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三章 ― 암흑도래(暗黑到來)
다그닥― 다그닥―
덜컥! 덜컥!
관도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장기린은 한쪽에 자그마하게 만들어진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 한창 푸릇푸릇하게 자라고 있는 논밭이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했던가.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산을 보듯이 대충 본다는 뜻이지만, 안력이 뛰어난 장기린에겐 스쳐 지나는 푸른 잎사귀의 세맥까지 보이고 있으니, 주마간산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는 풍경을 정성을 다해 눈에 담는 중이었다.
이렇게 마차에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기회가 얼마나 될까.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뭐지?’
상쾌한 기분 가운데, 마차를 타고 항주를 향해 출발할 때부터 느껴졌던 답답함이 끼어들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멎지를 않는다.
얼마 전, 객잔에서 문득 느꼈던 전투 직전의 위기감과 비슷했다.
가슴속이 먹먹하고 눈앞에 짙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 앞으로 나아갈 길이 꽉 막혀 버린 듯한 혼란스러움.
그런 느낌이 없었다면 아마 장기린은 혼자 항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지금쯤 신의(神醫)와 신장(神匠)이 함께 있는 곳에서 백연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숲과 강. 자연에 섞여 드는 듯 청정했던 풍경. 당 노인과의 대화는 재미있었고, 그가 아버지처럼 따랐던 대장군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 며칠간이라도 그 정기에 푹 젖어 있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백연이 회복되자마자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은 장기린을 항주로 급히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불안한 심정으로 밖을 내다보던 장기린.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앞에서 묵묵히 말을 다루고 있는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항주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리겠소?”
히히힝―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마부는 대답했다.
“별 탈이 없다면, 왔을 때처럼 닷새 정도 걸릴 겁니다.”
“닷새…… 더 빨리 갈 수는 없겠소?”
“으음, 해가 지고 나서도 아슬아슬할 때까지 달린다면 나흘로 줄일 수는 있습니다만…….”
마부는 걱정스런 기색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밤에 달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최근처럼 구름이 낀 날에는 관도에 장애물이 있거나, 길이 휘어져도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에 큰 사고가 날 위험이 있습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앞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과 마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럼, 저녁에는 내가 말을 몰도록 하지.”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밤눈이 밝고 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밤에는 내가 마차를 직접 몰겠소.”
장기린 스스로도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마부의 입장에선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마차를 몰다니, 그런 괴행이 어디에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손님이 마차를 몰다니요. 그리고, 말들도 쉬어야 합니다.”
“하루 두 시진. 그 정도 휴식하면 될 것이오. 해가 진 후부터 오시(午時:밤 11시―새벽 1시) 말까지는 내가 마차를 몰겠소.”
“그런……!”
즉, 딱 두 시진 동안 말을 재우는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나아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럼 며칠 안에 도착하겠소?”
“사흘…… 잘하면 앞으로 이틀 안에 도착할 겁니다.”
“좋군.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소.”
결국 말문이 막히는 마부.
그는 뭐라 반박하기 위해 한참이나 입을 뻐끔거렸으나 결국 말이 통하지 않겠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죠.”
“대신 말이 잘못될 경우 삯은 넉넉히 쳐 주겠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버틸 만한 놈들이니까요.”
마부의 말속에선 자신이 관리하는 말들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이럇!”
히히힝―!
힘차게 관도를 내달리는 마차. 그 속에서 장기린의 눈이 항주가 있는 동북향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대답해 줄 이가 없는 질문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속으로 덧없이 사라져 갔다.
☆ ☆ ☆
“멍청한 놈. 역시 구제불능이군.”
항주 금선로의 꽃. 천상미태(天上美態)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홍화객잔의 복도를 걸어가며 총관 사무혁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유충과 옥룡파의 파락호들이 풍운객잔에 가서 진휘연을 잡아오기는커녕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역시 본파에서 사람이 와야 돼. 이런 멍청이들을 가지고는 될 일도 안 되겠다.”
옥승이 빠진 옥룡파는 아무래도 항주오대객잔의 하나인 홍화객잔을 지키기에 역부족인 듯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일촉즉발의 무슨 사건이 터질이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흑도의 명문, 사혈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드르륵―
사 총관은 자신의 침소에 들어가 그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따끈따끈하게 끓여 둔 찻물을 잔에 따라 천천히 들이켰다.
하루를 마치기 전에 철관음 한 잔을 마시는 것은 그의 습관이다.
씁쓸하면서 향긋한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은 한 번 맛들이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후우…….”
사 총관은 그제야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긴장을 푼 채 푹신하게 깔려 있는 금침 위로 몸을 움직였다. 금침 옆, 등잔의 불을 끄려는 사 총관.
그 순간, 마치 유령처럼 나타난 그림자가 사 총관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헛, 누구……!!”
척.
대경하여 소리를 지르려던 사 총관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목에 차가운 검날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소리를 지르면 베겠다는 듯 살짝 피부를 파고 든 감각이 너무나 섬뜩했다.
“무슨……!”
사무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지금 객잔의 총관으로 있기는 하지만, 그도 엄연히 사혈방 출신으로 일류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었다. 한데 이렇게나 가까운 곳까지 접근을 허용했다는 점이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사무혁 총관?”
“누구…… 시오?”
“사신.”
짧은 대답엔 그 이상의 질문을 불허하는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사무혁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문답(問答)이 무용(無用).
이런 자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였다.
이름을 물은 것도 몰라서 물은 것 같지가 않았다. 확신을 갖고 죽이러 온 자. 냉랭한 눈빛엔 확고한 살기가 숨어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말을 합시다. 분명 대화가 되는 부분이 있을 거요.”
“대화라……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유라도 알려 줘야 하지 않소. 이렇게 무턱대고 죽이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짓이오.”
“도의?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다른 집의 것을 탐한 파락호의 우두머리가 도의를 말하는가?”
차가운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무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에서 사내의 정체, 아니, 사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풍운객잔…… 의 일로 온 거였나?”
“알았으니 이제 여한은 없겠지.”
목에서 떼어지는 칼날.
하지만 그건 안도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잠깐, 잠깐! 피해는 오히려 이쪽이 입었다! 우리 쪽 사람 십여 명이 한동안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쳤어. 그런데도 이런 식의 대응은 억울하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아니, 정말로 억울……!”
“이번에야 그랬겠지. 하지만 다음번에도 피해가 없으리란 보장이 있나? 오늘처럼, 아니, 더 더러운 수를 쓴다면 파고들 허점은 얼마든지 있다. 그럴 땐 머리를 잘라서 아예 불화의 싹을 없애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런……!”
사무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내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에 허점이 있었다면 설득이라도 해 보련만, 반대로 차분하고 논리적이다 보니 그로서는 반박할 방도가 없었다.
‘풍운객잔…… 풍운객잔……!’
사무혁은 속으로 씹어뱉듯이 그 이름을 연호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불길했는데, 결국 이런 식의 후폭풍을 몰고 올 줄이야.
스릉―
작은 창.
새어 들어온 달빛에 반사되는 칼날이 요요롭게 빛났다. 전쟁터에서나 쓸 법한 커다란 장군검. 그것도 들고 있는 것 말고도 허리춤에 하나가 더 있었다.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경험 많은 무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로는 아직 이립(而立:서른)도 채 안 되었을 듯했다.
그만한 나이에 이런 차분한 성정과 백전을 연마한 듯한 여유로운 대응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은 또 있었다.
무위(武威).
등 뒤로 느낄 때는 기척을 감추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까 그 무위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외기와 내기가 일체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막강한 내공이 잠시도 쉬지 않고 온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유유자적 자연스럽게 흐르는 내공.
구파의 제자일까? 그 겉모습만 봐도 현기가 가득한 무공을 익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한 손으로 검을 빼 들고 있는 자세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했으며, 자신을 냉랭하게 응시하는 시선에선 그토록 강하면서도 방심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결코 방주의 아래가 아니다.’
사무혁은 자신의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대의 사혈방주가 어떤 사람이던가.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이며,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흑도의 명문인 사혈방 방주의 자리에 앉은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 아니던가.
적사방주의 자리에서 십오 년. 마침내 마흔의 나이가 되었을 때 적사(赤蛇)란 별호에 왕(王)의 칭호를 얻은 초강자 중 한 명이다.
이렇게 젊은 청년과 동급으로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그럼에도 눈앞의 막강한 기세를 보자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아니, 홍화객잔은 사혈방의 지파다.”
상대를 사혈방주 맹욱과 동급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까? 사무혁의 입에서 지금껏 숨겨 왔던 정체가 가감없이 드러났다.
“이대로 나를 죽이면 사혈방의 방도들이 복수를 할 것이다. 어쩌면 방주이신 적사왕께서 직접 나서실 수도 있겠지. 아니, 방주께서 나서지 않더라도 적혈대 몇 명만 나서도 풍운객잔 따위는 몰살이다. 날 죽이는 건 도리어 위험을 늘리는 일이야.”
“그럴까? 사실을 말할 사람이 없어질 텐데?”
살인멸구(殺人滅口).
사무혁이 죽으면 사실을 알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사혈방을 우습게 보는군. 금선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 게다가 오늘은 풍운객잔에서 옥룡파 놈들이 맞고 쫓겨난 바로 그날이지.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런가? 그럼 당연히 사혈방에서 복수를 하겠군.”
“물론이다! 그러니 칼을 내려놓고 물러나라. 지금 돌아가면 나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한줄기 활로였다.
사무혁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대범하게 외쳤다. 마치 특별히 선심을 쓴다는 듯, 상대에게 그를 살려 주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더욱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사무혁의 잣대로 평가 할 수 있을 만큼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당당한 태도를 취한 것은 오히려 실수라고 해야 하는 바.
휙―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검날이 미간을 찔렀다.
사악― 하고 등 뒤에 소름이 돋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반의반 치도 안 되는 얇은 피부가 잘려 나가며 뜨끈한 피 한 줄기가 눈과 눈 사이로 흘러내렸다.
“흐업…….”
경악한 사무혁.
피부만 살짝 갈라 냈을 뿐,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검의 수급이 자유롭다는 뜻이니, 이 또한 놀라울 따름. 하지만 여전히 미간에 닿아 있는 칼날이 미칠 듯이 신경이 쓰였다. 뒤로 도망치고 싶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그대로 검을 찔러 버릴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떨리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청년은 냉혹한 눈빛으로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혈방이라…… 흑도명문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사혈방주 적사왕 맹욱은 무림십대고수에 드는 고수라지?”
“아, 알고 있는데도 이게 무슨 짓이오!”
“사혈방. 방해된다면 그곳도 없애 버리면 그뿐이다.”
“뭐, 뭐라고……?”
“총관을 죽이고, 그에 대해 추적할 사혈방도 지운다. 그러면 더 이상 풍운객잔에 해를 끼칠 존재는 없는 것이겠지?”
사무혁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극히 차분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청년 고수.
하지만 차분하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지금 한 말이 단순한 엄포나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무슨…… 그런…….”
흑도명문 사혈방을 지운다?
정도무림의 기둥인 구파일방. 그중 하나가, 그것도 문파의 사활을 걸고 모든 전력을 꺼내 놓아야만 가능한 일이거늘.
그럼에도 청년 고수는 그런 일을 가볍게 말했다.
보아하니 사혈방의 규모도 알고, 방주인 적사왕 맹욱이 어떤 자인지도 알고 있는 듯한데도 그런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것이 사무혁은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풍운객잔의 뒤에 무엇이 있기에……!”
다른 금선로의 객잔들이 그렇듯, 풍운객잔의 뒤에도 어떤 세력이 있을 거란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이어 벌어진 여러가지 사건들을 한정된 인원으로 힘겹게 해결해 나가는 것을 보며 의심을 풀었거늘.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에는 사혈방을 지우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무시무시한 자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잠깐, 그런데도 왜 나를 살려 놓지? 이건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 아닌가?’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은 또 다른 활로였다.
모사(謀士)의 능력이 있는 사무혁.
머릿속으로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그의 눈이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빛을 번뜩였다.
“그런가? 드러나고 싶지 않은 건가……!”
모든 것을 꿰뚫는 핵심.
한 쌍의 장군검을 든 청년 고수의 눈이 사무혁을 직시했다.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그 말은……!”
“그래, 살려 준다. 단, 알아 두어라. 다음은 없다. 만약 풍운객잔을 다시 한 번 건드린다면 너와 사혈방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선언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사무혁.
그 순간, 미간을 찌르고 있던 검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휘리릭― 철컥.
그림을 그린 듯 깔끔한 동작으로 회전한 장군검이 허리춤의 검집으로 빨려 들 듯 사라졌다.
그 잠깐의 움직임에도 온 방 안을 휘젓는 강렬한 검풍이 만들어지니, 사무혁의 앞에 놓여 있던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밝음과 어두움.
잠깐의 점멸.
눈을 감았다 뜬 것과 같은 찰나의 틈이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사무혁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어…….”
그야말로 귀신 같은 움직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있던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미간에 남아 있는 상처와 턱 끝까지 흘러내린 혈흔이 없었다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풍운객잔에서는…… 손을 떼야겠군.”
사무혁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압도당하면 화도 나지 않는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굉장한 무공. 청년 고수의 섬뜩한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진휘연 한 명에 대한 원한으로 건드리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긴 했으나 결국 풍운객잔을 포기하는 사무혁.
바람처럼 나타나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청년 고수의 경고는 그 정도의 위력을 발했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초라하게 움츠린 그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 ☆ ☆
사무혁이 강렬한 경고를 받았던 날로부터 며칠 뒤.
홍화객잔을 향해 뜻밖의 서신이 날아왔다.
발신인은 청풍객잔의 주인 방태풍.
인장까지 찍힌 서찰이었음에도, 그 내용은 진위를 의심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오대객주 증명패를 담보로 결백을 증명하고, 거래를 하고 싶다. 비밀리에 만나자?”
편지를 받은 사람은 사무혁 총관.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승낙의 답변을 보낸 뒤, 청풍객잔의 별실로 몰래 들어가는 중이었다.
“함정이 아닐까요? 이대로 가도 될까요?”
다른 호위 없이 홀로 옆에 따라붙은 유충은 아직 시퍼렇게 멍이 든 오른쪽 광대뼈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며 몇 번이나 걱정스런 말을 해댔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풍운객잔에서의 일 이후로 부쩍 기가 죽었는지 소심해진 유충.
사무혁으로서는 다루기가 쉬워졌으니 편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사내답지 못하게 재잘댈 때는 짜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무력은 유충밖에 없으니, 일단은 설명을 해 줘야 했다.
“안 그래도 장흠파를 잃고, 초청승부에서 져서 평판도 많이 떨어졌는데 괜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청풍객잔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우리와의 싸움을 피하려고 할 거다. 이 일은 그 연장이야.”
“하지만…… 왠지 찝찝합니다.”
“오대객잔 증명패를 건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지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지. 어쩌면 돈이나 다른 뭔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돈…….”
“평판이 떨어지면 손님이 떨어지고, 손님이 떨어지면 돈이 떨어진다. 당연한 이치야. 게다가 비안화숙(秘安話宿)이라 해서 고급 관리들을 중심으로 장사하던 청풍객잔인만큼 그 타격은 더욱 컸겠지. 지부대인 문표가 등을 돌렸다는 건 이미 항주에 소문이 파다하니까.”
“아……!”
“어쨌든 방심해선 안 되겠지만, 과하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저쪽에선 우리를 못 건드려.”
현실을 확실하게 꿰뚫어 보는 지모(智謀). 사무혁이 홍화객잔을 여기까지 키운 것은 다 지금과 같은 뛰어난 머리 덕분이었다.
유충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무혁의 곁에서 그를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 뛰어난 무(武)를 지니지 못한 유충으로서, 앞으로 험난한 금선로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강한 독심과 사무혁과 같은 지모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객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 미리 약속되었던 장소에 도착하자, 어여쁜 기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듯 공손하게 인사하며 별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드르륵―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안으로 사람의 기척이 없는 텅 빈 방 안이 보였다.
기녀는 공손하게 읍(揖)하며 말했다.
“안에서 기다리시기를 바란다고 객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에서……?”
“네.”
굽힌 허리를 다시 펴지 않는 기녀는 거기까지밖에 듣지 못한 듯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총관님, 저는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니면…….”
“안에 같이 들어가지.”
사무혁은 망설임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본래대로라면 유충은 밖에 두었을 터,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그에게 묘한 위화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먼저 와 있지 않다? 게다가 근처에 호위도 두지 않고?’
사실 그는 방태풍이 당연히 독두파의 험상궂은 파락호 몇 명을 배치해서 그를 압박할 거라 생각했다.
실질적인 해는 끼치지 않겠지만, 그런 식의 술수는 협상에 있어서 기본이었다.
그가 아는 방태풍은 그런 치졸한 술수를 밥 먹듯이 써먹는 작자였다.
드르륵―
미리 깔려 있는 방석 위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닫혔다. 사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기녀마저 떠나가자 주변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이건……?”
그런 사무혁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중간에 놓인 다탁.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일 척 길이의 나무 상자와 그 위에 놓인 하얀 수실이 달리 푸른 옥패가 있었던 것이다.
“오대객잔 증명패!!”
사무혁은 놀라고 황망하면서도 경각심이 들어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적막하기만 한 방 안.
병풍이 없으니 누군가 숨어 있을 장소도 없고, 귀를 기울여 방 밖을 살펴봐도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 어째서 이런 게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것도 보란 듯이 버젓이.”
“글쎄…….”
물을 만한 상대가 있다면 오히려 그가 묻고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런 걸 떡하니 중앙에 둔다는 건 알아서 살펴보라는 거겠지.”
그 숨은 뜻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까지 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바보나 다름없다.
사무혁은 오대객잔 증명패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고급스런 청옥패, 아래쪽에 둥그렇게 뚫린 구멍과 그 구멍을 통해 묶여 있는 백색의 비단 수실.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사무혁도 홍화객잔에게 주어진 똑같은 패를 하나 가지고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엔 천금이나 다름없는 물건. 이걸 왜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일까?’
진품인 것을 확인했으나 미혹은 더욱 짙어지기만 한다.
사무혁은 묵묵히 옥패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럼 이 상자는 뭘까요?”
“글쎄, 그것도 한 번 열어 보지.”
일단 옥패를 품속에 넣고 단단하게 닫혀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헛……!”
“흡!”
사무혁과 유충은 자신도 모르게 상자로부터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확― 하고 콧속에 파고드는 역겨운 혈향. 하지만 그보다 더 한 것은 상자 속에 있는 역겨운 것의 정체였다.
“방…… 태풍.”
사무혁의 입으로부터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이름.
상자 안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사내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두툼한 턱살과 늘어진 볼 살, 게다가 머리 위에 쓴 문사건도 그대로였다.
“이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충격은 잠시, 이내 그의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방태풍이 죽었다? 어째서? 누구 때문에?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언제냐다. 날 부른 건 함정인가? 아니면 나를 불러놓고 방금 전에 죽임을 당한 건가?”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다 보니 냉정함이 흐려져 버린 사무혁.
그는 방태풍의 목이 상자 안에 고이 담겨 있는데다 오대객잔 증명패가 보란 듯이 올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어야만 했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었거늘.
그 때문에 빨리 대응하지 못하고, 사신이나 다름없는 자가 나타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만 것이다.
드르륵―
“엇……?”
열리는 문. 시야에 들어온 복도에는 한 사내가 그들을 보며 서 있었다.
평범한 황색의 무복.
얼굴을 가릴 정도로 삿갓을 눌러쓰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헐렁한 옷을 입었으나 그것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육신이 잘 단련되어 있었다. 양 손목과 발목엔 가죽으로 감아 두었고, 허리엔 한 쌍의 도(刀)를 매달고 있었다.
‘쌍도……?’
쌍도.
두 개의 도를 사용하는 자. 게다가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났던 한 쌍의 장군검을 가지고 있던 청년 고수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 복잡한 심경.
거기에 더해 새롭게 나타난 사내가 사무혁의 이성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무혁은 곧바로 삿갓을 쓴 사내와 장군검을 지닌 청년을 연결시키는 우(愚)를 저지르고 말았다.
“풍운객잔에서 온 건가……!”
탄식하듯 흘러나온 한마디.
그 말이 삿갓사내의 흥미를 자아낸 듯했다.
“음, 지금 풍운객잔이라고 하셨습니까?”
차분하면서 지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올라간 삿갓 아래로 드러난 까무잡잡한 얼굴엔 짙은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이자…….’
기이한 기도였다.
눈앞에 있지만, 또한 눈앞에 있지 않은 듯한 느낌. 눈앞이 뿌연 안개로 가려진 것처럼 실체가 모호했다. 동그란 두 눈은 순수해 보일 정도로 맑았지만, 또한 도저히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수상함도 갖추고 있었다.
“방태풍의 잘린 머리를 눈앞에 두고도 그다음에 나타난 자를 풍운객잔에서 왔다고 생각한다라…… 그 정도로 구원(舊怨)이 깊었던가요? 아니, 아니지. 그 정도로 풍운객잔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셨습니까?”
흥미가 가득한 목소리로 토해 내는 질문들은 사무혁 자신과 같은 ‘모사’로서의 느낌을 진하게 전해 주었다.
‘풍운객잔에서 온 것이 아닌가?’
왠지 모르게 실수를 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완전히 삿갓을 벗어 버린 사내. 동그란 두 눈에서 신비로운 광채가 번뜩였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요. 풍운객잔…… 섣불리 넘길 이름이 아닙니다. 분명히 들어봤는데…… 아, 그렇군요. 장군이 동요를 보였던 그곳이군요.”
사무혁은 지금 삿갓사내의 눈빛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하고 풍수와 감여를 볼 줄 아는 자들. 무당(巫堂)의 영매나 무격들이 가지고 있던 몽환적인 기운이었다.
삿갓사내는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이혼,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습니다.”
자이혼.
중화의 이름이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생소한 이름이었다. 사무혁의 눈에서 경계심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쪽으로 가자고 했잖아.”
“되도록이면 설득을 하는 게 좋았지요. 불필요한 데 힘을 쏟을 필요가 없잖습니까.”
“하시르, 난 가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잔인할 때는 더 잔인하면서, 이럴 때는 그런 소탈한 태도라니. 아, 무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건가?”
냉랭한 목소리. 바람과도 같은 자유로운 말투.
복도 한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척 봐도 특이한 복장을 한 이국적인 사내였다.
소매 없는 옷을 입은 탓에 양팔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등 뒤엔 외날 대부와 커다란 각궁을 짊어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과 탄력있는 근육에선 야생동물을 보는 듯 튼튼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성큼, 문지방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이혼.
안 그래도 바짝 긴장해 있던 유충이 흥분해서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 정체를 밝히고 설명이 먼저다.”
“정체? 설명?”
짧게 반문하는 자이혼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비웃음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한 목소리에 사무혁은 등 뒤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유충, 안 돼!”
본능적으로 내뱉은 말.
그제야 유충도 위기를 느끼고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으나 이미 자이혼의 외날 도끼는 그의 왼쪽 어깨를 내려치는 중이었다.
푸콱!
뼈가 박살 나는 소리.
가죽북이 터져 나가듯 비산하는 핏물.
천천히, 사선으로 갈라진 유충의 상체가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일도양단.
아니, 지금은 일부양단(一斧兩斷)이라고 해야 할까. 바닥에 떨어진 유충의 얼굴은 숨이 끊어진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사무혁은 말문이 막힌 채 입만 뻐끔거리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유충에게 내려친 일격.
사무혁의 눈엔 대체 어떻게 저렇게 큰 도끼를 빼 들고, 어떤 방식으로 내려친 건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무위. 그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무공이었다.
사무혁으로서는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시체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온 방 안이 피범벅.
사무혁도 시뻘건 핏물로 온몸이 젖은 상황인데 정작 도끼를 내려친 자이혼의 몸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자이혼은 품 안에서 새하얀 천을 꺼내 외날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있었다.
꼼꼼히. 차분하게.
거기서 방금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흥분이나 동요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놈들, 괴물이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하시르와 자이혼.
사무혁이 보기엔 둘 다 사혈방주의 아래가 아닌 바.
어젯밤에 본 청년 고수도 그렇고, 대체 이런 자들이 어디서 자꾸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천하무림십대고수. 그조차 우물 안의 개구리였나……! 세상엔 이렇게나 강한 놈들이 많은 거였어?’
사무혁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젠 위기감보다도 허탈함이 먼저 들었다. 그가 지금껏 믿고 살아온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했다.
“자, 다 닦았다.”
깨끗해진 외날 대부. 자이혼이 준비가 다 됐다는 듯이 그 커다란 것을 한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사무혁은 더 이상의 생을 포기했다.
피할 수도, 싸울 수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선 안 됩니다.”
“응? 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던 자이혼을 만류하는 하시르.
사무혁은 눈을 떴다.
생기가 사라진 그의 두 눈에 피가 묻지 않은 방향을 골라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하시르가 방태풍의 목이 놓여 있는 다탁의 건너쪽에 털썩 앉는 모습이 보였다.
“앉으시죠.”
“…….”
“지금 저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거기서 도끼에 머리가 쪼개지는 것보단 이게 낫지 않겠습니까?”
차분한 말투임에도 그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멍하니 서서 잠시 우물쭈물하던 사무혁은 결국 하시르의 건너쪽에 앉고 말았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방태풍의 머리 너머로 까무잡잡한 얼굴의 젊은이가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원하는 게 뭐요?”
“풍운객잔에 대해 아는 것을 다 말해 주십시오.”
“풍운…… 객잔?”
“조사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당신에게 듣는 것이 빠를 것 같다고 하는군요. 당신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풍운객잔에 대해 그 근원부터 최근의 근황까지 아는 것을 모두 말해 주십시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은 듯한 말투에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에 대해 물을 만한 담력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무혁.
그는 짙은 혈향 속에서 애써 냉정을 되찾고 하시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해 주면 난 살 수 있는 것이오?”
“글쎄요.”
하시르는 빈말이라도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원래는 당신을 이곳에서 죽이고 대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만, 쓸모가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겠지요.”
“대역이라니…… 나의 대역을?”
사무혁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무리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한 일. 내가 하루에 어떤 일을 하는지 알기나 하시오?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어떤 곳과 연락을 취하는지 아는 거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투를 취하는지 아시오?”
“다 압니다.”
“그럴 리가…….”
“내 수하 중에 사람의 외모와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다’라고 판단을 내렸으니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곳과 연락을 취한다는 말은 사혈방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
“사혈방이라…… 뭐, 일단은 당신인 척하면서 시간을 끌겠지만, 정 안 되면 통째로 지워 버리면 될 일. 우리에겐 사소한 장애물조차 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사실을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하시르에게 사무혁은 압도되고 말았다.
“허허…….”
자신을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단다. 대역을 세우고, 그게 안 되면 사혈방을 아예 지우겠다고 말한다.
마치 어젯밤의 그 청년처럼.
사무혁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하시르와 어젯밤에 본 청년 고수를 비교해 보았다. 둘 다 사무혁으로서는 무위를 짐작할 수 없는 고수.
하지만 하시르에게선 청년이 가지지 못한 잔인함이 있었다. 청년은 일이 잘못되면 그를 죽일 뿐이지만, 하시르는 목적을 위해 어떤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무자비함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두려울지는 명백했다.
“아직도 못 믿겠습니까?”
“……믿소.”
“그럼 말씀해 주시죠. 당신이 얼마나 솔직하게 아는 것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생존이 걸려 있습니다.”
사무혁은 침중하고 허탈한 얼굴로 하시르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자신이 아는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홍화객잔의 입장에서 조사해 온 풍운객잔에 대한 정보.
장기린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시기부터, 진휘연과 그 외의 식구들을 하나하나 늘려 간 일. 그리고 최근에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항주를 벗어난 일과 옥룡파의 몇몇이 흠씬 얻어맞고 돌아온 사건을 설명하고, 어젯밤 한 쌍의 장군검을 가지고 있는 젊고 유능한 청년 고수가 경고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허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하시르의 반응은 사무혁의 생각보다 더 컸다.
“붉은 악귀! 그리고 표풍검(飄風劍)인가!”
“그놈들이 이곳에……!”
알 수 없는 별호를 말하는 하시르와 자이혼.
그들은 지금껏 보이던 냉정함을 던져 버린 채 극도로 동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자들, 그놈들을 알고 있다?’
사무혁은 놀라움을 감추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서로 좋은 관계는 아닌 듯했다.
적대적인 관계, 아니, 원수라고 해야 할 듯,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눈빛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과연, 그래서 장군께서 동요했던 것이군요.”
“그런데 왜! 가만히 두는 거지! 그놈에게 죽은 수호대의 전사들이 몇인데! 내가 키우던 바람새[風鳥] 스무 명이 그놈한테 몰살당했어!”
바람새.
자이혼이 가르치고 이끌던 뛰어난 궁사들이자 유격대를 말함이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이혼이 유일하게 아끼던 형제들이건만, 붉은 악귀의 급습에 모조리 죽어 나갔다.
그뿐인가.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우르칸의 바위곰[岩熊]들도 붉은 악귀에게 당했다. 삼대천에게 있어서 장기린은 철천지원수인 것이다.
“가만히 둔다라…… 왜 그랬을까요? 장군께서 계획하시는 일에도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인데 그대로 놔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빤하지! 장군은 그놈에겐 어쩐지 항상 정정당당하게 싸우려고 한단 말이다. 이번에도 분명히 암중에서 싸우지 않고 대계가 시작되는 날 정면으로 싸울 생각일 거다!”
“하긴, 숙적으로서 우정을 느끼시는 듯했죠. 장군의 성정이 원래 그러하고요.”
“난 인정할 수 없어! 장군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놈의 위치를 안 이상 죽여 버릴 거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돌리는 자이혼.
항상 폭급하게 사고를 일으키는 건 우르칸이고, 그걸 말리는 쪽이 자이혼이었건만.
오늘은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듯 자이혼이 먼저 나서려 하고 있었다.
“참으십시오. 그렇게 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참다니, 이게 참을 일이야?”
“예감이 안 좋습니다. 원래 천도(天道)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지만 이번엔 더하군요. 어두컴컴한 것이 눈앞을 가리고 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격으로서 신비한 광채를 발하는 하시르.
하지만 분노에 휩싸인 자이혼은 그 정도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놈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악귀 놈! 그런 놈을 가만히 놔두다니, 말도 안 되는 일. 만약 우리의 대계를 막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아니, 아니지. 분명 우리의 대계를 막을 셈일 거야. 당장 죽여 버려야 한단 말이다.”
“…….”
“장군은 붉은 악귀와 관련된 일만 되면 이성을 못 차리는 경향이 있어. 그럴 땐 우리가 나서야 한다. 미리 일을 처리해 버려야 해.”
텐챠이에게 알리지 않고 삼대천의 재량으로 처리하자는 말이었다.
“으음…….”
눈을 질끈 감는 하시르.
앞날을 예측하는 무격인 그로서도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은 쉽지 않았다.
텐챠이의 의견을 존중하자니, 붉은 악귀에 관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붉은 악귀를 항주 금선로에 놔두고 마음 편히 대계를 진행할 수 있을까? 게다가 표풍검까지 옆에 있는 듯한데?
‘안 될 말이지.’
삭초제근이라고 했다.
불안의 씨앗을 없애려면 아예 뿌리까지 뽑아내야 하는 법. 그것이야말로 자비가 없는 삼대천으로서 지금까지 그들이 해 온 방식이 아니던가.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습니다.”
“어떤……?”
“붉은 악귀가 치료를 위해 밖으로 데리고 갔다는 그 식객. 얼마 전에 훈련소에 숨어들어서 우리가 죽이려했던 일해검이 아닙니까?”
“뭣? 그놈이라고? 말도 안 된다. 그놈은 죽었어.”
“시기가 맞아떨어집니다. 붉은 악귀가 나간 건 칠 일 전. 강물에 떠내려 보낸 게 구일 전이니, 이틀간 몰래 추적을 피하며 객잔으로 돌아갔다면 딱 맞는 시기군요.”
“그런……!”
“아무래도 풍운객잔은 적들의 소굴인 듯합니다. 여러모로 그냥 둘 수는 없겠어요. 대계를 위해서 완전히 배제시켜야겠습니다.”
자이혼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래, 그냥 둬선 안 되지. 그럼 그놈을 쫓을 건가?”
“아닙니다. 항주 밖으로 떠났으나 곧 돌아오겠지요. 그리고 우린 저쪽의 전력이 얼마인지 아직 모릅니다. 우선 우리 식의 복수를 하고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식의 복수!”
“이쪽은 피를 나눈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그럼 붉은 악귀도 그와 같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삼대천 중 가장 온화한 게 하시르라고 했던가?
모르는 소리였다. 대의를 위해 잠시 접어 두었을 뿐, 한 번 복수를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 잔인하고 철저한 것이 하시르였다.
가늘어진 하시르의 눈.
그 사이로 음유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붉은 악귀, 표풍검, 그리고 적룡기마대. 모두 끌어내서 몰살시킬 것입니다.”
차분한 표정에 살기 어린 눈빛. 그 섬뜩한 기세엔 자이혼도 말문이 막히는 바.
정면에 묵묵히 앉아 있던 사무혁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일단, 살려 놓겠습니다.”
“고, 고맙소.”
“우리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조만간 있을 ‘큰 행사’ 때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일을 하나 처리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
큰 행사.
사무혁은 그게 황제를 비롯한 모든 황족들과 고위관료들이 비밀리에 회동하는 연회를 말한다는 것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중요한 행사에서 이들이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 게다가 이민족의 이름을 쓰고 북방의 억양을 쓰는 작자들이 바라는 일인만큼 자칫 구족이 멸할 일에 휘말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도망치려고 해도 마찬가지. 만약 사혈방 따위를 믿었다간 큰 실책을 범하는 일일 테지요.”
“…….”
“제 말뜻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음유하게 뻗어 나온 살기가 심장을 쿡 찔렀다. 숨이 멎는 듯한 느낌.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시르와 자이혼,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틀렸다. 이건 절대 상대할 수 없어.’
싸울 수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대연회 때 한 번만 일해 주면 된다면…… 어떻게든 그걸 순순히 해 주고 이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 알겠소.”
“그럼 이만 돌아가십시오. 조만간 연락이 있을 겁니다.”
하시르의 목소리는 고저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사무혁은 휘청거리며 일어나 터덜터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때, 그는 막대한 금전이 움직이는 금선로의 정점에 홍화객잔을 올려 놓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금선로 최고의 객잔을 만들고, 그곳의 주인이 되는 것.
그야말로 상왕(商王)이 부럽지 않을 업적이 아니겠는가. 그건 사혈방을 위한 충성심의 발로가 아니라 사무혁 자신이 가진 장대한 꿈이었다.
사혈방의 든든한 지원, 그리고 자신의 비상한 머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꿈은 노력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물 안 개구리도 이것보단 나을 터. 사무혁이여, 사무혁이여. 너는 지금껏 평생을 헛살았구나.’
큰 한숨을 내쉬는 사무혁.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시골의 촌로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 ☆ ☆
“준비는 다 됐습니까?”
“준비랄 게 있나?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지.”
“방심해선 안 됩니다. 붉은 악귀는 없지만 표풍검은 분명 근처에 있을 테니, 언제든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하! 표풍검이래 봤자 우리 셋 중 하나만 나서면 된다. 무서워할 게 무엇이냐?”
“표풍검뿐만 아니라 간부들이 모두 있다면요?”
“……흐음.”
“확률은 낮지만 무시할 수치는 아닙니다. 방심했다가 역으로 당하기라도 하면 장군을 뵐 낯이 없습니다. 기척은 최대한 감추고 조심해 주십시오. 뭐, 이런 말이 소용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하시르는 조언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켜질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삼대천은 극도로 자유롭고 난폭한 자들.
피를 보면 흥분할 테니, 싸움이 벌어질 때 기세를 감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우르칸이 혀를 끌끌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놈, 잔소리가 점점 심해지는군.”
“제가 책임지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책임을 말하는 하시르.
그의 목소리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이 가득했다.
“장군은? 역시 이 일을 모르는 거겠지?”
묵묵히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자이혼이 물었다.
“물론, 저희의 독단입니다.”
“음…….”
“제가 결정한 일, 제가 책임집니다. 풍운객잔은 물론이고, 붉은 악귀와 관련된 것들을 대계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것입니다.”
텐챠이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삼대천을 믿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중재자로 두뇌가 뛰어난 하시르가 있기 때문.
하지만 이번엔 그 하시르가 주도적으로 일을 벌였으니, 그는 텐챠이가 대노(大怒)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짊어지기로 하고 내린 결정이다.
삿갓 아래, 번뜩이는 눈빛은 같은 삼대천들도 맞받기가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시죠. 오늘, 붉은 악귀의 집을 부술 것입니다.”
당당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허리춤에서 한 쌍의 도갑이 서로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둠을 틈타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서는 세 사람.
하시르가 먼저 단번에 담장을 뛰어넘자 다른 두 사람도 그를 따라 뛰어올랐다.
휘리리릭―
바람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인기척을 내지 않고 뒤뜰에 내려섰다.
뒤뜰의 한구석에 있는 한적한 우물가.
등목을 하고 있었는지, 웃통을 벗고 잘 단련된 상체위로 물을 들이붓던 잘생긴 청년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놀람이 곧 경계심으로 변했다.
그 순간,
화아아악―!
허물을 벗듯이 드러나는 막강한 기세.
객잔 안은 물론이고, 금선로 전체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후웅!
거대한 그림자가 앞으로 튀어나가고,
꽈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객잔을 떨쳐 울렸다.
북쪽에서 내려온 세 개의 하늘.
희망을 가리는 어두운 그림자가 풍운객잔에 도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