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章 ― 만적지로(萬敵之路)(2)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경 수비대, 황실 근처에서 주둔 중이던 팔기군(八旗軍), 금의위, 동창, 수황위사(守皇衛士)까지 넘어서 자금성의 담장을 지나 보니 들은 첫마디가 그거였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반야혼은 얼굴이 허여멀건한 서생을 노려보았다.
“개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뭐?”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반야혼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잠깐, 이것 봐라?’
보통 만적이 노려보면 사람들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가슴을 붙잡고 쓰러지거나 숨을 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이 만적 반야혼.
만 명의 생명을 죽이고 사신(死神)의 경지에 오른 그의 능력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서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한 눈빛으로 반야혼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바로 목을 부러뜨리면 어떻게 될까?’
반야혼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 보았다.
눈앞에 있는 서생은 척 봐도 평생 책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을 듯한 가느다란 체구였다.
입고 있는 흰색 장포는 나뭇가지에 사람 옷을 입혀 놓은 것마냥 품이 남았고, 옷깃 위로 드러난 목은 아직 덜 자란 나뭇가지마냥 가녀린 느낌이다.
‘이상해…….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것 간단할 텐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째서지?’
단순한 변덕?
아니, 그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의무감이랄까.
본능의 속삭임 같은 것을 느꼈다.
“이해를 하신 것 같군요. 그럼 따라오십시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해하다니. 무엇을?”
“아시잖습니까.”
서생은 반야혼의 속을 꿰뚫어 보듯,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기품 있는 몸놀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해하다니 뭐를? 서생이 나를 기다렸다는 걸? 아니면, 설마 내가 공격을 안 하고 싶다고 느낀 것을?’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서생에 대한 의문이 늘어 갔다.
“이봐.”
“말씀하십시오.”
“정체가 뭐야? 너.”
서생은 반야혼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성은 백(白) 자는 택(擇), 하지만 저를 아는 사람들은 주로 ‘해태’라고 부릅니다.”
“해태? 그, 뿔 있고 사자 모양의? 신화에 나오는?”
“예, 그 해태입니다.”
그 뒤로 반야혼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해태 또한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사이, 두 사람은 황제가 거하는 대전(大殿)에 도달하고 있었다.
반야혼의 귀가 쫑긋거리며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다섯, 여섯…… 천정에만 여덟 명. 바닥에 셋. 문 너머에서 지켜보는 게 열 명. 완전 복마전이군. 허튼짓을 했다간 곧바로 달려들겠어.’
과연 황실이라고 해야 할까.
만만치 않은 놈들이 가득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기한 점이 있었는데.
겉보기엔 그저 문사 차림의 서생일 뿐인 해태건만, 그가 걸어가면 아무리 고관대작의 관리라도, 심지어 황제를 직접 모시는 시중들조차 길을 비키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자, 도착했습니다.”
스으윽―
해태는 안내는 끝났다는 듯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고, 반야혼은 드디어 그가 지금껏 ‘적’이라고 들어온 황실의 수괴를 만날 수 있었다.
명 태종(太宗).
태조 주원장의 손자인 혜제(惠帝)를 몰아낸 비정한 왕이면서, 북평을 북경으로 바꾸고 상업적으로 발달한 강남과 연결해 재정적으로 안정을 시켰으며, 북으로는 흑룡강(黑龍江) 유역, 남으로는 운남(雲南)과 안남(安南)까지 정복한 뛰어난 군주다.
반야혼은 황제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가 잠시 몸담았던 역모파의 사람들처럼 반란을 일으킨 부정한 왕이라던가, 밀정 정치를 시행하는 독재자라던가 하면서 분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존심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만적 반야혼.
일만의 군사와 상대하다 붙잡혔으나, 다시 탈옥하여 끝까지 황제를 살해하다.
반야혼은 이런 이야기가 역사에 새겨지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이야기는 질색이다. 머리 아픈 정치 관계도 상관없다. 그저 그가 들은 대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황제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 듣던 대로 무엄한 놈이로구나.”
용석(龍席) 위의 황제가 뭐라고 하든 반야혼이 알 바 아니다.
반야혼은 오체투지는커녕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황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황제는 커다란 의자의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쯤 되었을까.
생각보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장수 같은 느낌의 황제였다.
특히 어깨와 가슴의 최고급 곤룡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양.
코밑의 수염과 눈썹은 숯을 칠해 놓은 것처럼 짙었으며, 두 눈은 그 안에서 빛을 뿜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렬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한심한 외모는 아니로군.”
반야혼은 거침없이 감상을 내뱉었다.
“호오, 그것은 짐에 대한 너의 감상인가?”
“그렇다.”
“한심하지 않게 느낀 이유는?”
“강해 보이니까. 눈빛이 만만치 않으니까.”
황제는 자세를 바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해 보인다라……. 재미있군. 그럼 한번 말해 보아라. 그럼 저 서생은 어떻게 보이지?”
반야혼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왠지 공격하기가 싫다. 상대하고 싶지 않아.”
“호오?”
황제는 이제 만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와 반야혼으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반야혼이라면 한 걸음에 공격을 가할 수도 있는 거리.
하지만 황제는 두려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황제의 눈빛과 송곳니를 드러낸 야생동물마냥 적의를 보이는 반야혼의 눈빛이 마주쳤다.
“흠.”
황제는 짧은 탄성과 함께 옆에 있는 해태를 향해 말했다.
“해태.”
“예, 폐하.”
“역시, 죽이기 싫어졌다. 이 녀석을 살릴 수 있는 방도는 없나?”
그 말엔 반야혼도 놀랐고, 해태도 놀랐다.
“폐하, 그건…….”
해태는 무표정한 얼굴 위로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명 황실의 전설적인 존재. 항상 황제의 곁에서 현명한 조언을 해 주는 해태라면 이런 때에도 답을 해 주어야지?”
결국 해태는 황제의 집요한 시선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 왜? 문제가 있나?”
“일단, 백시(百矢)를 물리겠습니다.”
백(百) 개의 날카로운 화살(矢).
황제의 태사의 뒤쪽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백 명의 비밀 궁사들이 해태의 손짓에 차분히 물러났다.
그들은 벽 뒤에 있었기에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으나, 반야혼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잘 몰랐지만, 황제가 다섯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땐 그들이 내뿜는 살기에 온몸의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던 것이다.
백시가 떠나가자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수호칠영(守護七影)은…….”
“그들은 괜찮아. 내가 원하는 것을 망칠 사람들이 아니다.”
“예, 알겠습니다.”
황제의 머리 위와 발밑에 있는 일곱 명의 암인(暗人)들은 그대로 남았다.
해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세상엔 저자를 죽였다고 공표하시고,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 키우시면 됩니다.”
“자금성 안에 들어온 것을 목격한 자가 많을 텐데?”
“손은 좀 써야겠으나, 가짜 시체만 하나 구하면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 그럼 됐군.”
“문제는 저자의 생각입니다만…….”
황제와 해태의 시선이 반야혼에게 향했다.
반야혼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어 주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난 이곳에 황제를 죽이러 온 거다.”
거침없는 말투에, 진심으로 살기까지 내비쳤다. 그러자 울렁― 하고 천정과 발밑에서 보이지 않는 살기가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솟아오를 듯한 분위기였다.
쿵!
“내가 나서라 할 때까지 나서지 말거라.”
하나, 수호칠영의 살기는 황제의 단호한 한마디에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한 가지 물어보지. 짐을 죽이려는 이유는?”
“없어.”
“이유가 없는데, 짐을 죽이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니까. 끝까지 완수해야 돼.”
황제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임무라……. 임무라면 그놈이 내린 임무겠지? 이름이 유근이었던가?”
황제는 해태를 향해 시선으로 물었다.
“예, 맞습니다. 폐하, 귀주 목 출신의 역적 유근입니다.”
“그놈, 죽지 않았던가?”
“십 일 전에 파강장군 원회가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본거지를 습격하여 유근과 그를 따르는 부장 스무 명의 목을 쳤습니다. 유근의 구족(九族)이 멸했고, 이미 사후 처리도 다 끝난 상황입니다.”
“유근이 병법(兵法)에 뛰어나 토벌에 애를 먹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끝낸 듯 보이는군.”
“예, 폐하. 파강장군 원회는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자로, 공손 대장군과 함께 북로전쟁에 종군했었으며, 현재 비어 있는 북(北) 대장군 자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재입니다.”
“알고 있다. 나도 자주 들어 본 이름이야. 형이 황실 시랑인 원찬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원회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저 ‘북로전쟁’이라는 말에 뭔가를 떠올리듯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반야혼을 응시했다.
“들었듯이, 너에게 임무를 내린 유근은 이미 죽었다. 그래도 계속 임무를 수행할 테냐?”
“……이미 내린 임무는 임무야.”
“하핫! 더욱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명심해라. 이미 유근도 죽어 버렸으니 너는 임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실패해 버리면 그 임무는 끝난 거다. 그렇지?”
반야혼은 황제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 황제는 죽는다. 근데 뭘 수행하고, 뭘 실패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군. 쉽게 말해 주지. 나를 죽이려고 덤비란 말이다. 그런데 못 쓰러뜨리고 오히려 나한테 쓰러지면 임무는 ‘실패’다. 그렇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뒤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속에 입은 것은 금빛의 얇은 홑옷.
탄탄하고 건장한 상체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옷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해태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반야혼 또한 갑작스레 벌어지는 일에 어리둥절했다.
“황제, 이건 나를 죽여 달라는 뜻인가? 내가 싸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큭?!”
순간,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반야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시야가 반전하며 눈앞이 번쩍였다.
반야혼은 중간 과정을 전혀 보지 못했다.
분명히 다섯 걸음이 떨어져 있던 황제가 갑자기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눈앞에는 주먹이 얼굴만 하게 커져 있었다. 그 뒤엔 몸이 공중에 붕 떠 있었다.
파라라락―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만약 반야혼이 재빨리 몸을 한 바퀴 돌려 고양이처럼 네 발로 바닥에 착지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통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반야혼은 황제의 주먹의 위력에 전율하며 부러진 코뼈를 손으로 끼워 맞췄다.
“크핫! 아주 제법……!”
꽈아아앙―!
반야혼은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가 진각(震脚)을 내딛는 순간, 대전(大殿)의 바닥이 당장이라도 푹 꺼질 것처럼 울렁거렸던 것이다.
황제는 거기서 진각을 딛지 않은 왼쪽 발로 곧바로 등각(登脚)을 차올렸다.
황실비전(皇室秘傳).
제왕군림보(帝王君臨步)에 이은 승룡각(乘龍脚)이다.
진각. 전사. 발경.
세 가지가 모두 완벽하게 조화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에, 반야혼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크윽……!”
반야혼은 등각을 막은 양팔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공중에서 균형을 되찾았다.
위로 무려 이 장이나 떠올랐다.
굉장한 힘.
무지막지한 파괴력.
반야혼이 아닌 보통 사람이 이 일격을 맞았다면 지금쯤 몸의 일부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큭…… 재미있어! 재미있다!”
반야혼은 의외로 막강한 황제의 힘에 즐거워하며, 궁(宮)의 천정을 발로 박차고 아래쪽으로 쏘아졌다.
마치 먹이를 노리고 급강하하는 독수리처럼 괴의한 악력을 가진 양손을 양쪽으로 벌린 채 황제를 향해 쏘아졌다.
터엉!
“흐읍……!”
어깨를 뽑아 버릴 생각으로 내뻗은 양손은 황제가 가볍게 들어 올린 양손에 막혔다.
손바닥과 손바닥, 손가락과 손가락이 깍지를 끼고 얽힌 상태.
마치 황소가 힘겨루기를 하듯,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본 채 서로의 이마를 꽝! 하고 부딪쳤다.
반야혼이 전력을 다해 힘을 써 보았으나, 황제는 약간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을 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만약 항주에서 만났던 장기린과 싸웠다면 이런 식으로 되었을까?
어쨌든 반야혼으로서는 처음으로 만난 ‘밀리지 않는 상대’였다.
황제는 손깍지를 낀 그 상태로 숨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짐은 강해 보이고, 해태는 싸우고 싶지 않다, 라고 했었지? 그건 야생의 본능인지 모르겠으나 정확한 판단이었다. 짐은 강하다. 그리고 해태는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지.”
황제의 눈이 깊고 깊은 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야혼은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마치 자신의 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짐은 전쟁을 좋아한다. 전장에 나가서 주먹을 휘두르며 날뛰는 것을 즐기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적의 군대를 꺾고 내 땅으로 만드는 정복감도 좋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없지. 그저 내가 그걸 즐길 뿐이다.”
“그 말을…… 왜…… 지금…….”
“그러니 너를 여기서 짐이 맨손으로 때려눕히고 정복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에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어때? 무슨 말이지 알아듣겠나?”
으득. 으득.
양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떨리는 가운데, 황제는 갑자기 양팔의 힘을 쭉 빼면서 반야혼의 팔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어어……?”
휙 하니 끌려오며 중심이 흐트러지는 반야혼.
반야혼이 균형을 잡으려는 순간, 황제는 이번엔 반야혼 쪽으로 팔을 밀어 다시 한 번 균형을 무너뜨렸다.
유(流)의 공(功).
처음엔 짐승과도 같은 힘겨루기였으나, 이번엔 상승무공의 요결을 응용한 흐름의 유술(流術)이다.
휘청―
반야혼의 다리가 갑작스런 중심 이동을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꼬였다.
“야수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게 복종하지. 너도 짐에게 복종하라, 반야혼.”
마지막으로 황제가 팔을 휙 잡아당기는 순간, 결국 반야혼은 중심이 무너지며 앞쪽으로 끌려나왔다.
황제는 곧바로 손깍지를 풀어 버리며, 몸의 중심을 뒤로 옮기는 반보(半步). 그러고는 무릎으로 반야혼의 명치를 올려 찬 뒤, 팔꿈치를 휘둘러 턱을 위로 후려쳤다.
빠각!
단순하고 명쾌한 타격에 반야혼의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격하게 뒤틀렸다.
물론 반야혼은 그걸로 쓰러지지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유연성으로 타격을 최소화하며 충격을 버텨 냈으나…… 황제는 직접 전쟁을 찾아다닐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전투광(戰鬪狂)이다.
그는 반야혼이 휘청거리는 잠깐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발목을 걷어차서 넘어뜨린 뒤, 몸 위에 올라타 어디서 꺼낸 건지 단도를 목에 들이댔다.
스릉―
황금색 용이 손잡이에 양각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단검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닿은 목에서 핏물이 한 방울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자, 지금 너는 한 번 죽었다.”
반야혼은 그 단검의 칼날을 우그러뜨릴 수도 있었으나, 그냥 힘을 풀고 바닥에 누워 버렸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느낌.
마치 보이지 않던 속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반야혼은 자신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큭, 소용없는 일이지.’
칼날을 우그러뜨릴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황제도 단검으로 그의 목을 그대로 그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굳이 칼날을 멈추고 묻고 있지 않은가.
“큭, 큭큭큭…… 큭큭……!”
반야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는 그가 웃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듯 말없이 반야혼의 목에서 단검을 떼어 냈다.
“한 사람에게 진 것은 처음이었나? 유근에게 잡혔을 때는 백 명의 정예 병사, 얼마 전엔 만 명의 병사에 포위되어서 붙잡혔다지?”
반야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무는 실패했다. 돌아갈 주인도 없지. 이제 너는 어떻게 살 거냐?”
“……나에게, 선택권이 있나?”
“물론이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은 짐의 것이나, 짐은 관대하니 강제하진 않을 것이다. 네가 자연에 묻혀 살겠다면 그렇게 해 주지.”
반야혼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황제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약 자연에 묻혀 살지 않겠다면?”
황제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짐을 따르거나, 아니면 죽거나.”
“핫, 거참 대단히 관대하구먼.”
반야혼은 신랄한 말투로 말했으나, 딱히 황제에게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반야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난 원래 존댓말이라는 걸 못 써. 사람이 아니니까. 유근에게도 말투는 바꾸지 않았어.”
괜스레 몸을 삐딱하게 세운 채 시선은 멀리 있는 다른 곳을 바라봤다.
마치 애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지만, 그게 반야혼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경이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황제는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해태가 다시 곤룡포를 입혀 주는 동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아니다라…….”
곤룡포를 다 갖춰 입은 뒤, 황제는 밤안개처럼 조용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모두 짐의 것이다. 나를 위해 살아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마.”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뭐지?”
“싸움. 목숨이 걸려 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치열한 싸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반야혼의 얼굴은 어느새 야수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뭔가 속박에서 풀려난 듯한, 좀 더 자유롭고 난폭한 느낌.
황제는 그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이 짐과 같군.”
“그래?”
“유근이 그랬듯이 짐을 음해하려는 세력은 아직 도처에 숨어 있다. 하지만 짐은 너를 정쟁의 도구로 쓰진 않을 것이다.”
유근의 이야기가 나올 때 잠시 안색이 어두워졌던 반야혼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장이다. 아직 명 제국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짐은 너를 전장으로 데려가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
“그곳에서 마음껏 날뛰어라. 짐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다.”
반야혼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군과 신하.
주인과 짐승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
반야혼은 급하게 결정을 내렸지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으로 황제를 본 순간.
그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속을 꿰뚫어 보는 눈빛을 보는 순간, 이미 반야혼은 황제에게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묘지기 노인이 죽고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처럼, 반야혼은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이 끝나고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어딘가에서 살아간다면 장기린과 같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야혼은 새삼스런 감상에 젖어 조용히 중얼거렸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하지만 황제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잠깐! 방금 뭐라고 했느냐?”
“어……?”
“방금 장기린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반야혼은 조금 당황한 채 대답했다.
“그랬는데……?”
긍정의 대답을 하자, 황제는 물론이고 옆에 있는 해태까지 눈에 띄게 동요한 기색이었다.
“그 장기린에 대해 설명해 봐라.”
“설명……? 뭐, 나랑 비슷하고, 꽤 강해 보였다는 정도? 왜, 황제도 아는 녀석인가?”
“알다마다. 어디서 봤나? 기린은 지금 어디에 있지?”
반야혼은 황제가 장기린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으나, 잠시 생각해 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야혼 자신이 동류(同類)라고 느꼈던 인물이다.
그런 범상치 않은 인물이 과거에 대단한 업적을 쌓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걸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짧은 만남이었지만, 친구로서, 혈족으로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던 사이였다.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해 주려고 하는군.”
반야혼이 망설이는 것을 알아챈 황제가 깊은 눈동자로 그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과연 적룡기마대주다. 짐승 같은 자도 동료로 만들어 진심으로 아끼게 만들다니. 하지만 반야혼, 걱정하지 마라. 짐은 내가 아끼던 신하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을 뿐이다.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다.”
“…….”
“아무런 소식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신하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장기린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겠나?”
반야혼은 황제의 진실된 목소리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항주……. 거기서 객잔을 운영하고 있었어.”
“……객잔? 객잔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황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랬군! 그래서 네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였군!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모양이야!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황제의 웃음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한참 뒤, 다시 태사의로 돌아가 용석(龍席)에 앉은 황제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반야혼, 너도 함께 가자.”
“어……?”
“폐하! 설마,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해태, 백택은 절대로 안 된다며 황제를 말리려고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강경한 태도로 암행(暗行)으로 항주에 다녀올 것을 밀어붙였다.
“자, 그럼 가는 거다, 항주에. 장 대주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겠군.”
황제의 두 눈은 똑바로 남쪽의 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해태.”
“예, 폐하.”
“짐이 그동안 기린을 찾아 달라 말했었는데, 어째서 찾아 주지 않았던 것이지? 지금까진 그저 ‘모른다’라고만 일관하지 않았나?”
백택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지고한 존재.
비상한 머리로 백택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너도, 기린을 지켜 주려고 했던 거군. 떠나기 전에 부탁이라도 했던 건가?”
“……그렇습니다.”
백택은 순순히 긍정했다.
“기린은 평범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피가 지겹고,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벼운 게 싫다고 하더군요.”
“어리광이야. 평범한 삶이라니. 밥을 굶어 가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민초들은 어떻게든 전쟁터에 나갈 병사가 되어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대장군이 될 수도 있는 직위를 버리고 고작 그런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기린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높은 계단 위까지 거의 다 올라가 놓고, 기껏 그 끝에서 다시 내려간단 말인가. 기린은…… 너처럼 황실에서 직접 이름을 지어 준 명 제국의 신수(神獸)다. 그런 식으로 객잔 따위나 하면서 사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아.”
기린. 해태.
그 이름들은 황실과의 밀접한 인연을 상징하고 있었다.
“세상엔…… 이치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폐하.”
“짐은 이해할 수 없다.”
황제는 의자에 앉은 채 불만스럽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만인을 다스리는 군주라서 그런 것일까.
그의 얼굴엔 여러 가지 기질이 섞여 있다.
어떤 때는 냉혹한 장수로, 어떤 때는 장난스런 어린아이로, 그리고 어떤 때는 난폭한 폭군처럼.
훗날 영락제라 불리게 되는 철혈의 황제.
태종은 그런 인물이었다.
“기린에 관한 것은 항주에 가서 짐의 눈으로 직접 볼 것이고, 그 뒤에 모든 것을 판단하겠다. 만약 그의 지금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짐은 강제로라도 기린을 다시 황실로 끌고 올 것이야.”
백택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황제의 말을 그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드넓은 자금성의 한축에선 앞으로 항주를 뒤흔들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