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49화 (43/686)

第四十六章 ― 운명무변(運命無變)

“본인은 항주의 지부대인 문표요. 지금 북경에서 열리는 대회합에서 삼공(三公)의 직위에 오르게 될 예정인데, 대회합이 급히 중단되어 이곳에 참석하게 되었소이다.”

소개가 끝나자 군웅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삼공의 직위라니.

당장 여기서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반면에 장기린과 현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문표와 방태풍의 얼굴에 자신감 가득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북경에서 대회합이 열린다기에 안심하고 있었건만, 하늘이 돕지 않았는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현백, 문표가 오면 이길 수 없다고 했지?”

“맞아. 내가 가진 정보로는 문표를 몰아세울 수 없어.”

“그럼 진 건가?”

장기린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글쎄…….”

현백은 대답을 보류했다.

“글쎄라니? 아직 방법이 있는 건가?”

“방법은 없어.”

“……무슨 말이야?”

“하지만 뭐랄까, 하늘이 도울 수도 있달까.”

현백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장기린은 미간을 좁혔다.

항상 이런 식이다.

현백은 다른 사람들과는 사고의 속도가 달라서 도저히 생각을 쫓아갈 수가 없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기도나 해 보자는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 천지인 중에 천이 있으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다고.”

“그 천(天)이 안 도와줘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현백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반박하진 않았다.

한편, 그러는 사이 문표와 방태풍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문표는 뒷짐을 진 채 헛기침을 하며 군웅들을 쭉 응시했고, 방태풍은 잔뜩 들뜬 채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채 사방에 자신의 인맥을 과시했다.

군웅들에게서 환호성은 없었다.

문표의 모습이 호감으로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뒷짐을 지고 있는 배불뚝이 관리를 누가 좋아할까.

게다가 그 관리가 마치 하찮은 개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삼공에 오를 사람이라면…… 분명 저쪽이 높겠지?”

“그렇겠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청풍객잔이 더 대단한 사람을 데려왔네.”

군웅들은 수군거리며 중론을 하나로 모았다.

북경의 황실 밀정어사와 곧 삼공의 지위에 오를 항주 지부대인.

어느 쪽이 더 높은 신분인지는 명백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걸로 승부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군요! 풍운객잔 측, 더 데려올 손님이 있습니까?”

“없소.”

장기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관은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그는 장기린을 흘끗거리며 이죽이죽 웃더니, 명백히 놀리는 듯한 말투로 결과를 확정지으려 했다.

“그럼 승부는 결정된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잠깐. 분명 초청승부는 손님들 사이의 대화와 설전으로 승부를 내는 거라 들었는데?”

“예? 아, 뭐, 표면적으론 그렇습니다만…… 하실 겁니까?”

총관은 노골적으로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불쌍해서 안됐다는 눈빛이 아니라.

불쌍할 정도로 한심하고 지저분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문표가 지위가 더 높고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아무리 논리적인 설전을 벌여도 초청승부에선 이길 수 없다.

승부는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서로 간의 힘을 비교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총관의 말은 굳이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서 스스로 창피를 늘릴 필요가 있겠냐는 뜻이었다.

“이쯤에서 승부를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이상 계속하는 건 추태밖에 더 되겠습니까?”

“…….”

“어쩔까요? 계속할까요?”

귀에 거슬릴 만큼 한껏 들떠 있는 총관의 목소리.

그 심정은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가까이에 있던 관객들 여럿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가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총관의 말이 맞았다.

이 이상은 추태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분위기가 굳어질 때 즈음…….

“잠깐. 승부를 잠시 멈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

갑자기 들려온, 묵직하면서도 깊이있는 목소리가 총관을 제지했다.

의아해하는 군웅들 사이를 헤치고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묵직하면서 깊이있는 목소리는 그들 중 가장 앞에 나선 중년의 사내로부터 나오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낙향서생 같은 옷차림과는 달리 어딘가 고풍스런 분위기를 주변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백(白), 한 사람은 흑(黑).

백의를 입고 있는 것은 안스러울 만큼 옷 품이 많이 남는 마른 체구의 사내였고, 흑의를 입고 있는 것은 척 봐도 단련된 육체를 지닌 건장한 사내였다.

“당신은……!”

총관은 곧바로 그들을 알아봤다. 그리고 벌레를 씹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서는 겁니까!”

“초청승부에 참석한 사람은 필요한 경우에 발언권이 있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특히 당신에겐!”

총관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버럭 지른 뒤, 옆에 서 있는 방태풍과 문표에게 허리가 부러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당장 끌어내겠습니다.”

“쯧쯧, 나설 곳, 안 나설 곳을 못 가리는 사람이었구만.”

방태풍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총관이 더욱 당황하며 연회장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독두파의 덩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앞으로 나선 세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 다섯 명의 거한이 우르르 달려왔다.

머리를 빡빡 민 독두파의 거한들은 척 보기에도 수많은 싸움을 헤쳐 온 경험 많은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서 있는 세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우두둑―!

“큭……?!”

가장 앞에 있던 중년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던 거한 하나가 손목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독두파의 덩치들은 의외의 상황에 경악하며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 흑의를 입은 사내가 앞에 나서 있었다.

양팔을 늘어뜨린 자연스런 자세에서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흑의사내가 대체 어떤 움직임을 했고, 어떻게 손목을 꺾은 건지 그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얼굴을 가린 죽립 아래로 간신히 보이는 입술이 벌어지며 짐승처럼 송곳니를 드러냈다.

거한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팔다리가 얼어붙는 듯한, 그런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이, 이런! 뭐 하나! 당장 끌고 가지 않고!”

총관이 소리를 지르자 독두파의 사내들도 움찔거리며 억지로 다가가려 했다.

당장에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죽립을 쓴 흑의사내에게서 더더욱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자 독두파의 사내들도 눈빛이 확고해졌다.

그렇게 서로가 부딪치려는 순간, 짝! 하고 둔탁한 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어……?”

방태풍은 놀랐고, 군웅들도 경악했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질 만큼 얼굴을 세게 얻어맞은 총관.

그리고 그 총관에게 손바닥을 날린 것은 다름 아닌 항주의 지부대인, 문표였던 것이다.

“무, 문 대인?”

“왜,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총관과 방태풍의 의아한 반문을 자르듯이 문표가 일갈했다.

“닥쳐라! 감히 주제도 모르고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문표는 지금껏 그들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과 목에선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며, 항상 유지하던 차분함을 집어던지고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졸지에 얻어맞은 총관도, 그 모습을 지켜본 방태풍도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머릿속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무엇 때문에 총관이 얻어맞았는가?

무슨 일이 있고 나서 문표가 저리 흥분했는가?

‘저 세 사람……?’

그렇다.

저 세 사람이다.

문표는 세 사람이 등장한 뒤로 계속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총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겁먹은 듯이 등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문 대인, 도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입 다물고 있게, 방 객주!”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방태풍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 지금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간 큰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초청승부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한 번 마주쳤던 얼굴이다.

그에게 호가호위를 하고 있다며 호통을 치던 낙향서생.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딘지 행동이나 자세도 당당했고, 태양을 눈 안에 집어넣은 것처럼 강렬한 안광은 감히 맞받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체 왜 첫 만남에서 알아차릴 수 없었는지 의아했다.

‘속았다. 처음에 의도적으로 본모습을 숨겼어.’

속았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데 대체 누굴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나 다름없는 문 대인이 이렇게나 겁을 먹을 인물이라니. 그런 사람은 자금성에 없을…….’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방태풍은 다리에 힘이 빠져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아……!”

방태풍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왜 생각지 못했을까.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렇다.

‘일인(一人)’지하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 아래에 불과하듯이.

문표가 아무리 삼공의 직위에 오른다고 한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인 이상 머리 위에 한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 호, 화, 화, 황……!”

방태풍은 온몸이 떨려서 도저히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어떤 건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입이 굳고, 혀가 말린다.

그러던 중 ‘그분’이 조용히 하라는 듯 입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겉으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얼음보다도 더욱 차가웠다.

“…….”

누구의 명이라고 감히 거부를 할까.

방태풍은 그 순간부터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돌이 되었다.

“현백…….”

장기린의 목소리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거,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다기보단, 그러길 바랐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알고 그러길 바란 거지?”

“내가 항주로 올 때, ‘저분’께서 아무도 모르게 암행을 나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때 팍, 감이 왔다고나 할까.”

현백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하여간 너는…….”

“하하, 잘된 거잖아? 천기가 도운 거라고. 저분이 왔으니 문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장기린은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선 세 사람이 누구인지는 처음 보자마자 알아챘다.

현 명제국 황제 태종.

명 황실의 수호신 백택.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황제를 죽이겠다고 북경으로 향했던 반야혼도 함께 있었다.

‘그것도 황제를 지키고 있고.’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나타나도 한 도시가 뒤집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인물들이, 그것도 셋이나 변복을 하고 한낱 항주의 초청승부에 참여하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현백, 내가 왜 ‘저분’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전장에서 바로 제대했는지 알고 있나?”

“알지. 붙잡을까 봐 그런 거 아냐.”

“……그걸 아는 녀석이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거냐?”

장기린은 불타는 심정을 현백을 바라보는 눈빛에 여과없이 담았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사실 언젠가는 어차피 일어날 일 아니겠어? 설마 영원히 저분의 눈을 피해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겠지?”

“…….”

“이참에 네 생각이 어떤지 말씀드리는 게 어때?”

분하지만 현백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장기린이 푹 한숨을 내쉬는 사이, 황제는 온화한 얼굴로 문표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이제 따로 ‘조용히’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 대인?”

문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황제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방태풍에게 지시해 연회를 마무리하도록 시켰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연회석에서 물러났고, 장기린과 현백, 방태풍과 문표, 그리고 황제 일행은 청풍객잔의 최상급 특실로 안내되었다.

특실에 도착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문표는 무릎을 꿇으며 통렬하게 외쳤다.

“폐하―! 어찌하여 연락도 없이 이곳에 오셨습니까? 연락만 주셨더라면 제가 맨발로 맞이하며 항주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선별하여 보여 드렸을 것입니다!”

문표의 목소리는 절실했고, 너무나 안타까워한다는 심정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정치를 하며 온갖 문제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문표에게 이 정도 연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의 뒤에 선 문표가 하는 것을 본 방태풍이 뒤에서 똑같이 오체투지의 예를 취했다.

한편, 철혈의 황제 태종.

그는 문표의 외침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상석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그의 좌우엔 백택과 반야혼이 서 있었다.

“좋은 것들이라? 항주에는 어떤 좋은 것들이 있는가?”

“예? 아, 물론 금선로의 아름다운 객잔과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서호의 야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지요. 최고의 숙수들이 있는 항주의 요리는 사천, 북경, 상해의 천하삼미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

“다른 것은 없나? 그것들은 다 어제 즐겨 보았는데.”

문표는 항주의 지부대인을 맡고 있으나 객잔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금성 근처에 있기를 좋아하여 오히려 북경의 명소들을 더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황제의 이런 급작스런 질문엔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르나? 그렇겠지. 항주 지부대인으로서의 일보다는 북경에서 관리들의 인망을 얻기에 바빴으니까 말이야.”

“……!”

“아까 뭐라고 했지? 아, 이제 곧 삼공의 직위에 오를 거라 그랬지. 그럼 이제 짐 하나만이 남는 건데…… 다음은 뭘 할 텐가? 짐의 목을 노릴 텐가?”

황제는 웃는 얼굴로 마치 장난치듯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무릎을 꿇은 문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그런 말씀을……. 앞으로 천만 년이 지나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

문표는 식은땀을 흘리며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의 목을 노리다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이 나왔다간 순식간에 구족이 멸족된다.

“천만 년이라…….”

황제는 그 말이 재미있는 듯 피식 웃으며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문표 공, 삼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짐의 재가가 필요하지. 그리고 이번 대회합에서 짐은 그것에 찬성을 할 생각이었어. 왜 그런지 아나?”

“자,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건 문표 공, 자네가 그릇이 작기 때문이야.”

직설적인 말이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문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그 말에 수긍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방태풍이나 장기린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무능한 모습을 보여 버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는 제이(第二)의 진시황이라고까지 불리는 철혈의 제왕이다.

환관 등용, 밀정정치, 한 손에 틀어쥔 병권까지.

승상? 상국? 삼공의 직위?

아무리 높은 직위를 가져 봤자 황제에게 밉보이는 순간 목이 날아가는 지금의 세상이다.

문표는 오늘 청풍객잔의 초청승부에 참여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대회합이 취소되었다고 하더라도 얌전히 북경에 있었다면 아마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는 욕심이 많지. 금맥(金脈)이나 다름없는 항주 금선로에 집착하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청풍객잔을 잘 키워서 튼튼한 돈줄로 만들려는 것도 알고 있어. 중간 관리들을 좀 더 높은 관직에 등용시켜 주는 조건으로 뒷돈을 많이 챙겼다는 것도 알고 있지. 하지만 역모를 꾀할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아. 그게 짐이 삼공의 직위를 하사하는 걸 승인했던 이유다.”

“……!”

“설마 짐이 자네의 비리를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건 동창을 너무 우습게 보는 처사야.”

황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뒤를 향해 손짓을 했고, 백택은 어느새 밖에서 끓여온 차를 공손하게 대접했다.

문표는 입술이 덜덜 떨려서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는 그의 속 깊은 곳까지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표 공.”

“예, 예, 폐하!”

“적당히 뒷돈 받는 것까지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면 목이 날아갈 것이야.”

문표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황제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지독한 현실감과 함께 실제로 목이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곳 금선로의 객잔에 더 이상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풍운객잔은…… 지나오면서 보기에 다른 객잔들과 달라 제법 운치가 있더군. 금선로에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러셨사옵니까?”

“그래. 앞으로 삼공의 직위에 오를 자가 항주 지부대인이니, 짐의 바람은 앞으로도 계속 지켜질 수 있겠군. 참으로 잘된 일이야.”

“……!!”

“아닌가? 짐의 바람 따위는 무시하고 예정대로 풍운객잔을 무너뜨릴 건가?”

문표는 황제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통한의 심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풍운객잔은 앞으로도 쭉 금선로의 상징으로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요화 누이는 잘 있나? 그러고 보니 못 본 지가 오래되었군. 걱정이야. 만약 남편을 갑자기 잃게 된다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나?”

“…….”

“믿어도 되겠나, 문표 공?”

문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물론입니다, 폐하! 이 문표를 믿어 주시옵소서. 풍운객잔은 폐하께서 원하실 때 언제고 볼 수 있도록 항상 이곳에 존재할 것입니다!”

문표는 이마를 땅에 세 번이나 찧으며 결연하게 외쳤다.

황제는 그제야 문표를 제대로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문표는 이마를 땅에 박은 채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마 속이 쓰린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겠지.’

풍운객잔을 무너뜨리는 것은 고사하고, 이젠 반대로 풍운객잔이 잘못되지 않도록 지켜 주게 생겼다.

아마 지금 문표의 심정은 참담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 다행이군. 그럼 자네만 믿겠네.”

“믿어 주시니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그럼 문표 공, 자네는 다시 재개할 대회합을 준비해야겠지?”

“예……?”

“앞으로 삼공의 직위에 오르려면 할 일이 많을 텐데, 곧장 북경으로 다시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나?”

빙 둘러서 말하긴 했지만 당장 이곳을 나가서 사라지라는 간접적인 축객령이었다.

문표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그럼 폐하, 북경에서 뵙겠나이다.”

“그래. 그때 보도록 하지.”

황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문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쳐서 밖으로 나갔다.

한편, 방태풍은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듯 바닥에 엎드린 채로 굳어 있었으나, 문표가 손을 뻗어 거의 끌고 가다시피하며 방태풍을 내보냈다.

“…….”

기묘한 침묵이 흐르는 청풍객잔의 최고급 객실.

이제 객실에 남은 것은 황제 일행과 장기린, 현백, 총 다섯 명뿐이다.

장기린은 어느새 황제가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위풍당당한 체구.

만인을 압도하는 패황의 기질 또한 변함이 없다.

황제는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장기린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 시선을 맞받지 않고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태산처럼 장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 기린.”

“……폐하.”

“짐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흑룡강 유역에서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로 섭섭했다. 그리고 이해가 가질 않았지. 짐은 분명히 너에게 북경으로 오면 공손웅에 이은 차기 대장군의 자리를 약속했다. 기억하고 있겠지?”

장기린은 고개를 숙인 그의 정수리 위로 황제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런데 왜 북경으로 오지 않았나?”

“…….”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이며, 관례를 올릴 나이가 지난 이상 입신양명에 매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보장된 출세길을 마다한 건가?”

“폐하, 그것은…….”

“한 치의 숨김없이 대답하거라. 짐은 너의 가감없는 본심을 듣고 싶다.”

장기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과거에 대장군 공손웅과 했던 대화 그대로.

그때의 심정을 담아 진지하게 답했다.

“폐하, 저는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볍다?”

“예. 제가 전장에서 지낸 십삼 년 동안…… 제 손에 죽은 자들의 숫자만 세어도 아마 일만이 넘을 것입니다.”

십삼 년.

날짜로는 사천 일이 넘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고, 매일같이 사람을 죽였다.

그 숫자는 가히 셀 수 없을 정도.

붉은 악귀라는 별호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장기린은 그 시절의 감각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황제도, 백택도, 반야혼도.

심지어 친구인 현백도 처음 듣는 장기린의 진심 어린 고백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의 목숨이 무거웠습니다. 전투가 있던 날 밤, 잠들기 전엔 제가 죽인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 떠올릴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목을 베는 거나 나뭇가지를 베는 거나 똑같이 느껴질 정도로 감흥이 없어졌습니다. 잠들기 전에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날 죽인 사람의 얼굴을 셋 이상 기억해 낼 수 없었습니다.”

장기린은 지금도 그때의 공포를 생생히 기억한다.

양심이 모조리 마모되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공포.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린 듯한 이질감.

어느 순간 깨달은 스스로의 변화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장기린은 편안하게 자 본 적이 단 하루도 없다.

잠드는 것은 죄악이다.

그가 지금껏 죽여 온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잊고, 편안히 살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황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예.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 ‘평범한 사람들’은 너처럼 높은 직위에 오르고 싶어한다. 스스로 목숨을 걸고 병사가 되어서 어떻게든 공을 세우려고 하지.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거꾸로 살아보고 싶은 건가?”

“……예, 폐하. 지금의 전 행복합니다. 계속 지금처럼 살고 싶습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숙이고 초조한 심정으로 황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만약 황제가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라고 명한다면…… 어쩔 수 없다.

다시 복귀해야만 한다.

거부하는 것 따윈 용납되지 않는다.

예전에 진시황의 명령 한마디에 장성(長城)이 지어졌듯이, 명 황제의 한마디면 항주가 사라질 수도 있다.

“좋다.”

그런데 장기린의 귀에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말이 들렸다.

“원하는 대로 살아 봐라. 네가 그토록 그런 삶을 원한다면 한 번 그렇게 살아 보는 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언제든지 네가 있을 곳이 필요하다면 자금성으로 돌아오거라.”

황제의 말은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의 서광과도 같았다.

장기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봤다.

“폐하……!”

“아쉽구나. 네가 돌아오면 이번엔 왜구와 남만족이 들끓는다는 남쪽으로 한 번 가 보고 싶었건만.”

“…….”

“행복하게 살아 봐라, 기린.”

장기린은 처음으로 눈에서 울컥, 눈물이 흘러나오려 하는 것을 느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잠시 후, 황제는 장기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거라. 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됐다. 그리고 현백.”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현백이 웃는 얼굴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이번 일에 대한 보고는 자금성에서 듣도록 하지. 항주 금선로에 관해서, 그리고 문표에 대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작성하여 올리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포권을 취하는 현백에게 황제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나 더. 짐은 이곳에 없었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폐하. 폐하께선 이곳에 없으셨습니다.”

“좋다.”

“그런데 폐하, 언제 북경으로 돌아가실 것입니까?”

“지금 바로 갈 것이다.”

“…….”

“현백, 자네도 오늘 중에는 올라오겠지?”

현백은 잠시 난감해했으나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장기린을 얻지 못한 황제의 심술이다.

그나마 함께 가자고 하지 않고 반나절은 준 것을 감사하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물러가거라.”

“예, 폐하.”

장기린은 현백과 함께 뒷걸음질쳐서 자리를 벗어났다.

☆ ☆ ☆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황제와 그 뒤의 두 사람은 장기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후우…….”

청풍객잔을 빠져나오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사다난했던 하루였다.

장기린은 온몸의 정기가 다 빨린 것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투를 두 번 치른 것보다 힘들군.”

옆에서 현백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대단한데? 예전에 운화는 저분을 뵌 후에 전투를 열 번 치른 것만큼 힘들다고 했어. 두 번이면 굉장히 저렴한 수치인데?”

“운화가 그랬다고?”

“그래. 정치에 무심한 대장 때문에 혼자서 자금성을 분주하게 오가야 했던 불쌍한 친구지. 종종 저분한테 불려 가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고.”

“…….”

“그때 좀 더 잘해 줄 걸 그랬나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미 늦었으니까 나중에 만나면 맛있는 식사나 대접해 줘.”

장기린은 그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현백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운화도 자기 삶을 살아야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현백의 걸음이 멈추었다.

장기린이 돌아보자 현백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기린,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저분이 알아냈어. 그 말은 운화나 다른 적룡기마대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지.”

“뭐……?”

“요 근래가 될지 아니면 시간이 좀 흐른 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는 뜻이야. 슬슬 그에 대한 생각도 해 두어야지.”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린, 하나 충고해도 될까?”

“……말해.”

“나는 딱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믿고 있어. 사람들에겐 각자 주어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은 운명대로 흘러가고 말지.”

장기린은 현백이 말한 단어를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운명이라…….”

잠시 그 의미를 곱씹어 보다가 현백을 쳐다봤다.

현백은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현백은 흐린 날의 하늘처럼 분위기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기린, 명심하도록 해.”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현기(賢氣)가 느껴지는 말.

현백의 그 말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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