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九章 ― 운찬지일(雲璨之日)(1)
매일 아침.
묘시(卯時:오전5시―7시)가 시작될 무렵이면 운찬은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한때는 사자라는 이름의 개가 깨워 주었으나, 언제부턴가 사자가 이틀에 한 번꼴로밖에 집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다시 운찬이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문을 열면 바로 사자의 집이 보인다.
대나무를 잘게 잘라서 엮어 만든 집이었는데, 가끔 객잔을 보수하러 오는 임 목장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빈틈없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입구로 들어가는 경사로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였다.
운찬이 지금 자고 있는 방보다 더욱 정성이 들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어째서 객주님이 개를 키우는 것에 승낙을 하셨을까?’
운찬은 그때만 생각하면 신기했다.
열흘간의 시간을 보낸 후 결정하기로 했지만, 애초에 객잔 식구들은 장기린이 개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느 날 장기린이 개를 키워도 좋다고 했을 때는, 식구들 모두 대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마음이 바뀌셨죠?”
휘연의 질문에 장기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인정(人情)에 대해 배웠거든.”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어. 휘연은 알아 봤자 해만 될 거야.”
휘연은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불만스러워했으나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사자는 한 가족이 되었다.
운찬은 텅 비어 있는 사자의 집을 지나 자신만의 공간인 주방으로 들어갔다.
원래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운찬은 어둠이 싫다.
특히 등불을 대여섯 개나 피워 놓아도 여전히 어둡게 느껴지는 새벽의 주방은 정말로 싫다.
얼마 전에 이망이 한 번 쳐들어왔던 이후로는 바닥에서 또다시 단검이 푹! 하고 솟아오를 것만 같아서 함부로 걸음조차 뗄 수가 없었다.
운찬은 그가 찾는 중(中) 크기의 식칼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라.”
장기린이 해 준 말이었다.
운찬은 그 말을 기억하고 되도록 잘 때를 제외하곤 항상 식칼을 몸에 지니고 있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별 의미도 없는 미친 짓 같지만, 운찬은 장기린처럼 활검의 경지에 오를 수만 있다면 미친 짓이 아니라 미친 짓 할아버지라도 할 수 있는 각오가 있었다.
식칼을 품 안에 넣고 뒤뜰로 나온 운찬.
그곳에서 반 시진 동안 장기린이 가르쳐 준 ‘걷는 법’과 ‘숨쉬는 법’을 연습하면 운찬의 진짜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으하암―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강 숙수님.”
아칠과 아팔이 일어나는 것은 이때쯤이다.
묘시 중반.
두 사람은 쿨쿨 잠들어 있는 남궁휴를 깨운 뒤, 같이 숨 쉬는 법과 걷는 법을 수련한다.
운찬은 그때쯤 객잔 밖으로 빠져나간다.
해가 뜰 때쯤 열리는 새벽 시장에서 야채와 식재료들을 구입해 오기 위해서였다.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운찬은 아직 잠에 취한 얼굴로 물지게를 어깨에 짊어지는 아칠과 아팔에게 손을 흔들고, 계단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꿍!
“어……?”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발가락의 아픔.
그리고 동시에 몸이 확 기울었다.
“컥……!”
운찬은 눈을 부릅떴다.
발바닥이 미끄러졌다.
근처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앞으로 내딛으려던 발이 제자리에 딱 멈추는 것과 동시에, 발과 함께 나가려던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모든 것이 너무 불시에 일어났다.
운찬은 손을 뻗어 중심을 받으려고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단단한 나무 바닥이 이미 코앞으로 확! 하고 다가와 있었다.
눈을 질끈 감는 운찬.
하지만 기대했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객주님……?”
“걷는 법은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러는 거냐? 평소에도 항상 걷는 법을 사용해서 걸어야 할 것 아냐?”
무뚝뚝하면서도 속에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충고를 해 주는 장기린.
운찬은 장기린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면서 얼굴을 붉혔다.
스물을 넘은 사내 녀석이 걸음도 하나 제대로 못 걷다가 넘어진 것이 부끄러웠다.
“죄, 죄송해요.”
운찬은 사과하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신 거지?’
풍운객잔의 주인.
운찬이 형님이라 부르는 장기린은 그야말로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신기한 사람이었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살벌한 눈빛을 가진 것에 반해―그래도 최근엔 많이 나아져서 삼 초 정도는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속에는 잔정이 많고 사람을 자주 도와주었다.
객잔의 식구들은 다들 장기린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단 운찬 자신부터가 그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함받았고, 침모인 휘연 누님은 기루에 팔려 갈 뻔한 걸 데려왔으며, 남궁휴는 노름빚 때문에 지하 투기장에 끌려갈 뻔한 것을 구해 주었다.
아칠과 아팔은 목숨을 구한 적은 없지만…… 일단 다른 곳보다 월봉을 두 배나 많이 준다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은인처럼 감사하고 있었다.
돈도 많고, 그 돈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특이한 사람.
게다가 싸움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과거에 한가락 했다는 건 살벌한 눈빛과 오른쪽 귀가 뭉개져 있는 것을 보고 충분히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번에 청풍객잔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는 정말로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얼마 전엔 객잔 식구들이 모르는 새에 어디서 곰을 잡아다가 왕 대인네 집에 가져다줘서 왕 대인을 살렸다고 한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뭔지.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사내가 바로 장기린이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일 거야, 분명히.’
운찬은 그렇게 확신했다.
지금도 그렇다.
분명히 객잔 안에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느새 귀신처럼 나타나서 그가 넘어질 뻔한 것을 구해 주지 않았는가.
‘혹시 산신령이나 도깨비는 아닐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사이,
“뭘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딱!
“윽……!”
번개같이 날아온 일격이 운찬을 제정신으로 돌려 놓았다.
운찬은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장기린이 엄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앞으론 항상 ‘걷는 법’을 유지하도록. 언제 어디서나 몸에 배어 있게 하란 말이다. 알았어?”
“네, 그렇게 할게요.”
운찬은 자신의 다리를 건 원흉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싸리비.
어제 휴가 사용했음이 분명한 싸리비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바닥에 비스듬하게 넘어져 있었다.
‘이 녀석이 또……!’
휴는 일은 다 잘해 놓고 마지막에 정리를 깔끔하게 해 놓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건만, 전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넘어졌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겠냐?”
“예?”
“저걸 봐. 넌 저걸 넘어뜨릴 뻔한 거다.”
자신의 세 걸음 앞에 나무 의자가 겹겹이 쌓여 높은 탑을 만들고 있었다.
만약 장기린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의자탑에 머리를 꽝! 하고 박았을 것이다.
운찬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의자들은 옆으로 넘어졌을 테고,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탑을 건드리며 함께 무너졌을 게 분명했다.
대참사.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강 숙수님은 은근히 사고뭉치라니까요.”
그때 들려오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
사뿐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꽃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이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운찬은 잠시 모든 상황을 잊고 멍해져 버렸다.
차세대 항주제일화.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풍운객잔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는 여인이자, 상가(商家)의 여식으로서 객잔을 통괄하여 점점 발전하게 만드는 폭풍의 핵(核).
이름하여 진휘연.
운찬은 그녀가 장기린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때때로 멍하니 쳐다보게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몰라서 그렇지, 이미 객잔의 손님들 중에는 진휘연의 암중 추종자가 십 단위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 이 녀석에겐 눈을 뗄 수가 없어.”
장기린은 혀를 끌끌 차면서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도 이젠 봐주세요. 강 숙수님도 어서 시장에 가셔야죠. 보세요. 벌써 해가 뜨려 하고 있어요.”
진휘연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하지만 어딘가 엄격한 듯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운찬을 구해 주었다.
자고로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라고 했던가.
풍운객잔에서 장기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휘연뿐이다.
객잔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 숙수님, 어서 다녀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만약 이번에도 시장 제대로 못 봐 오시면 오늘 휴식 시간을 없앨 거예요.”
여전히 싱긋 웃고 있는 진휘연.
그 웃음은 혼이 빠질 만큼 아름다웠지만, 이번 웃음은 꽃으로 비유하자면 향기 속에 독이 들어 있는 양귀비와 같았다.
운찬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손님이 점점 늘어나면서 객잔의 일이 바빠지고 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각밖에 안 되는 휴식 시간이 없어져 버리면 운찬은 어찌 되겠는가.
‘으윽, 그렇게 되면 죽는다. 안 그래도 보조할 부숙수도 없는데…….’
항상 아름다운 웃음에 홀려서 잊고 만다.
이 객잔에서 진정으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진휘연이라는 것을.
돈을 관리하는 것은 진휘연.
장부를 갖고 있는 것도 진휘연.
불과 얼마 전에 쓸데없는 재료비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며 주의를 준 것도 진휘연이다.
이번엔 시장에 한시라도 더 빨리 가서 최대한 재료비를 줄여야 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운찬은 도망치듯이 객잔을 빠져나갔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
또 한 번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지루하고 귀찮은 노동인 ‘재료 준비’를 마치고 나면 운찬에겐 ‘소면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점심은 모두가 간소한 식사를 즐기는 시간이다.
보통 이 시간에 객잔을 찾는 사람들은 교자나 소룡포를 즐겨 먹는 편이지만, 풍운객잔에선 오로지 신천지 소면을 먹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보통 풍운객잔에서 점심시간에 판매되는 소면의 숫자는 대략 삼백 그릇.
그만한 숫자를 팔려면 불과 한 시진 안에 객잔 안의 탁자가 열 번이나 손님이 바뀐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에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장기린과 휴, 휘연까지 틈틈이 일손을 돕는 데도 불구하고 주문에 따라가는 것조차 벅찰 정도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물이야 미리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그 위에 얹는 고명, 삶은 야채, 고기, 그리고 면(麵)은 손오공이 분신술을 쓰듯이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하나하나, 고도로 훈련된 숙수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히 점심시간의 주방은 운찬에게 무간지옥처럼 끊임없는 일거리를 만들어 낸다.
주문, 주문, 주문…….
반죽, 반죽, 반죽…….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전심전력을 다해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점심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땡! 하고 들려오면 그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아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운찬은 주방 뒷문에 기대앉은 채 새하얀 가루로 범벅이 된 얼굴로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의 반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이제 남은 저녁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싶은 불안감이 섞인 목소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운찬은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따라갈 거라니까!”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
그러면서도 아침을 알리는 참새 소리처럼 영롱함이 섞여 있다.
“꼬마 아가씨 목소리잖아?”
운찬은 멍하니 있던 정신을 일깨우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풍운객잔에서 머물고 있는 유일한 투숙객.
구양화와 백연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있었다. 둘은 무언가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
“글쎄, 안 된다니까, 화 매.”
“그럼 나보고 또 객잔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말이예요? 그건 싫다구요!”
“화 매는 여기를 좋아하잖아.”
“좋아하죠! 하지만 지금 이 시간 때엔 내가 할 일이 너무 없어요! 휘연 언니는 장부 정리하느라 바쁘고, 휴 오라버니는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단 말이에요.”
‘휴 오라버니? 언제부터 쟤가 휴를 오라버니라 부르기 시작했지?’
운찬은 왠지 울컥,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수완이 좋고 말솜씨가 유려한 휴는 여성의 호의를 얻는 것에 능숙했다.
물론 구양화는 아직 열두어 살밖에 안 된 꼬마 아가씨고,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지만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쳇, 하여간…… 음?”
딴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일까.
운찬은 창밖으로 몸을 쭉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양화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운찬은 땅바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양화는 창밖에서 아래를 쳐다보는 식이다.
마치 재밌는 놀이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구양화를 보는 순간, 운찬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까딱, 까딱.
구양화는 거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척하니 손을 얹더니, 한쪽 손가락으로 이리 올라오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저게……!”
격한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운찬은 반항심에 휩싸였으면서도 어째선지 몸은 이미 객실을 향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문을 열자 눈꼬리가 하늘까지 치솟은 예쁘장한 소녀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척하니 겨눴다.
“이봐, 당신! 우리 얘길 엿듣고 있었지!”
옆에 있던 백연이 화들짝 놀라며 ‘화 매, 말을 가려서 해야지!’라며 주의를 주었다.
한편, 운찬은 그와는 다른 이유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당신’인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마 구양화는 모를 것이다, 미묘한 호칭의 차이가 사람의 기분을 얼마나 좌지우지하는지.
“그보단, 엿들은 게 아니야. 뒤뜰에서 쉬고 있는데 그냥 들린 거지.”
운찬은 억울함을 잔뜩 담아 항의했다.
“그게 그거야!”
“그 둘이 같은 거면 돌멩이랑 두꺼비가 같은 거겠다. 그럼 이 세상엔 엿듣는 사람뿐인 거냐?”
“어쨌든 내 말을 들었다는 거잖아!”
구양화라는 꼬마 아가씨는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과감히 넘어갈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어쨌든 들은 것은 들은 것이기에, 운찬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긴 했지.”
“그럼 됐어!”
구양화는 사건을 해결한 포청천처럼 명쾌하게 손을 내저었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됐다는 거야?”
“당신이 오늘 나랑 놀아 주면 된다는 거지.”
“……뭐?”
“이야기 들었다면서? 난 여기 있기가 너무 심심해서 백연 오라버니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뭔가 중요한 자리라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단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놀아 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지.”
참으로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해결법이었다.
운찬은 너무나 황당한 심정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도 바쁜 몸이라고.”
“바빠 봤자 숙수지. 아직 저녁 시간은 멀었잖아? 요리 시작하기 전까지만 돌아오면 되는 거 아냐?”
“……너, 지금 그 말로 대륙의 모든 숙수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거 아냐?”
“대륙은 무슨. 들은 건 당신뿐이잖아?”
구양화는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하며 절대로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운찬이 애써 분을 참으며 백연을 쳐다보자, 백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조용히 부탁했다.
“강 숙수님, 죄송하지만 잠시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보시다시피 화 매가 너무 심심해해서요.”
“저기, 그렇긴 해도 이건 좀 곤란한데요.”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가려는 곳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라서 화 매를 절대로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구양화는 백연이 사정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부탁하고 있어요! 우린 이 객잔의 손님이라구! 객잔의 직원이면 손님의 요구를 받아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하아, 화 매. 이건 원래 이분들의 일이 아니잖아. 꼭 해줘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
“어쨌든, 난 여기 이 사람이랑 놀고 있을 테니까, 백 오라버니는 볼일을 보고 와요. 걱정할 것 없어요.”
구양화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홱 돌렸다.
운찬은 거기서 구양화의 마음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네.’
결국, 구양화는 백연이 걱정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럼 강 숙수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화 매가 말은 저렇게 사납게 해도 사실 속은 착한 아이입니다.”
“……그래요?”
“예. 조금만 같이 지내 보면 곧 대하는 법을 알게 되실 겁니다.”
백연은 꾸벅 인사를 한 뒤,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중요한 자리에 나가야 한다는 말은 진짜인 듯했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둘.
운찬은 어디 한번 날 재밌게 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세우고 있는 구양화를 보자 울고 싶어졌다.
‘그래, 휘연 누님이라면!’
이 풍운객잔의 실세이자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꼬마 아가씨와도 친분이 있는 진휘연이라면 이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운찬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일각 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운찬은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진휘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일각 동안 구양화를 떼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구양화와 같이 놀아 주라고 설득을 당해 버렸다.
구양화와 백연은 중요한 손님이라는 점.
그리고 저녁에 쓸 재료 준비는 다른 식구들이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점에 혹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옆에서 구양화는 볼을 부풀린 채 툴툴거리고 있었다.
“칫, 방물점에 갔어야 하는데.”
“……제발 좀 봐주라. 전에도 시도해 봤는데, 거긴 도저히 못 가겠단 말이야. 안에 젊은 여인들이 바글바글이어서.”
“흐응, 시도해 보긴 했구나?”
“뭐, 그땐 단련할 필요가 좀 있었거든.”
청월루에서 있었던 여심대회전을 앞두고 여인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정작 우승은 엉뚱하게도 객주님이 가져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기억이다.
“그래서? 버섯 채취는 어떻게 하는 건데?”
“아, 그건, 저기 저 산에 가서 할 거야.”
운찬은 관문 너머에 있는 제법 울창하고 커다란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숲으로 간다고……?”
갑자기 구양화는 있지도 않은 가슴을 양손으로 가리며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설마 음흉한 마음을 품은 건 아니겠지?”
“……뭐라고?”
운찬은 귀를 의심했다.
“아버님이 그러셨어. 사내란 것들은 다 늑대고 짐승이라고. 특히 단둘이서 으슥한 곳으로 가려는 상황이 생기면 그건 분명히 그놈의 음흉한 책략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셨어.”
“……너무 심하시잖아! 너희 아버님! 그 말을 들으니 나까지 남성 불신에 걸리겠어!”
“흥! 난 아버님을 믿어.”
아무리 요새 늙은이들이 회춘한답시고 어린 소녀들을 끼고 자는 ‘동녀’가 유행이라지만, 운찬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얼마 전에 연하와의 만남에서 엄청난 쓴맛을 본 뒤로 오히려 풍만하고 성숙한 연상이 이상형이 되어 있었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이란 다 그런 걸까?’
사실 구양화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다. 열두어 살에 이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귀엽게 생겼으니, 장래가 기대되긴 한다.
“그렇게 불안하면 돌아가. 난 작업 끝내고 갈 테니까.”
운찬은 냉정하게 말하며 휙 몸을 돌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건 엄청난 실수였다.
“너무해! 이제 볼 장 다 봤다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거야? 단물은 다 빼먹었다는 거야?”
“뭐, 뭐라고?”
“흑, 난 이제 갈 곳도 없는데! 이제 노류장화(路柳墻花:길가에 피어 있는 버드나무와 꽃. 기녀를 비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걸까?”
“그,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엄청난 언어의 공격.
특히 마지막에 구양화가 운찬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은 압권이었다.
“……울어 버린다!”
“으아아! 내가 잘못했어!”
운찬은 체면 따위 집어던지고 열두 살짜리 꼬마에게 빌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관문의 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천하의 몹쓸 놈’을 보는 듯한 눈으로 운찬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여우 같은 계집애!’
언젠가는 되갚아 주리라.
운찬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어느새 새침떼기로 돌아와 있는 구양화를 데리고 관문 밖으로 나갔다.
☆ ☆ ☆
목이(木耳)버섯이라는 건 주로 죽은 나무의 둥치에서 자라나는데, 보통 가을철에 딸 수 있지만 습하고 서늘한 환경에서는 그전에라도 채취할 수 있다.
목이버섯은 중화요리엔 자주 들어가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운찬은 청월루에 있던 시절부터 미리 이렇게 장소를 봐 두고, 종종 와서 목이버섯을 채취해 가곤 했다.
그때야 요리 연습을 할 재료비가 없어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사서 써도 되지만…… 그래도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렇게 직접 목이버섯을 채취해서 쓰는 게 더 맛이 좋았다.
숲 속에 들어온 구양화는 주변을 살피며 신기해했다.
그녀가 이렇게 울창한 숲 속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정말로 길이 없는 곳도 있네? 이런 데선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 평생 숲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 질문을 하는 구양화가 그제야 제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면 큰일 나지. 그런데 다 방법이 있어. 밤이면 북극성의 위치를 보고 방향을 잡고, 낮이라면 해의 위치와 쓰러진 나무의 나이테를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어.”
“나이테? 어떻게?”
“일단 평평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를 찾아서…… 그다음 나이테가 어느 쪽으로 몰려 있는지 보는 거야.”
운찬은 시험 삼아 어떤 나무꾼이 베어 놓은 감나무의 둥치를 가리켰다.
“어, 정말이네? 나이테가 한쪽으로 몰려 있어!”
“그래. 나무는 남쪽으로 빨리 자라거든. 그러니까 나이테 간격이 넓은 쪽이 남쪽이야.”
“흐응, 그럼 나이테 간격이 좁은 쪽은 북쪽이고?”
“맞아.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 경사로에서 자라는 나무는 도움이 안 돼. 땅이 경사가 있으면 나이테가 변하거든. 그러니까 꼭 평평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방향을 잡아야 돼.”
운찬은 상세히 말해 주다가 문득 구양화의 시선을 느꼈다.
“……왜?”
“흐응, 꽤 잘 알고 있다 싶어서.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의외네?”
“적당……! 큭, 네 눈에 난 그렇게 보였던 거야?”
“당연하지.”
즉답.
운찬은 다리가 휘청거리려는 것을 겨우 버텨 냈다.
“그런데 말이야…….”
“……바로 화제를 바꾸는 거냐?”
“오늘 채취하기로 한 목이버섯이 어떤 거야?”
운찬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목이버섯 몰라?”
“뭔지는 알아. 근데 요리에 나오는 것만 봐서 진짜는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실제로도 그렇게 쭈글쭈글하고 새카매?”
구양화는 예쁜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묻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모를 수도 있겠구나.”
“흥, 나도 모르는 것 정도는 있어.”
“……그건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게 아니잖아. 아무튼, 목이버섯은 실제로는 갈색이야. 크기는 일 촌 정도 되고, 이름대로 귀처럼 생겼어. 짧은 회색 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고.”
“아, 혹시 이거야?”
구양화는 바닥에 비스듬하게 넘어져 있는, 겉이 미끈미끈한 나무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무엔 푸릇푸릇한 이끼가 껍질을 한 겹 더 덮고 있었는데, 햇빛이 닿지 않는 아래쪽에 회색 털을 가진 갈색의 버섯이 솟아나 있었다.
“맞아, 그거야. 눈 좋은데?”
“흐응, 목이버섯이 이렇게 생겼구나.”
구양화는 옆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로 목이버섯을 쿡쿡 찔러 보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나무가 미끈미끈하니까 기분이 나빠져. 이 나무 이름이 뭐야?”
“이거? 아…… 아마, 말오줌나무일걸?”
“……뭐라고?”
구양화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뭐? 아니야.”
“그럼 어떻게 이 세상에 마, 마, 말……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을 수 있어?! 나 놀리는 거 맞잖아!”
아무래도 양갓집의 규수로 자란 아가씨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운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건 말오줌나무 맞아. 목이버섯은 뽕나무나 말오줌나무의 둥치에서 자란다고.”
“지, 진짜야?”
“그래.”
구양화는 충격을 받은 듯 동그란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그럼 왜…… 이름이 그렇게 된 건데?”
“어?”
“있잖아. 그, 마, 말이 매번 와서 그, 그걸 주지도 않을 텐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냔 말이야.”
“그, 글쎄……?”
운찬도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 말오줌나무라고 하니까 말오줌나무인 것이다.
그 말의 기원까지는 운찬이 알 수가 없었다.
“뭐야, 아는 게 없잖아?”
“……어이,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명 안 될걸?”
“어쨌든 당신은 모른다는 거 아냐? 흥, 쓸모없어.”
운찬은 울컥하면서 저절로 주먹이 튀어 나가려는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나저나 목이버섯이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자란다니 충격이야. 앞으로 이 버섯은 안 먹을래.”
구양화는 이끼가 끼고 새카맣게 썩어 가는 나무둥치를 보며 몸서리 쳤다.
“어이, 이름이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말오줌나무가 더러운 건 아냐. 실제론 보통 나무랑 다를 게 없다고.”
“흥, 그래도 이것 봐. 썩어 가고 있잖아? 이런 걸 먹고 자라는 건데 좋을 리가 있겠어?”
“……그렇게 따지면 연꽂은 더러운 진흙탕에서 자란다고. 게다가 우리가 먹는 쌀도 똥이나 오줌 같은 비료를 주고 키우는 거다? 그에 비하면 목이버섯 정도는 양반이지.”
“뭐, 뭐?!”
“어? 몰랐어? 너 정말로 부잣집 딸내미로만 자랐구나? 농작물이나 과일 중에 똥을 퇴비로 안 먹고 자라는 건 없어. 원래 깨끗한 것들은 다 더러운 걸 먹고 자라는 거야.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어.”
아무래도 운찬은 아까의 복수를 의도치 않은 곳에서 한 듯했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구양화는 그야말로 당장 토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고통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아, 알고 있었어, 그딴 거.”
뒤늦게 강한 척해 봤자, 이미 늦었다.
어린애도 안 믿을 거짓말이었다.
‘흐음, 백 씨가 말한 게 이런 거였나 보네. 이제 보니 그냥 어린애였어.’
운찬은 그리 생각하자 구양화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운찬은 미리 준비해 둔 무명천 보따리를 꺼내 그 안에 목이버섯을 따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이곳에 들르지 않은 석 달간 목이버섯은 꽤나 많이 자라 있었다.
뿌리 부분을 뚝뚝 끊어 가면서 따 내자 어느새 보따리가 꽤 무거워져 있었다.
“넌 안 할 거야?”
“거, 거기에 손대기 싫어.”
“흐음, 역시 어린애구나? 버섯이 만지기 싫은 거지? 하긴, 어린애는 버섯이 만지기 싫겠지.”
“누가 어린애라는 거야!”
“아냐? 그럼 버섯을 만질 수 있어?”
“당연하지!”
구양화는 자기가 대답해 놓고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으, 으…….”
덜덜 떨면서 손을 뻗치는 구양화.
처음엔 손끝에 버섯이 닫기만 해도 몸서리치면서 떨었지만, 이내 버섯이 어떤 해를 끼치진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버섯을 아무렇지도 않게 뚝뚝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용감한 구양화.
어린아이답게 회복력이 빨랐다.
금세 말오줌나무의 둥치에서 목이버섯을 다 채취한 구양화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더 없어?”
“으음, 저쪽에 뽕나무 둥치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래? 그럼 얼른 가자!”
구양화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운찬이 가리킨 방향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토끼처럼 깡총거리는 소녀를 보며 운찬은 피식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구만.”
아무래도 데려오길 잘한 모양이다.
운찬도 혼자 쓸쓸하게 버섯을 따러 오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았다.
구양화는 뽕나무 나무둥치에 가득 피어 있는 목이버섯을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말이야, 혹시 살면서 죽을 뻔한 적 있어?”
“죽을 뻔한 적?”
“아이, 참. 목숨이 위험했던 적 말이야.”
구양화는 어딘가 의기양양해 보였다.
“있어.”
“당연히…… 어? 있다고?”
“살면서 목숨이 위험한 적 정도는 몇 번 있는 법이지. 그런데 왜?”
구양화는 어째선지 숨을 씩씩거리며 못 마땅해하고 있었다.
“왜 화내는 거야?”
“흥! 누가 화났다고 그래?”
“…….”
“아무튼! 그래도 산적을 만난 적은 없지?”
어린아이답게 콧대를 세우는 구양화.
‘아아, 그런 거였나?’
운찬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춰 주었다.
“그런 적은 없었지. 산적을 만나는 건 아무나 하는 경험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운찬은 버섯을 따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흐흥, 그럼, 그럼. 맞아. 아무나 하는 경험이 아니지.”
“그렇지. 혹시 꼬마 아가씨는 그런 적이 있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런 경험도 없을 것 같아 보여?”
구양화는 손가락으로 척하니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때는 춘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항주를 떠나 북경으로 향하는 도중에 호골산(虎骨山)을 지나야 했어.”
“호골산?!”
운찬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그래?”
“아, 아냐. 계속해.”
호골산.
그리고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산적 집단인 호골채는 상당히 유명한 곳이다.
녹림칠십이채에서도 알아주는 팔대산채 중 하나였다.
“에이, 기분 떨어지게. 아무튼 그랬는데, 갑자기 산적들이 나타난 거야. 그때 어두컴컴한 길목에는 백 오라버니랑 나밖에 없었어. 그런데 호랑이 가죽 비스무리한 걸 입은 남자들이 갑자기 수풀 속에서 다섯 명이나 튀어나오더니 앞을 척 가로막는 거야.”
“호오, 그래서?”
“백 오라버니가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했지. ‘누구십니까?’라고.”
운찬은 어느새 버섯을 따던 손길을 멈추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야기 내용이 흥미진진했다.
“그랬더니 이 건방진 산적들이 ‘우린 이 호골산의 호걸님들이시다! 당장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잖아.”
“오오, 하긴 그랬겠지.”
“절제절명의 순간이었어. 나중에 오라버니가 말해 준 건데, 그때 보이진 않았지만 우리한테 화살을 겨누고 있는 산적들도 다섯 명 정도 있었다고 하더라구.”
“허어, 위험했네. 그래서?”
“그런데!”
구양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런데, 이 흐리멍텅한 오라버니가, 명색이 대무당파의 기대주이자 우리 구양세…… 흠, 흠. 아무튼, 그런 대단한 사람이 산적한테 허리를 굽히면서, ‘미안합니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는 중이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면서 통행세를 내잖아!”
“아……!”
운찬은 솔직히 조금 실망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상대는 산적이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칼밥을 먹고살아야만 하는 막장 인생들.
설령 능력이 있다고 해도 야밤에 그들과 피를 보면서 드잡이질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통행세 얼마를 쥐어 주고 해결된다면 그게 훨씬 싸게 먹힌 거다.
“게다가 산적들의 대답이 더 웃겨. 우릴 보면서, ‘으음, 우리가 손님을 잘못 골랐군. 동생과 먼 길을 떠나려면 여비도 필요할 테지. 그냥 보내 주고 싶지만 그건 산채의 법도에 어긋나니 본래 통행세의 반만 받겠다’라고 하면서 받은 돈의 절반을 돌려주는 거야.”
“세상에, 착한 산적이잖아! 대단한데!”
그렇게 양심적인 산적이라니.
과연 호골채다.
단순히 범죄자들만 모여 있는 화적떼랑은 질이 다른 느낌이다.
“착하긴 뭐가 착해! 우릴 동정한 거잖아! 산적 따위가!”
“야, 그래도 보통 산적들은 속곳만 남기고 다 내려놓은 다음에 꺼지라고 한다고. 그 정도면 완전히 성인군자야.”
“흥, 성인군자는 무슨. 아무튼, 이 구양화님이 가진 돈을 순순히 내줄 것 같아?”
구양화는 다시 한 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너, 설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운찬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산적에게 다가갔어. 그리고 불쌍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산적의 가랑이를 힘껏 걷어차 줬어.”
“억……!!”
“그리고 백 오라버니가 건네준 돈주머니를 다시 빼앗고, 그 산적이 들고 있던 칼에 내 목을 들이대고 외쳤어. ‘오라버니! 이 산적이 나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뭣이……!”
점입가경.
운찬은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한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귀다. 넌 분명 마귀의 자식이야.”
다행히 구양화는 그가 중얼거린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아무튼. 어때? 정말로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지?”
‘네가 자초한 거잖아!’라는 절규는 마음속으로만 담아 두었다.
운찬은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구양화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둘 사이에 싸움이 안 일어나는 거야. 다들 그냥 말없이 멍하니 보고 있달까? 이상하지?”
“……그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한다.”
아니, 이해한다기보단 그들을 진심으로 동정한다.
“뭐라고?”
“아니,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구양화는 싱긋 웃었다.
휘잉― 하고 불어온 바람에 양갈래로 땋아둔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산적들한테 외쳤어. ‘무당파의 일해검을 불쌍하다고 봐주고 그냥 보낼 거야? 우린 돈도 많은데?’라고.”
“……우와아, 심해!”
운찬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때 백연의 심정이 어땠을까?
진심으로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심한 거야?”
“당연하지!”
“흥, 바보같이 힘도 있으면서 우리 돈을 뺏기는 백 오라버니가 무른 거라고!”
구양화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래서, 결과는?”
“사문의 이름이 걸리면 백 오라버니는 절대로 지지 않아. 호골채가 전부 달려들었는데도 오라버니는 다 쓰러뜨렸어.”
“저, 전부 다?”
“당연하지! 백 오라버니는 상처 하나 안 입었다고!”
구양화가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할수록 운찬은 점점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호골채는 운찬도 그 이름을 들어 봤을 만큼 유명한 산채다.
그런 곳을 단신으로 패퇴시켰다니.
‘그 어리바리한 얼굴 뒤로 그런 엄청난 실력이 숨겨져 있었던 거야?’
평소의 헤헤 웃는 얼빠진 얼굴을 생각하면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도 운찬은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구양화와 함께 목이버섯을 채취했다.
나무 두 개분의 목이버섯을 캐내자 제법 많은 양이 모였다.
“여기에 딱 한 그루만 더 있으면 양이 딱 맞을 텐데.”
“한 그루? 이것 같은 나무 말이야?”
“맞아. 딱 한 그루만 더 눕혀 놓으면 다음 번엔 작업하기에 딱 좋은 양을 캘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조금 적거든.”
목이버섯은 말려서 쓰는 재료이기 때문에 어차피 작업하는 김에 한 번에 많이 말려 두는 것이 좋다.
“그럼 베면 되잖아?”
“……말은 쉽지.”
“왜 안 하는데?”
“나무를 한 그루 벤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냐? 특히 버섯을 기를 만큼 몸통이 굵은 나무를 베어 내려면 하루종일 도끼질만 해도 모자랄걸? 매번 한다,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여유가 안 생겨서 못하고 있어.”
이래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일은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따리를 꼼꼼하게 싸매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흐응?’ 하고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한데……?’
본능적인 경고는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내가 해 줄게!”
“뭐, 뭐를?”
“나무를 베어 준다고! 그럼 당신도 나를 여기에 데려오길 잘했다고 삼생에 걸쳐 감사할 거 아냐?”
“삼생에 걸쳐 감사할 것까지야…….”
“아무튼! 내가 나무를 쓰러뜨려 주면 좋은 거지?”
운찬은 마음 같아선 큰 소리로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할 만큼 구양화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숨겨진 능력이 있는 걸까?’
호골채 산적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백연이 상전처럼 모시는 꼬마 아이다.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맞아. 그러면 너무 고마운 일이지.”
“좋아! 그럼 내가 특별히 도와줄게.”
구양화는 보무도 당당하게 척척 걸음을 옮기더니 주변의 나무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 나무야?”
“……아니, 그 옆에.”
“이거?”
“어. 그게 뽕나무야.”
구양화는 ‘겨우 이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
그렇다.
단검이다.
도끼도 톱도 아닌, 손바닥만 한 단검이다.
까득! 까득!
구양화는 그 단검을 나무 밑둥 근처에 대고 푹 찍더니 온 힘을 다해 낑낑대면서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운찬은 구양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아름이 넘는 커다란 나무를 손바닥만 한 단검으로, 그것도 열두 살짜리 여아가 벤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무리 몸을 매달려서 흔들어 봐도 고작 껍데기만 살짝 긁어내는 게 다였다. 심지어 안쪽까진 닿지도 않았다.
“뭐 하는 거야……?”
구양화는 한참을 낑낑대서 겨우 껍질을 좀 벗겨 낸 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채석장에 가 본 적 있어?”
“채석장? 대리석이나 회석 같은 돌 캐는 곳?”
“맞아. 거기.”
“아니, 가 본 적 없어.”
“그럼 거기서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쪼개는지 모르지? 거기선 끌로 바위에 자그마한 틈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쐐기를 박아 넣어. 그리고 계속해서 그 위에 물을 붓는 거야.”
운찬은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집채만 한 바위에 자그마한 틈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쐐기를 박아 넣는 상상.
“바위는 꿈쩍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럴 것 같지? 그런데 아냐. 나무에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커지거든? 그랬다가 물이 마르면 다시 수축하고, 물을 부으면 팽창하고. 그걸 몇 번 반복하면 바위는 쐐기를 박아 놓은 모양대로 쩍! 하고 깔끔하게 갈라져 버려.”
“저, 정말?”
“정말로. 그래서 떨어져 나온 석재를 다른 곳에 파는 거야. 그게 채석장에서 하는 일이라구.”
운찬은 잠시 그녀의 지식에 감탄했으나, 이내 그것과 이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너도 거기에 단검으로 틈을 만들고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을 주려고?”
“설마? 바보나 그런 생각을 하지. 나무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어쩌자는 거야?”
졸지에 바보가 된 운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더 좋은 게 있어.”
“어? 그게 뭔데?”
“요(要)는 틈을 만들고 거기서 발생하는 인위적인 힘을 만들면 나무가 쉽게 쪼개진다는 원리야. 그걸 이용하는 거라고.”
구양화는 나름 쉽게 풀어서 설명한 듯했지만, 운찬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슥― 삭― 슥― 삭―
구양화는 그 뒤로도 마치 사과 껍질을 깎아 내듯이 나무의 일부를 계속해서 깎아 냈다.
그리고 나무에 검지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만들어지자, 품속을 뒤적이더니 푹신해 보이는 재질의 하얀색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건 뭐야?”
“이거? 흐흥, 아직은 비밀.”
구양화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고 푸른색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영롱했고, 또한 탁했다.
두 가지 색깔이 섞여 있었는데, 하나는 하늘을 닮은 푸른색이고, 다른 하나는 새카만 진흙에 푸른색 염료를 조금 섞은 듯한 그런 색깔이었다.
구양화는 그 돌멩이 하나를 벌려진 나무 틈에 쑤셔 넣었다.
어딘가 조심조심하는 손놀림으로.
푸른색 돌멩이가 간신히 끝자락만 나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집어넣고는 뒤로 물러섰다.
“서역에는 연금술(鍊金術)이라는 게 있어. 어떤 물건이든 금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술법인데…… 그걸 응용하면 신기한 걸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
“어? 뭐라고?”
운찬은 빠르게 말하는 구양화의 이야기를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그걸 사천당가가 배워 와서 나라 몰래 더욱 연구해서 굉장한 걸 만들어 냈어. 물론 값이 너무 비싸고 위험해서 함부로 만들진 않았지만…… 난 이번에 여행을 나올 때 다른 건 다 두고 왔지만 이것만큼은 챙겨 왔어.”
“어, 어…….”
“중요한 건, 귀를 막아야 한다는 거야.”
운찬이 멍하니 쳐다보자 구양화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귀 막아! 손가락으로!”
“아, 알았어. 소리치지 마.”
“그리고 뒤로 열 걸음 물러나!”
“알았다니까.”
운찬은 일단 뭐가 뭔지 몰라도 시키는 대로 귀를 막고 열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구양화는 예의 그 하얀 주머니에서 파란 돌을 하나 더 꺼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무의 표시점을 지그시 노려보는 구양화는 나이에 맞지 않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
발끝을 비틀며 비스듬하게 선, 문외한인 운찬이 보기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자세.
‘뭘 하려는 거지?’
운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무는 장정 두 사람이 양팔을 뻗어 맞잡아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컸다.
그런 곳에 손바닥 한 뼘도 안 되는 상처를 만들고, 거기에 푸른 돌을 끼워 두었다.
그리고 지금 거기에 다른 푸른 돌을 하나 던지려는 것 같다.
“꼬마 아가씨, 지금…….”
“하아아앗―!”
운찬의 말문을 막으며 구양화가 기합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듯한 자세와 함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둔 파란색 돌멩이를 앞으로 내던졌다.
피유웅―!
일직선으로 날아간 돌멩이가, 정확하게 구양화가 미리 나무에 박아 두었던 또 다른 돌멩이와 부딪쳤다.
운찬은 그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저걸 던져서 맞추다니, 대단한데?’라고 생각한 순간,
콰아아앙―!
“……!!”
운찬의 혼을 빼 놓을 만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며 거대한 나무가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