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七章 ― 야수귀환(野獸歸還)
황제 일행과 현백이 북경으로 돌아가고 초청승부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된 뒤에 여러 가지 추측성 소문들이 금선로에 돌았다.
황실의 밀정어사가 문표의 약점을 잡았다느니.
청풍객잔의 총관이 앙심을 품고 비리를 폭로했다느니.
그래서 문표는 더 이상 항주 지부대인을 할 수 없을 거라느니…….
약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문들이었지만, 결국 잘 들어 보면 제대로 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그런 소문들도 가담항설(街談巷說)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사흘이 지나자 아무도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남의 일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해가 진 뒤의 금선로는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놀랐네요. 갑자기 저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장 가가.”
남궁세가의 장녀이자 뢰안각의 항주 지부를 맡고 있는 재녀(才女), 남궁연은 언제나처럼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밝은 푸른색 무복을 입고 장기린을 맞이해 주었다.
여인으로서 꾸민 것은 전무(全無)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남궁연은 뛰어난 미인이 아니지만, 무예를 단련하면서 만들어진 균형 잡힌 체형과 호기심과 지혜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누구든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장기린은 접객용 탁자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뢰안각 항주 지부는 금선로의 끝자락에 있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를, 객잔과 민가 사이의 평범한 일층짜리 건물에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반야혼 사태가 일어났을 때 급한 일이 있을 때 이리로 연락하라며 남궁연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혼자서는 찾을 수 없을 위치였다.
뢰안각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제법 총기가 엿보이는 어린 소년 한 명이 남궁연을 시중들고 있을 뿐, 두 사람 외엔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곳이었다.
“항상 둘뿐인가?”
“아뇨, 한 명이 더 있어요. 방노(防老)라는 노인인데, 항주 금선로에서 평생을 보낸 분이죠. 저희 뢰안각 항주 지부의 유일한 정보 수집인이랄까요.”
남궁연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럼 총 세 명?”
“네, 맞아요. 총 세 명이에요.”
“적적하겠군. 시간 나면 풍운객잔으로 와서 식사하도록 해. 휴도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남궁연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장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장 가가, 그런 여인네들 꾈 때 쓰는 말 말고 여기에 온 진짜 이유를 말해 주면 안 될까요?”
장기린은 미간을 좁혔다.
“여인네? 꾀어?”
“무심한 듯하면서 은근히 세심하게 챙겨 주는 것.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게 더 나쁘다구요. 알아요?”
“…….”
“아무튼, 진짜 이유를 말해 줘요, 장 가가.”
남궁연은 손으로 턱을 괴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한 여인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장기린은 왜 자기 주변에 있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건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반야혼에 대해 묻고 싶어서 왔어.”
“……반야혼이오? 그 사람은 왜요?”
남궁연의 눈에서 장난스런 호기심이 사라지고 경계심이 떠올랐다.
장기린은 이곳에 반야혼에 대해 묻기 위해서 왔다.
황제를 만났을 땐 너무 경황이 없었고 그 뒤로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반야혼이 황제의 곁을 지키게 된 건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항상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반야혼.
그는 장기린이 자유와 평범함을 찾아 항주로 왔을 때, 오히려 반대로 황제에게 스스로 속박되었다.
장기린은 그렇게 된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내가 듣기로 항주를 빠져나간 뒤에 조직된 추적대에 참여했다는데, 맞나?”
“맞아요. 금방 도로 나오긴 했지만.”
“도로 나와? 어째서?”
“뭐, 그치들은 제가 필요없었으니까요.”
“그럴 리가.”
장기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야혼 사건 때 잠깐이지만 남궁연이 얼마나 생각이 깊고 통찰력이 있는지는 충분히 확인했다.
그런데 추적대에 그녀만 한 인재가 필요없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아직 세상은 여인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가 않아요. 특히 고지식한 관리들은 더하죠.”
“……하긴.”
“겪어 본 듯한 말투네요? 관리들과 일해 본 적이 있나요?”
남궁연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반짝였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군.’
조금만 틈을 보이면 곧바로 이쪽의 내심을 캐내려고 한다.
장기린은 모른 척하며 반야혼에 대한 화제로 다시 이야기를 전환했다.
“반야혼은 북경에 도착했겠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혹시 알아?”
“말을 돌리시긴. 좋아요, 알려 드리죠. 반야혼은 북경에 도착했어요. 추적대를 지휘하던 지휘자들은 다 죽었고요. 잘 모르시겠지만 그때 추적대에 합류해 있던 진주언가의 가주도 죽어서 한동안 무림이 뒤집어졌죠.”
“진주언가의 가주? 강한 사람인가?”
“최고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 세가를 이끌던 사람이니 강한 사람 맞아요.”
“그래서? 반야혼은 황실에 도착한 다음에 어떻게 됐지?”
남궁연은 장기린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무림과 관계없는 사람이 맞군요.”
“무슨 뜻이지?”
“보통 무림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진주언가의 가주가 죽었다는 소식에 좀 더 큰 관심을 갖는다구요. 뭐, 아무튼 반야혼은 팔기군과 금의위, 수황위사들까지 뚫고 황제에게까지 도달했다는 소문이에요. 하지만 결국 죽었다네요. 비밀리에 황제를 수호하던 무사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처참한 모습의 시체가 다음날 실려 나갔데요.”
“황제를 수호하는 무사?”
“수호칠영인지, 백시(百矢)인지…… 소문은 무성한데 확실하지 않네요.”
“그래?”
“네. 하지만 반야혼이 죽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장기린은 거기까지 들은 뒤에야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황제는 반야혼을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
하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역모를 꾀한 무리에서 장수 급의 활약을 보인 반야혼을 그대로 아무런 처벌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은 절대로 주위에 좋게 보일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째서 황제를 죽이려던 반야혼이 마음을 바꿨는가 하는 문제다.
장기린은 반야혼이 황실에 쳐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을 인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 반야혼.
철혈의 황제, 태종.
살아 있는 황실의 신화, 백택.
‘그래, 힘의 논리다. 반야혼은 일대일의 싸움에서 패배한 거야. 누구에게? 백택에게? 아니, 아니지. 그랬다면 황제를 지킬 리가 없지. 즉, 황제가 직접 나서서 싸웠고 반야혼을 쓰러뜨린 거다.’
장기린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때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황제와 함께 싸워 봤다.
황제가 직접 칼을 들고 나설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생길 경우 황제는 항상 군더더기없고 장중한 움직임을 선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게 반야혼을 꺾을 정도로 강했을 줄이야.’
놀라운 한편,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온 대륙의 권력을 휘어잡는 압도적인 재능에다가 반야혼을 발아래에 둘 정도의 무력까지.
황제는 정말 신의 아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 가가, 왜 그러죠?”
“……별로. 아무것도 아냐.”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남궁연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의심스러워했으나, 전에 그가 반야혼이 혈족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것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이내 따뜻한 눈빛을 보내 주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
“그보다 초청승부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얼마 전에 청풍객잔이 더 이상 풍운객잔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서신으로 보내기까지 했다면서요?”
“그냥 그렇게 됐어. 그런데 어떻게인지 벌써 알고 있군.”
“오라버니가 어제 와서 다 말해 줬거든요.”
“……하여간.”
남궁연은 이쪽을 배려했는지 화제를 돌려 주기까지 했다.
‘미안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반야혼이 위험해지겠지. 그러니 밝힐 수 없어.’
반야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말해 줄 수 없을 듯했다.
장기린은 미안함을 애써 감추며 남궁연의 질문에 운을 맞춰 대답한 뒤, 차를 한잔 얻어마시고 뢰안각을 나왔다.
마지막에 그녀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야혼이라…….’
장기린은 한 점 구름도 없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와의 인연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았다.
☆ ☆ ☆
“하아…….”
잘 익은 사과처럼 붉고 매끄러운 입술로부터 근심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궁전의 처마처럼 곱게 휘어진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호수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갈 곳을 잃고 좌우로 흔들렸다.
미인의 한숨은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고사성어가 딱 맞다.
휘연의 한숨 소리를 들은 장기린은 그 한숨에 자꾸 의식을 기울이게 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때는 날씨가 화창한 어느 아침.
탁자 위에 놓인 주판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두드려 대며 뭔가를 계산하던 휘연이 그녀가 세필로 적어 내려가던 숫자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그녀가 다시 한 번 주판을 두드리고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
결국 장기린은 묻고 말았다.
“큰일이에요. 수지가 맞지 않아요. 이대로는 이번 달에 적자가 나게 생겼다구요.”
“적자라니. 우리 손님이 늘어나지 않았어?”
“늘어났죠. 하지만 사흘간의 무단 휴업이 컸어요. 그 뒤로 좀처럼 손님이 그 이상 늘지를 않네요.”
“그래? 이상하네? 분명 흑자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재료비랑 인건비보다는 훨씬 많이 벌지 않았어?”
“그거야 그렇죠.”
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장기린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잠깐,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왜 적자라는 거야?”
“객잔을 개축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꽤 되잖아요. 그걸 청산하려면 아직 훨씬 모자라요. 그걸 다 갚아 버리기 전에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적자에 불과하다구요.”
“흐음, 그래?”
“흐음, 그래가 아니에요!”
휘연은 탕! 하고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분명히 이번 달엔 개축 비용을 다 갚아 버리고 처음으로 진짜 흑자를 기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구요. 그게 실패하다니, 이렇게 되면 제 꿈이…….”
“꿈?”
의아한 마음에 되묻자 휘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 빚이요. 객주님께 진 은자 삼백스물다섯 냥의 빚을 어서 다 갚아야죠.”
“……그게 꿈이었어?”
“네. 제 첫 번째 꿈이에요.”
“그런 빚은 생각 안 해도 돼. 전에도 말했잖아, 그건 빚이 아니라 내가 쓰고 싶어서 쓴 돈이니까 정당한 대가를 원하면 언제든 주겠다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한시라도 빨리 그 빚을 청산해 버리고 싶다구요!”
휘연의 목소리엔 어딘가 결연한 의지까지 깃들어 있었다.
“…….”
장기린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과 비슷한 대화는 이미 예전에 나눈 적이 있다.
월봉을 안 받는 대신 순이익의 일 할을 자신이 가지겠다고 했던 약속.
설마 이렇게 빨리 순이익이 나기 시작할 줄은 몰랐고, 그때는 오히려 월봉을 못 주게 될까 봐 걱정했지만 분명히 그때도 휘연은 순이익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빚부터 청산하겠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한데.’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 폐부가 차가워지는 듯한 이 감정은 무엇일까.
휘연이 빚을 갚는다?
빚을 다 갚으면 어떻게 되나?
……자유다.
객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얼마 전에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객잔을 떠나고 싶어 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휘연이 빚을 갚는 것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니 장기린은 왠지 그녀가 자신과의 연을 청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섭섭한 심정이 되었다.
“객주님, 혹시 섭섭해하는 거예요?”
장기린은 무의식중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속을 읽은 것일까.
휘연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빤히 장기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빚을 갚는다는 게 섭섭했구나……. 객주님, 걱정 마세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빚을 다 갚고 나도 절대로 이곳을 안 떠난다구요.”
“……걱정 안 했어.”
“흐응, 그래요?”
휘연은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장기린의 옷소매를 꼭 붙잡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땅이 꺼질 만큼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한 행동 중에 무언가가 휘연을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그저, 저는…… 빚을 다 갚아야 객주님과…….”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휘연은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볼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은자 스무 냥 정도만 더 있으면 됐는데. 아깝네요.”
“은자 스무 냥이면…… 소면이 사천 그릇인가?”
“네, 맞아요. 매출로만 따지면 그 정도가 되죠.”
“그럼 순이익으로 따지면?”
“동전 열 문 중에 여섯 문이 재료비와 인건비. 순이익은 동전 네 문이니까…… 순이익으로 따지면 만 그릇이네요.”
“……!”
“하아, 아무래도 단기간엔 힘들겠죠?”
일만 그릇을 채우려면 매일 백 그릇씩 추가로 팔아도 백 일이 걸린다. 단기간에 채워 넣기엔 무리다.
“힘들지 않을까?”
“하아, 맞아요. 그럴 거예요.”
“…….”
“어쩔 수 없죠. 일단 조금 더 기다리면서…… 손님들을 많이 끌어모을 구상을 좀 해 볼게요. 다행히 조금씩 회복되는 추세니까요.”
휘연은 곧장 세필을 집어 들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모를 만큼 자신의 생각에 몰두했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주니…… 장사가 점점 번창하는 걸 테지.’
자고로 어떤 일이든 성공하기 위해선 인복(人福)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면에선 장기린은 인복을 타고났다.
휘연, 운찬, 아칠, 아팔, 휴.
다들 특이한 인물들이지만 누구 하나 능력이 없거나 객잔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앞으로도 잘 부탁해, 휘연.’
장기린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휘연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장기린이 다음에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휴는 마당을 쓸고 있는 중이었고, 아칠과 아팔은 객실들이 있는 이층을 정돈하는 중이었다.
남은 것은 운찬 한 명.
최근에 많은 사건을 겪어 가장 주의를 필요로 하는 식구였다.
땅. 땅. 땅. 땅. 땅!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운찬이 많은 종류의 야채와 풀들을 다지고 빻고 하면서 뭔가를 실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칼 소리가 경쾌했다.
마늘, 대파, 쑥, 청경채, 호박잎.
여러 가지 조향야채(調香野菜)들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다듬는 운찬의 눈은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엔 운찬이 예전처럼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으나 운찬은 그게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운찬은 지금 요리에 미쳐 있었다.
마치 다른 생각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모든 잡념을 끊고 오로지 요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재료를 사러 갈 때를 제외하곤 하루 온종일 주방에서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칼질. 익히기. 튀기기. 볶기. 굽기.
그런 요리의 기교를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단련하면서 장기린이 가르쳐 준 호흡법과 ‘걷는 법’도 매일 꼬박꼬박 신경 써서 훈련했다.
장기린은 그런 운찬을 볼 때마다 한 자루의 식칼이 점점 담금질이 되어 날카로워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기본이 단련되면서 운찬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더는 맛있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신천지 소면조차 최근의 손님들은 더욱 맛이 좋아졌다며 극찬을 하기 일쑤였다.
“운찬.”
“아, 형님. 오셨어요?”
운찬은 잠시 인사를 한 뒤 곧바로 다시 시선을 돌려 한창 녹두(綠豆)를 볶고 있던 솥을 앞뒤로 흔들었다.
촤르륵― 촤르륵―
모래가 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녹두가 솥의 한참 위쪽까지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반복했다.
마치 곡예단이 묘기를 부리는 듯한 신묘한 솜씨였다.
“잠시만요! 거의 끝났어요!”
녹색의 콩 바깥쪽에 윤기가 흐르는 막이 하나 씌워졌다 싶은 순간, 운찬은 탕! 하고 솥을 불 밖으로 내려놓더니 미리 구워 놓았는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고기 위에 콩을 부었다.
타닥타닥.
뜨거운 콩이 마찬가지로 뜨거워져 있던 물고기의 껍질을 파고들며 맛있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붉은빛이 도는 양념을 그 위에 붓자 치지직! 하고 매콤하면서 짭쪼름한 맛있는 냄새가 풍겨졌다.
소리, 냄새, 외양.
어느 것 하나 맛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운찬은 스스로 만든 요리가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헤헤, 녹두활어(綠豆活魚)예요. 원래는 이것과 다른 모습이지만……. 마침 상해 쪽에서 갈치가 좋은 게 들어왔기에 변형해 봤어요.”
“갈치? 이게 갈치인가?”
“어라? 갈치 한 번도 못 보셨어요?”
장기린은 그동안 내륙 지방인 흑룡강 유역에서만 살았기에 붕어나 메기 말고는 물고기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다음에 저랑 같이 시장에 한 번 가요. 거기 가면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다 있다구요.”
“그래?”
“네! 그뿐 아니라 먹거리도 많아요. 전에 축제 때 광장에서 열린 걸 잠깐 보셨죠? 그보다 세 배는 더 많은 노점들이 시장에 있어요.”
“그럼 다 같이 한 번 가면 좋겠군.”
“맞아요. 다 같이 가요.”
운찬은 불 앞에서 솥을 돌리느라 땀범벅이 된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그때, 조심스런 발소리와 함께 주방문 틈 사이로 동그란 얼굴 두 개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칠과 아팔이다.
녹두활어의 맛있는 냄새를 맡고 온 건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어쩐지 두 아이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객주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우물쭈물한다.
평소에 우유부단한 아칠과 달리 똑 부러지는 아팔마저 쉽사리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저기…… 앗! 잠깐!”
아칠과 아팔이 소리를 지르며 당황하는 사이 황갈색의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쏜살같이 주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헥헥거리는 숨소리.
온몸을 덮고 있는 북실북실한 털.
새카맣고 납작한 코가 쉴 새 없이 공중을 킁킁거리고, 붉은색의 긴 혓바닥이 툭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 사이를 연신 왕복했다.
“개……?”
장기린은 상대를 인식하자마자 뒤로 펄쩍 물러났다.
그리고 운찬이 재료를 다듬기 위해 사용하던 짧은 소도(小刀) 두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목표는 미간.
그의 실력이라면 일격에 죽일 수 있다.
그의 손에 들린 소도가 앞으로 쏘아지려는 찰나,
“잠―깐―!”
갑자기 휘연이 뛰어 들어와 앞을 가로막았다.
“악! 안 돼요!”
“죽이지 마세요!”
아칠과 아팔이 양쪽에서 개를 얼싸 안았고,
“형님! 안 됩니다!”
운찬이 뒤에서 허리를 붙잡았다.
“…….”
장기린은 침묵했다.
어느새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 충격과 공포의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며 휘연을 응시했다.
“어째서라뇨. 설마 그 칼, 던지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식구들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왜 죄 없는 동물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휘연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화가 난 듯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따지고 있었다.
“죄가 없다니?”
“죄가 없죠. 얘가 뭘 어쨌다고 칼까지 던지려고 그래요!”
“뭘 어쨌냐고? 하지만…… 이 녀석은…….”
장기린은 문제의 ‘개’를 바라봤다.
지저분하고 숨을 헐떡이는 털복숭이는 새카만 눈동자로 장기린을 쭉 응시하고 있었다.
쭉 찢어진 입꼬리가 왠지 그를 비웃는 것 같다.
“이 녀석은…… 개잖아?”
필사적으로 항변했으나,
“개가 어때서요!”
바로 반격당했다.
“얘는 개예요. 그것도 아직 어린, 강아지!”
“다 큰 것 같은데?”
“아니에요! 봐요! 아직 종아리까지밖에 안 오잖아요! 이런 애들은 다 크면 골반까지 온다구요.”
장기린은 다시 한 번 개를 살펴봤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직 다리가 짧고 몸집이 좀 작은 듯한 느낌도 든다.
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다 큰 것도 아닌 듯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 충직과 충성의 상징! 그게 바로 개라구요! 믿을 수가 없네요. 어떻게 개를 죽이려고 할 수 있죠?”
휘연은 아칠과 아팔이 목을 끌어안고 있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개는 그 손길이 좋은 듯 머리를 흔들더니 휘연의 손가락과 아칠, 아팔의 얼굴을 핥았다.
“간지러워!”
“가만 있어, 가만히.”
아칠과 아팔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개를 좋아하다니.
개가 사람과 가장 가깝다니.
“보셨죠? 얼마나 착해요? 개는 사람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구요.”
“……그게 문제야.”
“네?”
“개는 사람이 시키면 무엇이든 하는 게 문제라고.”
말에게 지시를 내려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아니, 불가능하다.
소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개만이 가능하다.
장기린이 전장에서 상대했던 적들 중에 서융(西戎)족은 개를 수족처럼 사용하며 군견(軍犬)으로 사용했다.
어찌나 교묘하고 재빠른지 그 당시에 개에게 목을 물어 뜯겨 죽은 병사들만 해도 수백에 달했다.
그뿐인가.
꼭 군견이 아니더라도 전장을 배회하다 보면 들개들이 시체를 뜯어 먹는 광경은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장기린은 개가 싫었다.
개만 보면 병사들을 물어뜯던 송곳니와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오른다.
“사람이 시키는 걸 다 하는 건 좋은 거잖아요?”
“…….”
“객주님, 저기…… 이제 칼 내려놓으세요.”
휘연이 긴장한 눈으로 장기린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있었다.
장기린은 두 말 않고 칼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개를 보는 시선이 호의적으로 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으억? 무슨 일입니까?”
그때, 마당을 다 쓸고 돌아온 휴가 주방의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긴장된 분위기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헥헥거리고 있는 개를 보고는 반색하며 다가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와, 어디서 온 녀석입니까? 목줄이 없는 걸 보면 주인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곤 튼튼하네요?”
개는 휴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핥았다.
“하하, 이 녀석, 애교도 있고 착하네.”
“그렇죠? 예쁘죠?”
“키우고 싶지 않나요?”
아칠과 아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원군을 만나 의기양양해진 듯한 느낌이다.
휴는 아칠과 아팔을 보고, 다시 장기린을 한 번 쳐다보더니 상황을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 한 마리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그렇죠! 그렇죠!”
“맞아요! 개 한 마리 있어서 나쁠 건 없어요!”
아칠과 아팔은 곧장 조르는 듯한 눈으로 장기린을 쳐다봤다.
그동안 항상 어른스럽게 일을 잘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천상 어린아이였다.
“객주님, 저기…….”
“이 개…… 키우면 안 될까요?”
장기린은 딱 잘라서 대답했다.
“안 돼.”
그는 개가 싫다.
그런데 뒷뜰에 개가 있는 광경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저, 저희가 다 키울게요!”
“객주님은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밥도 저희가 먹다가 남은 거 주고, 시끄럽게 짖지도 않게 할게요!”
“키우게 해 주세요. 네?”
“저희가 다 관리할게요!”
장기린은 휘연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렇게 하자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운찬을 보자 운찬도 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휴는 방금 전의 대화로 이미 저쪽 편인 것이 확인된 상태다.
‘개를 싫어하는 건 나뿐인가?’
“어디서 난 건데?”
장기린은 일단 출처를 물었다.
“얘가 갑자기 찾아왔어요. 운명처럼요! 앞마당을 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로 늠름하게 걸어왔다니까요.”
“마치 저희한테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맞아요. ‘키워 줘!’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아칠과 아팔은 앞다퉈서 설득의 말을 내뱉었다.
“으음…….”
그 열정을 보니 웬만하면 그러라고 하고 싶지만,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개를 키우자고 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는 장기린.
그런 그에게 개가 쪼르르 다가왔다.
“앗, 사자(獅子)!”
“안 돼!”
아칠과 아팔이 황급히 말리려고 했지만 개는 이미 장기린의 바지에 달라붙은 뒤였다.
‘벌써 이름까지 지어 준 건가?’
게다가 개 이름으로 사자라니, 너무 과분한 이름이 아닌가.
타칭 ‘사자’는 장기린의 허벅지에 척 한쪽 앞발을 얹고 헥헥거리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순한 눈빛.
순진무구하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장기린에게 뭔가 무언의 의지를 보내고 있었다.
‘키워달라…… 는 건가?’
신기하게도 개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순식간에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누군지 눈치채는 영리한 머리라니.
“……할 수 없군.”
결국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객주님?!”
“정말요?!”
화들짝 놀라는 모두에게 손을 들어 올려 진정시켰다.
“키우자는 게 아니야. 잠시 데리고 있으면서 생각해 보자는 거다. 열흘간 데리고 있어 보고 그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아…….”
“그거면 돼요! 분명 함께 있다 보면 객주님도 사자의 매력을 알게 될 거예요!”
아칠과 아팔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서둘러 사자를 데리고 뒤뜰로 달려갔다.
집은 어떻게 할지, 훈련은 누가 시킬지 같은 걸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장기린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잘하신 거예요.”
휘연이 다가와 장기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다구요. 어떻게 개한테 칼을 던질 생각을 했어요?”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그럼요. 보통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그렇게까지 안 해요. 엄―청 큰 개가 갑자기 달려든다면 모를까, 보통 저런 평범한 개가 다가오면 다들 예뻐한다구요.”
“그래?”
“네, 그래요.”
상식.
지금 장기린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상식’이었다.
‘개를 무조건 좋아해야 한다니.’
장기린은 평범하게 사는 것은 역시 힘들구나라고 생각했다.
“뒤뜰에 개가 있으니 이제 더 재밌어지겠네요.”
장기린은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 ☆ ☆
“왕 대인?”
“네! 중촌(中村)의 왕 대인이라고 기억하시죠? 열흘에 한 번씩 저희 객잔에 와서 요리를 잔뜩 시켜 놓고 드시는 분이요.”
“아, 그분!”
주변에서 다들 기억한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물론 장기린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열흘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아와 운찬의 요리를 무려 십 인분 이상씩 대량으로 시키는 사람이 있다. 나이는 오십대쯤 되었고 상당히 부유한 느낌을 주는 사내인데, 체구가 장기린의 세 배는 될 만큼 큰 거구라서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철우 같은 근육질의 거구는 아니고, 오히려 어디에 가깝냐면 방태풍이나 문표와 같은 퉁퉁한 체구에 가깝다.
항상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운찬을 불러서 맛있는 요리를 먹게 해 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객잔 식구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해 주는 좋은 사람이다.
이야기 듣기로는 주변의 소작농들한테도 잘 대해 주어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다고 했다.
“왕 대인이 지금 병환에 걸려 앓아누우셨어요. 그래서 방금 보양 요리를 몇 개 가져다 드리고 오는 길인데…… 거기서 의원이 하는 말이, 곰의 쓸개와 간을 먹으면 오행이 조화를 이뤄서 병이 금방 나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흐음, 까다로운 조건이군.”
“네. 게다가 보통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곰의 쓸개나 간으론 안 되나 봐요. 반드시 살아 있는 곰을 잡아서 신선한 걸 먹어야 한대요.”
야생동물은 절대로 사람 손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산 채로 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말만 들어도 그 어려움이 짐작이 되었다.
“그 사람, 돈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돈이 많으면 해결할 수 있지 않나?”
“돈은 많은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니?”
운찬은 걱정스러운 듯 침중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의원이 열흘 안에 곰의 간과 쓸개를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곰을 잡아와야 하는데…… 항주엔 곰이 별로 없거든요. 의외로 호랑이는 제법 있대요. 그런데 곰은 딱 한 마리, 호정산(湖貞山)에 있는 적웅(赤熊)뿐이래요.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처음 듣는데.”
“이 적웅이라는 놈이 보통이 아닌 영물이에요. 머리도 좋고 힘도 세서, 그놈을 잡으러 간 사냥꾼은 가는 족족 죽는다고 하네요.”
“영물……?”
“네. 사냥꾼을 백 명이나 죽였다니까 무서운 놈이죠. 죽이는 것도 못하고 있는데 산 채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가 봐요.”
운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휘연도 안타까움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됐네요. 왕 대인은 좋은 분이었는데…….”
“그러게요. 지금 왕 대인의 노복들이 급하게 근처 곡마단에 연락해서 곰을 구할 수 없겠냐고 묻는 중인데…… 아마 힘들 것 같대요. 워낙 아무렇게나 떠도는 사람들이라 연락이 될 리가 없다고 하네요.”
“곡마단은…… 아마 연락이 되더라도 곰을 안 팔 거예요.”
“맞아요. 그 말도 했어요. 곡마단에선 곰 한 마리를 무대에 내보내기 위해서 몇 년이나 훈련시킨다고 하더라구요. 절대 팔 리가 없대요.”
“다른 방법은 없대요?”
“없대요. 다만 한 가지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번에 적웅을 산 채로 잡아오는 사람한테 큰 돈을 준다나 봐요.”
“……돈이요?”
“네. 은자 삼백 냥을 상금으로 걸었어요.”
“……!”
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자 삼백 냥……!”
“크죠? 그 정도면 아마 굉장한 사람이 적웅을 잡아올지도 몰라요. 왜, 그, 무림의 은거고수 같은 사람이요.”
“과연,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돈은 죽은 사람도 움직인다니까요. 왕 대인 집의 사람들 말로는 그게 마지막 희망이래요.”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왕 대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넉넉해 보이는 웃음.
선한 눈빛.
어린 시절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자라 온후한 성정을 가진 부자(富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풍운객잔의 중요한 손님이며, 동시에 객잔의 식구들이 이렇게나 마음을 쓰게 만드는 사람은 흔치 않다.
‘도와줄까?’
문득 돈과는 상관없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 대인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켜보기만 할 게 아니라 나서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십 일이 기한이라고 했지? 팔 일이 될 때까지 곰을 잡아 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는 움직여 보자.’
장기린은 속으로 조용히 자신만의 기준을 세웠다.
“누군가 나서서 꼭 곰을 잡아 왔으면 좋겠네요.”
“네, 왕 대인께서 쾌차하셨으면 좋겠어요.”
객잔 식구들의 걱정과 함께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왕 대인이 앓아누운 지 팔 일째 되던 날.
장기린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뒤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침상에서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등을 벽에 기댄 채였다.
눈을 감고 오감을 닫은 채 육체의 휴식을 취하는 것.
그게 장기린의 ‘수면’이다.
정확하게 이각의 수면을 취한 뒤, 장기린은 서서히 몸의 감각을 다시 회복시키려다가 황급히 눈부터 떴다.
갑자기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이다.
‘이 시간에 누가?!’
객잔 식구들은 모두 저녁 시간의 영업 준비로 바쁜 시간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시각.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황갈색의 그림자가 장기린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후우웅―!
비록 수면 중이었다고는 해도 장기린의 반사 신경은 녹슬지 않았다.
자연체. 무박자.
일체의 준비 동작도 없이 뻗어 나간 주먹이 쏘아지던 상대의 코앞에서 겨우 멈춰 섰다.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 장기린.
명경지수와도 같은 차분한 눈빛이 이 순간만큼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헥…… 헥…… 헥…….
붉은색의 혀가 낼름거릴 때마다 뜨거운 숨이 얼굴로 훅훅 불어온다.
북실북실한 황갈색의 털.
납작한 콧등 위로 새카만 두 개의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자 ‘사자’는 재빨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만 위로 힐끔 올리며 눈치를 본다.
굴복의 표시.
장기린은 그 모습을 보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여기에 들어온 거냐?”
끄응― 끄응―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건만, 사자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설마 나를 깨워 주려고 그런 거냐?”
장기린은 아칠과 아팔이 자신들이 일어날 시간이 되면 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깨워 준다고 자랑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칠과 아팔이 그렇게 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걸 부러워한 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법을 쓰게 되었고, 운찬도 사자가 아침에 깨워 주었다.
그런 사자가 정확히 장기린이 일어날 시간에 들어왔으니, 그 의중이 충분히 짐작되지 않는가.
“난 필요없어.”
끄응, 끄응…….
“필요없다니까.”
장기린은 침상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한 번 정돈한 뒤 밖으로 나갔다.
사자는 계속해서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객잔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는 와중에도, 도시를 빠져나가 뒤쪽의 호정산으로 향하는데도 사자는 계속해서 뒤를 쫓아왔다.
“너…….”
장기린이 홱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사자는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한 걸음을 걸어가자 사자도 한 걸음을 따라왔다.
그때 사자를 쳐다보면,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봤다.
“……마음대로 해라.”
장기린은 말도 안 통하는 개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호정산에 산다는 곰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무기가 필요했기에 근처의 적당한 대나무를 부러뜨려 죽창을 만들었다.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대죽이었으나 손날을 세워 비스듬하게 끝을 쳐내자 제법 날카로운 창이 되었다.
그러고는 근방에서 가장 큰 나무 위로 올라가 호정산 전체의 산세를 살펴보았다.
전투를 하기에 앞서 지세(地勢)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산의 높이는 대략 일 리 정도.
경사는 중(中) 정도이지만, 중간 중간에 절벽처럼 가파른 부분이 있다.
호정산은 전체적으로 나무가 많은 임산(林山)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수림이 울창한 곳이 세 군데가 있었는데, 그가 찾는 적웅은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두었을 확률이 높았다.
‘숲이 울창하면 몸을 숨기기가 좋고 사냥감이 많으며, 무엇보다 주변에 기운이 충만하다. 분명히 저 세 곳 중 하나에 있어.’
장기린은 미리 봐 둔 세 곳 중에 가장 가까운 호정산 좌측의 중턱 부분으로 향했다.
앞을 막는 덤불은 죽창으로 밀어내고, 가파른 경사나 두꺼운 나무뿌리들은 뛰어넘으면서 수림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여긴…… 아니군.”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알았다.
눈에 보이는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발길이 많이 닿은 오솔길이라든지, 군데군데 사냥꾼들이 밤을 샐 때 쓰던 모닥불 자리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이런 곳에 적웅이 살 리가 없지.’
그가 찾는 곳은 좀 더 바깥과 격리된 곳.
그러면서도 호정산의 정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듣기론 이 산을 지배하는 영물이라고 들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지배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땅을 한눈에 내려다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 쪽인가?”
그가 찾아 두었던 나머지 두 군데의 요지 중 호정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장기린.
그 순간, 뒤따라오던 사자가 짖었다.
컹―! 컹―!
“너……?”
사자가 객잔에 찾아온 뒤로 처음으로 목청을 돋워 짖고 있었다.
아직 다 자란 것도 아니면서 사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느낌이 굵고 웅장했다.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한쪽 방향을 보고 경계하듯 짖었다.
공교롭게도 사자가 짖는 쪽은 장기린이 봐 두었던 두 군데 중에 정상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방향이었다.
사자는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기린이 망설이자, 더욱 큰 소리로 컹! 하고 짧게 짖었다.
“……못 당하겠군.”
결국 방향을 바꿔 몸을 움직이자 사자는 기쁜 듯이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장기린은 달려가는 와중에 뒤따라오는 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녀석이 나한테 길을 알려 준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과한 생각인가?’
개는 사람보다 후각이 좋으니 뭔가 다른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건 별개다.
보통 개가 이렇게까지 영리할까?
‘……모르겠어. 알 수가 없다.’
장기린은 개를 접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특이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왠지 사자에 대한 안 좋은 첫인상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일각가량을 움직였다.
산기슭과 나지막한 개울을 건너 다시 울창한 수림 이 시작됐다.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이 냄새……!”
코를 찌르는 비릿한 쇠 냄새.
주변을 어둡게 만드는 듯한 끈적끈적한 공기가 수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장기린의 눈빛이 변했다.
뒤따라오던 사자도 꼬리를 바짝 세운 채 긴장했다.
이곳은 적지(敵地)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치열한 전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
장기린은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수림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시신은 불과 열 걸음도 지나기 전에 발견했다.
새하얀 비단에 붉은색 매화 문양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남자의 시신이다.
사인(死因)은 목을 반쯤 뜯어놓은 흉악한 일격과 가슴에 평행하게 새겨진 네 줄기의 깊은 상처다.
아직 파리가 들끓지는 않고 구더기가 겨우 깨알만 한 크기인 것으로 봐선 사망한 지 삼 일도 채 되지 않은 듯했다.
삼 일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장기린은 그것을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시신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칼이 반쯤 뽑혀 있다. 기습을 당했어. 몸을 보니 제법 자신을 단련한 남자 같은데…… 그럼에도 가슴을 발톱에 찍힐 때까지도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슴이 박살 난 뒤에 황급히 검을 뽑아 들려고 했으나, 검을 반도 뽑기 전에 이미 목이 꺾였어.’
거기까지 알아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일류 병사라면 이런 기습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상대는 한낱 미물인 곰이 아닌가.
곰이 이렇게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는가?
“거기다 동료가 있었군.”
장기린은 땅에 남은 발자국을 대조해 보던 중 지금 눈앞에 있던 사내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발걸음이 무거운 자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발걸음이 셋 중에 가장 가벼운 자다.
발자국의 크기와 깊이로 알 수 있었다.
‘이자가 목이 부러진 뒤에 발걸음이 가벼운 쪽이 달려들었어. 왼쪽 발자국이 더 깊으면서 뒤로 반보(半步)…… 발검이다. 검을 뽑았어. 그런데 곰이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짓눌린 풀과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면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곰.
아니, 이제 곰이라고 부르기엔 미안할 만큼 대단한 녀석은 한 사람을 죽이자마자 곧바로 임무를 마쳤다는 듯 등을 보이며 도망친 것이다.
냉혹한 살수나 잘 훈련된 암살대의 활약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벼운 쪽은 곧바로 곰을 쫓아서 달려갔고, 무거운 쪽은 잠시 시신을 살펴본 뒤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다음 싸움이 일어난 곳은…… 여기!’
흔적을 쫓아가던 장기린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춰 섰다.
첫 번째 시신으로부터 큰 보폭으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보기에도 처참할 만큼 상체가 뭉개진 시신이 있었다.
상의와 하의 모두 늑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내였다.
한쪽 손에 소태도(小太刀)를 뽑아 든 채로 머리가 박살 나 있었는데, 등에 멘 화살통과 여러 가지 도구가 들어 있는 봇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냥꾼 겸 다른 사람들의 안내역을 하던 자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바닥엔 반으로 뚝 부러진 대궁(大弓)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고, 화살촉의 끝부분에만 살짝 혈흔이 묻어 나온 화살도 세 개나 떨어져 있다.
‘발걸음이 무거운 쪽의 시신이다. 적웅은 무거운 쪽을 먼저 노렸어. 그런데 분명히 화살에 맞은 것 같은데, 고작 화살촉의 끝에만 피가 조금 묻어 있다니. 가죽이 그렇게나 질기다는 건가?’
대궁의 화살이 안 박힐 정도라면 잘 만들어진 가죽갑옷을 항상 입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엔 짧지만 치열했던 싸움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흔적을 쫓아갈수록 놀라운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적웅은 철저하게 교활하고 강력했다.
‘가벼운 쪽’이 동료의 죽음에 격분하여 미친듯이 달려들자 적웅은 도망치던 도중에 갑자기 방향을 돌리며 제자리에서 두 발로 일어섰다.
가벼운 쪽은 잠시 당황했으나 상대가 고작 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별생각 없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그에게 적웅은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려 길목을 차단했다.
‘대단한 힘이야. 일격에 제법 굵은 소나무를 쓰러뜨렸어. 사내는 소나무를 피해 공격하려 했지만, 이미 적웅은 무거운 쪽을 향해 달려드는 중이었다. 이때까지 몸에 맞은 화살이 세 개. 하지만 달리는 도중에 자연스레 빠질 만큼 화살은 깊이 박히지 못했다.’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삼 일 전 이곳에서 일어났던 참상을 생생하게 재연했다.
가벼운 쪽의 사내는 졸지에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반면에 무거운 쪽의 사내는 경험이 풍부해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달려드는 적웅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전력을 다해 달려든 적웅은 마치 커다란 마차가 달려드는 것과도 같은 힘으로 사내의 머리통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어 버렸다.
단 일격.
그것만으로 사내는 목이 함몰되고 어깨와 가슴이 뭉개졌다.
‘즉사한 사내를 보고 마지막 한 명은 경악해서 후퇴했다. 적웅이 있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무조건 뛰어갔어. 그리고…….’
당황해서 이지가 흐려진 마지막 사내는 하필이면 수림의 더욱 깊은 곳으로 뛰어들었다.
즉, 호랑이를 피하려고 호랑이굴로 달려간 셈이다.
“허리가 반 토막이 났군. 일격으로 결판이 났다.”
청년의 시신은 수림의 깊은 안쪽에서 발견되었다.
단,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한 모습으로 볼 때 이번에는 칼을 제대로 휘둘러 적웅에게도 타격을 입힌 듯했다.
바닥엔 적웅의 것으로 보이는 피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얼마나 싸움이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
눈앞의 시신은 처음에 죽은 사내와 똑같이 매화 문양의 비단 무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몸집은 작지만 매우 날렵해 보였다.
잘 싸웠지만 어느 순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그때 적웅에게 허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잘만하면 죽지 않고 싸움을 끝낼 수도 있었어. 무엇이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을까?’
잠시 의아해하는 장기린.
그때, 뒤따라오고 있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장기린은 손에 든 죽창을 다시금 굳게 붙잡았다.
그는 지금 수림의 깊은 곳에 있다.
즉, 적웅의 ‘구역’ 안쪽.
어느새 간간이 들려오던 주변의 새소리가 뚝 그쳐 있었다.
‘그 녀석이 왔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팔꿈치에 힘을 뺐다.
어깨를 편안히 늘어뜨리고 허리는 꼿꼿이 세웠다.
자연체(自然體).
언제든 반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채 장기린은 수풀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박사박.
잎사귀가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
화아아악―!
잎사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박살 난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그곳에서 잔상을 남기며 달려드는 갈색의 몸체.
장기린은 그 잔상이 눈에 보이기도 전에 이미 기척을 읽고 창을 내찌르고 있었다.
쾅!
진각을 내딛고,
피슈우욱―!
공기가 찢어지며 녹색의 전광(電光)이 번뜩였다.
번뜩이는 전광은 재빠르게 몸을 비트는 습격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핏!
얇은 파열음과 함께 핏물이 살짝 튀어올랐다.
‘어깨를 스쳐?’
애초에 노렸던 것은 옆구리였다.
그런데 상대는 그걸 피해서 겨우 어깨만 살짝 스치도록 만들어 낸 것이다.
미간을 좁히는 장기린.
갈색의 습격자는 마치 날렵한 표범처럼 펄쩍 뛰어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둥치 위로 올라가 있었다.
“너는……!”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처음 숲에서 시신을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큰 놀라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인물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이거, 반갑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나무둥치 위로 올라간 습격자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웃었다.
만적 반야혼.
황제의 곁에 있던 야수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