 서로에 나타났다가…… 도깨비가 따로 없군. 이러다간 정말로 놓칠 것 같지 않은가!”

도지휘사사는 앞에 놓인 탁자를 쾅! 하고 후려친 뒤 옆에 있는 도사와 언진명을 노려보았다.

“하남을 지나면 길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잡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오. 만약 모든 게 잘못되어서 만적이 북경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어찌 되는 줄 아시오?”

도지휘사사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역모를 막지 못한 죄. 일만의 병력으로 한 사람을 막지 못했으니 나는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건 두 사람이라도 다르지 않소!”

“그, 그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도사는 깜짝 놀라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고, 언진명은 오히려 더욱 큰 분노로 뜨거운 눈빛이 되어 있었다.

“감히, 우리 영랑대 백여 명과 제 아들을 죽인 놈!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도지휘사사!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따로 세가의 전력을 이끌고 만적을 쫓을 것입니다.”

언진명이 포권을 취하자, 도지휘사사도 마주 포권을 했다.

“꼭 부탁하겠소. 본인은 이대로 일만 병력을 이끌고 북상할 것이오. 하남 땅을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만적을 꼭 붙잡을 것이오.”

“연락은 계속 취하겠습니다.”

“알겠소. 무운을 빌겠소.”

언진명은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도사 또한 지부 대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도움을 청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다.

만약 남궁연이 있었다면 세 사람을 어떻게든 다시 한 곳에 모아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어 만적을 쫓았을 테지만, 지금의 세 사람은 결국 뿔뿔이 흩어져 힘을 분산시키고 말았다.

도지휘사사는 도지휘사사대로.

도사와 언진명은 또한 그들대로.

결국 제각각 쫓는 포위망은 중간에 겹쳐지며 허점을 드러냈고, 만적은 그 작은 허점을 놓치지 않은 채 유유히 포위망을 벗어나 버렸다.

그 와중에 만적 반야혼은 하남에서 진주 언가의 가주 언진명과 마주쳐 불과 이십 합 만에 목을 부러뜨리고, 함께 있던 영랑대 이백 명의 추적을 가뿐하게 뿌리쳤다.

게다가 야음을 틈타 집요하게 앞을 가로막는 도지휘사사의 침실로 찾아가 그의 목을 부러뜨려 버린 일은 앞으로 근 오십 년간 회자될 전설로 남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열흘 뒤, 만적 반야혼은 북경에 입성해 황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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