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章 ― 신의자격(神醫資格)
움푹 들어간 볼. 눈 밑은 검은빛을 띠고 무릎을 끌어안은 모습에선 그 어떤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때 재기발랄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계속해서 대문과 발끝만을 번갈아 쳐다볼 뿐. 그나마도 최근엔 대문보다는 발끝을 더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었다.
“화 매, 뭐라도 좀 먹어.”
“…….”
휘연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간장과 들기름을 섞은 야채죽을 내밀었지만 구양화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옆에 주전자째로 갖다 놓은 찻물을 가끔 홀짝홀짝 마시는 게 다행이랄까.
만약 그나마도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탈수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은 안 돼. 자, 어서. 입만 벌려. 내가 떠서 먹여 줄 테니까.”
“…….”
“어서!”
죽을 한 번 크게 떠서 입에 갖다 대며 휘연은 강하게 말했다.
휘연이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한 것은 처음이라 그런 것일까.
구양화가 움찔하며 서서히 입을 벌렸다.
휘연은 뜨거운 죽을 몇 번 후후 불어 식힌 뒤, 구양화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우물우물. 꿀꺽.
처음엔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것보다도 느리게 우물거리던 구양화였지만, 마지막엔 제대로 씹어서 삼켰다.
한입을 먹었을 뿐인데도 얼굴 한가득 확― 퍼지는 생기.
운찬이 나름 약선요리(藥仙料理)라며 만든 야채죽은 정말로 효능이 있는 듯했다.
“어때, 맛있지?”
“……응.”
“기다리는 것도 힘이 있어야 기다리는 거야. 이렇게 하다가 백 소협이 도착하기도 전에 화 매가 먼저 쓰러지면 어떡할래?”
“그건…….”
“그렇게 되면 화를 내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못 낸다? 이렇게나 걱정을 시켰는데, 화도 한 번 안 내고 용서해 줄 거야?”
구양화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로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다. 사흘이나 밥도 안 먹고 걱정을 시켜 놓고 어떻게 그냥 넘어가 줄 수가 있을까.
“그렇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응.”
“그러면 먹어. 힘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고, 힘이 있으려면 잘 먹어야 하는 거야.”
여인의 마음은 여인이 가장 잘 아는 법.
휘연의 말이 핵심을 짚는데다 마치 어머니 같은 다정한 분위기로 말을 하니 구양화도 더 이상 거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휘연이 건네주는 그릇을 받아 들고 죽을 먹기 시작했다.
두 숟가락, 세 숟가락…….
그리고 네 숟가락째 죽이 담긴 그릇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죽 그릇을 옆에 내려놓은 구양화가 휘연의 품에 폭 안겼다.
“화 매…….”
휘연은 당황하지 않고 그런 그녀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휘연 언니, 혹시 백 오라버니가 잘못되었으면 어떡하지? 내가 화를 낼 기회조차 없어져 버린 거면? 크게 다쳤거나,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겨서 못 돌아오는 거면 어떡하지?”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 잘될 거야.”
“백 오라버니는 무림인이잖아. 칼을 들고 싸우는 게 평생의 일이라고. 나가는 날 아침에 표정이 어두웠을 때부터 알아채고 말렸어야 했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화 매…….”
구양화는 휘연에게 어떤 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속에 꽉 찬 불안감과 울분을 털어 놓고, 마음껏 울고 싶을 뿐인 거였다.
휘연은 구양화가 안긴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그녀를 부둥켜안고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괜찮아.”
“으아앙, 흐아아앙……!”
항상 강한 척, 어른인 척하며 도도하게 지내던 소녀.
훌륭한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가족들에게 온갖 귀여움을 받고 자랐으며, 그만큼 주변에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던 어른스런 소녀가 세 살박이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렇게나 컸다.
구양화에게 있어 백연은 항상 그녀의 짜증과 투정을 받아 주고 어떤 일이든 그녀에게 양보하는, 지나칠 만큼 사람이 좋고 화가 날 만큼 어리숙한…… 그런 최고의 오라버니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분명 남매.
구양화는 그런 백연이 죽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지금껏 쌓아 올린 외면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싫어, 싫단 말야. 백 오라버니가 죽는 건 싫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본심.
“괜찮아, 화 매. 괜찮아.”
휘연은 그런 그녀를 전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구양화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그 속에서 한 명의 흐느낌과 한 명의 위로는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못 견디겠어요.”
“보고 있기가 힘들어요…….”
“아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아칠, 아팔, 그리고 운찬.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깊이 탄식했다. 벌써 닷새째다. 처음엔 어르고 달래서 밥도 먹이고 기분도 풀어 놨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흘째부터는 그들도 해 줄 말이 없었다.
사흘이나 연락도 없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건 분명 연락을 취할 틈도 없을 만큼 큰 변란에 휘말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혹시, 정말로 큰일을 당한 거면?”
불안한 듯 중얼거리는 쌍둥이 점소이에게 운찬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말이 씨 된다는 말 몰라?”
“으응,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되는걸요…….”
시무룩해져서 괜히 발끝만 쳐다보는 아칠과 아팔.
운찬은 괜히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윽박지르긴 했지만, 사실 운찬 역시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찮을 거야. 내가 듣기론 그 사람 굉장히 강하다더라고. 산적들이 득실득실한 산채를 혼자서 제압했다니까?”
“어, 정말요? 그 형이 그렇게 강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근데 어떻게 혼자서 산채를 다 제압해요?”
아칠과 아팔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눈을 빛냈다. 산적들의 소굴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영웅의 이야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굉장히 강하다나 봐. 젊은 무인들 중에선 손꼽힐 만큼 강하대.”
“우와―!”
“그러니 큰일은 없을 거야.”
“그렇겠네요!”
“대단하다―! 나중에 돌아오면 무공 좀 가르쳐 달라고 말해 볼까?”
“바보야! 우린 배우는 게 있잖아!”
아칠은 철없이 말하는 아팔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그, 그치만, 검술 같은 건 아니잖아. 객주님도 무공은 아니라고 하셨고…….”
“걷는 법, 숨쉬는 법, 한 박자 빨리 움직이는 법. 너, 그것들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거 있어?”
“……거, 걷는 법은 꽤 한다, 뭐.”
“하나라도 잘해. 그것만 해도 우리한텐 엄청난 행운이라구.”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아팔. 어른스럽게 아팔을 가르치는 아칠.
두 소년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운찬은 잠시 미소 지었지만, 이내 표정이 흐려졌다.
어른은 거짓말쟁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운찬은 아칠과 아팔에게 거짓말을 했다.
백연이 젊은 후기지수들 중에 손꼽힐 만큼 강하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휴가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무림이란 곳은 강한 자 위에 더 강한 자가 있고, 더 강한 자 위에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자가 있는 세계라고.
상상도 못했던 기인이사, 은거고인이 수도 없이 숨어 있으니 절대로 자만심을 가져선 안 된다고 했다.
‘백연 이상 가는 고수도…… 분명히 있겠지.’
아무리 강해 봤자 이십대의 청년 고수다.
사해에 이름을 떨친 사악한 대마두나, 무림의 고승, 대문파의 일대제자들 중에는 백연을 꺾을 만한 인물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위험하다.
백연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고, 그 사건에 그런 뛰어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최악의 경우엔…….’
불길한 상상에 운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객주님이 가신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운찬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금선북로.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객잔들이 즐비한 곳.
장기린이 향한 곳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그 ‘풍운객잔의 주인’이었군.”
이야기로만 듣던 상대를 이제야 만나게 된다는 듯 미미한 반가움마저 깃들어 있는 말투였다.
머리 위엔 문사건을 쓴 채 평범한 백색의 의복을 단정하게 걸쳤고, 입술 아래로 턱수염을 짧게 기른 얼굴은 어느 지역에서나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 문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 마주 보고 앉은 장기린의 생각은 달랐다.
눈앞의 중년 문사가 사실 외모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한 듯 가끔씩 이쪽을 살필 때마다 새어 나오는 날카로운 안광.
꼿꼿하고 정갈하게 세운 자세에서 느껴지는, 은은하면서도 빈틈없이 꽉 짜여진 기도.
힘으로 따지자면 다섯째에서 여섯째 사이쯤 될 듯했다.
하지만 무력(武力)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그릇이 범상치 않았다. 철우가 이 사람에게만큼은 항상 설설 기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얼굴을 본 적은 몇 번 있었지 않소?”
낭화와 이망의 사건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청월루에 들를 일이 있을 때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멀찍이서 서로 눈을 마주친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긴 했지.”
“그때마다 총관의 자리에 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던 분인지 궁금했소.”
“…….”
“이곳엔 과거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온 것이오?”
장기린의 질문은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장기린 본인이 그렇듯,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때의 삶을 이어 가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와 있는 것인가였다.
“과연, 자네는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로군.”
백 총관은 심유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과거에 거친 삶을 살아왔고, 지금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사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솜씨가 좋고 식견까지 날카로울 줄은 미처 몰랐네.”
“과찬이오.”
“아니, 정말일세. 할 수만 있다며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고 싶을 정도야.”
이번엔 장기린이 입을 다물었다.
장기린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싫은 일을 꼽자면, 그중 하나가 바로 과거의 삶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일단 자네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나는 과거의 삶과 결별하지 못했네. 지금도 쭉 그 삶을 살아가는 중이지.”
“……그렇소?”
“참고로 철우도 그렇네. 물론, 자네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장기린이 이미 알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백 총관은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 놓고 있었다.
“그건, ‘무림’이라는 곳과 관련된 일이오?”
무림.
장기린은 잘 모르는 세계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주변 사람들 중엔 그곳과 관계된 인물들이 절반 가까이나 되었다.
“그렇다네.”
또다시 순순히 대답하는 백 총관.
“하지만 자세한 정체나 이야기는 말해 줄 수 없네. 그러니 더 이상은 묻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소.”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자세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관계되고 싶지도 않고, 들어 봤자 그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자네가 이곳에 온 이유, 백연과 관련된 일 때문이겠지?”
“……알고 있었소?”
“백연에게 내려진 명령을 전달해 준 것이 나였으니까. 사적으로는 혈연관계, 공적으로는 현지 조력의 책임을 맡은 자로서 닷새째 연락이 끊긴 녀석에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네. 물론, 그 녀석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풍운객잔의 식구들과 아가씨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지.”
“…….”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오늘 내로 철우를 통해 연락을 전해 줄 생각이었네만…….”
백 총관은 백연의 숙부.
무당파에 맡겨지기 전까진 연락도 되지 않았고, 지금도 사이가 그리 좋진 않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들은 이야기와는 다르게 백연에게 꾸준히 애정을 갖고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혈연은 혈연이라는 것인가.’
이렇게 되고 보니 백연과 백 총관 사이의 그간 어떤 사정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럼 백연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간 것이오?”
“그렇다네. 백연은 그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고, 항주 관문을 넘어서 외곽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연락이 끊겨 버렸지. 지금 내가 아는 사람들이 그 흔적을 하나씩 더듬어 나가는 중이네만…… 백연이 어디까지 조사했고, 어떤 정보를 토대로 밖으로 나간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
“항주…… 외곽……?”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최근에 여러 가지 이권이 얽혀 위험한 분위기가 되었다는 금선로의 상황이었다.
청풍객잔의 뒷배를 봐주던 곳과 홍화객잔의 뒷배를 봐주던 곳이 부딪치기 시작했다는 풍문.
‘아냐, 그게 아니다.’
흑룡강 유역에서 십여 년간 갈고닦아진 전투 본능이 장기린에게 말하고 있었다.
백연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보다 더욱 큰 것.
백연이 항상 온몸에 두르고 있던 완벽에 가까운 방어기(防禦氣)가 떠올랐다. 언제 어느 곳에도 공격을 가해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던 치밀한 기운.
그건 온몸에 갑주를 두른 것과 마찬가지이니, 단순히 상대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갑주를 산산이 조각 낼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만 백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터.
장기린 자신이 그 방어기를 깨겠다고 가정해 봐도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져야만 백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까?
게다가 백연은 어디선가 내려온 ‘임무’를 받고 무언가를 쫓던 중이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
항주 외곽으로 나가야만 하는 임무.
‘설마…….’
상식적으로 생각해선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본능적으로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당파의 제자, 백연.
그리고 오 일 전 늦은 밤, 갑자기 객잔에서 나타나 휘연의 목숨을 위협했던 장기린 평생의 숙적.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백연이 받은 임무가 ‘몽고’와 관련이 있소?”
“……!!”
실종된 혈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침착했던 백 총관이었으나, 장기린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차분함을 잃고 말았다.
크게 일그러진 얼굴, 놀란 듯 치켜뜬 눈에 흔들리는 시선.
그 모습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정확히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가…….”
납득하는 장기린.
하지만 백 총관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것이지?”
백 총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있었다.
강렬한 눈빛.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맞물린 입술과 뿜어지는 강력한 기세에서 무력시위도 불사하겠다는 백 총관의 결의가 전해져 왔다.
“별것 아니오.”
장기린이 대충 덮으려고 했으나, 그건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별것 아니다? 황실에서도 특급으로 지정된 기밀인데다 그 사실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들어간 돈이 은자로 삼천 냥. 그리고 내가 아끼던 사람이 다섯이나 죽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려고 할 건가?”
“…….”
“똑바로 말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듣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최악의 경우를 의심해야만 하니까.”
의심, 불안, 경악의 감정을 담아 장기린을 노려보는 백 총관.
그가 말하는 ‘최악의 경우’는 장기린이 몽고 쪽의 사람일 수 있다는 가정일 것이다.
장기린의 입장에서야 코웃음이 나올 만큼 황당한 소리였지만 백 총관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비밀리에 진행해 온 일을 외부인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감탄보다는 경계심이 먼저 들 테니까.
“그건 잘못된 생각일 것이오.”
장기린은 담담하게, 하지만 진실된 목소리로 결백을 주장했다.
“몽고와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사이요.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원나라의 잔당이라고 대답할 수 있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증명할 방법은 없소. 나 자신이 그러할 뿐이니.”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는 그 태도로 판별할 수 있는 법.
백 총관은 장기린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진실과 거짓의 판별, 그리고 그의 깊은 속내까지 모두 파헤치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걸로 내 이야기에서 바로 ‘몽고’라는 답을 찾아낸 것은 말이 되질 않잖나. 더군다나 나는 백연과 내가 무림과 관계가 있다고 했네. 관군이나 황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낸 적이 없었어.”
애써 반론을 제기하는 백 총관.
하지만 이미 장기린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낀 그의 목소리는 경계심이 한풀 꺾여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소.”
“어떤?”
“그에 대해 설명하려면 내가 먼저 한 가지 물어야 할 게 있소.”
장기린이 백연과 몽고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던 건 오 일 전에 찾아왔던 ‘숙적’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정체도 밝히지 않은 자를 상대로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까 황실의 기밀이라는 말을 했소. 잘은 모르지만, 무림은 관부와 별개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으음…….”
“당신은 관부와 연계된 사람이오?”
중요한 질문.
백 총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변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을 했소?”
“무림과 관은 상호불가침이란 말을 하지만, 우리도 결국 명의 백성. 정도(正道)를 따르고자 한다면 황실을 위해 신명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끝까지 시원하게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걸까.
완곡한 표현이지만 결국 그 속뜻은 관부의 인물은 아니나 때로 관부의 일을 돕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장기린은 잠시 숙고한 뒤 말을 이었다.
“내가 몽고라 짐작한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오. 얼마 전, 금선로에서 안면이 있는 원의 장수를 보았소. 명의 영토 안에서 태연히 있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에 의심했고, 원의 잔당이 숨어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소.”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원의 장수라니! 누군가? 이름을 알고 있는가?”
백 총관은 크게 놀라며 자세히 캐물었다.
“잘 모르오. 얼굴만을 알 뿐이오.”
“허어, 확실히 원의 장수였나? 착각한 것은 아니고?”
“확실하오.”
텐챠이의 이름을 말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아직 백 총관이 어떤 인물인지, 어느 곳을 위해 일하며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백연의 숙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이상 그것도 의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텐챠이의 이름을 대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역추적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당연히 텐챠이의 이름은 감출 수밖에 없었다.
“으음…….”
잠시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은 백 총관이었으나, 이미 원의 잔당이 항주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선 상당히 신빙성이 큰 이야기였다.
“그런가……. 그래서 몽고라는 단어가 쉽게 나왔던 것이군.”
고민하던 백 총관은 결국 장기린을 믿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듯했다.
철우와의 관계.
백연과의 관계.
그리고 눈앞에서 보는 장기린의 됨됨이를 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네, 의심을 해서.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민감한 시기라 어쩔 수가 없었네.”
“이해하오.”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
백 총관도 백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이상,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잠깐.”
묵묵히 등을 돌려 떠나려는데 백 총관이 그를 붙잡았다.
“사실 자네에 대해 조사하려고 한 적이 있네. 풍운객잔이 워낙 금선로에서 여러 가지 화제를 일으키다보니 혹시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
“……그렇소?”
장기린은 여전히 시선을 문 쪽으로 향한 채로 대답했다.
“장기린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이나 낭인계에서 얻을 수 있던 정보는 전무(全無). 황실이나 관부 쪽으로 알아보려 했으나, 정보를 담당하던 동창의 교위가 어느 날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군.”
낮고 심각하게 깔리는 백 총관의 목소리.
황실이나 관부 쪽에서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감췄다는 뜻이었다.
“끈질기게 캐묻자 그나마 해 준 말이 ‘특특급(特特級)’이라는 말이었네. 특특급의 기밀이라니, 난 씨가 마른 황실 종친의 사생아를 찾을 때 말고 처음 들어 본 단어였어.”
“그런 일도 했었소?”
“헛, 실언이었군. 잊어 주게. 이것도 기밀이지.”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백 총관은 분명 알면서도 일부러 그 정보를 흘린 듯했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되었던 공기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부드러워지는 분위기. 백 총관은 잠시 긴장의 끈이 헐거워지는 그 순간을 노린 듯이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누구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나?”
장기린은 가만히 문을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과거에 많은 사람을 죽였소. 그래서 싸움에 진저리가 났고 모든 과거를 뒤로한 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이오.”
“그런가…….”
“과거와의 인연은 모두 끊어졌소. 지금의 나는 풍운객잔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 평범한 생활이라는 거……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군.”
백 총관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문 채 장기린이 떠나는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호인으로서, 항상 싸움과 피를 보며 살아야 하는 무림인으로서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장기린의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는지.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에 어째서 이렇게나 웃음이 나오는지.
백 총관은 웃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서투르지만 평범한 삶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사내의 잔향을 쫓았다.
“평범한 삶…… 그래, 그게 더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부귀, 명예, 정의감이 없는 삶.
하지만 가족의 웃음소리가 있고 따뜻한 정이 있는 삶.
장기린이 사라진 뒤에도, 백 총관은 그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 ☆ ☆
백 총관을 만나고 돌아오던 장기린은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혹시 실수한 것은 없는지, 문제가 될 만한 말은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고 있었다.
‘조금 감정적이었나?’
원의 잔당이라는 말은 여전히 그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모양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그들이 이젠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평범한 삶까지 위협한다고 생각하자 평정을 잃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과거와의 결별, 평범한 삶의 어려움…….
평소였다면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을 그가 처음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백 총관에게 그런 내심을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사(謀士)형의 인물이지만, 그래도 백 총관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자기 나름의 정의관도 있는 모양이고, 아마 장기린이 적이 아니라고 판별된 이상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백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할 걸 그랬다. 항주 외곽이랬으니 관문을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음?’
연락이 두절된 백연에 대해 생각하던 도중, 풍운객잔의 앞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지금 시각은 오전.
점심시간도 멀었으니 손님이 찾아올 리가 만무한데 객잔의 대문 앞에 웬 거지 같은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한 걸음을 내딛고, 한참이나 더 있다가 다시 한 걸음. 고작 앞으로 걸어가는 것일 뿐인데 허리와 어깨의 무게중심이 연신 비틀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위태로워보이는 모습이었다.
“저건……!”
장기린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정갈한 도복 대신 누더기를 걸치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지 않고 지저분하게 풀어헤쳤지만 그 체형이나 뒷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풀썩.
힘없이 비틀거리던 사내는 결국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장기린은 황급히 그를 부축하려다 그가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깊은 상처를 몇 개나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황급히 상의를 벗겨 내자 보이는 광경은 더욱 참혹했다.
왼쪽 어깨를 쇄골뼈까지 가른 상처는 조개처럼 입을 쩍 벌린 채 시뻘건 내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가슴과 상복부에는 내부에서부터 죽은 피가 피부를 시퍼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백연!”
“으…….”
신음만 흘릴 뿐,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엔 이미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건, 위험하다.’
눈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머릿속의 뇌가 반응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뇌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머릿속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뜻.
백연은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호흡도 불규칙하고,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음이 눈앞에 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객주님?”
백연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휘연이 조심스레 대문을 열었다가 장기린과 백연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휘연의 옆에, 지금 가장 없었으면 했던 소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백 오라버니……?”
설마 하고 흔들리는 눈빛.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의 목소리를 토해 냈다.
“설마, 설마……?”
이미 상의를 벗겨 내고 상태를 살피던 중이었으니, 그 참혹한 상처가 다 보인 모양.
구양화는 잠시 휘청거리다가 이내 중심을 바로 잡고 다급한 움직임으로 뛰어들었다.
“오라버니!”
휙―
그런 그녀의 앞을 장기린이 막아 세웠다.
손을 뻗어 그녀를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백연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어째서……? 비켜요! 제가 오라버니를 제대로 봐야겠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화를 내는 구양화에게선 백연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백연을 죽이고 싶나?”
“네……?”
“한시라도 지체되면 죽는다. 이미 심각한 상태야.”
백연은 풍운객잔까지 찾아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몸 상태가 처참했다. 이대로 잠시라도 지체하면 곧바로 죽어 버릴 것이다. 전장에서 참혹한 시신을 수 없이 봐 온 장기린으로선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화…… 매…….”
그때 신음처럼 들리는 목소리.
“오라버니!”
구양화가 비명을 지르듯이 답했으나, 백연은 잠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고개를 푹 꺾고 말았다.
힘이 다 한 모양.
백연이 무엇을 위해 사력을 다해 이곳까지 왔는지를 알게 해 주는 한마디였다.
“오라버니―!”
구양화가 절규했다. 휘연이 그녀의 등 뒤에서 껴안고 진정시켜도 그녀의 울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 바로 가야 한다. 근처에 가장 좋은 의원이 어디에 있지?”
그 와중에 냉정을 지키며 백연을 안고 일어서는 장기린.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는지 심각한 눈빛으로 백연을 응시하던 휴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금선북로 뒷골목 쪽으로 가면 간옹(看翁)이라는 의원이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약가에서 쫓겨났다는 음침한 늙은이지만 외상을 치유하는 데엔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파락호들 사이에선 유명합니다.”
“쫓겨나……? 다른 의원은 없나?”
“남로 쪽에 박가의원도 있습니다만, 거긴 여러모로 어중간하다는 평판이라…….”
장기린은 간옹이라는 자가 영 찝찝했지만 아무래도 휴의 말대로라면 이 근방의 의원들 중에 실력은 그 사람이 최고인 듯했다.
이런 중상을 입은 환자를 어중간한 평판의 보통 의원에게 데려갈 수는 없는 일.
장기린은 백연의 몸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내해라. 간옹에게로 가겠다.”
“예!”
힘차게 대답하며 뛰기 시작하는 휴.
장기린은 운찬에게 객잔의 문을 닫을 것을 당부한 뒤 휴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구양화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 저도 가겠어요!”
“화 매…….”
“휘연 언니, 나 꼭 가야 돼.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그럼 내 눈으로 꼭…… 봐야만 해.”
그새 평정을 되찾은 것일까.
구양화는 슬픔과 초조함이 가득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른스런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그럼 다 같이 가지.”
장기린은 승낙했다.
아끼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장기린이다. 어차피 백연의 상세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속도를 늦춰서 걸어가야 할 터. 구양화나 휘연이나 신체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니 빠른 걸음의 속도 정도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객주님!”
스무 걸음 앞쯤에서 그들을 재촉하는 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연을 안아 든 장기린, 구양화와 휘연은 황급히 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금선로의 뒷골목.
황실이 부럽지 않을 만큼 화려한 전각들이 즐비한 금선로와는 달리,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판잣집과 돌집이 늘어서 있는데다 어두운 골목길엔 술에 취에 잠들어 있는 더러운 거지나 음침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하류 인생들도 종종 눈에 띄는 곳이었다.
누군가가 술을 머고 토하기라도 한 듯 퀘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휘연과 구양화는 소매로 입과 코를 막고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나마 싫은 소리를 내뱉지 않는 게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휘연이나 구양화는 뒷골목과 어울리지 미인이기에 주변의 시선들이 더더욱 집중되는 상황이었다.
“자, 이쪽입니다.”
일행 중에 뒷골목의 음침한 모습을 신경 쓰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휴였다.
도박판을 전전하며 항주팔도신의 자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막장의 인생을 살았던 덕분인지, 그는 이런 공기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시선은 음침해도 막상 진짜로 건드리지는 못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뒷골목은 객잔의 파락호들이 지배하는 곳이라 손님을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일행의 외모가 고급스러울수록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다급하게 걸음을 옮긴 객잔의 식구들.
마침내 휴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지붕이 없는 희한한 구조의 초가집이었다. 초가지붕이 없는 이상 초가집이라고 부르지 않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지붕만 없을 뿐이지 나무 뼈대에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서 굳힌 벽면은 어딜 봐도 초가집이었다.
지붕이 없다고 해서 하늘이 뻥 뚫려 있는가 하느냐면 그건 그렇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본래 흰색이었던 것 같은 누리끼리한 천이 천막처럼 위를 막아 주고 있었다.
비가 오면 물이 다 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휴의 말론 그 간옹이라는 의원이 오랜 시간 여기서 지낸 모양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사도(邪道)를 걷는 의원, 간옹.
머리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밖에 안 되도록 짧게 잘랐고, 키도 훤칠한데다 평소에 몸을 단련하는지 소매를 걷은 팔뚝에선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의외로 젊은 외모였다. 이제 갓 삼십이나 되었을까.
얼굴 또한 상당히 준수하였으나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투는 저잣거리 파락호마냥 괴팍하기만 했다.
“어디서 이런 산송장을 데려왔어!”
백연을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 그것.
그는 이어서 줄줄이 다 알아듣지도 못할 욕을 지껄이더니, 장기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백연을 품에서 빼앗아 의당(醫堂)의 중앙에 마련된 평평한 침상에 조심스레 눕혀 놓았다.
‘신기한 자.’
장기린은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간옹을 보며 비할 바 없는 특별함을 느꼈다.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자신의 눈빛은 살기가 너무 강했다. 그런데 간옹은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무척이나 태연했다. 마치 그 정도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거친 뒷골목에서 의원일을 하려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짓이 괴팍하고 입이 험하지만, 그래도 환자를 대하는 손길과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해서 그래도 ‘믿을 만한 의원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간옹은 객잔 식구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지,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입은 것인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한 사항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그저 환자를 보면 치료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곧바로 뜨거운 물과 천을 갖고 와 시술에 들어갔다.
“거기 예쁜 아가씨들은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휘연과 구양화를 향한 말.
말투는 천박하지만 그 안에 사심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배려였다.
손바닥만 한 소도를 꺼내 향로의 빨갛게 타오르는 숯에 갖다 대고 칼날을 달구는 간옹.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던 두 여인이 그 모습을 보며 흠칫 놀랐다.
“자, 잠깐. 칼을 가지고 뭘 하려고?”
구양화가 당황해서 물었다.
그녀는 무가(武家)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환자를 보면, 보통 의원들은 백이면 백, 피를 멎게 해 줄 지혈산을 준비하고, 독을 뺄 약초를 갈아 상처에 붙이고, 환자의 생기를 살려 낼 약탕을 끓이느라 분주해진다. 거기에 침술에 자신있는 의원이라면 바로 어혈을 풀어낼 침술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스승의 밑에서 제대로 된 의술을 배운 자의 방식.
하지만 지금껏 의원이 환자를 보자마자 칼을 불에 달구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예쁘고 귀하게 자란 아가씨한테 대답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한시가 바빠서 말이야. 일단은 시술부터 하겠어.”
간옹은 향로에서 칼을 집어 들었다.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져 보일 만큼 칼날은 뜨겁게 달궈진 상황.
그는 그 칼날을 곧바로 어깨의 상처로 가져가 살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치이익―!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기가 타는 듯한 냄새가 역하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간옹의 손놀림이 한층 더 빨라졌다.
“꺄악! 무슨 짓이야! 백 오라버니를 죽일 셈이야?!”
눈을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장면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가는 구양화.
백연에게서 간옹을 떼어 놓으려던 그녀는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튼튼한 팔에 가로막혀 버렸다.
“기다려. 진정해라.”
“하지만……!”
“뜨거운 쇠는 살을 태우겠지만 대신 피를 멎게 해 준다. 곪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지. 쓸데없이 지혈산이나 약초를 뭉개서 붙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구양화는 물론이고, 휘연과 휴까지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장기린의 말은, 어쩐지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의 이야기처럼 사실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실제로 장기린은 전쟁터에서 그런 상황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운이 나쁘면 하루에 몇 십 번이나 싸워야 하는 날도 있고, 한쪽 팔이 잘려 나간 병사가 반대쪽 팔로 무기를 잡고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의원들이 침을 놓고 약탕을 먹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만한 물자나 인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처음 군의(軍醫)로 온 자들은 가끔 그러려는 행동을 취하지만, 그런 자들도 몇 달만 전쟁터를 경험하면 다들 독하고 과감하게 변한다.
인두로 출혈이 심한 상처를 지지는 건 기본이요, 썩거나 곪아 버린 상처 때문에 사지(四肢)를 잘라 버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장기린에게 있어서 간옹의 방식은 오히려 익숙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굉장한 집중력이다.’
백연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간옹은 구양화가 달려들 뻔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대단한 집중력.
그가 전심전력으로 치료에 전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런 간옹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음인가.
휘연과 구양화의 입에서 억눌린 감탄성이 새어 나왔다.
간옹의 손놀림은 무예를 연마한 무인의 칼놀림처럼 섬세하고, 과감했으며,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한 능숙함이 있었다.
처참하게 쩍 벌어져 있던 상처에서 괴사한 피부를 잘라 내고, 뜨거운 칼날로 지져서 출혈을 막아 미리 만들어 놓은 약즙을 바른 뒤 마치 천과 천을 잇듯이 바늘과 실로 상처를 꿰매 버렸다.
상식을 벗어난 의술.
의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를 도축하는 백정이나 가죽을 꿰매고 잇는 직인에 가까워 보였다. 명문 의가에서 충분히 사도라며 내쳐질 만한 방법이었다.
“아아…….”
둥그렇게 휘어진 바늘이 피부를 툭툭, 뚫고 들어갈 때마다 지켜보던 구양화와 휘연이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녀들은 그래도 꾹 참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의 상처를 다 꿰맸을 때쯤, 백연이 한 번 의식을 차리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아아……!”
탁한 목소리. 동공은 여전히 열린 채 초점이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아! 으으으…….”
구양화가 부르자 잠시 움찔 몸을 떨었으나, 백연은 다시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바늘에서 실을 끊어 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옹.
그는 고통을 호소하는 백연을 보며 오히려 기쁜 기색이었다.
“다행이야. 그래도 신경이 살아 있긴 한가 보군.”
환자에겐 고통스런 비명이라도 그의 입장에선 오히려 생존에의 신호였다.
간옹의 움직임이 더욱더 활기를 띠었다.
보랏빛으로 부풀어 오른 환부를 거침없이 칼로 절개해 죽은피를 빼내고, 맨손으로 명치와 배근(背筋)을 눌러 부러진 늑골을 끼워 맞춘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물 흐르듯이 이루어졌다.
그 자체로 신명나는 한 판의 춤사위.
하나의 무공이나 다름없다.
“으음, 이게 문제인데…… 아니, 이 덕분에 살았다고 해야 하나…….”
간옹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대뜸 백연의 하의를 벗겨 냈다.
“……!!”
어떤 처참한 광경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휘연과 구양화.
그래도 하의를 벗기는 건 차마 볼 수 없는지 두 사람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
이번 신음은 장기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체의 상세가 너무 심각해서 미처 보지 못했다.
허벅지에 당한 관통상.
화살이 박혀 있다가 뽑힌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의 주변에는 마치 누군가가 퍼런 염료로 그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섬뜩한 느낌의 핏줄이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이건…….”
간옹은 거기에서 다시 상식 외의 행동을 보여 주었다.
상처에 칼을 가져가 울컥, 하고 새어 나오는 거멓게 죽은피를 묻히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혀끝에 살짝 묻혀 맛을 본 것이다.
“으음, 이 쓴맛, 이 증상……. 그렇군. 부자인가. 부자독을 썼군. 역시 이 음기(陰氣)는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독의 맛을 느낄 정도면 자신도 독을 들이켰다는 뜻인데, 그에게는 중독을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간옹은 이내 의당의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달려가더니, 그 안에서 검은 보자기에 칭칭 감겨 있던 약통을 꺼내 가지고 왔다.
뚜껑을 열자 퍼져 나가는 지독하게 쓴 냄새.
고약(膏藥)이다.
그는 그것을 검지와 중지로 듬뿍 퍼서 허벅지 부위의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다시금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비트는 백연. 하지만 동시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던 비정상적인 푸른빛의 혈관이 점점 그 규모를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스스스―
“오……!”
지켜보던 휴가 탄성을 내뱉었다.
푸른빛의 혈관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상처에 발라져 있던 새카만 고약이 신기하게도 점점 흰색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간옹이 그들에게 해 주는 말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 주었다.
“부자독은 극(極)자가 붙을 만큼 강력한 음기. 하지만 우연인지 천운인지 독에 당하기 직전에 극양의 기운을 뽑아서 모은 덕분에 독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극양과 극음은 상충되지만 또한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태극. 이미 한참 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살아 있는 건 순전히 그 우연 덕분이야.”
거칠고 투박한 말투였지만, 그가 내뱉는 말에선 깊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현기가 깔려 있었다.
감탄하는 일행.
그들의 눈에서 희망이 차올랐다.
“그럼 살 수 있는 것이오?”
“아니.”
하지만 그 희망을 일거에 부숴 버리는 간옹이었다.
“그러기엔 생기를 너무 많이 썼어. 진원진기만 손상당하지 않았어도 손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 두면 열흘 안에 죽을 거야.”
“방법이 없는 것이오?”
“눈빛 사나운 형씨, 난 의원이지 신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 솔직히 다른 의원을 찾아갔으면 오늘 안에 죽었을걸?”
즉, 자기니까 열흘이나마 더 살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의원으로서 죽음을 많이 겪은 탓인지, 심각한 소식을 전하는 간옹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아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
구양화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으나, 결국 신음을 흘리며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화 매!”
휘연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괘, 괜찮아, 언니.”
“아냐. 괜찮을 리가 없잖니. 울어도 돼. 괜찮으니까 울어도 돼.”
휘연의 품에 안긴 구양화의 눈에서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지만, 그녀는 끝끝내 울지 않았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기에.
그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제 괜찮아, 언니.”
“화 매……?”
“잠깐, 할 일이 있어.”
휘연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빠져나오는 구양화.
그녀는 소매로 눈 밑을 한 번 슥― 닦아 내더니, 양쪽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당당하게 간옹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 그런 칼질에 집착하다가 명문 의가에서 쫓겨났지?”
“어이, 아가씨. 말이 심한데?”
간옹은 짐짓 사납게 인상을 썼다. 칼질이라는 말은 그에게 민감한 사안이었던 까닭이다.
“내가 하는 건 ‘칼질’이 아니야. 명명백백한 ‘의술’이지. 한 말기에 계셨던 의선(醫仙) 화타께서 사용하셨으며 그분이 옥사하면서 비인부전의 명맥이 끊겼지만 그 제자들의 비서를 통해 회복된, 당금에 몇 안 되는 진짜 외기(外技) 의술이라고.”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의술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는 간옹.
그가 아무리 인상을 써도 무서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겉으로 괴팍해 보이는 모습 속엔 의외로 순수하고 순진한 면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의가에선 그런 종류의 공부만 미친듯이 파고들었을 테고…… 침을 놓거나 약방문을 처방하거나 하는 의술엔 영 소질이 없었지?”
“무슨 소리!”
살살 심기를 긁는 듯한 구양화의 발언에 간옹이 냉큼 넘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래 봬도 진선의가(眞善醫家) 수석(首席) 자리까지 올랐던 몸이야! 내기의술(內氣醫術)은 깊게 공부하지 못했지만, 그냥저냥 대충 배운 박가의원 같은 것들 보단 훨씬 낫다고 자부할 수 있어!”
“그래? 정말이야?”
“당연하지! 아가씨, 너무 날 무시하면 정말로 화낸다?”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간옹.
박가의원이 들으면 대노할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을 보면, 휴가 했던 ‘어중간하다’라는 평판이 사실인 듯했다.
그러고 보면 간옹은 의가에서 쫓겨난 파문 제자답지 않게 항상 자신만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성정이라 생각했는데, 그속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신의(神醫)는 아니지?”
의미심장한 구양화의 말에 간옹이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뜻이야?”
“몸의 상처를 고치고 회복시키는 건 자신있어도, 내기를 다스리고 생약(生藥)과 생기(生氣)를 다루는 것엔 아직 어설프지 않냐는 소리야.”
“……솔직히 그렇긴 해.”
어린 소녀답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구양화. 그에 답하는 간옹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럼 물을게. 박가의원 따위가 아니라, 신의(神醫)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돌본다면? 그래도 백 오라버니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으음…….”
“솔직하게 대답해 줘. 어떤 대답이라도 수긍할 테니까.”
구양화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그 눈빛에서 절박함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한편, 구양화의 말에 생각이 바뀐 듯한 간옹.
그는 진지하게 백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한 번 살피는 듯했다.
“으음…….”
그리고 그는 탐탁지 않은 듯, 신음을 흘렸다.
“그전에. 아가씨, 신의(神醫)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어? 넓은 중원에 수백, 수천의 의원이 있지만 그중에 신의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단 세 사람뿐이라고?”
“알고 있어. 백의선(白醫仙), 흑신의(黑神醫), 적광의(赤狂醫)지?”
“허? 알고 있네?”
“그중 한 명을 알고 있거든. 대답이나 해 줘.”
“뭣?! 그중 누구를?”
“알려 줄 수 없어. 워낙 낯을 가리는 분이라, 실수로라도 밖으로 정보를 흘리면 불같이 화를 내시거든. 그보다 신의가 있으면 오라버니가 살 수 있냐고 물었잖아.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간옹은 잠시 머뭇거리다 심각한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솔직히 내 실력으로는 이게 최선이지만…… 분명 신의라고 불리는 그 세 분이라면 어느 쪽이든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을 거야. 그 세 분은 화타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리는 분들이란 말이야. 잃어 버린 진원진기나 깎여 버린 생기 따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쳐 줄 수 있을걸?”
“진짜? 정말이야?”
“그럼. 세 분 중 누구냐에 따라서 방법은 상당히 달라질 테지만, 어쨌든 세 분 다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상태의 환자든 살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단 말이지.”
구양화의 눈빛이 반짝였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백연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간옹은 그녀의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구양화의 말을 통해 모든 것을 간파하고 한마디 충고를 더했다.
“백의선은 황실의 근처를 떠나지 말라는 명을 받았으니 북경에 있을 테고, 적광의는 전쟁터만 찾아다니는 분이니 찾을 수가 없을 테고, 그럼 행방불명 중인 흑신의인가? 백의선이야, 흑신의야? 둘 중 어느 쪽이지?”
“아…….”
“말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가씨. 하지만 결정을 신중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말한 열흘은 침상에 누워 안정을 취할 때의 말이고, 만약 이동을 하면서 환자에게 무리를 준다면…… 그게 닷새가 될지 사흘이 될지는 그야말로 천지신명께 달린 거니까 말이지.”
모두의 시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백연을 향했다.
창백한 안색. 핏기가 빠진 입술.
대체 간옹이 어떤 수를 쓴 것인지 숨소리가 안정되긴 했지만, 여러 군데에 참혹하게 드러난 상처는 그의 상태가 여전히 위중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대로 여기서 안정을 취한다면 마지막에 한 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라. 회광반조가 일어날 때는 생기가 돌아올 테니까.”
“아…….”
“하지만 이동을 하다가 잘못되면 그대로 끝이지. 그대로 숨이 멈춰서 대화할 기회는 없을 거야. 잘 선택해.”
간옹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그 속에 걱정해 주는 듯한 따뜻함이 있었다.
장기린은 구양화가 고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 일은 그가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 혈육이나 마찬가지인 구양화가 결정할 일인 것이다.
“괜찮아.”
구양화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지막 이별의 대화를 나누느니,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잡겠어.”
“그래? 역시 그런가…….”
간옹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가더니, 손바닥 반만 한 통을 내밀었다.
구양화가 받아 들고 뚜껑을 열자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청아한 향이 확― 하고 퍼져 나왔다.
“내 스승님이 만드신 구명환이야. 세상에 몇 개 없는 귀한 물건이지. 만약 이동 중에 눈밑이 퍼렇게 변하면서 숨이 거칠어지면 그 구명환을 먹이도록 해.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는 더 살려 놓을 거야. 잘하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라.”
“아…….”
“씹을 필요는 없어. 입에 넣자마자 녹을 테니까.”
구양화는 감탄하며 단약을 소중하게 품 안에 챙겨 넣었다.
목숨이 늘어나는 단약이다.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그건 보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한가……!’
반면, 장기린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다 죽어가는 백연을 찢고 꿰매면서 열흘이나 더 살려 놓은 것도 이미 신기(神技)라고 할 만하건만, 죽기 직전에 입에 넣기만 하면 하루 반나절을 더 살려 놓는 약이라는 말은 충분히 기사(奇事)라고 할 만했다.
하루 반나절.
죽음이 임박한 자에게 있어서는 긴 시간이다.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고, 기력이 돌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별의 말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대단하다.’
장기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전장의 군의들 중에도 대단한 이는 많았지만, 이렇게 특출난 능력은 처음 보는 듯했다.
“자, 그럼 됐지? 내가 환자를 옮길 만한 마차를 불러 줄 테니까 바로 출발하라고.”
“가, 감사해요.”
처음으로 구양화가 존댓말을 썼다.
그만큼 감사한 마음이 크다는 뜻.
하지만 간옹은 눈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젓더니,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그럴 필요 없어. 계산은 확실히 할 테니까.”
“네……?”
“어이, 모르는 거야? 거기 예쁘장한 형씨는 구면인 것 같은데, 이야기 안 해 줬어?”
예쁘장한 형씨.
지목당한 휴가 잠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자기를 부르는 거냐고 묻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간옹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본인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듯하지만, 옆에서 보기엔 그보다 잘 어울리는 호칭도 없었다.
“크흠, 여기 있는 간옹은 뒷골목 의원입니다. 뒷골목 의원은 아무것도 안 묻고 치료해 주는 대신…… 뭐랄까, 계산을 확실히 하죠. 치료비가 비쌉니다.”
“치료비? 얼마나……?”
얼떨떨하게 묻는 구양화. 그에 대한 대답은 간옹이 했다.
“은자 육백 냥.”
“헛……!”
깜짝 놀란 휴가 옆에서 신음을 흘렸다. 그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금액인 모양이다.
은자 육백 냥.
웬만한 객잔을 하나 통째로 살 수 있고, 비옥한 토지 일만 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왜? 비싸?”
모두가 놀란 것과 달리 간옹에겐 그 액수가 당연한 듯했다.
“산송장을 데려와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말고 다른 데 갔으면 열흘이나마 살렸을 것 같아?”
“하, 하지만…….”
“그리고 내가 쓴 고약이랑 지금 넘긴 구명환이 얼마짜린 줄 알아? 거기에 들어간 재료들 내가 읊어 줄까? 솔직히 나 엄청 싸게 해 준 거야.”
돈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인지, 간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과하다 싶으면 그 구명환 돌려줘. 그러면 은자 삼십 냥으로 해 줄게.”
손을 척하니 내미는 간옹.
구양화는 품 안에 넣은 단약을 지키려는 듯 양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저리 가요!”
“……이봐, 아가씨. 사람을 색마 대하듯이 하면 곤란해.”
거기서 휴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그 단약이…… 설마 오백칠십 냥이라는 소리입니까?”
“당연하지. 원래는 천 냥이 있어도 못 구하는 귀한 약이야. 난 재료값만 받은 거라고. 그거, 산송장이 먹으면 하루 반나절이지만, 보통 사람이 중상을 입었을 때 먹으면 바로 상처가 낫는 명약이란 말이야.”
“아…….”
“그럼 결정해. 구명환을 돌려주든지 나중에 육백 냥을 낼 걸 약속하든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간옹.
겉으로 보기엔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내려는 뒷골목 의원의 모습이지만, 장기린은 거기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나중이라니, 돈을 지금 내는 것이 아니오?”
“형씨, 난 기본적으로 내가 환자를 살렸을 때만 돈을 받아. 만약 환자가 죽으면…… 그땐 치료비는 안 받는 거야. 노력에 결과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법이니까.”
그 말을 하는 간옹에게선 어쩐지 과거의 회한이 느껴졌다.
“즉, 백연이 이송 중에 죽거나 잘못되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래, 그 말이야.”
정말로 특이한 자.
이런 생각을 가진 의원은 대륙 그 어디에도 없을 듯했다.
“그럼 왜 구명환을 주었소?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면 그런 귀한 물건은 되도록 안 내놓는 게 좋을 텐데.”
“그건…….”
처음으로 간옹의 말이 막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살릴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돈 때문이든 뭐든, 다른 이유로 환자를 소홀히 대하면…… 그건 의원이…… 아니니까.”
말을 질질 끄는 간옹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뒷골목에서 사나운 자들을 상대하고 있다고는 하나, 간옹은 장기린이 지금까지 봐 온 의원들 중에 가장 ‘의원’ 같은 자였다.
진선의가에서의 파문?
실수다.
진선의가는 큰 인재를 잃은 것이다.
솔직히 백연이 살든 죽든, 만약에 환자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치료비를 안 낸다면 어쩔 것인가? 이 세상엔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거늘.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다. 보물이나 다름 없는 구명환까지 내주면서 환자를 살리려고 한다.
휴도 더 이상은 치료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장기린은 조용히 품에 손을 넣었다.
“자, 받으시오.”
“……!”
금괴를 하나 꺼내서 건네준다.
금괴는 하나에 금자 삼십 냥. 금자 한 냥은 은자 스무 냥의 가치를 갖고 있으니, 금괴 하나가 은자 육백냥이라 할 수 있었다.
휴와 구양화의 눈이 커다래지고, 간옹 역시 놀랐는지 손에 들린 금괴와 장기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째서……?”
의아한 듯 묻는 간옹.
장기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과 같은 이유요. 친구를 구하는 데 그에 대한 대가를 공짜로 바란다면 친구라고 할 수 없겠지.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다면 하늘도 돕지 않을 것이오.”
백연은 객잔의 식구들과 두루두루 친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
휘연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구양화의 오라버니이며, 누구보다 순박하고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원나라 잔당의 피해자였다.
친구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해야 한다.
어차피 쓰지도 않고 항상 품 안에 있는 금괴.
처음에 들고 온 다섯 개의 금괴 중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중 하나쯤 쓴다고 해도 상관없다.
더군다나 진정한 의원의 모습을 보여 준 간옹이라면…… 설령 가는 길에 백연이 잘못된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주고 싶었다.
“객주님……!”
장기린의 행동에 놀란 것은 간옹만이 아니었던가.
구양화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 당장 돈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마땅히 자신이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툭.
장기린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 신의라는 자가 있는 곳은 알고 있겠지?”
“아, 네…….”
“내가 함께 가 주마. 너 혼자 백연을 데리고 갈 수는 없을 테니까.”
구구절절, 서로 긴말을 나눌 필요조차 없었다.
그 짧은 말로 서로의 심정을 다 소통할 수 있었다.
“윽…….”
그동안의 마음고생으로 많이 약해진 탓인가.
결국 구양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객잔은……?”
울먹거리며 묻는 구양화.
그녀가 향한 시선에 있던 휘연이 밝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객주님, 객잔은 저희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그래, 그러지.”
이럴 때 두말 않고 뒤를 밀어 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휘연다웠다.
다시 간옹에게 시선을 돌리는 장기린.
간옹은 한참 동안 금괴를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이름을…… 물어도 될까?”
“장기린.”
“장기린…… 사는 곳은?”
“풍운객잔에 있다.”
“장기린…… 풍운객잔…….”
간옹은 특이한 이름에 웃지도 않고, 그 말을 깊게 곱씹는 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알려 줘. 이 금괴는 돌려줄 테니까.”
“그러지.”
거짓말이다.
장기린은 설령 백연이 죽더라도 돈을 도로 받아 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간옹은 그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금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각 후.
간옹이 준비해 준 마차에 마부를 제외한 세 사람이 올라 항주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