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56화 (49/686)

第五十三章 ― 형제등장(兄弟登場)

“이야, 그런 거군요. 남궁세가에선 낭인 세계에까지 손을 뻗는군요.”

“칠대세가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방법입니다만, 의외로 무림문파들에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백 소협도 처음 듣지 않았습니까?”

“과연,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낭인 세계를 관리할 수가 있죠? 저도 낭인들은 몇 번 만나 봤습니다만, 다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 뿐이던데…… 아니, 일단 남궁세가에 소속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낭인이 아니게 되는 것 아닌가요?”

날씨가 화창하고 손님이 없는 한적한 오전의 시간.

백연과 남궁휴는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무림에 관련된 것이었다.

한쪽은 구대문파로 꼽히는 명문 무파 출신이고, 한쪽은 무림오대세가 중 하나인 명가의 장남이다 보니 둘 사이엔 대화가 통하는 점이 많았다.

“거기엔 다 방법이 있죠. 사실 안휘성의 낭인들은 그들이 남궁세가의 뜻대로 움직이는 줄도 모릅니다.”

“예? 그게 무슨…….”

“모두를 지배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낭인이니까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간부’ 계급 정도라면…….”

“아아, 그렇다면 안휘성의 낭인 간부들은……!”

“남궁씨족의 분가입니다. 적통이 아닌 방계의 혈족 중에 엄선된 인재가 낭인 세계에 입문해서 간부가 됩니다.”

“그런……!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더군다나 그렇게 낭인 세계에 들어가서 힘든 고생을 한 사람들이 순순히 본가의 명에 따릅니까?”

“확실히 그 부분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낭인 세계라는 게 또 만만치가 않아서 아무리 무공 실력이 뛰어나도 자칫하다간 허무하게 죽어 버리기도 하고…….”

“그렇죠. 금선로 암흑가의 실력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쪽 세계의 사람들도 절대로 만만치가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비무가 아닌, 철저한 실전으로 단련된 사람들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본 가에선 매우 엄정한 절차를 거쳐 낭인 세계에 투입할 인재들을 선별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서…….”

“……아, 과연! 그런 일까지!”

“세가의 뒷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배신이란 있을 수 없는 일로…….”

수군수군―

백연과 남궁휴는 머리를 맞댄 채 무림 세계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개봉의 개방부터 해남도의 해남파까지.

대륙의 여러 곳을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들이 즐겁게 흘러나왔다.

“현재 무림도 떠들썩합니다. 마교에 대해 아시지요?”

“천마신교 말입니까? 물론 압니다. 원래는 백련교였고 명제국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을 옹립한…….”

“예. 그때까진 그저 신비로운 종교 무파였는데, 이젠 그 세력이 너무 막강해져서……. 성격도 많이 변했지요. 그리고 당금의 황제도 마교를 좋아하지 않아 곧 팽(烹)당할 처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태종은 호불호가 명확해서 앞길에 방해되는 자들에겐 매우 냉혹무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대로죠. 하지만 마교도 만만치는 않아서, 곧바로 정계나 군부 쪽에선 세력을 빼내고 신강의 본교 쪽엔 세력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에에? 그럼 전쟁입니까?”

“아직은 모르는…… 그보다…….”

나직한 목소리의 밀도가 점점 더 진해졌다.

백연과 남궁휴는 진지한 얼굴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보다…… 남궁 소협.”

“하하, 아뇨. 휴라고 불러 주십시오. 지금은 소협이라 불릴 위치가 아닙니다.”

“그래도 소협은 소협이지요.”

“하지만…….”

“무공을 여전히 수련하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무림의 세계에 있는 것. 그리고 무림에 속해 있는 모두가 협자(俠者)들이니 소협이 맞습니다.”

“으음…….”

“검은 쥐고 있지 않지만 육체는 언제나 점점 더 단련되고 있습니다. 첫날에 본 남궁 소협과 지금 제 눈에 보이는 남궁 소협은 너무나 다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아뇨, 맞습니다.”

순박하고 서글서글한 평소와는 다른, 백연의 ‘무인으로서’의 날카로운 눈빛.

과연 일해검.

무림에서도 이름난 검사다운 탁월한 안목이었다.

실제로 남궁휴는 장기린에게 ‘걷는 법’을 배우고 수련한 뒤 날이 갈수록 스스로 강해지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백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남궁가의 검을 견식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지요?”

“보시다시피 무단으로 집을 나온 가출 청년이라 말입니다. 남궁가의 무공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거절하는 남궁휴.

그 웃음에서 알 수 없는 아픔을 느낀 백연은 포권을 풀어 버린 뒤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집을 나온 지 꽤 되셨다면…… 본가의 소식은 잘 모르시겠군요?”

“뭐, 그렇습니다. 집을 나온 지 벌써 오 년이 되어 가니까요.”

“혹시 최근에 동생분께서 무림행(武林行)을 시작하신 것 알고 계십니까?”

남궁휴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어졌다.

“동생이라면……?”

“남궁혁 공자 말입니다. 최근엔 금청검(金靑劍)이란 별호로 불리던데요.”

“아…….”

남궁혁.

세가의 둘째이자 남궁휴나 남궁연과는 달리 본처인 이화부인에게서 태어난 세가의 적통.

아버지인 창천대협 남궁무원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고 공표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명문가 출신인 이화부인을 따르는 세가 내 가신들의 알력.

주변 하인들에게서마저 느껴지는 무시와 냉대.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세가 내의 모든 관심과 애정은 남궁혁에게 향해 있었다.

휴는 그것에 대해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애정에 굶주린 편도 아니었고, 이화부인이나 세속적인 친척들의 속보이는 환대 같은 것은 거저 준다 해도 싫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어릴 적엔 순수하고 활기차던 동생 남궁혁이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점점 변해 갔다는 것이다.

“오 년 전엔 서서히 이화부인을 닮기 시작했지…….”

백연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궁 소협? 방금 뭐라고…….”

“아니,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남궁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혁에 관한 이야기는 왜……?”

“아아, 그건 말입니다. 최근에…….”

“백연.”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던 백연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객잔의 별채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새하얀 백창의를 입고,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사내.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이 어느새 그들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예……?”

백연은 잠시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장기린에게 다가갔다.

객잔 안은 손님이 없이 조용했다.

마치 바깥과는 다른 공간으로 잘려 있는 것처럼 고요한 공기가 감돌았다.

휘연은 구양화와 함께 방물점에 구경하러 갔고, 아칠, 아팔 형제는 운찬과 함께 필요한 게 있다며 시장에 나간 상황.

거기서 휴는 구석에 앉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휴.”

“예?”

“주방에 가 있어.”

“……예.”

휴는 조금 실망한 듯한 모습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저, 객주님, 무슨 일이신지……?”

백연은 순박한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제 낮에 관문 쪽으로 갈 일이 있었소.”

“……예?”

“그리고 우연히 청월루의 앞에서 당신을 봤지. 백 총관이라는 사람과 포옹을 하던데.”

“……!!”

백연이 놀란 듯 입을 벌리더니, 이내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장기린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백연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현재 이유없이 풍운객잔에서 장기로 투숙하고 있는 백연.

그가 만약 청월루와 깊은 관계가 있다면 반드시 알아야 했다.

더군다나 인연이 있는 사람이 풍운객잔에 호의적인 철우가 아니라 백 총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지난번에 청월루가 풍운객잔을 돕지 않게 만들었던 주역이 바로 백 총관이겠지.’

철우는 말하지 않았지만 장기린은 그때의 상황만으로도 이미 누구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 철우가 초청승부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얼마나 큰소리를 쳤던가.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청월루에서 유일하게 철우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 즉 백 총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저, 그게…… 저기…….”

백연은 눈동자를 좌우로 흔들며 고민하더니,

“휴우, 할 수 없죠.”

한숨을 내쉬며 변명하길 포기했다.

“사실, 그분은 제 숙부님이십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제 아버님의 동생이시죠.”

“숙부……? 백 총관이?”

“예,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같은 백 씨.

외모 또한 특색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외모라는 데서 비슷한 점이 있었다.

“딱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굳이 먼저 밝힐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게다가 숙부님과는 꽤나 어색한 관계라서 말입니다.”

“가족인데 별로 안 친한가 보군.”

“예에, 저는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무당파에 맡겨져서 말입니다. 숙부님을 찾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화 매네 집안의 사람들이 더욱 가족처럼 느껴진달까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백연.

말은 다 못했지만 어딘가 가정 내에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 보였다.

“그래, 알겠소.”

“그럼 용건은……?”

“아아, 이걸로 되었소. 손님이 온 것 같기도 하고.”

“아…….”

잠시 의아해하던 백연은 이내 장기린이 느낀 기척과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려 풍운객잔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활기차면서 가벼운 발소리가 객잔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연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어떻게 나보다 빨리……?”

“응? 뭐라고 했소?”

“아, 아닙니다.”

백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사이 객잔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서는 푸른색 무복의 미청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청년처럼 모습을 가장한 미녀였다.

“안녕하세요, 장 가가.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찾는 남궁연.

지적인 눈매엔 웬일로 다급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주방에…….”

“연―!”

목소리만 듣고도 어떻게 알았는지 주방 밖으로 뛰쳐나오는 남궁휴.

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좋아하는 남궁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평소의 차분함을 버리고 후다닥 뛰어서 다가왔다.

“연!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잠깐!”

퍽!

“켁……!”

남궁연은 달려와 부둥켜안으려는 휴의 명치끝을 발로 차 버렸다.

“너, 너무하잖아, 동생?”

“조금쯤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세요, 오라버니.”

“그, 그런……!”

“한마디만 할게요.”

“어……?”

다부진 표정, 냉정한 눈빛, 그리고 심기가 불편한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궁연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뭐……?”

“오늘부터 대략 열흘간. 내가 말할 때까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객잔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어? 그게 무슨…….”

“이유는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하세요! 알았죠?”

강압적이면서 일방적인 명령.

하지만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왠지 모를 위기감과 초조함 때문에 남궁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분명히 말했어요! 절대. 절대. 절대로! 객잔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구요!”

“그런데 아침에 재료를 사 오는 건…….”

“배달을 부탁하세요.”

“어? 아니,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아침마다 앞마당도 쓸어야 하고…….”

“아칠과 아팔이 도와줄 거예요. 한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하세요. 명령이에요.”

“……명령?!”

“네, 명령이에요.”

단호하게 선언하는 남궁연.

남궁휴가 아연하게 굳어 있는 사이, 장기린은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지?”

“아, 그건…….”

남궁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대답해 드리기가 곤란하네요.”

“……흐음.”

“죄송해요.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라버니는 지금 절대로 객잔 밖에 나가서는 안 되요.”

남궁연의 눈빛에는 미안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철우가 했던 말과 같은 종류인가?’

홍화객잔과 청풍객잔 사이의 일로 금선로가 위험하게 들끓고 있다는 것.

그것에 대한 걱정인가 싶었다.

“죄송할 것까진 없지만 상황은 좀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데. 외출 금지는 휴에게만 적용되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예? 아, 네. 괜찮아요. 뭐랄까…… 오라버니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경우라서…….”

“음, 무슨 소리야?”

“다른 분들은 괜찮아요. 오라버니만 당분간 외출을 하지 않으면 돼요.”

남궁연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그 이상은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그런가…….”

순순히 납득을 하는 것은 장기린 혼자뿐.

“어째서? 어째서 외출을 하면 안 되는 거지?! 연아, 이건 너무한다고. 어째서 내가 갑자기 유폐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오라버니는 조용히 하세요!”

“으윽……!”

휴는 억울해하며 투덜거렸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남궁연에게 한참 동안이나 잔소리를 들었다.

‘뭔가가 일어나는군.’

철우의 충고, 백연의 친척, 그리고 남궁연의 당부까지.

항주 금선로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장기린은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 ☆ ☆

다음날 오전.

주방에서 한참 동안이나 재료를 다듬는 일을 도와주다가 나온 장기린은 대문 뒤에서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애처럼 빠끔히 밖을 내다보며 번뇌하고 있는 남궁휴를 발견했다.

“으, 으으…….”

신음을 흘리며 한 번 밖을 내다보고,

“으으…….”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휴?”

의아한 마음에 장기린이 그를 불러 봤지만 깊은 상념에 빠진 휴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휴는 계속해서 대문 밖을 힐끔거리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청소해야 하는데…… 대문 앞을 쓸어야 하는데……. 아아, 아칠, 아팔 만으로는 깨끗하게 치울 수가 없는데…….”

“휴……?”

“그렇다고 연이와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으으, 이걸 어쩌지……?”

그런가.

청소가 그렇게나 중요했던가?

장기린은 그 모습에 솔직히 놀라 버렸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무는 남궁휴는 정말로 걱정스럽고 초조해 보였다. 그는 남궁휴가 이 정도로 자신의 직무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뭔가 미묘한데…….’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오묘한 기분이었다.

“아아! 아침에 목욕을 다녀오는 린린이랑 소화를 봐야 하는데. 창해루의 미미가 선물을 갖고 온다고 했는데……! 운중루의 이월이가 만나자고 그랬는데……!”

아쉬움에 속이 타들어 가는 목소리.

남궁휴가 일일천추(一日千秋)의 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장기린도 그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휴.”

“으으…….”

“휴!”

“어? 아, 엇! 예!”

휴가 머리가 쭈뼛 설 만큼 놀라며 자세를 똑바로 했다.

“누구 기다리나?”

“……!!”

평소의 능글능글하며 여유있는 태도는 다 어디에 내다 버렸는지, 휴는 긴장해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잔뜩 얼어 있는 태도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그게, 저기…….”

휴는 이런 순수한 태도를 장기린에게만 가끔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긴장을 풀었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능글거리며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것보단 화났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똑똑한 동생의 말을 듣는 것이 좋지 않겠냐?”

“……예.”

“약속대로 열흘간은 대문 밖으로 나가지 마.”

“예.”

고개를 숙이며 시무룩해지는 휴에게 장기린은 꼿꼿하게 펼친 손바닥으로 장타를 날려 주었다.

빡!

“으억……!”

회피 동작조차 취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는 휴.

곧바로 다시 벌떡 일어나 얼얼한 머리를 문지르는 휴에게 장기린은 냉랭하게 꾸짖었다.

“너무 여자만 밝히지 말고.”

“윽! 예, 죄송합니다.”

휴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 ☆ ☆

금선로의 남쪽 관문은 광동과 안휘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이나 물품들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특히 가구나 대청을 만드는 데 쓰는 광동의 적목(赤木)은 유명해서 남문에서 목재를 실은 사두마차가 들어오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상해가 있는 동문이나 북경으로 연결된 북문만큼 붐비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이 되면 상당한 사람들이 몰리곤 했다.

“워이―! 저리 비키시오! 세가(世家)의 행차요!”

히히힝―!

쌍두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 말이 위풍당당하게 울부짖으며 몰려 있는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고급스런 목재로 만들어진 마차.

웬만한 사람의 키만큼 큰 바퀴 두 개가 덜컹거리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쌍두마차의 뒤쪽엔 두 개의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맹(盟)’, 다른 하나는 ‘안(安)’이었다.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마차와 깃발을 보고는 다들 두말하지 않고 옆으로 순순히 비켜서 주었다.

그 깃발이 의미하는 단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됐어. 여기서 내릴래.”

“예? 저기…… 하지만 공자님, 여기는 아직 금선로의 초입밖에 안 돼서……. 목적지까지는 꽤 걸으셔야 할 텐데요.”

“아니, 됐어. 이참에 대륙제일이라는 금선로 구경이나 제대로 하면 되지. 그렇지 않나, 문엽, 오우?”

황족이 부럽지 않을 만큼 화려한 푸른색 비단 무복을 걸친 잘생긴 청년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생 한 번 안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새하얀 얼굴. 키는 제법 훤칠하고 눈매가 조금 사납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딜가도 눈에 띌 법한 준수한 외모였는데, 허리엔 값비싸 보이는 보검을 차고 있었다.

청년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뒤로 두 사람이 따라 내렸다.

한 명은 약간 호리호리한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녹색 무복의 청년.

다른 한 명은 상당한 거구를 가진 강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쯧, 뭐, 상관없나? 좋을 대로 하라고, 혁.”

습관적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은 사천당문의 셋째 공자인 당문엽(唐門葉).

펑퍼짐한 소맷자락 사이로 가끔 칼날이 반사하는 빛이 번뜩였다.

“아아, 나도 상관없다. 뭐, 잔뜩 날뛸 만한 일거리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크게 하품을 하며 등 뒤에 찬 박도를 습관적으로 손으로 툭툭 두드리는 거한.

하북팽가의 둘째 팽오우(彭烏牛)는 말린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험악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청독수(靑毒手) 당문엽.

참청도(斬晴刀) 팽오우.

그리고 마차에서 가장 처음에 내렸던 금청검(金靑劍) 남궁혁까지.

무림에선 각각 명문 무림세가 출신인 이 세 사람을 일컬어 신진삼청(新進三靑)이라 불렀다.

특히 사천, 하남, 안휘에선 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다만 그 명성은 좋은 쪽이 아니었다.

명문세가의 도련님.

좋은 환경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으나, 아직 무공도 성품도 많이 부족한 세 명의 청년.

그런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뭉쳤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세 사람은 각각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인근 지역의 무림문파에 행패를 부려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예사였고, 산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표국이나 관청을 무시하고 모욕해서 싸움을 벌인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철부지에 사고뭉치.

거기에 어쭙잖은 공명심으로 뭔가 명예를 얻을 만한 일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실력이 없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신진삼청은 다들 영약을 밥처럼 먹고 명가의 집중적인 후원을 받아 수련했기에 일류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행패를 당하는 입장에 있어선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란 말이 그 이상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신진삼청에게 원한을 가진 소문파들이 몇 번이고 그들에게 무림의 쓴맛을 보여 주려고 했지만, 다들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문엽이 비범한 실력으로 독을 뿌리고, 팽오우가 타고난 신력을 살려 오호도(五虎刀)를 난무하며 주변을 휘몰아친다. 그리고 남궁혁이 창궁무애검법으로 날렵하게 뛰어들어 적들에게 최후의 비수를 꽂는 것이다.

그들은 부잣집 도련님들답지 않게 살수(殺手)를 쓰는 것에 익숙했다.

실력이 있고, 거기에 손을 쓰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당해내기 어려운 법.

그들 때문에 분루를 삼켜야만 했던 소문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자, 그럼 좀 걸어 볼까?”

남궁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손은 뒷짐을 진 채 오만하게 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

가끔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화려한 복색의 세 사람을 주시했지만 사람을 깔보는 냉랭한 눈빛에 너도나도 시선을 돌려 버렸다.

“흥! 역시 밤이 아니면 여기도 별 볼일 없구만.”

남궁혁은 혀를 끌끌 찼다.

“흐음, 낮에는 보통 객잔의 하인들이나 시비들만 돌아다니지.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아아, 그럼 이런 천민들이랑 같은 곳에 있어야 하는 건가? 하다못해 어여쁜 기녀들이라도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것도 밤이나 돼야 볼 수 있지. 여기가 사천이었다면 우리들 말고는 다 쫓아내 버렸을 텐데…….”

“하하, 문엽. 그건 너무 심하다고. 관청에서 항의할 거야.”

“쯧쯧, 항의할 테면 하라지. 어차피 사천의 지사가 당가타의 식솔일세. 그런 것 따위 소리소문없이 무마할 수 있어.”

“하핫! 역시 사천당가, 그리고 문엽이야. 대범하기로는 따를 수가 없구만.”

남궁혁은 오만하게 웃는 당문엽을 보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거대 세가의 후계라는 신분은 일국의 왕자와 같은 위치였다. 즉,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행패를 부려도 웬만해서는 그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나저나…… 혁, 이곳엔 도대체 왜 온 거지? 북경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굳이 올 이유가 있나?”

“아아, 있지, 있어.”

“어떤……?”

나른하게 걷고 있던 팽오우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남궁혁은 씩 웃으며 허리에 찬 금색의 검집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남궁혁에게 금청검이라는 별호를 안겨 준 화려한 검이 그의 손짓에 따라 흔들렸다.

이름하야 청운검(靑雲劍).

남궁세가의 ‘적통’ 후계자만이 지닐 수 있는 혈통의 상징이었다.

“그리운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그리운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배다른 누이가 항주에 ‘귀향’을 가 있다고 했던가? 여인임에도 굳이 떼를 써서 뇌안각에 들어갔다고 했지?”

“아아,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었나?”

“음, 특이한 경우라서 말이지. 우리 팽가에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팽오우는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팽가는 무림세가들 중에서도 호걸이 많기로 소문난 가문.

여인들 역시 호걸의 피를 타고나서 드세고 괄괄하기 그지없으나 그래도 가문에서 어떤 ‘직함’을 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하긴, 흔한 일은 아니지.’

남궁혁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무림세가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의 길은 둘뿐이다.

가문을 위해 부모가 정해 준 곳으로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피나는 노력으로 무공을 닦아 무림에 나가는 것.

하지만 무림에 나가더라도 대부분의 여인들은 무림에서 만난 다른 가문의 자제와 혼인을 하거나, 아니면 거친 생활에 질려 가문으로 돌아와 결국 가문이 정해 준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어느 쪽이든 혼인을 하고 집안 살림을 맡게 된다는 것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가에선 여인들에겐 내방을 관리하는 안주인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직분은 절대로 주지 않았다.

어차피 혼인을 하고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될 것을 알기에, 중요한 정보나 가문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연 누이가 그렇게 유명했나?’

남궁혁도 대충 상상은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팽오우의 입으로 듣고 보니 새삼 대단한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온갖 방해물이 기다리고 있는 가시밭길을 굳이 걸어가는 선구자였다.

“그것도 그렇지. 온 김에 인사나 해 두는 게 좋겠어.”

남궁휴는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흐음…….”

“왜 그러지, 문엽?”

“아니, 새삼 남궁세가는 마음이 넓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우리 당가였다면 천비의 자식들은 본가의 자식들에겐 말도 못 붙였을 텐데 말이야.”

“아…….”

“방계의 혈통들은 다들 본가의 혈통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 가문의 문규라서.”

“…….”

“크흠!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너무 내 말에 괘념치 말게나. 세상엔 여러 가지 규칙이 있는 법이니까.”

급격히 어두워지는 남궁혁의 표정을 살핀 당문엽은 재빨리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하지만 남궁혁의 표정은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당문엽의 말은 무림세가의 세계에선 지극히 당연한 상식.

게다가 그의 모친인 이화부인은 틈이 날 때마다 그에게 이야기했다.

“천한 피를 이은 것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거라! 그 망종은 물론이고, 연이라는 계집과도 절대 상종하지 마! 너는 이 세가에 하나뿐인 적통이다! 알겠니?”

“어머니…….”

남궁혁은 눈빛을 싸늘하게 식히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그랬나, 혁?”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화부인과 그 외의 수많은 가신들의 충고는 남궁혁의 심성을 바꿔 놓았다. 어릴 적에 아무리 순수하고 해맑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더라도, 평생 동안 옆에서 그런 종류의 교육을 받으면 결국 성품이 변하는 법이다.

아버지인 창천대협 남궁무원이 좀 더 가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격이었다면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남궁혁은 이화부인 쪽을 좀 더 많이 닮아 버렸다.

‘그래, 연 누이는 천비의 소생이다. 나와는 피가 달라.’

어머니를 제외하곤 집안에서 유일하게 남궁혁을 혼내고 가르쳤던 남궁연.

뇌안각에 들어가면서 관계가 끊어지긴 했지만, 그동안은 누이로서 애틋한 남매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당문엽도 그렇고, 팽오우도 그렇듯이.

천비의 소생이자 언젠가 시집을 가서 다른 집안의 사람이 될 여인은 그가 애정을 가질 대상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남궁연이 애정을 갖고 아끼는 사람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그래, 그거였어.”

“……혁, 오늘따라 혼잣말이 많은데?”

“아아, 미안해. 옛 생각이 좀 나서 말이야.”

남궁혁은 상념을 끊고 얼굴의 표정을 평소대로 되돌렸다.

다혈질에 남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는 오만한 모습.

그게 그의 ‘평범한 모습’이었다.

“내가 굳이 방향을 바꿔서 이곳에 온 것은…… 꼭 봐야만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누구를 말하는 건가?”

당문엽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남궁혁은 얼굴 가득 경멸의 빛을 띤 채 답했다.

“있어. 아주 하찮은…… 하인이지.”

“하인? 하인이라고? 그 청소하고 잡일을 하는 하인?”

“그래, 하인이야.”

“하인 따위를 보기 위해 방향을 틀어서 굳이 항주에 들렀다는 건가?”

당문엽과 팽오우는 서로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그들은 남궁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듣기엔 이상하겠지만, 사실이야. 숙부님께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거든.”

“흥미로운 이야기라니…….”

“하하, 조금만 더 어울려 달라고. 그 인간이 하인이 되어 있는 꼴을 꼭 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거든.”

“…….”

남궁혁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떠올랐다.

당문엽과 팽오우는 서로를 다시 한 번 쳐다본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혁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할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당문엽과 팽오우는 가주의 직계 혈족이지만 후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혁은 명실공히 남궁세가의 유일한 후계자.

신진삼청의 대장이나 다름없는 남궁혁이 이 정도로 고집을 세울 땐 순순히 그 말을 들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쯧, 할 수 없지.”

“뭐, 그게 혁이 원하는 거라면…….”

두 사람이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럼, 일단 어디의 하인으로 있는지 알아보러 가 볼까?”

“알아볼 만한 곳이 있나?”

“아아, 여기 항주에 딱 한 곳 있지. 순순히 협조해 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남궁혁은 어리둥절해 있는 두 사람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오랜만이군요.”

금선로의 끝자락에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낡은 건물.

적당히 돈을 모은 시전 상인이나 살 법한 집에 들어온 세 사람은 어떤 것에도 몸을 닿게 하기 싫다는 듯이 입구 근처에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낡을 대로 낡아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있는 건물.

자신들의 ‘방 하나’만 한 집은 그들의 눈으로 보기엔 거지 소굴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당문엽은 항상 휴대하는 녹색의 부채를 쫙 펼친 채 노골적으로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쿨럭……! 쿨럭, 쿨럭……!”

“…….”

세 사람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기분 탓인지 코끝에서 매캐하고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거기에 뇌안각 항주 지부의 정보 수집을 통괄하는 방노가 당장에라도 피를 토할 듯 밭은기침을 했다.

당문엽은 지금의 상황이 더더욱 마음에 안 드는지 신경질적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뭐, 이딴 곳에 지부가 있는 거지……?”

“이봐, 혁. 혹시 세가에 돈이 부족한 건가? 내가 팽가에 연락해서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지 물어봐 줄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투덜거리는 당문엽과 팽오우.

고생이란 것을 안 해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들의 행동이었다.

그나마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남궁혁이 한 수 위라고 해야 할까.

“하아…….”

남궁연은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북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올 줄이야…….”

남궁연은 미리 휴에게 열흘간 출입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휴의 모습을 이 철없고 오만한 애송이 셋에게 보여 주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우리가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군요.”

“아아, 그야 당연하지. 신진삼청이 다녀가는 곳마다 워낙 시끄러워서 말이야. 실제로 그 뒤처리 때문에 세가의 돈도 엄청나게 쓰고 있거든.”

“…….”

“차는 권할 필요 없지? 보아하니 다들 자리에 앉기도 싫은 것 같은데.”

남궁연은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며 털썩 의자에 앉았다.

보란 듯한 행동.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런…….”

“으득……!”

흥분한 세 사람의 얼굴이 대번에 벌개졌으나, 남궁연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그녀의 부하 노인에게 손짓했다.

“방노.”

“예, 지부장님.”

옆에서 기침을 쿨럭이던 방노가 미리 화로 위에서 끓이고 있던 차를 한 잔 내놓았다.

남궁연은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다리를 살짝 꼬더니, 차를 받아 들고 홀짝홀짝 입을 적셨다.

남자 같은 복색을 하고 머리엔 영웅건까지 두른 남궁연이 그런 자세로 세 사람을 노려보자 은근한 위압감이 풍겨졌다,

“크윽……!”

“으으……!”

당문엽과 팽오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분노를 겨우겨우 눌러 참고 있었다.

차를 권하지 않는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조차 없다.

평생을 천둥벌거숭이마냥 무서운 것 없이 살아온 그들이 지금껏 이런 노골적인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유수한 명문무파의 장로들조차 그들에게 이런 태도는 보인 적이 없었다.

“연 누이.”

“그래도 누이라고는 불러 주는구나?”

“뭔가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군요.”

남궁혁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위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궁연은 그 얼굴을 보자 더욱더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앞에 놓인 탁자에 찻잔을 소리 나도록 탁! 내려놓았다.

“마음에 안 들어.”

“무엇이 말입니까?”

“네 그 가식적인 웃음 말이야. 게다가 말투는 점점 이화부인을 닮아가고……. 머릿속은 어떻니? 거긴 아직 괜찮은 거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연 누이.”

“전혀. 애초에 육 년간 네가 다른 형제에게 연락 한 번 안 했을 때부터 우리 사이는 비틀어진 거야.”

남궁연은 남궁혁, 당문엽, 팽오우를 앞에 두고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당당하게 노려봤다.

남궁휴가 집안에서 쫓겨나듯이 가출을 하고, 남궁연이 뇌안각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힘든 시간들을 보내던 시절.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하고 형과 누나를 잘 따르는 ‘동생’이었던 남궁혁은 마치 허물을 벗어던지듯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이 되어 버렸다.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한 성격으로.

남궁무원의 정부인인 이화부인과 똑같은 성격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아니, 변한 게 아니라…… 어쩌면 본색이 드러났을 뿐일지도 모르지.’

그만큼 남궁혁의 변화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남궁휴가 쫓겨났을 때, 그리고 남궁연이 이화부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뇌안각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그때 남궁휴가 지었던 경멸 섞인 표정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젠장, 웬만하면 참아 보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남궁휴는 허물을 벗듯이 가식적인 웃음을 순식간에 날려 버리고 오만한 눈빛으로 남궁연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가면을 벗는구나.”

“친구들 앞이라 그래도 예의를 차리려고 했는데,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지? 반 이상이 천한 피라는 것을 일부러 보여 주려는 셈이야? 그걸로 날 모욕하려고?”

“천한 피? 모욕? 하여간 생각이 그 정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하긴 어머니가 그런 분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감히 어머니를 함부로 언급하지 마.”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

의자에 앉은 남궁연과 제자리에 서 있는 남궁혁,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침묵이 흘렀다.

양쪽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첨예한 대립의 끝에서 남궁연이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그래서? 그 ‘천한 피’를 찾아온 이유는?”

“하?”

남궁혁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 난 남궁세가의 후계자야. 좀 더 공손히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따지면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야. 게다가 뇌안각 항주 지부의 지부장이고.”

“천비의 소생 주제에 누나라고? 게다가 이깟 다 쓰러져 가는 지부 하나 맡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자랑이라니, 설마. 사실 너는 아직 아버님께 인정받지 못한 후계자 아냐? 난 적어도 아버님께 정식으로 이 지부를 맡는 것을 인정받았어. 그런 녀석한테 자랑을 해서 뭐 할까.”

“……!!”

“나중에 진짜로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그땐 편하게 대하라고 해도 알아서 깍듯하게 대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십대에 처음 뇌안각에 들어간 뒤로 육 년.

그동안 무림에서 치열한 정보전을 일상으로 겪으며 일해 온 실무 경험은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남궁혁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남궁연은 지적이면서도 당당한 눈빛으로 능숙하게 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공격한 것이다.

“…….”

하지만 움찔하는 것도 잠시.

이내 좋은 수를 떠올린 남궁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깐, 잠깐. 그래,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 이야기보단 내가 왜 여기에 왔느냐가 중요한 거 아냐?”

“…….”

“내가 여기에 온 건 숙부님으로부터 이곳에 내가 아는 하인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거든. 혹시 알고 있으려나?”

이 세상에 남궁혁이 아는 하인이 몇이나 될까.

남궁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남궁혁과 다른 두 사람이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뒤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하인이라니?”

“……모르는 척하겠다는 거야?”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거야. 금선로에 하인이 몇 명인데……. 게다가 그중에 네가 알 만한 하인이 있을까?”

남궁혁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끝까지 해 보자, 이거지?”

“글쎄? 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짜증나게 능청스럽구만. 난 지금 남궁세가의 후계자로서 정보를 요구하고 있는 거야. 뇌안각의 한낱 지부장이라면 내 요구를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흐응.”

“내 말이 틀려?”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궁혁이 이젠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후계자 운운하면서 공적인 관계를 끄집어낸 것은 말하자면 최후통첩이었다.

이 이상 화나게 하면 보복할 것이라는.

남궁혁은 두 친구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해서 지금 눈앞에 있는 건방진 여자를 무릎 꿇리지 않으면 성질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하아…….”

하지만 그런 남궁혁을 보며 비웃음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는 남궁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남궁연의 얼굴에서 평소의 그녀에게서라면 절대로 볼 수 없을 차갑고 오만한 표정이 드러났다.

지적이고 차분하며 어느 정도 애교도 있던 ‘남궁휴의 동생 남궁연’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공적인 업무를 수행 중인 뇌안각 항주 지부장.

그녀는 철없는 어린애를 대하듯이 남궁혁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 가주지령도 못 받았고, 더군다나 무림에서 말썽이나 일으키고 있는 본가의 혈족 따위에게 세가의 율법상으론 아무런 권한도 없어.”

“뭣……!”

“네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건 순전히 지부장의 ‘호의’ 덕분이야.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너한테 호의가 없거든? 그러니 그게 어떤 정보든 간에 너한테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남궁혁의 오른쪽 볼이 분노로 꿈틀거린다.

“이, 감히……!”

수치를 당했다.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자연히 그의 손이 허리에 찬 청운검으로 향했으나…….

“커험!”

그 순간, 조용히 남궁연의 뒤에 시립해 있던 방노가 경고를 하듯 헛기침을 하며 희끗한 눈썹 아래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남궁혁을 노려봤다.

등골이 섬뜩한 느낌.

목에 칼날이 다가와 있는 듯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

뿌득.

‘이 영감, 의외로 제법이다.’

남궁혁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고 이를 갈며 검에서 다시 손을 떼어 냈다.

물론 그의 뒤에는 당문엽도 있고 팽오우도 있으니 싸움이 일어나면 절대로 질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가문의 혈족을 상대로 칼부림을 하는 것은 단순히 방탕하게 행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남궁연에다 저런 만만치 않은 노인까지 함께라면 아무리 신진삼청 세 사람이 강하다 해도 흔적도 없이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 누이.”

남궁혁은 한발 물러서면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화를 억눌렀다.

“당신은 항상 그래 왔지. 그 열화남인가 뭔가로 불린다는 가문의 수치를 끝까지 감싸고돌았어. 아마 뇌안각에 들어간 것도 그 인간을 돕기 위해서겠지?”

“…….”

“그래도 반이나마 같은 피가 섞인 마지막 온정으로 충고하는 건데…… 내가 가주의 위(位)에 오르는 것도 머지않았어. 그전에 어느 쪽 인간이 될 건지 확실하게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그때 가서 상황을 바꾸려고 하면 이미 늦은 거니까 말이야. 세가 내에서 찍히면 좋게 못 끝난다, 이거야.”

남궁혁은 파락호마냥 노골적으로 위협하면서 휙 하고 등을 돌렸다.

“아, 그리고 그 하인 말인데, 뇌안각이 돕지 않아도 내가 찾을 거야.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할 테니까 말이야. 하하! 거기 처박혀서 지켜보기나 하라고.”

그 말을 끝으로 남궁혁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고, 당문엽과 팽오우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남궁연을 노려보고는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쾅!

문이 닫힌 뒤, 남궁연은 당당하게 세웠던 턱끝을 내리고 침중한 얼굴이 되어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그녀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저들이 훗날 ‘성장했을 때’, 그때의 미래가 두려워서였다.

“방노…….”

“예.”

“큰일이야. 남궁세가에서 뱀 같은 자식이 나오고 말았어. 그것도 남궁가의 적자가 저런 협잡꾼에 비열한 망종으로…….”

남궁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세로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타탁! 타탁!

화로에서는 불꽃이 튀는 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방노는 그저 옆에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마치 그게 그의 할 일이라는 듯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다.

“……역시, 오라버니를 포기할 수는 없겠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던 남궁연은 어딘가 개운해진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난 남궁세가를 사랑해. 존경하는 아버님, 그리고 내 어머니가 임종의 순간까지 남아 있었던 장소, 오라버니와 함께 자라온 집……. 그러니 앞으로도 내 가문은 무사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

“지부장님……!”

“응, 그래. 그렇게 결정했어.”

방노의 노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눈물 따윈 말라붙을 대로 말라붙은 남궁가의 늙은 노신(老臣)이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남궁연을 보면서 코끝이 찡해 오는 감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주인 남궁무원의 명령으로 어린 시절부터 남궁연을 보필한 그였기에 이 순간이 더욱 특별했다.

모진 삶을 살아온 젊은 여인이 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냔 말이다.

“이 방노,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의 대업을 돕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방노를 보며 남궁연은 더더욱 자신의 중대한 결심을 공고히 했다.

“남궁혁이 가주에 오르는 것만은…… 절대로 볼 수 없어.”

가문을 만드는 것엔 삼대(三代),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엔 일대(一代)면 족하다.

남궁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해야겠어, 방노.”

“예.”

“아버…… 아니, 가주님과 연락을 취해 줘. 가능한 한 빨리 만나 뵙고 싶다고.”

“알겠습니다.”

방노는 잠시 주름진 손으로 눈물을 훔친 뒤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건물 안에서 사라졌다. 겉으로 보이는 노인의 외모와는 너무나 다른 활기찬 움직임이었다.

끼이익― 쿵!

남궁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서서히 사람들이 늘기 시작하는 금선로의 풍경을 바라봤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금선로.

지금 이곳에서도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꼭, 바꿔 놓고야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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