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一章 ― 신장신의(神匠神醫)
간옹이 부른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장기린은 휘연에게 물었다.
“휘연, 내가 금괴를 쓸 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사실 장기린은 간옹에게 금괴를 내밀 때 휘연의 반대를 예상했다.
휘연은 상가의 자제답게 항상 검소하고, 돈을 쓰는 것에 철저했던 것이다. 풍운객잔의 장부를 관리하면서 동전 한 푼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는데, 무려 금괴를 내놓는 것에 아무런 말도 없던 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객주님이시니까요.”
“휘연……?”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장기린에게 휘연은 그저 부드럽고 한없는 애정을 담아 웃고 있었다.
“객주님이 그런 분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금덩어리보다는 사람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그 말만 들으면 무척 대단한 위인인 줄 알겠어. 난 그런 사람이 아냐.”
“아뇨. 그런 분이세요. 그러니까 객잔 식구들이 모두 객주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고, 그런 분이니까…… 제가 좋아하게 된 거예요.”
마지막 말은 장기린에게만 들리도록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장기린은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할 줄이야.
휘연을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서로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더욱더 대담한 행동을 했다.
쪽.
볼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만들어 내는 작은 소리.
하지만 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천둥만큼이나 큰 소리가 천하의 장기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녀오면 드릴 게 있어요.”
휘연은 많이 부끄러웠는지 곧바로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가 버렸다. 뒤에서 보이는 동그란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손으로 볼을 감싼 채 휘연이 구양화에게 인사하고 멀어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장기린.
문득 시선을 느껴서 고개를 돌리자, 휴가 자신을 힐끔힐끔 보며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아뇨. 그냥…… 뭐랄까, 뜨겁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놀리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장난을 치는 분위기였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했다.
민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단 백연의 생사가 달린 상황. 기뻐하면서 웃음을 지을 때가 아닌 것이다.
“웃을 때가 아니야.”
“크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휴.”
“예?”
“내가 없는 동안 객잔을 잘 부탁한다.”
장기린의 진지한 목소리에 휴는 표정을 굳히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그래, 믿는다.”
휴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어릴 적에 제법 검을 휘둘렀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타고난 재능이 상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중간에 훈련을 그만두긴 했지만 뒷골목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경험도 있다.
재능, 독기, 경험.
그 세 가지를 모두 갖춘 휴는 매일매일 성실하게 훈련을 하면서 이젠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진구가 있었다면 둘이서 좋은 승부가 되었겠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까무잡잡한 얼굴과 장난기 많으면서 쾌활한 말투.
그립지만 그리워해선 안 되는 동생이다.
“객주님!”
문득 구양화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마차는 어느새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어.”
마차에 올라타는 장기린.
그들은 휘연, 휴, 간옹의 배웅을 받으며 신의를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항주의 관문을 넘어 초광부(?光府)로 가는 길은 평탄하기만 했다.
특별한 장애물도 없었고, 간옹이 붙여 준 마부의 솜씨 또한 뛰어나서 마차가 흔들리거나 덜컹거리는 문제로 백연의 상세가 악화될 위험은 없어 보였다.
초광부는 항주의 동남쪽. 남경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바다가 가깝고 내륙과는 멀다. 습하고 따뜻한 기후였지만 덕분에 땅이 비옥해서 질 좋은 차와 쌀을 재배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마차의 방향을 그리로 잡은 것은 구양화.
장기린은 아직 초광부의 어느 곳으로 가는지, 또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도 몰랐지만, 모든 것을 구양화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백 오라버니.”
반 시진에 한 번씩 구양화는 백연을 꾸준히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미약한 숨소리를 내며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이마와 몸에서 계속해서 땀을 흘렸고, 가끔 입술을 떨면서 ‘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오늘로 항주를 떠난 지 삼 일째.
간옹이 잘못하다간 사흘에서 닷새를 넘기기 힘들 수도 있다고 했던가. 구양화가 백연을 극진히 간호하며 계속해서 입에 물을 흘려넣어 주었으나, 백연은 그 절반도 다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구양화는 백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반나절에서 하루만 더 가면 돼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요.”
“그래?”
반나절에서 하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애매한 시간이었다.
백연의 상세가 언제 급속도로 악화될지 모르기에 더더욱 그랬다.
“아가씨.”
그때, 마부석과 마차 안을 잇는 쪽문이 열리면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부는 구양화를 아가씨라고 깎듯하게 불렀다.
“이제 곧 초광에 들어갑니다. 그대로 들어가도 되겠지요?”
구양화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마부에게도 정확히 말하지 않은 모양.
마부는 그전에도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방향을 묻곤 했다.
“아니, 관문을 통과해선 안 돼요.”
“그럼 어느 쪽으로…….”
“북쪽. 관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관도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샛길이 보일 거예요. 우린 그리로 가야 해요.”
구양화의 입에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술술 흘러나왔다.
근처의 지리에 익숙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몇 번이나 와 본 것처럼 능숙해 보였다.
“할아버님이랑 몇 번이나 같이 와 봤어요. 그때마다 할아버님도 그때그때 길을 가르쳐 주셨죠.”
구양화는 장기린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먼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이지 어른스럽고 영악한 소녀였다.
“다른 사람이 목적지를 알면 안 되는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지명을 말해 봤자 마부들도 알지 못하는 곳이거든요. 그때그때 방향을 알려 줘서 길을 가는 게 더 편해요.”
즉,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외진 지역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두두두―
덜컹― 덜컹―
마차가 샛길로 접어들고, 잘 닦인 관도가 아니라 험한 소로를 지나게 되자 마부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몇 번 덜컹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으으…….”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백연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작은 충격조차 그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태.
서서히 안색이 더욱 나빠지는 백연의 모습을 볼 때마다 구양화는 몇 번이나 품 안의 단약을 꺼냈지만, 차마 뚜껑은 열지 못한 채 계속해서 도로 품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쯤 지났을 때,
마침내 마부에게서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아가씨, 뭔가가 보입니다.”
“작은 초가집인가요?!”
“예. 물래방아가 있는 초가집입니다.”
그 순간, 구양화의 눈에서 빛이 뿜어졌다.
그녀가 애타게 찾던 장소가 맞는 듯하다.
철퍽! 철퍽!
땅! 땅! 땅!
물래방아가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힘찬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협곡이고, 한쪽엔 폭이 넓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구양화는 백연의 손을 꼭 붙잡더니, 마차가 멈춰서자마자 날 듯이 뛰어내렸다.
“당 노! 당 노! 안에 있어? 화아(華兒)가 왔어! 당 노!”
날카롭게 찢어지는 구양화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다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안쪽에서 들려오던 망치질 소리가 뚝 그쳤다.
장기린은 초가집에서 백발백염의 노인이 미간을 좁히면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아라니? 설마, 그 구양 늙은이의 손녀, 화아란 말이냐?”
“그래! 나야, 당 노!”
후다닥 뛰어간 구양화가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체구의 노인의 품에 폭 안겼다.
노인은 땀이 범벅이 된 채 온몸에 거뭇거뭇한 그을음이 묻어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
당 노는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즐거운 듯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 녀석! 오랜만에 보는데도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이렇게 까불어서야 시집이나 가겠느냐!”
“시집, 까짓거 안 가지 뭐. 구양가에서 평생 살아도 돼.”
“허허, 내 딸내미도 한때 그런 말을 하긴 했다만, 열일곱이 되니 금새 말을 훽 뒤집어 버리더구나. 너도 분명히 그럴 거다, 요 녀석!”
껄껄 웃는 호탕한 웃음에 구양화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는 구양화.
그 말에 화답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노인의 가슴에 얼굴만 묻고 있었다.
“화아야?”
건장한 체구의 노인은 곧 이상함을 느끼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그를 부를 때부터 구양화에게선 어딘가 절박한 기색이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노인의 기세가 바뀌었다.
차가운 눈빛. 당당한 기파.
백전노장 같은 노인의 시선이 마차 앞, 장기린에게로 향했다.
‘성격이 대단한 노인이군.’
느껴지는 힘은 장기린의 입장에선 대단치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고집스런 눈빛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성격이 꼬장꼬장할 게 분명했다. 아마 저 노인이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오직 구양화뿐. 그 외의 사람들은 괴팍하고 강렬한 성격 탓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할 것이다.
장기린은 저런 눈빛과 기도를 가진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황실 최고의 명장(名匠), 풍 도공.
시대의 최고 장인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당 노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경계받고 있군.’
당 노인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네놈이 감히 내 손녀를 울렸느냐는 듯한 기세였다.
“당 노, 우(宇) 선생은 어디에 있어?”
“응? 우가 놈 말이냐? 그놈은 왜?”
“백 오라버니가 다쳤어. 우 선생이 필요해.”
“백연이?”
당 노인도 백연을 아는 모양.
구양화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키자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기린을 가까이에서 본 그는 잠시 눈을 번뜩이며 이채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장기린이 옆으로 비켜 주자 그 뒤에 눕혀져 있는 백연을 보며 미간을 꿈틀거렸다.
“상세가 심각하구나!”
당 노는 단순히 망치질을 하는 장인(匠人)이라 생각했는데 인체의 구조에 대해서도 해박한 듯했다.
그는 백연의 어깨, 가슴팍, 복부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침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하군.”
초점없는 눈동자. 핏기가 빠진 얼굴.
당 노도 백연의 생기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초가집으로 뛰어가더니, 그 안에서 손바닥만 한 북을 들고 나와 둥둥,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가 놈! 어디에 있나! 빨리 와라!”
둥. 둥. 둥.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북소리는 주변에서 인기척이라곤 한 점 찾을 수 없는 협곡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북을 울린 지 반 각 정도 지났을까.
초가집 서쪽의 울창한 수림 사이에서 키가 큰 노인이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무명옷을 갖춰 입고, 튼튼해 보이는 가죽신에 어깨 한쪽으로 메는 망태기를 걸치고 있었다.
망태기 안에는 녹색의 풀잎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장기린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 당가야? 또 천관포(天關砲)라도 터뜨린 거냐?”
괄괄한 목소리에 느껴지는 강렬한 남쪽 지방의 말투.
당 노처럼 건장한 느낌은 아니지만,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꼬장꼬장한 성격이 느껴졌다.
머리카락과 턱까지만 기른 짧은 수염이 모두 반은 검고 반은 허옇게 새어 버린 반백이었는데, 얼굴이 대춧빛처럼 붉은 사람이 반백의 머리를 하고 있으니 굉장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빛에서 묘한 현기가 느껴졌다.
당 노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굉장히 맑아서, 마치 별빛을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아니다, 우가 놈아. 백연이 크게 다쳤어. 네놈의 의술이 필요하다.”
“백연? 그 무당파의 순박한 녀석 말인가?”
“그래, 그 녀석.”
그제야 우 선생이라 불린 노인이 이쪽을 바라본다.
구양화, 장기린, 그리고 백연.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우 노인은 그의 자리에선 백연의 옆얼굴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크게 눈을 뜨더니 망태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중안(中顔)이 창백하고 눈 밑이 누렇다. 동공이 열려 이지를 판별하지 못하니, 이미 생기가 고갈되었구나.”
득도한 고승의 시선이 이러할까.
멀리서 한 번 슬쩍 본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파악하고 핵심을 짚는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의 손엔 어느새 품에서 꺼낸 금빛의 침통이 들려 있었다.
대춧빛처럼 붉은 얼굴 위로 침중한 시선이 백연을 이리저리 살폈다.
“우 선생님, 백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나요? 살릴 수 있죠? 네?”
우 선생.
대륙에 세 명뿐인 의술의 대가이자 흑도에서 활동하여 흑신의(黑神醫)라는 별호로 불리는 우문환(宇文桓)이 바로 그였다.
그는 백연의 어깨를 꿰매 놓은 실과 가슴의 칼자국을 보더니, 탄성을 발했다.
“호오, 이 상처를 치료한 자가 누구냐? 대단한 실력이다. 청랑서를 구 할 구 푼에 가깝게 재현했어.”
화타의 책, 청랑서.
역대 최초로 몸을 절개해 상처를 치료하는 비법이 적힌 의술계의 비서(秘書)였다.
“이 정도면 적광의가 했다고 해도 믿겠는데……. 아니, 아니지. 허벅지의 상처에 붙인 이 침음(沈陰) 고약. 호오, 혹시 적광의와 관련이 있는 자인가?”
“네?”
“생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대처는 최적이었다. 아직 태극음양의 이치에 대해서는 부족한 면을 보이지만, 외신(外身)을 다루는 능력이나 절제술에선 놀라운 실력이 보인다. 당장 죽을 사람을 열흘이나 더 살려 뒀어.”
“아…….”
장기린과 구양화는 동시에 놀랐다.
과연 신의라고 해야 할까. 우문환은 드러난 상황만 보고도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다만 이대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혹시 뭔가 준 것이 없느냐? 위급할 때 먹이라는 말과 함께 주었을 텐데.”
“있어요.”
웬만한 점쟁이도 이 정도로 맞추지는 못할 터.
구양화는 감탄한 눈빛으로 품 안에서 사각형의 단약 통을 꺼내 우문환에게 내밀었다.
뚜껑을 열고 단약을 살피는 우문환.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구명환! 역시 적광의가 엮여 있었군! 하하! 화아야, 이 녀석을 치료한 자가 누구냐?”
“그게, 항주에 있는 간옹이라는 사람인데…… 젊어 보였어요. 삼십대 초반쯤?”
“그래? 적광의가 제자를 둔 모양이군. 평생 그럴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우문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간옹이 삼대신의라는 적광의의 제자인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
신의의 제자라면 어느 곳에서든 최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의가에서 쫓겨난 의원인 것처럼 꾸미며 뒷골목에 있는 것일까.
장기린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 그보다! 우 선생님, 백 오라버니는? 백 오라버니는 살릴 수 있는 거죠?”
우문환은 지긋한 눈으로 구양화를 쳐다보며 인자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나라면 이 녀석을 살릴 수 있다.”
“정말로……!”
“간옹이라는 녀석이 미리 처치를 잘해 둔 덕분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잘못되어 버렸다면 아무리 나라도 손을 쓸 수가 없었을 테지.”
우문환은 그렇게 말하며 금침을 꺼내 망설임없이 백연의 가슴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백연을 옮길 필요도, 다른 준비를 할 것도 없다는 식이었다.
진중한 눈으로 백연의 안색을 주시하며 침을 꽂아 넣는 우문환.
가슴의 중앙에서부터 시작된 침술이 하복부까지 내려오고, 마침내 얼굴의 인중과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 인근까지 올라갔을 때, 신기하게도 잔뜩 찌푸려져 있던 백연의 인상이 점점 편안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이윽고 백연의 입에서 신음이 아니라 편안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신기(神技).
장기린은 하늘이 내린 의술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다른 의원들이 산송장이라고 표현했던 자가 침을 몇 방 맞았다고 해서 곧장 생기를 되찾는 모습은,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만큼이나 신비로웠다.
“이제 이대로 일각을 두면 생기가 모일 것이다. 나는 그 안에 몸 안의 균형을 찾아줄 약탕을 끓여야겠다.”
“우 선생님……!”
구양화가 감격과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우문환을 올려다보았다.
백연은 눈에 띄는 차도를 보였다.
신의라 불리는 우문환이 계속해서 손을 쓰고 있다.
이미 백연은 살아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비록 지금 큰 뜻을 위해 은거하고 있긴 하다만, 본래 의원의 의무는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니까.”
걸걸하고 거친 목소리에서 지극한 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세를 풍미하는 신의, 우문환은 곧바로 초가집 옆의 창고로 들어가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남은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장기린이 백연의 몸에 꽂혀 있는 금침을 보며 기다리고 있으니, 갑자기 눈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있었다.
“넌 뭐냐?”
건장한 체구의 노인.
척 보기에도 일흔이 넘은 듯한 외모인데, 온몸의 근육이 여전히 발달되어 있어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뾰족한 매부리코.
짙은 백색의 눈썹이 하늘 위로 치솟아 있는 눈매는 매우 사납게 날이 서 있었다.
“백연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오.”
“친분? 무림인인가?”
“아니오.”
“그럼 더욱 위험하군.”
뭘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
장기린이 의아해하는 사이, 구양화가 나섰다.
“당 노, 그러면 안 돼. 객주님은 우릴 많이 도와주셨단 말이야. 이번에 여기까지 오는 데도 객주님의 도움이 컸어.”
장기린을 변호하는 구양화.
하지만 당 노인이 반응을 보인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객주라고? 이놈이 객잔의 주인이란 말이냐?”
“응, 항주 금선로에 있는 객잔의 주인이셔.”
“허어……!”
황당하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는 당 노인.
그의 눈이 장인 특유의 고집스럽고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피 내음이 짙다. 태생이 그러했고, 그 후에 수만 번의 망치질로 담금질이 된 셈이야. 이놈은 검에 비유하면 마검이다. 삶 자체가 피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위험한 놈이란 말이다.”
당 노인의 말에 장기린은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도 자신의 눈빛이나 인상이 평범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마검이라…….
태생이 그러했으며 타고난 삶이 피를 보는 운명이란다.
“마검은…… 평범한 검이 되고 싶어 하면 안 되는 것이오?”
“뭣이?”
“피가 지겨워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지겨워진 마검이 있다면 어찌해야 하오?”
비꼬는 것이 아니다. 장기린은 이미 인생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장인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당 노인은 그런 장기린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빛냈다.
짙으면서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장기린을 응시한다. 잠시 후, 두툼한 입술이 열리며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수 있나. 부러뜨려야지.”
“당 노!”
옆에서 듣고 있던 구양화가 놀라서 외쳤다.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영악한 그녀였다. 하여 장기린과 당 노의 대화가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 눈치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가…… 부러뜨려야만 하는가…….”
침음성을 흘리는 장기린.
당 노는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따라와라. 보여 줄 게 있다.”
“당 노……?”
“화아는 그놈 곁을 좀 지켜 주거라.”
등을 돌리고 물레방아가 있는 초가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당 노인.
장기린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백연의 곁을 지키기 위해 남은 구양화가 ‘당 노는 공방(工房)에 아무나 안 데려가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이 흔치는 않은 듯했다.
“이곳은……!”
초가집에 발을 들인 장기린은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풍 도공과 비슷한 분위기로 알아채긴 했지만, 이 초가집은 하나의 커다란 병기고라고 할 수 있었다.
단검, 장검, 협봉검, 장군검으로 시작해서 낭아추, 철겸, 일월륜 같은 특이한 병기들까지.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암기들과 생전 처음 보는 색의 돌멩이가 조심스레 보관되어 있었다.
장기린은 전쟁터에서 수만 개의 병장기가 보관된 무기고에 가 본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과는 또 다른 신천지였다.
벽에 걸린 물건,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동댕이쳐진 물건들까지도 하나하나 범상한 물건이 없었다.
신병이기라고 하던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대단한 위력을 낼 무기들이 이곳엔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무거나 건드리지 말아라. 특히 그 푸른색 돌멩이를 건드렸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
“이것 말이오?”
“그래. 그쪽을 향해서는 숨도 함부로 불지 않는 게 좋다.”
탁한 색과 맑은 색이 섞여 있는 푸른색 돌멩이가 보였다.
구양화가 항상 지니고 있는 물건이며, 운찬의 인생을 크게 뒤틀어 놓은 ‘뇌홍(雷汞)’이라는 폭발물이었지만, 장기린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
그는 그저 신경을 끊은 채 다른 곳을 보기 시작했다.
“이게, 전부 노인장이 만든 것이오?”
“그래. 다 조금씩 부족한 놈들이지만, 나름 쓸만은 하기에 부수지 않고 그냥 두는 놈들이지.”
“부족하다니…….”
장기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하나가 신병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구들.
척 보기에도 예기, 모양, 효용, 균형감. 그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었다. 초가집 안쪽 어디를 둘러봐도 적룡기마대원들이 본다면 눈에 불을 켜고 갖고 싶어할 만한 무기들뿐이었다.
“이건?”
그중에 딱 하나. 장기린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수수한 느낌의 장검.
칼날의 너비는 손가락 세 개를 붙인 두께 정도 되고, 색깔은 회백색에 검병은 있으나 검날과 검병을 구분 짓는 분리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길쭉한 하나의 협봉(狹棒)이며, 검끝으로 갈수록 점점 너비가 좁아지는 유선형의 몸체를 하고 있었다. 검병의 끝에는 흰색의 두툼한 수실이 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하늘을 나는 새의 꼬리 날개처럼 느껴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주변을 보면 용이 새겨져 있다거나 재질이 쉬이 볼 수 없는 강철이라거나 하는 화려하고 진귀한 무기들도 많은데, 이런 투박하고 존재감없는 검이 그의 흥미를 끌다니.
특히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검의 중심에 길게 새겨진 혈조(血彫)였는데, 본래 검에 묻은 피를 흘리기 위해 만들어진 그 혈조로부터 깊숙이 잠재된 은밀한 살기를 느꼈다.
“이건…… 화살이로군.”
장기린은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봤다.
활시위에 걸고 쏘는 화살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사람이 활이 되는.
그리고 검이 화살이 되어 앞으로 내쏘는 극쾌의 움직임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검이다.
“역시 알아보는 건가.”
당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선형의 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이것이었다. 마라불장(魔羅佛杖)이라는 걸 아나?”
“모르오.”
“그렇지. 무림인이 아니라고 했지. 처음엔 파마(破魔)의 신병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군(魔君)의 손에 들려 그 영능을 잃고 마병(魔兵)이 되고 말았다. 그 병기에 의해 죽은 자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 결국 몸에 닿기만 해도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스스로 피를 보고 싶어 하는 요물이 되고 말았지.”
신병(神兵)에서 마병(魔兵)으로.
하늘 위에서 살다가 땅 밑으로 추락한 듯한 변화다. 비록 생명이 없는 물건이라 해도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설마…….’
신기한 이야기이긴 하나, 당 노인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장기린은 유선형 검의 혈조에서 느껴지던 깊이 잠재된 섬뜩한 살기를 떠올렸다.
“그 또한 알아차렸나? 쯧쯧, 역시 마병은 마병을 알아보는 모양이군.”
칭찬보다는 질책의 기색이 강했다.
왜 그런 걸 알아보고 그러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네 생각이 맞다. 그 마라불장의 주인이 죽고, 여러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마병은 결국 내 손에 들어왔지. 나는 처음에 마라불장을 파기하려고 하였으나, 부수려는 순간에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라불장은 그 순간 분명히 슬퍼하고 있었다.”
“병기가…… 슬퍼했다는 말이오?”
“그래. 왜? 거짓말 같은가?”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병기의 슬픔.
그런 인간적인 감정은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가끔 전쟁터에서 손에 들린 무기가 스스로 피를 원하는 듯이 자주적으로 움직여 준 적은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당 노인이 겪었다는 일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그때 난 느꼈지. 신병이 마병이 되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장인으로서 그런 기구한 운명을 겪은 병기가 있다면 다시 신병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거야말로 장인으로서 천도(天道)를 지키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거다.”
신병을 마병으로.
마병을 다시 신병으로.
그거야말로 장인으로서 자신의 천명이라고, 당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이건…….”
“그래. 마라불장을 녹이고, 항마의 제식을 한 뒤, 그 위에 새로운 백철을 씌워서 만든 ‘뼈대’다. 아직 완성한 건 아니지. 합당한 주인이 나타나면 그에 맞춰서 신병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전대의 마병을 토대로 새로이 만들어지는 신병.
지금도 이렇게나 장기린의 눈길을 끄는데 완성이 되었을 땐 얼마나 대단한 무기가 될까.
장기린은 그 검의 주인 될 자가 누군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으며, 또한 의문이 하나 생기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검이오? 살기를 지우기 위해선 굳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무기로 만들 필요가 없지 않소?”
본래 불장이었던 몸이다.
불장이란 제법 직책이 있는 중이 들고 있는 지팡이일 뿐,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고 해도 칼날이 없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런 불장의 모습일 때도 마병이 되었다.
그런데 애초에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검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래서 너에게 이걸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당 노인은 그런 장기린에게 질책의 눈길을 보냈다.
“무림인이 아니니 모를 테지만, 세간에는 신병이라 불리는 무기가 꽤 있다. 그런데 그중에 무기의 형태가 아닌 게 몇 개나 되지? 저 소림의 녹옥불장, 개방의 타구옥봉. 그런데 그 두 개의 물건이 사람을 죽인 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자신의 천명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
당 노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녹옥불장에는 녹옥신검이 숨겨져 있고, 타구옥봉은 상대의 병장기를 깨부수는 신물이다. 둘 다 소림이나 개방의 위기가 왔을 때 적들을 수없이 죽였고, 그 수가 백 단위는 가뿐히 넘어가는 피를 머금었지. 그런데도 그것들은 여전히 신병이라 불린다. 어째서? 마병들이나 신병들이나 생명을 많이 뺏어가긴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한쪽은 신병이라 불리고 한쪽은 마병이라 불리지?”
“즉,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가 요점이 아니라는 것이오?”
“바로 그거다! 즉, 죽인 사람의 숫자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누가 병기의 주인인가’와 그 주인이 사람을 죽일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싸우는가’라는 것이다. 같은 백 명의 목숨을 빼앗더라도 한쪽은 정명한 마음으로 문파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한쪽은 한때의 욕망이나 감정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 양쪽의 차이는 명백하지.”
“아…….”
“특히 후자일 경우엔 결국 점차 생명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고 살인에 대한 경각심이 무뎌지며,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못하는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장기린의 삶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후자에 가깝다.
전쟁터라는 이름의 지옥 속.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스러져 가는 곳에서, 장기린은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에 걸맞은 신념을 가지고 창을 휘둘렀던가? 가끔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싸운 적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린은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큰 충성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대장군에게 거둬져서 자라다 보니 자신이 있을 곳은 전쟁터뿐이라는 생각으로 싸웠을 뿐이다.
별생각없는 살인.
살인이 얼마나 큰일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면서 싸움 실력은 있는 바람에 수백, 수천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그러니 마검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 검은…… 이제 겨우 뼈대, 즉 마검이 아닌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한 지금의 너와 같다. 무(無)지. 이제야 겨우 시작점으로 왔다는 소리다.”
“이 검이 나……?”
“그래. 즉, 이제부터다. 싸우지 않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어. 사람이 살다 보면 싸워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 어떤 마음을 갖는가, 어떤 신념으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가가 중요하다. 그 차이가 신병을 만드는 거야.”
당 노인이 조용히 그 ‘뼈대’를 상자 속에 집어넣는 사이,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의 천명을 말하는 당 노인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았다.
휘연 때도 그랬고, 운찬 때도 그랬다.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해도, 분명 살다 보면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더군다나 최근에 그는 불안한 느낌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 당 노인은 큰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큰 가르침, 감사하오.”
장기린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그 깍듯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꼬장꼬장한 노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크흠, 그래도 이렇게 구구절절 말해 준 보람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검이 신검으로 거듭나는 날이 오길 기대하겠다.”
“꼭 그렇게 될 것이오.”
강한 의지로 빛나는 장기린의 눈.
당 노인은 기껍게 웃더니, 구석에 쌓여 있는 병기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것도 아니고, 으음, 이것도 아니고……. 오오, 여기에 있구나.”
드르륵―
당 노인이 들어 올린 것은 눈이 안 보이는 맹인들이나 쓸 법한 긴 나무 지팡이였다.
손에 잡히는 부분은 고사리처럼 둥그렇게 말려 있고, 땅을 짚는 부분은 뭉툭하면서도 매끈하게 깎아 놓아 단단해 보이는 지팡이.
너비는 세 치. 딱 한 손으로 감싸 쥘 수 있는 두께였다.
“자, 선물이다.”
휙― 하고 날아오는 지팡이를 장기린은 무심코 받아 들었다. 하지만 쇳덩이를 받아 든 듯한 묵직한 무게감이 평범한 지팡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해 주었다.
“이것을 왜 주는 것이오?”
“화아가 저만큼이나 변명해 준다는 것은 네가 저 아이에게 잘해 주었다는 이야기겠지. 그것에 대한 대가다.”
“그렇다면 받을 수 없소.”
장기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불합리한 대가는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게 한 사람에 대한 호의의 대가라면.
“내가 말을 잘못한 모양이구만. 그런 뜻이 아니야. 모든 싸움에서 피를 볼 수는 없겠지. 그럴 때 쓰라고 주는 거야. 그래야 마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화아에게도 계속해서 좋은 사람으로 남아 줄 것이 아닌가.”
“아…….”
“자네, 창을 쓰지?”
그러고 보면 어느새 당 노인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이젠 ‘너’가 아니라 ‘자네’였다. 상대로서 존중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장기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검사는 검지와 중지에, 창수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것이 상식.
당 노인도 그걸 보고 알아차렸나 싶었던 것이다.
“손을 보고 안 게 아니야.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자네를 처음 보는 순간, 꼿꼿하게 날을 세우고 웅장하게 움직이는 창의 느낌이 났지.”
“분위기라…….”
“그런 게 있어, 장인들만 알 수 있는. 검사는 검의 느낌이 나고, 도객은 도의 느낌이 나지. 자네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창’의 느낌이었어. 아마 이미 평생을 함께할 무기를 만났던 것이겠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명장의 시선.
그 순간, 장기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적흑색의 몸체. 매끈하면서도 사납게 뻗어 있는 긴 삼각형의 창날.
진천룡(震天龍).
우레를 부르는 용처럼 사납고 강렬한 살기를 품고 있는 파멸적인 무구다.
황실 최고의 명장, 풍 도공이 만든 오룡창 중에서도 첫 번째.
그는 진천룡을…… 대장군의 묘소에 평범한 삶을 살겠다는 맹세의 뜻으로 두고 왔다.
놀랍게도 당 노인은 그런 것까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의 벗이라 할 만한 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렇소.”
“그래서 그걸 주는 거야. 그건 평범한 지팡이 같지만, 거기 손잡이의 끝부분을 힘을 줘서 누르면…….”
철컹!
강한 떨림과 함께 지팡이의 중간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새카만 쇳덩이가 지팡이의 길이를 늘였다.
“음!”
장기린은 깜짝 놀랐다.
이런 식의 무기가 존재할 줄이야.
원래 길이 삼 척짜리 나무 지팡이가 양쪽으로 나눠지면서, 가운데는 철봉이고 양끝은 나무 지팡이인, 길이 육 척짜리의 긴 봉이 된 것이다.
“나무 부분도 사실은 속에 철심이 박혀 있어서 철봉이나 다름없지. 나무는 특별히 구해 온 철목이고. 아마 웬만한 신병이 아니고서야 상처 하나 내기 힘들 것이야.”
당 노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칼날도 없고, 치명적인 장점도 없다.
하지만 이 지팡이는 그런 밋밋함이 장점이었다. 평범함 속에 무기로서의 효용을 담고, 그 무기의 살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장인으로서의 욕심을 최대한 자제한 작품.
게다가 어떤 무기에도 흠집이 나지 않을 만큼의 강도를 더했으니, 호신용 무기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에 있을까.
“으음…….”
처음엔 떨떠름했던 장기린도 그의 손에 딱 맞춘 듯 손에 잡히는 지팡이를 보며 어느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처억.
오른손은 뒤로, 왼손은 앞으로.
왼발은 앞을 향하고 오른발은 직각 바깥쪽으로 굽힌 평범한 동작.
모든 창술의 기본이라는 거창(擧槍) 자세였으나, 그것을 장기린이 행하자 백전의 무인도 감히 덤벼들지 못할 만큼 빈틈없는 기세를 뿜어냈다.
“호오……! 역시, 잘 어울리는군.”
당 노인의 감탄성이 들려왔다.
상대를 베어 낼 칼날은 없지만, 상처 입지 않을 단단함은 있다. 장기린은 이 특이한 지팡이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무인창(無刃槍)이야. 칼날이 없긴 하지만, 그건 봉이 아니라 엄연한 창이지.”
“그렇소. 이건 창이오.”
“그래. 허허, 알아볼 줄 알았지.”
칼날이 없는 것은 봉이다?
아니다. 봉에는 창이 가진 것과 같은 손잡이가 없다. 그 내심에 박혀 있는 육중함도 없으며, 그 끝에 집중된 살기도 없다.
단순히 칼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런 자잘한 차이가 창과 봉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걸 다시 되돌리는 방법은 무엇이오?”
“아, 그렇지. 둥그렇게 휘어진 부분의 끝을 다시 꾹 누르면서 양쪽을 가운데로 모아 주면 돼. 그럼 원래대로 지팡이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다.”
철컥―
딸깍!
장기린이 시키는 대로 끝을 누르면서 양옆을 가운데로 모으자 육 척짜리 무인창이 다시 삼 척짜리 지팡이로 돌아왔다.
“호오…….”
다시 한 번 들고 요리조리 살펴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리 봐도 지팡이에 불과하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소.”
“응? 받는 건가? 좀 더 튕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삶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마땅히 받을 것이오. 혹시 대가를 원한다면 치르겠소.”
“됐다. 자네가 나중에 신병으로 거듭나 주기만 하면 족해.”
당 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검이 아니라 신병…… 신병까진 모르겠으나, 평범한 죽창이 되도록 노력은 하겠소.”
“하핫!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더 마음에 들어.”
껄껄 웃는 당 노인.
그는 무기를 만드는 장인인만큼 무기를 제대로 써 주는 무인 역시 싫어하지 않는다. 그게 사람의 도리를 알고 있는 무인이라면 더욱 더.
두 사람은 잠시 초가집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는 건 주로 당 노인 쪽. 그는 무기를 만드는 데 드는 고충이라거나 지금 그가 이런 한적한 곳에 사는 이유 등을 말해 주었다.
“객주님! 당 노!”
쾅! 하고 문이 열리며 구양화가 나타난 것은 그들이 초가집에 들어오고 이각 즈음이 지난 뒤였다.
“백 오라버니가 깨어났어요!”
구양화의 얼굴은 환한 햇살처럼 밝게 개어 있었다.
“장 객주님…….”
실종되었던 시간까지 합하면 근 팔 일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백연의 목소리는 잔뜩 마른 장작처럼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큰…… 신세를…… 반드시 갚겠…….”
장기린은 가만히 뒀다간 피라도 토할 것 같은 백연의 말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 몸이나 회복하시오. 당신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소.”
“금괴…… 에 대한 신세도…….”
“그새 그런 이야기까지 나눴소?”
장기린은 놀란 눈으로 구양화를 바라봤다.
분명 백연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알리러 뛰어온 줄 알았는데, 그새 어떻게 저런 이야기까지 할 틈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내가 한 말이 아니예요.”
그런데 구양화는 억울하다는 듯이 부정했다.
“화 매가…… 이야기한 게 아닙…… 니다.”
“그럼?”
“저를…… 간옹 의원…… 에게 데려가 주셨을 때부터…… 정신은 깨어 있었습니다……. 몸은…… 움직여 주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즉,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랬군. 그럼 십 일 후에 죽을 거라 말하는 이야기도 다 들었었겠군.”
“아…….”
장기린의 말에 옆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구양화였다.
“백 오라버니, 그걸 다 들었었어요?”
“그래…… 다 들었어…….”
“그, 얼마나…….”
얼마나, 괴로웠을까.
죽음을 선고받고, 눈앞은 보이지 않고, 몸은 움직이지 않고.
그런 상황에 얼마나 막막하고 절망을 느꼈을까.
“그렇기에…… 더욱 고마워, 화 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장 객주님……. 이 은혜는…… 반드시…….”
결연한 어조로 다짐하던 백연.
이내 힘이 다했는지 스르륵 눈을 감고 기절해 버렸다.
“백 오라버니?!”
“괜찮다. 그저 잠든 것뿐이니. 생기를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무리 그가 단련된 무인이라도 앞으로 오 일은 더 이곳에서 정양해야 할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흑신의, 우문환이 구양화를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생사를 헤매던 백연이 오 일만 정양하면 낫는다.
신의의 능력을 여과없이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오 일이라…….”
물론 백연이 회복한 것은 기쁘지만, 장기린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 일이나 더 이곳에서 지체하게 된다면, 나중에 객잔으로 돌아가는 데 다시 오 일. 합쳐서 십 일이나 걸리게 된다.
객잔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휘연이 있으니 알아서 잘 굴러가겠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금선로의 상황이 뒤숭숭하다보니 슬슬 걱정이 되었다.
“객주님은 돌아가요.”
그런 마음을 알았차렸음인가?
구양화가 장기린을 보며 말했다.
“내가 가면 마차는?”
“항주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했어요. 만약 그전에 사정이 생기면 근처에서 마차를 구하는 방법도 있구요.”
“으음, 그런가.”
어느새 마부랑도 이야기가 끝내 놓은 듯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구양화는 나이답지 않게 일처리가 영리하고 재빨랐다.
“하긴,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없을 테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심처(深處).
백연의 요양을 위한 곳에 굳이 장기린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난 말상대가 있으니 좋다만,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겠지?”
젊은이처럼 씩 웃는 당 노인.
“바쁜 사람을 붙잡는 게 아니다, 당 가야.”
“누가 뭐랬나? 그러니 잘 가라고 말하는 거 아니냐.”
“은근슬쩍 남으라고 권유하는 듯한 말투잖나.”
“누가! 이놈이 왜 남의 말을 왜곡하고 난리야!”
“하여간 예전부터 그랬지. 여인네에게 말을 걸 때도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뭣! 이 늙은이가 한 번 해보자는 거냐!”
혀를 쯧쯧 차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우문환.
그리고 그 말을 하나하나 받아 주며 싸우고 있는 당 노인은 너무나도 정겨워 보이는 모습이다.
“백연이 다 나으면 객잔에 돌아올 건가?”
“네, 물론이죠. 백 오라버니도 아직 할 일이 남았을걸요?”
“으음, 그런가.”
“마차가 구해지는 대로 출발할게요. 객주님은 어서 가서 휘연 언니 걱정을 덜어 주시라구요.”
장기린은 웃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더 어른인 척하며 영리하게 구는 구양화였다.
그는 이 영리한 소녀가 싫지 않았다.
“그럼 가지. 노인장들께도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소. 혹시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항주 금선로의 풍운객잔으로 오시오.”
“객잔이라…… 궁금하구만. 시간 나면 한 번 들르겠다.”
재밌다는 듯이 웃는 당 노인.
장기린은 깊숙이 고개를 숙인 뒤 마차에 다시 올랐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서서히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
항주로 돌아가는 여정의 뒷모습을 구양화와 당 노인이 끝까지 시선으로 배웅해 주고 있었다.
“별일 없었겠지?”
풍운객잔까지는 앞으로 닷새면 도착한다. 괜찮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장기린은 묘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