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一章 ― 북풍상륙(北風上陸)
항주 금선로의 외곽.
한때 항주 최고의 청과상으로 유명했던 진씨가문의 과수원은 불과 일 년여 만에 이제 잡초가 무성한 수림으로 변해 있었다.
공기는 음습했고, 때때로 정체 모를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주변의 농민들은 이제 그곳을 귀견장(鬼犬場)이라고 불렀다.
귀신 귀 자에 개 견. 즉, 귀신들린 개들이 출몰하는 장원이라는 뜻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끔 주인 없는 과일에 욕심이 나서 몰래 들어가 보면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눈이 시뻘건 개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컹컹거리는 울음소리와 살벌한 으르렁거림.
시뻘건 눈빛과 침을 질질 흘릴 때 살짝살짝 엿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장난스레 과일 서리를 갔던 십대의 아이들 몇 명이 그 개에 물려 죽었고, 그 보복을 하러 들어갔던 건장한 사내 몇 명이 팔다리를 못 쓰는 병신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한 사람의 일손이 아쉬운 농가에서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겠는가.
농민들은 이 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했으나 귀견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내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이젠 귀견장의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아했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반응이 똑같았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쥔 채 공포에 휩싸여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그러다 용기를 낸 한 명이 귀견장에 있는 귀견들은 그 수가 수십에서 수백이나 된다고 증언했다.
농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백.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물어뜯거나 잡아먹으려고 할 수 있는 맹수가 무려 수백이나 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겁에 질려 관청에 신고했다.
과수원을 살펴보고 위험한 동물이 살고 있다면 퇴치해 달라는 민원을 넣었지만, 관청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부(不)였다.
그들의 말로는, 과거 진씨가문의 과수원은 정당한 방법으로 명의가 이전되었고, 지금 과수원 주인과 이야기해 본 결과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부로 사유지에 들어가서 과일을 훔치려고 했으니, 절도죄를 물을 수 있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손수 귀견장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금지(禁地).
그들 사이에 약속을 만들고, 이후로는 절대로 그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다.
농민들이 만든 울타리 너머.
주변에서 귀견장이라 불리는 과수원의 중심부엔 명제국의 땅에는 어울리지 않는 흰색 빛의 커다란 천막이 몇 십 개나 늘어서 있었다.
중심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주변에 그보다 작은 기둥들로 뼈대를 만든 흰색의 천막.
본래대로라면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에 세워져야 마땅할 파오들이 과수원의 중심에 모여 있는 광경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파오들은 하나같이 흰 천에 똑같은 글귀가 새겨진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北風
만약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 지금의 광경을 봤다면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북풍.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원제국의 칸이었던 쿠빌라이 가문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북풍처럼 거세게.
북풍처럼 빠르게.
그리고, 북풍처럼 사납게.
그 말을 가장 앞장서 실천한 것이 후대 쿠빌라이의 정예병이었던 십만 기병.
그리고 그 십만 기병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전사들만이 모여 있는 텐챠이 수호대였다.
하나, 하나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
텐챠이 수호대는 푸른 늑대의 후손들답게 무적무패의 전설을 만들어 냈으나, 결국 유일한 호적수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설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전설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항주에 숨어들어 마지막 칼날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납게 훈련된 귀견들을 풀어서 주변을 단절시키고, 광활한 과수원의 땅을 이용해 군마들을 훈련시켰다.
대낮엔 병사들의 기합 소리로 온 천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이곳은 이미 일종의 기병양성소였다.
항주에서 멀지 않은 곳.
단번에 항주를 장악하고 대로(大路)를 이용해 북경까지도 한달음에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치명적인 위협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귀견장 최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파오 안.
누구나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법한 거구의 사내가 기름 먹인 천으로 정성 들여 닦고 있던 대도(大刀)를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하고 남자다웠는데, 특히 각진 턱 선과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비스듬한 흉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눈알은 다행히 다치지 않았지만 얼굴의 절반 가까이를 가로지르는 심각한 상처였다.
그는 그 상처를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숙적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 상처에 대한 대가로 숙적의 옆구리를 길게 그어 주었기에 더더욱 그 흉터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이었다.
스윽―
사내가 일어서자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무게감이 생겨났다.
머리는 뒷머리만 길게 길러서 땋은 변발, 몸에는 헐렁한 무명옷을 걸쳤다.
단단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듯한 강건한 육체에 초원을 내달리는 늑대처럼 사납고 날렵한 눈빛이 공존하는 사내.
그의 이름은 텐챠이.
몽고 초원에서 진정한 푸른 늑대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창천랑(蒼天狼)이라 불리는, 패망한 쿠빌라이 가문의 마지막 유지(有志)였다.
“그것이…….”
텐챠이의 앞에 부복한 자는 독두파의 수뇌라 불리는 독두삼살 중 흉월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의 사마귀를 매만지며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풍객잔의 주인 방태풍이 오대객잔 증명패를 대가로 홍화객잔과 거래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폭발이 일어나면서 교섭이 결렬되었고, 그 틈에 미행하던 녀석들이 강제로 돌입해서 방태풍을 구출했습니다.”
“폭발이라니, 어떤 폭발을 말하는 거지?”
텐챠이는 폭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게……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포격(砲擊) 종류는 아니었고, 화약(火藥)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위력이 상당합니다. 단 한 번의 폭발로 별실의 복도와 기둥 세 개가 날아가 결국 건물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흐음, 명나라는 화기를 엄중하게 관리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무림문파 같은 곳에선 암시장을 통해 구입하거나 특유의 비법으로 제조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쪽의 물건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흉월은 방태풍을 대할 때와는 달리 똑 부러지는 일처리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쪽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주군.
그의 능력은 오로지 텐챠이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군. 우리에겐 오대객잔 증명패가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청풍객잔에 잠입했던 것인데, 함부로 다른 곳에 넘겨 버리면 곤란하지.”
“예. 다만, 이번에 사상자가 나와서 홍화객잔과의 일은 쉽게 처리되지 않을 듯합니다. 어쩌면 대대적인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상관없다.”
“예?”
“증명패만 우리 손에 있으면 돼. 나머지는 방태풍이 책임지도록 만들면 된다.”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낮고 굵은 목소리.
흉월은 감격하여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드디어……!”
“그래, 슬슬 때가 된 모양이군.”
텐챠이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집념. 원념.
그리고 차가운 살기.
텐챠이는 허리에 찬 대도를 뽑아 천막 밖의 태양을 겨누며 말했다.
“이제부터 계획을 시행한다.”
“주군……!”
“그 녀석들을 불러라.”
“그 녀석들이라면……?”
“삼대천(三大天).”
“……!!”
흉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원제국의 삼대천.
그것은 정예 중의 정예인 텐챠이 수호대에서도 가장 특별한 세 마리의 짐승을 뜻했다.
그들은 어떠한 상식도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며, 오로지 텐챠이의 명령만을 따른다.
“하지만…… 최근에 근처를 감시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삼대천을 부른다면 분명히 눈에 띄게 될 텐데요.”
“눈이라면 동창이나 청월루를 말하는 건가?”
“그들도 있지만…… 최근에 몰래 저희의 뒤를 캐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북쪽의 전장에서부터 흔적을 쫓아오고 있다는데요.”
“북쪽의 전장에서부터? 설마, 그때 투마르가 말했던 그놈들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텐챠이는 반년 전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항주 관문 근처에서 산적으로 위장해 병력을 모으던 부장 투마르가 의문의 습격을 당했다고 보고한 적이 있었다.
아직 자리를 잡은 초반이기 때문에 습격을 당할 만한 시점이 아니었고, 또한 습격자들이 텐챠이 수호대의 성격에 대해 꽤 상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고 보고해서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텐챠이는 그 일 때문에 당시에 준비 중이던 모든 거점들을 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런가…… 재미있군.”
텐챠이는 결단을 내렸다.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한다. 만약 추적의 기미가 보인다면 오히려 반대로 역추적하여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도록.”
“예, 주군!”
“중화 전체에 북풍의 상흔을 남겨 줄 것이다. 아주 깊고 치명적인 흔적을.”
파오를 밝히는 어두운 등불 아래, 텐챠이의 두 눈은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항주 서로(西路).
사천(四川)과 호남(湖南) 지역에서 올라오는 물건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중화 상계의 중요한 통로였다.
매일같이 수백 대의 마차들이 움직이고, 수만 근의 물건들이 서로를 통해 항주로 배달된다.
하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에는 그런 항주 서로도 한적한 적막에 휩싸인다.
밤에는 산적들이 출몰하기 쉬울뿐더러, 길눈이 어두워져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논두렁 같은 곳에 빠져서 나올 수 없게 되는 그런 경우도 종종 생기는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경우인지 한 대의 마차가 어두운 항주 서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는 그 안에 탄 귀인(貴人)의 신분을 증명하듯 값비싼 금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열심히 채찍질을 하는 마부의 등 뒤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연신 잔소리를 해댔다.
“더 빨리 가지 못하겠느냐! 이러다간 아침에 자금성에 입궐을 할 수가 없겠다!”
“하, 하지만 나으리, 이보다 빨리 달리다간 마차가 크게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요.”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입궐을 못하면 난 죽은 목숨이야!”
마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하며 한층 채찍질에 힘을 더했다.
고관대작의 마부 노릇은 정말로 할 짓이 못 된다.
빠르면 빠르다고 뭐라 그러고, 느리면 느리다고 뭐라 그러는 까탈스러운 것들이 귀족인 것이다.
‘댁이야 사고가 나서 죽든 입궐을 못해서 죽든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뭐유? 나는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란 말이유.’
마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아직 어스름한 새벽녘의 길을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양쪽엔 가파른 협곡.
마차 네다섯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대로는 일직선으로 호쾌하게 뚫려 있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있어선 안 될 것이 눈에 보였다.
마부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저게 뭐지? 사람인가?’
모양은 분명 사람인데 너무나 크다.
한 사람이 섰을 뿐인데 그 넓은 대로의 중간이 턱! 하고 막힌 것만 같았다.
키는 칠 척 이상. 떡 벌어진 어깨의 넓이도 사오 척은 되는 것 같았다.
마부는 칠 척 거한이란 말을 옛날이야기 속에서는 몇 번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큰 사람도 있구나…….”
감탄은 잠시.
이내 마부는 자신이 큰 곤란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비키잖아? 손짓을 하는데…… 서라는 건가?’
하지만 서란다고 해서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에 탄 고관대작은 지금 한시라도 빨리 자금성에 도착해야 마음이 놓이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범상치 않은 덩치를 가진 사내가 만약 산적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 나으리!”
“왜 그러느냐!”
“누군가 길을 막고 서 있는데요? 멈추라는데…… 어떻게 해야…….”
“멈추긴 왜 멈춰! 그냥 달려! 내가 한시라도 빨리 자금성에 가야 하는 걸 몰라서 물어?!”
신경질적인 고함성이 귓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마부는 마음을 정했다.
칠 척 거한이 아무리 몸이 크다고는 해도 대로를 전부 막을 수는 없다.
옆으로 비켜서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면 뭘 어쩌겠냐 싶었던 것이다.
“비켜! 비켜!”
마부는 거한에게 소리치며 말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세 마리의 말이 이끄는 삼두마차.
거기다가 값비싼 목재로 만든 육중한 마차다.
최고로 속력을 올리자 대로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흘러나왔다.
마부는 가만히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거한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생각했다.
이제 됐다…… 라고.
그런데 그 순간,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손바닥이 하나 보이고, 안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이 밀어닥쳤다.
콰직!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마부의 의식은 거기서 끝이 났다.
콰아앙―!
칠 척 거한은 손바닥으로 마부의 머리를 날려 버린 뒤 몸을 반 바퀴 빙글 돌리면서 마부가 꽉 붙들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마차의 앞부분을 주먹으로 꽝! 하고 내려쳤다.
나무 조각들이 터져 나가며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개세(開歲)의 위력을 가진 힘.
뇌홍, 화약에 필적하는 파괴력이 선보여졌다.
이 모든 것은 불과 촌각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력을 다해 달리던 세 마리의 말은 갑작스런 충격에 목이 휙 꺾이면서 거북이가 뒤집어지듯 배를 하늘로 보이며 쓰러져 버렸다.
히히히힝……!
우드득―!
세 마리의 말은 그대로 피거품을 입에 문 채 바닥에 쓰러져서 경련했다.
그 모습으로 보아 생존은 불가능한 듯 보였다.
과격한 급정거.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을 할 수도, 감히 실행을 할 수도 없는 괴물 같은 행동이다.
주먹을 한 번 내려친 것만으로도 말들은 처참하게 죽어 버렸고, 마차는 앞부분이 땅에 박혀 버린 채 공중에 뜬 바퀴만이 공허하게 끼긱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거한은 괴물 같은 힘을 선보였음에도, 그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반파된 마차의 문이 열리며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비틀비틀 기어 나왔다.
사내는 혼이 빠져 버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끄응……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사내는 앞부분이 땅에 박혀 버린 마차를 멍하니 응시하고, 이내 피거품을 뿜으며 꿈틀거리는 말들과 머리가 사라져 버린 마부의 시신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히, 히이익―!”
중년 사내는 무작정 뒷걸음질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칠 척 거한의 몸에 쿵, 하고 부딪쳤는데, 중년 사내의 키는 거한의 가슴까지도 오지 못했다.
“너, 너는 또 뭐, 뭐냐?”
“우르칸이다.”
무뚝뚝하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우르칸.
그것이 북쪽 원나라 방식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은 중년 관리가 황급히 이곳을 도망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르칸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중년 관리가 미처 다섯 걸음도 떼기 전에,
쒜에에엑―!
푹!
“히에엑?!”
푹! 푹! 푹! 푹! 푹!
“흐, 흐아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여섯 대가 정확하게 중년 관리의 주변을 빙 둘러서 포위하듯이 땅에 박혔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나아갔더라면 그대로 몸에 화살이 박혔을 것이다.
놀라운 속사력.
괄목할 만한 정확도.
중년 관리는 덜덜 떨면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박, 사박.
그때, 나뭇잎을 즈려밟는 듯한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얼핏 여인처럼 보일 만큼 매끈한 얼굴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이마에는 푸른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호리호리한 체구에 하늘하늘하면서도 소매가 없어 양쪽 팔이 다 드러난 이국적인 복색을 걸치고 있었다.
대신 팔꿈치와 손목엔 짐승 가죽으로 만든 듯한 보호대를 몇 겹이나 차고 있었고, 보호대의 틈새에 짐승의 깃털과 뾰족한 단검들이 빽빽이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들고 있는 무기였다.
중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형식의 각궁(角弓)을 들고 있었는데, 심줄도 굵고 질겨 보이는 형태라 당기기가 쉽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등 뒤엔 그의 호리호리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쇠도끼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자이혼.”
우르칸이 굵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잡을 수 있었다.”
“잡는다? 어떻게 말이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마차 바퀴를 집어 던져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중년 관리가 깜짝 놀라서 우르칸을 쳐다봤다.
우르칸의 손에는 정말로 마차 바퀴가 들려 있었다.
웬만한 사람의 몸무게만큼 나가는 육중한 바퀴가 무려 한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저것에 얻어맞으면 잡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몸이 박살 난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 중년 관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었다.
“명심해라, 우르칸. 우리의 목적은 이자를 죽이는 게 아니야.”
“……알고 있다.”
우르칸이 못 마땅한 얼굴로 인정하자, 자이혼이 중년 사내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분패.”
“어, 어……?”
“신분패. 그리고 옷도 벗어라.”
자이혼은 우르칸과 달리 난폭하지 않고 차분하며 이성적으로 보였다.
중년 사내는 이게 그가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그의 신분패와 관복을 벗어 자이혼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가진 걸 모두 드리겠습니다.”
북경의 관리다운 재빠른 판단이었다.
자이혼은 신분패와 관복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확실하군.”
그리고 자이혼은 등 뒤의 외날대부(大斧)를 뽑아 번개같이 중년 사내의 목을 내려쳤다.
푸화악―!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으나 자이혼은 교묘하게 움직여 피가 한 방울도 몸에 묻지 않도록 했다.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지.”
자이혼이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텐챠이 수호대.
천지인(天地人) 삼대(三隊) 중 천랑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세 명의 괴물.
삼대천(三大天)은 사람의 인정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임무와 자기자신의 욕구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신력(身力).
아름드리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수 있는 몽고 초원 최고의 장사, 우르칸.
백 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안력(眼力).
한때 중화십궁(中華十弓)의 막내라 불렸던 냉철한 궁사, 자이혼.
그중 자이혼은 도끼에 묻은 피를 새하얀 천으로 닦아 낸 뒤 냉정한 목소리로 우르칸을 힐난했다.
“마차도 필요했는데 이 모양이 되었으니 쓸 수가 없게 되었어.”
“너무 빨리 달려서 세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통나무로 길목을 막아 두라고 했을 텐데? 네 고집 때문에 불쌍한 말들이 죽어 버렸다.”
우르칸은 자이혼의 지적에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말들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다.”
“난 가끔 네가 정말로 초원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이 생긴다.”
“……시비 거는 건가?”
“그렇지 않은가. 초원의 아들들은 말을 한 가족처럼 아낀다. 너 같은 별종은 없어.”
“…….”
“자기가 말을 탈 수 없을 만큼 무겁다고 해서 말들을 막 대하지 말아라. 말은 우리가 아껴야 하는 바람의 아들이다.”
우르칸은 잔뜩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말없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마치 개와 원숭이처럼 항상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은 예사.
그럴 때마다 가장 좋은 해결법은 서로를 무시하며 임무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특히 우르칸은 자신이 한 발 물러서는 것이 마음이 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이혼 역시 그런 우르칸을 어른답게 포용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기묘하게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마차는 어떻게 하지?”
“하나 더 잡아야 하겠지. 이번에는 통나무를 깔아 둬라.”
“……알았다.”
우르칸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협곡 쪽으로 올라가 아름드리나무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드드드득―!
“흐으읍……!”
불끈거리는 근육.
목과 어깨에서 힘줄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팔뚝이 허벅지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
초패왕 항우가 이만한 힘을 지녔을까.
가히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괴력을 뽐내며 우르칸은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렸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통나무를 관도의 중간에 집어 던졌다.
쿠구궁―!
땅이 울리며 순식간에 방책이 하나 만들어졌다.
우르칸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흐음!”
그사이, 자이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르칸이 뽑은 것과 거의 비슷한 굵기의 나무를 고른 뒤, 등 뒤의 외날도끼를 뽑아 들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회전력(回轉力).
진각(震脚).
발경(發經).
삼위일체를 이룬 동작으로 스무 근짜리 도끼를 아름드리나무의 거의 절반 가까이까지 단번에 박아 넣었다.
퍼억!
파편을 뿜어낸 나무가 충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자이혼은 몸매가 호리호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광석으로 비유하자면 금강석 같은 근육을 지녔다.
극도로 압축된 순도 높은 근육.
힘으로 따지자면 우르칸을 이길 수 없을 테지만, 순간적인 파괴력으론 그에 뒤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자이혼의 특징은 십 장 밖의 개미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뛰어난 안력(眼力)이다.
자이혼은 도끼를 다시 등 뒤에 돌려 메고, 이번엔 각궁을 들고 아름드리나무의 맥점(脈點)에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융! 피융! 피융!
정확하게 세 발.
처음에 도끼질을 해 놓은 상처에 한 발, 그리고 반대쪽 부분에 두 발의 화살이 명중하자, 신기하게도 커다란 나무가 휘청거리면서 한쪽으로 급격하게 무게가 쏠리기 시작했다.
절정에 오른 안공(眼功).
그리고 섬세하고 정확한 궁술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신기(神技)였다.
우지지지직!
결국 나무가 쓰러졌다.
쓰러진 나무는 협곡의 경사를 굴러, 우르칸이 그랬듯이 자연히 중간의 관도를 가로막았다.
“…….”
“…….”
우르칸과 자이혼은 서로를 견제하며 관도의 중심에 내려섰다.
이제 통나무 두 개가 관도를 가로막았다.
다음에 오는 마차는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음?”
자이혼과 우르칸은 서로를 한 번 응시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며 다시 관도를 쳐다봤다.
그들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마차가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고 있었다.
마차가.
그것도 당당하게 그들이 있는 곳으로.
히히힝―!
마차는 통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이혼과 우르칸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말 두 마리가 이끄는, 꽤나 고급스런 쌍두마차.
마부석엔 커다란 대나무 삿갓을 푹 눌러쓴 마부가 한 명 앉아 있었는데, 그 마부 외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르칸과 자이혼은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마차를 부쉈군요.”
부드러우면서 차분한 목소리.
뛰어난 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격(巫覡)출신답게 정갈한 몸가짐을 유지하는 사내는 그들이 알기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시르.”
“내 탓이 아니야 우르칸이 부쉈다.”
우르칸과 자이혼의 눈빛이 공중에서 사납게 부딪쳤다.
둘이 으르렁거리면서 다시 언쟁을 벌이려는 찰나,
짝!
경쾌한 박수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하시르는 대나무 삿갓을 벗어 던지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관문이 열리자마자 항주에 들어서야 하지 않습니까?”
자이혼과 우르칸은 서로를 노려봤다.
“우르칸이 마차만 부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만약 너였다면 달리는 마차를 세울 수나 있었을 것 같은가?”
“물론이다. 마부만 활로 쏴서 죽이면 되는 일이다.”
“그럼 나서서 할 것이지, 왜 다 끝난 뒤에 뒷말을 하는가. 계집애처럼.”
스릉―!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칼소리.
막 실제로 부딪치려고 했던 자이혼과 우르칸은 행동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두 분, 적당히 하지 않으시면 정말로 화를 낼 것입니다. 이곳에서 축제를 벌여야 마음을 진정시키겠습니까?”
원제국에서 축제란, 곧 싸움.
하시르는 양쪽 허리에 찬 쌍도를 동시에 반쯤 뽑아들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칼을 뽑아 든 하시르의 주변은 안개가 낀 것처럼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시르는 그것을 영력(靈力)의 공간이라 불렀다.
하시르가 타고난 재능이 닿는 곳.
무슨 일이 있어도 패배할 수 없는 하시르의 무적의 범위였다.
“크흠!”
“음…….”
우르칸과 자이혼은 이내 전의를 잃고 몸을 팩 돌렸다.
삼대천은 위아래 없이 모두 동등하게 강하다.
싸우면 서로의 승부를 점칠 수 없다.
하지만 우르칸과 자이혼, 두 사람 모두 하시르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불이 물을 이길 수 없고 물이 나무를 이길 수 없듯이, 그런 종류의 상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두렵지 않지만 하시르만큼은 일대일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시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제야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위대한 영혼이 선물한 뛰어난 영력(靈力).
무력과 지력, 거기에 신력(神力)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전인(全人)이자 모사(謀士), 하시르.
텐챠이 수호대에서 지장(智將)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삼대천이다.
우르칸은 길목을 막아 두었던 통나무와 부서진 마차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자이혼은 참혹한 시체들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신분패를 얻으셨습니까?”
“아, 여기에 있다.”
하시르는 자이혼이 넘겨준 신분패를 잘 살펴본 뒤 품 안에 집어넣었다.
자이혼은 머리띠를 풀고 중년 관리가 입고 있었던 관복을 입었고, 우르칸은 호위무사의 옷이라며 하시르가 준 무복을 입고 마차에 탔다.
마부의 역할은 하시르가 했다.
그는 다시 삿갓을 눌러쓴 뒤 채찍질을 하여 금세 항주의 관문에 도착했는데, 관병들을 상대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큼 침착하고 능청스러웠다.
“정오품 통정사 참의(參議)님의 행차이십니다. 한시라도 빨리 자금성에 입궐하셔야 하는데, 빨리 처리해줄 수 없겠습니까?”
“으음, 하지만 보시다시피 줄이 길어서 조금 기다리셔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봐주십시오. 저 때문에 여정이 늦어졌다고 하면 저는 목이 달아납니다. 저기, 이걸로 힘들게 일하시는 데 목이라도 좀 축이시고…….”
“커험, 이거, 이러면 곤란한데…….”
“하하, 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인데요. 이번에 도와주시면 제가 참의님께 항주 서관의 관병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꼭 고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커험, 공무를 하시는 분인데 어서 가셔야지. 통과하시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능청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하시르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고관대작의 마차다운 품위를 지키며 관문을 통과했다.
해가 화창하게 떠오르는 어느 아침.
텐챠이 수호대 삼대천을 태운 마차는 그렇게 해서 항주에 도착했다.
☆ ☆ ☆
쿵. 쿵. 쿵. 쿵!
쿵쾅거리는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문짝이 거칠게 열렸다.
나타난 사내는 키가 육 척이 넘고 상당히 마른 체형을 가진 문사였는데, 그는 얼마나 다급했는지 머리 위의 문사건을 삐뚤게 돌려 쓴 채 거칠게 숨을 씨근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야, 우생.”
평소처럼 탁자 위에 첩첩이 쌓인 서찰들을 읽고 있던 부운화는 서찰을 내려놓고 미간을 좁히며 섭우생을 쳐다봤다.
“크, 크, 큰일입니다, 둘째 형님.”
“무슨 일이기에?”
“드디어 ‘들개’들이 움직였습니다.”
우당탕!
부운화는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최근 들어 두 번째.
장기린이 있는 풍운객잔이 초청승부를 벌였다는 이야기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들개들이……!! 드디어?!”
“예! 그렇습니다!”
부운화는 들뜨면서도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눈빛을 뜨겁게 불태우고 있었다.
옆의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진구도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진구의 목소리엔 아직도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진구, 일어나라. 그놈들이 움직였어.”
“그놈들이라면……?”
“원나라의 잔당, 쿠빌라이의 충견들 말이다.”
벌떡!
고양이처럼 몸을 튕겨서 일어난 진구의 눈빛이 바뀌었다.
쿠빌라이의 충견.
즉, 원나라 최후의 정예들이었던 텐챠이 수호대 놈들을 말함이다.
북부 초원 기마군단의 정예 중의 정예.
포로로 잡히면 독단을 깨물거나 자결해 버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미친 듯이 싸우려고 달려드는 광견(狂犬)들.
천랑(天狼), 지랑(地狼), 인랑(人狼)순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있으며, 그중에 천랑 급 이상의 전사들은 보통의 명제국 병사들로 따지면 천인장 급의 실력자들로만 구성된 무서운 부대였다.
특히 천랑대를 이끄는 삼대천(三大天)이란 괴물들은 전장에서 너무나도 유명했는데, 가끔씩 선보이는 그들의 업적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만큼 신화(神話)적인 일들뿐이었다.
명실상부한 적룡기마대의 숙적.
삼대천이 나타나면 적룡기마대에서도 진구 이상의 실력을 가진 ‘간부’들만이 나서야 간신히 상대가 되었다.
“그럼, 삼대천도 나타난 겁니까?”
진구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물었다.
진구는 적룡기마대의 막내.
아직 어린 만큼 다른 간부들에 비해 전장의 경험이 적어서 아직 텐챠이 수호대의 삼대천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과의 만남을 갈망했다.
호승심이 강한 진구는 신화적인 존재를 만나고, 자신이 그 존재를 뛰어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삼대천을 쫓던 동창의 말로는 남만쪽에서 출몰하다가 갑자기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 시기에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진 것을 보면…… 분명히 관계가 있어.”
섭우생은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관계가 있다면……?”
“분명 이곳 항주에도 나타날 거라는 뜻이야.”
“드디어……!!”
기뻐하는 진구.
하지만 옆에서 섭우생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어져 있던 부운화가 그런 진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좋아할 일이 아니다, 진구야.”
“예? 어째서요? 강한 자와의 싸움은 즐거운 거 아닌가요?”
천성적으로 무인의 자질을 타고난 진구다운 생각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부운화도 그런 진구의 용감한 성정을 칭찬해 주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너무도 거대했다.
“물론 그렇지만, 삼대천은…… 정말로 위험한 상대다.”
부운화의 목소리에서 정말로 심각한 기운을 느낀 진구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 정도로…… 대단해요?”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분명 대단하다. 장수로서의 능력, 전사로서의 능력, 무인(武人)으로서의 ‘그릇’의 크기. 만약 네가 삼대천을 직접 보게 된다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거다.”
“……대형과 비교하면은요?”
부운화의 입에서 그 정도의 평가가 나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진구는 가장 핵심적이며,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대형과의 비교라…….”
부운화는 말을 끌면서 단번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부운화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흑룡을 타고 진천룡을 든 대형은 무적이다. 알고 있지?”
“예, 물론이죠.”
장기린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명마, 흑룡(黑龍).
명장 풍 도공(刀工)이 만든 오룡창(五龍槍) 중 최강의 창, 진천룡(震天龍).
그 둘을 모두 가진 장기린은 전장에서 무신(武神)의 위엄을 발했다.
그야말로 진구가 꿈꾸는 전사로서의 이상형.
진구는 그때의 장기린을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대형의 호적수는 원나라 최강의 전사인 텐챠이뿐이다. 그동안 둘은 셀 수 없이 싸웠지만 아직 명확한 결과가 나지 않은 것은 이미 유명한 일이지.”
“흥, 그건 대형이 봐준 거예요. 결국 마지막엔 텐챠이가 패퇴했잖아요.”
진구는 자신의 우상이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으로 항변했다.
“사실 그건 군사적인 승리지, 대형의 전적인 승리는 아니었어.”
“일기토를 할 기회가 없어서 그래요. 텐챠이의 왼쪽 눈에 그어진 흉터 못 봤어요?”
“그렇게 따지면 대형의 옆구리엔 그때 당한 긴 상흔이 남아 있다.”
“으윽! 둘째 형님은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얼굴을 붉히며 버럭 화를 내는 진구.
부운화는 그 순수한 모습에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구 편이냐고 묻는 다면 당연히 대형의 편이지. 다만 나는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는 거다.”
“으윽……!!”
“텐챠이도 명마인 창풍(蒼風)과 신응도(神鷹刀)가 있지. 확실히 대형과 텐챠이의 실력은 호각이야. 나도 무인으로서 그 둘의 아무런 방해가 없는 대결을 꼭 보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까지의 대결은 주변의 방해가 너무 많았어.”
진구는 볼을 뚱하게 부풀리며 불만스러워했으나 더 이상의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나 소문으로 보나 텐챠이와 장기린이 승부를 논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진구의 기억 속에도 전장에서 봤던 텐챠이의 무위는 충격적이었다.
일도에 말과 사람을 절반으로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
사흘 밤낮을 싸워도 지치지 않는 무한한 체력.
주변을 압도하는 폭풍 같은 기세와 인마일체로 벼랑도 거꾸로 올라갈 수 있는 신기(神技)의 기마술.
원나라 최강의 전사라는 별호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단지, 장기린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진구로서 받아들이기가 힘들 뿐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삼대천이오. 삼대천의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텐챠이로 화제가 바뀌었잖아요?”
“아, 그랬지.”
부운화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진구를 똑바로 응시했다.
“진구야, 대형과 함께했던 우리의 마지막 싸움을 기억하냐?”
“……십만 기병과 싸운 거요?”
“그래. 그때, 우리가 우생과 현백 문사의 작전을 써서 승리했지. 하지만 내가 단언하는데, 만약 그때 삼대천이 대칸이 아니라 텐챠이와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없었을 거다.”
한 치의 과장도 없는 부운화의 진실된 평가.
진구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날의 싸움은 섭우생과 현백의 기상천외한 전략들 덕분에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런 싸움이 단 세 사람 때문에 결과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말…… 도 안 돼요.”
“삼대천이 각각 누구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지?”
“예. 괴력난신 우르칸, 신궁 자이혼. 그리고 영매(靈媒) 하시르.”
진구는 북쪽 전장에서 아직까지도 전설로 내려오는 세 개의 이름을 말했다.
“그래. 그럼 상상해 봐라. 현백 문사나 우생과 맞먹는 지략을 지닌 하시르가 군을 움직이고, 괴력을 지닌 우르칸이 선봉에서 우리 군을 쳐부순다. 그리고 중화십궁 중에서도 최고라는 신궁 자이혼이 화살로 우리를 견제하겠지.”
“하, 하지만 대형이……!”
“대형은 텐챠이에게 막힌다. 대형은 막강하지만 텐챠이도 만만치 않아. 기억해 봐. 그날의 싸움도 대형이 텐챠이를 붙잡고 있는 동안 우리의 활약으로 승기가 돌아간 거였어. 그런데 삼대천 때문에 우리가 밀린다면?”
“……!”
진구는 점점 부운화의 말대로 전투가 흘러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우르칸이 그렇게 강해요? 자이혼의 궁술은 우리를 견제할 만큼의 실력이에요? 정말로 하시르는 다섯째 형만큼 지략이 뛰어난가요?”
“……진구야, 나는 지금껏 삼대천과 다섯 번이 넘게 마주쳤다.”
“저, 정말요? 그런데 왜 지금껏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말해 줄 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삼대천 각각의 무력은 동급. 그리고 그들 중 하나와 나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예……?”
진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아는 한, 장기린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 둘째 형님, 즉 부운화였다.
물 흐르는 듯한 몸놀림과 어딘가 현기가 흐르는 무공, 그리고 한 쌍의 장군검으로 만들어 내는 강력하고 정교한 공격들.
아직까지 진구는 부운화를 상대해서 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삼대천 각자가 부운화와 동급이라는 이야기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럴 수가……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다. 그리고 그런 삼대천이 지금 항주에 오고 있다고 하지. 그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어?”
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그는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찼다.
“우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예……?”
“원나라 잔당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기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심엔 분명 실종된 텐챠이가 있을 거고, 거기에 이제 삼대천이 합류한 거야. 그런 녀석들을 우생과 나, 그리고 진구 너까지, 세 사람만으로 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진구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불가능하다.
절대로.
다른 것들은 일단 모두 제외하고, 삼대천만 나타난다고 해도 지금의 세 명으론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진구는 더듬더듬 되물었다.
전에 없던 긴장감이 몰려온다.
그런데 다행히 부운화는 차분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우생, 전에 이야기해 둔 것은 처리했어?”
“예, 둘째 형님. 이미 개방을 통해 전부 찾아냈습니다.”
“전부? 그거, 좋은 소식인데. 다들 어디에 있었지?”
“따로따로 찾을 것도 없이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동정호에 다들 모여 있더군요. 셋째 형님의 아버님이 수로채의 채주잖습니까? 그 덕분에 넷째 형님이랑 다른 대원들도 모두 거기서 놀고먹고 하는 모양입니다.”
“뭐……?”
부운화는 수로채에서 놀고먹고 하고 있다는 말에 이마를 짚었다.
섭우생의 셋째 형님은 즉, 추룡을 말함이다.
다혈질이고 막무가내이지만, 속정은 깊은 사내.
때문에 대원들 중에도 유난히 추룡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추룡은 장강수로십팔채의 가족이었는데, 추룡의 아버지는 그냥 수로채의 채주 정도가 아니라 장강수로십팔채 모두를 이끄는 총표파자였다.
무당파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부운화는 총표파자라는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알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동등한 위치.
물론 격으로는 조금 떨어지지만, 병력과 무력 면에서는 그만한 자격을 갖춘 호걸인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의 자식인 추룡이 명제국 최전방의 병사로 지원한 것도 사실 기행 중의 기행이었다.
‘군에서 제대하면 도대체 뭘 할까 걱정되긴 했는데, 역시나 수로채에 가 있다니……! 그것도 다른 대원들까지 다 데리고!’
부운화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넷째인 대석.
평범한 농가 출신의 단순무식한 녀석이 추룡의 몇 마디에 얼마나 쉽게 넘어갔을지는 굳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되었다.
분명 지금쯤 수적들 사이에서 특유의 신력(神力)을 가지고 힘자랑이나 하고 있으리라.
탕!
부운화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외쳤다.
“당장 다 올라오라고 해!”
“지금 당장요?”
“그래. 적룡기마대 전원 재집결이다.”
섭우생과 진구, 두 사람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적룡기마대의 전원 재집결!
만약 북쪽 전장의 군인들이 들었다면 환호성을 내질렀을 대사건이다.
온몸에 소름과 전율이 돋은 두 사람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섭우생은 당장 서신을 보내기 위해 밖으로 달려갔고, 진구는 뜨겁게 달아오른 피를 식히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진구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긴장감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수가 부족하다?
삼대천이 강하다?
다 필요없다.
적룡기마대 전원이 모인다면 그 어떤 적이 와도 모조리 물리칠 수 있다.
적룡은 무적.
북쪽 전장의 병사들에게 그건 이미 하나의 신앙이었다.
“수가 부족하다면, 우리도 수를 늘리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야.”
그런 진구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할 부운화가 아닌 바.
부운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내려놓았던 장군검 두 개를 양쪽 허리에 비스듬하게 채웠다.
그러고는 각반과 보호대를 각각 다리와 팔목에 차고, 팔꿈치와 상박엔 비구와 호심경을 착용했다.
진구는 너무도 익숙한 그 모습을 보자 순간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제 저 위에 적룡기마대 특유의 철 갑주만 몸에 걸치면 전투 직전의 모습이 된다.
“으으……!”
흥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는 진구.
그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즐거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헤헤, 둘째 형님. 그 모습은……!”
“그래, 전투 준비다.”
부운화는 결연한 모습으로 자신의 긴 머리를 영웅건으로 질끈 동여맸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
북풍(北風).
북풍은 오직 원나라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는 여러 가지 색이 묻어 있다.
그것에는 북쪽초원의 향기도 있으며, 지금껏 장성을 지켜 온 명제국 병사들의 환호성도 섞여 있다.
시대의 연장.
북쪽에서 거세게 불어온 바람은 이미 한 번 끝난 전쟁의 향기를 항주로 실어 온 것이다.
“이미,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어.”
적룡기마대의 부대주, 부운화.
그는 적룡기마대를 소집하며 다시금 전쟁의 시작을 선언했다.
☆ ☆ ☆
“객주님, 거기서 뭐 하세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장부를 정리하던 휘연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장기린은 알에서 깨어나 무조건 어미 새를 쫓는 병아리처럼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째.
아무런 이유도 없이.
딱히 뭔가를 찾는 것도 아니면서 창밖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도 의아했다.
자신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몇 번이고 자문하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며, 또한 흥분하고 있는 것인지…….
“바람을 쐬고 싶으신가 봐요?”
“바람?”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뭔가 답답하고 괴로울 때,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 싶은, 그런 심정이요.”
휘연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답답한 것은 아니야.”
“그래요?”
“다만, 바람이라…… 그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장기린은 창밖으로 손을 뻗어 손끝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요새 많은 일들이 있긴 했다.
운찬이 청풍객잔에 잡혀간 것은 큰 사건이었고, 풍운객잔의 사활이 걸렸던 초청승부도 큰일이었다.
최근에 청풍객잔에서 홍화객잔의 별실을 무너뜨리고 습격해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던데, 그런 것을 보면 조만간 금선로에도 뭔가 큰 변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운찬의 반응이 이상했지.’
홍화객잔이나 청풍객잔에 대한 소식이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후다닥 도망치는 것이,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불안, 초조, 긴장감.
그와 함께 생기는 미지의 기쁨.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옆구리에 남아 있는 긴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숙적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가 욱신거리면서 쑤셔 왔다.
이 상처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에 새겨 둔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상처들.
그것들 하나하나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예전의 기억들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장기린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달빛은 아무런 답도 내려 주지 않았다.
“객주님……?”
그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휘연이 소매를 잡아당겼다.
예쁜 얼굴.
호수 같은 눈망울에 짙은 불안감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장기린은 그 순간, 모든 것을 잊고 미소 지었다.
휘연에게서 느껴지는 그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흉터에서 느껴지는 아픔들을 모조리 씻어 내렸다.
‘그래,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전장의 붉은 악귀가 아니라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이야.’
장기린은 그 순간, 곧 일어날 무언가를 예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평범한 삶을 꿈꾸는 장기린.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으로 남기로.
“들어가자.”
장기린이 웃으며 이끌자 휘연 또한 불안한 모습을 지우고 맑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달과 별이 밝은 항주의 밤.
그 어느 때와도 똑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