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44화 (39/686)

第四十一章 ― 금선진동(金仙振動)

적룡기마대의 부대주.

부운화는 바닥으로부터 겹겹이 쌓여 있는 수십 개의 서찰과 죽간들을 쉬지 않고 읽고 있었다.

읽고, 읽고, 또 읽는다.

해가 뜰 때부터 시작해, 해가 지고 잠이 들 때까지 부운화는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때때로 뭔가가 떠오르거나, 의심이 가는 것이 있으면 옆에 있는 세필로 서찰에 뭔가를 빼곡히 적기까지 했다.

“둘째 형님, 우리 요새 너무 활약이 없는 것 아니에요?”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막내 진구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활약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요! 가슴이 두근거리는 싸움도 없고! 만날 이렇게 방 안에 갇혀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특히 제가 하는 일은 하루에 한 번씩 먹을 걸 사 오는 일밖에 없다고요. 이게 뭐예요. 이럴 바엔 전장에 남아 있는 게 더 나았다구요.”

진구는 성질이 난 고양이처럼 등을 바닥에 비비면서 팔다리를 뒤틀었다.

힘이 남아돌아서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듯한 모습.

벌써 약관의 나이가 지났건만, 하는 짓은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네가 싫어도 지겹게 싸우는 날이 올 거다.”

“……둘째 형님, 그 말 한 달째 계속하고 있다는 거 아세요?”

“그랬나?”

“‘그랬나?’가 아니에요! 도대체 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은 언제 오는 거예요! 이러다간 배에 살이 찌겠다구요!”

진구는 필사적으로 항의해 보았으나, 부운화는 앞에 놓인 서찰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수련을 게을리하나 보군.”

“윽! 수련은 부지런히 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많이 먹어서 그런가?”

“……뭐, 많이 먹을 음식이라도 줘 보셨나요?”

“매 끼니마다 주먹밥을 세 개씩 먹고 있잖아.”

“반찬은 야채볶음뿐이죠! 그것도 오로지 콩 줄기만! 도대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만 먹어야 하는 거예요? 콩 줄기랑 밥만 먹는다고 살이 찔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요!”

부운화는 ‘흐음’ 하고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랬나?”

“……크아아악!”

결국 분노가 폭발한 진구가 펄쩍 뛰어올라 부운화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빠아악!

“끄악!”

진구는 얼얼한 정수리를 붙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름대로 대붕격(大鵬擊)을 응용해 내리친 주먹인데, 부운화는 동그랗게 말린 죽간으로 세 번의 변초를 만들어 혼을 쏙 빼놓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정수리를 일타(一打)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부운화는 서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을 뿐이다.

“으윽, 아직은 무리인가요…….”

비록 가벼운 장난이었으나, 어딜 보나 실력 차이가 확연하다는 사실에 진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진구야.”

“네.”

“조금만 더 참아라. 조만간 큰일이 있을 거야.”

달래기 위해 하는 말이었으나, 이번에는 그 밑에 진지함이 숨겨져 있었다.

항주에 몽고의 잔당이 숨어 있다는 것을 파악한 지 한 달.

여러 방향으로 해 오던 조사에 드디어 진전이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그 결과가 나올 참이었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진구도 그런 것을 이해 못할 성격이 아니다.

그저 이런 식으로 구실을 만들어서 힘을 좀 분출하고 싶었을 뿐.

“그런데 둘째 형님, 뭔가 찾은 거라도…….”

쿵쿵쿵쿵―

“음?”

“어?”

부운화와 진구, 두 사람은 모두 의아한 얼굴로 방문 쪽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오르더니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것이다.

“큰일입니다!”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키가 크고 몸집이 마른 사내였다.

팔다리도 길고, 키도 육척이나 되니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였는데, 눈이 가늘어서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했다.

입고 있는 옷은 문사들이나 입을 법한 펑퍼짐한 백의.

게다가 손에는 제법 모양이 나는 섭선을 들고 있었는데, 그게 또 묘하게 잘 어울렸다.

“우생, 무슨 일이야?”

“둘째 형님, 소문 들으셨습니까?”

“소문?”

“예, 대형에 대한 소문입니다.”

깍듯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말하는 문사 차림의 사내가 바로 섭우생.

적룡기마대에서 다섯 번째 서열이자, 기문둔갑(奇門遁甲)과 기관술(機關術)로 유명한 산동 섭가의 장자이며, 전장에선 싸우는 군사라 하여 전투군사(戰鬪軍師)라는 별호로 불리던 특별한 사내다.

그는 가문으로 돌아갔다가 원래 잘 맞지 않았던 아버지와 다시 한 번 대판 싸우고 얼마 전에 항주로 돌아왔는데, 덕분에 부운화가 하고 있던 조사는 훨씬 수월해진 참이었다.

섭우생은 무림 가문 출신답게 기책(奇策)에 능하고, 정보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어떤 정보든 하오문이나 개방을 통해 척척 알아 올 수 있었기에, 관청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던 부운화로서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대형에 관한 일이라니?”

“청풍객잔이 사고를 쳤습니다. 대형이 데리고 있던 숙수를 미인계를 통해 빼내서 죽이려고 했다더군요. 덕분에 대형이 직접 죽창을 들고 청풍객잔에 쳐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뭣……!”

처음으로 부운화의 손에서 서찰이 떨어졌다.

진구는 이미 잔뜩 흥분해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도대체 왜 그 객잔은 바람 잘 날이 없는 거야!”

부운화의 한탄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결과는?”

“청풍객잔의 장흠파가 전멸. 하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독두파는 자리에 없었고, 객주인 방태풍이 대형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답니다.”

부운화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장흠파, 대형이 직접 다 쓰러뜨리신 거겠지?”

“예, 안타깝게도…….”

“대형은…… 평범하게 살겠다는 사람이 장흠파를 혼자서 박살 내 버리면 어쩌자는 거지?”

부운화는 안타까움을 담아 한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만약에 반대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 대형이 그깟 놈들에게 맞고 왔다면 더 화가 나지 않아요?”

진구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얼음이 얼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

이제껏 차분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던 부운화와 섭우생의 눈에서도 불꽃이 번뜩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군.”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된다면 철저히 괴멸해야겠지요. 감히 적룡기마대의 대장을 건드린 대가는 매우 클 겁니다.”

“물론. 모조리 박살 내야겠지.”

“앞으로 그곳에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도록 짓밟고 불태워야만 합니다.”

가장 앞서서 흥분했던 진구가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적룡기마대의 결속력은 강하다.

특히 대원들이 대형인 장기린에게 가지는 존경심과 애정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여서, 누군가가 장기린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는 적룡기마대 전원의 처절한 보복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흠흠! 자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건 아니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일단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죠.”

“……그래, 그렇지.”

“일단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자면…….”

부운화와 섭우생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장기린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그 위험성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장기린이 장흠파 따위에게 당할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장흠파를 쓰러뜨리면서 특별히 강한 모습을 보이면 주변의 모두가 장기린을 주목할 테고, 그럼 그가 간절히 바라는 ‘평범한 삶’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주변의 분위기는 어때? 관심이 큰가?”

“안 좋습니다. 금선로 전체가 그 사실 때문에 들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색이 청풍객잔은 금선로 오대객잔 중의 하나인 만큼, 그런 곳의 파락호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린 대형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정보를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

“아시다시피 금선로 객잔들은 하나같이 뒷배경이 심상치 않아서…….”

부운화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두드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숨어 있는 원나라의 잔당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 그들이 이곳에 와 있는 목적은 장기린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지금껏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곳 금선로의 뒷면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거대한 단체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그중엔 무림 문파도 있고, 힘 있는 세도가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황실과 연관이 된 부분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곳들이 아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일단은 황실의 정보 통제를 기대하며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청월루에서 대형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려는 듯 보인답니다.”

“청월루가? 어째서?”

“글쎄요. 청월루의 철우가 대형과 친분이 있다는 건 꽤나 유명하니, 그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니지. 이런 뒷골목에서 하루 이틀 구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순진하게 대가 없이 도와줄 리가 없잖아.”

“그렇습니까? 저는 대형께선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만.”

“……으음.”

“저는 항상 대형에 대한 것은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이치에 벗어난 존재는 책사의 머리로 따라잡으려 해선 안 되는 것이겠지요.”

섭우생은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꼬리를 부드럽게 끌어내리면서 웃고 있었다.

책사의 얼굴.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다.

“하하.”

부운화는 팟!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문무겸전(文武兼全), 쌍절진인의 제자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부운화가 머리로 못 이기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딱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섭우생.

다른 한 사람은 대형의 친구인 현백.

두 사람의 머리는 적룡기마대 속에서 썩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났다.

“과연, 맞는 말이야. 대형에 대한 건 머리로 계산하면 안 되는 거겠지. 예전에 제갈공명도 관우에 대해서는 책략을 짜지 않았다지?”

“그랬죠. 어떤 계산도 그 이상으로 뛰어넘어 버리니까요.”

“책사들에겐 힘이 과한 것도 불편한 모양이야.”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흘러가야만 만족하는 것이 책사란 족속이니까 말입니다.”

부운화는 ‘그렇다면 나는 평생 책사는 못 되겠군’이라고 말하며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앞으로 시시비비는 어떻게 가리는 거지? 이대로라면 분명 청풍객잔에서 보복을 하려고 할 것 같은데.”

“저희가 몰래 박살을 내 버리죠!”

진구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진구, 너는 조용히 해.”

“하지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

“그랬다가 괜히 풍운객잔이 오해를 받거나, 우리가 들켜서 추적이라도 당하면 그땐 어쩔 거냐. 대형을 곤란하게 만들 셈이야?”

“끄응. 그건 그렇네요.”

순순히 수긍하는 진구의 옆에서 섭우생이 이야기를 보충했다.

“초청승부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답니다.”

“초청승부?”

“모르시나 보군요. 초청승부라는 건 금선로에서 꽤나 대중화된 방법으로…… 연회를 열고, 그곳에 객잔과 친분이 두터운 손님을 불러서 그 손님들끼리 시비를 가리게 만드는 겁니다. 명목상으론 학식과 기품을 겨룬다고 하지만…… 사실은 ‘누가 더 높은 사람을 부를 수 있냐!’라는 권력 싸움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이해하는 순간, 부운화는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또 곤란한데.”

“예, 곤란합니다.”

“대형이 부를 만한 손님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있어 봤자, 현백 정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이 없군.”

“예.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손님을 불러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입니다. 대형의 평범한 생활을 지키기 위한 일인데, 높은 사람을 불러서 대형의 위치를 드러내면 오히려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럴 테지. 그건 본말전도야.”

부운화와 섭우생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사실, 한 가지 떠오른 게 있긴 합니다.”

“그래?”

섭우생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독제독(理毒制毒)입니다.”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 그 말은 설마, 다른 객잔을 이용하자는 뜻인가?”

“예. 마침 청월루가 청풍객잔과 사이가 좋지 않다더군요.”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아도, 서로 직접 공격할 정도가 될까?”

“안 되면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꼭 청월루가 아니라 홍화객잔도 좋습니다. 이간계(離間計)로 싸움을 부채질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흠, 방법은?”

“제 생각엔…….”

진구가 다시 고양이처럼 햇볕을 받으며 몸을 웅크리는 사이, 부운화와 섭우생은 곧바로 그에 대한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금선로 오대객잔 사이를 벌려 놓는 이간계의 시작.

단지 장기린의 평범한 생활을 지키는 것만이 목적인 두 사람의 계획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지금의 두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했다.

☆ ☆ ☆

홍화객잔.

오대객잔 중에 천상미태(天上美態)라는 별호로 불리는 만큼,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기녀들이 많은 곳이 바로 홍화객잔이었다.

홍화객잔에선 항상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전 중엔 예기(藝妓)들이 악곡을 연습하고, 오후엔 예기가 되고 싶은 동녀들이 악곡을 배우며, 해가 진 뒤에는 손님들을 위한 예악이 연주되기 때문이다.

만약 진휘연이 그대로 홍화객잔에 팔려갔더라면, 지금쯤 다른 동녀들과 마찬가지로 예악을 배우고 연습하고 있었을 것이다.

홍화객잔의 기녀들에게 예악은 필수다.

예악을 할 수 있는 기녀는 상급.

예악을 할 수 없는 기녀는 하급.

하류잡배들에게도 몸을 파는 하급 청루의 기녀가 되느냐, 고관대작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고급 기녀가 되느냐는 바로 이 예악의 능력 유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항주제일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천화(天花)조차도 매일 연주를 게을리하지 않고 스스로의 기술을 연마했다.

홍화객잔도 그런 쪽으로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황실 악사(皇室樂師)를 초빙해 주기적으로 고급 기녀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고, 명장이 만든 악기들을 구비하는 것에도 충분한 금액을 지원했다.

항주 금선로에서도 오대객잔에 이름을 올리는 높은 평판은 바로 이런 투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옥소와 대금 소리가 유난히 영롱하게 울리는 한적한 오후.

총관 사무혁과 옥룡파의 두목 옥승은 서로를 마주 보며 찻잔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마주한 것은 진휘연 사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치 고양이와 개처럼 평소에도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은, 옥승이 진휘연을 놓친 것도 모자라 사타구니 사이가 박살 나는 처참한 꼴이 되어 돌아온 뒤로 관계가 점점 악화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대략 한 달간 옥승이 부린 행패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포악했다.

중상급 기녀 셋이 한동안 거동을 못할 만큼 다쳤고, 동녀 하나가 자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나름 매끈한 얼굴과 색기 어린 미모로 화화공자 생활을 했던 옥승에게 있어서, ‘불구’가 된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성적인 불만족은 매일 같은 행패와 횡포로 이어졌다.

한 달 후, 마침내 사무혁이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할 때쯤, 다행히도 옥승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의 갈 길을 찾았다.

남자가 될 수 없다면…… 여자가 되면 된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옥승이었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원래 선이 가늘었던 옥승의 외모는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예쁜 비단 궁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여인보다 훨씬 아름다워졌다.

아니, 그냥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홍화객잔에서 천화를 제외하면 상대할 여인이 없을 만큼 색기(色氣)가 넘치는 미녀가 되었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썹.

갸름한 턱선.

늘씬해 보이는 몸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상대를 깔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한 염세적인 눈빛이었다.

사내들 중에 그런 눈빛을 보고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옥승이 여장을 하고 객잔 안을 서성일 때면, 단골 기녀를 찾아온 손님들조차도 옥승과 술을 마시고 싶다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옥승이 사실은 남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남색(男色)을 공공연히 했던 시대인 만큼,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옥승이라면 괜찮다며 매달리곤 했던 것이다.

함께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무혁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옥승이 사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과거에 어떤 개자식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앞에서 새빨간 입술로 찻잔을 무는 고혹적인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 정말로 짜증 나는군.”

사무혁은 진심을 담아 말하고 이를 뿌득 갈았다.

“왜? 끌려?”

“…….”

“농담이야, 농담. 나도 총관처럼 차가운 아저씨는 싫어.”

여성스럽게 한쪽 손으로 뺨을 감싸는 옥승.

사무혁은 그 모습을 보며 ‘남자 주제에!’라고 외쳐 주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더럽고 치사해도 지금은 옥승이 필요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옥승의 무공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고, 그가 다스리던 옥룡파 또한 확장의 확장을 거듭해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던 것이다.

지금은 명실상부 옥룡파의 전성기였다.

홍화객잔의 운영을 책임지는 총관으로서 옥승은 놓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야기는 들었지?”

“무슨 이야기?”

옥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청풍객잔과 풍운객잔 말이다.”

“아, 그거?”

“초청승부.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

옥승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청풍객잔이지. 지부 대인 문표가 뒤를 봐준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제 와서 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왜?”

“청월루가 그 판을 아예 엎으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뭐……?”

옥승은 처음으로 가장된 목소리가 아니라 본래의 목소리를 냈다.

“그거 확실해? 금선지약 위반이잖아. 전쟁을 하겠다는 거야?”

“거의 확실한 정보다. 게다가 전쟁 정도가 아니라 청풍객잔을 아예 밀어 버리려는 것 같다던데.”

“……!”

짤그랑―

옥승은 팔목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팔찌들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건 더 이상 청풍객잔과 풍운객잔만의 일이 아니다.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거대한 이권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관군은 그걸 그냥 두고 볼까?”

“글쎄, 청월루 정도 되면 눈가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중요한 건 의도다. 어째서 지금 청월루는 청풍객잔을 치려고 하는가? 풍운객잔을 지키기 위해 거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홍화객잔의 총관 사무혁은 이권 다툼에 능한 자였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틈을 보고, 끼어들고, 그 속에서 최고의 이득을 얻는 능력이 탁월했다.

예전에 진휘연을 산 것도 그런 능력을 발휘한 덕분이다.

노리는 사람이 많았던 진휘연을 사기 위해, 그는 뒷돈을 대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 공작과 협박까지 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

그게 바로 총관 사무혁인 것이다.

‘이번 일은 크다.’

사무혁의 육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건 큰일이라고.

어쩌면 살아온 이래 가장 큰 이득을 올릴지도 모른다고,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끼어들어야 돼.”

“어?”

“이번 일엔 반드시 끼어들 거다. 너는 어느 쪽 편을 들고 싶나?”

팔찌만 만지작대고 있던 옥승이 씩 웃었다.

염기 가득한 미소.

보는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아찔한 웃음이다.

“그걸 꼭 물어봐야 해?”

“아니, 필요 없지.”

사무혁은 옆에서 지필묵을 꺼내 들었다.

“네가 해 줄 일은 이거다. 곧바로 옥룡파를 움직여서…….”

“음, 그리고?”

“그런 다음엔 내가 이쪽에 서신으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화려한 예악 소리에 묻혀 조용히 가라앉았다.

위험한 분위기가 흐르는 금선로.

홍화객잔의 최상층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 ☆

철우는 기분이 좋았다.

풍운객잔의 숙수 아가를 납치하고, 청월루의 침모를 납치한 건방진 청풍객잔에 드디어 응분의 철퇴를 내릴 때가 온 것이다.

낭인들을 모으는 일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지 않을 법한, 배짱이 두둑하고 제법 신의가 있는 녀석들로만 선별해서 오십 명 정도를 고용해 두었다.

싸움은 철우파가 한다.

하지만 상대인 독두파의 전력을 잘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고용해 두었다.

“나도 참, 천생 싸움꾼이구먼.”

평소에도 큰 불만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싸움을 앞두고 들뜨는 기분이 되어 보니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큰 싸움을 앞둔 긴장감.

절로 몸이 뜨거워지는 흥분.

가진 힘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철우.”

그때, 청월루의 뒷문에서 백 총관이 그를 불렀다.

“총관님?”

“잠깐 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나?”

기분 좋게 풀려 있던 철우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백 총관은 좋은 일은 곧바로 면전에 대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다.

자신의 방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할 때는 안 좋은 소식일 경우가 많았다.

“……알겠습니다.”

철우가 방 안에 들어와 앉은 뒤로도 백 총관은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철우의 안색이 불편하게 일그러질 때쯤, 백 총관은 품속에서 하나의 서찰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금선로의 다른 오대객잔들의 공문일세.”

“예?”

“홍화객잔, 북화적월루, 창해루, 세 곳이 서명을 해 둔 상태지.”

퉁방울 같은 두 눈을 부릅뜬 철우는 황급히 서찰을 받아 들고 내용을 읽어 내렸다.

―청월루 친전.

이번 ‘초청승부 사태’는 자칫 금선로 오대객잔 사이의 무의미한 이권 다툼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되므로 서로 간의 안녕을 위해 과도한 행동은 규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홍화객잔, 북화적월루, 창해루는 청월루가 이 사태에 관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만약 무력이 개입되는 행위를 사용할 시엔 다른 오대객잔도 그것과 똑같은 행위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청월루가 그에 대한 불이익을 가장 먼저 받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해 두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는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공존과 공생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청월루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겠습니다.

서찰을 쥔 철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무슨…….”

이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다.

오대객잔이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똘똘 뭉쳐서 가족적인 분위기를 풍겼단 말인가.

“우리가 안이했네.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어야 했어.”

백 총관은 자신의 탓이라는 듯 탄식했다.

“다들 앞뒤 안 가리고 세력만 확장하려는 청풍객잔을 싫어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지켜 주려고 하는 겁니까?”

“저들은 청풍객잔이 무너지는 게 싫은 것이 아닐세. 청풍객잔을 우리가 무너뜨리는 게 싫은 것뿐이지.”

“그런……!”

“거기다가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홍화객잔이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군. 홍화객잔이라면, 짐작 가는 것이 있겠지?”

철우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홍화객잔이 그러는 이유라면 충분히 알고 있다.

진휘연을 놓친 것.

그 와중에 옥승이 불구가 된 것.

그리고 그 뒤에 철우는 그들에게 풍운객잔을 건드리려면 청월루를 먼저 상대해야 할 거라고 으름장까지 놓지 않았던가.

쾅!

“상관없습니다!”

철우는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우리에겐 침모를 납치당했었다는 명분이 있습니다! 청월루에겐 청풍객잔에 보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그들도 다 알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청월루가 이득을 볼 것 같다면 절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작자들이니까 말이야. 명분이야 어찌 됐건, 무조건 방해를 하고 보겠지.”

철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럼 그들도 우리랑 똑같이 침모를 납치당하더라도 아무 말 못하겠군요.”

“어허! 어리석은 짓 하지 말게! 그랬다간 정말로 전쟁이야.”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겁니다! 청풍객잔이 한 짓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참아야 합니까?”

백 총관이 호통을 쳤으나, 철우는 수그러드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큰 분노에 사로잡혔다.

퉁방울처럼 커다란 눈동자에선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직접 공격은 못할 겁니다. 청월루를 치려면 보통 병력으론 안 되고, 그럼 자신들도 빈틈을 보여야만 할 겁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죠.”

“……자네, 진심이군.”

철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초청승부가 시작되기 전에 청풍객잔을 밀어 버리겠다고 약속했단 말입니다.”

“누구와 약속을 했다는 건가? 풍운객잔의 그 사람들과?”

“…….”

“자네, 아무래도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었던 모양이군.”

가면.

그 말이 나오자 철우의 얼굴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졌다.

“잊고 있는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네. 우리가 청월루를 구입한 이유를 잊지 말게. 성격이 안 좋은 숙수를 꾹 참고 고용하고 있는 것도, 자네가 내심을 숨기며 하류잡배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모두 다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되네.”

항상 차분하다고만 생각했던 백 총관의 말투가 지금만큼은 냉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냉정한 말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그의 본질.

그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자각시켰다.

“알고…… 있습니다.”

철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네.”

“그들이……!”

“곧 ‘접촉’이 있을 걸세. 그들이 꼬리를 드러낼 때까진 지금처럼 금선로에 괜한 사건이 없어야 해. 지금 이대로. 지금의 평화를 계속 유지해야만 하네. 알아듣겠나? 하물며 우리 손으로 그 평화를 박살 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단 말일세.”

“…….”

“철우,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

철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나가 보게.”

문을 닫고 나서는 철우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풍운객잔의 식구들에게 했던 약속. 장기린에게 호언장담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 말들이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린 것처럼 가슴속을 답답하게 내리눌렀다.

철우는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다 하얗게 타 버릴 것만 같았다.

남아일언 중천금은 무슨.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면서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예전에는 그의 ‘본래 신분’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어째서일까. 근래엔 철우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

본래의 자신으로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철우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혼란스러웠다.

“빌어먹을……!”

철우는 옆에 세워져 있던 애꿎은 청동화로 하나를 집어 들고 양손으로 붙잡아 우그러뜨려 버렸다.

빠직. 빠지직!

끔찍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진 청동화로가 구깃구깃하게 말리며 동그란 청동 공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악력.

철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해 주는 모습이다.

철우는 마치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듯이 양손으로 청동화로를 꽉꽉 짓눌렀다.

힘을 줬다가 풀었다가. 힘을 줬다가 풀었다가.

그는 그 공이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힘을 주는 것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꾸웅―!

치이이익―

빨갛게 달아오른 청동 덩어리가 떨어지자, 바닥에 깔아 두었던 융단이 새카만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갔다.

“후우.”

철우는 연기가 나는 것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화풀이를 하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사과해야겠지.”

철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청월루 밖으로 나서는 철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빠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