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46화 (41/686)

第四十三章 ― 북경풍운(北京風雲)

봄이라는 것은 신기한 계절이다.

길지 않은 기간에 꽁꽁 얼어 있던 땅이 녹아내리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면서 넘치는 생명력을 뿜어낸다.

하늘을 푸르고 흘러가는 구름은 새하얗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 날씨에 앞머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상쾌한 바람은 맞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

명 제국 최고의 도시 북경(北京).

그리고 주작대로로 이어지는 번화가엔 일천 개가 넘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루에만 수만 명의 인구가 왔다 갔다 하는 번화가인 만큼, 꼭 물건을 파는 노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곳도 있고, 음식을 파는 곳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휘이잉―

그 중심부에 있는 삼층짜리 전각.

온갖 냄새가 뒤섞인 바람을 맞으며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소녀가 창밖으로 손을 쭉 내뻗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하얗고 앳된 손이 허공을 부유했다.

새하얀 피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앙증맞은 코. 눈꼬리가 올라가서 조금 사나워 보이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누구나 감탄을 내뱉을 만큼 아름다운 까만색 눈동자.

장래가 기대되는 열두어 살의 소녀는 바람을 손으로 붙잡으려는 듯 손을 움직이다가, 이내 질린 것처럼 축 늘어뜨렸다.

“심심해에…….”

소녀는 양쪽으로 땋아 둔 자신의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볼을 부풀렸다.

그녀의 이름은 구양화.

검존이 있는 구양세가의 금지옥엽이지만, 지금은 가출 아닌 가출을 해서 백연과 함께 있는 중이었다.

백연은 일해검(一解劍)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무당파의 촉망받는 제자다.

그는 지금 황실을 노리고 있는 희대의 살인마를 쫓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곳 북경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무당파 속가제자 출신의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

구양화는 당연히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백연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객실 창문에 하릴없이 붙어서 바람이나 쐬고 있는 한심한 처지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라도 따라갈…… 어? 저건 뭐야?”

툴툴거리며 불평을 내뱉던 구양화가 문득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눈치채고 아래쪽 번화가를 내려다보았다.

수백 명의 사람이 우글거리는 복잡한 곳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리엔 흰색의 문사건.

거기다 멀리서 봐도 낡고 오래된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서생이었다.

골격은 꽤나 좋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건장한 체격이다.

게다가 뽀얀 피부와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흐르는 얼굴.

분명히 부잣집 아들 같은데, 도대체 왜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최근에 집안이 망했나?’

그랬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눈에 띄는 그 서생은 구양화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손을 흔들지?”

구양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문했다.

서생은 구양화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서생은커녕 저 비슷한 사람도 만난 기억이 없다.

“미친 건가?”

서생이 직접 듣는다면 매우 상처를 받을 만한 말이지만, 구양화의 입장에선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상대한테 반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다니, 이해가 안 되지 않은가?

그 서생은 구양화가 인상을 쓰면서 노려보자, 순간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객잔 앞에 놓인 노점의 의자에 걸터앉아 소면과 만두를 주문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면과 만두는 주문한 즉시 나왔다.

서생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가리는 게 없는지, 접시를 받아들자마자 호쾌하게 우적우적 베어 먹기 시작했다.

그는 그 뒤론 구양화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뭐야. 저 사람?”

그 기묘한 모순성이 구양화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처음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더니, 이젠 대놓고 모르는 척이다.

그 상반된 행동은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한 소녀의 마음을 크게 자극했다.

“그냥 넘어갈 줄 알고?”

짐짓 화내는 듯했지만, 구양화는 명백히 지금의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심심함을 타파해 줄 흥미로운 사건.

갑자기 나타난 인상 좋은 젊은 서생에게선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구양화는 객실을 나와 한달음에 앞의 노점까지 내려갔다.

서생은 소면의 국물만 남겨 놓고, 만두를 하나 더 주문해서 베어 물고 있는 중이었다.

구양화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다가가 서생의 앞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소면의 국물을 들이켜던 서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봐요.”

“응?”

“나 알아요?”

서생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는데?”

“……그런데 왜 아까 나한테 손을 흔들었어요?”

“예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대답.

그 대답이 기쁘다기보단 너무나 황당해서 구양화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몇 살인 줄 알아요?”

“글쎄? 열둘? 열셋?”

“대충 맞아요. 열셋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혹시 그런 거예요? 어린 소녀들만 덮치는 성벽(性癖)을 가진 그런 사람?”

구양화는 그녀가 좋아하는 무림영웅록에 나오던 색마(色魔)들을 떠올리며 혐오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본 사람을 도대체 뭐에 비유하는 거야?”

서생은 어이없는 얼굴로 들고 있던 소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떨어진 모양.

하지만 그래도 잠시 멈칫했을 뿐 만두를 먹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생긴 것답지 않게 식욕이 왕성했다.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뭐예요? 여자가 좀 예쁘면 무조건 웃으면서 손 흔들어요?”

“……자신이 예쁘다는 건 부정을 안 하네?”

“흥. 평소에 지겨울 정도로 듣는 소리니까요.”

다른 소녀가 했다면 비웃음을 샀을 말이지만, 실제로 구양화는 나중에 한 지역을 평정할 것 같은 전도유망한 미소녀다.

때문에 콧대를 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얼굴도 용서가 되었다.

서생은 허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맞아. 예쁜 여인은 나라의 재산이자 큰 보물이지. 난 예쁜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게 돼. 어린 소저한테 손을 흔든 것도 그런 이유야.”

“……방금 그 말에서 왜 얼굴하고 다르게 낡은 옷을 입고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흐음, 왜인데?”

쾅!

구양화는 서슬 퍼런 기세로 탁자를 내리쳤다.

“왜긴 왜예요! 여자를 그렇게 밝히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이겠죠!”

“흐음, 그런가?”

“‘그런가?’라니! 무슨 남의 말을 하듯이 하고 있는 거예요! 당장 고쳐요! 여우 같은 계집애들한테 휘둘려서 부모님이 뼈 빠지게 일해서 벌은 돈을 무의미하게 퍼 주지 말라구요!”

화를 내곤 있지만,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생은 기분 좋게 웃으며 되물었다.

“상냥하네.”

“네? 뭐라고요?”

“상냥하다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아! 혹시, 약삭빠른 여자에 대해 안 좋은 기억 같은 게 있는 거야?”

“무, 무슨 소리예요? 그런 거 없어요!”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구양화를 보며 서생은 조용히 웃고 말았다.

어지간히 솔직한 아가씨다.

생각한 게 얼굴에 다 나타난다.

‘집에선 분명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겠지.’

그건 다른 사람들은 잘 받지 못하는 축복.

서생은 구양화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사한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야. 오늘은 내 기분이 굉장히 좋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왜 기분이 좋은데요?”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무정한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어. 도와 달라고.”

“헤에, 필요할 때만 찾는 못된 친구군요.”

구양화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천하의 몹쓸 놈들한테 둘러싸인 한심한 인간을 보는 듯한, 그런 동정의 눈빛이었다.

“아니지. 드디어 나한테 기댈 만큼 나를 믿게 된 거라고. 기분 좋은 일이야. 원래는 남한테 절대로 아쉬운 소리를 안 하는 친구거든.”

서생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서 싱글싱글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흐응…….”

구양화는 턱을 손에 얹은 채 그런 서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질문을 툭 던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안 쳐다봤어요?”

“응?”

“여기 앉고 나서부터요. 계속 손을 흔들면서 웃다가 갑자기 그때부터 나를 안 봤잖아요?”

“그야 간단한 이유지.”

서생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맛있는 게 나왔잖아.”

“……뭐라고요?”

“아름다운 여인도 좋지만, 맛있는 먹을거리가 먼저 아니겠어?”

구양화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먹을거리…… 라고요?”

“응. 아! 꼬마 소저는 타지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여긴 아는 사람들한텐 굉장히 유명한 맛집이야. 이 만두랑 소면은, 한 번 맛본 사람은 계속 먹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물(魔物)이라고.”

서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 남은 만두의 잔해를 입안에 쏙 털어 넣어 버렸다.

서생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구양화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보자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아니, 잠깐만. 그럼 난 지금 만두한테 진 거야?’

딱히 서생한테 사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지만.

구양세가의 금지옥엽이 고작 만두 따위에게 졌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해가 안 돼.”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꼬마 소저?”

“그런 머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쯤 퉁퉁한 돼지꼴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왜 그렇게 늘씬해? 왜 정상적인 몸매인 건데?”

억울하다는 듯이 외치는 구양화.

서생은 점심의 마무리로 소면 국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후루룩 마셔 버린 뒤 대답했다.

“비밀이야, 꼬마 소저.”

“……뭐?!”

“적당한 비밀은 남자를 돋보이게 만들지.”

씩 웃는 서생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내 치명적인 매력이거든.”

구양화는 이제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다.

“……정말, 미쳤구나. 아저씨.”

“왜? 매력적이지 않아?”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구양화는 치를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특이하다.

하지만 서생은 분명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름이 뭐야?”

구양화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다른 데를 보며 물었다.

“꼬마 소저,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자기 이름을 먼저 말하는 거잖아?”

“흥, 미인은 그런 거 안 지켜도 돼.”

“너무한걸. 평소에도 혹시 자기 입으로 미인이라고 하면서 그런 횡포를 부리고 다니는 거야?”

“누, 누가 그런 짓을 할까 봐!”

구양화는 이번에도 역시 당황하며 소리쳤다.

“……화(華).”

“응?”

“이름이 화라고.”

“흐음,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이름이네. 성은?”

“비밀이야.”

구양화는 도도한 숙녀처럼 턱을 치켜세운 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서생이 ‘날 따라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가 사납게 노려보는 구양화의 시선에 찔끔하였다.

“크흠, 뭐, 그렇게까지 말씀을 해 주시니.”

서생은 만두 속이 묻었던 손을 깨끗이 털어 내더니, 자세를 정갈히 하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화 소저, 소생의 이름은 현백. 태어날 때 마당에 있던 측백나무가 벼락을 맞고 까맣게 타 버렸다고 하여 현백입니다.”

“헤에, 특이한 이름이네.”

“그런 말을 많이 듣지요. 성은 우(于)입니다.”

“흐응.”

구양화는 갑작스레 존댓말을 사용하는 현백에게 놀라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도가 달라졌네? 이제야 날 숙녀로 인정한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자신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마자 현백의 태도가 일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자유롭고 격식 없는 서생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뭐, 뭣?”

“열두어 살 꼬맹이한테 존댓말을 쓸 수는 없지. 그 정도는 받아들이라고, 꼬마 소저.”

구양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왜 이상한 행동을 해서 사람을 속이고 그래!”

“이름을 말해 준다는 것은 중요한 행위잖아? 거기서 격식을 좀 차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으윽, 이해를 못하겠어.”

“이해 못해도 괜찮아.”

서생은 당당하게 웃은 뒤, 노점의 주인에게 만두 두 개를 더 주문했다.

구양화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거기서 또 먹어?”

“먼 길을 가야 하거든. 먼 길을 가려면 힘이 필요한 법이잖아?”

“헤에, 어디…… 아! 친구 도와주러 간댔지?”

서생은 말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구양화는 문득 쓸쓸해졌다.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녀는 서생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생은 이제 만두 두 개만 더 먹고 나면 먼 길을 떠난다. 아마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 심심한 객잔에 홀로 남겨진다.

‘백연 오라버니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저기, 당신…….”

구양화는 현백에게 조금 더 있어 주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말은 전할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다.

“꺄아악―!”

“뭐, 뭐야?!”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번화가.

그곳에서 뭔가 다급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고,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노점 의자에 앉아 있는 현백과 구양화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길가로 향했다.

인파가 좌우로 쫙 갈라져 버린 대로.

그 틈에서 복부에 깊은 상처를 입은 듯한 사내가 뛰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색 무복으로 온몸을 감싼 그 사내는 격한 싸움을 겪으며 살아온 듯 얼굴 위가 온갖 흉터로 뒤덮여 있었는데, 좌우로 희번뜩거리는 눈빛이 지나치게 살벌했다.

“하아, 후우…… 비켜!”

피투성이의 사내가 호통을 치자, 길가에 있는 사람들이 겁먹은 생쥐 떼처럼 옆으로 우르르 비켜났다.

사내는 놀랍게도 현백과 구양화가 앉아 있는 노점에서 멈춰 섰다. 사내는 노점과 연결된 객잔의 이름을 살펴보더니, 이내 탁자에 마주 앉아 있는 현백과 구양화를 보고는 두 눈을 밝게 빛냈다.

“후우, 후우……. 이봐, 너.”

그리고 사내가 응시한 사람은…… 놀랍게도 구양화였다.

“에? 나, 나?”

“이걸…… 이걸, 네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 주면 된다.”

“어, 어? 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

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숨을 헐떡이는 사내는 그런 구양화의 안색을 살필 여유도 없이, 품속에서 반쯤 피에 젖은 서찰 하나를 구양화에게 건네주었다.

“부탁…… 한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람들을 헤치며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구양화는 얼떨결에 서찰을 받아 든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폭풍이 한바탕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힐끗거리며 이상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손에 피 묻은 서찰이 들려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낮에 꾼 꿈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잠시간의 혼란.

하지만 상황이 모두 파악되자 구양화는 환희에 찬 얼굴로 양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와, 왔다아―!”

크게 외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앞에 앉아 있는 현백이 듣기엔 충분한 목소리였다.

“뭐가 왔다는 거야?”

이번만큼은 천하의 현백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사건! 사건! 대사건!”

“어?”

“무림영웅록에 나오잖아! 암중에 숨은 거대한 음모는 항상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거라구! 난 이제 사건의 중심인물이야! 백 오라버니가 떼어 놓고 가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된 거라고!”

“흐응, 그래?”

“자,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한 번…….”

구양화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조심 서찰을 펼치기 시작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다.

결국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백은 탄식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나 참, 정말 특이한 아가씨에게 걸렸군.”

분명히 어딘가 부잣집의 금지옥엽일 게 분명한데,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자라났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보통의 소녀가 수상쩍은 무리와 연관되었을 때 이렇게나 기뻐할까?

게다가 무림영웅록이라니.

그런 삼류 소설을 보면서 즐기는 소녀가 있을 줄이야.

현백은 이날 이때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얏!”

구양화는 기합을 지르며 서찰을 쫙 펼쳤다.

서찰은 얇은 한지가 두 겹으로 붙어서 겹쳐져 있었는데, 덕분에 뻣뻣해진 종이 위로 엄지손톱만 한 세필이 가로세로로 한 척이 넘는 종이 위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

처음엔 즐거워하던 구양화가 점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갔다.

서찰은 제법 글공부를 많이 한 구양화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딱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황금이 몇 관, 백자가 몇 개, 구완마가 몇 마리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의 이름과 그 개수만이 끊임없이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딴 걸로 한 장을 꽉 채우다니…… 도대체 뭐지? 암호 같은 걸까? 으으, 나는 암호는 잘 모르는데……. 역시 백 오라버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난감해하는 구양화.

그런 그녀의 옆에서 문사건이 쑥 튀어나왔다.

“흐음, 이건…….”

순간, 현백의 눈에서 범상치 않은 정광이 번뜩였으나 구양화는 보지 못했다.

“으앗! 뭐, 뭐야?”

“뭐긴 뭐야. 보고 있는 거지.”

“보, 보지 마! 이건 대단히 중요하고 위험한 서찰이라고. 말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구양화는 서찰을 탁! 하고 다시 접은 뒤,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기세가 너무 험악해서 현백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는 꼬마 소저는 그런 거에 말려들어도 되는 거야?”

“나, 난 괜찮아.”

“어째서?”

“난 주인공이니까.”

콧방귀를 끼며 턱을 치켜드는 구양화.

그 모습이 귀엽다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 묻은 서찰을 들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현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오시.

계획대로라면, 이제 슬슬 항주로 내려가는 마차를 수배해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현백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머리를 긁으며 행동에 나섰다.

바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려움에 처한 소녀를 버려두고 가는 건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미안해, 친구. 조금만 이해해 줘.’

현백은 멀리 있는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양해를 구한 뒤, 흠! 하고 기합을 넣은 얼굴로 물었다.

“꼬마 소저, 함께 온 사람 있지?”

“어? 어, 있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 아까 그 남자가 말하는 것을 보니까, 그 사람도 이 일에 관련된 것 같은데.”

구양화는 잘 생각이 안 나는 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게, 무당파 속가제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한…… 한…….”

“……혹시, 한호(韓浩) 아냐?”

“맞다! 한호! 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럼 일단 그리로 가자. 이 자리는 피하는 게 좋겠어.”

“어? 왜?”

구양화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물었다.

현백은 계속 두 사람을 힐끗거리는 주변의 구경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우릴 알고 있잖아?”

“응, 그런데 왜?”

“……아까 그 남자는 상처를 입고 있었지?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았어.”

“그럼 여기서 질문. 그 남자는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을까?”

구양화의 얼굴이 등불에 불을 밝히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 추격자가 있는 거구나!”

“그걸 이제 알면 어떻게 해!”

“이제라도 알면 됐지! 왜 성질을 부려!”

구양화는 백연과 함께 있을 때완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백연은 구양화를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규중화(閨中花)처럼 조심조심 대했고, 그 때문에 구양화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고 지루했었다.

그런데 현백은 그런 것이 없다.

마치 자기 또래를 대하는 것마냥 대등하게 대하니, 계속 티격태격 싸우더라도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보아하니 그 서찰은 중요한 물건이야. 어서 도망치자.”

“아, 근데…….”

“근데?”

“백 오라버니가 여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었어. 잘못하면 서로 잃어버리고 못 찾는다고.”

“괜찮아. 한호라는 사람 만나러 갔다며? 그리로 가면 되지. 혹시 그 사람이 없더라도 어디로 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테고.”

현백이 스스로 생각해도 명쾌한 결론이다. 그런데 구양화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조금 망설였다.

“……당신, 정말로 색마(色魔) 아니지?”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또 꺼내는 거냐! 아니, 그보다 그 의심이 다 안 풀렸는데도 나랑 앉아서 이야기를 한 거야?!”

결국 버럭 소리치자, 구양화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아니, 아니. 됐어. 그 의심은 풀렸으니까.”

“뭐?”

“진짜 색마였으면 어떻게든 꼬셔 내려고 달콤한 말만 했을 거 아냐? 그런데 화를 내는 거 보니까 됐어.”

“……영악하긴.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현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경계하고 살아. 세상이 요새 워낙 험하니까 말이야.”

“알고 있어. 난 똑똑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

“어! 지금 비웃었지!”

“안 비웃었어! 너, 자격지심이라도 있는 거 아냐?”

두 사람은 끝까지 툭탁거리면서 자리를 옮겼다.

현백은 구양화를 그가 알고 있는 한호의 집으로 데려갔다.

한호의 집은 자금성 외곽에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집이다. 자금성의 성벽이 보이는 후문 근처에 있는 집으로, 매일 자금성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고용인이 살기엔 딱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누구십니까?”

문을 두드리자 나온 것은 인상이 유순해 보이는 남자 하인이었다.

“이곳에 있는 한 위사를 만나러 왔는데, 안에 계십니까?”

“계시긴 한데……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하인은 현백의 옷차림을 흘끗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유순한 성품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집 안에 들여도 되는지 망설이는 듯했다.

“내 일은 아니고……. 아마, 여기 백…… 잠깐, 꼬마 소저, 네 동행의 이름이 뭐지?”

“백연, 백연이야.”

“들으셨습니까? 무당파의 백연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찾아온 것인데, 혹시 안에 있다면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습니까?”

“아, 그분은…….”

우물쭈물하는 하인의 얼굴 표정만으로도 백연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직도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 듯하여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여기 이 꼬마 소저는 그분의 동생입니다. 우연히 길을 잃게 되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제가 주인어른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결국 하인은 고용인에게까지 예의 바르게 구는 현백의 태도에 감복했는지, 친절한 태도로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두 사람은 대문을 통과해 접객실에 앉았다.

구양화가 현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하인에게 존댓말을 쓴 거야?”

“왜 하인에겐 존댓말을 쓰면 안 되는데?”

“그야…… 하인이니까 그렇지.”

구양화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하인도 사람이야. 내가 월봉을 주면서 데리고 있는 하인이 아니라면 존댓말을 쓸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치만……. 그러면 위아래가 없어진다고 아버님이 그러셨었어.”

“집 안에선 그래야겠지. 하지만 밖에서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현백은 차분한 눈빛으로 구양화를 응시했다.

구양화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화 매!”

그때, 놀란 기색이 역력한 백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깔끔한 도복에 허리춤에 찬 송문고검. 그리고 순박한 눈빛을 한 인상 좋은 사내다.

백연은 구양화의 옆에 앉아 있는 현백을 보며 당황한 얼굴이었다.

“화 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현백. 태어날 때 마당에 있던 측백나무가 벼락을 맞아 까맣게 타 버려서 현백입니다. 보시다시피 평범한 서생이지요.”

“아…… 예. 저는 무당의 제자 백연이라고 합니다. 이름에 대한 유례는 딱히 없습니다.”

백연은 허둥지둥 현백에게 마주 포권을 취했다.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순박한 대응이라고 생각하며 현백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여기 꼬마 소저랑 우연히 노점에서 만났는데…… 그때 마침 검은 옷을 입고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사내가 여기 꼬마 소저에게 서찰을 건네주더군요. 그러고는 ‘이건 네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구양화가 품 안의 서찰을 꺼내 백연에게 건네주었다.

붉은색 피가 묻은 서찰이다.

피를 보자 백연의 분위기가 변했다. 무림인으로서의 백연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서찰을 쭉 훑어본 뒤,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게 백 소협이 아닌 겁니까?”

“화 매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 제가 맞을 텐데…… 하지만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라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백연은 그 부분에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눈치였다.

“사실 여기에 있는 제 지인이 조금 전에 다급하게 후문으로 빠져나간 상태입니다.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요.”

“급한 일…… 이요?”

“예, 지금 이 서찰은 그 일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인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물어보기로…….”

쾅! 쾅! 쾅!

“어?”

그때, 모두의 시선이 대문을 향했다.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기색이 매우 공격적이고 무례했다.

현백을 안내해 준 하인이 황급히 대문을 열기 위해 나갔으나, 의문의 방문자들은 하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작정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자, 잠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자금성에서 일하시는…….”

“알고 있다! 한 위사의 집이지! 그보다 비켜!”

하인은 건장한 사내들의 손에 붙잡혀 옆으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사내들은 백연과 현백, 구양화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숫자는 총 일곱 명.

하나같이 무예를 익혔는지 다부진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장 특이한 점은 모두가 아무런 표식도 없는 흑색 무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거기다가 얼굴을 가리는 복면과 두건만 하면, 밤에 남의 집 담을 넘는 암행의로도 손색이 없는 복장.

사내들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백연과 현백을 쏘아보고 있었다.

“백연?”

“그렇소만.”

“황실의 일이다. 함께 가 주어야겠다.”

사내들은 그 말로 충분하다는 듯 곧바로 백연을 연행하듯 끌고 가려 했다.

“잠깐! 잠깐 기다리시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가야 하는 거요?”

그들의 강압적인 행사는 순박한 백연조차 흥분하게 만들었다.

백연은 자신의 양팔을 붙잡으려는 사내들의 손길을 구름을 밟고 오르는 듯한 신법으로 가볍게 빠져나왔다.

무당의 독문 신법 제운종(梯雲縱)이다.

무당산의 신묘한 기운을 그대로 빼닮은 신법은, 경험이 많아 보이는 흑의 사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공을 쓴다!”

“저항한다!”

“네 이놈! 황실의 행사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호통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

백연은 억울한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런 처사가 어디에 있소! 일단 무슨 일인지 말을 해 주어야 따라가든 말든 할 것 아니오. 난 당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황실의 처사라고만 말하면 다인 거요?”

지당한 말이었으나 흑의 사내들에게 있어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반역이었던 모양이다.

채챙! 챙!

흑의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협봉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검광.

백연의 얼굴도 마침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검을 뽑아 들다니……. 당신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도한 집단일 게 분명하구려. 나는 절대로 따라가지 않겠소.”

흑의 사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외쳤다.

“명백한 반기!”

“강제로 연행한다!”

“시행해!”

흑의 사내들이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고, 백연 또한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마주 보며 허리춤에 있는 송문고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한 위험한 공기가 감돌았다.

바로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동창의 행사는 여전히 너무 강압적입니다. 그래서야 공포를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심어 주지 않겠습니까?”

“누구냐!”

앞으로 나선 것은 현백이었다.

그는 뒤에서 구양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한 뒤, 지금 쳐들어온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제 이름은 현백. 태어날 때 마당에 있던 측백나무가 까맣게 타 버려서 현백이란 이름이 되었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자기소개.

뒤에서 듣고 있던 구양화는 왜 그런 소개를 저 사람들한테 하는 거야! 라면서 흥분했으나, 흑의 사내들의 반응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설마…….”

“당신이……!”

현백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란 여덟 명.

특히 우두머리 사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현백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이런, 처음 듣는 이름에 그렇게 놀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예, 그렇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누가 봐도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우두머리 사내는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백 소협, 제가 글을 배우면서 처세술(處世術)에 대해서도 조금 익힌 바가 있으니, 여기는 제가 중재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예. 부탁드립니다.”

백연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현백은 앞으로 나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 그쪽 분들은 백 소협이 받으신 서찰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서찰 때문입니다.”

“저 서찰엔 황금 세 관, 도기용 백토 다섯 관, 구완마 열 필 등의 물품 백이십팔 종과 그에 관한 수량 약 팔백이십 관이 면밀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물품 목록은 어딘지 제가 아는 어떤 ‘목록’과 닮아 있더군요. 물론 수량은 꽤나 많이 달랐습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는데…… 이건, 제 생각이 맞는 겁니까?”

“…….”

“대답을 안 하시는군요. 맞습니까?”

어느새 흑의 사내들은 모두 검을 검집 안에 얌전히 집어넣고 있었다.

그 사태를 지켜보던 구양화는 깜짝 놀랐다.

현백은 그녀에게 주어진 서찰을 잠깐 훑듯이 봤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서찰을 곱게 접어 품안에 넣었기 때문에 보여 줄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물품이 백이십팔 종이라는 건 어떻게 알고, 그에 대한 총수량은 또 어떻게 아는 것일까?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다 외웠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일.

구양화는 머릿속에 드는 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맞…… 습니다.”

현백은 차분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눈빛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두머리 사내는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거 큰일이군요. 그렇게 되면 황실에 들어가는 진상품의 숫자가 크게 차이가 날 텐데 말입니다.”

“…….”

“황실에 들어가는 진상품에 손을 대는 것은 황제 폐하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 즉, 역모죄가 적용됩니다. 구족이 멸하는 중죄인데, 만약 그 일에 연루가 되는 것만으로도…… 아마, 최소한 삼족은 멸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두머리의 안색은 이제 파랗게 질려 있었다.

우두머리뿐만이 아니다. 사태가 돌아가는 방향을 짐작한 다른 흑의 무사들도 뻣뻣하게 굳은 채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창이 여기까지 나섰다는 건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보자, 지금 동창을 맡으신 분이 영친왕(英親王)의 사촌이신 이 태감(太監)님이시고…… 그러고 보니 저 목록은 산지(産地)를 따져 보면 하북(河北) 지방…… 영친왕님의 땅이군요. 아! 왠지 그림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현백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조용히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흑의 사내들은 어쨌냐면,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들은 사건을 유야무야(有耶無耶) 덮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시군요. 좋습니다.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것 또한 역모를 막기 위한 한 방편일 겁니다. ……그럼, 돌아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마무리를 짓는 현백.

반면에 우두머리 사내는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는 듯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예……?”

“못 들으셨습니까? 저는 그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

우두머리 사내의 얼굴에 환희가 담겼다.

“다만!”

거기에 현백은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말을 덧붙였다.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친왕께 제대로 경고를 하고, 대책을 세워 두어야만 할 겁니다. 비어 버린 국고(國庫)도 채워 두어야 하며, 특히 어쩌다 보니 이 일에 연관이 되어 버린 한 위사와 여기 계신 백 소협을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절대로 억울한 사람이 나와선 안 됩니다. 황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명정대한 처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두머리 사내는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깊이 포권을 취했다.

삼족의 목이 날아갈 뻔했다가 살아난 순간이다.

우두머리 사내는 진심으로 감읍해하고 있었다.

“백 소협.”

“예, 예?”

“그 서찰을 주시겠습니까?”

“아, 예.”

백연은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현백이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백연이 서찰을 건네주자, 현백은 그것을 받아 우두머리 사내에게 주었다.

우두머리 사내는 감읍하며 양손으로 그 서찰을 받아 품속에 집어넣었다.

“저기…….”

“무엇입니까?”

“태감께는……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현백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잠시 먼 길을 다녀와야 하는 낙향 서생입니다. 제가 북경으로 돌아올 때쯤엔, 이곳이 훨씬 좋은 곳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군요.”

“아…… 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우두머리 사내는 현백에게 몇 번이나 절을 한 뒤, 다른 사내들을 이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집 안의 공기는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간의 침묵 이후, 백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문사님.”

“현백이라고 불러 주시겠습니까?”

“에, 현백 문사님, 감사합니다. 저를 큰 곤경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아닙니다. 동창이라니. 잘못 엮였다간 어떤 꼴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연은 현백의 만류에도 몇 번이나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현백 문사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름 뒤에 끝까지 문사님이 붙였다.

현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요? 저는 그저, 낙향 서생일 뿐입니다.”

“예……?”

백연은 어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누가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전에도 문사님처럼 비범한 분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당신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더니, ‘그저 객잔 주인일 뿐입니다.’라고 답하셨었습니다.”

현백은 백연의 말에 기이하게 흥미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하는 생각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재미있군요. 그 비범한 분은 어디서 객잔을 하고 있답니까?”

“아, 항주 금선로였습니다. 화려한 객잔만 즐비한 곳인데, 거기에 인간미가 느껴지는 수수한 객잔이 딱 하나 있지요. 안 그래도 빚을 진 게 있어서, 이번에 다시 한 번 찾아뵈려는 참입니다.”

“항주 금선로…… 입니까?”

“예. 아, 혹시 아십니까? 풍운객잔이라는 이름인데.”

현백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조금 더 캐묻기 시작했다.

“글쎄요.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어떤 곳입니까?”

“편안하고, 친절하고, 좋습니다. 아! 음식도 일품이고, 특히 침모님이 굉장한 미인이신데 너무 좋은 분이셔서 저희 화 매와도 친자매처럼 잘 지내 주셨습니다.”

“호오…… 여자까지…….”

“예?”

“아니, 아닙니다.”

현백은 씩 웃으며, 옆에 서 있는 구양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어느새 사건에 대한 건 잊어버렸는지, 항주로 간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저기, 백 오라버니. 항주로 돌아가는 거야?”

“아! 맞아. 화 매에겐 아직 말을 안 했군. 주변에 알아보니까 내가 쫓던 사람이 이미 황실에 붙잡혔다고 하더라고.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정말?”

“그래서 항주로 돌아가 볼까 생각 중이야. 풍운객잔에 가서 빚을 갚고 싶은데…… 화 매는 어떻게 생각해?”

“좋아! 나도 휘연 언니를 다시 보고 싶어!”

“하하, 그럼 그렇게 하자!”

백연과 구양화는 항주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 현백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

“백 소협, 괜찮다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예? 아,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돕겠습니다.”

“저도 마침 항주로 가려던 참입니다. 그 풍운객잔이라는 곳에도 꼭 가고 싶은데…… 함께 가게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백연은 구양화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현백을 마음에 들어 했던 구양화가 반대할 리가 만무한 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연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럼 풍운객잔까지 함께 가도록 하지요.”

“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포권을 취하며 마주 웃는 두 사람.

현백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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