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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五章 ― 추측불가(推測不可)
“폐하, 정말로 들어가실 겁니까?”
황실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황제에게 서슴없이 조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이름은 백택. 별호는 해태.
겉으로는 가냘픈 문사의 모습을 한 백택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 듯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황실의 관리들 몰래 암행을 나온 세 사람은 지금 금룡마장에서 급하게 빌린 최고급 마차 안에 있었다. 금룡마장의 장주인 장노에게 신분을 드러내면서까지 빌린 마차였는데, 최고급품답게 의자의 안쪽에 명주솜이 몇 겹이나 겹쳐 있어서 앉아 있기가 매우 편했고 특히 마차를 이끌고 있는 몸집이 큰 누런색 말은 항주까지의 여정을 반으로 줄여 줄 만큼 힘이 좋은 녀석이었다.
지금 그들은 항주 금선로에 멈춰 있었다. 안쪽으로 발이 쳐져 있는 창밖으론 황실의 궁전만큼이나 화려한 전각이 보이는 중이다.
문제는 바로 조금 전에 일어났다.
황제가 장 대주의 객잔과 초청승부를 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더니, 갑자기 그곳으로 직접 가 보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백택은 만류했다.
이런 곳에서 정체가 들통 나기라도 했다간 큰일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만인지상의 황제인 태종은 백택이 아무리 만류해도 자신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나도 이건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치 승복처럼 품이 넓고 치렁치렁한 흑색 옷을 입은 사내.
과거에 만적이라 불리던 역모 무리의 장수였으며, 지금은 황제의 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반야혼도 우려를 표했다.
백택과 반야혼이 둘 다 반대를 한 셈이지만 역시 황제의 뜻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짐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오나…….”
“평범한 서생들이 입는 옷이 있지 않나. 낙향한 문사들이 입는 옷 같은 게 필요할 듯한데.”
창밖을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철혈의 황제.
밀정정치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패왕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할 수 없군.’
백택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연왕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셨던 몸이다. 태종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땐 어떤 달변도 그를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최선을 다해서 황제를 도와야만 했다.
“……이각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우선 거하실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필요없다.”
“예?”
“짐은 마차 안에서 기다릴 테니 어서 옷을 구해 오도록.”
백택은 황제가 ‘기다린다’는 말에 잠시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마차 밖으로 나가 지나다니는 인파 속에 섞여든 백택은 그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이각 뒤에 하나의 보따리를 들고 마차로 돌아왔다.
“말씀하신 대로 낙향한 문사들이 입을 법한 옷으로 가져왔습니다. 아무런 특색도 없는 무명천인데…… 만약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나 좀 더 부드러운 천을 원하시면 일각 안에 구해 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이거면 충분하다.”
황제는 안감이 꺼칠꺼칠한 허름한 무명옷을 들어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백택.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너는 짐을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처럼 대하는구나. 잊지 말거라. 짐은 전쟁터를 즐겨 다니는 전왕이니라.”
백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리고 만약 태조께서 백련교도와 결탁해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짐은 지금쯤 이런 옷조차 입지 못할 형편에 직접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농사를 짓지 않았겠나.”
“……폐하!”
백택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듯 외쳤다.
이곳이 밀폐가 되어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면 들은 자들의 혀를 다 뽑아서 말이 나지 않게 해야 할 만큼 중대한 발언이었다.
천인(天人) 사상은 중요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는 반드시 하늘이 점지한 신의 혈통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이 잡히지 않으며, 너도나도 황제가 되겠다고 군을 일으켜 난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은가.
“농담이니,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다.”
“…….”
“둘 다 안에 들어가면 각별히 언행을 주의하도록. 짐은 이곳에 황제로서 온 것이 아니다.”
백택과 반야혼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 봤다.
그들 생각에 걱정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아니다. 황제의 말투, 격조, 행동, 품위, 그리고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까지.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주변을 속일 것인가.
“자, 그럼 가지.”
황제는 허름한 문사복을 입고는 마차에서 내려 청풍객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백택과 반야혼은 그 뒤를 황급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시라고요?”
“이름이 중요한 겁니까?”
“중요하죠. 객주님은 현재 바쁘시기 때문에 미리 약속을 해 둔 게 아닌 이상 연결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곤란하군요.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이름도 안 알려 주시고, 관직도 안 알려 주신다면 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잠깐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도 안 됩니까?”
“불가(不可)! 안 됩니다.”
“객주는 무엇 때문에 바쁜 겁니까?”
“허, 참 질기신 분이군요. 다가올 초청승부 때문인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흐음…….”
“그럼, 이만 나가 주십시오. 만약 이 이상 저희 객잔의 영업을 방해하신다면 사람을 불러 내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백택과 반야혼.
두 사람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저 건방진 총관과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정말로 그들이 아는 황제란 말인가.
관리들이 조금만 불손한 태도를 보여도 불호령을 치던 높은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가.
대답을 질질 끌거나 회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격한 성질은 어디로 갔고?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황제에게선 만인을 압도하던 위압감도, 눈앞에 선 자를 짓누르는 듯한 강렬한 안광도 없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두 사람에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보였다.
황제가 청풍객잔의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면을 확 뒤집어쓴 것처럼 완전히 변해 버렸던 것이다.
허름한 문사복.
엉거주춤한 자세.
살짝 좁힌 어깨까지.
누가 봐도 평범한 낙향문사였다.
황제로서의 위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쯧…….”
한편, 청풍객잔의 총관은 난감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갑자기 정문으로 들어와서 객주를 만나겠다고 떼를 쓰는 문사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방태풍은 철저히 ‘급’을 따지는 사람이다.
대단한 명가의 후예이거나 특별한 관직에 올라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얼굴조차 내비추지 않는다.
그는 그게 문 대인과 친분을 쌓은 자로서 유지해야하는 격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총관은 철저하게 그들을 선별해 내야만 했다.
예전에 한 번, 정칠품 관리가 하도 졸라서 방태풍에게 소개를 시켜 줬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호통을 한 번 듣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쫓겨날 뻔했다.
그 뒤로 총관은 방태풍에게 함부로 사람을 소개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논할 가치도 없잖아.’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낙향문사다.
허름한 옷차림.
딱히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인상.
무예를 좀 닦았는지 골격이 튼튼한 게 눈에 띄지만, 그것 말고는 졸지에 관직을 잃고 고향으로 귀향하는 전형적인 서생이었다.
‘보나마나 어떻게든 줄 좀 엮어 달라며 객주에게 부탁하러 온 사람이겠지.’
이런 인간들은 하루에도 열 명은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서생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한 사람은 흑의, 한 사람은 백의를 입었는데, 흑의를 입고 죽립을 쓴 쪽은 명색이 호위무사이면서 칼도 없었고, 백의를 입은 서생은 피죽도 못 먹고 자랐는지 옷 품이 한 아름은 남을 만큼 말라 있었다.
‘중하(中下). 아직 사람을 고용할 돈은 있지만 특별할 것 없는 위인이다. 낼 수 있는 돈은 많아 봤자 은자 사오십 냥.’
총관은 머릿속으로 등급을 내린 뒤, 끈질기게 질문을 해 오는 서생에게 대충 대답해 주고는 결론을 지었다.
“그럼, 이만 나가 주십시오. 만약 이 이상 저희 객잔의 영업을 방해하신다면 사람을 불러 내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름장을 놓은 게 통했는지 서생의 질문이 딱 멈췄다.
총관은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생은 이제 단념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마치 고위 관료가 된 것 같은 전율에 득의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이봐.”
반야혼은 청풍객잔의 건방진 총관이 다른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사라진 뒤, 황제에게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 거야?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던데.”
황제는 소리없이 입꼬리만을 움직여 웃었다.
잠시뿐이지만 황제로서의 웃음이 살짝 엿보였다가 사라졌다.
“젊었을 적엔 암행을 자주 나왔었지. 그때 자주 흉내 냈던 것이 전쟁터에서 갓 돌아온 병사나 지금처럼 관직을 잃고 낙향한 문사였다.”
“호오, 이런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군?”
“그런 거지.”
“재미있네. 황제 폐하도 제법 괜찮은 취미를 갖고 있었어.”
반야혼이 왠지 찌릿한 느낌에 옆을 보자, 백택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혀 재밌는 취미가 아니다.”
“뭐야, 재밌잖아?”
“폐하, 그보다 저쪽에서 내려오는 거구의 사내가 이곳 객잔의 주인인 방태풍이라는 자입니다. 산동의 시골 출신으로, 십칠 세 때 가족들이 땅을 사기 위해 준비해 둔 돈을 훔쳐서 항주에 상경. 그 뒤로 객잔을 열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황제는 백택이 말해 준 정보를 들으며 계단을 뒤뚱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방태풍을 쳐다봤다.
뒤에서 반야혼이 나를 무시하냐며 백택과 툭탁거리는 소음은 가볍게 무시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살이 찐 자군.”
“예, 그렇군요.”
“그런데 정보가 평소보다 더 자세한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백택?”
“항주 금선로는 최근 요주의 지역이라 미리 정보를 모아 두었습니다. 항주 지부대인 문표, 통정사 이자형을 중심으로 남부(南部) 세력들이 이곳에서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지.”
황제는 얼마 전에 동창과 도찰원(어사대)으로부터 받았던 보고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태풍은 계단을 다 내려와 총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이 총관! 내가 낮잠을 자고 나면 반드시 간식을 먹어야 하는 것 몰라? 내 밑에서 일한 게 벌써 몇 년째인데 매번 내가 이걸 직접 말해야 돼!”
쩌렁쩌렁하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객잔 안을 울려 퍼졌다.
총관은 객잔의 투숙객과 나누던 이야기를 황급히 중단하고 방태풍에게로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총관님. 초청승부 준비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만…….”
“커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사람이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서 일이나 할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됐으니, 내가 평소에 먹던 대로 심태연이랑 다과 좀 챙겨와.”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굽실거리는 총관과 거들먹거리는 방태풍.
황제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방 객주.”
“엉? 누구…… 시더라?”
방태풍은 자신의 앞길이 막힌 것에 대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땀을 흘려 번들번들해진 얼굴 살 사이로 새우처럼 작은 눈이 황제의 전신을 훑어봤다.
“음…….”
방태풍은 육감이 좋은 자다.
보이는 것과 달리 뭔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대화를 해 보려고 했으나, 이게 자신의 실책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총관의 대응이 한발 더 빨랐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객주님은 바쁘니 소개시켜 드릴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총관은 버럭 화를 내며 방태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낮잠을 자고 간식을 먹는 게 바쁜 일입니까?”
“그, 그건 객주님의 건강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보다 빨리 나가 주십시오!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사람을 부르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잠깐 이야기나 나누겠다는 건데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는 겁니까?”
“예민하게 군다니! 우리 객주님께선 아무나 만나 뵐 수 없는 분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방태풍이 나직하게 물었다.
“이 총관, 어떻게 된 거야?”
“별거 아닙니다. 평소처럼 청탁하러 온 사람입니다.”
“뭐야, 그랬어?”
방태풍은 실망한 듯이 혀를 끌끌 차며 총관의 어깨너머로 황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에 힘없는 눈빛이다.
그는 잠시 잘못 봤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 총관이 알아서 처리해.”
“예, 그러겠습니다!”
황제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뒤뚱뒤뚱 계단을 오르는 방태풍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고작 객잔의 주인 따위가 고관대작 행세라니,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게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이렷다!”
“뭐, 뭐, 뭐야?!”
“잘 들어라, 방태풍! 혼자서 계단도 못 올라가는 몸으로 감히 권좌를 쥐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여우는 여우일 뿐. 평생 호랑이가 될 순 없다!”
방태풍의 걸음이 뚝 멈췄다.
총관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외쳤다.
“독두파를 불러! 저 미친 서생을 당장 매질하고 쫓아내!”
기다렸다는 듯이 중처럼 머리를 민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황제는 앞으로 나서려는 백택과 반야혼을 제지하고 스스로 외쳤다.
“이런 객잔엔 이제 볼일이 없다. 내 발로 나갈 것이다!”
황제는 그러고는 두 말 않고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갔다.
백택과 반야혼도 그 뒤를 따라나가고, 숨을 씩씩거리던 총관은 당장 쫓아가서 매질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방태풍이 그것을 말렸다.
“됐어. 이런저런 말을 떠드는 자들도 있는 법이지. 그런 것 하나하나에 대응해서는 여기서 장사 못해.”
평소대로라면 방태풍도 흥분해서 매질을 하라며 함께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방태풍은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비록,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지만 말이다.
“의외네. 바로 쫓아 나올 줄 알았는데.”
반야혼은 청풍객잔의 대문이 조용한 것을 보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백택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명심해라. 너는 이제 폐하의 번견(番犬)이다. 함부로 네 마음대로 살생을 해선 안 된다.”
“저쪽이 먼저 덤벼들면 함부로가 아니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 아냐?”
둘의 다툼을 지켜보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이번엔 반야혼의 말이 맞다, 백택.”
“……폐하, 반야혼은 야수입니다. 규제를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됐다. 짐은 지금 그대로의 반야혼이 좋다. 항상 지금처럼 사납고 자유롭게 살아라.”
반야혼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씩 웃었고, 백택은 잠시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백택은 뭔가 감정을 쌓아 두는 사람이 아니다.
조언을 하고 황제가 그것을 거부하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재고하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그들이 다음에 해야 할 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럼 곧바로 풍운객잔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곳엔 가지 않겠다. 오랜만의 만남이라는 것은 극적일수록 즐거운 법이지. 안 그런가?”
“그렇다면……?”
“초청승부는 내일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금선로 최고의 객잔은 창해루라고 들었다. 오늘은 그곳에서 묵는 게 좋겠다.”
백택은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끌기 위해 어자석에 올라갔다.
황제는 마차에 오르기 전에 양팔을 양옆으로 쭉 펼친 채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발로 땅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특이한 행동임에도 황제에겐 그 행동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넓은 하늘.
광활한 대지.
철혈의 황제는 대지를 짓밟고 하늘을 양팔로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궁궐 밖의 하늘은 왠지 궁궐 안의 하늘보다 넓은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땅[地]과 하늘[天]을 잇는 것이 사람[人]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맞는 말이야. 짐은 이렇게 세상을 느끼는 것이 좋다.”
“흐음.”
황제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반야혼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해 보았으나, 반야혼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가 그런 반야혼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바깥은 즐겁다. 과거에 조맹덕이 한나라를 다 차지해 놓고도 제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이렇게 좋은 것들이 밖에 많은데 뭐 하러 궁궐 안에 죄인처럼 갇혀 있고 싶겠나.”
“폐하, 또 그런 말씀을.”
백택이 어자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백택 때문에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구나.”
“……폐하.”
“자, 출발하자.”
황제와 반야혼이 마차에 올라타자 백택의 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벅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황아(黃蛾)란 이름을 가진 명마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음에도 금선로엔 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창해루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잠시, 마차가 한 쌍의 남녀를 지나칠 때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마부석에 앉아 있던 백택이 갑자기 마차를 멈췄다.
“뭐야?”
“무슨 일인가?”
마차 안의 반야혼과 황제가 질문했으나 백택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정면을 바라본 채 입가에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별일 아닙니다, 폐하.”
“그래?”
황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백택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터벅, 터벅.
묵직한 황아의 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창해루를 향해 나아갔다.
금선로의 하늘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너무나도 맑았다.
☆ ☆ ☆
초청승부가 벌어지는 날.
항주 금선로의 하늘은 너무나도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덕분에 햇볕이 너무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장기린은 풍운객잔의 뒷마당에 서서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바람이 흘러가고, 다시 흘러 들어왔다.
하늘, 그리고 땅.
광활한 자연 속에 모든 것을 맡기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바람에 섞어 흘려 보냈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장기린은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그가 큰 고민이라고 생각하던 문제도, 그가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소원도 자연의 거대함 속에선 다 부질없는 티끌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난 존재하지? 왜 난 살아 있지?’
모든 것이 티끌이라면, 무엇이 티끌과 사람을 구별 짓게 하는가?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
사람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
그렇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가치가 있는가?
살아 있는 생물과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장기린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 갔다.
질문으로 질문을 답하고, 그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답하는 무한한 순환.
그리고 마침내 그에 대한 답이 잡힐 듯한 순간,
“여전히 그 버릇은 못 고쳤군, 친구.”
낭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를 질문의 바다에서 끄집어냈다.
“……현백.”
장기린은 양팔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서신을 받자마자 그를 위해 항주까지 달려와 준 친구가 별채의 마루에 앉은 채 빙긋 웃고 있었다.
허름한 문사복을 입었음에도 외모가 빛이 난다.
깨끗한 피부와 선명한 이목구비.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얼굴과 온화한 눈빛은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언제부터 했더라? 아, 북로전쟁에서 ‘그분’이 하는 걸 보고 나서 따라 했다고 했던가? 그게 벌써 칠 년 전이지?”
“맞아.”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야, 너는 큰 전투가 있는 날은 그걸 하더라고. 그걸 하면 어때? 마음이 편해져? 부담이 덜어지나?”
장기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흐음, 그래?”
“그보다는 물어보고 싶은데, 정말로 오늘 문표가 안 올까?”
지금 북경에서 대회합이 열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곳에 참석해야 하는 문표는 오늘 초청승부에 오지 못할 거라고 현백은 말했었다.
그리고 현백은 문표만 오지 않는다면 승부는 풍운객잔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문표’만 오지 않는다면.
장기린으로선 그 전제를 한 번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칠 할 정도는 확실해.”
“칠 할?”
“왜, 생각보다 적어?”
“어제 이야기하는 걸로 봐선 십 할 확신하고 있다 생각했다.”
현백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런 급작스러운 상황에 칠 할이면 충분한 수치지 뭘 그래?”
“……그런가?”
“그래. 그리고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만약 이 승부에서 지게 되면? 그래서 객잔을 팔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떠나야지.”
“기린, 자네 혼자서 쳐들어가도 청풍객잔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잖아?”
“…….”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장기린은 현백이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장기린이 현백의 내심을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지 않을 거야.”
“어째서?”
“그랬다간 전장을 벗어나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강 숙수 때문에 싸운 적이 있잖아?”
“…….”
“혼자서 장흠파인가 하는 파락호들을 다 쓸어버렸다며? 그렇게 눈에 띄었는데 주변에서 가만히 둘까? 차라리 초청승부에서 깔끔하게 지고 여길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
현백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장기린도 지금껏 남몰래 고민해 오던 부분이다.
그의 숨겨진 실력이 드러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면?
그리고 그의 정체가 발각이 된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항상 그걸 두려워했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운찬이 죽도록 내버려 뒀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짓을 하고 평범하게 살 수는 없다.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이곳을 지킬 거야.”
장기린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연, 운찬, 아칠, 아팔. 모두의 고향이 여기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여기서 계속 지내고 싶어.”
“만약 정체가 발각된다면? 알잖아, ‘그분’이 계속 너를 찾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라는 건, 여기 객잔의 식구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백은 그런 장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게 네 생각이군.”
현백은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장기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린, 너는 항상 다른 사람이 받을 피해만 걱정하는 경향이 있어. 자기 자신이 받는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뭐랄까, 자신의 가치를 너무 무시한달까?”
“그게 무슨 뜻이지?”
“자신의 가치를 좀 더 소중히 하라는 거야. 어제 잠깐 만나 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객잔 식구들이 너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어.”
현백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기린, 너는 네 생각보다 가치가 커. 객잔 식구들은 만약 네가 잘못되거나 사라지면…… 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절망하고 상심할 거야. 잊지 마. 이 객잔의 중심은 장기린이다. 장기린이 없다면 이 객잔도 없어.”
진지한 눈빛.
위로하듯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을 적신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현백은 장기린이 수긍하자 곧바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음?”
“제수씨 말이야. 어이,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내가 볼 땐 충분히 가능…… 알았어, 알았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십 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거야.”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었고 현백도 그저 먼 하늘만 쳐다보며 말을 걸지 않았다.
십 년 전, 만월의 밤.
양손을 끈적하게 적시던 뜨거운 피.
그날 이후, 장기린은 여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다.
“기린, 너는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거야. 그리고 평범한 삶에는…… 함께할 반려자도 당연히 필요한 것 아닐까?”
현백의 목소리는 아늑한 밤공기처럼 편안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되고, 그 사람을 아끼고 항상 함께하고 싶다. 그게 곧 연정(戀情)인 거야. 특별할 것 없어.”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당장 제수씨한테 연모한다 고백하고 손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알았어, 알았다니까!”
현백은 장기린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 객잔 본채로 후다닥 도망쳤다.
그리고 문 앞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장난스레 소리쳤다.
“잊지 마! 우리 나이 정도면 슬슬 자식을 볼 나이라고!”
“……그러는 너는?”
“하하! 나야 아직 모르지만, 아마 북경 어디에 내가 모르는 자식이 몇 명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당장 짐 싸서 돌아가라!”
집어 던진 돌멩이가 재빨리 닫힌 문에 막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시 고요해진 마당.
그곳에서 장기린은 피식 웃었다.
‘피하는 걸 보니…… 그동안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나 보군.’
비록 장난이더라도 장기린의 주먹에 돌멩이까지 피한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여간, 당해 낼 수가 없는 녀석이다.”
곧 있을 초청승부에 신경을 쓰기도 바쁠 텐데 자신의 심정까지 신경을 쓰다니.
장기린은 현백을 친구로 만들어 준 하늘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 ☆ ☆
“정말로 도와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직접 배웅을 나온 낭화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금 물어 왔다.
“괜찮아.”
“그래도…….”
그녀가 사뿐히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아찔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한 걸음 가까워진 만큼 체향도 강하게 느껴졌다.
낭화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그런 그녀를 가로막는 자그마한 그림자가 있었다.
“흥! 괜찮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척 하니 홀로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것은 구양화였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그녀는 고집스러운 눈매로 낭화를 째려봤다.
“그렇게 화장을 떡칠을 하고, 향유를 있는 대로 뿌리고 나타나서 뭘 어쩔라고? 남자라도 꾀러 온 거야, 여기?”
“뭐…… 라고요?”
“그렇잖아? 너무 노골적이라서 못 봐주겠어!”
사납게 몰아세우는 구양화에게는 일견즉통이라 불리는 천하의 낭화도 당해 낼 수가 없는 듯이 보였다.
낭화의 화장은 짙지 않다.
체향도 향기 자체가 인상이 강할 뿐이지 거부감이 일 만큼 진하게 나는 것은 아니다.
‘……라고는 아마 말할 수 없겠지.’
장기린도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눈치라는 게 생겼다.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낭화를 편들었다가는 여인들 사이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구양화가 휘연의 편을 들어 낭화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으윽,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뭐랄까, 지금 내 상황이 조금 곤란해서. 몇 명 아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당장 연락해서는 오늘 안에 데려오긴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구양화도 심성이 착한 소녀였다.
그녀는 뭔가를 돕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에 잔뜩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
“하지만…….”
“정말로 괜찮다. 오늘 승부는 이 녀석으로 충분해.”
구양화는 현백을 흘끗거리면서 아쉬운 얼굴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구양화의 뒤에 서 있던 백연도 장기린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울상이 되어 있는 얼굴로 봐선 아마 돕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짝! 짝!
“자자, 아름다운 소저들께선 그쯤해 주세요.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때라서 말입니다.”
현백은 박수를 쳐서 시선을 모은 뒤, 명마 녹산(綠山)이 이끄는 마차에 올라타며 장기린에게 손짓했다.
장기린은 객잔의 식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모두들…….”
객잔 식구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오늘 객잔의 영업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안 그래도 며칠 쉰 것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데, 여기서 또다시 휴업을 한다면 타격이 클 게 자명했던 것이다.
모두를 대표해 휘연이 나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노란색 경장을 입은 그녀는 장기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은은한 연꽃 향이 난다.
휘연이 이마가 코에 닿을 정도로 다가와 손을 뻗어 장기린의 옷깃이 비뚤어진 것을 고쳐 주었다.
“잘 다녀오세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생긋 웃어준다.
장기린은 왠지 초청승부가 어찌 되든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휘연이 있다면, 그리고 운찬, 휴, 아칠, 아팔이 있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다녀올게.”
모두를 각자 한 번씩 쳐다본 장기린은 현백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힘이 좋은 말 덕분에 풍운객잔은 순식간에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야, 사람이 정말 많네. 역시 초청승부는 승패에 관계없이 동네 사람들한테 축제나 마찬가지인가 봐.”
“확실히 그렇군.”
“저 봐, 저걸 좀 보라구.”
청풍객잔에 도착했을 때, 현백은 입구 근처에 몰려 있는 인파들을 가리키며 흥분했다.
“노점도 열렸잖아! 하여간 상인들이란. 돈이 될 만한 곳은 귀신처럼 알아차린다니까.”
“돈은 중요하니까.”
현백은 고개를 휙 돌려 장기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감격했다는 듯이 거짓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안 본 새 많이 컸는데, 친구? 돈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시끄러워. 그보다 이제 들어가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물론 있지.”
현백은 씩 웃으면서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은 것이었는데, 뼈를 깎아서 만든 것처럼 색깔이 하얗고 평평하게 만들어진 여덟 개의 면엔 각기 다른 숫자의 점이 찍혀 있었다.
“팔각석(八角石)이라는 거야. 왜, 전쟁터에서 봤지? 싸움 끝나고 나면 병사들이 술 마시면서 이거 던지면서 놀고 그랬잖아.”
“그래,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이렇게 비싸 보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그때 그건 나무 깎아서 만든 거고, 이건 서역에서 들여온 상아(象牙)를 깎아 만든 최고급품이니까.”
현백은 씩 웃으면서 하얀색 팔각석을 공중으로 한 번 휙 던지더니 양쪽 손바닥을 겹쳐서 박수를 치듯이 받았다.
“몇일 것 같아?”
“팔.”
장기린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이런 재미없는 친구 같으니.”
현백은 혀를 찼으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맨 위에 있는 점의 개수는 정확히 여덟 개였다.
“자, 다시 한 번.”
현백은 팔각석을 다시 한 번 던진 뒤 이번엔 몇일 것 같냐고 물었고, 장기린은 이번에도 팔이라고 대답했다.
손바닥을 열자, 역시나 이번에도 숫자는 팔이었다.
“자, 또 한 번.”
그리고 세 번째.
장기린이 한 대답도, 현백이 손바닥을 펼쳐서 보여 준 숫자도 똑같이 팔이었다.
“던진 팔각석의 숫자가 몇인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걸 어떻게 하는지 알겠지?”
현백은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팔각석을 장기린에게 넘겨주었다.
장기린은 팔각석을 잠시 살펴보다가 현백이 한 것처럼 정확한 순간에 손으로 받아서 맨 윗면을 팔로 만들었다.
모든 것은 안력(眼力)과 박자(拍子)다.
장기린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역시 잘하는데!”
현백은 감탄하며 손가락으로 장기린의 손바닥 위에 놓인 팔각석을 가리켰다.
“그게 초청승부에서 네가 할 일이야.”
“…이게?”
“그래, 이게.”
“이것만 하면 된다는 건가?”
다시금 물었으나, 현백은 대답없이 씩 웃을 뿐이었다.
현백의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초청승부가 시작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수백 명이 넘는 손님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한 청풍객잔은 객주 방태풍이 기나긴 연설을 끝내자 느닷없이 연회석의 중심으로 장기린을 불러 팔각석을 손에 쥐어 주었던 것이다.
방태풍과 장기린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팔각석을 던져 양손으로 받았다.
손바닥을 펼쳤을 때, 방태풍의 손 위에 있는 숫자는 육.
그리고 장기린의 손에 있는 숫자는 팔이었다.
“자, 그러면 이긴 쪽이 나중이니, 손님 공개는 청풍객잔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청풍객잔의 총관은 큰 소리로 외쳤다.
“청풍객잔의 손님,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기녀들이 현악기를 뜯고, 손님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악사들이 북과 옥소를 울렸다.
흡사 경극 속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듯한 화려한 풍경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예악 속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턱아래의 수염을 청수하게 기른 중년 관리가 천천히 연회장에 등장했다.
고급스러운 관복 위로 화려한 자주빛 비단 장포를 걸쳤다.
머리 위의 관모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했고, 서늘한 눈빛은 기품있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방태풍이 연회석 앞에서 한발 먼저 나가 관리를 향해 예를 표했다.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뒤, 연회석 주변으로 잔뜩 모인 관중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본인의 이름은 이자형. 현재 통정사를 책임지고 있소. 여기 방 객주와의 평소 친분으로 말미암아 이번 초청승부에 빈객으로서 오게 되었소.”
통정사 이자형의 담담한 소개 뒤에 총관이 목소리를 높여 설명을 덧붙였다.
“이 대인께선 정삼품, 통정사의 관직을 지내고 계시며, 통정사는 황제 폐하께 올라가는 상소를 총괄하는 직책입니다.”
오오오―!
군중들은 이자형을 향해 감탄과 환호성을 보냈다.
정삼품의 관리라면 항주의 목(牧)과도 대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행세할 수 있는 직책이니, 평소엔 보통 사람들이 그 발끝조차 보기 힘든 신분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눈앞에 데려온 청풍객잔을 향해 환호성을 보냈다.
평소 머리 위에 있던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서 쳐다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초청승부의 장점인 것이다.
뜨거워진 열기는 한참 동안이나 식을 줄을 몰랐다.
‘지부대인이 아닌 것은 다행이지만……. 정삼품이라면 생각보다 높은데?’
그와 함께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은 현백의 관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던가.
철우는 현백이 설령 한림원의 최고 관직인 학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백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문표만 아니라면 이길 수 있다고 말했을까?
그사이 청풍객잔의 총관이 사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자, 그럼 다음은 풍운객잔의 손님을 소개할 차례입니다. 풍운객잔의 손님, 입장해 주십시오.”
다시금 울려 퍼지는 예악 소리와 함께 이자형이 나왔던 반대 방향에서 현백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
“에이…….”
군웅들 사이에서 실망한 듯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현백은 젊고 잘생겼지만, 허름한 문사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고위 관료가 아니다.
게다가 금선로에서 가장 허름한 풍운객잔의 손님이다 보니 관리라고 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냐는 생각이 팽배했다.
저벅, 저벅.
“어?”
“으음…….”
하지만 현백이 연회석의 앞으로 나와 걸음을 멈췄을 때,
현백의 눈을 본 모두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현백. 태어났을 때 마당에 있던 측백나무가 벼락을 맞고 까맣게 타 버려서 현백입니다.”
주변 사람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들어 봤을 자기소개가 끝나자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한 사람.
이미 방태풍의 옆에 착석해 있던 통정사 이자형은 현백의 자기소개를 듣자 청수한 인상을 무너뜨린 채 두 눈을 부릅뜨고 현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 모습은 분명 무언가를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 대인?”
“잠깐, 조용히 하시오.”
이자형은 방태풍에게 면박을 주면서까지 앞으로 현백이 내뱉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을 하고 있었다.
한편, 청풍객잔의 총관은 현백이 관직을 말해 주지 않자 아연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기, 그게…… 이번 손님께선 자신의 관직을 직접 소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손님, 관직을 말씀해 주시지요.”
현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현재 한림원의 수찬을 맡고 있습니다. 관직으로 따지자면 종육품입니다.”
곳곳에서 ‘역시……’나 ‘뭐야, 그랬어?’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또한 방태풍의 입에선 노골적인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삼품과 종육품.
이건 비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너무나 큰 차이다.
그런데 방태풍의 옆에 앉아 있던 통정사 이자형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이럴 수가, 정말이었다니……!”
그의 당황을 부추기듯 현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관직은 황제 폐하의 칙령을 받은 뒤로 표면상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 제 직책은…… 황실 직속 밀정어사(皇室直屬密偵御使).”
현백은 이마 위를 가리고 있던 문사건을 벗었다.
갇혀 있던 긴 머리카락이 올올이 풀려 나오며 준수한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군중들 중 여인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 모양이 바뀐 것만으로도 현백의 외모가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더 빛나 보였던 것이다.
현백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사 임무의 특성상 도찰원(都察院)의 부도어사(副都御史)와 같은 권한을 지닙니다. 청풍객잔의 총관이라면 그 직위를 알고 있겠지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현백의 시선이 청풍객잔의 총관을 향했다.
총관은 화들짝 놀라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도, 도찰원의 부도어사라면 정삼품……. 토, 통정사 이 대인과 같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그 후, 군웅들에게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는데, 그 함성은 통정사 이자형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더욱 뜨거웠다.
“와아아―! 진짜냐!”
“저렇게 젊은데? 정말로 그만큼 높은 분인 거야?”
“대단한데! 생각보다 꽤 하잖아, 풍운객잔!”
들끓는 환호성 속에서 절대로 즐거울 수 없는 사람이 세 사람 있었다.
청풍객잔의 총관.
통정사 이자형.
그리고 청풍객잔의 객주, 방태풍.
“이런…….”
방태풍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혀를 찼다.
황실의 밀정어사와 북경의 통정사.
그 둘은 똑같은 정삼품이지만 성향이 너무 다르다.
그는 이제야 이자형이 현백의 이름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창백한 안색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통정사와 밀정어사를 다른 것에 비유하자면, 몸집이 똑같은 개구리와 뱀 정도가 될 것이다.
둘 다 고위 관직이지만 처리하는 ‘일’이 다르다.
통정사는 직책 그대로 황제에게 올라가는 상소를 총괄한다.
즉, 상소를 올리고 싶어 하는 하위 관료나 지방의 태수들에게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지만, 반대로 황제와 가까운 황실의 실권자에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밀정어사는 통정사와는 정반대다.
병사도 없고, 관리들 사이의 인맥도 없으니 휘두를 만한 권력도 없지만 단 하나, ‘감찰권’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칼을 갖고 있다.
특히 황실의 밀정어사는 동창과 깊은 협력을 맺고 관리들의 비리를 캐내 물어뜯는 냉혹한 사냥꾼이었다.
그러니 싸움이 될 리가 없다.
‘큭큭, 하늘이 돕는구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방태풍은 그 순간, 이자형을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하늘이 그를 도운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주변 분위기는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통정사라든지 도찰원이라든지, 그런 것을 잘 모르더라도 군웅들은 본능적으로 현백 쪽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욱이 젊고 잘생긴 청년이지 않은가.
그들의 선호도는 이미 확고해 보였다.
그사이, 현백은 경직되어 있는 이자형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자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뭘 한 거야?
“몇 개 주워들은 소문을 말해 주고 왔어. 지방의 관청에서 올라온 상소문 몇 개를 마음대로 고쳤다는 이야기야.”
장기린은 이자형을 힐끗 쳐다봤다.
여전히 굳어 있는 그는 이제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말싸움으로 가더라도 금세 패배를 인정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봐!”
방태풍은 총관을 손짓으로 불러 귓속말을 전해 주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총관도 그 소식을 듣자 만면에 미소를 띠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잠깐! 환호를 멈추십시오! 청풍객잔에선 소개해 드릴 손님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군웅들은 환호성을 멈추고 웅성거렸다.
“손님이 더 있어?”
“그래도 되나?”
“손님은 각자 한 사람씩 데려오는 것 아니었어?”
총관은 군웅들의 의문을 애써 모른 척하며 예악대에게 수신호를 보내 연주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심금을 울리는 현음(絃音)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군웅들의 목소리는 자연히 음색에 묻혔다.
그리고 잠시 후, 시선을 압도하는 광경에 군웅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야, 저거?”
“가마를 타고 온 거야?”
“도대체 누구기에……?”
청풍객잔의 다음 손님은 몸집이 큰 장정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있는 가마에 올라탄 거구의 사내였다.
나이는 오십대.
배가 나오고 풍채가 둥글둥글한 것이 방태풍과 막상막하를 이뤘다.
하지만 퉁퉁한 얼굴에 사람 좋은 인상과 사람을 깔아 보는 듯한 냉혹한 눈빛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저 사람은……!”
처음에 현백이 등장했을 때 이자형이 긴장했다면, 이번에 갑작스레 나타난 청풍객잔의 세 번째 손님은 현백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항주 지부대인?”
현백은 설마하는 눈으로 노려봤으나 가마에서 내려 연회석에 천천히 발을 딛는 인간돼지는 의심할 바 없이 항주 지부대인 문표였다.
현백은 원망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기가 돕는다고 생각했건만, 하늘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