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59화 (50/686)

第五十六章 ― 장강출세(長江出世)

중화 대륙의 젖줄인 장강.

반만년의 고도(古都)인 남경에서 장강을 따라가면 남창, 무한을 지나 동정호에 도달하게 된다.

말 그대로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수인 동정호는 어부, 뱃사공, 수적들이 만들어 가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남으로는 양자강과 악양, 북으로는 황하강과 통해 있는 중원 최대의 호수.

드넓은 장강에 수많은 수적들이 있다고는 하나, 진짜 수적들로 이루어진 수채는 오직 열여덟 개뿐이다.

장강수로십팔채.

그곳은 뜨거운 열정을 품은 호한들의 집합소다. 과거 양산박의 호걸들이 세상을 바꿀 웅심을 품고 산적이 되었듯이, 장강수로십팔채도 부패한 관리들에게 반기를 든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인 것이다.

그들은 수로를 막고 통행세를 받아 살아가고 있지만, 절대로 정도 이상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시대의 풍운아라 자부하는 호걸들의 자부심이 걸려 있기도 하고,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장강수로십팔채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규율은 엄격했다. 만약 수로십팔채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을 하면 곧바로 혈맹에서 강제로 퇴출되고 적으로 규정되어 토벌된다.

생각해 보라.

수로십팔채 중에 십칠채가 갑자기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수로채의 맹주령이 발동되는 순간, 순식간에 수채 앞에 수백 대가 넘는 전선들이 모여들고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수백 번의 싸움으로 단련된 십팔채의 정예들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것에 감히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설마 작은 횡포 몇 번으로 그렇게까지 하겠느냐 하는 안이한 생각을 가졌다간 순식간에 수채가 불바다가 된다.

실제로 부하 관리를 잘못해서 더러운 짓을 방치하던 무골채(武骨寨)가 하룻밤 새 채주의 목이 베이고 수채는 불바다가 되어 버렸던 일은 아직까지도 장강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장강에서 수로맹의 힘은 절대적.

그럼에도 오만하지 않고 적당한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수로맹은 지금까지도 무사히 강성해질 수 있었다.

만약 장강수로십팔채가 악질의 부하를 방치하고 주변의 민초들을 괴롭혔다면?

악랄한 도적 떼들을 제발 퇴치해 달라고 장강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관부나 무림맹에 상소를 올렸다면?

아마 지금쯤 장강의 수로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채 지리멸렬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강한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장강수로십팔채는 그런 세태를 잘 알고 합리적으로 처신한 어엿한 ‘무림문파’였다.

대대로 장강수로십팔채의 총표파자는 동정호의 채주가 맡는다.

삼십 년 전 장강 일통을 이루고 무림맹의 인정을 받아낸 걸출한 인물, 장강용왕(長江龍王) 추묵환(?墨環)이 동정호 수채의 채주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동정호는 모든 수적들의 고향이었다.

동정호에 다니는 배는 절반이 어선, 절반이 수적선이라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수적들에게 좋은 환경이었다.

동정호 주변의 관부는 모두 수로맹에 호의적인 인물들뿐이고, 주변의 무림문파들도 동정호의 수적들만큼은 무림인으로서 대우해 주었다.

거기다 장강용왕 추묵환이라는 초절정고수와 강력한 용왕을 따르는 용왕수호대의 호걸들은 무투술이 대단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용왕수호대는 구대문파의 일대제자들과 견줘도 빠지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데, 실제로 동정호를 지나던 청성파의 칠검이 용왕수호대와 시비가 붙어서 큰 낭패를 본 일화는 무림에서 유명했다.

그 뒤 칠검의 소식을 듣고 분노한 청성파가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을 대거 내려 보냈으나, 장강용왕 혼자서 비밀리에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돌려보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

그러니 장강용왕과 용왕수호대가 있는 동정호는 모든 수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우우우―료오오옹―!”

마른하늘의 우레처럼 터져 나온 목소리가 동정호의 뿌연 안개를 흩어 놓았다.

발원지는 동정호의 중심에 있는 용왕도(龍王島).

아무리 바람이 없는 고요한 날이라곤 해도 거리가 이백 리가 넘는 동정호 변까지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는 점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괴물인지를 알게 해 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가까운 곳에서 저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어쩌면 물속에서 고기들이 배를 뒤집고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강기슭의 평평한 바위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던 청년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키는 오 척 반. 체구는 보통이지만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탓에 드러난 어깨와 팔뚝을 보면 그가 바위처럼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턱 선이 굵고 눈썹이 진하다. 잘생긴 건 절대 아니지만 못생기진 않았고,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외모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얼굴을 크게 가로지는 상처.

왼쪽 볼에서 콧등을 지나 오른쪽 볼까지 수평으로 가르는 상처에, 이마의 중심에서 콧등까지 수직으로 가르는 상처가 합쳐져 얼굴 위에 크게 열십(十)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얼굴에 상처가 없을수록 실력이 뛰어나다는 낭인들의 속설이 있지만…… 아마 그 누구도 눈앞의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참혹한 흉터에 굵직한 외모. 게다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매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말을 걸기는커녕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실력이 없다니, 말도 안 된다.

상대가 그 이상으로 강했을 뿐이다.

지금 흉터가 이 정도라면 상처가 막 생겼을 때는 대체 어떤 몰골이었을까.

그나마 그런 상처를 입고도 이목구비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이 천운이었다.

그의 이름은 추룡(?龍).

적룡기마대의 셋째이자, 가장 호전적인 중(中)부대의 장수였다.

“또 시작이구만, 영감탱이.”

추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들을 데리고 동정호에 온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건만, 그의 아버지는 질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매일매일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면서 그를 찾고 있었다.

“동정호 어부들이 얼마나 깜짝깜짝 놀라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어제 들렀던 마을에선 이미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 용왕이 분노했다면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제물이라도 바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으함, 오늘도 도망 다녀야 하려나…….”

추룡은 하품을 하면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동정호에서 흘러나가는 작은 내천.

성인 남자 세 사람이 팔을 벌리면 막을 수 있을 법한 자그마한 개울가엔 지금 철 갑옷을 입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백오십 명의 사내가 있었다.

다들 어디에 가도 눈에 띌 법한 외모와 분위기를 가졌지만, 그중 특히나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칠 척 장신의 육체에 어깨와 등판이 보통 사내의 세 배는 되어 보일 만큼 넓고, 팔뚝은 양손으로 붙잡아야 될 만큼 크고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거구의 사내인데, 그에 반해 피부는 애기처럼 뽀얗고 통통한 얼굴형은 어딜 보나 순박한 시골 청년 같았다.

그는 뒤뚱거리면서 자신의 몸보다도 거대한 바위를 옮기고 있었다.

가로, 세로, 높이.

전부다 일 장은 될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열 명은 달려들어야 할 법한 거대한 화성암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뒤뚱거릴 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훌쩍 집어 던졌다.

……그렇다.

‘집어 던졌다.’

개울가에, 그것도 한가운데에 그 바위를 집어 던졌다.

꽈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치솟는 물보라.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진동이 땅을 쿵쿵! 울렸다.

“우와아아―!”

“역시 대석 형님! 대단하십니다!”

“대석! 대석! 대석!”

연이어 이어지는 환호성에 사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의 이름은 대석.

적룡기마대의 넷째이며, 평소엔 순박한 반면에 한 번 피를 보거나 싸움이 시작되면 앞뒤 안 가리고 날 뛰는 무서운 장수였다.

그는 갑자기 개울의 중심에 우뚝 솟은 자신의 작품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이내 만족한 듯이 활짝 웃었다.

바위의 근처에서 새하얀 것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산천어, 개구리, 붕어, 가재 등의 온갖 것들이 배를 뒤집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오오―! 잡혔어! 잡혔다!”

“어디어디? 아! 진짜네!”

“진짜로 돌만 던져도 잡히는구나. 처음 알았다…….”

“멍청아, 저런 걸 아무나 할 수 있겠냐? 대석 형님만 할 수 있는 거다.”

“우오오―! 하긴, 저런 바위는 천하장사이신 대석 형님만 들 수 있지.”

“당연하지. 대―석! 대―석!”

“최―고―! 최―고―!”

주변의 병사들이 입을 모아 환호했다.

대석은 그게 기분이 좋은 지 어깨를 으쓱하며 개울에 첨벙첨벙 들어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수확물’들을 퍼내 밖으로 집어 던졌다.

병사들은 다시 또 왁자지껄하니 떠들면서 수확물들을 받아 들고 ‘맛있겠다’느니, ‘양이 엄청나네요’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면서 웃어댔다.

“이걸로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요?”

“으하하! 그거 좋네! 오늘은 강물에서 잡은 물고기나 먹을까?”

“대석 형님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네요!”

솔직히 숫자가 백오십인데 겨우 그 정도 수확물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는가.

그들에겐 이것이 놀이였다.

심심함을 타파하고 대석이 찌뿌둥한 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좋은 놀이.

대석 또한 그걸 알면서 즐거워했다. 그는 양쪽 어깨를 휘휘 돌리더니, 씩 웃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그럼 바위를 다시 한 번 꺼냈다가 던져 볼까?”

“우오오―!”

“좋아! 간다! 이걸 들어 올려서…… 크억!”

온몸에 힘줄이 돋아나면서 전신의 근육이 꿈틀꿈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가 괴력을 발휘해 바위를 다시 한 번 들어 올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바위를 후려치는 바람에 대석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하였다.

“으, 으어.”

날아온 돌멩이는 겨우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그 안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흔들릴 만한 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대석이 알기로 이런 투척술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했다.

“셋째 형?! 깨어났수?”

“이 멍―청―아―!”

소리를 버럭 지르자 대석이 몸을 움츠렸다. 커다란 덩치에 안 맞은 귀여운 반응이었다.

“겨우 고기 몇 마리 잡는 데 집채만 한 바위를 쓰는 놈이 어디에 있냐! 게다가 한 번 더 해? 물고기를 우습게 보는 거냐, 이 자식!”

“셋째 형, 그건 뭔가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

“시끄러워! 애초에 물고기를 잡고 싶으면 그물을 치든가 낚시로 잡으면 되잖아! 뭐 하러 바위를 집어 던져서 안 그래도 겁에 질린 촌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안 그래도 사람들이 용왕이 분노했다면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아마 지금의 굉음을 듣고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줄 알 것이다.

대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물은 재미없수. 이렇게 고기들이 한꺼번에 잡혀야 재밌수.”

“……너는 재미 때문에 집채만 한 바위를 집어 던지는 거냐?”

“어? 그러면 안 되는 거유?”

“일의 효율이라는 게…… 아니, 말을 말자.”

개울에서 물고기 몇 마리를 잡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커다란 바위를 던지는 대석.

다른 사람에겐 상식 밖의 행동이 대석에게 당연한 것은, 그만큼 바위를 던지는 일이 그에게 ‘별것 아닌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식 밖의 힘은 상식 밖의 행동을 만들어 낸다.

“뭐, 다들 즐거워하니 됐나?”

추룡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적룡기마대의 병사들을 한 번 쳐다본 뒤, 대석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가자.”

“어디를 말이유?”

“용왕도. 가서 한바탕 몸 좀 풀고 밥이나 얻어먹고 오자.”

“밥?!”

“그래, 밥.”

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욕이 많은 대석은 밥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빛낸다. 앞에 ‘한바탕 몸을 풀고’는 들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 적룡기마대! 전부 나루터로 갈 준비를…… 할 필요가 없겠네.”

추룡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그가 찾아가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괴물 같은 아버지 쪽이 한발 더 빨랐던 모양이다.

뿌우우우―!

안개를 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전선.

광택이 칠해진 황금빛 선체는 마치 진짜 용의 몸처럼 신비로운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커다란 용이 조각되어 있는 선수의 뒤편에서 전투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적룡기마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벌떡 일어서서 대열을 맞추고 각자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

잔뜩 몸을 낮춘 맹수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 말에 올라타진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 왁자지껄하니 웃고 떠들었냐는 듯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 그들이 전장에서 살아오던 정병들이라는 증거였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얼씨구? 용왕수호대까지?”

그때, 용이 새겨진 거선의 양옆에서 등장하는 새카만 묵빛의 전선 두 척.

추룡은 그 모습을 보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여간 영감탱이, 호들갑스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기껏해야 부모자식 간의 싸움이다. 거기에 동정채의 정예인 용왕수호대를 투입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사고방식이냔 말이다.

“여―엉―가암―! 여긴 왜 왔어―!”

추룡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처럼 동정호 전체를 울리지는 않겠지만, 코앞에 있는 배에는 다 들릴 만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순간, 뿔피리 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장강의 용왕이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노오옴―!”

“우왁?!”

콰과과과―!

삼 장 높이가 넘는 선수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린 백발의 노인은 동정호의 수면을 밟으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파바바박! 하고 뒤쪽으로 엄청난 기세의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호랑이가 달려들어도 이것보단 낫지 않을까.

노인은 동정호의 수면을 지나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멍하니 서 있던 추룡을 덮치며 손바닥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

물론 추룡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서 피했지만,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바위는 그렇지 못했다.

대석이 옮겨 놓은 집채만 한 바위에 거미줄처럼 쩍!하고 금이 가더니, 이내 안쪽에서부터 잘근잘근 부서지면서 작은 돌멩이 덩어리가 되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추룡은 무참히 살해당한 바위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내부에서부터 상대를 파괴하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내공을 이용해 적을 안쪽에서부터 부숴 버리는 무시무시한 살인기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영감! 하나뿐인 아들을 죽일 셈이야?!”

아무리 추룡이라도 이런 살인기를 정면으로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격분하는 게 당연하건만, 백발의 노인, 아니, 추룡의 아버지이자 장강수로십팔채의 총표파자인 장강용왕 추묵환은 되레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이깟 공격에 죽을 놈 같으면 죽어도 상관없다!”

“뭣! 당신 내 아버지 맞아?”

“지금은 아니다!”

공기를 꿰뚫 듯이 날아오는 정권을 간신히 피하면서 추룡은 악을 썼다.

“무슨 아버지가 아들이 팔 년 만에 돌아왔는데 얘기도 안 듣고 죽이려고 들어!”

“그러니까, 지금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잖나!”

“그런 게 어딨어! 한 번 아버지는 영원히 아버지지! 우왁?!”

부우웅―!

두 번의 정권과 장법 후에 갑자기 아래쪽에서 치솟은 등각은 아슬아슬하게 추룡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뇌에 충격이 갔는지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추룡이 재빨리 자세를 추스르며 뒤로 물러서자, 추묵환은 그제야 공격을 멈추며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추룡을 관찰했다.

“호오, 그걸 피해? 조금은 실력이 늘었구나.”

“당연히 늘었지. 팔 년 만인데.”

“그걸 감안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어영부영하는 필부들의 전장이라도 배울 건 있었나 보지?”

추묵환은 감탄하는 의미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추룡의 눈빛이 그 말을 듣자 삐딱해졌다.

“그 말투 마음에 안 드는데, 영감.”

“뭐라고?”

“어영부영하는 필부들의 전장이라니. 수적들 사이에서 왕초 노릇하는 영감이 할 말이 아니지 않아?”

이번엔 추묵환의 이마에서 핏줄이 돋아났다.

“수적이라고 다 같은 수적이 아니다. 우리 동정호의 수적들은 애초부터 싸움이 좋아서 들어온, 무림맹에서도 인정하는 무림인들이다, 이거야! 게다가 매일매일 무림인들이랑 전투를 벌인다. 어디서 농사나 짓던 놈들 징집해서 싸움 놀이 하는 전쟁터랑 같은 줄 아냐!”

“젠장, 그 말은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었어. 그러는 영감이야말로 전쟁터에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해? 알기나 하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알 게 뭐냐.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

추룡의 얼굴이 화를 참느라 붉으락푸르락했다.

“빌어먹을! 대화가 안 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버릇없는 아들놈! 팔 년 만에 왔으면 아비한테 오체투지를 하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해야지, 뭘 도망다니면서 근처를 어슬렁대는 거냐!”

“젠장, 첫날부터 이렇게 다짜고짜 싸우려고 드니까 그랬던 거 아냐!”

“당연하지! 네놈은 몸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는 바보니까 그런 거다. 네놈이 보낸 팔 년이 얼마나 헛된 시간이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 아니냐!”

“헛된 시간 아니라니까!”

“그럼 증명해라!”

“증명하면? 이젠 대놓고 수적질시키려고?”

“당연한 일! 네놈이 내 가업을 물려받아야 할 것 아니냐!”

“가업은 무슨! 수채는 거기 옆에 있는 해사(海蛇) 아저씨한테나 물려줘!”

추룡은 어느새 배에서 내려 조용히 추묵환의 뒤에 서 있는 장신의 사내를 가리키며 외쳤다.

등에 뱀 모양의 흉터가 있다고 해서 ‘바다뱀’이라고 불리는 그는 용왕수호대의 대장이자 추묵환을 평생에 걸쳐 보필한 충직한 사내였다.

해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럴 그릇이 못 됩니다, 도련님.”

“안 되긴. 저런 영감도 해먹고 있는 자린데!”

“그래도 이놈이!”

번갈아 가며 악을 쓰는 추룡과 추묵환의 사이에서 해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총표파자께선 이 장강의 영웅이십니다, 도련님.”

“……하아, 다들 속고 있는 거라고. 원래는 이렇게 성질 더러운 영감인 줄 모르고 말이야.”

“뭐야? 이런 쳐 죽일 놈이!”

“이봐! 지금도 조금을 못 참고 버럭 화를 내잖아!”

“이게 어디가 조금이냐! 이 버릇없는 놈! 화낼 만하니까 내는 거다!”

추룡도 적룡기마대에선 다혈질로 유명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상대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추묵환은 이마를 붙잡고 탄식했다.

“팔 년 전에 네놈이 연의를 읽고 관우가 되겠다니 뭐니 하면서 뛰쳐나가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으악, 그 얘기는 또 왜 꺼내는 거야!”

추룡의 뒤에서 부자간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적룡기마대의 대원들이 수군거렸다.

“연의? 연의를 보고 전쟁터에 지원한 거야?”

“단순하네.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못하는 건가?”

“아니, 그치만 추 형은 뭐랄까, 관우라기보단 장비지 않아?”

“그렇지. 관우가 되고 싶었던 건 애초에 환상인 거지.”

적룡기마대의 대원들이 씩 웃으면서 추룡을 쳐다보았다.

“시끄러워!”

추룡을 벌게진 얼굴로 소리 지른 뒤, 다시 사태의 원흉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영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나갈 때의 목표처럼 위대한 대장군이 되었냐는 거다.”

“…….”

“네놈이 나갈 때 나한테 전쟁터에 나가 관운장처럼 위대한 대장군이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서찰에 써서 보냈던 건 기억하냐? 기억 못하겠으면 여기에 증거가 있다.”

추묵환은 품속에서 이젠 너덜너덜해진 채 색이 바랜 종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그래.”

“……됐어.”

“뭐라고?”

“안 됐다고, 대장군은.”

물론 팔 년의 세월 동안 거기장군의 부장 자리 정도는 딸 만한 전공을 세웠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우 같은 대장군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영웅은 괜히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게 아니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실제론 그런 위치에 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들이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서 네놈은 뭘 잘난 척 콧대를 세우는 거냐?”

“…….”

“난 이 장강에서 최고가 되었다. 넌 뭘 했지? 전장에 나가서 거기서 최고가 되었나? 그것도 아니지?”

추룡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부모다.

이런 식으로 핵심을 찌르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듣자하니 거기서도 셋째밖에 안 되었다고 하던데, 네놈은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이곳으로 돌아온 거냐?”

“…….”

“어중이떠중이들한테 밀리고 세 번째라니……. 나참, 기가 차는군. 내 아들이라는 녀석이 겨우 세 번째밖에 못하는 거냐? 그런 멍청이들한테까지 밀려서?”

추룡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화가 난 얼굴로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며 추묵환을 쏘아봤다.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냐?”

“형님들은 멍청이가 아니라는 거야. 영감은 알아볼 생각도 안 해 봤겠지만 말이지. 그 두 사람은 정말로 대단해.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거야.”

자신은 욕을 들을 수 있지만, 형님들에게 욕을 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게 설령 자신의 부모라해도.

제대로 부딪쳐서 그 가치를 알리지 않고는 도저히 참지 못한다.

“좋아, 증명해 주겠어.”

추룡이 단호하게 말하자 추묵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어떻게 말이냐?”

“빤하지. 내가 증명하면 되는 거잖아. 형님들은 나보다 강하니까 말이야.”

“강하다? 너보다?”

“그래, 나보다 강해. 아무리 수련해서 덤벼도 이길 수가 없었어.”

“용왕십삼기(龍王十三技)를 열여섯에 익힌 너보다 더욱 강하다?”

“그렇다니까.”

“그놈들은 나이가 얼마나 됐지?”

“나보다 한두 살 많을 거야.”

“…….”

“왜 그래? 시험 안 할 거야? 지금까지 계속 싸우려고 했잖아?”

추룡이 호전적인 표정으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적룡기마대 쪽으로 손을 쭉 뻗자, 한 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새카맣고 무거운 창을 던져 주었다.

“너, 그건……?”

추묵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추룡의 손에 들린 것은 흔히 ‘언월도’라 불리는 중병이었다.

길이는 육 척 정도.

도대체 몇 번을 정련했는지 짐작이 안 갈 만큼 단단해 보이는 묵철의 창대 위에 반달형의 칼날이 붙어 있었는데, 무기에 배여 있는 날카로움과 살기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창대에는 칼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황룡이 양각되어 있었다. 칼날의 위쪽에는 마치 낚시대처럼 뭔가를 걸어서 잡아당길 수 있도록 뾰족한 고리가 만들어져 있었고, 두툼한 칼날은 사람의 몸을 통째로 베어 넘길 수 있을 만큼 육중해 보였다.

명 제국 최고의 장인인 풍 도공이 만든 오룡창 중 하나, 황룡창(黃龍槍)이 바로 그것이었다.

추묵환은 황룡창을 보며 잠시 그 뛰어남에 놀랐으나,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무기에 살기가 지나치게 짙다. 무인(武人)의 병기가 아니라, 대량으로 살상을 하기 위한 병기다. 육중하고 파괴력이 있지만 섬세함이 없어 보이는군.”

초절정고수의 안목은 단번에 무기가 가진 목적을 꿰뚫어 보았다.

“무기라는 게 잘 벨 수만 있으면 됐지, 무슨 소리야.”

“끄응…….”

“그리고 영감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그쪽도 충분히 중병기면서?”

“이놈! 해신(海神)은 그런 투박한 살상 병기와는 다르다!”

“삼첨양인도라니, 그거야말로 시대에 뒤처진 중병 아냐?”

추묵환이 등 뒤에서 꺼내 든 것은 칼날 세 개가 나란히 늘어져 있는 삼지창 형태의 병기였다.

창대에선 은은하게 푸른빛이 감돌고 칼날은 은백색의 예기를 흩뿌렸다.

찌르기와 베기 모두에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는 싸우는 전사에게 있어선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이름은 해신(海神).

총표파자가 되기 전부터 추묵환이 애용해 온 가보였다.

한때는 추룡도 삼첨양인도를 쓰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황룡창을 최고로 여기고 있었다.

“너, 내가 해신을 든 의미를 알고 있겠지?”

추묵환은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장난스런 싸움은 이제 끝이다.

병기를 들었다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그게 장강 수적들의 규칙이었다.

“알고 있어.”

추룡 역시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느새 주변엔 구경꾼들이 수백에 달하고 있었다.

한쪽엔 대석과 적룡기마대, 다른 한쪽엔 용왕수호대의 호걸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팔 년 만에 돌아온 총표파자의 후계자가 무공을 선보이는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장강에 있어서 두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했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네 적이다. 목숨을 걸어라.”

눈을 부릅뜨는 것과 동시에 흩날리는 백발.

압도적인 기파가 동정호를 뒤흔들었다.

장강용왕 추묵환과 적룡기마대의 셋째 추룡.

양자가 곧바로 격돌하는 듯싶었으나, 추룡은 선뜻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젠장, 영감탱이. 강하긴 강하군.’

눈이 시뻘개지도록 상대를 살폈으나 도저히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봤지만, 역시 그의 아버지는 생각보다도 훨씬 강했다.

수천 명의 수적들을 거느린 장강의 왕.

높은 산에 오를수록 더 높은 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던가.

지금 추룡이 느끼는 심정이 딱 그랬다.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야, 안 오는 건가?”

자세를 잡고 있던 추묵환은 잔뜩 긴장한 추룡을 보며 재미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받아 봐라. 우선 용왕십삼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움직이는 추묵환.

젊은이 못지않은 건장한 육체가 대치를 박찬다. 흙더미가 사람의 키만큼이나 뒤로 튀어오를 만큼 강하게 발을 구르며 전방으로 도약한 추묵환은 손에 든 삼첨양인도를 바닥으로 내려쳤다.

수직으로 내리찍는 종타(縱打).

추룡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으나, 바닥에 있던 돌멩이들이 포탄에 얻어맞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처참하게 박살 나며 사방으로 튕겨졌다.

두두두두―

튀어 오른 파편이 몸에 와서 부딪쳤다.

추묵환은 옆으로 피한 추룡을 흘끗 바라본 뒤 곧바도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삼첨양인도, 해신이 이번엔 수평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추룡 역시 그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곧바로 몸을 반 회전하며 허리에 낀 황룡창을 똑같이 수평으로 휘둘러 정면으로 맞받았다.

꽈아아아앙―!

창과 창이 부딪쳤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굉음과 함께 추룡의 몸이 비틀거렸다.

발이 땅 밑으로 파고들고 허리가 휘청거렸다.

추묵환이 펼친 공격의 위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초절정이라 불릴 만큼 완성된 내공.

그리고 나이가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해서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근육을 갖고 있는 외공이 결합해서 만들어 낸 경천의 파괴력인 것이다.

하지만 추룡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추묵환은 오히려 경악한 기색이었다.

“너……!”

“핫! 예전 같으면 맞받아치는 순간 기절했을 텐데…… 이거지?”

“…….”

“영감도 이젠 예전 같지 않은데? 아니, 내가 강해진 건가?”

“호오?”

“이제 장난은 그만 쳐. 절반의 힘이잖아. 나를 우습게 보면 정말로 큰일 날 거야.”

씩 웃는 추룡을 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추묵환.

그는 이내 흐뭇한 듯이 웃으며 더 이상 아들을 시험하기를 포기했다.

추룡은 이미 그가 시험할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어느새 그렇게 컸는지, 전심전력으로 싸워야 할 상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아아악―!

더더욱 강렬한 기파가 숨김없이 뿜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 듯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서는 자.

추룡이었다.

쉬이이익―!

좌반신을 전방으로 내민 채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가 든 황룡창, 즉 언월도는 삼첨양인도보다 길이가 길었다. 그만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에게 다가가 곧바로 창을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듯이 휘둘렀다.

목표는 다리 사이의 고간.

같은 남자로서 금기시된 목표지만 그곳이 가장 공격하기가 쉬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표를 찔렀다고 생각했으나, 추묵환은 당연하게도 이미 공격의 궤적에서 벗어난 뒤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활기찬 움직임으로 옆으로 튀어 오르더니, 이번엔 추룡의 배후를 잡으려고 했다.

“어림없어!”

추룡은 허공을 찔렀던 날끝을 곧바로 옆으로 회전시켰다. 칼날의 궤적은 분명하게 추묵환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해신으로 등을 찌르려고 했던 추묵환보다 먼저 칼날이 도달해야 했으나, 그 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크윽!”

쩡!

단발의 강렬한 충격과 함께 창날이 위쪽으로 튕겨 올랐다.

우우웅―!

해신의 칼날이 아지랑이처럼 뿌옇고 빛나는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기(劍氣).

아니, 이건 창기(槍氣)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기(氣)의 경지를 넘어서 강(强)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추룡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제이타가 오고 있었다.

투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추룡의 자세가 무너졌다.

육십이 넘은 노인을 상대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파괴력이다. 추룡이 힘으로는 밀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 이어지는 연환 공격 또한 굉장했다. 폭풍처럼 연이어진 공격에 추룡은 반격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뭐냐! 벌써 끝인 거냐!”

추묵환은 호탕하게 웃으며 해신을 뒤쪽으로 쭉 뺐다가 단번에 앞으로 내찔렀다.

용왕십삼기. 그중 세 번째인 관(貫)이었다.

동정호 위에서 쓰면 웬만한 배를 통째로 박살 내는 파괴력을 가진 일격.

추룡은 그 공격을 반쯤 구르다시피 몸을 회전하며 피해 낸 뒤, 황룡창을 바닥을 향해 내려쳤다.

“음? 이 녀석이!”

정면으로 후드득 튀어 오르는 흙덩어리들을 쳐 낸 추묵환이 노성을 터뜨렸다.

“부족하다! 이런 알량한 수로는 네 능력을 증명하기에 너무나 부족해!”

후웅―

해신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흙먼지를 흩어 버리는 추묵환.

아마 그 당당한 기세는 백 명에게 둘러싸여도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추룡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야에 포착되지 않을 만큼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이 추묵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파하앗―!”

힘찬 기합성.

쾅! 하고 내딛는 진각.

휘리릭―!

황룡창이 최근거리에서 태풍처럼 회전했다.

베는 무기를 다룰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밀어서 ‘자르는 것’.

다른 하나는 당겨서 ‘베는 것’이다.

밀어서 자르는 방식은 완력과 무게를 이용하는 방법이고, 당겨서 베는 것은 무기의 원심력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원심력을 이용하려면 무기의 길이가 길수록 좋다.

예를 들면 ‘창’처럼.

촤악―!

“흡……!”

추묵환이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백색의 미염이 반쯤 잘려서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추묵환이 최대한 상체를 뒤로 젖혀서 피해 낸 덕분이다. 자칫 방심했다간 수염이 아니라 어깨가 잘려 나갔을 상황이다.

“이놈……!”

추묵환은 아끼던 수염이 잘려 나갔다는 것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마음속 깊이 기뻐했다.

아들이 강해졌다.

이젠 정말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만큼 강해진 것이다.

두근! 두근!

한편, 추룡은 그 순간 다른 세계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무박자(無拍子)의 세계.

누군가는 신속(神速)의 세계라고도 하는 초월의 공간이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세계가 빛을 잃고 온통 흑백의 색채만으로 변했다.

추룡은 달리고 있었다.

무거운 물속에 들어온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본래대로라면 절대로 시간 내에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너어어어……….”

추묵환의 목소리가 마치 길게 늘여 놓은 것처럼 늘어졌다.

그의 해신이 움직이고, 용왕십삼기의 마지막 초식. 해일(海溢)을 사용했다.

사방을 뒤덮는 해신의 그림자.

찌르고, 베고, 할퀴어대는 삼첨양인도가 그의 퇴로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다시금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추룡은 거기서 더욱 집중력을 높였다.

해신의 움직임이 한층 더 느리게 보였다.

추룡은 해신의 움직임보다 아주 조금 더 빨리 움직여서 아슬아슬하게 그에게 다가오는 공격을 피해 추묵환의 배후를 잡아 냈다.

후우웅―

용왕십삼기의 마지막 초식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

허무. 경악. 불신.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추묵환의 표정을 일별한 뒤, 추룡은 그대로 황룡창을 움직였다.

‘이겼다……!’

생애 처음 아버지를 이겼다.

그렇게 생각하며 척, 황룡창의 날을 추묵환의 목에 갖다 대는 순간,

후우우웅―!

“헛……?!”

갑작스레 세계가 반전했다.

분명히 반대쪽을 보고 있었던 추묵환이 어느새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백염의 노인은 똑같은 세계에서, 똑같은 속도로 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해신이 정확하게 반 바퀴를 회전하며 황룡창의 창날을 위로 올려쳤다.

휘청, 흔들리는 육체.

그리고 해신은 공중에서 다시 한 번 반 바퀴를 회전해 이번엔 황룡창의 창대를 강하게 내려쳤다.

쩌저정!!

“푸하학……!”

추룡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자신의 황룡창에 깔린 꼴이 되어, 그대로 마차 바퀴에 밟힌 개구리처럼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나마 꼴사납게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리라.

추룡이 마지막에 받은 일격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파괴력이 있었다.

“놀랐다…….”

쿨럭쿨럭, 거친 기침을 토해 내는 추룡에게 미미하게 떨리는 추묵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초속(超速)의 경지에 갔을 줄이야……. 네가 그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초속의 경지는 곧 초절정의 경지.

추묵환의 눈빛이 떨렸다.

는 중원 천하에 몇 없는 ‘왕’의 칭호를 받은 무림인이다. 무림오선을 제외하곤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불과 스물을 조금 넘긴 아들에게 깨질 뻔했다.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너보다 강하다고? 너도 이만큼이나 강한데…… 겨우 너와 한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녀석이, 네가 확실히 패배를 인정할 만큼의 실력이 있단 말이냐?”

“쿨럭쿨럭. 큭, 그렇다고. 형님들은 내가 확실히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실력이 있어.”

“…….”

“어때, 영감탱이. 나를 보니까 알겠어? 내가 있던 전장이 얼마나 사나운 곳인지?”

어린 시절 거칠고 사나운 수적들 사이에서 자란 추룡이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다.

무림인에겐 전쟁이 별거 아니다?

그런 속설은 다 개소리다.

직접 전쟁에 나가 보지도 않은 무림인들이 지어 낸 이야기가 틀림없다.

아무리 초절한 실력을 가진 고수라도 몽고 기병 백 명조차 당해 낼 수 없다.

하물며 하늘이 까맣게 보일 정도의 화살비와 지축을 울리는 대군의 진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린…… 강해.”

그런 전장에서 살아남은 독종 중의 독종들이 바로 적룡기마대다. 추룡은 자신이 적룡기마대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바보 아들놈…….”

추묵환은 그런 추룡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래, 너희는 강하다.”

마침내 인정해 주었다.

추룡뿐만이 아니라 뒤에서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고 있는 대석도, 그 뒤에서 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적룡기마대도 모두가 강하다.

즉, 추룡이 전장에서 보낸 팔 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흐흐, 드디어 인정했구만. 가끔은 솔직한데?”

“시끄럽다. 버릇없는 녀석. 네놈은 말버릇부터 고쳐야 해.”

“할 수 없어. 이렇게…… 태어난 걸…….”

추룡의 말끝이 점점 흐려지면서 마침내 눈을 감았다.

아닌 척 버티고는 있었지만 마지막에 당한 공격의 내상이 제법 무거웠던 것이다.

쿨쿨, 순식간에 코를 골며 잠에 빠지는 추룡.

“이 녀석…….”

대석, 적룡기마대, 용왕수호대.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추묵환은 한참이나 그런 추룡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잠깐, 뭐라고? 서찰? 나한테?”

“아아, 셋째 형 앞으로 와 있었수.”

대석은 배부른 곰처럼 나른하게 앉은 채 대답했다. 추룡이 정신을 차렸을 땐 약초 냄새로 그득한 어느 의원의 약방 안이었다. 그리고 방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대석이 추룡을 보자마자 한 소리가 ‘서찰이 있수’라는 말이었다.

“누구한테서? 그리고 언제 그런 걸 받았는데?”

“누구한테서 온 건지는 모르겠고, 셋째 형이 쓰러지고 나서 아버님이 나한테 주고 갔수.”

“영감탱이가……?”

추룡은 대석으로부터 서찰을 받아 들고 급한 마음에 한달음에 펼쳐 보았다.

발신인 자리엔 운(雲)이라는 글자뿐.

하지만 그 한 글자만으로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운화 형님!”

“어? 둘째 형님이 보낸 거였수?”

대석은 글자를 읽지 못한다. 추룡은 손바닥을 들어 올려 대석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낸 뒤, 한 호흡에 장문의 내용을 쭉 읽어 내렸다.

“이건…….”

내용은 잘 알았다.

대형을 위해 큰 싸움이 일어날 테니 와서 도와달라는, 기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깨어나면 용왕도 안에 갇혀 있을 줄 알았는데…… 근처 마을에 그냥 두고 가 버릴 줄이야. 게다가 이 서찰을 굳이 나한테 넘겨준 이유가 뭐지?’

그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대석이 첨언을 덧붙였다.

“아버님께서 전언을 남겼수. 만약 죽으면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더 날뛰다 오라고……. 그리고 배울 것은 배울 수 있을 때 확실히 배우고 오라고…….”

“…….”

“셋째 형?”

추룡은 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가를 소매로 훔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쳇, 영감탱이. 노망이라도 든 모양이네.”

“그런가……?”

“그래. 안 그러면 이럴 리가 없지.”

“하지만 아버님이 셋째 형을 되게 아끼는 것 같았수. 팔 년 전에 쓰고 나갔던 서찰을 항상 품에 넣고 있던데, 그거 아무나 그러는 거 아니잖수?”

“……쳇.”

그러고 보면 항상 그랬다.

항상 윽박지르고 구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 속에는 아들을 훌륭한 호걸로 만들고 싶다는 애정이 항상 숨어 있었다.

“이제야 인정을 하고 말이야…….”

추룡은 투덜거렸다.

그렇게라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으면 도저히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듯했던 것이다.

끼익―

약방의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앞에는 해사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 년 전에 봤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무뚝뚝한 얼굴의 용왕수호대장.

그는 어딘가 따뜻한 느낌의 눈빛으로 추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긴 왜 왔어요? 아버지가 마음이 바뀌었으니 도로 데려오래요?”

부친인 추묵환에게도 반말을 툭툭 내뱉던 추룡이지만, 어릴 적부터 그를 진심으로 아껴 주던 해사에게는 늘 존댓말을 사용했다.

“도련님,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군요.”

“……쳇.”

“아버님의 전언입니다. 만약 수로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하오문이 연결되어 있을 법한 객잔이나 수로채에 전언을 남기라 하셨습니다. ‘용왕의 손님’이라고 말하면 웬만한 편의는 다 봐줄 것입니다.”

추룡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질문했다.

“용건은…… 그것뿐?”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도련님의 성장에 저도 뿌듯하였습니다.”

“…….”

“저뿐만이 아닙니다. 수로채의 형제들 모두 진심으로 감탄하고, 도련님의 귀환을 기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추룡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쳇, 나 이런 간지러운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죠, 해사.”

“무슨 말씀이신지……?”

“됐어요, 됐어. 하여간 이름 그대로 능구렁이라니까.”

해사는 얼음에 금이 간 것처럼 미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 가는 길에 마중도 안 해 주신데요?”

“제멋대로 나갔던 자식인데 뭣 하러 배웅까지 해 주냐고, 나중에 길 잃어버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기나 하랍니다.”

“하하, 끝까지 꼬마 취급인가? 아버지답네.”

추룡은 해사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밖으로 나섰다. 문밖에는 이미 말까지 대동해서 출발 준비를 마친 적룡기마대원 백오십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적룡기마대!”

“예에―!”

“이야기는 들었지?”

“오오―!”

“목적지는 항주! 목표는 대형을 돕는 것. 그리고 상대는…….”

추룡은 호전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 위에 올랐다.

“……몽고의 떨거지들.”

“우오오오오―!”

우렁찬 함성이 동정호 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몽고의 잔병들.

적룡기마대의 전의를 돋우는 데는 그만한 상대도 없었다.

“그럼 출진이다! 이동 경로는 최단 거리로 주파한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휴식도 없어!”

“오오오……?”

“대신 도착하면 내가 크게 쏜다!”

“우오오오오―!”

“괜찮지?”

“괜찮습니다!”

“푸핫! 그리고 해사!”

약방의 문 앞에 선 채 그들을 배웅하던 해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한테 전해 줘요. 이번 일이 끝나면 진짜로 돌아오겠다고.”

“아버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하핫! 그럼 갑니다!”

히히힝―!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적룡기마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동정호에서 항주로 이어지는 인연.

앞으로 항주에서 벌어질 일의 가장 큰 변수의 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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