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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十二章 ― 근묵자흑(近墨者黑)
“항상 궁금했는데, 어째서 항주인가요?”
적룡기마대 간부 중 막내이자, 쾌활하고 활동적인 성격을 지닌 진구는 문득 생각난 것을 질문했다.
“어째서라니, 무슨 뜻이냐?”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항주 전역이 그려져 있는 군사용 지도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적룡기마대의 둘째이자 부대주인 부운화였다.
남자임에도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잘생긴 외모. 그리고 차분한 눈빛이 눈에 띄었다.
“대형이 여기에 오신 건 제가 객잔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라고 쳐도…… 오대객잔이 이상한 단체랑 연관되어 있는 거나, 몽고 달자 놈들이 비밀 지부를 만든 것도 어째서 다 항주죠? 왜 넓고 넓은 땅덩어리 중에서 하필 항주에 다 모였냐는 말이에요.”
“음, 그 이야기였군.”
부운화가 지도에서 눈을 떼어냈다. 그는 지도 위의 몇 군데 지형과 특색을 종이에 필사한 뒤,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찰을 정신없이 읽어 내리고 있는 적룡기마대의 다섯째 섭우생에게 건네주었다.
“우생, 예상 접전 지역이다. 야전 중심으로 전술을 짜 둬.”
“예.”
대답은 간결. 섭우생은 받은 종이를 눈으로 한 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뭔가를 길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뼈만 남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른 얼굴 위로 광기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
전술에 미친 자.
흑룡강 유역에서 현백과 동급의 지략으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모사(謀事)다운 풍모였다.
그런 식으로 작성된 예비 전술들이 이미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 되어 쌓여 가는 중이었다.
섭우생은 계속해서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이미 머릿속에 다 집어넣어 둔 지형과 지도를 일필휘지로 그려 내고, 그 위에 가능한 전술들을 세필로 쭉 적어 넣기 시작했다.
방 안은 이미 코를 틀어막아야 할 만큼 진한 먹 내음로 가득했고, 섭우생의 양손 끝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부운화는 그런 섭우생을 힐끗 쳐다본 뒤, 자신도 곧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진구야, 황제의 친위 세력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니?”
“네? 에이, 둘째 형님도 참. 저도 그 정도는 안다구요. 북평(北平)…… 아니, 이젠 북경(北京)이구나. 황제 폐하가 가신들 때문에 북경으로 천도한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구요.”
“그렇구나. 그럼 황제의 적대 세력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딘지 아니?”
“에, 예?”
진구는 잠시 고민하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적대 세력…… 으음, 흐, 흑룡강 유역, 아니면 남만?”
“그건 적국(敵國)이 있는 곳이지. 적대 세력은 같은 명 제국 내에서의 비호의적인 세력을 말하는 거야.”
“아, 반군을 말하는 거군요?”
“반군까진 아니지만…… 뭐, 이제 와선 비슷하려나? 어쨌든 현재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명 제국 세력은 모두 남경 부근에 위치해 있어. 이른바 경제의 중심지인 강남 지방에서 오랫동안 부와 권력을 쌓아 온 토호 귀족들이라는 거다.”
“헤에, 그렇군요.”
“지금껏 중화의 수도는 남경이었고, 그만큼 남부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아. 이미 하늘이 바뀐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고지식하게 아직도 혜제를 따르는 자들까지 있는 곳이야.”
혜제(惠帝).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의 손자이자 지금의 황제인 태종에게 정난의 변으로 제위를 빼앗겨 버린 비운의 황제였다.
고지식한 남부 귀족들은 여전히 태종이 제위에 오른 것을 ‘반란’이라 여기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황가에 있어 정통성은 중요하다.
아무리 환관과 동창들이 불순분자들의 뿌리를 뽑고 피와 공포를 뿌리고 다녀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곳곳에서 반군들이 출몰하는 이유가 바로 태종에게 정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서 더더욱 북경으로 천도를 한 거군요?”
“그렇지. 북경은 황제의 본가 같은 곳. 반대로 남경엔 불구대천의 숙적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언제 칼끝을 반대로 향할지 모르는데 남경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일이지.”
“음, 황제도 피곤한 거군요.”
“물론. 만인지상의 위치라고 만사가 편할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야. 커다란 권력은 그만큼의 책임감이 뒤따르는 법. 진구, 네가 황제가 되면 아마 사흘도 못 견디고 뛰쳐나올 거야.”
“아, 그 정도예요…… 가 아니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 주세요! 그거 잘못해서 누가 들었다간 역모죄라구요!”
“하하! 진구, 너도 의외로 소심하구나!”
“둘째 형님이 너무 대범한 거라구요…….”
지금은 바야흐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동창에게 끌려가는 밀정정치의 시대.
그런 때에 이런 종류의 대화는 목숨이 걸린 치명적인 문제였다.
진구는 망을 보는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주변에 혹시 듣는 사람이 없나 살폈다.
“하하, 아무도 없어. 괜찮아, 괜찮아.”
“둘째 형님…….”
“뭐, 아무튼, 지금의 황제는 보통 사람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인물이야. 모든 것을 잘하는 만재(萬才)에 머리는 무서울 만치 비상하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착같은 성품 덕에 끈질기기까지 하지. 때문에 그는 적대 세력이 가득한 남경을 포기하지 않았어.”
진구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이건 특급 기밀인데…… 오 년에 한 번씩 황제는 비밀리에 항주에서 연회를 열어. 황족들과 남경 쪽의 최고위 권세가들을 모아서 여는 연회지. 그리고 그 연회는 마침 올해 단오절에 열려.”
“오오!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 아무리 적대적인 귀족들이라도 황제가 직접 주최한 이상 거기에 참석 안 할 수는 없어.”
“아…… 그런데 반발심을 가진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하나요? 왠지 핑계를 대면서 안 올 것 같은데…….”
“첫 연회 때는 물론 안 왔지.”
“역시!”
“하지만 그때, 참석 안 한 관료들은 모두 암암리에 동창에 의해 숙청됐어. 죄목은 역모.”
“……!!”
“그 뒤로 연회에 초대된 관료들 중 참석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
진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긴장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무서운 분이네요, 황제는.”
“철혈의 황제라는 말을 괜히 듣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역대 중화 역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시대야.”
“아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던 진구는 문득 원래의 화제가 이게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앗! 잠깐만요. 우린 분명히 왜 하필이면 항주로 모든 게 집결되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 설마! 별별 게 다 항주 금선로로 모이는 이유가 바로……?!”
“그래, 그 연회 때문이라는 거다.”
“……!!”
부운화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침중해졌다.
심각한 주제. 진지한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들도 분명 대연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 시기에 항주 근교에 거점을 마련할 리가 없으니까.”
“그런?! 그건 엄청 심각한 문제잖아요? 이건 자칫 잘못하면…….”
“그래. 황제와 황족 암살. 게다가 잘못하면 연회에 참석한 대신들이 단번에 몰살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날 테지.”
“으아……?!”
“관료들이 없으면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고, 국가의 기틀과 기강이 무너진다. 그러면 명 제국은 끝이고, 전국시대가 돌아오게 되거나, 아니면 원나라가 다시 중원을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구, 국가 전복! 원 제국 재기?”
“그래, 그런 이야기야.”
갑자기 제국의 패권을 논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탓일까, 진구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어, 엄청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잖아요. 지금 항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명 제국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는 건가요?”
“그래, 그거야.”
“으아아?!”
진구는 길이가 얼마 안 되는 짧은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었다.
“역시 대형은 폭풍을 몰고 다니는 운을 타고난 게 분명하네요. 어떻게 은거 장소로 정한 곳이 하필 이런 위태로운 장소로……!”
“하하! 네 말대로다! 대형에겐 항상 그런 경향이 좀 있었지.”
“웃을 문제가 아니에요!”
진구는 손톱을 이빨로 까득거리며 물어뜯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빨리 황실이나 도독부에 전갈을 넣어서 대책을…….”
“잠깐, 진구. 일단 진정해.”
“지, 진정을 어떻게 해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서 연회를 연기하든가 취소하든가 해야죠. 안 그랬다간 명 제국이 멸망한다구요. 이걸 어떻게 두고만 봐요?”
진구는 혀가 꼬일 만큼 당황해서는 허둥지둥했다.
전장에서의 경험이 있는 만큼 진구는 또래의 청년들보다 훨씬 생각이 깊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한 국가의 명운을 짊어지기엔 아직 그릇이 부족했다.
부운화는 우왕좌왕하는 진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 그 사실을 말한다고 한들 황제 폐하께서 연회를 연기하실 것 같아?”
“예……?”
“그분은 자존감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외압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야. 설령 우리가 증거를 찾아서 위험을 알린다고 한들 절대로 계획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지.”
“아……!”
“어차피 우리에겐 아직 몽고의 잔병들이 그 연회를 노린다는 확증도 없어. 괜히 전갈을 보냈다간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기만 할 거야.”
“하, 하지만 그들도 몽고의 잔병들이 항주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동창을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아.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을 황실에선 이미 상세히 알고 있다고 봐야 하지.”
진구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부운화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황실에서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래. 황실에선 분명 지금 몽고의 잔병들을 진압하기보단, 좀 더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확실한 꼬리를 잡아서 근거지를 뿌리 뽑으려고 할 거라는 게, 우생의 생각이다.”
“아아, 과연!”
진구는 고개를 돌려 섭우생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이쪽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전략 수립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다만 중요한 건 저쪽에서 얼마나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지. 미리 대비를 하고 덫을 놓고 있던 황제인가, 아니면 몽고의 잔병들이 예상 이상의 능력과 행동으로 허를 찌를 것인가. 어느 쪽이 위인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걸 테지.”
“크윽! 한 치 앞을 모르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 언제든 싸울 준비를 해 두는 거야.”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 빨리 추룡과 대석이 와야 하는 거야.”
추룡과 대석.
남은 간부 두 사람과 적룡기마대가 모두 도착하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우리의 최우선 사항은 몽고의 잔병들을 섬멸하는 게 아니야.”
“예? 그럼 어떤……?”
“대형의 안위. 평범한 생활을 지키도록 돕는 것이지.”
“아……!”
“우린 이곳에 그걸 위해 존재하는 거야.”
군에선 이미 제대한 몸.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냐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서 싸울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대형 장기린을 위해서다.
“자, 상황을 알았으면 진구 너도 도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아, 물론 도와야죠. 어떤 일인데요?”
“이거.”
부운화는 항주 전도를 내밀며 그곳에 세필로 점을 찍기 시작했다.
“어, 어어……?”
하나둘, 늘어가던 점이 어느샌가 서른 개가 넘어갔다.
진구도 지도를 읽는 법은 배웠다.
때문에 부운화가 점을 찍는 곳들이 전투와 전술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설마…….”
다만 문제는, 그 점을 찍는 범위가 말 그대로 항주 ‘전역’을 망라한다는 점이었다.
“자, 다 됐다. 이곳을 돌아보고 지도와 다른 점이 있는지 확인한 뒤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으아악! 여길 다요?!”
“그래. 내일까진 되겠지?”
“무리인 게 당연하잖아요! 점이 오십 개는 넘는데! 게다가 방향도 다 제각각이고! 하루 만에 끝마치려면 수색병이 점의 숫자만큼 필요하겠는데요?!”
“넌 보통 병사가 아니잖아.”
“……끄응, 그건 그렇지만.”
“평소엔 말을 안 타고도 전장을 내달리던 네가 무슨 엄살을 떨고 있는 거야? 경신법으로만 따지면 대형과 나 다음이 바로 너일 텐데?”
“으으……!”
“잔말 말고 다녀와. 보고서 제출은 내일까지다.”
“으아! 그래도 너무한다구요―!”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진구.
그의 절규는 하루 온종일 항주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 ☆ ☆
누가 먼저라 할 수 없는 짧은 순간, 두 개의 무기가 서로를 향했다.
하나는 파멸적인 살기가 감도는 검붉은 빛의 철창.
다른 하나는 마력적인 예기가 감도는 삼 척 길이의 대도.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고 혼란스럽더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것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피가 난무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두 사람은 그들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평범한 세상과 철저하게 독립된.
숭고하고 고결한 전사들의 시간.
물론 가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그들의 세계에 침범하려는 자들도 있다.
대규모의 전투에 놀라고 새빨간 피의 광기에 취한 약하디약한 존재들.
그들은 덧없는 생명을 불태우며 부나방처럼 달려들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을 뿐이다.
푸화아악―!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철창을 옆으로 휘두르자 옆에서 몰래 다가오려던 병사 둘이 한꺼번에 몸이 동강 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곧바로 철창을 반 회전하며 좌측으로 일침.
이번엔 왼쪽에서 덤벼들던 병사 하나가 퍽! 하고 몸이 갈라지며 공중에서 터져 나간 선혈이 폭포수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바로 그 순간, 반 박자를 빠르게 움직이며 정면으로 찌르기.
푸욱―!
일격에 가슴을 관통한 뒤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움직였다.
히히힝―!!
오랜 시간 동안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되어 호흡을 맞춰 온 흑룡은 주인의 의중을 알아채고 거대한 몸체를 움직여 앞으로 포탄처럼 쏘아졌다.
땅을 박차는 뒷발.
흑룡이 성난 수소처럼 정면의 모든 것을 들이받았다.
콰과곽―!
전장을 호령하는 명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미 한 병사의 가슴을 꿰뚫은 창으로 줄줄이 세 명의 병사를 더 관통했다.
푹! 푹! 푹!
콰드득…….
그대로 오 장 가까이를 달리자 조각 난 사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창끝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그제야 혼란스러웠던 잡음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의 벽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건너편을 쳐다보니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피범벅이 된 갑옷을 입고, 커다란 대도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주변의 병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고 있었다.
일도에 사람과 말이 한꺼번에 베어졌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그의 주변도 똑같이 처참한 모습의 사체들로 가득했다.
푸르륵……!
푸르르륵……!
두 마리 말이 투레질을 하며 서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한 손으론 무기를, 다른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아가는 두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무나도 첨예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무거워서 어깨가 부러져 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이 두 사람 사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상대의 숨소리, 사소한 손끝의 움직임까지 보였다.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까딱할 수 없다.
서로의 능력은 호각.
그것은 지난 시간 동안 겪어 온 수십, 수백 번의 싸움으로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대였다. 무언가를 감출 여유도 없고, 여력을 남길 이유도 없다.
빠악!
히히힝―!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은 두 마리의 말이 서로의 이마를 거세게 부딪치며 스쳐 지나가는 순간 깨졌다.
휘청하고 흔들리는 발판.
그리고 주변의 모습이 고속으로 스쳐 지나갈 때 섬광이 번뜩였다.
쩌엉―!
손바닥이 화끈거리며 뼛속까지 저릿저릿해지는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한 번…….
쩌저정―!
앞으로 힘껏 달렸던 말은 그대로 뒤로 반 바퀴를 돌아 다시금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창과 대도가 몇 번이나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뜨거운 석양빛을 받으며 이뤄지는 격전.
기교나 속임수도 없이, 평생에 걸쳐 실전으로 다듬어 온 살인기(殺人技)만을 주고받았다.
주고받는 공격 하나하나가 전력.
그렇게 셀 수 없는 공방을 계속하던 어느 순간,
쩌엉―! 차창! 채캉―!
석양이 아름답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만의 병력이 부딪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것도 목숨을 걸고 숙적과 결전을 벌이는 도중에 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생각이다.
석양에 대한 감탄이라니.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십만의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를 쓰러뜨리면 지금까지의 모든 싸움이 끝이 날 터.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석양빛을 보자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저 아름다운 광경 아래 이런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상대하던 숙적의 검격도 무의미해졌다.
휙― 하고 아무렇게나 휘두른 철창이 지금까지의 그라면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 빈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왼쪽 눈 근처를 비스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푸슛―!
핏물이 튀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은 얕았다.
원래대로라면 머리를 갈랐을 일격이지만 타고 있는 말들끼리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운 좋게도 방향이 빗나가고 만 것이다.
상대는 경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의 공격이 그의 몸에 닿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이라면 이대로 창을 휘둘러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십여 년간 쓰러뜨리지 못한 상대이지만 이번만은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것은 그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문득 느껴지는 지독한 허무감에 창끝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비춰지는 석양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푸화아아악―!
그 순간, 따끔거리는 감각과 함께 옆구리의 철갑이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그러진 숙적의 얼굴.
분노에 찬 고함 소리.
그리고…… 격렬한 아픔이 온몸을 치달아 올랐다.
“흡……!”
장기린은 벽에 비스듬하게 등을 기대고 누워 있다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얼굴과 목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의 손끝은 아직까지도 파르르 떨렸다.
‘그날의 꿈을 꾸다니.’
그는 옆구리에 남은 흉터를 손으로 꾹 눌렀다.
마치 그날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 당시의 고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어째서? 어제부터 왜 이러는 거지?’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길 잠시, 옆에서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객주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엄청 하얘요.”
통통한 얼굴에 아직 덜 성숙한 체구.
하지만 순수한 눈빛 아래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고 있는 것은 풍운객잔의 쌍둥이 점소이인 아칠, 아팔 형제였다.
“땀도 많이 흘리시고…….”
“정말로 괜찮으세요? 물이라도 한잔 떠올까요?”
아칠과 아팔은 뭘 해 줘야 하는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장기린은 머릿속에 가득했던 상념을 털어 버렸다.
“괜찮아.”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너희 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장기린은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어 주었다.
쓰윽― 쓰윽―
두 사람은 그 온기와 감촉이 좋은 듯 걱정스러웠던 표정이 점차 사라지며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얼굴이 풀려 버렸다.
장기린은 피식 웃으며 쌍둥이 형제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앗!”
“아파요! 객주님!”
“사내 녀석들이 엄살은. 아침 식사 때문에 온 거지? 돌아가서 세안만 하고 곧바로 간다고 전해 줘.”
아칠과 아팔은 ‘예에―!’ 하고 쾌활하게 대답하며 돌아가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장기린을 돌아봤다.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아프시면 안 돼요! 객주님은 우리 객잔의 기둥이에요!”
“맞아요!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자 아칠과 아팔은 짧은 다리를 움직여 도도도 뛰어갔다.
“꼬맹이 녀석들이…….”
저런 쪼그만 녀석들이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건가.
기가 찰 노릇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두 아이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꿈을 꿨어.’
장기린은 잔뜩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옆으로 젖힌 뒤 뒤뜰의 구석에 있는 우물가로 다가갔다.
풍운객잔은 낡고 오래된 객잔이지만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우물이 객잔 내부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다른 객잔에서 새벽마다 하인들을 시켜서 물을 떠 오는 것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물이 시원한 건 큰 장점이지.’
특히 새벽녘에 물을 길어서 쓰면 손끝이 얼 것만 같은 냉기도 느낄 수가 있었다.
장기린은 우물에 걸쳐 있는 줄을 잡아당겨 두레박을 곧바로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촤아악―!
머리끝을 저릿하게 만드는 냉기.
얼얼한 감각과 함께 약간 나른해져 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시원한 물로 머리를 감자 얼굴과 목에서 끈적거리던 느낌이 싹 사라졌다.
장기린은 젖은 머리에서 물기를 짜낸 뒤, 우물가에 마치 장기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소곳이 접혀 있는 흰색의 천을 들어 올렸다.
부드럽고 매끈한.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깨끗한 천.
언제부턴가 매일 아침 우물가에 흰색 천이 놓여 있었다.
처음 그 천을 봤을 땐 아칠, 아팔 형제가 준비해 준 것인 줄 알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꽃 냄새.
은은하면서도 향긋한 연꽃 냄새가 흰색 천에 그득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
얼굴을 문지르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 내고, 손에 묻은 물기마저 없앤 뒤, 다시 반듯하게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 두었다.
이렇게 있던 자리에 놔두면, 다음날엔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천으로 바뀌어 있다.
마치 우렁각시 전설이 생각난다.
장기린은 그 우렁각시에게 조만간 보답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새로운 아침, 새로 시작되는 일상.
밤중에 꾼 꿈은 그의 마음을 조금 뒤흔들어 놓았지만…… 그의 일상을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 풍운객잔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
그 정도의 일로는 방해조차 되지 않았다.
☆ ☆ ☆
풍운객잔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있다.
아침 식사는 꼭 다 함께 모여서 먹는 것.
점심과 저녁 시간엔 많은 손님들로 인해 바빠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정해진 규칙이었다.
장기린은 언제나처럼 객잔 식구들이 모여 있는 탁자의 상석에 가서 앉았다.
휘연은 깔끔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아칠과 아팔은 나란히 앉아서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남궁휴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도……?”
거기에, 어쩐 이유에선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기로 투숙하고 있는 구양화와 백연도 앉아 있었다.
“으하암…… 아얏! 화, 화 매, 왜 그러는 거야?”
백연은 하품을 하다가 옆구리를 꼬집히고는 화들짝 놀라 혀를 씹고 말았다.
“오라버니! 품위를 지켜야죠. 언제 어느 때고 몸가짐을 똑바로 해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어제 늦게까지 할 일이 있어서 못 잤…… 아얏! 아, 알았다니까. 바로 할게. 바로 하면 되잖아.”
무당에서 일해검이라 불리는 고수라도 혀를 씹자 아파하는 것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았다.
구양화가 서슬 퍼런 기세로 닦달하자 몸가짐을 바로 한 것은 백연뿐만이 아니었다. 꾸벅꾸벅 졸던 남궁휴도 자세를 바로 했고, 공포에 눌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아칠, 아팔 형제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평소의 배 이상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째서일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어?”
식탁 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요리가……?”
평소의 아침 식사는 가볍고 담백한 식단 위주였다.
싱거울 정도로 간을 안 한 소채라든가, 아삭한 야채를 썰어 넣은 달걀 요리. 개중에 조금 부담스러운 요리라고 해 봤자 속을 간장에 조린 고기로 꽉꽉 채워 넣은 소룡포(小龍包)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차려진 아침 식사는 그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식탁 위에 요리들이 쭉 늘어선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찔해질 정도의 ‘단맛’이 느껴졌다.
연고(설떡)에 미화당(쌀엿), 거기에 바삭하게 튀긴 전병과 유각까지.
춘절 이후로는 구경도 못했던 달콤한 먹거리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단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장기린이 먹을 만한 음식이라곤 그나마 단맛이 덜한 두포(豆包:팥 만두)뿐이었다.
“……운찬.”
“예, 예?”
주방에서 방금 쪄 내서 따끈따끈한 두포를 접시에 담아 오던 운찬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당연한 물음이다.
풍운객잔을 개업한 지 벌써 한 해가 지나간다.
그 한 해 동안 이렇게나 단것들로만 아침이 채워진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어, 어, 없었어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예. 어, 없었어요.”
시선을 피하는 불안한 눈빛. 창백한 안색.
하지만 몰래 힐끔거리는 운찬의 시선은 명백히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구양화?’
긴 머리를 마치 벌레의 더듬이처럼 양 갈래로 땋은 꼬마 아가씨.
운찬은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하고 날카로운 그 아가씨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
지그시 응시하자 운찬은 몸을 움찔 떨며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시선은 옆으로 피하고 있지만 발은 땅에 딱 달라붙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행색이었다.
꾸욱―
그때, 옆에서 휘연이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응?’
도리도리.
휘연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는 듯 구양화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긴 뭐, 상관없나……?”
그는 딱히 먹는 것에 대해 까다로운 성격도 아니고,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하루가 시작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식사란 영양분을 몸에 공급하기 위한 행위일 뿐.
그게 즐거운 시간으로 변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추궁할 필요는 없겠지.’
장기린은 운찬에게서 시선을 떼고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그럼, 식사하자.”
곧이어 식탁에 둘러 앉은 식구들에게서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잘 먹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가지 요리에 손을 가져가는 식구들.
남궁휴는 장기린과 마찬가지로 단 음식을 꺼려했으나, 여인들이나 아이들은 단것을 꽤나 좋아하는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병이나 연고 같은 것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구양화였다.
눈에 띄게 예쁜 소녀는 물엿이 잔뜩 묻어 있는 미화당을 입에 가져가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흐, 흥― 흐응―!”
나직하면서 귀여운 콧노래와 함께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
보는 사람마저 행복해질 것처럼 즐거운 광경이었다.
“화 매.”
“네, 휘연 언니?”
“화 매는 정말로 단걸 좋아하네?”
“그럼요! 단것을 먹으면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정도인걸요?”
구양화는 그 말을 하면서 힐끗 시선을 돌려 운찬을 쳐다봤다.
요리를 끝내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운찬의 몸이 움찔 떨린 것은…… 식탁에 둘러 앉아 있던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뭔가 있네.”
“뭔가 있었어.”
아칠과 아팔이 전병을 입으로 가져가던 것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아침부터 단 음식이 잔뜩 있던 건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렇겠지? 아가씨는 단 음식을 괴―앵장히 좋아하니까.”
“그러고 보면 오늘 아침에 강 숙수님이 아가씨를 피한 것 같아.”
“맞아, 맞아. 분명히 뭔가 큰 잘못을 했을 거야.”
“이 식탁은 그에 대한 보답, 아니면 입막음?”
아칠과 아팔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군거렸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다 들렸다.
“강 숙수님.”
남궁휴는 어느새 잠이 다 깼는지 싱글싱글 웃었다.
“뭐, 뭐야?”
“혹시 동정의 실수 같은 겁니까?”
“거기서 동정 얘기가 왜 나와!”
운찬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동정으로서 오래 지내다 보니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취향을 바꾸었나 싶어서……. 혹시 그런 쪽으로 실수하신 거라면 저에게 솔직하게 상담을…….”
“으, 으와아악―?!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무 위험한 쪽으로 변하면 안 됩니다? 범죄로 가 버리면 감싸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래요?”
“그래!”
운찬과 휴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살짝 긴장되어 있었던 아침 식탁의 분위기는 한층 쇄신되어 있었다.
장기린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입을 크게 베어 물자 쫄깃한 반죽 사이로 살짝 달콤하면서 짭쪼름한 팥소가 입 안에 들어왔다.
“음…….”
생각보다 맛있다. 이 정도라면 아침식사로 먹기에 괜찮을 듯했다.
“화 매.”
“왜요, 오라버니?”
“무슨 일 있었어?”
백연은 이어지는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며 순진한 눈으로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
“네. 그보다 휘연 언니.”
구양화는 고개를 돌려 휘연을 바라봤다.
“응?”
“있잖아요…….”
“응.”
구양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어제 홍화객잔에서 크게 불이 났던 거 아시죠?”
“알지. 금선로 전체에 난리가 났잖아.”
우당탕탕―!
갑자기 의자가 넘어지며 운찬이 바닥을 뒹굴었다.
“…….”
“…….”
객잔 식구들의 의아한 시선이 운찬에게 모여들었다.
“강 숙수님, 괜찮으세요?”
“어디 안 다치셨어요?”
걱정을 해 준 것은 휘연과 아칠, 아팔 형제.
남궁휴와 백연, 그리고 장기린은 의심스런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거기서 왜……?”
“어떻게 가만히 있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가지……?”
“……이상하네.”
운찬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하, 하하…… 바, 발이 미끄러져서요.”
세 남자는 그 말에 의심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일단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건 왜?”
“거기서 큰 불이 난 건요, 글쎄 ‘누군가’가 화약의 종류를 써서 폭발시킨 거래요.”
“아, 응. 들었어. 누군지 몰라도 굉장히 난폭한 사람인 것 같아. 어떻게 객잔을 폭파시킬 생각을 했을까?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데.”
“애초에 사람들을 다치게 하려고 한 일 아닐까요?”
“그런 걸까?”
“그렇지 않으면 전각 하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폭발물을 쓰진 않았겠죠?”
빙긋 웃는 구양화.
“히끅…… 히끅…….”
반면, 운찬은 어느새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강 숙수님?”
“물 좀 갖다 드릴까요?”
운찬은 걱정하는 아칠과 아팔에게 아니라며 손을 저어 사양했지만 동요는 감추지 못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
그는 앞에서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켁, 케켁……!”
운찬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딸꾹질에 뜨거운 차.
운찬은 쓰라린 목을 잡고 화로 위에 올려진 해산물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크케케…….”
운찬이 괴로워하는 사이에도 휘연과 구양화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탐화폭마(探花爆魔) 말인데요…….”
“응? 탐화폭마?”
“홍화[花]를 찾은[探] 폭마(爆魔)라고 해서 탐화폭마래요. 오늘 아침에 시장통에선 온통 그 얘기뿐이던걸요?”
“그래? 으응, 듣고 보니 굉장히 어감이 안 좋은 것 같아.”
“네. 탐화라니…… 꼭 색마(色魔)의 별호 같지 않나요?”
“크케케켁……!”
운찬은 이제 거의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휘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강 숙수님, 많이 안 좋으신가요?”
“아, 아뇨, 괜찮…….”
“저 사람은 괜찮아요. 그보다 휘연 언니, 그 탐화폭마를 관부에서 찾고 있다는 거 아세요?”
“……!!”
“화약은 관부에서 엄중히 관리하는 금용 물품이거든요. 함부로 사용한 사람은 커다란 중벌을 받아요. 지금쯤 포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요?”
우당탕탕―!
“…….”
“……”
운찬은 다시 한 번 의자에서 넘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도대체……?”
바로 옆자리에 있던 백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운찬을 응시했다.
“으으…… 괘, 괜찮아요.”
“…….”
“저, 정말 괜찮아요.”
모두의 시선이 운찬을 아프도록 찔렀다.
단 한 사람, 싱긋 웃는 얼굴로 휘연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하는 구양화만 빼고.
“그 사람은 대체 어디에 사는 범죄자일까요? 설마 의외로 가까운 데 있는 건 아니겠죠?”
“윽……!”
“잡히면 중벌을 받을 텐데……. 아아, 그런 면에선 불쌍하네요.”
“크흑…….”
“게다가 홍화객잔의 옥룡파가 사력을 다해서 찾고 있대요. 시장통에 소문이 파다하던걸요?”
“커허헉……!”
구양화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운찬은 괴로워했다.
‘이 녀석,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장기린은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운찬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 하며 표정을 관리하는 운찬.
“…….”
하지만 창백해진 안색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그거 이상하네? 그 탐화폭마는 어차피 청풍객잔이 고용한 사람 아니었어?”
휘연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뭐, 다들 그렇다고 생각하더라구요.”
“……에? 그럼 아냐?”
“글쎄요―?”
의미심장하게 올라가는 목소리.
구양화는 빙긋 웃고 있었다.
한편,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운찬―너무나도 약해 보였다―은 주방으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뭔가 커다란 쟁반을 하나 들고 나왔다.
“와아?”
“우와! 맛있겠다!”
아칠과 아팔이 당장에라도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흐를 것 같은 얼굴로 운찬이 들고 나오는 것을 바라봤다.
쟁반 위에는 새빨간 당과가 가득 놓여 있었다. 딸기, 사과, 삶은 밤들을 예쁘게 다듬고 그 위에 반투명한 붉은빛 엿당으로 동그랗게 껍질을 씌워 놓은, 보기만 해도 절로 입속에 침이 고이는 간식이었다.
운찬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다가와 그 쟁반을 구양화의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흐응…….”
“…….”
당과를 보며 의미심장한 콧소리는 내는 구양화와 두 눈을 부릅뜬 채 필사적으로 어떤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운찬.
구양화는 운찬과 당과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했지만…… 결국 보기만 해도 입 안이 달달해지는 당과를 이길 수는 없었다.
툭.
그나마 큰 선심을 베풀 듯 거만한 자세로 딸기가 속에 들어 있는 당과를 하나 집어 든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달까.
“뭐, 일단은 이걸로 마무리하죠.”
아작―!
“으응……!”
그리곤 앞서의 거만한 자세가 무색할 만큼 한입을 깨문 것만으로 행복에 취한 소녀의 얼굴로 돌아가 버렸다.
“마, 맛있어……!”
구양화는 몽롱한 표정으로 당과를 바라봤다.
눈빛만 봐서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
다만 입속에선 달콤하고 아삭한 딸기가 씹히고 있을 뿐이었다.
“화 매는 정말로 단걸 좋아하네.”
휘연은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마치 혼인가마를 타고 떠나는 딸을 보는 어머니 같은 미소였다.
‘아니, 나는 그보다는 저 둘 사이의 비밀이 더 신경이 쓰이는데 말이야.’
약점이라도 잡힌 것마냥 노골적으로 구양화에게 설설 기는 운찬과 그런 운찬을 보며 묘한 언동으로 압박을 가하는 구양화.
장기린은 그 둘 사이의 비밀에 흥미가 생겼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분위기도 좋고 말이지.’
구양화의 앞에 놓인 당과 쟁반은 빠른 속도로 비어 가고 있었다. 예쁜 당과에 흥미가 생긴 객잔 식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아아, 맛있어요!”
“이 아작거리는 맛이 일품이야!”
“정말로 맛있군요.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단 음식인데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강 숙수님은, …이지만, 뭐, 요리만큼은 항주에서 제일이니까요.”
“어이!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 얼버무림엔 무슨 단어가 들어간 거야?”
백연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전달한 남궁휴를 향해 운찬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일갈했다.
“흐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이 녀석!”
“말해 드릴까요, 백 소협?”
“예? 아, 예. 말해 주십시오.”
“자, 잠깐! 이 자식―!”
어느새 구양화의 압박은 잊고 운찬은 남궁휴와 티격태격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오늘은 어디 나가시나요?”
“응? 으응, 화 매. 오늘도 중요한 일이 있어.”
“항상 바쁘시네요.”
“요즘은 좀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하, 하지만 아마 오늘만 다녀오면 일이 마무리될 거야.”
“흐응, 그래요?”
“그래. 그러니 여기 객잔분들과 잘 지내고 있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잘 지낸다구요.”
구양화는 여전히 당과의 단맛에 취한 채로 백연과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휘연은 웃으면서 옆에 앉은 구양화와 함께 당과를 나눠 먹었고, 아칠과 아팔은 백연이 중간 중간에 무당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풍경.
이거야말로 풍운객잔의 ‘일상’이었다.
‘이런 분위기로 되어 있으면 뭐라고 할 수가 없단 말이지.’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곤 운찬에게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실제로 운찬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어 봐야 얼마나 되어 있겠냐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위험한 상황이면 말을 하겠지. 지난번의 경험으로 학습도 했을 거고.’
운찬도 학습 능력이 있는 이상 지난번처럼 쉬쉬하다가 사건을 더 크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끼이익―!
“크흠!”
장기린이 세 개째의 두포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때, 갑자기 풍운객잔의 정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그림자가 비쳐 들어왔다.
아직 개점 시간 전.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통째로 가려 버리는 거구의 사내가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철우?”
장기린은 물론이고, 식탁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철우를 향했다.
“여어.”
대문 앞에서 솥뚜껑 같은 큰 손을 들어 올리는 철우는 매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과 맞지 않는 태도.
아마 지난번 ‘초청승부’ 때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에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 어울리는군. 평소대로 하는 게 어떻소?”
“하지만 어쩐지 어색해서…….”
“우린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장기린은 동의를 구하듯이 객잔 식구들을 바라봤다.
휘연도, 운찬도, 휴도, 그리고 아칠과 아팔 형제까지도.
사정을 알고 있는 모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철우는 그 모습을 보며 감격한 듯이, 또는 오히려 괴로운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하핫! 그런가. 역시 난 축 처친 게 안 어울리는 모양이군.”
“뭐, 그렇지.”
“지난번엔 정말 미안하게 됐다. 여러 가지 깊은 사정이 있었어.”
“이유라면 이미 알고 있소.”
“음, 정말인가?”
철우는 놀랐다는 듯이 퉁방울 같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외부엔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이해할 수 있소. 나도 그러니까.”
“……뭐?”
장기린은 철우가 풍운객잔을 돕겠다는 약속을 철회했을 때 한동안 의아해하며 고민했고, 결국 생각해 낸 답을 내놓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일 테지.”
“……어어?”
“괜한 일에 엮여서 소문이 나 버리면 평범하게 지내야 할 입장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내가 그 입장이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실제로 목숨이 걸려 있는 승부는 아니었으니까.
장기린은 자신의 경우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친우를 돕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목숨과 관련된 일이 아닌 바에야…… 식구의 안전이 더 중요한 게 당연했다.
“평범하게……? 아니, 그게…….”
철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덤불같이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정답은 아니었다.
철우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장기린의 확고부동한 눈빛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렇지…….”
철우는 결국 그렇게 뜨뜨미지근한 대답으로 끝맺었다.
“그럼 됐소. 앞으로 그 일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
“아침 식사 함께하겠소?”
“맛있어 보이는구만. 식사는 하고 왔지만, 그럼 조금만…….”
철우는 장기린이 먹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두포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두포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큼 컸지만 철우가 집어 들자 조약돌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오! 이거 맛있는데?”
철우는 두포 하나를 한입에 털어 넣듯이 삼키고는 감탄했다.
“마, 맛있어요?”
“그래. 진짜로 맛있구만. 내가 지금껏 먹어본 두포 중에 최고야.”
“헤헤.”
운찬은 예전에 철우와 안 좋은 만남이 있었던 것도 다 잊어버린 채 이젠 가족을 대하듯이 솔직하게 기뻐했다.
철우는 그런 운찬의 등을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팡팡! 때려 준 뒤 껄껄 웃으며 장기린의 옆에 의자를 놓고 털썩 걸터앉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조용히?”
“크흠, 아니, 여기로 충분해.”
철우는 어느새 두포를 세 개나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는 채로, 하지만 어딘가 진지하고 심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주변의 다른 객잔 식구들은 눈치 빠르게도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근 금선로가 떠들썩한 건 알고 있지?”
“홍화객잔의 일 말인가?”
“맞아. 그 탐화폭마인가 뭔가 하는 후레자식 때문에 만들어진 소란 말이야. 그것 때문에 지금 관부에, 옥룡파에…… 난리도 아니라고.”
그때 운찬의 어깨가 또다시 움찔 떨렸지만, 장기린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건 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한동안은 ‘절대로!’ 다른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 사건을 일으키지도 마.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고 조심해서 살란 말이야.”
철우는 씹던 두포를 꿀꺽 삼켜 버린 뒤 장기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투박한 말투 뒤로 느껴지는 진지함과 심각함.
그리고 이쪽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
그 모든 것들을 느낀 장기린은 가만히 그런 철우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충고…… 인가.’
금선로가 어수선한 지금 시점에서 절대로 사건에 휘말리지 말라는 것.
정확한 뒷사정은 모르지만, 그가 풍운객잔을 진심으로 염려해 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그건 내가 신경을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이 아닌 것 같소.”
사건을 일부러 일으킨 적은 없다.
사건이 마음대로 터졌을 뿐이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 도대체 이놈의 오래된 객잔은 매번 매번 금선로에 ‘풍운’을 몰고 오니까 말이야.”
“…….”
“최초로 이름을 지은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딱 맞는 이름을 지었단 말이야. 풍수인가? 혹시 풍수가 안 맞아서 매번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건가?”
철우는 질렸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는 ‘풍운’객잔.
장기린은 뭔가 억울했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지 알기나 해? 그리고 그 뒤에선 나도 꽤나 손을 썼다고.”
“……그런가?”
“너흰 너희의 영향력을 좀 더 생각해야 돼.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대객잔도 아닌 이런 작고 낡은 객잔이 매번 금선로를 시끌시끌하게 만든다니, 그게 사실 말이나 되는 소리야?”
덩치에 맞지 않게 투덜거리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동안 철우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철우는 그런 식으로 반쯤 장난처럼 투덜대다가 어느 순간 얼굴 가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이번엔 정말로 위험해.”
“……그렇소?”
“농담하는 게 아냐. 오대객잔이란 곳들…… 전부 뒤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조직들이 있다고. 성(城) 한두 개 정도는 기본이고, 어떤 곳은 대륙 전역에 영향을 끼칠 만한, 그런 단체들뿐이라는 거야.”
“청월루도…… 겠지?”
“…….”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 장기린이 굳이 꺼낸 화제는 둘 사이의 암묵적인 비밀 같은 거였다.
풍운객잔은 청월루의 뒷배경을 캐묻지 않는다.
대신 철우는 있는 힘껏 풍운객잔을 돕는다.
“크흠!”
철우는 어색해진 공기를 헛기침으로 무마한 뒤 억지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고 그런 단체들끼리 지금 다툼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란 말이지.”
“……그렇소?”
“그런 상황에서 잘못 발을 내딛으면 순식간에 탁류에 휘말리는 거야. 참고로 만약 그렇게 되면 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장기린은 문득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말았다.
배경은 전장.
다섯 개의 대군이 서로 창을 대치하고 있는 광경.
창끝을 서로에게 향한 채 한 발만 앞으로 내딛으면 피투성이의 전쟁이 벌어지는…… 그런 긴장감 가득한 상황.
‘그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확실히 여러모로 곤란하겠지.’
더군다나 풍운객잔에 묘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철우인만큼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간 마음의 부담이 몇 배로 커져 버릴 게 분명했다.
“어이,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앞으로 금선로에서 일어날 일에……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라고.”
“…….”
“어이, 알아들은 거야?”
“……노력하지.”
장기린은 짧게 대답했다.
“그걸로 됐어.”
씩 웃으며 두포를 다시 집어먹는 철우.
다른 식구들은 여전히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고,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아침 요리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대문 밖은 긴장감이 흐르는 전장으로 변했는지 몰라도, 지금 객잔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행복한 기운이 흘렀다.
그렇게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길 잠시.
장기린이 툭 내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철우.”
“엉?”
“아까 ‘조금만’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
얼굴이 확― 하고 붉어져 버리는 철우.
어느새 탁자 위의 두포가 담겨 있던 접시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사, 사내답지 못하게! 먹는 걸로 따지는 건가?”
“……아니, 따진다기보단 내가 먹을 게 없다는 건데.”
“그게 따지는 거잖아!”
철우가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풍운객잔은 다시 왁자지껄하고 활기찬 아침의 공기로 돌아왔다.
즐겁고 들뜬 분위기.
철우가 씩씩거리고 객잔 식구들의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가 새들의 지저귐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속에서 장기린은 철우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라…….’
뭔가를 예감하게 하는, 가슴 찌릿한 충고.
그 말은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장기린의 마음속에 남았다.
☆ ☆ ☆
철우와 함께 모두가 모여 아침 식사를 했던 날의 오후.
장기린은 오랜만에 금선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앞머리는 휘연에게 빌린 참빗으로 빗어 내려서 얌전하게 눈을 가렸고, 깔끔하게 빨아 입은 흰빛의 백창의는 햇빛을 반사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눈을 가리고 평범하게 옷을 입으니 장기린도 거리의 풍경 속에 자연스레 섞여들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집 밖으로 나와 혼자서 거리를 걷는 것은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거니와, 밖에서 할 일은 주로 객잔 식구들이 다 알아서 했기 때문에 장기린 혼자서는 굳이 바깥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가끔은 밖에 나오는 것도 좋군.’
얼굴을 간질이는 산들바람, 인적이 많지 않은 한적한 거리.
장기린은 운찬의 부탁을 받고 관문쪽의 엽사촌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 갓 잡힌 꿩이라고 했나?’
시장에선 살 수 없고 꼭 엽사촌에 가야만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재료라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운찬이 직접 가야 할 일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객잔에 손님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뿐인 숙수인 그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방 엽사라고 했던가? 미리 말이 다 되어 있으니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
운찬은 밀린 주문 때문에 지글지글 끓는 솥에서 손을 떼지 못하면서도 장기린이 직접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바쁘니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운찬은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장기린을 여전히 어려워하는 구석이 있었다.
“음?”
지금 장기린이 지나는 곳은 금선로의 상층부.
등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환하게 빛이 나는 듯한, 고급스런 전각들이 즐비해 있는 진정한 금선로였다.
장기린은 전각들을 쭉 관찰하던 도중, 문득 눈에 익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저건……?”
푸른색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단아한 청월루.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철우랑 백 총관…… 이었던가?”
장익덕을 연상시키는 거구의 호걸, 그리고 평범한 문사풍의 중년 사내.
백 총관이란 사내는 지난번 청월루에 갔을 때 철우가 소개시켜 준 적이 있어서 장기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순박한 인상의 청년.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흰색의 도복을 입고 허리춤엔 송문고검을 찼다.
그는 어색한 듯이, 또한 반갑다는 듯이 씩 웃더니, 백 총관이라는 사내와 양팔을 벌려 크게 포옹했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보고 아연한 심정에 발걸음을 멈춰 버렸다.
남성끼리의 포옹은 절친한 친우, 또는 피가 이어진 혈연을 의미한다.
청월루의 백 총관.
그와 깊은 인연을 맺은 상대가…… 장기린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니.
“백연……?”
그랬다.
청월루의 사람들과 친분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백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