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62화 (117/686)

第五十九章 ― 식객위기(食客危機)

언제나와 같은 아침 식사.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딱 한 자리가 어색하게 비어 있었다.

아침 식사는 모두 함께하는 것이 풍운객잔의 규칙.

이렇게 한 자리가 비는 것은 운찬 납치 사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음…….”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빈자리를 향했다.

빈자리의 옆에 앉아 있던 구양화는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았어. 평소엔 늦으면 늦을 것 같다고 미리 말을 하고 나갔는데…… 이번엔 그런 말도 없이 나가서 아직까지 안 들어왔어. 이상해.”

구양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백연은 구양화에게 친혈육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순박하고 올바른 성품상 이런 식으로 튀는 행동을 할 리가 없기에 더더욱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화 매…….”

구양화의 옆에 앉아 있던 휘연이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고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구양화의 두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그러자 표정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구양화.

항상 건방져 보일 정도로 당차던 소녀가 이런 약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졸지에 활기찼던 아침 식사 자리의 공기가 무거워져 버렸다.

객잔 식구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한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아…….”

모두의 시선을 받은 휴.

“크흠, 괜찮을 겁니다. 백 소협은 어디서든 쉽게 무슨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 무슨 연유가 있을 겁니다.”

이럴 때는 분위기를 띄워 줄 사람이 필요한 법.

휴가 나서서 웃는 얼굴로 구양화를 위로해 주었다.

“그럴까……?”

“물론이죠. 분명, 나중에 순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미안해, 화 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라고 말하면서 들어올 겁니다. 틀림없어요.”

“풋!”

구양화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장되게 백연을 따라 하는 휴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백 오라버니랑 하나도 안 닮았어.”

“그렇습니까? 이것참, 수련이 부족했군요.”

“하지만 말투는 똑같아. 분명 백 오라버니도 나중에 객잔에 와서 그렇게 말할 거야. 틀림없어.”

“예, 분명히 그럴 겁니다.”

구양화는 다행히도 기운을 되찾는 듯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앞에 놓인 음식에 손을 뻗으면서 백연에 대한 불만을 투덜거렸다.

“나중에 오면 단단히 혼을 내 줘야지. 흥, 자기 멋대로 외박을 하면 어떻게 해? 이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거야. 이런 식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장가나 가겠어?”

“아니, 그건 좀…… 오히려 외박을 해야 장가를 가게 되는 거 아냐?”

“뭐?”

운찬은 눈치없이 끼어들었다가 찌릿, 하고 날아오는 시선을 받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구양화의 뜨거운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단단히 성이 나 있는 벌집을 주먹으로 후려친 꼴이었다.

화난 벌이 벌침도 쏘지 않고 순순히 표적을 놓아 줄 리가 없다.

“이런 저질! 어리고 순수한 숙녀가 있는 곳에서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순수한? 숙녀?”

“왜! 불만있어?”

“아니, 뭐랄까…… 외박하면 장가간다는 말을 알아들은 시점에서 이미 둘 다 아닌 게 아닐까 싶은…….”

“뭐, 뭐가 어째?!”

구양화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섰다가,

“흐응,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갑자기 팔짱을 끼고 다시 앉으며 심상치 않게 목소리를 착 깔았다.

“당신이 나한테 그래도 될까? 이런 식으로 내 성질을 건드려도 돼? 날 무시해도 좋은 거야? 그날 밤 있던 일을 말해도 되는 거야?”

“윽, 그날 밤이라니! 괜히 오해할 만한 의미심장한 단어로 말하지 마! 게다가 그건 저번에 단 음식으로 합의를 봤잖아?! 왜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거야?”

“어라?”

구양화는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

“이런 뻔뻔한!!”

운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최근에 잊고 있었다.

구양화는 소악마 같은 녀석이었다. 나름 선량한 산적들을 억지로 백연과 싸움 붙여서 피를 보게 만들었듯이, 상상도 못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화약고 같은 계집애였다.

“워, 원하는 게 뭐냐?”

그리고 운찬은 그런 화약고 같은 계집애에게 설설 기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흐응, 백 오라버니를 찾아와 줘.”

“뭣!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뭐야? 무능하네. 그럼 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내가 원하는 건 왜 묻는 건데?”

“당연히 상식선에서 이야기하라는 거다!”

“됐어. 당신 따위는 백 오라버니가 도착하면 같이 벌 받을 준비나 해.”

“왜 내가?!”

계속해서 티격태격하는 운찬과 구양화.

휘연은 그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어머나! 두 사람, 어느새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을까요?”

“……저게, 사이가 좋은 건가?”

저게 사이가 좋은 거면, 사이가 더 좋아졌다간 칼부림이 날 분위기였다.

“그럼요. ‘싸울 만큼 사이가 좋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아이 참, 사이가 안 좋으면 싸우지도 않아요. 영영 화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렇게 가벼운 일로 싸운다는 건 화해하기 쉽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아아, 그런 건가.”

“네. 싸워서 원수가 될 것 같으면 저렇게 못 싸운다구요.”

“하긴 그렇겠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구양화와 운찬은 모두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휘연은 구양화가 기운이 난 것 같다면서 기뻐했다. 구양화도 객잔 식구들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그날 오후가 될 때까지 우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백연은 객잔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울창한 사과나무 사이로 깔린 짙은 안개는 햇볕을 가려 주변을 온통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 낙엽이 썩으면서 만들어 내는 찝찝한 단내, 그리고 멀리서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군…….”

무당파의 일대제자.

최근 사해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일해검 백연은 난감한 얼굴로 사과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 주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벌써 꼬박 하루가 넘도록 쫓기는 중이었다.

항주 관청 상방(商房)의 책임자를 캐물어서 겨우 실마리를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실마리를 쫓아 외곽으로 나오고, 근처 마을에서 ‘귀견장’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추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한둘 정도가 뒤를 미행하는 정도였는데, 나중엔 노골적으로 수십이 넘는 패거리가 등장해 앞을 가로막고 빠져나갈 길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연은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혼자서 호골채를 제압했듯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웬만한 방법으론 그를 막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순박한 백연이지만, 무당파의 대표 고수인만큼 그 정도의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만한 착각이었다는 것은 불과 일각 만에 여실히 드러났다.

되도록 싸움을 피하면서 활로를 찾아 외진 길목으로 들어갔더니, 마치 처음부터 그가 그 길로 도망칠 줄 알았다는 듯이 오십 명의 강건한 사내가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백연은 자신이 몰이사냥을 당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차츰차츰 퇴로를 차단하고 도주 방향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마침내 사냥감이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쯤엔 이미 완전한 구석에 몰려 있는 방식이었다.

양옆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 앞뒤는 칼을 든 수십의 무사들.

백연은 거기서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정면으로 달려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퇴로가 완전히 막히는 바람에 싸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거였지만, 그 덕분에 상대의 무서움을 톡톡히 알게 되었다.

적들은 일격필살. 마치 난폭한 바람처럼 표표한 움직임을 사용했다. 미친개처럼 끈질기고 지독하게 덤벼들고,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팔다리가 한두 개 부러진 것 정도로는 절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혈도를 짚어 전신을 못 쓰게 만들거나, 완전히 의식을 잃도록 충격을 줘야 하는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십명을 그렇게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특히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을 신조로 하는 백연에게 있어선 상성이 나쁜 최악의 상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게 황실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몽고 잔당들의 정체인가?’

상상 이상의 실력과 집념을 겸비하고, 철저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무서운 자들.

백연은 수많은 무림인이나 무림방파와 싸워 봤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상대는 처음 만났다. 지금도 겨우 과수원으로 도망치긴 했지만, 언제 잡힐지 몰라 초조해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화 매가 걱정할 텐데…….”

백연은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하루가 지나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상황이었다.

돌아가면 아마 한참이나 혼나고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만 할 것이다.

“하하.”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그에게는 걱정하고 있는 어린 여동생이 있다. 반드시 살아서 무사히 돌아가야만 했다.

“좋아, 가자.”

백연은 무당의 비전인 제운종의 신법을 사용해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뒤,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송문고검은 검집에 집어넣은 채 반사광이 주변에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레 이동했다.

초상비(草上飛).

풀이 눌리지 않게 밟고 지나간다는 뜻의 신법으로, 이 신법을 사용하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컹! 컹! 컹!

“이런…….”

하지만 아무리 초상비를 시전해도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의 민감한 후각까지 피해 낼 수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개들이 가까워졌다. 백연은 전력을 다해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과나무들이 수도 없이 옆을 스쳐 지나가고, 벌겋게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개들이 마침내 한 발자국 뒤의 꽁무니까지 따라붙었을 때쯤 마침내 백연은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높은 울타리를 발견했다.

“타핫!”

제운종.

백연은 구름으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듯이 근처에 있는 사과나무를 밟으며, 그 가지 끝까지 타고 올랐다.

컹! 컹컹컹!

울타리를 넘는 것은 쉬웠다.

끈질기게 쫓아오던 개들은 울타리를 발톱으로 박박 긁어대며 사납게 짖어댔다.

이제 근처의 병사들도 백연이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백연은 곧바로 항주 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어……?”

어느샌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삿갓을 푹 눌러쓴 사내가 세 발자국 앞에서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빨랐군요. 나무 위에서 반 각 정도 더 상황을 살피는 것이 현명했을 텐데, 어째서 일찍 내려왔습니까?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라도 생각이 났나요?”

부드러운 목소리.

학식이 풍부한 듯한 지적인 말투.

눈을 감고 들었다면 마치 한림원의 학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찌 이런 자가……?’

백연은 일순간 폐부가 싸늘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자는 고수였다.

그것도 온몸이 비상 신호를 울리는 듯한 전율이 이는 고수.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 자세히 보면 눈앞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바로 세 걸음 앞에 서 있지만, 막상 다가가려고 하면 스무 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 듯했다.

백연은 일단 검부터 빼 들었다.

스릉―!

차가운 소음을 내는 송문고검.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검이 아니기에 날을 갈아 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검의 중심이 제대로 잡혀 있는 상급의 검이다.

백연은 검끝을 살짝 아래로 내린 채 삿갓의 사내를 견제하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뒀다.

“그 방어기(防禦氣). 과연 어떤 공격이든 무난히 받아넘길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군요. 전후좌우, 심지어 위아래에서 날아드는 기습도 쉽게 막아 내겠습니다. 다수를 상대하는 것도 무난할 듯하군요.”

살짝 들어 올린 삿갓 아래로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이 드러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진짜가 아닌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 방면으로 집중되는 공격은 어떨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시’에서 시작해 ‘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두 개의 은빛이 동시에 번뜩이고 있었다.

백연의 안색이 다급하게 변했다.

삼 척 정도 길이의 중도(中刀) 한 쌍이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쩌정―!

“막았습니까? 그럼 다시 한 번 갑니다.”

삿갓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회전하는가 싶더니, 나란히 선 쌍도가 동시에 왼쪽 방향에 날아들었다.

백연은 사량발천근의 묘리로 공격을 아래쪽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흘려 냈다.

쩌엉―!

거친 소리와 함께 쌍도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큭, 강력하다!’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닌데 완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공격의 힘을 구 할 이상 흩어 버렸는데도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태극혜검.

힘의 흐름을 중시하는 무당파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느리고, 완만하며, 또한 완벽한 무공이었다.

처음 태극혜검을 수련하는 사람은 권태감에 빠진다.

검술이 워낙 느리고 완만해서 실전에선 전혀 효용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련 초반을 넘어 중반 즈음에 접어들 때쯤엔 저잣거리에서 유행하는 태극권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 태극혜검이 몸에 일체화되기 시작하면 태극혜검은 무적이 된다.

온몸을 감싸 흐르는 방어기.

사량발천근, 이화접목의 묘리로 몸을 감싼 채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찌를 수 있는 자유로운 태극의 검.

백연이 그 완벽함에 반해 태극혜검만을 파고들었던 이래로 오늘처럼 힘든 상대를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챠핫!”

처음으로 삿갓사내로부터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뒤로 반 보.’

백연은 정확히 뒤로 반 보를 움직임과 동시에 검으로 둥그런 원을 그려 공격을 막아 냈다. 도격이 막히면 분명히 옆으로 몸을 피할 것이다.

‘됐어!’

상대는 예상 그대로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고, 미리 휘두른 백연의 검에 어깨가 베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상대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당연히 닿을 거라 생각한 검이 전혀 엉뚱한 곳을 스치고 있었다.

“어……?”

경악. 불신.

분명히 검이 몸에 닿을 것 같았는데 어째서 정신을 차려 보니 상대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는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백연이 그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리기도 전에, 앞에서 반원을 그리던 쌍도가 갑자기 측면에서 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쉐엑―!

찔러 들어오는 파공음이 무시무시했다.

백연이 평소처럼 비스듬하게 공격을 밀어 내려는 순간, 갑자기 찔러오던 쌍도가 여덟 개로 변했다.

“헛……!”

심신이 혼란스러워진 백연에겐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였다.

환도(幻刀)를 이용한 수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나하나가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경시할 수가 없었다.

백연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해 태극혜검을 전개하자 실제로 육안으로 뚜렷이 보일 만한 둥그런 원이 백연의 주위로 방패처럼 펼쳐졌다.

따다다당―!

여덟 개로 불어난 쌍도는 제각각 소음을 내며 양옆으로 튕겨 나갔다.

“검막!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

삿갓의 사내는 감탄한 것처럼 말했다.

그와 동시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탁, 하고 튀어 오르며 회전. 그 즉시 좌수와 우수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휘둘렀다.

이번엔 열여섯 개로 변한 쌍도가 좌우에서 허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큭……!”

따다다당―!

사락―

십수번의 검격이 교차되고, 딱 하나!

촘촘한 그물 같은 검막을 뚫은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백연의 이마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핏!

핏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위에서 묶어 두었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좌우로 흘러내렸다.

“드디어 빈틈이 생겼군요.”

상처를 입고 심신의 충격을 받은 백연과는 달리, 삿갓의 사내는 태연하게 말까지 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잘 받아 보시죠.”

스릉―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납도.

삿갓의 사내는 숨을 고르듯이 한 번 어깨를 들썩이더니, 갑자기 턱이 땅에 닿을 것처럼 상체를 확 숙이고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낮은 자세로 달려왔다.

피이이잉―

화살을 쏘는 듯한 파공음.

삿갓의 사내는 손잡이를 역수(逆手)로 붙잡고 발도(拔刀). 도집에서 미끄러지듯이 튀어나온 쌍도가 백연의 코앞에서 십자(十字)로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쉬쉬시시시식―!

“……!!”

서른두 개의 환도가 파도처럼 백연의 전신을 덮쳤다. 백연은 전력을 다해 태극혜검을 전개해 막았다.

쳐 내고, 쳐 내고, 비껴 내고, 쳐 내고.

그러던 어느 순간, 전도(剪刀)처럼 교차한 쌍도의 칼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여기까지군요.”

턱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

백연은 죽음을 각오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삿갓의 사내는 상쾌하게 대답하더니.

훌쩍 쌍도를 제자리에 납도한 뒤 뒤로 펄쩍 물러나 버렸다.

“무슨……?”

백연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삿갓사내는 그를 무사히 놓아주는가?

“나름대로 재밌었습니다.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질 틈도 없이, 삿갓의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깐……!”

붙잡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잘려 나간 머리끈, 이마에 새겨진 상처.

백연은 강호에 나온 뒤로 처음 겪어 본 패배를 곱씹어 볼 틈도 없이 혼란에 빠져 버렸다.

컹! 컹―! 커컹―!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연은 다시 몸을 추스르고 개 짖는 소리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도망치던 길목에서 엄청난 거구의 사내를 만났을 때, 백연은 자신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한 명이 사라지자 한 명이 나타난다. 그것도 조금 전의 삿갓사내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막강한 고수였다.

“처음에 만났던 자의 이름을 들었나?”

무뚝뚝한 목소리. 북쪽의 억양이 많이 섞인 어색한 한어였다.

“……삿갓을 쓰고 있던 자 말이오?”

“그렇다.”

“아니, 듣지 못했소.”

“그럼 나도 말할 수 없다.”

종잡을 수 없는 언행.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인의 느낌이 났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 삿갓사내도…….’

삿갓사내가 인외(人外)의 느낌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거구의 사내는 요괴(妖怪)였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특이한 자들이 나타났을까.

지금에 와서는 이들이 정말로 그가 쫓던 몽고 쪽의 사람들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굉장한 체격이다. 내 세 배는 되지 않을까?’

백연도 체격이 상당히 다부진 편인데, 눈앞의 사내는 어깨너비만 해도 백연의 세배는 될 것 같은 거구였다.

삿갓사내와의 싸움처럼 이번 싸움도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사내는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강렬한 안광으로 백연을 쏘아보더니,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그의 이마와 목덜미의 상처를 응시했다.

“두 군데인가? 흥, 여전히 착한 척은 혼자 다 하는 녀석이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거구의 사내는 혀를 쯧쯧 차다가,

“그럼 어떤 공격이든 무난히 받아 낸다는 그 검술을 한 번 구경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칠 척이 넘는 거대한 체구가 바닥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 검술에 대한 말. 이자들은 그것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건가?’

의구심이 생겨난다. 백연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나와 싸우려는 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이유? 그야, 재밌어 보이니까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거구의 사내.

“단단한 방패를 가지고 있다는 놈이 있으면 직접 부숴 보고 싶지.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

그건 당신만 그런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백연은 지금 곧 닥쳐올 싸움에 대비해 마음을 추스르는 것만 해도 힘이 들었다.

여러모로 가혹한 상황이었다.

지독하게 잘 훈련된 병사들에게 쫓기고, 사나운 개들이 달려드는데다가, 이젠 삿갓사내에 이어 엄청난 거구의 사내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더 최악인 것은 그를 도우러 올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백연은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기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즉, 눈앞의 사내를 이겨야 한다.’

조금 전처럼 상대의 칼에 목을 내줬다간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백연은 결연한 마음으로 검을 잡았다.

그 순간,

“카하앗―!”

즐거운 것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땅이 쾅! 하고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구의 육체가 그를 향해 포탄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백연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제운종.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반 보를 옆으로 돌아 거구사내의 사각지대로 들어갔다.

‘빈틈!’

강력했던 인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수월하게 빈틈을 찾았다.

부드럽게 뽑힌 송문고검이 사내의 왼쪽 옆구리에 있는 혈도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검기점혈의 한 수.

심력이 많이 필요한 기술이지만, 지금은 힘을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됐나……?’

최소한 반신이 마비될 정도의 혈도들을 제압한 덕분인지 거구의 사내는 동상처럼 가만히 굳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혈도를 점혈당하면 최소한 일각은 움직일 수가…… 헛?!’

깜짝 놀란 백연.

거구사내는 어느새 두꺼운 등근육을 꿈틀거리더니, 허리를 반 바퀴 휘돌려 깍지 낀 양손을 바닥으로 내려찍고 있었다.

꽈아앙―!

백연은 앞뒤 재지 않고 일단 몸을 옆으로 날렸고, 자신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무릎 깊이만큼 움푹 파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만약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몸이 박살 나지 않았을까.

‘점혈이 안 통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누가 그러더군. 나한테는 혈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럴 리가……!”

“육신을 극한으로 단련하면 그런 경우도 있는 모양이야.”

자랑스레 씩 웃는 거구의 사내를 보며 백연은 할 말을 잃었다.

가끔 그런 말을 듣기는 한다.

소림의 철포삼이나 진주언가의 강시공 같은 뛰어난 외공을 익히면 혈도가 소용없는 강한 육체를 갖게 된다는…….

하지만 그걸 정말 두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혈도는 단련할 수 없기 때문에 혈도가 아닌가.’

혈도가 없다는 것은 몸에 약점이 없다는 뜻.

금강불괴가 부럽지 않을 무시무시한 육체나 다름없었다.

“카핫!”

부우우웅―!

다시금 움직이는 육체.

호랑이처럼 뛰어든 거구의 사내가 사람 머리통만큼 커다란 주먹을 옆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주먹이 백연의 바로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직격했다.

그 순간, 와그작! 하고 가볍게 부러져 버린 나무는 뒤쪽에 있던 멀쩡한 나무들까지 몇 개나 부러뜨린 뒤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힘.

백연은 전법을 바꿨다.

거구사내의 공격에 맞춰 제운종으로 뛰어오른 뒤 공중에서 사내의 팔을 검으로 베어 낸 것이다.

촤악!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팔뚝 근처에서 한 뼘 정도 되는 상처가 생겨났다. 다행히 혈도가 없는 육신이라도 칼이 들어가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치 질긴 갑옷을 억지로 베어 낸 것처럼 자그만 상처를 하나 입히는 데 큰 힘이 들어갔다.

“카핫!”

사내는 팔뚝의 상처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달려들었다.

붕― 하고 백연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손바닥이 공중에서 휘저어졌다.

백연은 이렇게 공격을 피해 낼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당 무공의 정수가 태극이고, 태극은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포함한다지만, 그래도 이만한 공격을 흘려 내려면 백연도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피해야만 한다.

피하다가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상처를 입혀야 했다.

콰앙!

내려찍는 주먹에 부서진 바위 파편이 백연의 얼굴에 후두둑, 튀어 부딪쳤다. 백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하체를 벌려 자세를 낮춘 뒤 힘을 모아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까아앙―!

‘까앙?’

검과 육신의 부딪침에선 절대로 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황당한 심정이 되어 버린 백연.

한 팔을 봉할 작정으로 어깨를 노린 그의 일격은 솥뚜껑만큼이나 큰 사내의 쫙 펼쳐진 손바닥에 가로막혀 있었다.

‘손바닥이라니?’

손바닥에 철판이라도 심어 두었는가?

대체 어떻게 손바닥으로 날카로운 검첨을 막아 냈느냐는 의문도 잠시.

부와아앙―!

“……!!”

굉장한 풍압과 함께 커다란 주먹이 그의 가슴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찰나를 가르는 속도.

피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윽?!”

백연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움직여 검날을 앞에 똑바로 세웠지만, 공성추처럼 날아온 주먹은 그 검날을 그대로 후려쳐 백연을 뒤쪽으로 날려 버렸다.

“커허……!”

우드득!

몸 내부에서 거센 파골음이 들리고 입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부릅뜬 눈에 미약하게 생채기가 조금 나 있는 거대한 주먹이 보였다.

검날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그런데 생채기 조금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일까.

“쿨럭…… 쿨럭…… 크윽……!”

백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주먹 한 방에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졌다. 폐를 찌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움직일 때마다 아픔을 동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싸우는 데 큰 지장이 생긴 것이다.

“호오, 살았나?”

그런데 거구의 사내는 오히려 백연이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는 듯 감탄성을 냈다.

“그 짧은 순간에 충격을 삼 할 이하로 줄였다라…… 과연, 재미있는 검술이다.”

“쿨럭…… 쿨럭…….”

백연에겐 대꾸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뒤로 조금 물러서면서 거리를 두려는 그때, 거구의 사내와 정반대인 등 뒤에서 바늘 끝처럼 따끔한 살기가 느껴졌다.

“흡……!”

놀람은 잠시. 생각에 앞서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빙글 몸을 돌리며 검을 좌에서 우로 일회전.

깡!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살처럼 쏘아지던 살기가 옆에 있는 땅에 가 박혔다.

‘화살?’

그 정체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화살 세 개가 더 날아오는 참이었다.

머리, 발, 어깨를 노리는 다양한 공격.

대체 활을 어떻게 쏜 것인지 화살 세 개가 동시에 도착했다. 백연은 검을 휘돌려 화살들을 쳐 냈다. 세 개의 화살 뒤에 숨어 은밀히 심장을 노리는 화살이 있었지만, 태극혜검의 묘용으로 부드럽게 화살을 옆으로 쳐 냈다.

“후우…….”

백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끊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팽팽하게 가다듬었다.

그래도 화살은 낫다.

기묘한 환검을 쓰던 삿갓의 사내나, 사람을 초월한 듯한 괴력을 쓰는 사내의 공격보다는 훨씬 상대하기가 편했다.

상성의 문제랄까.

백연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강맹하고 정확해도 화살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피슝―! 피슈슈슉―!

그런 백연에게 화를 내듯 이번엔 화살 다섯 개가 줄지어 날아왔다.

제각각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날아오는 공격.

찰나의 찰나를 쪼갠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 차였지만, 여기서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고 흐름을 놓치면 순식간에 몸이 벌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백연은 진중하게 옆으로 일 보 반을 움직이며 검을 움직였다.

태극혜검의 한 수.

날아오던 화살 다섯 개가 마치 끈에 매달린 것처럼 줄줄이 끌려올라가 쏘아지던 힘을 잃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사이 마지막으로 닥쳐오는 강한 일격.

이번 화살은 뭔가가 다른 듯, 검으로 쳐 내자 손목과 어깨가 찌릿찌릿할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대체……?”

백연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주변을 더욱더 경계했다.

화살에 담긴 깊은 내공으로 봐서는 활을 쏜 자는 궁술이 대단한 자일 게 분명했다.

태극혜검이 전후좌우를 모두 감싸는 방어기의 무공이라서 막아 낸 것이지, 만약 다른 무공을 익힌 자였다면 화살을 다 막아 내지 못하고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 치졸한 녀석―!”

그때, 어째선지 거구의 사내가 숨을 씩씩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 차례다! 아까 분명히 정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방해를 하는 거냐―!”

우렁찬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백연은 몽고 병사들이나 개들이 쫓아올 것을 걱정했지만, 그건 쓸데없는 우려였던 듯 뒤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심한 소리를 하는군.”

다만 한 사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사내가 풀숲을 가르며 불쑥 나타났는데, 백연은 그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매가 없는 옷, 이마에 두른 푸른색 띠, 손목에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띠를 몇 겹이나 두르고 있었는데, 그 가죽띠엔 깃털과 단검들이 빽빽하게 끼워져 있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왼손에 들고 있는 각궁과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외날 도끼였다.

호리호리한 체구답지 않게 몸이 잘 단련되어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끼를 병기로 쓰는 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활과 도끼를 동시에 사용하는 자가 거의 없긴 했다.

‘위험하다!’

백연은 지극한 경계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물론 조금 전에 만난 두 사람도 위험한 인물이긴 매한가지였지만, 지금 만난 호리호리한 사내는 특히나 차갑고 잔인한 느낌이 들어서 꺼려졌던 것이다.

“네놈, 덩치에 안 맞게 칭얼거리는 말을 하는군.”

“뭐야?!”

“그 팔뚝의 상처를 봐라. 상처씩이나 입어 놓고 네 차례라고 주장할 수 있나?”

“할 수 없잖나. 생각보다 검술이 제법 날카로웠다!”

“변명인가?”

“변명이라니! 상처를 입었으니, 더더욱 내가 이놈을 때려눕혀야만 한다는 뜻이다!”

거구의 사내는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붉힌 채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고 있었다.

반면에 이국적인 복색의 사내는 차가운 얼굴을 고수하며 비웃는 듯한 말투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어지간히 성질이 쌓여 있었나 보군. 그렇게나 집착할 이유가 있나?”

“이 녀석, 굉장히 재미있다. 내 주먹을 고작 갈비뼈 몇 대 부러지는 것으로 받아 냈어. 게다가 공격을 옆으로 쳐 낼 때는 충격을 구 할 이상 흩어 버린다.”

“그래, 그렇군. 쉽게 망가지지 않는 장난감이라는 건가?”

“네놈에게 넘기기에 아깝다.”

호리호리한 사내는 그 말에 ‘흠’ 하고 무성의하게 이야기를 넘겨 버린 뒤,

“어쨌거나 상처를 입었으면 자격을 잃은 거다. 뒤로 꺼져서 구경하기나 하시지.”

무시하는 듯한 말로 거구의 사내를 분노케 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 자리에서 네놈부터 박살 내 줄까?”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못할 것 같나?”

곰과 늑대가 만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반면, 백연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쉽게 망가지지 않는 장난감.’

상처를 입으면 안 된다고 단정하는 오만함.

백연이 지금껏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웬만한 무인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끝내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는 백연이었다.

물론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내가 살수를 쓸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살수를 쓰지 않고 제압하려면 상대보다 강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상대가 쉽게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더 강하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비무라면 공손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겠지만, 실전에선?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마음을 굳힌 백연.

그는 오른손으로 검을 들어 올린 뒤, 손가락 전부를 꼿꼿하게 세운 추장(錐掌) 형태로, 손바닥을 눈앞의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어?”

“음?”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연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은 강하오! 그러니 내가 전력을 다해도 죽지 않을 거라 믿고 무공을 사용하겠소!”

“허어?”

“곧바로 가겠소. 누구부터 상대하면 되오?”

이런 상황에서도 기습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일대일 비무를 고집하는 백연.

명문정파의 무인으로서의 고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연은 그렇게 정당하게 싸움으로써 더욱 힘을 얻는 성격이었다.

“흐음!”

거구의 사내는 호리호리한 사내를 옆으로 휙 밀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번엔 호리호리한 사내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백연이 의외의 행동을 한 이상, 그것을 한 번 지켜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카하아앗―!”

거구의 사내는 가타부타 말을 섞지 않았다.

포탄처럼 날아오는 거구의 육신.

커다란 주먹이 무시무시한 힘을 담고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까아앙―!

“큭……!”

여전히 무지막지한 파괴력.

송문고검의 검날이 부러질 듯 휘어지며 부러진 갈비뼈 쪽에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훙―!

하지만 이번엔 처음의 공방 때와는 달랐다.

백연의 손바닥으로 푸른빛이 모여들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운이 굽이굽이 흘러 도도하게 이어졌다.

허공을 격하는 장타(掌打).

그러자 분명히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었음에도 거구사내의 어깨 뒤쪽에서 펑!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윽?!”

깜짝 놀라 어깨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는 거구의 사내.

그가 입고 있던 헐렁한 장삼은 이미 어깨 부위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옷이 찢어지고 그가 고통을 느낄 정도면 위력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백연을 돌아봤다.

백연은 이미 두 번, 세 번 연거푸 장타를 뽑아 내고 있었다.

펑! 펑!

무릎 뒤에서 한 번, 척추 근처 옆구리에 한 번.

폭음이 들릴 때마다 거구사내의 몸이 바람맞은 연처럼 흔들리더니, 마침내 세 번째 장타를 오른쪽 종아리에 얻어맞았을 땐 휘청하고 균형이 흔들리며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자식……!”

무릎을 꿇은 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듯, 사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네 번이나 연거푸 입은 타격이 만만치 않은 듯 일어나는 자세가 극히 불안정했다.

“호오?”

옆에서 지켜보던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 역시 놀란 눈치였다.

회풍장(廻風掌).

무당 비전의 장법이며, 직접 손이 닿지 않아도 허공을 격해 상대를 제압하는 격공장(擊空掌)의 일종이었다.

깊고도 넓은 무당 무공의 정수가 담긴 상승 무공.

익히는 것도 까다롭지만, 사용하기는 더욱 쉽지 않아서 무당 내에서도 익힌 사람이 몇 명 없었다.

그 대신 회풍장에는 거리를 뛰어넘어 공격할 수 있다는 것 말고도 한 가지 더 효용이 있었는데, 회풍(廻風)이라는 이름답게 장법을 때리는 것과 반대 방향에서 힘이 전사(轉徙)되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선 막아 내기가 수월치 않다는 것이다.

“끄응……!”

거구의 사내는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아 비틀거리는 다리로 고집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백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호랑이처럼 번뜩이는 안광.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듯 보였다.

“후우, 후우, 후우……!”

백연은 삼 세 번 숨을 몰아쉬며 내기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파앙!

허공을 때리는 장타.

“카핫!”

하지만 거구의 사내가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는 듯 백연의 손바닥이 향한 반대쪽 방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펑!

허공에 뭉쳐 들던 힘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애써 사용한 회풍장이 소용이 없어진 노릇.

하지만 거기까진 백연도 예상했던 바다. 제운종의 구결을 읊으며 뛰어든 백연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거구의 사내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하아?”

거구의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이 손바닥을 힘차게 아래로 내려쳤다.

백연은 허공을 박차듯이 뛰어올라 번신(륙身).

담을 뛰어넘는 호랑이와 같은 과호각(跨虎脚)으로 어깨를 내리찍고, 곧바로 등을 점해 왼쪽 손바닥을 등 뒤의 명문혈에 갖다 댔다.

“타하아아아앗―!”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기합성.

단전에서 용솟음친 내력이 손바닥을 갖다 댄 상대의 등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푸확!

거구의 사내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입뿐만이 아니었다.

눈, 코, 귀.

내장과 연결된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거구의 사내는 마침내 양쪽 무릎을 다 꿇고 말았다.

‘죽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백연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무당에서 가장 위험한 무공이 검술이다?

아니다. 가장 위험한 무공은 장법, 그중에서도 겉은 멀쩡한데 내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면장(綿掌)이 가장 위험했다.

통배권.

격산타우.

수많은 이름의 비슷한 무공이 있지만 면장은 그중에서 상대의 내부를 가장 확실히 ‘파괴’하는 기술이다.

백연이 지금껏 이 기술을 봉하고 사용하지 않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끄으윽…….”

그 파괴력은 과연 발군.

어떤 공격도 능히 맨몸으로 받아 낼 것 같던 거구의 사내도 신음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 뿐,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백연은 그런 그가 혹시나 잘못될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리기엔 너무 일렀던 것일까.

덥썩.

“엇……?”

갑작스레 뻗은 팔에 발목 쪽의 옷자락이 붙잡히고 말았다. 앗, 하는 순간 몸이 위로 붕 뜨고, 전방으로 투척당했다.

백연은 말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나마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땅을 향해 일직선으로 처박힌 백연은 신법을 사용할 틈도 없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머리가 핑핑 돌고, 온몸에 격통이 내달렸다.

“끄윽…….”

떨어지면서 모래와 자갈에 몸을 긁힌 탓인지 양팔과 양 무릎에 생채기가 잔뜩 나 있었다.

순간적으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러웠다.

상황을 깨달은 것은 한쪽 바짓단이 절반이나 뜯겨 나갔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오장육부가 박살 났을 거라 추측한 거구의 사내가 그를 한 손으로 내동댕이쳤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이놈이, 감히!”

분노에 찬 목소리.

놀랍게도 칠공에서 피를 뿜었던 거구의 사내가 어느새 멀쩡하게 서 있었다.

백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저게 인간인가.

면장이 제대로 들어갔고, 내부에 큰 타격을 줬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일어나다니.

저렇게나 멀쩡한 모습으로, 아니, 오히려 그전보다 더욱 더 강한 기세를 뿜어 낸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크, 으윽, 큭…….”

백연은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반대쪽 갈비뼈가 두 개가 더 나간 듯했다.

총합 다섯 개의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

게다가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는지 숨을 들이켜자 극심한 고통과 함께 기침에 뭔가 액체가 섞여 나왔다.

“쿨럭……! 쿨럭! 쿨럭! 쿨럭!”

격렬한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입을 막았던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물이 아니라 선홍색의 피였다.

호흡(呼吸)이란 곧 통기(通氣).

이제 폐를 다쳐 숨이 막혔으니, 기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회풍장으로 간신히 선기를 잡았나 싶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백연은 한순간의 방심에서 이어진 뼈아픈 실책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이제 죽는 건가?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눈앞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를 피워올리는 거구의 사내가 있다.

싸워 보진 않았으나, 거구의 사내에 못지않은 위압감을 가진 호리호리한 사내도 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가 살아날 길은 요원할 터.

잠시 혼란과 절망 사이에서 떠돌던 백연의 시선이 문득 한쪽의 지형을 포착했다.

‘저곳이라면……!’

구석에 몰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결의를 다지는 백연.

하지만 백전연마로 단련된 상대는 백연의 눈빛이 변하는 것만 보고도 그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채 버렸다.

“뭔가를 꾸미는군.”

“큭, 도망치려는 거냐?”

냉정하게 지적하는 호리호리한 사내.

숨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로 다그치는 거구의 사내.

“타앗!”

백연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상체를 노리고 날아오는 주먹을 옆으로 피해 내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손바닥은 위로 펄쩍 뛰어넘었다.

“카학…….”

울컥하고 폐부에서 비릿한 핏물이 올라온다.

격한 움직임이 상처를 더더욱 벌리는 모양.

황급히 손을 움직여 가슴 근처의 혈도를 점했으나, 임시방편으로 더 이상 악화되는 것만 막았을 뿐, 격렬한 고통은 여전했다.

부우웅―!

백연은 몸을 낮춰 주먹을 피해 낸 뒤 거구사내의 다리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까아앙!

“감히!”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쇳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바닥이 검을 튕겨 내고 있었다.

그 반탄력만으로도 다시금 울컥하고 피가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백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공중에서 번신(륙身).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하단전의 진기를 사용해 허공을 후려쳤다.

“엇?!”

퍼엉!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거구의 사내의 무릎이 뒤에서 누가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앞으로 쭉 튕겨 나왔다.

“큭……!”

거구의 사내는 결국 균형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노옴―!”

격한 노성을 내지르지만, 좀처럼 다시 일어서진 못했다.

‘역시……!’

백연의 예상이 맞았다.

멀쩡한 척했으나, 연이은 회풍장과 면장의 타격은 사상누각처럼 사내의 하체를 허물어뜨리고 있던 것이다.

이제 거구의 사내는 그를 쫓지 못한다.

백연은 그 사실을 확인한 뒤 곧바로 그가 목표로 했던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직 신법(身法)은 쓸 수 있다. 곧바로 도주하면……!’

무당 신법 제운종을 극성으로 전개했다.

순식간에 화살처럼 쏘아지는 몸.

하지만 미처 그 속도가 최고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백연의 몸은 제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강제로 멈춰 서야만 했다.

쏴아아아―!

바람이 폭포수처럼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백연은 황급히 송문고검을 수평으로 눕혀 위로 들어 올렸고, 그 순간 은색으로 번쩍이는 두 뼘 길이의 외날 도끼가 그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쩌어엉!

“……!!”

너무나 격심한 고통 때문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최악의 몸 상태.

더군다나 예상치 못한 틈에 급습을 받아서일까.

태극혜검이 가지고 있는 사량발천근의 묘리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나마 공격을 막은 것이 천운.

직격으로 떨어진 외날 도끼는 사문에서 받은 송문고검을 절반으로 뚝 부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백연의 왼쪽 어깨를 깊이 파고들었다.

푸확!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홍색의 피 사이로 백연을 응시하는 호리호리한 사내의 시선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

더군다나 급습을 해 놓고, 피가 한 방울도 몸에 튀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몸을 피하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

백연은 탄식했다.

의식이 핑 돌았다. 출혈이 너무 컸던 탓인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도끼가 가른 것은 쇄골뼈까지.

그나마 송문고검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만큼으로 그친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심장을 포함한 상반신의 삼분지 일이 대번에 잘려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쇄골뼈까지 다쳤다고 해서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다.

어깨는 동맥이 흐르는 경로.

안 그래도 쇄약해진 몸에 도끼로 동맥이 찢겼으니 앞으로 반 각 안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크…… 윽…….”

백연은 반 동강 난 송문고검이지만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그대로 손가락을 세워 어깨의 혈도를 점했다.

어깨의 근육이 수축하고, 울컥거리며 넘치던 피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미 생기를 잃어 가는 몸.

백연은 균형을 잃지 않고 제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다.

“제법 강단은 있군.”

지팡이처럼 도끼를 땅에 세운 채 가만히 백연을 지켜보던 호리호리한 사내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처참한 몸상태로도 끝까지 서 있는 것을 칭찬하는 모양.

하지만 백연으로서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도 생각이 안 나는 황당한 칭찬이었다.

호리호리한 사내는 급격히 흐려지는 백연의 눈빛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목을 베어 줄까, 심장을 찍어 줄까?”

태연한 목소리로 마치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하하…….”

백연은 웃었다.

고양이 쥐 생각해 준다고 해야 할까.

별로 반갑지 않은 호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마지막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화 매…….”

정기신(精氣身)의 균형이 흐트러진 탓인지 사랑스런 소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친혈육으로 생각하는 그의 소중한 여동생.

혈육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던 그를 받아 준 무당산.

그리고 그 무당산의 인연으로 만난 구양세가의 위대한 검선과 그의 손녀.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는 주저없이 그 소녀를 꼽으리라.

“돌아갈게…… 화 매. 난 꼭 돌아갈 거야…….”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백연은 확고하게 단언했다.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하루, 이틀…… 아니, 이젠 며칠이나 지난 건지 시간 감각도 못 느끼겠지만, 분명 참견 많고 도도한 소녀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혼탁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지껄이는 백연의 상태는 누가 봐도 심각한 모양새.

호리호리한 사내는 외날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목을 베기로 마음먹은 듯, 비스듬한 투로 안에 정확하게 백연의 목덜미가 들어가 있었다.

‘육양신공(六陽神功)이다. 태극이 아니라 육양이다.’

하지만 호리호리한 사내가 알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건 백연이 지금 머릿속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도끼가 밑으로 움직이기 직전.

백연은 평생 동안 하단전에 쌓아 둔 진기(眞氣)를 전부 중단전으로 쏟아붓고, 곧이어 우 기문(右 期門), 거궐(巨闕), 구미(鳩尾)…… 즉, 어깨에서 손바닥으로 이어지는 혈도를 통해 강제로 밀어 넣었다.

구결은 육양신공(六陽神功).

무당의 무공 중에 가장 양기가 강성한 내공이며, 가장 파괴력이 큰 진기인도법이다.

우두두둑―!

강제로 혈도를 확장시켰기 때문일까.

손목에서 어깨까지 팔 전체가 뻣뻣하게 굳은 채 연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기는 승천하는 용처럼 쭉쭉 뻗어 나갔다.

마침내 장심(掌心), 그리고 양계혈.

반 동강 난 송문고검에 백연의 진원진기까지 포함한 극양(極陽)의 기운이 주입되는 순간, 벌 떼가 울 듯이 웅웅 진동하던 검날은 수십, 수백의 파편이 되어 앞쪽으로 터져 나갔다.

“뭣……!”

경악하는 사내.

황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도끼의 넓은 날로 몸을 방어해 보지만, 얼굴과 목의 중요 부위만 간신히 막았을 뿐, 그 외의 전신에 검날의 파편이 박혀 들었다.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그게 파편이 몸에 틀어박히는 것에 대한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상처를 입도록 허용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백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쪽으로 뛰쳐나갔다.

사문에서 받은 소중한 송문고검은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희생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의지뿐이다. 백연은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가 무조건 뛰어내렸다.

풍덩!

고작 이 장 남짓 되는 높이.

게다가 강폭도 좁은 별것 아닌 강이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 휩쓸어 하류로 흘러내려 보내기엔 충분할 만큼 유속이 빨랐다.

“크, 쿨럭, 푸후, 쿨럭!”

안 그래도 호흡이 용이치 않은 상태.

거기에 물에까지 빠지자 유영(遊泳)을 하기는커녕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 상황까지 되고 말았다.

백연의 마지막 승부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목을 흐린 뒤 강물에 뛰어든다.

지금은 좁은 폭의 작은 강에 불과하지만, 십 장 정도만 흘러가면 갑자기 강폭이 넓어지며 서호로 흘러 들어가는 대강(大江)으로 바뀐다.

귀견장을 찾기 위해 관청에서 지도를 상세하게 연구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보였다. 중간에 폭포가 하나 있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 여겼다.

어차피 사람의 명운은 하늘에 달린 법.

그 자리에서 목이 베여 죽느니, 이렇게나마 천명에 희망을 걸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피이잉― 피슉!

“흡……!”

하지만 상대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강변에 모습을 드러낸 이국적인 풍모의 호리호리한 사내.

그가 각궁을 꺼내 강의 흐름을 타고 도망치는 백연에게 화살을 쏜 것이다.

푹, 하고 화살이 박힌 허벅지로부터 알싸한 고통과 함께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육체.

이 이상 출혈이 일어나면 위험했다.

백연은 안간힘을 다해 물속으로 잠수했다.

피슉거리는 파공음이 몇 번이나 들리고, 그중 몇 개는 백연의 몸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으나, 천만다행으로 그 이상 몸에 박힌 화살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행운은 거기까지.

백연은 차가운 물의 온도와 강하게 흘러가는 유속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깜깜해지는 시야.

앞을 알 수 없는 그의 명운도 짙은 구름에 가려진 듯 어둡기만 했다.

☆ ☆ ☆

“뭐야, 놓친 건가?”

반 각 즈음 지났을까. 무시무시한 회복력으로 내상을 수습한 우르칸은 바위처럼 굳은 얼굴로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고 있는 자이혼을 힐난했다.

“…….”

하지만 자이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시간이라도 재고 있는지 한참을 강물을 응시하더니,

“아니, 죽었다.”

갑자기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강물에 뛰어든 것 아니었나?”

“맞아.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다고 확신을 하지? 아까도 봤겠지만, 저놈, 생각보다 보통이 아니야.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찔렀다 해도 안심할 수는 없다. 추적을 보내야 돼.”

우르칸 자신도 의외로 강한 무공에 당해 세 번이나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처음엔 그저 방어만 잘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속을 파헤쳐 보니까 늑대의 이빨만큼이나 날카로운 비기들을 수도 없이 감추고 있는 놈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눈빛에 살기가 가득한 우르칸.

그가 주먹을 꽉 쥐자, 손에서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 몇 개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내 잔성(殘星)으로 어깨를 세 치 다섯 푼. 그리고 우측 대퇴부에 화살이 꽂혔다.”

“그래……?”

잔성(殘星)은 자이혼이 가진 외날 도끼의 이름이었다.

자이혼의 도끼로 어깨를 세 치 다섯 푼.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상이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퇴부에 맞은 화살에는 부자(附子) 독을 발라 뒀다.”

“부자?”

우르칸은 놀랐다.

부자(附子).

초오라고 불리는 풀의 뿌리를 뜻하는 말로, 잎이 새발가락처럼 갈라져 있고 가을녘에 투구 모양의 꽃이 피는 것으로 유명한 식물이었다. 이 식물은 자라나면서 원래 있던 뿌리 옆에 새로운 뿌리가 붙는데, 그 뿌리가 옆에 붙듯이[附] 생긴다고 해서 이름이 부자였다. 부자를 짓이기면 보통 사람이 새끼손톱만큼만 먹어도 바로 사지가 비틀리며 구토를 하다 죽게 되는 맹독이 생기는데, 일부 사냥꾼들은 이 부자독을 화살에 묻혀서 동물을 사냥하기도 한다.

보통 식물의 독은 음기(陰氣)의 정화.

특히 부자독은 음기를 극도로 성하게 만들고 양기를 쇠하게 만드는 극독이다.

하지만 우르칸이 놀란 것은 부자독이 아니라 자이혼이 독을 썼다는 사실이다.

자이혼은 특별히 암살을 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독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로 죽이고 싶었나?”

“그래.”

자이혼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우르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얼굴과 목 아래. 검의 파편으로 육체를 난자당한 자이혼은 꽤나 난잡한 몰골이었다.

팔, 다리, 가슴과 허벅지.

몸에 강기를 두른 덕분에 치명상은 없지만, 수십 개의 검편이 파고들었기에 옷은 너덜너덜. 붉은 생채기도 수십 개나 나 있는 상태였다.

“참고로 네 몰골은 더 하다, 우르칸.”

그 시선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

자이혼은 빈정대듯이 말했다.

“……알고 있다.”

우르칸은 드물게 순순히 수긍했다.

오늘 그가 얼마나 못난 모습을 보였는지는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팔에는 상처를 입었고, 옷은 더럽혀졌고, 칠공에서 피를 토한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그에게 초인적인 회복력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그만한 상처에, 부자의 독…… 죽었겠군, 확실히.”

“아아, 수면 위로 일각 동안 떠오르지 않았다. 죽었다고 확신을 해도 되겠지.”

잠시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지켜보던 두 사람.

이내 멀리서 타종 소리가 울리자 두 사람은 몸을 돌렸다.

“장군이 부르는군.”

“뭐, 재미있었다.”

“아아, 그래. 재미있었다.”

우르칸과 자이혼.

기본적으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즐기는 괴이한 자들이다. 두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진 뒤, 힘차게 흐르는 강물 위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