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九章 ― 승부준비(勝負準備)
“초청승부(招請勝負)라고요……?”
장기린은 움찔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상대의 눈을 피해 본 적이 없건만, 이상하게도 휘연이 화를 내면 눈을 피하게 되어 버린다.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잖아.’
이유는 간단했다.
말주변이 부족한 장기린이 말싸움에서 이길 리는 없고, 그렇다고 버럭 화를 내자니 휘연과 눈이 마주치면 들끓어 오르던 화가 순풍에 꽃잎이 날리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웃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할 정도이니만큼, 휘연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휘연은 장기린에게 있어서 무적이다.
“객주님.”
휘연은 장기린이 시선을 돌렸음에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선을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으음…….”
“객주님, 저를 똑바로 보세요.”
새하얀 손이 다가와 장기린의 양 볼을 감쌌다.
살짝 차가운 듯하면서도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숨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휘연이 코앞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얗다.’
우선 드는 생각은 휘연의 피부가 도자기처럼 하얗다는 것. 그리고 두 눈이 호수만큼 깊고 맑다는 점이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객주님!”
“……어?”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해 주세요. 왜 하필 초청승부를 내자고 하신 거예요?”
“그게…….”
장기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운찬을 구하러 청풍객잔에 쳐들어갔던 날.
청풍객잔을 지키는 장흠파와 그 두목인 장흠을 때려눕힌 뒤, 장기린은 사태를 무난히 해결하기 위해 청풍객잔의 객주인 방태풍과 앞으로 영원히 풍운객잔에게서 손을 떼겠다는 문서를 걸고 초청승부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만약 그 승부에서 지면, 우린 금선로에서 문을 닫고 장사를 접어야 해요. 항주에선 꽤 유명한 상식인데…… 객주님은 모르셨죠?”
“문을 닫는다고……?”
“네.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졌다고 고개를 숙이는 셈이니까요. 말하자면, 우리 간판을 내걸고 싸우는 거예요. 이긴 쪽은 진 쪽의 간판을 부수거나 가져가 버리죠.”
장기린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이제야 왜 방태풍이 그렇게 히죽히죽 웃었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서 오히려 풍운객잔을 무너뜨릴 일발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런 거였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장기린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설 것 같은 장기린.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에, 장기린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두가 굳어 버렸다.
“그러게!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객주도 쓰러뜨려 버리고 오는 게 좋았어요! 차라리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겁을 주고 오셨어야죠!”
객잔 안의 공기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야, 방금 휘연 누님이 말씀하신 거 맞지?”
“맞아요. 침모님이 말씀하셨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나라가 망할 징조인가? 그래! 그런 거야! 이 나라는 망하기 직전의 순간에 와 있어!”
“침모님이 물들고 있어요! 이 금선로의 어둠에 물들고 있어요!”
호들갑을 떠는 풍운객잔의 ‘하인’ 남궁휴와 ‘점소이’ 아칠, 아팔 형제에게 휘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시끄러워요.”
그 한마디에, 모두 시선을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어.”
“휴우. 네, 그랬겠죠. 대신 생각은 있었겠죠?”
“생각?”
“승부에서 이길 방법에 대한 생각이요.”
설마 그런 것조차 없었다면 정말로 가만히 안 두겠다는 눈빛이다.
장기린은 속으로 움찔하였으나, 그래도 생각해 두었던 것이 있기에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 생각해 둔 방법은 있어.”
“초청해 올 만한 명사(名師)를 알고 계시나요?”
“명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명…….”
장기린이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풍운객잔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이봐! 장 객주! 안에 있어?!”
마치 제집인 양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사내.
초패왕 항우가 부럽지 않을 거구에, 턱부터 귀밑까지 밤송이같이 삐죽삐죽하게 나 있는 수염과 퉁방울처럼 커다란 눈은 장익덕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이곳 항주 금선로의 오대객잔 중 하나인 항주일미(杭州一味) 청월루의 파락호 대장, 철우였다.
“청풍객잔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왔다며! 다 들었다! 게다가 초청승부까지 벌이기로 했다던데 사실이야?”
우렁찬 목소리가 객잔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실이야.”
“도대체 왜? 우린 연락만 오면 바로 쳐들어가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홍매가 되돌아와서 깜짝 놀랐다고! 아무리 물어봐도 홍매는 아는 게 별로 없었고 말이야.”
“그게…….”
딱히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인지라 장기린은 그동안의 사정을 철우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청월루의 침모였던 홍매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소교가 얼마나 사갈 같은 여인이었는지.
그녀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배신했으며, 어떻게 운찬을 죽이려고 했는지를 설명하자, 철우는 격분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허공으로 주먹질을 해 댔다.
“뭐, 그런 망종 같은 계집이 다 있어!”
“하지만 결국 장흠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소.”
“그건 자업자득이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침모랑 이곳의 숙수 아가한테 입힌 상처는 치유가 되지 않아!”
철우는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일어선 채로 계속해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장기린은 자리에 앉은 채 그런 철우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철우는 이런 암흑가의 인물이면서도 굉장히 정의롭다.
남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알고, 남의 상처에 진심으로 분노도 해 준다.
그건 암흑가의 인물로서 드문 일이다.
뒷골목이란 곳은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것이 일상인 비정한 세계.
그런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자들은 인성(人性)이 올바르게 자라긴 힘들기에, 더더욱 철우처럼 정의감(正義感)을 가진 인물을 찾기가 힘든 법이었다.
그런데도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평소에 철우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진짜 모습은 속에 감춰 둔 채 파락호로서의 철우를 연기하고 있는 듯하다고나 할까.
“크흠, 내가 화내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장기린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는지, 철우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니, 이상하지 않소. 좋은 일이지.”
“크흠! 뭐, 그렇다면 됐고. 그보다 지금 숙수 아가는 어디에 있어? 잘 버텨 내고 있나?”
“계속 멍하니 누워 있긴 하지만, 생각보단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소.”
운찬은 장기린이 돌아온 뒤에 반나절쯤 지나서야 객잔으로 돌아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초점 없는 눈빛을 한 채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론 계속해서 넋이 나가 버린 상태다.
장기린이나 휘연이 말을 걸어 보아도 무감각하게 대답만 할 뿐, 능동적으로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대답을 하는 정도면 금방 돌아오겠지.”
“그렇다면 좋겠지만…….”
확답을 할 수 없는 것은, 여인과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장기린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잠시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휘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마실 찻물을 내어 가지고 왔다.
따끈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수국차(水菊茶)였다.
철우는 자리에 앉으며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그렇고, 초청승부 말인데. 그거 잘 생각하고 한 건가? 대책이 있는 거야?”
“대책은…… 있소.”
안 그래도 철우가 오기 전에 휘연에게 말하려던 화제였다.
객잔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장기린에게 모여들었다.
“어떤 대책인데?”
“친구가 있소. 꽤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인데…… 지금 관직에 올라 있을 것이오.”
장기린이 가볍게 내뱉은 말은 꽤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친구……?”
“세상에, 객주님한테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어!”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외로운 늑대 아니었어?”
“우와! 충격!”
“친한 사람은 우리뿐인 줄 알았는데!”
장기린의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런 종류였단 말인가.
“너희…….”
목소리가 낮고 음산하게 깔리자, 남궁휴와 아칠, 아팔 형제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암! 우리 객주님, ‘의외로’ 사교성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럼요! 객주님도 ‘의외로’ 섬세하시니 주변에서 따를 거예요.”
“다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의외로’ 다정한 면이 가장 큰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가?”
“그렇죠!”
장기린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알았으니, 그 의외로 타령 좀 그만해.”
철우는 어느새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크핫! 역시 이 객잔은 재밌다니까! 아가들이 자유로워서 재미있어.”
한참이나 클클거리며 웃던 철우는 아직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로 물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디에서 관직에 있는데? 무슨 장군이라든가 그런 거 아냐?”
“한림원에 있소.”
“한림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하, 한림원이라면 그거잖아? 과거에서 급제해야만 들어가는.”
“엄청 똑똑한 사람들만 가는 곳 아냐?”
“어릴 적부터 평생 글공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못 들어간다고 하던데? 엄청난 천재 아니면 힘들다고…….”
“근데, 그런 곳에 객주님의 친한 친구가 있다는 거야?”
지그시…….
모두의 눈길이 장기린에게 따갑게 꽂혔다.
“저 야수 같은 객주님이랑.”
“똑똑한 천재가 친구……?
“……안 어울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한림원 학사면 그거 아닌가요? 엄청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한?”
“그렇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객주님이랑 친해졌을까?”
“야수 같은 객주님이랑.”
“그렇죠. 짐승 같은 객주님이랑.”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이야기의 내용이 심해졌다.
장기린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내가 여기 있는 것 안 보이냐?”
그 말에 다들 다시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파핫!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철우는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손뼉을 쳤다.
“한림원은 명 제국의 실질적인 재상인 내각대학사가 배출되는 곳이지. 하지만 그건 ‘실질적인’이고, 실제론 한림원의 수장인 학사(學士)도 정오품이라고. 관직으론 높은 게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가?”
“그렇다니까. 게다가 장 객주의 친구면 많아 봤자 불혹(不惑:40세)도 안 됐을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관직도 높지 않을 것 같은데?”
장기린은 의외로 철우가 자세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에 봤을 때 관직이 수찬(修撰)인가 그랬었는데…….”
“수찬?”
철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수찬이면, 한림원 팔 관직(八官職) 중에 밑에서 두 번째인데. 종육품(六品)인가 그럴걸?”
“으음…….”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지?”
“삼 년 전이었소.”
철우는 난감한 듯 입을 우물거렸다.
“삼 년이면 올라 봤자 한 품계 정도겠는데…….”
“품계가 중요한가?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 좋기로는 유명한 녀석이라서 학식이나 말싸움 같은 걸론 절대로 안 질 텐데.”
장기린은 그쪽으론 자신 있었다.
열여섯쯤에 전장에서 처음 만나 십 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온 사이다.
그 친구는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섭우생도 그 녀석한테는 한 수 밀린다고 했었지.’
그런데 자신이 있는 장기린과는 달리, 철우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말싸움……?”
철우는 그러고는 뭔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이마를 탁! 때렸다.
“그렇군. 초청승부가 뭔지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거였어!”
“어……?”
“이봐, 장 객주. 말해 봐. 초청승부가 뭐라고 알고 있어?”
“뭐냐니.”
장기린은 방태풍에게 들은 대로 이야기를 꺼냈다.
“음. 금선로의 손님들 사이에서 최근에 유행하는 것으로, 연회에 친구들을 부르고, 대화와 문필을 통해 어느 쪽이 합당하고 정당한지를 승부하는 거라고…… 그렇게 들었는데?”
“역시.”
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철우뿐만 아니라, 옆의 휘연이나 남궁휴도 어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객주님, 초청승부는 그런 게 아니에요.”
휘연이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초청승부는 손님들끼리 말싸움을 해서 승자를 가리는 게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손님으로 데리고 오는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더 윗사람인가, 같은 걸로 승부를 내는 거예요.”
장기린의 얼굴이 멍해졌다.
“잠깐, 그럼 결국 권력 겨루기라는 거야?”
“네, 그래요.”
“그런……!”
장기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방태풍이 그에게 또 다른 거짓말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청풍객잔을 조금 아는데, 그곳 객주가 자신만만하게 부를 만한 손님이 누굴지는 대충 상상이 가. 만약 그 손님이 온다면…… 미안하지만 한림원 대학사 정도는 불러와야 상대할 수 있을걸?”
“그 손님이 대체 누구기에?”
“항주의 지부 대인. 이름은 문표, 조만간 삼공의 직위에 오를 정계의 거물이지.”
철우는 난감한 얼굴로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사람을 상대할 만한 인물은 중화 전체에 몇 없어. 한림원 대학사, 병부의 최고 권위자인 도독(都督), 또는 도찰원의 도어사(都御司) 정도일까?”
“으음…….”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중에 누군가를 불러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철우가 이야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다.
대학사, 도독, 도어사.
한마디로 명 제국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물들뿐.
‘청풍객잔의 그 돼지는 어떻게 지부 대인과 친분을 쌓은 거지?’
의외의 인맥.
외모와는 전혀 다른 수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곤란하네요…….”
“방법이 없네.”
휘연과 남궁휴도 좀처럼 좋은 생각이 안 나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뭐,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냐.”
“어떻게?”
“지부 대인이 청풍객잔의 뒤를 봐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풍객잔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초청승부에 참여해 줄 만큼 사람이 좋진 않다는 거지. 문표가 승부에 참여하는 걸 거절할 수도 있어.”
“아, 그럼……!”
장기린은 지부 대인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눈앞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아, 물론 지부 대인이 안 온다고 해도 풍운객잔으로서는 이기기 힘들겠지만.”
“어?”
“청풍객잔은 그래 봬도 오대객잔 중에 하나야. 특히 비밀을 잘 지키기로 유명해서 정계의 손님들이 많지. 꼭 지부 대인이 아니더라도 고위 관료들은 발에 채일 만큼 잘 알고 있을 거야.”
“…….”
“그중에 아무나 불러도 풍운객잔으로서는 이길 수 없다고.”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남궁휴와 아칠, 아팔 형제의 분위기는 초상이라도 치른 듯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걸로 풍운객잔은 끝인 건가…….”
“저희 쫓겨나나요?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가요?”
“풍운객잔이 사라지다니, 그런 건 싫어요!”
아칠과 아팔이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잠깐!”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어.”
“객주님……?”
“중요한 건, 청풍객잔이 불러올 사람보다 관직이 높아야 한다는 건가?”
휘연이 그 부분에서 고개를 저었다.
“꼭 관직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명성이 누가 더 높으냐 하는 게 더 중요해요. 예를 들어 뛰어난 예인(藝人)이나, 천하에 이름 높은 문사(文士)나 무인(武人)이라면 웬만한 관직보다 더 높게 인정해 주죠.”
“인정? 누가?”
“초청승부에 대한 결과는 그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어느 쪽 사람을 더 인정해 주느냐 하는 걸로 결정되니까요. 그날 참석한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이름이라면 되는 거예요.”
즉,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이름을 날린 사람을 데려오면 된다는 뜻이다.
장기린은 그가 불러올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저쪽에서 데려온 손님과 우리 쪽 손님의 명성이 비슷하다면? 그땐 어떻게 승부를 내는 거지?”
“그땐…….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초청승부를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휘연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여인이다.
휘연이 모른다고 하자, 옆에 있던 철우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두 사람의 설전(舌戰)으로 결판이 나지. 그리고 보통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게 되면 끝이 나게 되어 있어.”
“패배 선언이라…… 결국 두 사람의 명성이 비등비등할 경우엔 말싸움으로 승부를 낸다는 소린가?”
“그래, 그거지.”
장기린은 이제 초청승부에 대한 것을 다 이해했으나, 마땅한 방법은 아무래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야기대로라면 지금 장기린의 친구를 부른다고 해도 승부에선 이길 수 없다는 게 거의 확실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아까 희망이 있다고 했던 거지?”
철우는 수염이 뾰족뾰족하게 나 있는 얼굴로 씩 웃었다.
“청풍객잔에서 어떤 손님을 부르든 간에 풍운객잔은 이기기 힘들다. 그렇지?”
“그렇지.”
“그렇다면, 아예 그 초청승부를 벌이기 전에 청풍객잔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되잖아?”
의외의 말에 객잔 안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흠. 이봐들, 들어 보라고. 홍매가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우린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어. 안 그래도 청풍객잔에선 지금껏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일은 그 울분을 풀 이유를 만들어 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철우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살기 충만한 난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나?”
“아암! 원수나 다름없지. 예비 침모였던 소교가 일을 벌인 것도 장흠파가 부추긴 거였다고. 게다가 최근 뒷세계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청풍객잔에서 우릴 치려고 낭인들을 모은다던데,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먼저 쳐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장기린은 철우가 한 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즉, 그 말은 조만간 청월루에서 청풍객잔을 칠 거란 이야기군.”
“그래, 그 말이야. 물론 이건 비밀이야. 절대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철우는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채 진지한 눈빛으로 주변의 모두를 한 번씩 응시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 없이 말을 퍼뜨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확실한 건가?”
“안타깝지만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가능성이 높지. 최대한 그렇게 되도록 총관님께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야.”
“으음…….”
“만약 그렇게 되면 초청승부라는 것 자체가 유야무야되어 사라져 버릴 테지.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철우의 말은 정답이었다.
애초에 승부를 하려고 한 것도 더 이상 청풍객잔이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그런데 청풍객잔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면 문제의 원인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자,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청월루에서도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철우는 껄껄 웃으며 옆에 있는 남궁휴의 등짝을 팡팡 두드리더니 객잔 밖으로 사라졌다.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휘연은 아픈 등짝을 자기 손으로 문지르려고 몸을 뒤틀고 있는 남궁휴를 보며 작게 웃은 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해도 준비는 해 두어야 해요.”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는 거지?”
“네. 철우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믿음은 가지만…… 금선로라는 곳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고 항상 들었어요.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 두어야 해요.”
휘연이 들었다는 것은, 항주에서 손꼽히는 청과상이었다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였을 것이다.
항주처럼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상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그런 곳에서 성공한 사람의 말이라면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다.
“즉, 초청승부에 데려올 사람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거지?”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음…….”
“그 친구 분, 자주 연락은 하고 계셨나요?”
한림원에 있는 친구.
장기린은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삼 년 전인가…….”
“네? 마지막으로 봤던 것도 삼 년 전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 이후로 서찰도 서로 안 한 거예요?”
“그런 거…… 안 해.”
장기린은 꼭 그 친구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친목을 목적으로 서찰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뭐랄까요. 어쩐지 납득이 된다고나 할까요.”
휘연은 한쪽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댄 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이번엔 해야겠죠?”
“그렇겠지. 그런데…….”
장기린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서찰은…… 어떻게 보내는 거지?”
“네?”
“서찰, 한 번도 남을 통해서 보낸 적이 없어서.”
장기린은 휘연과 남궁휴, 그리고 아칠, 아팔이 모두 황당해하는 것을 보며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게, 이상한가?”
“이상하죠!”
“객주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고향이나 본가(本家)에 안부 서찰 정도는 보냅니다.”
“직접 가기엔 어려울 때가 많으니까요.”
“가끔 안부 서찰을 보내서 가족들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을 시켜 주는 것이지요.”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휘연과 남궁휴를 보며, 장기린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생활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장기린은 뭔가를 하고 싶다면 동생이나 수하들을 통해서 하면 됐다.
전쟁터에서 주고받는 지령이나 작전들은 대부분 전령을 전하는 전문 병사가 해 주었던 것이다.
“객주님은…… 가끔 딴세상에서 살다가 온 것 같아요.”
휘연은 그 뒤에 서찰은 표국을 통해 보낼 수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소정의 금액만으로도 충분히 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기한 이야기였다.
지금껏 표국이란 곳은 의뢰를 받아 물건을 수송하거나 하는 용병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편의를 봐 주는 일도 상당히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알겠어. 그럼, 당장 써서 보내도록 하지.”
“네. 그런데 객주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볼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조심스레 묻는 미인에게 거절을 할 수 있는 사내가 몇이나 될까?
장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봐.”
휘연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친구’라는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본질적이면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
그곳에 있는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 녀석은…….”
장기린의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십이 년 전의 추운 겨울을 더듬었다.
아련한 눈빛으로 기억의 잔향을 좇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