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八章 ― 인정수교(人情受敎)
“반야혼.”
달리는 마차 안에서 황제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항주에 남도록 해라.”
“……뭐라고?”
“항주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기린을 데리고 오도록 해라.”
반야혼은 순간적으로 황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알 수가 없어졌다.
그것은 마부석에서 마차를 끌고 있던 백택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급하게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우고 작은 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뜻은 없다. 말한 그대로이니라.”
“기린이 평범한 삶을 살도록 허(許)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황제는 의자에 몸을 느긋하게 기대며 대답했다.
“한 번 원하는 대로 살아 보라고 했지, 영원히 그렇게 살라고는 안 했다.”
“……폐하.”
“왜? 짐은 기린이 가진 재능이 평생 객잔 따위에서 썩는 꼴은 못 본다.”
황제는 뻔뻔했지만, 그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지금 여기선 오히려 짐의 관대함에 감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번 원하는 대로 살아 보라며 시간과 기회를 준 것 아닌가.”
“하지만…….”
“그리고 기린에겐 안된 일이지만, 사람에겐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게 있다. 짐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분명 기린은 다른 일에 휘말려서 더 이상 유유자적하게 살 수 없게 될 것이야.”
황제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마치 예언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굳이 반야혼을 남겨 둘 필요는 없습니다. 황실의 사람을 이용해 감시를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반야혼을 마음껏 풀어 두는 것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백택은 반야혼을 신용하지 못했다.
“황실의 사람? 그래서 적룡기마대주가 항주에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알리라는 뜻인가?”
“동창의 인력을 쓰면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쓸데없는 인력 낭비다. 동창이 할 일은 북경에서도 충분히 많아. 그리고 누군가가 감시를 하고 있다면 기린이 알아채지 못할 것 같나?”
“…….”
“그런 면에서 반야혼이 가장 알맞다. 뛰어난 은신공(隱身功)도 있고, 객잔이 잘못되었을 때 기린을 데려오려면 안면이 있는 자가 가는 게 좋겠지.”
황제는 매사가 즉흥적인 것 같아도 그 밑에는 항상 냉정한 계산이 깔려 있는 사람이었다.
백택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반야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객잔이 쉽게 안 없어지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하는 거지?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라고?”
“그래.”
황제는 망설이지도 않고 즉답했다.
“그래라니? 나를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렇게나 수고를 했으면서, 한 번 써보지도 않고 항주에 처박아 두겠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다. 네가 필요하면 부를 테니 그때까진 항주에서 조용히 휴식을 좀 취하란 뜻이다.”
“휴식……?”
“그래. 분명 유근과 함께 세상에 나온 뒤로 제대로 쉬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테지. 어릴 적에 그랬듯이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말고 자연에 묻혀서 살아라. 나중에 때가 되면…… 이 장신구의 반쪽을 가진 자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럼 그를 따라가면 된다.”
황제는 용 모양으로 조각된 손바닥만 한 금 장신구를 반으로 뚝 부러뜨려서 반야혼에게 건네주었다.
반야혼은 그 장신구 조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속의 증표.
언젠가 황제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표식.
반야혼은 그 조각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충심으로 황제의 곁에 있던 것은 아니다. 황실에 있든 장기린을 지켜보며 항주 근처에 있든, 어떻게 되더라도 그에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먹고 숨으면 아무도 못 찾을 텐데?”
황제는 그것 역시 미리 생각해 두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기린을 감시하려면 항주엔 주기적으로 들러야 할 테지.”
“그건 그렇지.”
“그럼 약속을 정하겠다. 네가 필요해지면 보름달이 뜨는 날 금선로의 입구에서 정오가 되기 전에 사람을 보내겠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 금선로 입구?”
“그래. 보름에 한 번이다. 정오까지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돌아가도 좋다.”
황제는 ‘어쩔테냐?’라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반야혼을 응시했다.
반야혼은, 목줄이 풀린 야생동물처럼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겠어.”
☆ ☆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폐하는?”
장기린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였다.
“한동안 쉬라고 하기에 여기서 쉬고 있었지.”
“쉬어? 여기서?”
장기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 냄새가 나는 맹수의 보금자리.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편안하게 쉴 만한 곳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잠깐, 설마?’
문득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 내자 걱정이 생겼다.
“설마 너, 여기 사는 곰을 죽인 거냐?”
“곰?”
반야혼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굉장히 기분이 나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난 새끼 있는 건 안 건드려.”
“새끼라니?”
“여기에 사는 곰 말이야.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다고.”
반야혼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장기린은 그 말에 동요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처음에 휘연을 봤을 때 그렇게 말했었지.’
그때는 함께 있던 구양화를 휘연의 딸로 오해하고 했던 말이겠지만, 어쨌든 반야혼에게도 자신만의 기준이 있구나라며 생각하고는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그와 동시에 장기린은 난감함을 느끼고 말았다.
곰이 새끼를 낳았다.
즉, 지금부터 왕 대인의 집에 끌고 가야 하는 곰이 새끼를 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궁금한가 보군. 그럼 한 번 같이 가서 보는 게 어때?”
그런 장기린의 속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반야혼은 장기린을 숲의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저건 대체 뭐지?”
반야혼은 헥헥거리면서도 두 사람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사자를 가리켰다.
사자는 반야혼이 자신을 가리키자 으르렁거리며 경계심을 표했다.
“사자.”
“뭐?”
개의 이름을 듣고 당연하게도 반야혼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객잔 식구들이…… 주워 온 개다.”
“주워 온 개?”
“그래.”
“그럼 죽여도 되겠지?”
반야혼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려 사자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으르릉― 컹! 컹! 컹!
사자는 놀랍게도 반야혼을 향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짖어댔다.
그 모습에 반야혼은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나는 개가 싫어. 예전부터 가축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꼭 개들이 시끄럽게 굴었지.”
우두둑―!
반야혼의 손가락에서 뼈마디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기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반야혼도 개를 싫어한다.
묘한 곳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죽창을 들어 올려 반야혼의 얼굴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불만이 가득한 반야혼에게 장기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 돼.”
“어째서?”
“이름을 지어 둔 것을 보면 모르겠나? 우리 객잔 식구들은 이 녀석을 좋아한다. 죽으면 슬퍼할 거야.”
“……흥, 하여간 인간들이란.”
반야혼은 같잖다는 듯이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가려는 곳에 있는 곰은 다른 동물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한다. 저 개가 따라오면 분명 싫어할 텐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너는 저 개가 좋은가?”
“…….”
“뭐, 상관없다.”
반야혼은 코웃음 치더니 몸을 돌려 다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지만, 언제 곰한테 물려 죽어도 난 모르는 일이다.”
……심술궂은 말을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림 속을 일각가량 헤치고 들어가자 나타난 것은 몸집이 큰 장정 다섯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동굴이었다.
입구에 다가서자마자 지독한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마치 콧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육식동물의 냄새, 역겨운 체향이 동굴 주인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끄응…¨.
뒤에 있던 사자가 끙끙거리며 불쾌감을 나타냈으나,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끝까지 장기린을 따라 동굴로 들어왔다.
어둡고 습한 공기를 느끼며 장기린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걸 발견했다.
“이게…… 새끼들이군.”
장기린은 신음을 흘리듯이 말하고 말았다.
이제 갓 눈을 뜬 것 같은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통통하고 짧아 보이는 팔다리.
살짝 밀기만 해도 뒤로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동그란 몸은 젊은 여인들이 봤다면 비명을 지를 만큼 귀여웠다.
새끼는 총 두 마리.
전부 제 스스로는 아직 멀리 걷지도 못할 만큼 어렸고, 크기는 작은 개와 비슷한 정도에 불과했다.
보나마나 아직 어미의 젖을 떼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장기린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들의 어미는?”
장기린이 목소리를 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새끼 곰 두 마리는 꾸엉꾸엉거리는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아직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동굴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목소리가 컸다.
새끼들은 갑자기 나타난 장기린을 경계하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글쎄, 잠깐 사냥이라도 나간 모양인데?”
“이 울음소리를 들었겠지?”
“큭, 그렇겠지. 곰은 모성애가 강하니까.”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지금 상황에 별로 관심없다는 듯이 넓적한 종유석 위에 털썩 걸터앉는 반야혼.
장기린은 복잡한 심경으로 계속해서 시끄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새끼들을 쳐다봤다.
울음소리를 들었으니 어미가 곧 찾아올 것이다.
반야혼은 그전에 마음을 정해야만 했다.
‘어미를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새끼가 있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반야혼만의 규칙이 아니다.
장기린도 전장에 있을 때 피난을 떠나는 난민이나 자식을 지키려는 부녀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약탈을 하려는 병사가 있으면 나서서 엄벌에 처할 정도였다.
그러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잡아야 할 곰이 아직 어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새끼를 둘이나 데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말았다.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군.”
반야혼은 낮으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는 이곳에 왜 온 거지? 죽창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싸우러 온 것 같은데, 다른 놈들처럼 곰을 잡으러 온 건가?”
“…….”
“그럼 이제 내 말을 들었으니 어떻게 할 건가? 그래도 상관없이 죽일 건가? 새끼가 있는 어미 곰을?”
반야혼은 호송대에서 양응룡을 조종하고, 항주를 탈출할 때 언가의 다섯째 아들을 현혹시켰던 화술을 사용했다.
이유는 어디까지나 흥미.
반야혼은 장기린을 직접 쳐다보진 않았지만,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장기린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고민하는 화제를 반야혼이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답을 내리기 전에 먼저 답을 내려주는 존재가 있었다.
컹―! 컹―!
낮고 굵은 목소리로 짖어대는 갈색 털의 견공.
사자가 새끼들을 향해 달려들더니 꼬리를 흔들며 새끼들의 얼굴을 핥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끄응― 끄응―
새끼들은 처음엔 놀란 듯이 보였으나, 이내 자신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자와 동화되기 시작했다.
새끼들과 사자는 덩치에 큰 차이가 없었다.
사자가 조금 커 보였지만 그건 순전히 북슬북슬한 털 때문이고, 크기도 비슷했기에 셋은 더 쉽게 동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곰의 새끼들은 앞발로 얼굴을 툭툭 때리면서 애정을 표현했고, 사자는 그런 애정 표현을 묵묵히 받아 주면서 순식간에 두 아이의 호의를 얻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난을 받아 주면서도 때때로 콧등을 깨물거나 앞발로 머리를 누르면서 두 새끼를 자신보다 아래 서열로 만드는 것도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
“……저것도 쓸모가 있었군.”
심지어 반야혼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장기린과 반야혼은 서로 대화하는 것조차 잊고 사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놀라운 사교성과 행동력은 두 사람보다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렇게 사자와 두 새끼 곰의 친분이 점점 돈독해질 무렵, 어미가 찾아왔다.
크워어어엉―!
어마어마한 울음소리.
항주 호정산을 지배하는 여왕의 포효가 온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뒤흔들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적웅(赤熊)이란 이름답게 붉은색 털로 뒤덮인 거대한 몸체였다.
장기린은 맹세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큰 곰은 처음 보았다.
몸집은 커다란 전마(戰馬) 세 마리를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컸고, 주먹만 한 두 눈이 불을 뿜으며 그 아래로는 사람의 허리를 한입에 물어뜯을 것 같은 입과 송곳니가 번뜩이고 있었다.
입에서 토해 내는 울음소리는 폭풍과도 같고, 연이어 내뿜는 숨결은 거대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막대한 존재감은 적웅이 두 발로 땅을 버티고 일어섰을 때 절정에 달했다.
무려 십오 척이 넘는 키.
거대한 육체가 두 발로 일어서자 동굴 안이 꽉 차 버렸다.
그림자가 쏟아지는 듯하다는 게 이런 것일까.
적웅의 모습은 거대한 동물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신(神)을 보고 있는 듯했다.
‘생각 이상이군.’
장기린은 죽창을 다시 바르게 고쳐 쥐고 몸을 긴장시켰다.
직접 대하고 보니 멋모르고 달려든 비단 무복의 사내들이 왜 도망을 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위압감을 뿜어내는 적웅은 마치 반야혼이나 장기린의 살기와 비슷했던 것이다.
‘앞발을 먼저 휘두를까, 아니면 입으로 물어뜯으려고 할까?’
동물의 습성에 대해 모르니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크르르릉―!
그런 장기린을 비웃 듯이 으르렁거리는 적웅.
적웅은 장기린을 한 번 보고 그다음에 반야혼을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새끼들을 쳐다보았다.
쿠웅―!
그리고는 다시 앞발을 땅에 딛고 네 발로 걷기 시작했다.
장기린과 반야혼이 양옆으로 비켜서자 적웅은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새끼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기린과 반야혼에게 옆구리나 등 같은 급소들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동물이지만, 그 대범함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사자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장기린은 ‘아차!’ 싶었으나, 이미 적웅은 새끼들과 사자의 코앞까지 다가간 상태였다.
후우우―
적웅이 뜨거운 숨을 내쉬고,
헥…… 헥…… 헥헥…….
사자가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였다.
사자는 놀랍게도 적웅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새끼 곰들은 여전히 앞발로 사자를 끌어안고 장난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새끼 곰 두 마리가 한꺼번에 매달리자, 그제야 사자는 적웅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새끼 곰들의 얼굴을 핥아 주었다.
새끼 곰들이 마치 까르르 웃는 것처럼 꾸엉꾸엉 울면서 등을 바닥에 대고 뒹굴거렸다.
적웅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그시.
그 순간, 사자가 움직였다.
“저런……!”
“쉿!”
놀란 장기린이 움직이려는 것을 반야혼이 말렸다.
사자는 계속해서 옆에 달라붙는 새끼 곰 두 마리를 앞발로 눌러서 떼어놓더니, 적웅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적웅의 앞발을 끌어안고 숨을 헥헥거리며 적웅을 올려다본 것이다.
아름드리고목에 붙은 매미와 같은 모습.
그걸 애교를 부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만용을 부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적웅이 잠깐의 변덕으로 앞발을 살짝 휘두르기만 해도 사자는 곤죽이 되어 죽는다.
그럼에도 사자는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적웅을 올려다볼 뿐이다.
헥…… 헥…… 헥헥…….
사자가 올려다보는 만큼, 적웅도 사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긴장된 공기가 감돌기를 잠시.
마침내 적웅이 움직여 도착한 곳은 차가운 동굴의 바닥이었다.
쿠웅―!
묵직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엎드린 적웅의 배를 향해 새끼 곰 두 마리가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젖을 빨기 시작했다.
적웅은 사자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자가 젖을 빠는 새끼 곰들 사이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무언의 동의.
그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적웅은 옆으로 누운 채로 잠을 자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고, 새끼 곰들 역시 적웅의 품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봐, 이만 나가지.”
반야혼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장기린은 적웅의 그 모습으로부터 눈을 떼어 내지 못했다.
이번엔 사자가 따라 나오지 않았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바람이 몸을 청량하게 씻어 주었다.
장기린은 가만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에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적룡기마대의 군사(軍師) 역할을 맡고 있던 섭우생은 별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일부는 매일같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한 사람이 사는 것도, 한 사람이 죽는 것도.
당사자가 아닌 다름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금방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사람 좋은 왕 대인을 살릴 것인가.
새끼를 가진 곰을 살릴 것인가.
아직은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장기린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반야혼.”
장기린은 옆에 서서 하품을 하고 있는 만적을 불렀다.
“적웅은 어째서 우릴 공격하지 않았지?”
“적웅? 저 곰의 이름인가?”
장기린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반야혼은 ‘단순한 이름이군’이라며 비웃었다.
“똑똑한 곰이야. 웬만한 사람보다 나아.”
“똑똑하다고?”
“우연히 피 냄새를 맡고 와 봤는데, 저 곰이 나를 보고도 공격을 안 하더군.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걸 한눈에 알아본 거지. 어때? 사람보다 낫지 않나? 내가 강한 줄 모르고 덤비다 죽은 멍청한 놈들만 해도 일만 명은 족히 된다고.”
반야혼은 자신의 말이 재밌는지 큭큭거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았다는 건가?”
“그래. 그밖에 공격 안 할 이유가 뭐가 있어? 참고로, 저 밖에는 무슨 현상금을 노리고 왔다는 사냥꾼들이 백 명쯤은 죽어 있다고.”
확실히 반야혼의 말대로 동굴밖엔 시신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적웅이 얼마나 난폭한 성격인지 알게 해 주는 증거들이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보통 내가 강하다는 걸 알았으면 굴복을 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이 곰은 안 그러더란 말이지. 오히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식으로 당당한 거야.”
“방금 전처럼 말이군.”
“그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확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말했듯이 새끼가 있는 것은 안 죽인다는 주의라서. 이젠 저 녀석도 그걸 아는지 날 없는 것처럼 취급하더군.”
반야혼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웅이라는 곰은 보통 영악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하지만 절대로 해를 입히지 않으니 비굴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얼마나 ‘인간’다운 생각인가.
장기린은 적웅의 이성이 생각보다 더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반야혼, 이곳에 계속 있을 건가?”
반야혼은 어째선지 그 질문을 던지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먼 곳으로 피했다.
“뭐, 한동안은.”
“어째서?”
“잘난 척을 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사냥을 갔다 오는 사이엔 빈틈투성이야. 사냥꾼들이 들이닥치면 새끼들부터 데려갈 거다.”
장기린은 조금 놀라 버렸다.
즉, 요약하자면 적웅이 동굴을 비운 사이 새끼들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반야혼이 지키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장기린은 그제야 자신이 동굴로 가려고 했을 때 반야혼이 습격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반야혼은 새끼들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일만 이상 취한 살인귀에게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반야혼은 ‘인정’이 많은 것 같았다.
“반야혼, 다시 봤다.”
반야혼은 코웃음 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잘 지켜라. 내일 다시 오지.”
“객잔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래. 안 들어가면 식구들이 걱정할 테니까.”
“…….”
장기린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반야혼에게 조금의 장난기를 담아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사자는 죽이면 안 돼.”
“큭, 새끼들 눈치가 보여서 이젠 죽이지도 못하겠더군. 아까 보니까 잘도 곰들 사이에 끼어들던데, 사실은 개가 아니라 곰인 거 아냐?”
장기린은 반야혼의 어울리지 않는 농담에 웃어 버렸다.
☆ ☆ ☆
다음날 아침.
해가 질 때 즈음, 객잔 식구들 몰래 호정산으로 향하는 장기린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이유는 그날 낮에 왕 대인의 집에 들렀던 일 때문이었다.
장기린은 평소 왕 대인이 자주 다니던 단골 객잔의 주인이라는 신분으로 독대를 허락받았고, 그곳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는 체구로 변해 버린 왕 대인의 초췌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기린은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반야혼의 일만을 제외하곤 대부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고, 특히 왕 대인은 장기린이 적웅을 잡아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부분에서 놀라워했다.
“허허, 풍운객잔에…… 쿨럭, 쿨럭……! 잠룡이 숨어 있었구려. 화산파에서 와 준 무인들도 실패한 일인데…….”
왕 대인은 비록 속가제자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다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으니 장기린에게 더 이상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곰이 새끼를 데리고 있다고 했지요? 그럼 됐습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니, 의도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왕 대인은 그리 말하며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홀가분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도의를 어기면서까지 어미를 죽이고 목숨을 구한다니, 그거야말로 절대 해선 안 될 일입니다. 쿨럭…… 쿨럭……! 잘하셨습니다, 장 객주. 앞으로도 그렇게 도의를 지키며 살아 주십시오.”
왕 대인은 그 뒤로 기침이 더욱 심해지며 정신을 잃었고, 황급히 달려온 의원에 의해 장기린은 밖으로 내쫓기듯이 밀려났다.
“도의라…….”
장기린은 그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왕 대인이 비굴하고 처절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면 훨씬 마음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이제 남은 시간은 하루.
촉박하지만…… 지금의 장기린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사박, 사박.
그리고 시간은 다시 어두워진 저녁.
환한 보름달의 달빛을 받으며 장기린은 반야혼과 조우했다.
반야혼은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서 하얀색의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길쭉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이었는데, 반야혼은 환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그것을 계속해서 씹어 삼켰다.
거대한 동굴을 등 뒤에 두고 환한 달빛을 받는 반야혼.
반야혼과 보름달.
그 둘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장기린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적웅은?”
장기린의 질문에 반야혼은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호정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사냥 중.”
그러고는 다시 하얀 무언가를 씹는다.
“그래서 새끼들을 지키고 있었군.”
“거기에 덤으로 개도 한 마리 지키고 있지.”
“사자는 잘 있나?”
“이젠 어느 게 새끼 곰이고 어느 게 개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장기린은 반야혼의 툴툴거리는 말투에 또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마음은 정했나?”
이번엔 반야혼이 툭 내던지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
“어떻게 정했지?”
“죽이지 않는다.”
“그건 사람을, 아니면 곰을?”
장기린은 여전히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반야혼의 옆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반야혼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왕 대인의 사정도, 그리고 장기린이 이곳에 온 이유도.
“곰을 죽이지 않는다.”
“큭, 어째서?”
“이미 거의 다 죽어 가는 사람과 앞으로 새끼를 키워야 할 곰. 어느 쪽이 우선인지는 명백하니까.”
반야혼은 장기린 쪽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혀를 끌끌 찼다.
“결국, 사람과 곰을 동급으로 본다는 것이잖아. 보아하니 너도 평범하게 살긴 글렀군.”
“……그런가?”
“쯧, 이번엔 제대로 한 번 싸워 보나 했더니…… 아무래도 너와는 싸우기 힘들 모양이다.”
즉, 장기린이 모든 걸 각오하고 왕 대인을 구하기 위해 적웅을 잡으려고 했다면 반야혼과 싸워야만 했다는 뜻이었다.
“반야혼.”
“왜?”
“너는 좋은 사람이다.”
언젠가 운찬을 비롯한 객잔의 식구들이 장기린에게 들려줬던 말을 반야혼에게 해 주었다.
반야혼은 잠시 움찔하며 굳었으나, 이내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심각한 얼굴로 하루 종일 고민하더니, 드디어 미쳤나 보군.”
그는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아 놓은 하얀색 물체를 꺼내 다시 질겅질겅 씹었다.
장기린은 문득 그게 뭔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먹고 있는 거지?”
“어, 이거?”
반야혼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곰의 비계.”
“……뭐라고?”
“그거 알아? 겨울잠 자는 동물들의 비계는 느끼하지 않고 쫀득쫀득하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야.”
반야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장기린에게는 청천벽력보다도 더 큰 충격을 안겼다.
“대체…… 그건 무슨 곰의 비계지?”
“무슨 곰이냐니? 당연히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어떤 곰이지.”
“……뭐?”
“털이 우중충하게 어두운 놈이었어. 자주 있어. 새끼를 가진 어미의 냄새가 발정기가 된 암곰의 냄새랑 비슷하거든. 그걸 구별 못하고 찾아오는 멍청한 수놈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와서 귀찮을 정도야.”
반야혼은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얀색 비계를 입에 가져가려 했다.
장기린은 울컥 화가 나서 비계를 뺏어 들었다.
탁!
“무슨 짓이야!”
눈을 부릅뜨며 살기를 뿜어내는 반야혼.
그는 짐승처럼 살아온 탓인지 음식을 뺏기는 것에 예민했다.
“넌 대체…….”
장기린은 미간을 좁힌 채 주먹을 꽉 움켜쥐고 움찔거렸으나…… 이내 비계를 다시 던져 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싶지만 참는다.
반야혼에게 화를 내서 뭐 하겠는가.
돌로 된 조각상에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지금도 곰을 잡을 수 있겠나?”
“뭐야, 싸우는 것 아니었어?”
“대답이나 해. 근처에 살아 있는 곰이 있나?”
반야혼은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세 마리 정도. 서쪽으로 고개 하나 넘어가면 금방 찾을 수 있어.”
“그래, 알았다.”
장기린은 어제 아무렇게나 바닥에 꽂아 두었던 죽창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자 뒤쪽에서 반야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장기린은 대답했다.
담담하고, 또한 개운한 목소리로.
“곰 사냥하러 간다.”
☆ ☆ ☆
때론 경극의 마무리처럼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도 필요한 법이다.
장기린은 양손과 양발이 줄에 묶인 채 버둥거리는 곰 한 마리를 잡아 돌아가자 감격에 젖어 울음을 터뜨리던 왕 대인 집 가솔들의 얼굴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왕 대인은 거동도 하기 힘든 몸으로 굳이 장기린이 있는 곳까지 나와 절을 올렸다.
“운이 좋았던 것뿐이오. 이렇게까지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니오.”
장기린은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했으나 그는 생명의 은인에겐 꼭 예를 표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세 번이나 절을 했고, 곧이어 힘이 다해 실신하자 가솔들과 의원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왕 대인을 다시 안채로 옮기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엔 장기린도 객잔으로 돌아왔기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랐으나, 열흘 뒤 비록 평소보다 상당히 마른 모습이지만 혈색을 되찾은 왕 대인이 객잔으로 찾아와 직접 감사를 표하자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 대인은 의외의 상황에 너무나 놀란 객잔 식구들에게 직접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부디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며 커다란 수레 열 개에 가득 쌓여 있는 쌀 포대를 보여 주었다.
“세상에! 올 한 해 동안 쌀 걱정은 없겠네요!”
“객주님, 쌀이 천 석입니다. 저 정도면 웬만한 고위관리의 한 해 녹봉과 맞먹습니다. 이 정도 재산을 쉽게 내놓다니…… 왕 대인이 숨겨진 거부(巨富)라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운찬과 휴는 특히나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칠과 아팔은 이렇게 많은 쌀은 처음 본다며 입을 쩍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고, 휘연은 자신이 모르는 새에 또 위험한 일을 했다며 장기린에게 새침한 눈초리를 보냈다.
모두가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장기린은 왕 대인의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받지 않겠소.”
“예에?!”
놀란 것은 객잔의 식구들과 왕 대인이 집에서 데려온 식솔들뿐이다.
왕 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어째서 안 받으십니까?”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받지 않겠소.”
“하지만 그러면 저는 생명의 은을 갚지 못하게 됩니다.”
“괜찮소. 앞으로도 객잔의 좋은 손님으로 남아 주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오.”
장기린은 그 당시에 적웅을 죽이기보단 왕 대인이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큰 보답을 선뜻 받을 만큼 장기린은 뻔뻔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왕 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말 않고 열 수레의 쌀 천 석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개, 객주님!”
“쌀이 천 석이에요! 받으셔야죠!”
“맞아요! 어째서 안 받으시는 거예요!”
운찬, 아칠, 아팔. 세 사람은 점점 멀어지는 수레 위의 쌀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장기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사이, 왕 대인이 가까이 다가와 장기린에게 포권을 취했다.
“역시 은공과의 인연은 쌀 천 석보단 훨씬 값진 듯합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오?”
“이 쌀을 받아 주시면 그걸로 은혜를 다 갚은 것으로 하려 했으나…… 안 받아 주시니 앞으로의 약속으로 은혜를 갚을까 합니다.”
왕 대인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곳 풍운객잔의 이름을 따서 전장(錢場)을 하나 만들까 합니다. 장 객주님께는 앞으로 그 전장에서 액수가 얼마가 되더라도 융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 돈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되시거나 돈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부담없이 찾아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생명의 은을 갚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전장이라면…… 돈을 빌리거나 맡길 수 있는 그 전장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장기린은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그는 아직 돈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돈을 빌릴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았다.
‘돈을 빌릴 일이 없다면 승낙해도 상관없겠지. 그래야 저쪽도 마음이 편할 테고.’
그렇게 생각한 장기린은 왕 대인의 말에 승낙했다.
“그럼, 그 호의는 감사히 받겠소.”
“약속하신 겁니다. 장 객주님께선 저 왕분(王賁)의 약속을 얻으셨습니다. 앞으로 돈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찾아 주십시오.”
왕 대인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떠나가는 왕 대인의 뒷모습을 보며 운찬과 아칠, 아팔은 안타까운 듯 괴로워했다.
“원래, 부자가 더 하다더니…… 딱 한 번 사양하니까 다시 권유하지도 않고 냉큼 돌아가는 것 봐요.”
“앞으로의 약속은 돈이 안 되잖아요. 전장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맞아, 맞아. 천 석을 받았어야 하는데.”
반면, 아쉬워하는 세 사람과는 달리 휘연과 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장에서의 무제한 융통 약속이라…….”
“이건 어쩌면…….”
두 사람은 영리하게 눈을 빛냈으나 주위를 의식하곤 말을 아꼈다.
제각각 상념에 빠져 있는 식구들과는 달리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이 일은 어떻게 되도 좋은 일이다.
그는 왕 대인을 구할 수 있었고, 두 새끼 곰의 어미인 적웅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된 결말에 장기린은 기분이 좋았다.
“자, 그럼 돌아갈까?”
객잔을 향해 몸을 돌리는 장기린.
훗날, 풍운전장(風雲錢場)이란 이름의 전장이 대륙 상계(商界)를 장악하고, 전장의 주인인 왕분은 ‘보이지 않는 손[隱手]’이라 불리며 자금성의 관부(官府)마저도 좌지우지하는 거물이 된다. 더불어 전장의 성공과 함께 범위를 넓혀 풍운표국도 성공적으로 출범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아직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