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43화 (38/686)

第四十章 ― 전장조우(戰場遭遇)

십이 년 전, 북부(北部) 흑룡강(黑龍江) 유역.

스스로 황제의 위(位)에 오른 연왕(燕王)은 복잡한 내부 정세를 다스리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

원래 내부의 인물들이 아무리 서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도, 일단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치고 단결하게 되는 법이다.

남으로는 운남, 북으로는 흑룡강 유역까지.

곳곳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잔당들을 청소하며 북진(北進)한 명(明)의 군대는 흑룡강 유역에서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친히 출전하여 사기를 드높이던 황제는 정무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황제의 곁에 있던 삼십만이 넘는 대군은 함께 철수했고, 남은 것은 대장군 공손웅이 이끄는 십만의 군사들뿐이었다.

십만이라고 하면 얼핏 많아 보이지만, 흑룡강 일대 전체를 방어해야만 하는 사정을 알고 보면 그 숫자는 한숨이 나올 만큼 미약한 숫자다.

보통 사람들은 원나라가 중원을 빼앗기고 멸망하면서 몽고가 매우 약해졌다고 착각하곤 했는데, 사실은 전혀 달랐다.

원나라는 몽고 제국의 일부일 뿐.

킵차크 한국, 차가타이 한국, 일 한국.

삼국 체제로 연합 왕조를 형성한 그들은 원 제국이 멸망했음에도 오히려 힘의 절정기에 이르고 있었다. 다만, 세계의 중심을 중원에 두지 않았을 뿐이다.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상.

몽고 제국은 광활한 서방 영토를 바그다드가 있는 곳까지 모조리 지배하고, 흑룡강 이북의 초원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그 대지의 넓이만 해도 명 제국의 두 배 이상.

일례를 들자면, 대칸의 후계자에 불과한 젊은 쿠빌라이가 지닌 ‘가벼운’ 병력만 해도 십만이 넘는다.

그러니 국경을 수비해야 하는 공손웅에게 있어서는 북쪽에서 이따금씩 노략질을 하러 오는 기마대를 막아 내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장애였다.

매일매일이 사투.

진정한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듯한 경기병들은, 보는 이들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기마술을 선보이며 멍하니 서 있는 보병들을 볏단 베듯이 우수수 쓰러뜨리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이 당시 명의 병부에선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청룡대’라는 정예 기마부대를 양성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그 성과를 보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상황.

전방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공손웅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인재가 필요하다.

쿠빌라이의 기마대를 상대할 수 있는, 똑같이 속전(速戰)으로 적의 본진을 습격해 피해를 주고 유유히 추격대를 따돌리며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창이 필요했다.

공손웅은 전장의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천하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걸물들을 모았다.

그리고 철저한 선별을 거쳐 너무 순진하지도, 너무 사악하지도 않은 성품의 인물들을 뽑아냈다.

악귀.

무림인.

싸움꾼.

낭인.

귀책사.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적룡기마대였다.

매일 싸움이 있으면, 매일 시체가 나오는 법이다.

고기 썩는 냄새는 예사였고, 그 냄새를 맡고 몰려든 수천 마리의 까마귀들과 수백 마리의 들개들이 아수라장을 만들어 냈다.

전장(戰場)은 인간이 만들어 낸 지옥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전투가 끝나고 시신들을 한데 쌓아 불태울 때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인세의 풍경이 아닌 듯한 탈력감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그나마 겨울은 축복받은 계절이다.

날이 추우면 시체가 부패할 일이 없으니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

바닥을 뒤덮은 구더기 떼와 뭘 먹으려고만 하면 달려드는 수만 마리의 파리 떼를 보지 않아도 된다.

십육 세.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적룡기마대에 들어온 지 일 년째가 되어 가던 장기린은 그 ‘소년’을 만났다.

지독하게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내륙 지방인 흑룡강 유역에서 눈을 보는 건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귀중한 일이었으나, 그날은 어째선지 이러다간 눈에 빠져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의 변덕일까?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의 징조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기린은 생애 처음으로 본 눈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뒷머리가 등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눈과 입을 꾹 다문 얼굴 위로 차디찬 눈송이들이 겹겹이 쌓여 갔고, 몸에 걸친 누더기나 다름없이 해진 천 조각은 축축이 젖은 채 싸늘한 바람에 얼어붙어 갔다.

일각. 이각…….

시간이 흘러도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직 숨을 쉬고 있었으나, 손도 까딱하지 않고 굳어 있는 그 모습은 논밭에 세워 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추위를 못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눈보라가 친다.

평원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그 모습은 이미 사람의 형상에서 정체 모를 눈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러다간 죽어.”

맑고 낭랑한 목소리.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의 미성(美聲)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숙하다거나 어려 보이진 않고 자신감에 찬 것 같은 당당한 목소리였다.

장기린은 눈을 떴다.

눈을 뜨고 고개를 내리자 얼굴에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장기린은 마치 세안을 하듯 얼굴의 눈을 대충 털어 낸 뒤, 그의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소년을 바라봤다.

좋은 재질의 문사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었다.

체구는 순간적으로 여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았고, 문사 옷 위로 여우 털로 만든 덧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있는 것을 보자, ‘약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옷뿐만이 아니다.

손은 털로 만든 모피로 감쌌고, 발에는 기름을 잘 먹인 두툼한 가죽신까지 신고 있었다.

턱선은 갸름했고, 뽀얀 얼굴과 매끈한 콧날은 전형적인 부잣집 도령의 모습이었다.

장기린은 어째서 부잣집의 인간들은 저렇게 자식을 약하게 키우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안 죽어.”

소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죽어. 사람은 체온이 떨어지면 죽는단 말이야. 특히 우리처럼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애들은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위에 조심해야 돼.”

“……우리처럼?”

“그래, 우리처럼. 너 나이 열여섯이라며? 나도 그래. 내 나이도 열여섯이거든.”

장기린은 구김살 없이 씩 웃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동갑?

상상도 못했다. 여지없이 두세 살은 어린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키도 그보다 한 뼘은 작았고, 덩치도 작은 게 딱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난 괜찮아.”

“안 괜찮다니까.”

“괜찮아. 난 지금까지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어.”

“이번에 처음으로 걸릴 수도 있지.”

소년은 어려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고집이 매우 셌다.

“게다가 그 누더기는 뭐야? 전혀 옷 역할을 못하고 있잖아? 전방의 병사들에게 군복이랑 갑주가 지급되지 않아?”

“……받아 봤자 금방 이렇게 되니 소용없어. 그나마도 오십 일에 하나씩 지급되고.”

장기린은 그 ‘누더기’ 위에 달라붙은 눈덩이들을 털어 내며 대답했다.

“그래? 상부는 잘 모르는 문제점이네.”

“그런 게 한두 개는 아니지.”

“그런 건 곧바로 상관에게 항의를 해서 고쳐야지. 참고 있으면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소년은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는 말했다.

“…….”

“응? 왜 그래?”

가만히 지켜보자니, 소년에게서 아까는 보지 못했던 점들이 보였다.

상부에 건의하면 뭐든 고쳐질 거라는 치기(稚氣) 어린 정의감.

하지만 우둔해서는 아니고, 그저 정의감이 강할 뿐이다.

소년은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똘망똘망한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보고 있었다.

성품이 곧다는 뜻이다.

부잣집에서 보호만 받고 자라 유약한 도련님이 아니라, 성품이 강직한 어린 서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난 여기서 눈을 느껴야 해.”

“어째서?”

“어제 장달(張達) 아저씨가 여기서 죽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소년은 그걸로는 설명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장기린은 그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다,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장달이란 사람은, 일 년 전에 장기린이 적룡기마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의 보호자를 자청한 오지랖 넓은 사십 대의 장한이었다.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다.

평생을 홀로 살아온데다가 잔소리도 많고 성격도 꼬장꼬장해서, 순종적이지 않은 성격의 장기린과는 매번 부딪치기 일쑤였다.

항상 어린놈이 이런 인생 막장에서 구른다면서 구박을 하곤 했는데, 어제는 갑자기 쳐들어온 쿠빌라이의 정예 기병과 싸우다가 장기린 대신 등에 칼을 맞았다.

그리고 다 죽어 가면서 한 말이 걸작이었다.

“크윽. 넌, 눈을 본 적도 없지? 하! 그걸 보면 말이다. 너 같은 망종도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질 거야. 쿨럭, 쿨럭……! 그, 새하얀 걸 보면…… 누구나 자기를 반성하게 되거든.”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피거품을 토해 낸 뒤 죽었다.

척추가 끊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살아나더라도 사람으로서 제구실을 하진 못했었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장기린은 그날 처음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이 눈은, 그 아저씨가 내려 주는 거야.”

장기린은 눈을 지겹도록 쏟아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우연 따위는 없다.

근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눈보라.

그게 하필 장달이 눈에 대해 말하며 죽은 다음 날이라니, 그 외엔 설명이 안 되지 않은가.

눈송이가 하나하나 몸에 쌓여 갈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쌀쌀한 바람이 춥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귀신같은 건 없어.”

상념에 빠져들려는 장기린을 어딘가 냉정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어. 귀신은 본 적 없으니 안 믿는 거야. 세간에 들리는 건 다 허황된 이야기뿐이고. 그러니 나는 안 믿어.”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이 눈도 귀신이 내리는 게 아니라 어딘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장기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 자를 믿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귀찮은 일은 없다.

장기린은 소년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소년 또한 그 이상 장기린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각자 밝힌 것으로 끝.

소년은 빙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우일현(于一賢). 자는 현백(玄柏)이야. 내가 태어나던 날 마당에 있던 측백나무가 번개를 맞고 까맣게 타 버렸거든. 그래서 현백이야.”

소년의 목소리는 밝았고, 그래서 그 안에 어떤 어둠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알아. ‘그분’께 기린이라는 이름을 받았지? 난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너를 만나 보고 싶었어.”

‘그분’이 누군지 잘 알고 있는 장기린은 우일현, 아니 현백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이 소년은 특별하다.

그분과 장기린에 관한 정보는 기밀 중에서도 특급 기밀에 속하는 이야기.

그걸 들으려면 웬만한 관직의 힘으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이 녀석, 누구지?’

장기린은 현백을 살펴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현백의 무구한 눈빛이 장기린을 살펴보는 듯했다.

평소에 주변의 병사들로부터 사람을 잘 꿰뚫어 본다는 평을 듣는 장기린이지만, 현백에게만큼은 오히려 자신이 꿰뚫어 보여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의 마음을 살피는 차분한 눈동자.

아이답지 않게 꼿꼿하고 곧은 눈빛.

하지만 싫지는 않다.

이곳 전장에서 또래를 만난 것은 원씨 가문의 둘째 아들 이후로 처음이지만, 괜히 뻣뻣하게 콧대만 세우던 그 녀석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거 알아? 여기 흑룡강 유역에 내 또래는 너랑 낙양 원가의 둘째 아들뿐이야.”

마음이 통한 걸까?

신기하게도 현백은 장기린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말을 꺼냈다.

“그래, 알아.”

“처음 여기 왔을 때 그 녀석도 만나 봤는데, 어쩐지 난 네가 더 마음에 들어.”

“…….”

“어? 놀란 얼굴이네. 나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아니, 내 생각과 똑같아서 놀랐을 뿐이야.”

장기린은 다시금 얼굴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을 털어 내며 대답했다.

“헤에, 생각이 똑같았다 이거지?”

“그래.”

“그럼 친구가 될 수 있겠네.”

“……친구?”

“생각이 같은 사람끼린 친구가 되는 거야. 몰랐어?”

친구라는 말은 장기린의 인생에 있어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전장에 있는 병사들은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부분이 장기린보다 나이가 많았다.

친구가 아니라 ‘형’ 또는 ‘선배’다.

현백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은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져 나온 신기한 물건과도 같았다.

“자, 일단 이거 걸쳐.”

현백은 그러면서 자기가 입고 있던 모피 겉옷을 하나 벗어서 장기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장기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현백의 행동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친구가 그렇게 추운 꼴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란 거야?”

“…….”

“헤에, 잘 어울리네? 참, 고맙단 말은 안 해도 돼. 친구끼린 고맙단 말은 하지 않는 거라고 했어.”

코끝을 세우며 말하는 것이 어딘가 멋을 부리는 듯한 그런 과장된 행동이었으나, 장기린에겐 그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고 보기 좋았다.

“너는? 나에게 벗어 주고 안 춥나?”

“추―워―! 엄―청 추워!”

현백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왜 벗어 줬어?”

“난 겉옷이 아직 세 개나 더 남았지만, 넌 그거 하나뿐이잖아? 사실 마음 같아선 하나 더 벗어 주고 싶다고. 근데 정말로 너는 안 추워 보이니까…… 일단 나머지는 내가 그냥 입기로 했어. 괜찮지?”

장기린은 자신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모피 옷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맨들맨들.

물에 젖지 않도록 기름칠까지 잘되어 있는 최고급 모피가 분명했다.

아직 시장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병사들의 말대로라면 일 년 치 봉급을 다 모아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이런 것을, 그것도 자기가 추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어 주다니.

아직 이때의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어? 뭐가?”

“아무 욕심 없이 자기 것을 내주다니. 그런 건 네가 처음이야.”

“어, 그, 그래?”

현백은 오묘한 표정으로 장기린을 응시하더니, 이내 볼을 조금 붉히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 특별한 건 아니야. 친구한테 뭔가를 나눠 주는 건 아까운 게 아니니까.”

현백이 내뱉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신선하게 다가왔다.

“친구…….”

아직까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상태.

장기린은 고개를 돌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순백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새하얀 눈을 보면 자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진다는 장달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라 머릿속에 드는 생각.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단 하나의 삶.

“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어? 뭐라고?”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던 현백은 바람 소리 때문에 장기린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돌아가자.”

“그래! 빨리 돌아가자! 어서!”

현백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기린의 소매를 붙들고 본영의 막사가 있는 쪽으로 펄쩍펄쩍 뛰어갔다.

장기린은 묵묵히 현백에게 끌려가며 생각했다.

처음으로 눈을 보고.

처음으로 친구를 얻고.

처음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

문득, 이 모든 게 장달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아저씨.’

장기린은 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장기린이 현백에 대해 들은 것은 그다음 날의 아침이 되어서였다.

현백은 국자감(國子監)의 총장인 제주(祭州)를 배출한 명문 우씨 가문의 둘째 아들로, 사서삼경을 열 살 때 다 외우고, 열다섯이 되기 전에 소학과 대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외의 온갖 서적을 섭렵한 천재라고 했다.

이제 몇 년 만 기다려 관례를 올리기만 하면 과거 급제는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하는 명가(名家)의 기대주.

왜 그런 곳의 귀한 아들이 이런 위험한 전쟁터에 왔냐고 묻자, 공손웅은 어색한 얼굴을 한 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현백도 이곳에 병사로서 배치되었다고 말할 뿐.

장기린은 복잡한 가정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현백과는 매일 만날 수가 있었다.

고귀한 가문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지닌 바 재능 때문인지 군사(軍師)가 있는 안전한 후방 막사에 배치되어 서류를 처리하는 일을 맡긴 했지만, 그래도 병사가 되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루 한 번.

모든 일과가 끝나고 해질녘이 되면 장기린은 현백과 만날 수 있었다.

장기린은 변변치 않은 말재주로 그날 있었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현백은 그날 그가 군사의 옆에서 무엇을 했는지, 다음번엔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 같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간에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기에 그 대화는 매우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름대로 평온하던 나날이 깨진 것은 완연한 봄이 되어 따스한 공기가 감돌던 어느 날.

쿠빌라이의 정예 기병이 군사가 있는 막사를 습격했다.

“으아아악―!”

비명, 절규, 고함 소리.

목숨을 걸고 내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백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해 왔다.

웬만한 문사(文士)보다도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서책을 독파했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라도 책으로 많은 경험을 한 만큼 어떤 어른보다도 현명하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다 소용없어…….”

현백은 가슴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군사를 바라봤다.

그걸 ‘운이 안 좋았다’라고 표현해야 할까?

평소와 다름없었던 오후.

갑자기 벌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웽웽거리는 소음과 함께 막사의 천정이 뚫려 버렸다.

그러고는 막사를 뚫고 날아든 수십 발의 화살들 중 다섯 개가 마침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군사의 가슴에 줄줄이 틀어박혔던 것이다.

특히 그중 하나는 미간을 꿰뚫었고, 군사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탁자 앞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있던 현백은 그 모습을 모두 생생히 목격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화살비가 몸을 꿰뚫고, 급격히 생기를 잃어버린 군사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그 순간까지.

현백은 그사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다섯 수레 분량의 지식도, 가문을 나오게 된 이유인 비상한 머리도, 그 순간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는 그저 소년이었다.

십오 세 소년.

자신감도, 경험도, 능력도 없는 철부지 꼬마.

머릿속이 텅 비어서 멍하니 굳어 있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아아악―!”

촤악! 하고 뭔가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현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비명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실감이 났다.

상처.

아픔.

죽음.

그 모든 게 피부에 닿은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도, 도망쳐야…….”

그나마 도주의 생각이 든 것은, 그동안 장기린의 전투 경험을 전해 들은 덕분이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도망쳐야만 한다고 말하던 장기린에게, 손자의 삼십육계가 바로 후퇴라며 잘난 것처럼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멍청이, 삼십육계는 무슨,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야 뭐가 천재냐. 뭐가 가문의 대들보야? 겨우 이거밖에 안 되면서, 고작 원나라 잔당의 병사 하나 상대 못하면서 훗날의 대재학이니 하면서 콧대를 세웠던 거야?’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은 너무나 씁쓸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손자, 한하서, 춘추열국기, 수많은 병법과 전사(戰史)들을 섭렵했던 두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명군의 배치를 떠올리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 시점, 앞으로의 전개 방식을 예상한 뒤 도망쳐야 할 방향을 잡았다.

‘천막을 찢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뛰어야 해.’

진지를 습격한 기마병이 없는 곳.

그리고 원군이 달려올 확률이 가장 높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촤아악―!

“윽……!”

하지만 원의 병사가 들이닥친 것이 먼저였다.

현백은 도망치려고 반쯤 몸을 돌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코를 찌르는 듯한 피 냄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의 사내는 밖에서 이미 몇 명을 죽이고 들어온 것인지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치밀하게 주변을 살피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군사의 시신을 응시했다.

“―쉬무르.”

씹어뱉는 듯한 말투.

거친 황야 같은 목소리.

원의 언어는 배운 적이 없어서 알 수 없었으나, 좋지 않은 뜻의 말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눈빛에서 알 수 있다.

뜨겁게 숨을 몰아쉬는 병사의 눈빛은 명백한 ‘살기’를 담고 있었으니까.

“으아앗!”

빠각!

황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벼루를 던져 보았으나, 오히려 화만 돋운 듯했다.

병사는 피하거나 쳐 내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날아오는 벼루를 이마로 박살 내 버렸다.

거칠기 짝이 없는 태도.

하지만 그건 싸움에 익숙한 정병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캬하앗―!”

소름 끼치는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병사를 피해 현백은 거의 구르다시피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병사를 피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도망쳐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도주할 방향을 힐끗거렸으나, 병사는 이런 경험이 많은지 현백에게 절대로 틈을 보이지 않았다.

현백은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 봤으나,

콰자작!

“헛……!”

짜증이 난 듯 내려친 주먹 한 방에 탁자가 박살 나 버리는 것을 보며 대번에 기가 죽어 버렸다.

‘한 대 맞으면 죽겠어.’

덩치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단단한 원목 탁자를 일격에 박살 내는 힘이라니.

탁자가 부서지는 순간, 현백은 의지할 곳을 잃고 말았다.

원으로 피하던 동선이 일직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재빨리 뒤로 물러섰으나 그래 봤자 좁은 천막 안.

등이 천막에 닿은 채 퇴로가 사라진 것은 금방이었다.

“―챠이, 우쉬르.”

거리를 좁혀 오는 병사의 위압감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병사는 화가 단단히 난 듯 성큼성큼 다가와 도망치려는 현백의 목줄을 잔인하게 틀어쥐었다.

“컥……!”

현백은 바둥거리며 병사의 다리를 발로 찼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병사는 현백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쾅!

등짝이 단단한 바닥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현백은 입을 쩍 벌린 채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려고 한참이나 컥컥거렸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숨을 들이켤 수가 없었다.

평소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지금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다.

‘이걸로 끝이구나.’

현백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사를 올려다보며 이제 끝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병사의 손에선 언제 뽑아 들었는지 날카로운 칼날이 번쩍이고 있었다.

저게 내리쳐지면 현백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항의하듯이.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숨은 쉬어지지 않고,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것이다.

“현백!”

“……!!”

현백은 앞으로 이날,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귓속을 파고드는 선명한 목소리.

놀란 병사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검은 빛의 그림자가 마치 날쌘 들고양이처럼 병사를 덮치고 목을 긋고 있었다.

푸쉬이익―

“커어어…….”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타고난 사냥꾼?

숙련된 살인 기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은 심지어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장기린의 손은 빨랐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벌어진 목의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병사는 한쪽 손으로 피가 뿜어지는 목을 누른 채 어떻게든 등에 업힌 장기린을 찌르려고 버둥거렸지만, 장기린은 능숙한 동작으로 병사의 다리를 걸고 옆으로 쓰러뜨려 버렸다.

쿠웅!

마른 고목이 쓰러지듯이, 둔중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십육 세의 소년이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 병사를 불과 촌각 만에 쓰러뜨리는 모습.

누구나 경악할 모습이었으나, 장기린은 그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그저 현백만 살펴보고 있었다.

“다치지 않았어?”

“아…….”

현백은 그런 얼빠진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장기린과 현백은 동갑.

같은 나이.

같은 시간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장기린은 어째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이고,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지킬 수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어.”

“뭐?”

“망설이지 않고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다니. 그런 건 네가 처음이야.”

장기린은 잠시 혼란스러워했으나, 이내 그 익숙한 말이 자기가 예전에 내뱉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했다.

“별로, 이런 건 당연한 거다.”

“그래? 나에겐 대단해 보이는데.”

장기린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현백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현백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 수 있는 장기린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펄럭!

그때, 천막의 입구가 젖혀지며 생소한 형태의 갑주를 입은 병사 두 사람이 들어왔다.

명 제국의 병사가 아니다.

한 사람은 맨들맨들하게 머리카락을 밀어서 햇빛도 반사할 것 같은 대머리.

허리에 찬 만도와 얼굴에 몇 개나 새겨져 있는 흉터가 험악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이제 막 소년의 나이를 벗어난 것 같은 청년이었는데, 어른 못지않은 체구에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

온몸에서 흐르는 살기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냈다.

“캬앗!”

그들 중 대머리 사내는,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하자 곧바로 만도를 뽑아 들며 장기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황하지 않는 장기린.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병사들의 움직임을 살핀 뒤, 앞쪽에 있던 병사가 만도를 휘두르는 순간 미끄러지듯이 바닥을 구르며 단검으로 병사의 발목을 베어 냈다.

푸욱!

“키야앗!”

병사는 발목에서 피를 흘리며 더욱 난폭하게 만도를 휘둘렀다.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나는 것이 그 위력을 짐작케 했다.

장기린은 이번에도 재빠르게 칼날을 피해 내면서 스치듯이 병사의 오른쪽 팔뚝을 단검으로 그었다.

“큭……!”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병사가 상처만 입고 주춤하자, 이번엔 뒤쪽에 있던 젊은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척 보기에도 앞에 나선 병사보다 경험이 풍부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장기린을 상대하는 몸놀림이 다른 병사와는 전혀 달랐다.

작게, 작게.

빈틈이 적은 움직임을 계속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엔 대범하게 장기린을 몰아붙였다.

피슉!

“큭.”

처음으로 장기린의 몸에 상처가 생겼다.

왼쪽 상박을 가로지르는 상처.

깊지는 않지만 제법 피가 흐르는 것이 아파 보이는 모양새였다.

병사는 상처가 난 장기린을 보면서도 방심하거나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장기린 또한 동요하지 않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몸을 긴장시켰다.

상대도 척 보기에 아직 십 대를 넘지 않은 나이.

그런데도 장기린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휙―!

찰나를 가르며 장기린이 달려들었다.

품속으로 파고들며 휘두르는 단검.

챙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장기린이 휘두르는 단검과 상대가 휘두르는 만도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서로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는 불꽃이 튀기는 듯한 접전은 백 합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다 한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밖에서 위기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명 제국의 병사들이 움직이는 듯 땅이 울리는 순간,

“타하앗!”

“카하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최고의 한 수가 서로를 관통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찌르기가 상대의 어깨를 꿰뚫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장기린의 머리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큭…….”

“기린!”

놀란 현백이 소리를 질렀다.

번뜩이는 칼날이 공중에 반월을 그려 내는 순간, 장기린의 오른쪽 귀가 절반 정도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장기린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픈 내색은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뿌득.

하지만 오히려 그 상황에 놀란 것은 상대편인 듯했다.

젊은 병사는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단검이 박혀 있는 자신의 어깨를 힐끗 쳐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단검을 뽑았다.

“흡!”

피가 울컥거리며 새어 나오는 데도, 젊은 병사는 헛기침을 한 번 했을 뿐 아픈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남자답게 각이 진 턱.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위로 사납게 끝이 솟아오른 눈매가 장기린을 노려봤다.

“내 이름은 텐챠이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의외로 유창한 한어(漢語)에 현백의 눈이 동그래졌다.

“……장기린.”

장기린은 불편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장기린, 기억해 두겠다.”

자신을 텐챠이라고 밝힌 젊은 병사는 옆에 있는 병사와 몽고 말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손에 들고 있던 만도로 부상당한 병사의 목을 베어 냈다.

촤아악!

“아니……!”

경악한 것은 현백뿐.

장기린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텐챠이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동료를 베었고, 베어진 동료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평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입은 발목 부상으론 도주하기 어려운 상황.

붙잡혀 봤자 고문을 당할 뿐이니, 그럴 때는 동료가 깨끗하게 죽여 주는 것이 원 병사들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히히힝―!

텐챠이는 밖에 세워 두었단 말을 타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버렸다.

장기린과 현백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상황을 파악한 명 제국의 기마대가 황급히 그를 추격했으나, 텐챠이는 방향을 몇 번 전환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추격대를 따돌리곤 자신의 본영으로 퇴각했다.

아직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았다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신기(神技)의 기마술이다.

훗날 텐챠이 수호대를 만들고, 대칸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는 원 제국 최강의 전사.

붉은 악귀라고 불리게 될 장기린을 상대로 수백 번의 싸움을 반복할 호적수.

쿠빌라이의 칼.

푸른 늑대의 후손.

창천랑(蒼天狼) 텐챠이와 장기린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운명이란 본래 그런 것일까.

아직은 둘 다 무명(無名).

흑룡강 유역의 이름 없는 싸움에서부터, 명 제국과 몽고 제국의 명운을 걸 장대한 싸움의 인연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 ☆

“음…….”

장기린이 한참을 신음하자,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휘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객주님, 대답 안 해 주실 거예요?”

“아, 미안.”

“얘기해 주세요. 그 친구 분과는 어떻게 친해지게 되셨는데요?”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그가 병사로 있던 부분은 건너뛴 채 핵심을 이야기했다.

“우연히 만났어. 대략 이년 반 정도를 함께 있었고.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녀석은 가문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치렀지. 거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으며 급제를 했고,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런 얘기야.”

“흐음, 그때 객주님은 어디에 계셨었는데요?”

“……험한 곳.”

얼버무리며 대답하는 장기린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휘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객주님의 친구 분은 어째서 좋은 가문을 놔두고 그 험한 곳에 갔던 겁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휴의 질문이었다.

똑같이 좋은 가문 출신이라 그럴까, 현백의 입장을 어딘가 짐작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녀석에겐 형이 있어. 꽤나 머리가 좋은 모양이지만, 천재라 불릴 정도는 아니고.”

“아…….”

“그리고 그 녀석은 가문과 피가 이어지지 않은 양자인 모양이야.”

짧은 설명이었으나 남궁휴는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한 듯했다.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남궁휴 자신도, 적자인 동생 때문에 가문에서 내쳐진 거나 다름없는 처지인 것을.

다만 다른 점은, 저쪽은 능력 없는 형이 적자라는 점뿐이다.

“안됐네요.”

“안됐군요.”

“안됐어요―”

객잔 식구 모두가 현백을 동정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은 정말로 인정이 많다.

“안됐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어릴 적엔 꽤나 심한 꼴을 당한 모양이지만, 관례를 치른 뒤론 그런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신경 쓰지 않아. 나는 어쨌든 좋은 가문에서 잘 먹고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은 분명 행복하다…… 라고 그 녀석이 말했었지.”

휘연은 조금 놀란 표정을.

남궁휴는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아칠과 아팔은 어쨌냐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꼭 모으고 있었다.

“왠지, 가슴이 찡한데요.”

“그 친구 분…… 좋은 사람이군요.”

“만나 보고 싶어졌어요!”

“분명 착한 사람일 거예요!”

와글와글 떠드는 공기가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장기린은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이제 집이 있다. 밖에 나가면 항상 돌아올 것을 걱정해야 하고, 이렇게 과거의 친구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는 가족들이 존재했다.

“그럼, 곧바로 서찰을 보내 볼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서 쓰라며 후다닥 종이와 문방구를 가져오는 아칠과 아팔을 보며 장기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왠지 그도 삼 년간 보지 못한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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