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57화 (115/686)

第五十四章 ― 탕아불변(蕩兒不變)

“객주님!”

주방에서 운찬의 재료 손질을 도와주고 나오던 장기린은 밝고 활기찬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연노랑 빛의 경장을 입고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등 뒤에서 하나로 묶었다. 뽀얀 피부에 큰 눈을 가진 미인이 햇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웃고 있었다.

“휘연?”

“옷매무새가 흐트러지셨어요.”

“그래? 어디가 흐트러졌지?”

주방일을 했으니 소매나 어깨 부분이 흐트러졌겠다 싶어서 정리를 하려는데, 가늘고 긴 손가락이 얼굴로 다가왔다.

“어…….”

장기린이 낼 수 있던 말은 얼빠진 신음 소리뿐.

어느새 가지런해진 앞머리가 코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목덜미와 앞섶에서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따뜻한 숨결.

콧속으로 파고드는 은은한 연꽃향.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장기린은 뻣뻣하게 경직된 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제 됐어?”

“아뇨, 아직이요.”

하지만 장기린이 굳어진 것과는 달리 휘연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녀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오히려 즐거운 듯이 그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만져 주고 있었다.

“객주님.”

“음?”

휘연은 옷을 만지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 뭐예요?”

“……!!”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다가 강제로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처럼, 장기린은 급격히 현실감을 되찾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 그게…….”

목소리가 너무 딱딱했던 것일까.

휘연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하지만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물었다.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객주님이 십 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저기, 지금까지도 여, 연인을 만들지 않는다고…….”

살짝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묻는 휘연.

장기린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현백이지?”

“에……?!”

“현백에게 들은 거지?”

“그, 글쎄요……?”

휘연은 시선을 살며시 옆으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여전히 거짓말에는 서투른 모습.

장기린은 그 모습에 속으로 살짝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을 거야.”

“……왜요?”

“왜냐니? 내가 꼭 모든 걸 휘연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잖아.”

“아……!”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했으나, 어째선지 휘연은 그 말에 화가 난 듯 보였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엿보였다. 꾹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양손에 핏기가 가시도록 주먹을 꽉 움켜쥔 휘연의 모습을 보자, 장기린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휘연?”

“제가 객주님께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구요.”

장기린은 눈앞에서 호수 같은 눈망울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자 급격히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렇지는…….”

“그럼 말씀해 주세요.”

“뭐를?”

“십 년 전 이야기요.”

“…….”

“역시,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저라는 존재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십 년 전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 달라니까요.”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저도 여자니까요. 감으로 알아요.”

“안 돼. 말하기 싫어.”

“말해 줘요.”

“싫어.”

“말해 줘요.”

“싫다니까.”

“숨길 만한 이유가 있나요?”

“……그럴 리가.”

“그럼 말해 달라니까요―!”

두 사람은 아웅다웅하면서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편,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운찬과 아칠, 아팔 형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고도 연인 사이는 아니라니.”

“누가 봐도 연인인데요.”

“맞아요, 맞아. 저것 봐요. 주변에 연분홍 빛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 같지 않은가요?”

운찬은 뭔가에 해탈한 듯 공허한 눈빛으로, 그리고 아칠, 아팔은 선망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휘연이 얼굴을 붉힌 채 언성을 높이고, 장기린도 딱딱한 표정으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싸운다는 것은, 절대로 이만한 일로 심각한 상황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의식 밑바닥엔 그만한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원래 싸우는 것도 사이가 좋아야 싸우는 거라구요.”

“게다가 그전에는 자연스럽게 옷매무새를 고쳐 줬고…….”

“저 정도면 연인이 아니라 부부지.”

“그치? 그치?”

“그런데도 부정을 하고 있으니, 갈 길이 멀다고나 할까…….”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

아칠과 아팔은 눈동자를 빛내며 장기린과 휘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아, 그냥 빨리 사귀어 버리면 좋을 텐데.”

운찬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칠과 아팔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득도한 도사 같은 분위기.”

“숙수님, 방금 굉장히 경험이 풍부한 사람처럼 들렸어요.”

운찬은 그 말에 어떠한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희도 나중에 원한이 사무쳐서 뼈에 새겨질 정도의 악녀를 만나서 사랑 한 번 해 봐. 시시한 연애 백 번을 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경험이 될 거야.”

“아…… 하하.”

애매하게 웃는 두 사람.

운찬은 분개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것을 추억하는 듯한 미묘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것도 다 한때야.”

“수, 숙수님?”

“나중에 잘되고 나면, ‘아, 그땐 왜 그렇게 유치하게 고집을 부렸을까’ 하고 후회하게 된다고.”

“하, 하하…….”

“그러니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며 좋을 텐데.”

운찬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노인처럼 퇴색된 눈빛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하…….”

“에에…….”

해탈해 버린 운찬을 보며 난감해하던 아칠과 아팔.

두 사람은 결국 흥, 하고 서로 등을 돌려 버린 채로도 여전히 다투고 있는 휘연과 장기린을 잠시 지켜보다가 문득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정문 쪽이 시끄럽네?”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만 나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칠과 아팔은 또다른 호기심을 느끼고 종종걸음으로 객잔 안을 가로질렀다.

금새 눈앞으로 다가온 정문에는…….

“휴 형?”

“게다가 저건…… 기녀 누나들?”

아칠과 아팔의 눈이 동그래졌다.

휴가 인기가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휴는 바닥을 쓸던 싸리비를 손에 든 채로 무려 다섯 명이 넘는 아리따운 기녀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그것도 여러 기녀들과 동시에, 공평하게 대화를 나누는 휴의 화술은 그야말로 신기(神技)라 불러도 무방할 듯 보였다.

“우와, 정말 대단해.”

“역시 열화남. 항주 최고의 화화공자라더니, 허명이 아닌 거야.”

“음음, 정말 그래.”

“저런 사람과 인기 승부에서 동점이었다니. 강 숙수님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칠과 아팔은 즐거운 기분으로 휴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한창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참새처럼 밝게 재잘대던 기녀들의 목소리가 딱 그쳤다.

가녀리고 우아한 기녀들이 놀라서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를 비싼 비단 무복으로 몸을 감싼 젊은 사내 세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

탄성을 발하며 제자리에서 굳어 버리는 휴.

기녀들을 상대할 때의 그 여유롭고 능숙한 화술은 다 어디로 갔는지, 휴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채 입술 밖으로 단 한 마디도 꺼내질 못하고 있었다.

“하하, 이것참.”

비단 무복을 입은 세 사람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내가 운찬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칠과 아팔은 그 사내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너무나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아칠과 아팔은 동시에 같은 뜻의 말을 중얼거렸다.

☆ ☆ ☆

“혁, 정말 본 가의 피가 섞이긴 한 건가? 하는 짓으로 봐서는 도저히 명가의 자제가 아닌데.”

“우리들이 왔는데 자리를 권하기는커녕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하고……. 솔직히 굉장히 모욕을 당한 기분이야.”

당문엽과 팽오우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불만을 토해 냈다.

“자네들이 이해해 줘. 천한 피가 흘러서 그런지 예의에는 무지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궁혁이야말로 세 사람 중에 가장 분노한 채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을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끝은 분노의 여파로 부들부들 떨렸다.

악다문 입에선 까득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 여자……!’

이 분노와 모욕감을 대체 어디에 풀 것인가.

남궁혁은 눈을 희번득거리며 그것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생각했다. 때문에 옆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살벌했다.

“으음…….”

“크흠…….”

당문엽과 팽오우는 난감한 얼굴로 서로만을 힐끗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아, 오늘 운도 안 좋은데, 어디 가서 기분 전환이나 하는 게 어떤가?”

“그래. 어차피 항주까지 왔는데, 대륙제일이라는 금선로 기녀들의 미색을 좀 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그래, 그러자고. 어디로 가는 게 좋겠나? 최고의 기루라는 창해루, 아니면 기녀들이 아름답다는 홍화객잔으로?”

“으음, 글쎄…… 나는 음식이 맛있다는 청월루도 가 보고 싶은데.”

“아니,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음식보단 기녀인 게 당연하잖나.”

“문엽, 너야말로 모르는 소릴 하는군. 항주의 음식은 북경, 사천, 상해의 요리법이 다 섞여서 대륙제일이라는 평을 듣는단 말이야. 특히 그중에서도 청월루의 음식은 대단히 화려하다는군.”

“그런가?”

“그래.”

“으음. 이거, 고민되는군. 혁, 자네 생각은 어떻지?”

팽오우와 대화를 나누던 당문엽이 은근한 목소리로 남궁혁에게 물었다.

“……어디든 상관없어.”

“그러지 말고 의견을 내보게. 오우와 이야기를 나누다간 끝이 안 나겠어.”

“음…….”

“역시 기녀 아닌가. 영웅호색이라, 사내라면 당연히 꽃을 즐겨야 하는 법 아닌가.”

때마침 한 무리의 기녀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채 까르르 웃으며 세 사람의 옆을 지나쳐 갔다.

선녀처럼 틀어 올린 머리, 고급스럽게 장식된 금장 비녀. 게다가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새하얗게 만든 기녀들은 주변의 사내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기녀들은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지나가다가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복색을 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당문엽이 조용히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기녀들도 마주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었다.

“항주 여인들은 역시 뭔가가 다르긴 하군.”

“큭큭, 역시 자고로 여자는 저렇게 화려해야지. 만개한 꽃 같은 느낌이지 않나?”

“호오, 듣고 보니 그런데?”

“만개한 꽃이 향이 좋은 법이야. 나비는 그런 꽃만 찾아서 날아다니는 법이지.”

당문엽과 팽오우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기녀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쯧…….”

하지만 그 옆에서 탐탁지 않은 듯 혀를 차며 지켜보던 남궁혁.

그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자가 조신해야지, 저렇게 제멋에 취해 나대는 여인을 만나면 잘못하다간 패가망신할 거야.”

“허어? 혁, 자네는 기녀들이 싫은가? 지금까지 기루에서 여인을 싫어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는데……?”

“딱히 싫어하진 않아. 나도 사내니 여인은 좋아하지. 하지만 기녀들에겐 뭔가…… 가슴에서 울컥하고 진심으로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야.”

“허어? 크, 크흠! 흠!”

당문엽은 황당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좋은 가문과 준수한 외모. 지금껏 그런 조건들을 이용해 남궁혁이 농락한 여인들의 숫자만 해도 몇이던가.

당문엽은 그런 남궁혁의 입에서 이렇게나 감상적인 말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네가 그런 종류의 연애를 해 보고 싶어 하는 줄은 지금껏 몰랐군.”

“하? 누가 연애를 한다고 했어? 난 그저 그런 감정이 안 든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게 그것이지. 결국 기녀들에겐 마음이 안 간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가?”

“그렇다네. 그럼 자네는 어떤 여인이 좋은가? 훌륭한 집안에서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자라난 규수가 좋은가? 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도 기녀들처럼 헤픈 여인은 싫다는 이야기겠지?”

남궁혁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상.

그것은…….

“차분하고, 아름다우며, 맑은 분위기가 풍기는…… 그러면서도 학식이 부족하지 않아 사리를 분명히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여인.”

남궁혁은 그런 생각을 입밖으로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여인상을 머릿속에 흐릿하게 그려 보았다.

“결국 순수한 여인이 좋다는 거군.”

“혁이 그런 취향인 줄은 지금껏 몰랐어.”

“난 그동안 기녀들을 자주 찾기에 그런 여인을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네.”

“나도 그랬어.”

남궁혁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당문엽과 팽오우에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순수한 것과는 달라. 난처럼 청초한, 그러면서도 맑은 폭포수처럼 강인한…….”

“아아! 알았네, 알았어. 대충 알겠으니, 만약 그런 여인을 보게 되면 꼭 소개시켜 주도록 하지.”

“알긴 뭘 알았다는 거야? 난 아직 이야기가…….”

“됐네, 됐어. 그런 여인은 안 그래도 가문에서 정해 주는 정혼자쯤 되면 당연히 갖추고 있는 소양일세. 그러니 나중엔 오히려 화려하고 자유로운 저런 여인들을 원하게 될 걸세.”

“으음…….”

“아니라고 생각하나? 하핫, 아마 나중엔 내 말이 맞았다면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게 될 것이야.”

자랑스럽게 단언하는 당문엽.

설령 그렇다고 해도 땅을 치며 통곡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남궁혁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이야기를 끝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익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녀든 여인이든.

지금은 다 귀찮았다.

어차피 화려하고 헤픈 여인네들은 애초에 그의 취향도 아니었고, 지금 같은 심경으로 딩가딩가 풍악을 울리면서 놀기엔 그는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한 사내였다.

터덜터덜.

기녀들에겐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걸어가는 남궁혁.

당문엽과 팽오우는 그 뒤를 따르면서도 주변을 지나는 기녀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모순적이게도 그런 기녀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남궁혁이었다.

“꺄아! 저 공자님 잘생기셨다―!”

“조금 차가워 보이지 않니?”

“그게 매력이지― 원래 제대로 된 사내는 차가운 법이야.”

“그런 거야?”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세 사람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세상 참 불공평하군.”

“정말 그래…….”

당문엽과 팽오우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사이 발걸음을 사뿐거리며 걸어간 기녀들은 금선로의 어느 한 지점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한 객잔으로 다가갔다.

처음엔 자신들의 객잔으로 돌아가나 싶었으나, 세 사람은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금선로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허름한 객잔.

나름 두꺼운 대죽으로 장식하고 깔끔하게 정돈을 해 두었으나, 그래도 주변의 화려하고 고급스런 전각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평범한 객잔’이었다.

“풍, 운, 객, 잔……? 기녀가 있을 만한 객잔이 아닌데‥…?”

이번엔 당문엽과 팽오우뿐만이 아니라 남궁혁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다.

낡은 건물.

단출한 느낌.

척 보기에도 고급 기루에 소속된 것 같은 아리따운 기녀들이 거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기녀들이 몰려드니, 누가 봐도 특이하고 이상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휴 랑―! 어머나, 오늘은 왜 안 나와 계신 걸까?”

“그러네요. 항상 이곳에 나와 계셨는데.”

“휴 랑―! 휴 랑―! 아! 거기에 계셨어요?”

기녀들은 둥지에 모인 종달새처럼 지저귀다가 문득 어느 한곳을 보며 반색을 했다.

“쉿! 누이들! 이쪽이야, 이쪽!”

“휴 랑?”

“오늘은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돼. 객잔 밖으로 나가면 안 되거든. 아, 오늘도 예쁘네, 미미. 비녀는 새로 산 거야?”

“어머나, 고마워요. 아, 그런데 객잔 밖으로 못 나간다니? 벌이라도 받으시는 거예요?”

“으윽, 벌은 아니지만…‥ 아니, 벌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어.”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몰라. 하지만 객잔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아아, 그래도 이렇게 누이들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지네. 오늘 하루종일 우울했어.”

“어머나, 그건 기쁘네요.”

화화공자처럼 능수능란하고 부드러운 언변에 까르르 웃는 기녀들.

신진삼청 세 사람은 그 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봤다.

“저건 대체 뭐지? 기녀들이 저놈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신기한 일이군. 기둥서방이나 그런 건가?”

“글쎄, 기둥서방이 보통 다른 객잔에서 일하나?”

“으음…….”

당문엽과 팽오우는 고개를 갸웃한 채 그 이상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실제로 주변을 지나다니는 행인 중에도 기녀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광경은 흔치가 않은 것이다.

“하, 하하…‥ 하하하!”

그러는 사이, 단 한 사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혁‥…?”

“왜 그러나?”

남궁혁이 계속해서 큰 소리로 웃자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던 기녀들은 물론이고, 객잔의 대문 뒤에 숨어서 빠끔히 얼굴만 내민 채 대화를 나누던 사내도 남궁혁을 쳐다봤다.

“어……?”

그리고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괜히 고민했군, 괜히 고민했어.”

남궁혁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좋아 보이는데? 삶이 즐거운가 보지?”

“혁…….”

기녀들과 정담을 나누던 사내, 남궁휴는 오랜만에 본 동생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핏줄이 미천하다지만 적어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진 말아 달라고 했지 않나?”

그 싸늘한 냉대에는 아무리 넉살 좋은 남궁휴라도 대꾸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이, 남궁혁은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큭큭……. 그래도 이렇게 만날 줄이야. 괜히 고민했어. 더러운 인연이라도 이렇게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이군. 하인이라더니, 진짜 하인! 게다가 기녀들과 농짓거리라니…….”

남궁혁은 배를 붙잡고 몸을 굽혀 가면서까지 대소를 터뜨렸다.

“매일 이렇게 기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사는 거야? 그래서 집으로 안 돌아오는 건가?”

“…….”

“하긴 항주 기녀들이니 어련할까. 매일매일이 즐겁겠지. 너무 놀아서 몸이 축나고 있는 건 아냐?”

남궁혁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남궁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혁…….”

남궁휴는 씁쓸한 눈빛으로 비틀린 조소를 토해 내는 남궁혁을 바라보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휴가 세가에서 막 뛰쳐나와 도박의 세계로 들어가 있을 무렵이었다.

항주팔도신의 하나로 꼽히며 도박판을 전전하던 시절.

도박 빚이 너무 많아져서 잠시 융통할 만한 돈을 얻고자 남궁세가의 분가에 찾아갔을 때, 남궁혁을 만났다.

“왜 이런 꼴로 사는 거지?”

“혁? 네가 왜 여기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왜 이런 꼴로 사는 거지?”

“……전에 말했잖아. 나는 세가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어. 내가 가면 후계자 구도가…….”

“어차피 세가 내에 있었어도 후계자는 내가 됐을 거야.”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함부로 살지 마.”

“걱정은 고맙지만, 생각보다 지낼 만…….”

“착각하지 마. 난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너’라니, 이젠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거야?”

“뭐? 혀엉?”

“…….”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 더러운 피를 이었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내 형이 되겠다고 하는 거지?”

“남궁혁, 너…….”

“이따위로 살 거면 차라리 죽어 버려. 그게 내 인생에 덜 방해되니까.”

차갑게 말하던 남궁혁.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남궁혁의 본모습이었다.

“큭, 못 봐주겠구만.”

남궁혁은 남궁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겉보기엔 깔끔하지만, 어디까지나 값싼 무명천으로 만든 하인의 복색. 그나마 골격과 체형이 좋은 남궁휴가 입어서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정말로 허름해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손에는 싸리비를 들고, 몸에는 흔한 장신구 하나 없이 머리를 묶어 두었다.

‘이런 인간의 뭐가 좋다고 기녀들은 난리를 치는 거지? 얼굴은 조금 잘생겼지만, 그래도 고작 객잔의 하인인데다가 가진 것도 없는데. 어째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녀들은 돈이 없는 사내들은 쳐다도 안 보는 게 상식 아니던가.

지금도 주변의 기녀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휴와 혁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이상하게 집안의 하인들은 모두 저 인간을 좋아했지.’

하인들은 항상 남궁휴를 보며 웃고, 딱히 누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언제나 보물처럼 그를 애지중지 아꼈다.

그들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가식적인 인사와는 하늘과 땅 차이.

반면에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아부를 떨던 것은 어머니인 이화부인이 회유한 측근들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남궁혁은 육 년 전 남궁휴와 남궁연이 가문을 떠났을 때…….

‘젠장, 싫은 기억이 떠올랐군.’

남궁혁은 이를 악물고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남궁휴가 하인으로 있는 ‘풍운객잔’을 새삼스런 눈빛으로 다시 둘러봤다.

“흐음, 아무리 봐도 금선로에 있을 만한 객잔으론 안 보이는데…… 뭐, 별수 없나. 그나마 이런 객잔이어야 그나마 널 고용해 주겠지.”

남궁혁은 노골적으로 비웃어 주었다.

만약 무가의 자제들 사이에서 이 정도의 모욕을 당했다면 당장에 칼이 뽑혔을 상황.

하지만 남궁휴의 대응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하하, 그렇긴 하지? 내가 여기 고용된 건 천운이었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웃는 얼굴.

언제 얼굴이 굳어졌냐는 듯 남궁휴는 능청스럽게 말을 둘러대고 있었다.

“그나저나 혁, 아직도 날 형이라고 안 불러 주는 거야?”

“뭐? 무슨 개소리를……!”

“이런이런. 항상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니까.”

휴는 능글능글하게 혁의 말허리를 잘랐다.

“자자, 누이들. 보다시피 오늘은 오랜만의 형제 상봉이야. 하지만 복잡한 가정사라 딱히 보여 주고 싶지가 않네. 이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기녀들이 아쉬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에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휴 랑.”

“맞아. 이렇게 부잣집 도련님 동생이 있었다니.”

“우린 궁금해서 못 참겠다구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데요? 어째서 저런 부잣집에서 나온 거예요?”

“알려 줘요― 알려 줘요―!”

뜨거운 성원과 함께 교성이 뒤따랐다.

하지만 남궁휴는 그런 그들을 능숙한 양치기가 시끄럽게 우는 양들을 다독이듯이 부드럽게 달랬다.

“자아, 그러지들 말아 줘. 나중에 다 제대로 설명해 줄 테니까.”

“에에―!”

“나중에 다들 장신구 하나씩은 선물할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알겠지?”

남궁휴가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자 기녀들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순순히 물러섰다. 남궁혁은 기녀들이 멀어지는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지켜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항주에서 지내면 그런 기술도 생기나 보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아아, 그러네. 항주에서 예쁜 누이들이랑 계속 즐겁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어 버렸어.”

“…….”

“그나저나…… 동생, 여긴 무슨 일로?”

남궁혁은 그림을 그린 듯 멋진 미소를 선보이는 남궁휴를 보자 울컥 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는 항상 그랬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서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이런 식으로 밝게 웃었다.

마치 자신은 절대로 불행하지 않다는 듯이.

너희가 아무리 괴롭혀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그게 너무 역겹고, 또 한편으론 부러워서…… 남궁혁은 그 웃음을 보면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라고 부르지 마. 천한 피 주제에.”

“아아, 여전히 건방지네, 동생.”

“건방떠는 건 너야. 지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궁혁은 왼발을 뒤로 반보 정도 빼며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면서 살기를 방출했다.

그러자 지금껏 태연한 척 뻔뻔하게 웃고 있던 남궁휴도 표정이 굳어진다.

“검을 뽑는 건 좀 심한데. 정도를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동생?”

“핫! 정도?”

남궁혁은 전력을 다해 비웃었다.

“무려 육 년이야. 가문에서 무공도 안 배운 채로 육 년이나 밖을 나돌아 다니면서 방탕하게 놀아 제낀 건 정도가 있는 행동이었어?”

“으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지 마. ‘불행한’ 주제에. 감히 어디서 건방을 떠는 거야? 내가 지금도 예전의 그 어린 소년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그때는 네가 좀 더 강했는지 몰라도, 지금의 너는…… 나한테 삼초지적조차 안 돼.”

남궁혁은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남궁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난 육 년간 그는 가문에서 온갖 영약을 받아먹고, 가문의 후계자로서 절정의 무공을 치열하게 수련했다. 게다가 최근엔 무림에 나와서 여러 가지 실전까지 경험했다.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항주에서 도박이나 하고 놀면서 굴러먹기나 한 인간한테 질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몸을 보니 제법 단련한 듯하긴 싶지만…….’

그래 봤자 변두리 삼류 무인 수준을 넘지 못할 터.

당연히 남궁휴는 지금쯤 그의 살기에 움찔하며 겁을 먹어야 할 텐데…….

“아아, 그야 그렇겠지. 난 육 년간 놀고먹기 바빴는데 어찌 무공에 매진한 동생을 이길 수 있겠어?”

남궁휴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그런 비굴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은 사실이지 뭐. 못 이기는 걸 어쩌겠어. 그보다, 넌 아무리 반밖에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친형을 죽일 거야? 게다가 이렇게 사람도 많은 곳에서?”

“……!”

“그런 짓을 할 만큼 나쁜 녀석도 아니면서 괜히 검을 뽑으려 하지 마. 사람의 목숨은 훨씬 무겁게 다뤄야 하는 거라고.”

“윽……!”

남궁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을 향해 충고를 해 왔다.

남궁혁은 순간 얼굴이 뜨겁게 느껴질 만큼 감정이 격해졌으나,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이깟 녀석의 말에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

순간적으로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의 말과 똑같이 느껴지는 바람에 저런 어이없는 충고에 대꾸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객잔의 하인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함부로 충고하지 마.”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뭐.”

“…….”

“그보다 이제 슬슬 진짜로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해 줬으면 하는데. 봐봐, 네 뒤의 친구들도 난감해하고 있다고. 그동안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갑자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큭……!”

“말 안 할 거야?”

어떻게 말하겠는가.

객잔의 하인 따위를 하고 있다고 해서 만나 보고 실컷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모든 것을 인정해 버리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남궁혁은 신경질적으로 남궁휴를 노려보다가, 문득 객잔 안쪽에서 살금살금 고개를 내민 채 이쪽의 동향을 살피는 어린 눈동자 두 쌍을 발견했다.

“…….”

그 눈동자 두 쌍은 자신들이 발각되었다는 것도 모르는지, 눈을 껌뻑거리며 열심히 남궁혁과 그의 친구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자신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부끄러워할 상황을 만들면 된다.

악질적인 생각을 떠올린 남궁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들어가 봐야겠어.”

“어?”

“비켜. 객잔에 들어가야겠으니까.”

남궁혁은 남궁휴를 옆으로 밀어 내며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잠깐, 안 돼.”

쿵!

그런데 남궁휴가 손을 휙 뻗더니 그의 얼굴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뭐야, 이거?”

남궁혁은 음상하게 대꾸하면서도 속으론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남궁휴가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역시 객잔이 약점이었어.’

남궁휴는 허둥지둥하며 안쪽과 바깥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안에는 왜 들어가려고?”

“내가 객잔에 들어가 보겠다는데 왜 막는 거지?”

“당연히 막지. 너 들어오면 소란을 피울 거잖아?”

“그거야 당연하겠지.”

“……돌아가.”

“난 객잔의 손님으로서 객잔에 들어가겠다는 건데, 하인에게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던가? 그런 짓 하면 오히려 쫓겨나지 않겠어?”

“…….”

“닥치고 비키기나 해, 하인. 감히 건방지게 손님의 앞길을 막지 말고.”

“너…….”

남궁혁은 난감해하는 휴를 보며 더더욱 기세를 올려 그를 압박했다.

휴는 결국 별수 없이 길을 비켜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궁혁은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서 가장 중심에 있는 탁자에 마음대로 앉았다.

“자아, 여기에 앉으면 되는 건가?”

당문엽과 팽오우도 뒤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 저기…….”

“손님, 주문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아칠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좀 더 어른스러운 성격의 아팔이 남궁혁에게 웃는 얼굴로 주문을 물었다.

“일단 마실 걸 좀 가져와. 목이 마르니까.”

“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아칠과 아팔은 미리 주방의 화로 위에서 끓이고 있었던 물로 차를 우려내서 가지고 왔다.

향긋한 차향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남궁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많이 걸어서 더워 죽겠는데 뜨거운 차를 마시라고? 필요없어. 시원한 것 가져와.”

“시, 시원한 거요?”

“그래, 시원한 거. 얼음 띄워 놓은 그런 것 없어?”

“얼음?!”

아칠과 아팔은 경악하고 말았다.

얼음이라는 건 깊은 동굴에서 꺼내오거나 북해에 가까운 곳까지 직접 가야만이 먹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물품이었다.

당연히 값이 비싸기 때문에 대단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자주 먹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것을 가벼운 말투로 갖다 달라고 하니, 아칠과 아팔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죄, 죄송하지만, 얼음은 없어서요.”

“하아, 얼음도 못 구해?”

“네. 하지만 시원한 물은 드릴 수가 있는데요?”

“할 수 없지. 그거라도 갖고 와.”

탁자를 탕탕, 두드리면서 소리치는 남궁혁.

아칠과 아팔은 재빨리 뒤뜰에 있는 우물로 달려가 미리 끓여서 우물물에 담가 두었던 가죽 물주머니를 끌어 올렸다.

주머니에 대는 것만으로도 손이 얼얼할 만큼 시원한 물이었다. 재빨리 잔에 담아 가지고 가자, 남궁혁은 한 모금을 들이켠 뒤 깜짝 놀라며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물이 아니잖아?”

“저희는 미리 끓여 둔 찻물을 식혀서 손님들께 대접하고 있어요. 마음에 안 드시나요?”

“으음……. 아니! 난 물을 주문했다고.”

“네……?”

“물을 갖고 오라고 했는데 냉차를 가져오면 어쩌라는 거야!”

“그, 그런……!”

“다시 가져와!”

냉차는 솔직히 매우 맛있었지만, 남궁혁은 일부러 어린 점소이들을 윽박지르며 냉차가 담겨 있는 찻잔을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쨍그랑―!

“아앗?!”

잔이 깨지면서 날카로운 찻잔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찻물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누군가가 당장에라도 치워야 할 상황.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한 남궁혁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남궁휴를 응시했다.

“이봐, 하인. 안 치우나?”

“……!”

“하인의 업무는 청소 아냐? 바닥에 이렇게 잔이 깨져 있으면 손님이 움직이다가 밟을지도 모른다고.”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 남궁휴를 노려보는 남궁혁.

분노와 당황, 그리고 괴로움이 뒤섞여 있는 남궁휴의 얼굴은 그의 기분을 매우 좋게 만들어 주었다.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행위로 그동안 쌓여 왔던 어두운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는 것을.

“이거, 재미있는데?”

“큭큭, 이것 때문에 항주에 오자고 한 거였군? 이제야 이해가 됐어.”

팽오우와 당문엽이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형제 싸움에 끼어들진 않았으나, 한발자국 뒤에서 남궁혁과 남궁휴의 다툼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큭…….”

한편, 남궁휴는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는 듯 보였다.

바닥에 흩어진 찻잔과 조금이나마 남은 알량한 자존심.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번엔 어떤 모습으로 즐거움을 줄 것인가.

남궁혁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남궁휴의 무릎이 힘없이 굽혀지려는 그때,

“너무하는군요!”

낭랑한, 마치 천상의 옥음(玉音)처럼 너무나도 부드럽게 귓속을 파고드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혁은 무심코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이 누군지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감히 남궁세가 후계자의 말을 끊은 건방진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당장에 그에 걸맞은 응징을 내려야 하건만,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자마자 입술이 굳어 버렸다.

‘이런…….’

두근두근.

몸속의 피가 너무나 빨리 움직인다.

아마 자신의 얼굴이 지금쯤 붉어져 있을 거라는 것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남궁혁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항상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이상적인 여성.

단아하고 청초한 외모에 순수하면서도 곧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무작정 순종적이지 않고 지금처럼 화난 표정으로 당당하게 잘못된 것을 따질 수도 있는 성격이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노란빛의 화사한 경장.

장신구는 일절 없는 수수한 의복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늘씬한 몸매와 긴 다리, 그리고 새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강조되어 보였다.

“이럴 수가……!”

남궁혁은 그녀를 홀린 듯이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 ☆ ☆

장기린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방긋 웃는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돈해 줄 땐 언제고, 갑자기 홱 토라져서는 등을 돌리고 가 버린 것이다.

숨을 씩씩거리며 걸어가던 울분에 찬 뒷모습이 아직도 그의 망막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번에 난 화는 쉽게 풀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큰일이군…….”

웬만한 일이라면 그냥 져 주고 말았을 텐데, 하필이면 절대로 져 줄 수가 없는 종류의 화제라는 게 문제였다.

십 년 전의 그녀라니.

휘연에게 사과를 하게 되면 분명히 그녀에 대해 물어볼 테고, 그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화를 풀지 않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아.’

그 상대가 휘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조언이 필요했다.

여자에 대해 잘 알고, 여심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 휴가 있었군.”

그 순간,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은 휴.

지금껏 봐 온 사람들 중에서 현백과 맞먹을 정도로 여심을 잘 알고 있는 것은 휴가 유일했다.

장기린은 휴를 찾으러 정문 쪽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그곳의 공기가 왜 이제껏 몰랐는지 의아해질 만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부잣집 자제 같은 모습의 세 사람.

바닥엔 깨진 찻잔과 찻물이 고여 있고, 아칠과 아팔이 잔뜩 긴장한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잣집 자제 중 한 명에게 휘연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이제껏 보지 못한 엄한 표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는 거죠? 그것도 자신의 형을 교묘한 수법으로 모욕을 주려고 하다니.”

“…….”

“듣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비겁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휘연은 당당하게 그를 꾸짖고 있었다.

병장기를 가진, 인상도 험악한 건장한 사내 셋을 상대로 위축되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웠다.

장기린은 특히 휘연이 말하고 있는 상대를 차분히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 고급스런 의복, 허리에 찬 화려한 금빛의 장검까지.

‘검을 좀 휘둘러 봤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기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오른쪽 검지와 중지의 둘째 마디에 나 있는 굳은살과 자연스럽게 발검을 할 수 있도록 항상 오른쪽 발을 반보 정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

상대는 검을 제법 휘두른 자.

그것도 실전에서 피를 보면서 싸워 본 상대였다.

‘이 녀석이 휴의 동생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얼굴 형태가 꽤나 닮은 것도 같았다. 갸름한 얼굴형과 끝이 그리 뾰족하지 않은 매끈한 코.

다만 속이 깨끗하게 들여다보이는 휴의 눈빛과는 달리, 동생 쪽은 어딘가 복잡하고 어두운 구석이 느껴졌다.

‘삐뚤어진 녀석이군. 왠지 정이 안 가.’

남궁혁이 주변을 훑어보는 눈빛에는 경멸과 우월의식이 가득 담겨 있어 장기린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순수한 첫인상만으로도 도저히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대는?”

“네?”

“그대는…… 누구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남궁혁이 상기된 얼굴로 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기린은 왠지 그 표정을 보자 더더욱 불쾌해졌다.

휘연은 잠시 당황해했으나 순순히 대답하였다.

“저는 이 객잔의 침모예요.”

“침모……?”

“네. 그렇기 때문에 저희 객잔의 식구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휘연이 여전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당당하게 남궁혁을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큰누나가 동생들을 혼내는 듯한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는 신진삼청.

그중 특히 당문엽과 팽오우는 흥미로운 물건을 본 것처럼 감탄성을 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큭, 재밌네. 그보다 대단한 외모인데? 저런 외모를 가지고 침모라고?”

“희한한 일이군. 침모는 보통 한창나이를 넘긴 퇴기들이 하는 일 아니었나?”

“그러게 말일세. 그나저나, 얼굴이 반반한 건 좋은데, 침모치곤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감히 우리에게 훈계를 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세 사람 중 가장 권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당문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나서서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 남궁혁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렇군. 내가 잘못한 것 같군. 사과하겠소.”

“어……?”

“혁?!”

당문엽과 팽오우는 경악하며 남궁혁을 응시했다.

“순간적인 흥분으로 실수를 했소. 우리 가문에선 형제들끼리 구원이 깊은지라……. 하지만 지금은 분명 반성하고 있으니 무례를 용서하시오.”

게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까지 한다.

당문엽과 팽오우는 지금 그들의 눈에 비춰지는 광경이 믿겨지지가 않아 연신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뇨, 그게…….”

휘연은 당황하며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당연히 반박할 것을 예상하고 강하게 말한 건데, 설마 이런 식으로 순순히 사과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휘연.

잠시 마음이 흔들린 그녀에게 쐐기를 박듯 남궁혁이 한 걸음을 다가섰다.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오?”

“아뇨, 그게…… 제가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사과는 형에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오. 단순한 집안싸움을 괜히 확대시켜서 객잔에 피해를 주다니, 명가의 후예답지 못한 치졸한 행동이었소. 일깨워 주어서 고맙소.”

“그런 말씀을…….”

“그 사죄의 뜻으로 뭔가를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이 있으시오?”

“……!!”

객잔 안의 공기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내용이 이쯤 되니 누구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저 녀석이…….’

특히 장기린은 마치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누가 탐낼 때와 같은 깊은 불쾌감을 느꼈다. 너무나 불쾌해서 당장 주먹이 날아갈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말로는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휘연도 난감해하는 것 같고…….’

그 정도면 그가 나설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너…….”

그리고 그가 나서려는 찰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휴가 한발 앞서 남궁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혁! 충고하는데,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작이라니?”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건 좋지만, 그 때문에 우리 객잔 식구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난 너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아.”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정반대인, 진지하고 위협적인 목소리.

어떤 어려운 상황도 능수능란하게 넘길 것 같던 휴는 이제 이 자리에 없었다.

그 격한 변화에 남궁혁조차 잠시 움찔하며 휴를 응시할 정도였다.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지만 잠시 후, 남궁혁은 휴를 비웃었다.

“내가 너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는 거야? 자신감이 지나친데?”

“……그럼?”

“난 진심이야.”

“……?!”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쩍 벌리는 휴.

그사이, 남궁혁은 휘연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얼굴엔 자신감으로 가득한 미소.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나 보였다.

아직 휴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이제 남궁혁과 휘연의 얼굴은 고작 손바닥 두 뼘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소저.”

“……네?”

“혹시 연인이 있으시오?”

휘연의 얼굴빛이 확― 하고 붉어졌다.

당연하겠지만,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그게…….”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는가 묻고 있소.”

“……”

생각은 생각.

현실은 현실.

휘연이 딱 잘라서 대답하지 못하자 남궁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럼 됐소.”

“네? 아, 아뇨. 하지만 저는…….”

“아니,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아직 언약을 한 사이까진 아닌 듯한데, 그렇지 않소? 상대도 엄청나게 둔해 빠진 남자군. 이런 미인을 가만히 두다니.”

“…….”

“정말 한심한 인간이야. 나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푹― 하고 가슴이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너무나 답답했다.

왠지 남궁혁이 내뱉는 독설 하나하나가 그를 지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저.”

남궁혁이 휘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할 말이 있소.”

뜨거운 눈빛으로 휘연을 바라보는 남궁혁.

장기린은 그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서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남궁혁은 휘연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나서서 막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왜 막아야 할까?

그는 휘연의 무엇인가?

단순히 휘연의 고용주로서 이런 일까지 막을 권리가 있을까?

게다가 오늘 아침엔 서로 다투기까지 했는데?

‘아…….’

생각이 너무 길었다.

뼈아픈 실책이다.

어느새 고민하며 멈춘 그의 모습을 휘연이 슬픈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휘연…….’

장기린의 시선을 피하듯 눈길을 돌리는 휘연.

그런 그녀의 앞엔 남궁혁이 서 있었다.

“소저.”

“……네?”

“소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소. 내 이름은 남궁혁. 남궁세가의 ‘후계자’요.”

한순간 머릿속이 멍해지고, 곧이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쾌감과 분노가 솟아올랐다.

가슴이 괴롭고, 누군가 폐부를 손으로 꽉 움켜쥔 듯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장기린은 그 순간 생각했다.

‘역시, 난 저 녀석이 싫어.’

첫인상이 틀리는 법은 없었다.

☆ ☆ ☆

“휴.”

“아, 객주님.”

한 손에 싸리비를 쥔 채 멍하니 서 있던 휴가 몸을 돌렸다. 휴의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눈의 초점은 흐려진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던데…….”

“하하, 역시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닌가?”

“아뇨, 맞습니다. 확실히 평범한 환경은 아니죠.”

휴는 씁쓸하게 웃었다.

“혁이 원래 저런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좀 더…… 뭐랄까요, 순수하고 귀여운 동생이었죠. 비록 피는 반밖에 안 섞였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연이랑 저는 혁이를 굉장히 아꼈습니다.”

“순수? 귀여워?”

“하하, 지금의 모습만 봐선 그렇게 안 보이겠죠?”

“당연하지. 어렸을 때부터 악의 씨앗이었을 것 같은데?”

“푸핫! 객주님은 가끔 재밌는 구석이 있으십니다.”

휴는 정말로 재밌는지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저랑 연이는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측실 소생. 게다가 엄연히 정실 부인으로부터 번듯한 아들이 있는 상황이니 가신들이 전부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라고 했나?”

“너무나 그릇이 큰 분이시다 보니 오히려 작은 것에 너무나 소홀한 분이셨죠. 남궁세가가 지금 역대로 가장 큰 성세를 누리고 있다는 평을 듣는 반면에, 내부는 역대로 가장 혼탁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가 내에서 이화 부인이 너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요.”

관부 출신의 여식이 무림세가를 휘어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역학 관계와 정치적 야합.

이미 남궁세가는 무림세가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께선 저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고 계세요. 심지어 지금까지도요.”

“지도자의 그런 면은 아랫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법이지.”

“하하, 확실히 그렇죠.”

휴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그렇게 연이와 제가 가문에서 고립되어 있었을 때, 유일하게 격의없이 다가온 게 혁이었어요.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항상 저희 남매를 감싸고 형과 누나로서 따라 주었죠. 어릴 적에 ‘형아, 형아!’ 하면서 뒤를 졸졸 따라다닐 때는 정말로 귀여웠는데…….”

“……그랬던 적이 있다고?”

장기린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의 건방지고 오만한 남궁혁의 모습에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생이 물의를 일으킨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객주님.”

“…….”

“여자관계가 복잡한 건 집안 내력이니까요. 아마 저 녀석도 잠시 추근거릴 뿐이지 얼마 안 되어서 곧 흥미를 잃을 겁니다.”

휴는 자기 가문의 비사를 드러내면서까지 사죄했다.

“너, 그거 자랑이 아니다.”

“하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걸로 화를 많이 당했으니까요.”

좋은 여자 ‘한 명’을 잘 만나는 게 여복(女福).

쓸데없이 여자가 많이 꼬이는 것은 여난(女難)일 뿐이다.

“하지만 너는…… 그걸로 된 거냐?”

“……에?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모욕당한 건 너다. 내가 나서면 오히려 네가 곤란해질까 봐 나서지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한마디 하지.”

사실 나중에 남궁혁이 휴에게 했던 행동과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분개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남궁혁에게 적룡기마대 식의 ‘형제의 우애’라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가족 문제라는 생각에 휴의 얼굴을 봐서 꾹 참았던 것이다.

“하하, 괜찮습니다, 객주님.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차라리 이게 나으니까 그렇습니다. 가문에 남아 있는 건 전부 안 좋은 기억뿐이어야 합니다.”

그 말을 하는 휴의 목소리는 너무나 쓸쓸해서 장기린은 차마 거기에 뭐라고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래…….”

그저 밋밋한 말투로 긍정할 뿐.

휴는 아직까지 남궁세가에 대해 그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미련을 잘라 내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미워해야 했다.

미워하려면 그쪽이 ‘나빠야’ 했다.

그에게 악담을 퍼부어도 좋다. 경멸하고 멸시하고, 노골적으로 악의를 보여도 좋다.

그럴수록 가문으로 돌아갈 마음은 사라질 테니까.

그곳으로 가지 않는 게 더 좋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으니까.

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가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객주님,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러니 부디 혁의 철없는 행동들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

휴는 보다 씩씩해진 눈빛으로 남자답게 씩 웃었다.

“그보다 객주님께선 빨리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때가 된 게 아닐까요?”

“결정이라니?”

“아시잖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그때를 놓치면 평생 기회는 없다고도 합니다.”

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장기린에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휴의 마음씨가 충분히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때문에 장기린은…….

“……그래. 생각해 보지.”

“예. 그거면 되었습니다.”

그때 휴의 웃음은 눈부시듯 밝게 느껴졌다.

☆ ☆ ☆

한적한 오후.

장기린은 객잔의 뒤뜰에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궁혁이 객잔에 나타난 지도 벌써 이틀째.

복잡해진 그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날씨는 쾌청했다.

장기린은 온몸이 뜨끈해질 정도의 햇살을 받으며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단호하게 거절했지…….’

남궁혁이 한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 휘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태도로 그를 거절했다.

처음엔 자신은 지금 객잔 일에 묶여 있으니 연애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로.

하지만 남궁혁이 포기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끈질기게 달라붙자 결국 자신은 연모하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놨던 것이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하지만 뭔가를 결심한 듯 씩씩하게 말하던 휘연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그때, 휘연은 눈앞에 있는 남궁혁이 아니라 옆에 서있는 장기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절박하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했던 그때의 눈빛은…….

‘연모한다는 사람은…… 나겠지.’

지금까지도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에 완전히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지금껏 휘연이 그에게 보여 주었던 과분할 정도의 호의.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무조건적인 애정.

게다가 그런 눈빛을 보면 아무리 무디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거겠지?’

휘연이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대답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행동하기엔 아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가 너무 컸다.

십 년 전, 만월의 밤.

양손을 적시던 진득한 핏물의 감촉은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미향(美香)…….’

그리운 이름이면서, 동시에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이 저릿해지는 슬픈 울림이기도 했다.

그를 사랑했던 여인.

그가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그의 품 안에서 죽고 말았다.

그날 이후, 장기린은 여인이라는 존재를 그의 인생에서 지워 버렸다.

‘지금의 나는 달라.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실제로 꽤나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어. 십 년 전과는 모든 것이 다르니 지켜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래도…… 내 삶은 너무나…….’

선뜻 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그가 휘연을 너무나 아끼기 때문이었다.

휘연을 소중히 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그 마음에 함부로 대답을 할 수 없는 악순환이 생기고 만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한숨이 나오고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음 깊숙이 새겨진 과거의 상처가 그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휘연에게 더욱 좋은 일일까.

그렇게 담벼락 위에 누워서 고민하길 잠시, 객잔 쪽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객주님.”

“……휘연.”

장기린은 물끄러미 휘연을 응시했다.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휘연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그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어색하고 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장기린과는 달리, 휘연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거리감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최근엔 쉬는 시간에 항상 여기에 계시네요?”

“……아! 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안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실래요? 오늘 좋은 수선차를 사 왔는데요.”

휘연은 이쪽의 눈치를 살피듯 볼을 살짝 붉힌 채 장기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소녀 같은 그 표정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다.

가슴이 뜨끔하면서 얼굴로 열기가 올라왔다.

장기린은 왠지 민망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시선을 피하니 공기가 더욱 어색해졌다.

“…….”

“…….”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를 상황.

그렇게 서로 말없이 서 있기를 잠시.

휘연의 얼굴에서 밝고 명랑했던 웃음이 점점 위태로워 보이는 미소로 변해 갔다.

“차는 싫으신 가요?”

“그런 건 아닌데…….”

“그, 그럼, 객주님.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있으세요? 다른 할 일 있으세요?”

기죽은 목소리.

자신감이 없는 조심스런 말투.

“할 일?”

“네. 오늘 연등제라…… 밖에 구경이라도 나갈까 해서…….”

“…….”

“아, 아니에요,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손님도 많을 텐데…… 철없는 생각이었어요. 잊어 주세요.”

“……휘연.”

너무나 휘연답지 않았다.

이렇게 기죽은 목소리도, 자신감 없는 말투도.

애써 납득하기 좋은 이유를 찾아 불안한 자신을 위로하려는 행동도…….

‘나 때문이다.’

마음이 아파 왔다.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연.”

“네?”

“남궁혁은…… 여전히 찾아오고 있어?”

“…….”

휘연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혁은 그 뒤로도 객잔을 계속해서 찾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남궁휴에게 독한 말을 내뱉는, 매우 까다로운 손님이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하루에 두 번 이상 끈질기게 휘연을 찾아와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도 형인 남궁휴는 물론이고, 그의 동료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정열적이고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 때문에 휘연도 최근에는 남궁혁과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호의는 여전히 불편해했지만, 끈질기면서도 결코 정도 이상으로 조르지는 않는 정중한 태도가 그녀의 태도를 바꾼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 녀석은.’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 가문과 외모라면 발에 차이는 게 여자일 텐데, 왜 하필 자신을 거절한 휘연을 찾아와서 객잔을 뒤흔들어 놓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남이 보기에도 휘연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지 않은 복잡한 진실이었다.

그사이, 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뭔가를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객주님.”

장기린은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흐르는 결연한 비장감에 흠칫 긴장했다.

“남궁 공자가 오늘 저한테 함께 뱃놀이에 가자고 청했어요. 연등제가 열릴 때 서호의 정경은 일품이라면서요.”

“……그래?”

장기린은 마음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무뚝뚝한 말투를 유지했다.

“그것…… 뿐인가요?”

“…….”

지금까지는 객주와 침모의 관계로.

어떤 때는 오라버니와 여동생처럼, 어떤 때는 사업상의 동반자처럼.

둘 사이에 있는 과거의 빚이 서로의 관계를 구속하는, 그런 미묘한 관계로 지내던 나날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한발을 내딛어 정면으로 묻고 있었다.

그런 곧고 솔직한 눈빛을 보자 장기린은 대답할 말이 궁해지고 말았다.

전투로 따지자면 야전.

그것도 희미하게 달이 뜬 새벽녘에 덮쳐 온 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는?”

“……휘연이 그러고 싶다면 상관없어.”

사악―

휘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눈빛에는 실망이 가득 담겼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휘연.

그녀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다른 사내와 함께 밖에 놀러 나가는 거라구요?”

“…….”

“객주님은 그래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절대로 싫다.

그걸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다.

하지만 장기린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느낀 위기감.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만 느끼는 모종의 감각을 느낀 것이 떠올랐다.

과연 그의 곁은 안전한가?

이망의 일이 있고, 옥승의 일도 있었다.

그는 정말로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가?

최근에 청풍객잔과 홍화객잔의 싸움으로 금선로가 시끄러운데, 그와 풍운객잔은 그 폭풍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인가?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가 십 년 전의 그날처럼 휘연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

모든 것을 고민하던 사이, 무심코 최악의 대답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객주님!”

휘연은 지금껏 장기린이 보지 못했던 얼굴로…….

당황, 분노, 슬픔이 뒤섞인 채 언성을 높였다.

“객주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오늘은 놀러 가겠어요!”

“…….”

“남궁혁 공자와! 밤에! 뱃놀이를 다녀오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나갔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달리는 말의 꼬리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뒷머리를 보며 장기린은 욱씬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프군.”

육체의 아픔이 아닌 마음의 고통.

무심코 튀어나온 한마디의 말은, 점점 그 크기를 불려 최악의 결말로 치닫고 말았다.

“정말…… 쉬운 일이 없군.”

장기린은 담벼락에 등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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