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二章 ― 인연만리(因緣萬里)
한적한 오후.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찻잔을 앞에 둔 장기린은, 족자에 걸린 난 그림을 정성들여 닦고 있는 휘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머리는 뒤로 틀어 올려 수수한 나무 비녀 하나만을 꽂아 두었고, 몸에 다른 장신구라곤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검소한 차림새다.
옷차림도 그렇다.
무명으로 만든 바지에 움직이기 편한 상의.
그런 쪽으론 둔감한 장기린이라도 그게 미(美)적인 용도라기보다는 철저히 기능적인 것에 맞춘 옷차림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나마 휘연이니 잘 어울리는 거겠지.’
비록 남자와 별다를 것 없는 옷차림이라도 휘연이 입으면 태가 났다.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고, 자그마한 얼굴이 돋보이는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휘연.”
“네?”
휘연이 고개를 돌릴 때 드러나는 새하얀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필요한 거 없어?”
“필요…… 한 거요?”
휘연은 뜻밖의 말이었는지 당황해했다.
“옷이나 장신구 같은 거 말이야.”
“아……. 그, 그런 건 왜 물으세요? 혹시 지금 제 모습이 보기 안 좋은가요?”
휘연은 안절부절하지못하며 자신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머리를 만지고, 옷맵시를 확인하며 얼굴을 붉혔다.
여인이라서 그런 걸까, 유독 민감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예뻐.”
“아, 예. 예?”
“……왜 그렇게 당황해? 혹시 내가 말실수했나?”
“아, 아뇨. 그냥, 기, 기뻐서요.”
휘연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장기린은 잠시 의아했으나, 일단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청월루에 갔을 때 휘연이 자기를 꾸몄었잖아?”
“네, 그랬죠.”
“그때 보기가 좋았어. 굉장히 아름다웠고. 그런데 뭐랄까. 그때 느낀 건데…… 휘연도 자기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금 억지로 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아……!”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바꾸도록 해. 금전적인 것은 충분히 지원을 해 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건 하는 게 좋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휘연.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장기린은 한 번 더 권유하려고 했으나, 휘연이 웃는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환한 웃음.
태양이 부럽지 않을 만큼 밝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객주님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필요 없어요.”
“…….”
장기린은 그 웃음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꾸미면 곤란한 걸요.”
“그건 왜 그렇지?”
“그게, 손님들이…….”
대답을 흐리며 난처해하는 휘연을 보며 장기린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처럼 꾸미지 않은 상태에서도 종종 남자 손님들이 그 미모를 알아보고 추근거리는 일이 잦은 편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화려하게 꾸민다면?
아마 이 객잔은 그녀에게 말을 한번 붙여 보려는 불순한 손님들로 바글바글해질 것이다.
‘그건 싫군.’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져서 장기린은 그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알겠어. 그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도록 해.”
“네. 아! 그럼 대신…….”
“대신?”
휘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머리 뒤의 나무 비녀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왔다.
“아, 아니에요. 그보다 이 난 그림 정말 볼수록 괜찮지 않나요? 화 동생이 다시 한 번 왔으면 좋겠네요. 정말 재주가 많은 동생이었는데.”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었으나, 장기린은 그냥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휘연이 말하기 곤란하다면 됐다.
특히, 장기린도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휘연.”
“네?”
“만약에 풍운객잔이 문을 닫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우뚝.
방금 전까지 즐거워 보였던 휘연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휘연의 눈빛은 뜨거웠다.
어딘가 공포에 질린 것처럼도 보였다.
매달리는 듯, 절박한 듯.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눈빛이었다.
“다른 뜻이 아니야. 그저, 혹시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시 객잔을 시작하게 되더라도…… 휘연은 함께 있어 주겠어?”
“아…….”
만약의 만약을 대비한 이야기.
휘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굳어졌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만약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그래도 돼. 빚은 언제든 갚아도 되니 신경 쓰지 말고…….”
“아뇨! 아니에요! 함께할 거예요. 앞으로도…… 쭉.”
휘연은 다급하게 말하더니, 얼굴이 더더욱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장기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휘연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쁜 일이다.
“고마워.”
“아, 아니에요. 당연한 거죠.”
장기린은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휘연에게서 시선을 돌려,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남궁휴를 바라봤다.
“휴.”
“……예?”
계속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휴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너는? 만약 풍운객잔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할 거지?”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객주님을 모셔야죠. 이미 그렇게 마음속으로 정했습니다.”
남궁휴는 그러더니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마찬가지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아마 침모님과는 조금 다르게 모시게 될 테지만…….”
“휴, 휴!”
당황한 휘연이 언성을 높이자, 휴는 과장된 몸짓으로 아차!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장기린이 휘연을 쳐다보자, 그녀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실언이었습니다. 어찌 됐건 저는 객주님이 내치지 않으시는 이상 옆에 있을 테니, 부디 귀찮아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리가 있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칠, 아팔에겐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녀석들은 분명히 땅끝까지도 따라갈 테니까 말이죠.”
그러면서 남궁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주방이었다.
남궁휴가 말을 끝내고 잠시 후, 몰래 이쪽을 엿보고 있던 아칠과 아팔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린 채 주방에서 나왔다.
“그, 그렇게 말하시면 어떻게 해요?”
“우리도 제대로 대답하고 싶었다구요!”
“맞아. 맞아!”
남궁휴는 볼을 부풀리는 두 소년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 그럼 함께 안 할 거야? 의외인데―? 객주님,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배은망덕한 녀석들이었습니다. 이런 녀석들은 앞으로 감봉을 하고, 다음 달부터는 아예 해고를 해 버려야…….”
“으아아―! 잠깐, 잠깐! 잠깐만요!”
“함께 가요! 함께 갈 거라구요! 땅끝까지 쫓아갈 거라구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 떠나요! 휴 형은 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울상이 되어 필사적으로 대답하는 두 사람은 너무나도 귀여웠다.
특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모두가 ‘가족’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 모두 고맙다.”
장기린은 아칠과 아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휘연은 불안한 얼굴이 되어 있었던 아칠과 아팔을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남궁휴는 옆에서 씩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즐거운 모습.
단란한 가족의 한때.
다만, 한 가지가 빠져 있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한 명에게도 물어볼까.”
휘연과 남궁휴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어……?”
“예……?”
잠시간의 의문.
하지만 곧이어 그 의미를 알게 되자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이번엔 조금 전에 얼굴이 붉어졌던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였던 것이다.
툭. 툭.
“객주님…….”
장기린은 그런 두 사람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까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이건 애초에 장기린이 처리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는 객잔을 빠져나와 별채로 향했다.
다섯 개의 방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별채.
그중 운찬이 있는 방은 인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운찬, 들어간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상의 구석에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운찬이 보였다.
“운찬.”
운찬은 너무나 초췌해져 있었다. 머리는 며칠이나 안 감아서 잡초처럼 엉켜 있고, 눈 밑은 거멓게 죽은데다 볼은 해골 못지않게 움푹 들어가 있었다.
장기린은 운찬이 벌써 사흘이 넘도록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사실을 아칠, 아팔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매일 주먹밥과 물을 넣어 줬다고 하던데, 운찬은 그마저도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했다.
문 앞의 접시를 보자 주먹밥은 반 입 정도 깨물다 만 흔적이 남아 있었고, 물 잔에도 물이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단식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개, 객주님.”
운찬의 목소리는 잔뜩 메마른 땅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장기린은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운찬을 지그시 바라봤다.
“객주님? 이젠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거냐?”
“그, 그게 아니라……”
“나와.”
장기린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잔말 말고 나와. 죽고 싶다면 죽여 줄 테니.”
장기린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기를 뿜어내거나 위협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장기린은 운찬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뿐이다.
운찬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소교에게 빠져서 앞뒤를 가리지 못했던 점.
한낱 여인에게 빠져서 장기린과 다른 식구들을 배신하고 떠나려고 했던 점.
그렇게까지 하고도 결국엔 사랑했던 여인이 죽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
운찬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있었다.
“저는…….”
“따라와.”
장기린이 밖으로 나오자, 운찬도 비틀거리는 몸놀림이었지만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기린은 운찬을 부축해 주지 않았다.
그 뒤로 조용히, 서로 간의 대화 없이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 그리 높지 않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다 왔다.”
장기린이 걸음을 멈추자,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른 운찬은 숨을 헉헉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앞이 컴컴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들리는 거라곤 자신의 폐가 쉑쉑대는 숨소리뿐.
그러던 운찬의 어깨에 딱딱하면서도 든든한 손이 올라왔다.
그 손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더니, 온수(溫水)에 몸을 담근 것처럼 노곤한 기운이 헐떡이던 폐와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이건……?”
마침내 정신을 차린 운찬이 멍하니 고개를 들자, 멀리 떨어진 어떤 한 점을 바라보고 있는 장기린의 얼굴이 보였다.
장기린은 운찬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저걸 봐라.”
“예? 아……!”
의문은 잠시.
장기린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운찬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에 보이는 풍경에 푹 빠져 버렸다.
금선로가 보이고 있었다.
나지막한 언덕임에도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대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가운데, 저녁 시간을 맞아 영업을 시작하는 객잔들이 하나둘씩 등불을 켜고 있었다.
객잔들이 등불을 켜는 속도는 매우 빨라서, 금선로 전체가 등불들로 환하게 빛나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모습은 흡사 별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은하수가 지상에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여긴 예전에 휘연이 납치를 당해서 끌려왔던 곳이야.”
“예……?”
“저기 있는 사당에, 옥승이라는 놈이 한 짓이었지. 별로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경치만큼은 대단히 좋다.”
운찬 또한 경치가 좋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렇게 먼 곳에서도…… 객잔들이 다 보이네요.”
운찬은 객잔들이 다 내려다보이는 그 경치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창해루, 청월루, 홍화객잔. 그리고 운중루의 앞에 아마 풍운객잔이 있을 것이다.
풍운객잔.
운찬은 그 이름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객잔 안엔 진휘연, 남궁휴, 아칠, 아팔이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제껏 익숙한 모습.
이미 한 식구가 되어 버린 ‘가족’의 풍경.
“큭…….”
운찬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부끄럽지?”
장기린은 운찬을 보지 않은 채로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여자랑 잘 살겠다고 객잔을 나갔는데, 결국 그 여자한테 배신당하고, 복수할 틈도 없이 그 여자는 눈앞에서 죽고, 그러고 나서 보니까 다시 돌아올 곳은 풍운객잔밖에 없고.”
“…….”
“솔직히 말해. 부끄럽지? 콱, 목매달고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자기 자신을 죽도록 패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
결국 운찬의 눈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아 보지만, 한 번 들썩거리기 시작한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운찬이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잔인할 만큼 가슴을 파헤치는 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장기린은 운찬의 마음을 다 읽고, 그 심정을 공감해 주고 있었다. 지금 한 말도 운찬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상처를 보듬어 주기 위해서다.
그 따뜻함이 운찬의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몇 대 때리고 그걸로 됐다면서 용서해 주면 되는 거냐?”
“크윽, 형님……!”
“원하는 바를 말해 봐라, 운찬.”
운찬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를 악문 채 어깨를 들썩이더니 마침내 무릎을 털썩 꿇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운찬의 눈빛은 흐려져 있었다.
이미 저질러 버린 죄의 그림자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몇 가지 잘못을 해서 뒷걸음질을 쳤을 뿐인데, 어느새 어둠 속에 혼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풍운객잔이야말로…… 내 집인데…….”
운찬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이젠 확실히 알 수 있다.
풍운객잔이야말로 그의 집, 그의 고향이다.
하지만 운찬은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떻게 속죄를 하려고 해도 그가 바라는 것을 얻기는 불가능할 것처럼만 느껴졌다.
“쉽지 않을 거다.”
장기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잃어버린 신뢰는 되찾기가 쉽지 않지. 벽에 못질을 한 뒤에 못을 다시 빼내도 그 자국은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의 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
운찬은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휘연, 휴, 아칠, 아팔, 모두가 너를 용서할 거다. 분명 모두 너를 예전과 전혀 다름없는 태도로 대할 테지만…… 너는 마음속에 항상 식구들이 너를 안 믿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게 될 거야.”
“그 말씀은…… 문제는 제게 있다는 건가요?”
“그래, 이번에 신뢰를 잃은 건 네가 아냐. 네가 우리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거지. 우린 너를 전과 똑같이 믿고, 아끼고 있다.”
“……!!”
“우리가 어떤 태도로 너를 대해도, 너는 항상 마음 한구석에 한 번 죄를 지었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우리를 대하게 될 거야. 문제는 그걸 전부 회복시키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데, 그 뒤는 전적으로 네 노력에 달렸어.”
운찬의 얼굴이 멍해졌다.
장기린은 그런 그에게 마지막 충고를 던졌다.
“과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지만…… 사람의 기억은 쉽게 잊혀지는 법이지.”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결국 운찬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쉽게 잊혀진다.
그 말은 언젠가는 안 좋은 기억을 다 잊어버릴 테니 힘을 내라는, 그런 장기린식의 격려였다.
“으, 으……. 으허엉……!”
운찬은 결국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가슴의 온갖 한을 토해 냈다.
장기린은 그런 운찬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바람이 유난히 시원했던 저녁.
운찬은 처음으로 그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았다.
☆ ☆ ☆
그날, 운찬은 객잔으로 돌아오자마자 객잔 식구 모두를 모은 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휘연이 괜찮으니 일어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운찬은 자신의 말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멍청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의리 없이 떠나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이걸로 예전의 일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앞으로 그 일이 잊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려고 합니다!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바닥에 엎드린 채 말하는 운찬의 목소리는 절박했고, 또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저런 목소리로 사죄를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휘연이 왼팔을 붙잡고, 휴가 오른팔을 붙잡아 운찬을 일으켜 주었다. 아칠과 아팔은 운찬의 몸에 묻은 먼지들을 수건으로 털어 내 주었다.
“괜찮으니 일어나세요.”
“맞습니다. 이런 꼴을 보이면 어떻게 화를 냅니까?”
“아아, 숙수님 좀 놀려 주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진지하면 놀려 줄 수도 없겠네요.”
밝고 따뜻한 목소리가 운찬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흐르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운찬은 한참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풍운객잔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운찬은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하고 싶어 했으나, 식 재료를 사 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식 재료를 준비하고, 객잔 내부를 깨끗이 청소한 뒤, 바깥에 걸려 있던 휴업 간판을 떼어 내 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간판을 떼어 내고, 벌써 점심시간인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는데도 손님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역시, 사흘간 휴업을 했던 영향이 큰 것일까요?”
휘연은 침중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가?”
“네, 저희는 단골들이 중요하니까요. 한 번 왔던 손님들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구요.”
옆에 서 있는 아칠, 아팔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객주님께는 아직 말씀 안 드렸었는데…… 왜 문을 안 여냐면서 항의한 분들도 있었어요.”
“항의?”
“네, 먼 곳에서 일부러 왔는데 문이 닫혀 있다면서……. 저희가 몇 번이나 사과를 한 뒤에야 돌아갔어요.”
장기린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함이 느껴졌다.
“그럼,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 된 건가?”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휘연의 눈빛이 강해져 있었다.
“저희 손님들이 화려한 금선로에서 굳이 풍운객잔에 식사를 하러 왔던 건 그만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저희가 장사를 계속한다면 분명 손님들이 다시 찾아 주실 거예요.”
“그래?”
“네, 아직 손님들은 저희가 다시 개장을 했다는 것을 모르니까요. 즉, 반대로 말하면 풍운객잔이 개장했다는 것을 알려 주기만 하면, 손님들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뜻이에요.”
휘연은 어느새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인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탓일까?
휘연은 종종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저렇게 즐거워하곤 했다. 어려움을 자신의 지혜로 헤쳐 나갈 때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아칠, 아팔!”
“네?”
“내가 지금 서찰을 쓸 테니까 곧장 임 목장님께 갖다 줘. 그리고 오늘과 내일 오시는 손님들껜 각자 신천지 소면을 한 그릇씩 무료로 드린다고 말씀드려.”
“엑, 무료? 공짜로요?”
“응, 공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휘연.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아칠과 아팔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상식에 있어서 ‘공짜’는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그런 건가……!’
처음엔 마찬가지로 의아했으나, 이내 장기린은 휘연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한 사람당 소면 한 그릇씩. 손님들은 공짜라는 것에 혹해 객잔을 찾아올 거고, 그러면 그 소식을 몰랐던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레 풍운객잔이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단하군. 이건 마치…….’
장기린은 송(宋)나라 시대의 병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잔치를 벌인다는 구실로 주변 백성들을 끌어모아서 적군에게 자신의 군세를 훨씬 더 큰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덕분에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군이라고 착각한 적이 스스로 물러갔다는 일화다.
그런데 그 병법을 장사에도 응용할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장기린 혼자였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 그럼 다녀오렴.”
아칠과 아팔은 여전히 왜 공짜로 소면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휘연이 써 준 서찰을 들고 임가촌을 향해 뛰어갔다.
휘연은 두 소년을 웃는 얼굴로 전송한 뒤, 주방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운찬을 불렀다.
“강 숙수님, 들으셨죠?”
“예? 아, 예. 죄, 죄송합니다.”
운찬은 손님이 없는 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며 미안해했다.
“강 숙수님이 나쁜 게 아니에요. 비열한 수를 쓴 청풍객잔이 나쁜 거죠.”
“침모님…….”
운찬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옆에서 남궁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침모님. 여자에게 면역이 없는 동정남이 나쁜 거죠.”
“휴!”
“사실입니다. 동정남들은 여인들만 보면 괜히 흥분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난생처음 제대로 여인과 마음이 통한다 싶으면 모조리 내버리고 불타오릅니다. 동정남의 나쁜 습성이죠. 그런 것 때문에 부모와 의절하고 자신의 본업을 잃어버리는 멍청한 짓을 저지른다니까요?”
대대적인 사과를 하고, 한동안은 자숙하며 지내려던 운찬이지만, 도발이 이 정도로 노골적이라면 그냥 넘기기는 힘들다.
운찬의 이마에서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도, 동정남을 무슨 희귀한 짐승처럼 표현하지 마!”
“허어? 동정끼린 서로 지켜 준다는 겁니까? 이거 참, 눈물 나게 감동적인 장면이군요. 이러다가 집결해서 무슨 파라도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윽. 비, 빈정대는 거야?”
“미리 부탁하겠는데,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하나 보고 있는 것도 불쌍한데, 그런 것들이 떼로 몰려 있으면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그, 그런 ‘것’이라니! 우리도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우리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륙의 수많은 동정남들이다아―!”
결국 두 사람은 몸의 대화를 나누며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시끄럽긴 하지만 활기찬 분위기다.
휘연과 장기린도 서로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순간.
딸랑―
대문 앞에 달아 놓은 풍경이 흔들리며 방울 소리를 냈다.
“어?”
“어라?”
멱살을 잡고 엎치락뒤치락하던 운찬과 남궁휴가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대문을 바라봤다.
장기린과 휘연도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방금 대문을 연 ‘손님’을 보며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어, 그러니까…….”
같은 여인이라서 그런 걸까.
그나마 휘연이 가장 먼저 냉정을 회복하고 입을 뗐다.
“낭화 소저?”
갑자기 객잔에 등장한 사람은, 낭화였던 것이다.
스르륵―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천둥번개처럼 들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네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어색할 만도 하건만, 낭화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웃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아…….”
과연, 낭화!
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기품 있는 태도. 만개한 꽃처럼 화려하고 성숙한 외모와 그 외모를 한층 더 화사하게 살려 주는 붉은색 성장(盛粧)까지.
낭화가 탁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객잔 전체가 최고급 특실로 바뀐 것만 같았다.
객잔의 남성들.
특히 남궁휴와 운찬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낭화를 응시했다.
“차가 맛있네요.”
“아, 네. 다행이네요.”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뿌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
휘연이 직접 끓여 온 것이었다.
휘연은 낭화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수수한 차림새의 휘연.
하지만 휘연 또한 차세대 항주제일화에 거론되던 미인이다 보니, 이게 또 그림이 된다.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과 수수한 차림의 미인.
그리고 둘 사이에 놓인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크윽, 강 숙수님 혹시 그림 그리는 재주 없으십니까?”
“……나한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이미 침모님 그림을 수십 장은 그렸을 것 같지 않냐?”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는 너는? 잡기(雜技)에 능하면서 그림은 못 그려?”
“어릴 때 한 번 난을 쳤더니, 그림 선생이 앞으로 평생 붓을 잡지 말라며 제 눈앞에서 붓을 꺾어 버리시더군요. 그 뒤로 딴 건 다 익혀도 화폭은 멀리했습니다.”
“그것참, 통탄할 일이네.”
“예, 정말로 통탄할 일입니다.”
두 사내는 조금 전까지의 다툼을 잊고 한마음, 한뜻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치는 장면을 미인도로 그릴 수만 있다면, 장담컨대 항주의 젊은이들 전부가 밤을 새우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미인도가 아니다.
선녀도(仙女圖)다.
한낮의 풍운객잔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여한이 없다.”
“그렇습니다. 마음속이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두 사내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후릅―
하지만 낭화가 앉아 있는 탁자에 이곳에서 유일하게 행복하지 않은 사내가 있었다.
장기린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으나, 속은 당황하여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불편하군.’
불편하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 탁자에 같이 앉아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낭화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 따끔따끔하면서 서늘한 분위기를.
마치 숙적이 서로를 마주한 듯한 공기가 계속해서 두 사람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진휘연과 낭화를 말함이다.
‘왜 이러는 거지?’
장기린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휘연이 어째서 ‘차가운 눈빛’으로 얼굴에만 웃음을 걸치고 있는지.
낭화가 어째서 저렇게 ‘그린 듯한 미소’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사람이 다툴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희 객잔엔 어쩐 일로 오셨죠? 낭화 소저 같은 분이 저희 객잔에 오실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요.”
휘연은 싱긋 웃고 있었고 목소리도 평범했으나, 그 밑에는 묘하게 서늘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낭화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어머, 귀여워라’라는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머나, 올 일이 없다뇨. 풍운객잔에는 항상 와 보고 싶었는걸요?”
“그런가요? 청월루 특실과는 비교하기조차 많이 부끄러운데요.”
“물론 비교할 수 없죠.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물건들과 아주 특별한 객주님과는요.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하잖아요?”
빠드득.
실제로 귀에 들린 건 아니지만, 장기린은 분명히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넓은 협곡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외줄다리가 끊어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주, 특별한, 객주님……?”
휘연은 이미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말이 조금 이상했나요? 제게 있어서 객주님은 생명의 은인이시죠. 꼭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아, 네.”
“객주님이 그러셨잖아요? 언제든 객주님이 보고 싶을 땐 찾아와도 된다고요. 맞죠?”
말의 분위기가 조금 변형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장기린은 분명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휘연이 옆에서 ‘설마!’ 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어쨌든 장기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랬었지.”
“……!”
휘연의 호수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약간 물기를 띠었다. 반면에 낭화는 어딘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찾아올 게요. 그래도 괜찮죠?”
“뭐, 나는 상관없어.”
“다행이다…….”
낭화는 한쪽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기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응?”
찌릿.
어째선지 휘연이 원망의 눈초리로 장기린을 보고 있었다.
“휘연, 왜 그래? 할 말 있어?”
“……아뇨, 없어요.”
휘연은 토라진 얼굴로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장기린은 난감해져서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이상하지만, 자기가 할 말이 없다는데 어쩐단 말인가.
낭화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번갈아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낭화, 이런 곳에 혼자 와도 되는 건가? 수행원은?”
“어머나,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혼자 온 것이 이상해서 묻는 거야.”
“부끄러워하시기는. 수행원이라면 한 사람 있어요. 지금은 객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
“네, 나중에 만나기로 했어요.”
낭화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은 채로 눈을 반짝이며 장기린을 쳐다보더니,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장 객주님.”
“왜 그러지?”
“초청승부를 하신다면서요?”
초청승부.
지금 풍운객잔의 식구들 사이에선 금구(禁句)처럼 되어 함부로 꺼내지 않는 단어다.
낭화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장기린은 궁금증이 생겼다.
“맞아, 그렇게 됐어.”
“도와 드릴까요?”
낭화는 선뜻 말을 꺼냈다.
“뭐……?”
“청월루의 특실 손님들 중에는 쟁쟁한 분들이 많아요. 지금 여기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지부 대인 문표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닌 분들도 많이 계세요.”
“…….”
“제가 부탁을 드리면 분명히 도와주실 분들도 있어요. 장 객주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꼭 도와 드리고 싶네요.”
장기린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낭화는 너무나도 따뜻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심이 깃들지 않은 순수한 호의, 희생을 각오한 결연함.
그 모든 감정들을 낭화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장기린은 생각 이상으로 적극적인 그녀에게 놀라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론 그녀에게 그 정도의 도움을 받을 자격까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머릿속으론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과 손익을 따져 보는 자신이 있었다.
낭화의 도움을 받는다?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청월루엔 대단한 단골손님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모두 낭화가 직접 부탁한다면 흔쾌히 장기린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지금 장기린의 입장은 어떠한가?
풍운객잔을 지킬 수 있나?
초청승부에서 이길 거라고 승부를 장담할 수 있나?
……아무것도 없다.
초청승부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결에서 장기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과거의 인맥으로 친구인 현백을 불렀지만, 다른 이들의 조언을 들어 보면 현백의 직책과 권한으론 청풍객잔이 부를 손님을 이기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나는 겨우 이 정도인가?’
문득 지독한 자괴감이 그의 마음속을 덮쳐 왔다.
이렇게나 무력하다.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능력을 제외하곤 장기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평범한 삶?
그건 아무나 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가?
그는 아칠, 아팔만도 못한 존재다.
적어도 그 두 형제는 열심히 살면서 자신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질이 있었다.
만약 장기린이 과거에 사람을 죽인 대가로 돈을 모아 두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지금처럼 객주 소리라도 들으면서 살 수 있었을까?
‘낭화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니, 받지 말아야 한다.
알량한 자존심과 풍운객잔을 지킨다는 실질적인 이득 사이에서 장기린은 고뇌했다.
그는 낭화의 목숨을 구해 줬다.
그러니 이 정도의 대가는 받아도 좋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낭화에게 거기까지 부탁하는 것은 너무나 과한 처사다.
밖에서 보기엔 짧은 시간이었으나, 장기린에겐 천 년만큼이나 긴 시간이었다.
‘아, 잠깐.’
그런데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장기린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의도는 고맙지만, 거절하겠어.”
“네?”
낭화는 설마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는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객주님 어째서……?”
“왜 거절을……?”
뒤쪽에서 남궁휴와 운찬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연도 말은 안 하지만 궁금한 눈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라고 알고 있다. 낭화, 만약 네가 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지?”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항상 차분하고, 어떤 갑작스러운 일도 능숙하게 넘겨 버릴 것 같던 낭화가 당황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아마 함께 술자리를 갖고 그 사람들의 고충이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할 거예요. 제 원래 일이기도 하니 별로 특별한 건 아니죠.”
“그 사람들은 이망에 대해서 알고 있나?”
“……!”
낭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망은 오랜 세월 동안 낭화를 쫓아다니며 그녀가 밤을 함께 보낸 남자들을 죽이던 살수의 이름이었다.
이망 덕분에 낭화는 다름 남자들과 강제로 잠자리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고, 그 때문에 오히려 희귀성이 생겨 항주삼화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망은 결국 얼마 전에 자제심을 잃고 폭주해 낭화를 강제로 납치하려 하다가 장기린의 손에 죽었다.
좋다고 할 수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씁쓸한 기억이다.
“역시 그런가.”
낭화는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굳게 닫힌 그녀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그런 희생을 강요하면서까지 내가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본 것이지?”
“그건…….”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은데.”
장기린은 그녀를 질책했다.
상대의 희생을 강요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선 모욕을 받은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객주님을 도와 드리고 싶었어요.”
낭화는 고개를 번쩍 들고 항변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니까요…….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객주님을 도와 드리고 싶었어요.”
“…….”
“안…… 되나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장기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다.”
“아…….”
단호한 거절에 낭화는 눈에 띄게 낙담한 빛을 보였다.
“부담…… 스러우신가 보군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네?”
“그 마음은 고맙게 받겠지만, 나는 네가 희생을 한 대가로 받는 도움은 필요 없어. 그런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거부한다. 이망과 나를 생각한다면, 너는 스스로를 좀 더 아끼도록 해.”
“객주님…….”
낭화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그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지. 도움 이야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장기린은 단호하게 이야기를 끝맺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이켰다.
찻물은 이미 식어 있었으나, 그 향은 여전히 향긋하게 살아 있었다.
스르륵―
“어?”
“어라?”
그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낭화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낭화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기린의 옆에 붙어 앉았다.
“앗……!”
놀라서 소리를 낸 것은 휘연.
하지만 휘연이 당황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낭화는 나긋나긋한 몸놀림으로 어깨를 맞대며 장기린의 오른팔을 끌어안았다.
장기린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겉으로 표를 내진 않았으나, 장기린 역시도 당황한 것이다.
“낭화.”
“네?”
“왜 이러는 거지?”
“고마워서요.”
낭화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한 가운데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약간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더욱 매력적이다.
장기린은 자신의 팔을 감싸는 부드럽고 풍만한 감촉과 목덜미에 닿는 따뜻한 숨을 느끼며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기린도 사내다.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다스릴 줄 알고, ‘그런 쪽’으로 특별히 강한 욕구가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상대는 낭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던 항주 최고의 미인인 것이다.
“고마워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마음의 동요가 드러난 건지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장기린은 몸을 뒤로 빼면서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팔을 휘감은 낭화의 몸이 촉수가 있는 문어처럼 유연하고 끈끈해서 실패했다.
“여인은 자기를 아껴 주는 것을 가장 고마워한답니다.”
“그래도 이건…….”
“방금 객주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결심이 섰어요.”
어떤 결심인지 묻기가 두려웠다.
“떠, 떨어지세요!”
그때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휘연이었다.
그녀는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낭화를 응시했다.
“어머나, 왜요?”
반면, 그에 답하는 낭화의 목소리엔 여유가 가득했다.
“객주님께서 불편해하시잖아요! 그리고 이, 이런 곳에서 그렇게 달라붙어 있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휘연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가 부끄러워해야 하나요?”
“당연하죠!”
“이게 제 직업이랍니다. 그리고 상대가 객주님이라면, 저는 부끄럽지 않은 걸요?”
그러면서 낭화는 오히려 보란 듯이 장기린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이, 이……!”
휘연은 뭔가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욕이란 걸 알지 못하는 그녀의 한정적인 어휘로는 도저히 감정을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나는…… 나는 그런 걸……!”
그리고 마침내 휘연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툭.
“어?”
낭화는 자연스럽게 장기린의 팔에서 떨어져 나와, 기품 있는 동작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손은 조신하게 무릎 위에 올린 모습.
본래의 낭화.
자신이 언제 남자의 팔에 몸을 기대는 행동을 했었냐는 듯한 태도다.
“아……!”
장기린은 그 순간 이마를 탁! 치며 탄성을 내지르고 싶어졌다.
어째서 몰랐을까.
낭화는 이렇게나 가벼운 성격의 여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앞에서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행동을 할 여인이 아니다.
일견즉통(一見卽通).
한눈에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여인이 바로 낭화가 아니던가.
낭화는 계획적으로 휘연에게 방종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휘연이 그것에 참지 못하고 폭발한 순간, 감탄할 만큼 자연스럽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객주님이 다른 여인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라……. 진 소저는 장 객주님과 어떤 사이인가요?”
낭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네?”
“연인 사이인가요?”
“……!”
휘연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낭화는 거기에 쐐기를 박듯, 말에 박차를 가했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제가 객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더라도 괜찮은 것 아닐까요?”
“……그건, 안 돼요.”
“어째서요?”
잠시 우물쭈물했으나, 휘연은 이내 답을 찾아낸 듯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가족이니까요!”
“가족…….”
“네. 한 가족으로서 객주님이 문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어요.”
그 대답에, 이번엔 낭화가 힘을 잃었다.
“가족이군요.”
“네, 가족이에요.”
낭화와 휘연이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 중심에서 불꽃이 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차갑고 난폭한 분위기다.
“휘연, 내가 언제 문란한 모습을 보였다는 거야?”
장기린은 그 틈에 억울함을 호소해 보았으나.
“문란하죠! 어떻게 몇 번 보지도 않은 여인과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가 있어요?”
“뭐? 그건 어쩔 수 없이…….”
“흥, 모든 사내들은 그렇게 변명하죠.”
휘연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반사적으로 낭화를 쳐다봤으나, 낭화는 그런 오해가 오히려 좋은 듯 싱긋 웃을 뿐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운찬, 휴.”
마지막으로 그가 향한 사람은 운찬과 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휘연 누님으로도 모자라서…….”
“낭화까지. 거기다가 둘을 모두 데리고 알콩달콩…….”
“형님은 모든 사내들의 적이로군요.”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려 조직적인 대항책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은 흡사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돕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객잔 안에서 지금 장기린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도대체 뭐가 어찌 되는 건지.’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지금쯤 그가 보낸 서찰을 받아서 읽었을 친구를 떠올렸다.
현백이 있는 곳은 자금성이 있는 곳.
즉, 북경(北京)이다.
그 친구는 와 줄까?
와 준다면 언제쯤 도착할까?
그런 현실도피적인 생각을 하며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양쪽에선 여전히 두 미인의 눈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