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八章 ― 인연정리(因緣情理)
“텐챠이……!”
장기린은 오랜 시간 동안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바위를 깎아 놓은 듯한 거구임에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뒷머리만 길게 기른 변발에, 선이 굵은 얼굴 위로는 장기린이 새겨 준 상처가 여전히 왼쪽 눈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텐챠이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눈에는 침착한 살기가 깃들어 있고,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파는 황제를 연상시킬 정도로 패도적이다.
몽고의 영웅 텐챠이.
어째서 그가 이곳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장기린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휘연의 목에 칼이 닿고 있다. 일단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게 우선이었다.
“휘연을 놔줘라.”
텐챠이의 흉터가 꿈틀, 하고 마치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이 여인이 너에게 소중한가?”
“그래.”
장기린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휘연이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다급하게 고개를 젓고, 텐챠이는 ‘호오’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붉은 악귀가 여인을 소중히 한다라……. 재미있군. 상상도 못했던 일이야.”
말로는 재미있다고 하지만, 텐챠이는 실망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칼날로 휘연의 목을 툭툭 건드리던 텐챠이.
그의 대도(大刀)가 휘연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윽……!”
억눌린 비명과 함께 휘연의 몸이 살짝 경련했다.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핏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너…….”
장기린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동안 억누르고 지워 버리려고 애썼던 살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살벌한 공기가 객잔 안을 짓눌렀다. 텐챠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래, 이제 조금 낫군.”
“무슨 소리냐?”
“평범한 척, 약한 척하는 게 우스웠단 말이다. 붉은 악귀는 항상 귀신 같은 살기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붉은 악귀가 아니지.”
스릉―
텐챠이가 손목을 뒤집어 칼날을 움직였다.
“너……!”
휘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장기린이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찰나, 텐챠이는 장난치듯이 칼날만 한 번 앞뒤로 흔든 뒤, 다시 휘연의 목에 갖다 대었다.
그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로 이 여인을 아끼는군.”
“……텐챠이, 만약 휘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를 끝까지 쫓아서 반드시 죽여 버릴 거다.”
장기린은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서히 그의 눈에서 차오르는 붉은빛의 살기.
보통 사람이 눈을 마주치면 천적을 만난 개구리처럼 굳어 버리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하핫!”
텐챠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다.”
“큭……!”
“이 여인을 죽이면 되는 건가? 그러면 나는 붉은 악귀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내 얼굴에 새겨진 흉터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장기린은 이를 악물었다.
틈을 노려 휘연을 되찾을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원하는 게…… 뭐냐?”
“글쎄.”
“왜 이곳에 온 거냐? 복수인가?”
텐챠이의 입장에서 장기린은 몽고의 몰락을 초래한 주범이다. 당연스레 그에 대한 복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다.”
그런데 텐챠이는 골똘히 생각하며 그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고?”
“그저 붉은 악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예상과 많이 다르군.”
텐챠이의 차가운 시선이 장기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장 하나 없이 맨몸. 객잔 안에 진천룡은커녕 흔한 죽창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그렇게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지?”
“……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그건 도망치는 것이다, 붉은 악귀.”
텐챠이는 단언했다.
마치 장기린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듯이.
“전장에서 네가 죽인 전사들. 너 때문에 대의를 잃은 원제국의 원한. 그리고 나와의 승부도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걸 모두 뒤로 버리고 갔는데 도망친 게 아니라는 건가?”
텐챠이는 칼을 들지 않은 왼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매만졌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듯이 섬세한 손길이었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보자 자신도 옆구리의 상처가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대가로 나는 옆구리를 베였을 텐데.”
“네가 방심해서였지.”
“그렇게 따지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아니다. 내 상처는 한창 싸움이 고조되던 도중에 입은 실력에 의한 일격. 반면에 내가 입힌 상처는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장기린은 복잡한 심정으로 텐챠이를 바라봤다.
텐챠이는 이런 자였다.
대충 서로 일격을 주고받았으니 동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너무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탓에 자신의 부족함마저 인정해 버린다.
“후우…….”
장기린은 한숨을 내쉰 뒤 텐챠이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으며 물었다.
“그러면 안 되나? 도망치면 안 되는 건가?”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텐챠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붉은 악귀가 원한에서 도망치겠다고?”
“그래. 난 더 이상 붉은 악귀로 살고 싶지 않다.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벼웠다. 더 이상의 싸움은 싫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러면 안 되나?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선 안 되는 건가?”
“무슨……!!”
텐챠이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객잔을 뒤흔들었다.
“네놈은 그렇게 간담이 없는 자였나! 이 창천랑, 텐챠이의 하나뿐인 숙적이 그렇게나 기백없고 무능한 필부에 불과했냔 말이다!”
“그래, 난 무능한 필부다. 아니, 무능한 필부가 되고 싶다.”
“……!”
충격을 받은 듯 텐챠이는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믿지 않는다.”
“믿어라. 그리고 휘연을 놔줘.”
“그럼 묻겠다. 난 네 말대로 너에게 갚을 원한이 있다. 그럼 이 여인을 인질로 잡고 너를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지금 너를 죽이겠다고 한다면 순순히 죽을 건가?”
“죽겠다.”
장기린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텐챠이의 깊은 눈빛이 장기린의 속을 꿰뚫을 듯이 빛났다.
“객주님! 안 돼요!”
휘연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으나 장기린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싸움을 원한다면 싸워 주겠다. 저항없이 죽기를 원한다면 죽어 주겠다. 대신 휘연은 살려다오. 그녀는…… 나 때문에 죽어선 안 되는 여인이다.”
“객주님!!”
“무엇이든 말해라, 텐챠이. 그녀를 살려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 주겠다.”
또다시 십 년 전의 일을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을 다시 두고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장기린은 결연하게 마음을 다잡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걸로 텐챠이와 휘연까지의 거리가 두 발자국으로 좁혀졌다. 텐챠이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칼날의 방향을 장기린의 목으로 바꾸고 있었다.
살기의 방향이 바뀐다.
본능이 생명의 위협을 경고한다.
성큼.
장기린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갔다.
목이 따끔했다. 텐챠이의 칼끝이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안 돼요!”
휘연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장기린을 밀치고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장기린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옆으로 밀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휘연, 안 돼!”
“저도 싫어요! 객주님이 희생되는 건 안 돼요!”
척하니 양팔을 벌리고 장기린의 앞을 막아서는 휘연.
쉬이익―
그때, 텐챠이의 칼날이 위로 올라갔다. 대각선으로 내리긋는 참격 직전의 자세였다.
장기린은 다급해졌다.
텐챠이는 일격에 인마(人馬)를 한꺼번에 베어 버리는 패도적인 도법을 사용한다.
칼이 올라간 이상 피하기엔 늦었다. 아니, 설령 피할 수 있다 해도 장기린 혼자라면 모를까, 휘연까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안 돼!’
장기린은 휘연의 허리를 잡아채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팔 한쪽 정도 잃는 것은 각오했다.
중요한 것은 그 뒤.
장기린은 이미 머릿속으로 팔을 잃은 뒤 휘연을 어떻게 피신시키고, 텐챠이와 어떻게 상대할지까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버릇은 아무리 평탄한 삶 속에서 녹슬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 마음 깊숙한 곳에 꿋꿋이 남아 있던 것이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몸을 옆으로 날린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뒤,
탁! 휘리릭―!
식탁을 박차고 바닥에 내려섰다.
휘연은 급작스런 움직임에 어리둥절한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장기린은 휘연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 주고 자신의 왼팔을 확인했다.
“음……!”
그런데…… 멀쩡했다.
왼팔이 잘리기는커녕 옷깃조차 베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장기린의 눈에 조용히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는 텐챠이의 모습이 보였다.
철컥―
“…….”
“…….”
칼을 집어넣은 텐챠이.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장기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다가…… 마침내 텐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이었군, 네가 퇴역했다는 것.”
“……이미 그렇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믿을 수 없었다. 이 텐챠이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전사로서의 길을 포기하다니. 난 당연히 네가 은퇴한 척을 하고 새로운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는 텐챠이에게 평소와 같은 존재감은 없었다. 묵묵히 서 있는 뒷모습에서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만이 들 뿐이었다.
“싸울 마음이 없는 자를…… 벨 필요는 없겠지.”
텐챠이는 칼에서는 완전히 손을 뗀 상태. 더 이상 전의는 없어 보였다.
“대륙은 넓다. 나 정도의 인물은 찾아보면 많이 있을 거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라고 생각하나? 운화만 해도 나 못지않아.”
“적룡기마대의 둘째? 물론 칼 솜씨만 따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장에서 나와 맞상대할 장수로선? 아니, 이 세상에 그럴 만한 장수는 너 하나뿐이다.”
“고맙다…… 고 해야 하나?”
“고마워할 필요 없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텐챠이는 휙― 하고 몸을 돌려 장기린을 쏘아봤다.
여전히 강렬한 안광.
호랑이를 마주한 것처럼 강렬한 기파가 주변을 압도했다.
“전사가 아닌 자와는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충고하지. 만약 앞으로 항주에서 ‘일어날 일’에 네가 끼어든다면…… 그때는 정말로 네가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부서질 것이다.”
텐챠이의 시선이 장기린의 어깨너머 휘연을 향했다.
움찔 몸을 떠는 휘연.
장기린은 한 발자국 옆으로 몸을 움직여 휘연을 텐차이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했다.
“……정말로 변했군.”
텐챠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변하려 노력하고 있어.”
“흠, 그게 좋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라.”
쏘아붙이는 듯한 어조지만, 그 안에 약간의 정이 담겨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 장기린뿐만은 아닐 것이다.
텐챠이와 장기린.
숙적이자 원수이며, 또한 어떤 의미에선 전우라고 할 수 있는 애증의 관계였다.
끼이익―
텐챠이가 등을 보인 채 대문을 열었다. 장기린은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결말은 짓지 않을 건가?”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에 따라 앞으로의 행동방식이 바뀌어야 할 테니까.
텐챠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핫!’ 하고 짧게 웃으며 물었다.
“붉은 악귀, 전장에서 나온 뒤 몇 명이나 죽였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 뒤로 셀 수 없는 숫자를 죽였다. 그게 지금 너와 나의 차이다. 너는 녹슨 칼이고, 나는 잘 벼려진 칼이지.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 어째서 굳이 결말을 지어야 하지?”
텐챠이는 ‘반론이라도 있나?’라는 듯한 오만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응시했다.
“그런가…….”
예전의 ‘붉은 악귀’였다면 여기서 ‘웃기지 마라!’라고 외치며 창을 휘둘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저 순순히 납득하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없는 자존심 따위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거다.”
텐챠이는 장기린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돌려 대문 밖의 인파 속에 섞여 들었다.
한창 손님이 몰릴 때의 금선로.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자 텐챠이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인연이 폭풍처럼 다가왔다가 화창한 날의 아침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방금 전의 모든 일들이 꿈이었던 것 같다.
장기린은 바싹 조였던 긴장이 단번에 풀려 버리는 허탈함을 느꼈다.
“아아…….”
“휘연?”
긴장이 풀린 것은 장기린 혼자만이 아니었다.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휘연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있었다.
장기린은 황급히 문을 닫고 휘연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잡아 주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상처 입은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갔나요?”
“그래, 갔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휘연은 안도하며 장기린의 왼쪽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무엇이 다행이라고 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연은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치 지금 놓치면 영영 사라져 버리는 물건을 대하듯이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붙잡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휘연…….”
목숨을 걸고 앞을 막아서던 휘연.
자신이 인질이 되었을 때 괜찮다며 눈물조차 보이지 않던 휘연.
이런 여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 하늘이 내려 준 단 한 명의 짝이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장기린은 이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있어.”
장기린은 휘연을 객잔의 한쪽 벽에 기대앉게 한 뒤, 자신도 그 옆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짹― 짹―
반쯤 열린 창문 밖에서 참새들이 아침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기름을 다 써 버린 등불에선 빛 대신 연기만 점점이 피어올랐다. 막 떠오른 해의 어스름한 빛무리가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객잔 안을 밝히고, 한밤중에 취객들로 왁자지껄했던 창밖은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한밤중에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빛이 밝아 올 때쯤에야 끝이 났다.
지루하거나 졸릴 만도 하건만, 휘연은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이야기를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전부 들어 주었다.
장기린이 기억할 수 있는 참혹했던 어린 시절부터, 대장군 공손웅에게 거둬져 대장군가에서 자란 일, 그리고 열다섯이 되었을 때 흑룡강 너머의 북쪽 전장으로 지원해 십삼 년간 전쟁터에서 살아온 이야기까지.
장기린은 자신의 인생에 있던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친구, 우정, 적룡기마대, 전우애, 목숨이 위험했던 전투들, 배신자, 상급 간부와의 충돌.
그리고 심지어 십 년 전에 있은 그의 첫사랑까지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군요. 객주님은 그렇게 살아왔군요.”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내용에 따라 얼굴이 빨개지도록 흥분하기도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로 슬퍼하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의 휘연의 반응은 매우 담백했다.
“객주님.”
“왜 그러지?”
“이쪽을 봐주세요.”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리자, 봉긋하게 솟은 노란색 천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
푹신푹신하고 따스한 체온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뒤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머리 뒤로 돌려 깍지까지 낀 손이 그의 뒤통수를 꽉 눌렀다.
“가만히 계세요.”
명령이라기보다는 따뜻한 권유에 불과했는데, 장기린은 어째선지 그 말에 거스를 수가 없었다.
처음에 어색했던 자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졌다.
단순히 머리가 가슴에 안겼을 뿐인데, 마음 깊숙한 곳까지 끌어안겨진 듯했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근 것처럼 전신의 긴장이 풀렸다. 사지육신이 노곤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리 위로 휘연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괜찮아요. 객주님의 곁에는 앞으로도 항상 제가 있을 거예요. 결코 외롭게 하지는 않을게요.”
“그래……?”
“네. 그러니 슬퍼하거나 고민하지 마세요. 힘든 일이 있으면 저에게 기대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먼저 객주님을 떠나는 일은 없어요.”
장기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자신도 휘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가, 나는 외로운 삶을 살았던 건가?’
휘연 덕분에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전장에서도 그를 진심으로 위해 주던 사람은 있었다. 대장군 공손웅이 그랬고, 적룡기마대의 형제들이 그랬으며, 친구인 현백 또한 그를 진심으로 위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장기린은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평범함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괴리감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기린은 언제나 고독했다.
그때까진. 지금의 휘연처럼 그의 모든 것을 알고도 그를 다정하게 감싸 안아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휘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생각.
휘연은 장기린에게 그만큼이나 커다란 존재가 되어 버렸다.
“휘연을 만나서 다행이야.”
“네. 저도 객주님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의 머리를 감싼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용기를 내어 다정한 말을 하면 더욱 다정한 말로 되돌려 준다.
장기린은 지금 그가 느끼는 끝도 없는 행복감과 안정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포근한 품 안.
모든 것을 다 받아 주는 상대.
그건 마치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모성애’와 같았지만, 한 번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적이 없는 장기린에겐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참, 그 적룡기마대의 형제들 이야기는 재미있었어요. 혹시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특히 진구 씨의 이야기요.”
휘연은 장기린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평소처럼 이야기했고,
“그 녀석에 관한 이야기는 많아. 하루에 한 번씩 사고를 안 치면 성이 안 차는 녀석이니까.”
장기린 역시 품에 안겨 눈을 꼭 감은 채 평소처럼 대답했다.
“후훗, 그럴 것 같았어요.”
“한 번은 별동대로 나가서 사흘간 보급이 끊겼을 때의 이야긴데, 진구 녀석이 적진의 보급 창고를 털어 먹자고 나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휘연은 편안하게 무릎을 눕혀서 앉고, 장기린은 그런 휘연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자세로 바뀌었지만 어느 한쪽도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이야기를 하던 쪽도, 이야기를 듣던 쪽도 어느 순간 둘 다 잠이 들어 버렸다.
생전 처음으로 ‘누워서’ 편안하게 잠을 잔 장기린은 일어나서 경악하게 되지만, 그건 나중에 있는 일.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으으…….”
아침 세안을 마친 뒤 슬슬 대문 앞을 쓸기 위해 싸리비를 들어 올렸던 휴는 별채에서 본채로 향하는 문 앞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운찬을 발견했다.
운찬의 거동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문을 삼분지 일 정도만 살짝 연 채 그 안을 들여다보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으앗! 쉬, 쉿! 쉬쉿!”
운찬은 다급하게 돌아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왜 안 들어가고…….”
“안 그래도 그게 문제라고. 도저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어.”
“어째서? 아……!”
의아해하며 문틈을 슬쩍 들여다본 휴는 운찬이 왜 그렇게 신음을 흘리면서 고민하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객잔 안의 한쪽 벽에 두 사람이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릎을 옆으로 눕힌 채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은 휘연.
휘연의 무릎을 베고 조용히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장기린.
창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따스하게 비쳐 주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굉장히 다정한 모습이잖습니까! 최근에 분위기가 좋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사이가 진전되었을 줄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우리가 모르는 새 엄청난 사건이라도 있던 겁니까?”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그 엄청난 사건이 바로 어젯밤에 일어났지만, 힘든 노동에 지쳐 깊이 잠들어 있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어차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 계기가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건 예정된 일이 아닐까?”
“흐음, 과연 그렇군요. 사건이 없어도 자연스레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까?”
“그거야 모르지만…… 그보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건 좋지만, 나도 새벽에 할 일이 많으니 이렇게 일을 못하게 막아 버리면 곤란한데…….”
운찬은 한숨을 푹 쉬며 투덜거렸다. 그 순간, 휴의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반짝 빛났다.
“흐음? 강 숙수님,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뭐, 뭣? 질투?!”
“아무리 지독한 연애로 상처를 입은 과거가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남의 불행을 바라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길에서 사이좋은 연인만 보면 ‘제길, 멍청한 것들, 어차피 나중에 상처만 입고 끝날 거면서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 거냐? 빨리 헤어져 버려라!’라고 중얼거리는 삐딱한 사내가 되어 버릴 겁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운찬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화를 냈다.
“질투 안 해! 안 한다고! 이건 그냥…… 오늘의 업무에 대한 걱정이야!”
“흐음, 그렇습니까?”
“……그 의심에 찬 눈초리는 뭐야?”
“뭐, 강 숙수님이 그렇다면 됐습니다.”
“안 됐어. 안 됐으니까 빨리 그 눈초리에 대해 설명해.”
“그보다 새벽 시장 시간에 늦은 것 아닙니까? 오늘은 뒷문을 이용하시죠.”
“말 돌리지 마! 아니, 그보다 뒷문?”
“저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두 분이 주무시고 있는데, 그걸 깨워서야 안 되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뒷문으로 가면 시장까지 반 시진은 더 걸릴걸?”
별채 쪽에 뒷문이 있지만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대문을 이용하면 곧바로 금선로로 이어지지만, 뒷문을 이용하면 좁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 뒷골목이 나온다.
뒷골목을 통해 나가게 되면 운찬이 가려는 새벽 시장까지 금선로를 이용할 때보다 반 시진은 더 걸리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뭐, 어떻습니까. 가끔은 반 시진쯤 아침 산책을 한다 생각하고 더 걸으면 되지요.”
“하지만 말이 쉽지, 반 시진은…….”
운찬은 아쉬운 듯이 대문을 힐끗 쳐다봤다.
“설마, 정말로 질투하고 계신 겁니까? 과거에 있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연인의 행복한 모습만 보면 꼭 방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알았어, 알았어! 뒷문으로 가면 되잖아, 가면!”
“그렇죠. 그래야 순수하고 동정인 강 숙수님이죠.”
“크윽……!”
운찬은 울분을 꾹 눌러 참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가 휴를 말로 이길 수 있는 날은 아득히 먼 훗날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같이 가시죠. 시장까지 심심하실 테니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필요없어!”
“자자, 그렇게 어린애처럼 삐치지 마시고…….”
“삐치다니, 누가? 나 안 삐쳤다고!”
“원래 삐친 아이는 그렇게 말하는 법이죠.”
“크아악―!”
결국 울분이 폭발한 운찬과 티격태격하며 휴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잠시 출입 금지 구역이 되어 버린 풍운객잔.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