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四章 ― 적귀재래(赤鬼再來)
콰앙!
“큰일입니다!”
계단을 오를 새도 없어서 이층 창문으로 곧장 뛰어 들어온 진구가 다급한 음성을 발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금껏 일상다반사로 겪어 왔던 부운화와 섭우생.
적룡기마대의 둘째와 다섯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각자의 앞에 놓인 서찰들을 읽느라 바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또 탐색 범위가 넓다고 불평하러 온 거야? 아니면 주변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니까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하려고?”
막내 진구는 최근에 낮에는 주변 지형을 탐색하고, 저녁엔 풍운객잔의 동태를 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껏 진구가 그들에게 큰일이라고 할 때마다 그런 이유가 붙어 있었던 것.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
진구가 가져온 소식은 너무나도 심각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삼대천이 움직였습니다! 목표는 풍운객잔. 앞으로 반 각 안에 도착합니다.”
“뭣…….”
“그런……!”
반사적으로 서찰에서 시선을 떼어 낸 부운화와 섭우생.
그들의 눈에 이미 방의 구석으로 가서 자신의 애병인 적룡창(赤龍槍)을 집어 드는 진구의 모습이 보였다.
심각한 얼굴. 진지한 기색.
거기에 군에서 쓰던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피해를 막기 위해선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저 먼저 가겠습니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진구는 곧바로 창밖을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가는 진구.
날듯이 달리며 순식간에 멀어지는 모습 뒤로 긴 적룡창의 잔상이 꼬리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진짜군.”
“큰일입니다. 삼대천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대형이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부운화와 섭우생의 얼굴은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삼대천이 풍운객잔을 노리고 직접 움직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원의 잔당이 항주에 숨어 일을 획책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당연히 마땅한 순간이 될 때까지 정체를 숨기고 흔적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그것도 크게 잘못되었다. 대형을 먼저 노리다니. 그럼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텐데……. 그래도 상관없다는 거라면, 우리가 지금껏 생각해 왔던 게 모두 틀렸을 수도 있겠다. 저쪽의 속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부운화의 말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둘째 형님, 이렇게 되면 저희의 목적은…….”
“음지에서 대형의 소망을 지켜 주는 것. 아마 그것도 오늘까지인 듯하다. 삼대천이 전면으로 나선 이상 대형께 알리지 않고 싸움을 마무리할 방법이 없어.”
침중한 표정이 된 부운화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들이 뒤엉켰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부운화 자신의 행적이 드러난 것일까? 아니, 그렇더라도 최대한 흔적을 감춰야 할 삼대천이 갑자기 이렇게나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저의가 무엇일까?
만에 하나, 뒤에서 부딪치게 될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음지의 싸움을 양지의 싸움으로 끌어올려 이렇게 큰일을 벌이려 할 줄이야.
상식을 벗어난 행보.
그 순간, 부운화는 이 판세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작고 작은 뒤틀림이 결국 다른 사람의 상식을 깨고, 귀신이 장난을 치는 것처럼 기괴한 상황을 만들어 가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시르.”
부운화는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스스로 확신했다. 이 모든 일은 삼대천이 오고 나서 벌어진 일. 이번 일의 저변에도 하시르의 의지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우생, 가자. 일단 형님이 아끼는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어.”
“예.”
단호한 대답과 함께 섭우생은 삼 척 길이의 철선(鐵扇)을 집어 들었다.
섭우생은 적룡기마대의 모사(謀士)지만, 또한 커다란 철부채를 무기로 삼아 싸울 줄도 아는, 문무겸전의 전투 군사였다.
부운화 역시 한 쌍의 장군검을 허리춤에 매단 뒤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뒤따라 뛰어내리는 섭우생.
어두운 항주 뒷골목에서 두 사람의 질주가 바람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 ☆ ☆
“오늘도 바빴지?”
“응. 손님이 점점 많아지나 봐. 날이 갈수록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
“으으, 손님이 많은 건 좋지만, 나도 늙었나 봐. 고작 손님 몇 명 늘었다고 팔다리가 쑤셔.”
“나도 그래. 허리가 막 아픈 거 있지?”
아칠과 아팔은 늙은이처럼 한숨을 내쉬며 쿡쿡 쑤시는 팔다리를 자그마한 손으로 스스로 주물럭거렸다.
“하, 어린것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야, 너희가 늙었으면 나는 뭐냐?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간 선조 할배냐?”
온몸에 소면 반죽을 하면서 묻은 허연 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아칠, 아팔 못지않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강운찬이었다.
터덜터덜 뒤뜰로 걸어 나오는 그를 보며 아칠과 아팔은 입을 삐쭉거리며 웃었다.
“우린 숙수님 같은 선조 없어요.”
“맞아. 숙수님은 동정이잖아요. 자식을 낳을 수 없다구요.”
언중유골이 따로 있던가. 이 정도면 말속에 뼈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칼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이것들이 누구한테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운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난 숙수님처럼 안 되야지.”
“응. 난 혼인을 빨리해서 자식을 낳고 싶어.”
“나도나도.”
“숙수님처럼은 안 될 거야.”
두런두런 나누는 쌍둥이의 이야기가 운찬의 마음을 푹푹 찌르고 있었다.
순수한 아이들일수록 잔인하다고 했던가.
둘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이야기가 어찌나 눈물이 나게 하는지, 운찬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휴, 이 자식! 너 때문에 아이들이 망가졌다!”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아칠과 아팔이 ‘앗, 뜨거!’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후다닥 뒤뜰을 향해 뛰어갔다.
“동정 숙수님이 화났다!”
“도망쳐! ‘걷는 법’을 활용해!”
“이놈드을―!”
“꺄하핫!”
까르르 웃으며 도망치는 아칠과 아팔.
운찬이 화가 나서 달려가긴 하지만, 그 속엔 서로 간의 깊은 애정이 깔려 있다. 아칠과 아팔은 아마 뒤뜰에 도착할 때쯤 잡힐 것이다. 세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면서 행하는 놀이였다.
“이 녀석들! 잡았다!”
“으앗! 놔줘요, 놔줘요!”
“못 놔주지. 벌을 받아랏! 너는 짚신 없이 마보 반 시진이야!”
“그런 게 어딨어요! 이런 무뢰한!”
“그런 게 여기에 있어! 힘센 자가 곧 법이다!”
“으아앗!”
비명을 지르고, 어떤 때는 까르르 웃고.
즐거운 일상 속에서 세 사람은 부산스럽게 소란을 피우며 뒤뜰로 이어지는 뒷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끼이익―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꺄하하…… 하?”
……그들의 일상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꽈아아아앙―!
폭약이 터진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강렬한 굉음이 객잔을 떨쳐 울렸다.
동시에, 우물 쪽으로부터 튕기듯이 날아온 한 사람의 인영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쿠웅!
드드드드―
땅을 긁듯이 몇 번이나 구르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뒷문의 바로 앞에 멈춰 선다.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는 왼팔. 피투성이가 된 상체를 힘겹게 일으키더니, 이내 새카만 핏덩이를 왈칵 토해 냈다.
“이…… 런 괴물…… 이…….”
갈비뼈가 부러졌음인가.
내뱉는 목소리에 숨소리가 과하게 섞여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한쪽을 노려본다.
풍운객잔의 하인, 남궁휴.
그가 노려보는 곳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대적이 있었다. 믿기 힘든 거구에 압도적인 존재감까지 갖춘 자였다.
날아온 일격을 죽지 않고 버텨 낸 것만 해도 남궁휴로서는 천운이었다.
놀랍도록 강한 자.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죽지 않았나?”
쿠웅. 쿠웅!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땅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궁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문에 멈춰 선 채 굳어 버린 세 사람을 향해 씹어뱉듯이 말했다.
“도망…… 쳐. 뒤도…… 돌아…… 보지 마.”
운찬, 아칠, 아팔.
세 사람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남궁휴는 그들을 애써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적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탓에 시선을 돌릴 수 없는데다 그는 이번 싸움으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이길 수 없다. 십 할. 패배. 그리고 죽음이다.’
거구의 사내만 해도 놀라운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만한 존재감을 가진 자가 둘이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남궁휴는 세 사람이 제발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도망치기를 바랐다.
“누, 누구 마음대로 도망치래! 난 여기 남겠어!”
“무슨……!”
“네가 멋있는 척하는 꼴을 두고 볼 줄 알고!”
덜덜 다리를 떨면서 그런 말을 잘도 한다 싶었다.
운찬은 뒷문을 쾅! 닫아 버렸다. 물론 아칠과 아팔은 객잔 안쪽에 남겨둔 채 안에서 열지 못하게 등으로 버티고 섰음은 물론이다.
운찬 역시 상상을 초월한 강자 앞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그러면서도 오기를 부리면서 남은 것이다.
“수, 숙수님!”
“휴 형! 안 돼요! 나와요!”
쾅쾅!
두드리는 문의 진동이 가슴을 뒤흔들었다. 운찬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제, 젠장, 쪽팔리게…… 이렇게 죽는다곤 생각 못해봤는데…….”
쿠웅. 쿠웅!
그런 말을 하는 사이에도 시시각각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숙수님…… 쿨럭, 쿨럭.”
“왜, 왜?”
“멍청…… 하시군요.”
“시끄러. 너야말로 멍청하다. 일격에 당하다니, 너무 약한 거 아냐?”
“방심…… 했습니다.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결말은……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남궁휴는 기습을 당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상대가 강하다면, 아마 기습을 당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싸웠어도 같은 결과가 되었으리라. 차이점은 고작해야 몇 초식을 더 버텨 냈느냐뿐이다.
‘내가 이렇게 약했던가.’
한때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뭐야, 안 도망치나?”
하늘이 내린 장수처럼 거대한 육체를 가진 사내.
솥뚜껑만 한 손과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그는 입으로 피를 꾸역꾸역 토해 내는 휴와 운찬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미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너희 풍운객잔의 식구들은 오늘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아무리 꼬마라도 마찬가지다. 그럼 도망치는 게 낫지 않겠나?”
“…….”
“아니면 덤비든지. 어느 쪽을 하겠나?”
거구의 사내, 우르칸의 시선이 잠시 운찬을 향하는 순간,
쉬이이익―
“타하앗―!”
천리호정. 거리를 단번에 줄이는 신법이 펼쳐지며 남궁휴의 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듯한 움직임.
대단한 민첩성과 과감함이었다.
쭉 뻗은 손날이 인체의 급소인 목젖을 찌르려 했다. 우르칸이 몸을 돌려 반응하려고 했으나 이미 손끝이 목젖에 닿아 있었다.
‘됐다!!’
남궁휴가 속으로 탄성을 내뱉는데, 눈앞에서 희끗, 번쩍이는 빛무리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푸푸푸푹―!
“커허…….”
하늘로 붕 떠오르는 육신.
뒤쪽으로 하염없이 튕겨 난 남궁휴는 목재로 만들어진 객잔의 벽에 못 박히듯이 매달리고 말았다.
“휴―!!”
비통한 운찬의 목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남궁휴가 가진바 이상의 움직임으로 기회를 잡았건만, 뒤쪽에서 날아온 다섯 발의 강력한 철시(鐵矢)가 그의 가슴을 꿰뚫고 더불어 객잔 벽에 통째로 박아 버린 것이다.
“쿨럭…….”
마지막 숨결을 내뱉듯, 남궁휴의 입에서 튀어나온 핏물이 턱끝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아아아―!”
운찬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가 우르칸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주먹으로 후려쳤다.
뻐어억―!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르칸은 피하지 않았고, 운찬의 주먹이 닿은 곳에선 놀라울 만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법이군.”
“으아아아―!”
무심한 듯 흘러나오는 칭찬이 들렸다.
운찬은 이번엔 발을 뻗었다.
노리는 곳은 안면.
키가 삼 척이나 차이 나지만, 힘껏 뛰어오를 수 있는 몸의 탄력으로 약점을 보완했다.
“흐음.”
하지만 옆구리를 얻어맞고 얼굴이 노려지고 있는 우르칸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화답하듯 날아가는 주먹.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거대한 주먹이 운찬의 발끝을 마주 후려치고,
으지직―!
격렬한 뒤틀림과 함께 운찬의 입이 쩍 벌어졌다.
너무 큰 충격은 본래 온몸을 마비시키는 법.
운찬은 공중을 날아 그대로 객잔의 벽에 부딪쳐 그 벽을 무너뜨렸다.
우르르르―
쏟아지는 돌더미 위에서 운찬은 신음을 흘렸다.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겹게 뜬 그의 눈에 아직도 도망치지 않은 채 뒷문의 근처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쌍둥이 형제가 보였다.
‘안 돼!’
속으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
아칠과 아팔은 쓰러진 운찬을 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달려왔고, 그 앞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난 삿갓의 사내가 한쌍의 도를 양손으로 뽑아 들고 아칠과 아팔의 가슴팍을 동시에 베어 냈다.
“아…….”
“윽…….”
어린아이가 상대임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두 소년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운찬은…….
돌무더기 위에 널부러진 채, 피눈물을 흘릴 듯 충혈된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돼에에―!”
처절한 외침과 함께 풍운객잔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 ☆ ☆
휘연은 창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은색의 물체를 비춰 보았다.
동그랗고 납작한 세공품에 질 좋은 가죽 줄을 연결해 만든 목걸이였다. 방물상에서 산 것이 아니라 직접 부탁하여 만든 물건. 게다가 그 재질까지 들여다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은화를 여섯 개나 썼지만…… 괜찮겠지?”
은화도 보통 은화가 아니었다.
장기린이 홍화객잔에 팔려가던 휘연을 금괴로 되사고, 그에 대한 잔돈으로 받은 은화 중에 여섯 개를 쓴 것이었다.
그 은화는 두 사람의 인연과 그 시작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그녀로서는 큰 지출을 한 셈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쳐 아까워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큰 맘 먹고 은화 여섯 개를 녹여 순수한 은만 분리해 동그란 은반 형태의 세공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기(麒).
연(蓮).
기린을 뜻하는 ‘기’에 휘연을 뜻하는 ‘연’이었다.
딱히 다른 세공이나 장식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휘연에게 있어서는 극상의 보물과도 같았다.
이미 똑같이 생긴 한 쌍의 목걸이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이 목에 차고 있는 바.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장기린이 돌아와 그녀가 그에게 선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꽈아아아앙―!
“아……?”
굉음이 들린 것, 그리고 비명이 들렸던 것 또한 그때였다.
휘연은 놀라서 곧장 처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밖으로 이어진 뒤뜰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연이어 들린 굉음과 함께 한쪽 객잔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돌이 된 듯 딱딱하게 굳어 버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객잔의 벽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행복.
평범한 일상을 함께해 주는 소중한 가족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었다.
“안―돼에에―!”
운찬의 처절한 절규와 함께 아칠과 아팔이 가슴이 베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운찬은 일어서려고 하는 듯했지만, 그럴 만한 몸 상태가 아닌 듯했다. 기괴하게 뒤틀린 오른쪽 다리를 보면, 척 봐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상세가 아니었다.
“아, 아아…… 아아아…….”
휘청―
휘연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간신히 벽에 손을 대고 버텨 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에 비치는 것이 진짜일까?
이건 악몽이 아닐까?
어떻게 그녀가 아끼는 모든 것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을까?
스윽―
“……!”
휘연은 아칠과 아팔을 쓰러뜨린 삿갓사내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무심한 살기.
게다가 휘연을 보는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사냥감을 찾은 듯한 득의의 기색이 떠오른 것이다.
“멈춰라아―!”
휘리릭!
그때, 객잔의 지붕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리며 커다란 창을 삿갓사내에게 내리찍었다.
나이는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햇볕에 잘 그을린 갈색의 몸. 단련된 육체가 강인함을 품고 있었다. 그 청년의 공격은 무공에 문외한인 휘연이 보기에도 대단한 위력으로 보였으나, 삿갓사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도를 휘둘러 그 청년을 옆으로 쳐 냈다.
따아앙!!
“큭……?!”
가볍게 휘두른 일격에 온몸으로 내리찍은 창이 튕겨 나갔다. 그뿐인가. 청년은 그 경력을 다 해소하지 못하고 돌멩이처럼 옆으로 튕겨 나고 말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청년이 튕겨 나간 방향은 거구의 사내가 있는 곳이었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 청년을 향해 내려쳐지고, 청년은 그것을 피하고 막는 것만 해도 경황이 없는 듯했다.
“안 돼! 도망치십시오!”
청년이 다급하게 발하는 목소리는 분명 휘연을 향하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인데 어째서 저렇게나 걱정해 주는 것일까.
하지만 휘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고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바라왔던 모든 것이 이 자리에서 끝날 수 있음을.
‘객주님……!’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 하늘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불러본다.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일한 정인(情人).
가슴이 시립도록 그립다.
운명으로 엮인 반려를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붉은 악귀의 여인이 당신이었군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삿갓사내의 목소리는 이런 무도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았다.
“그래요.”
붉은 악귀.
얼마 전에 장기린의 과거를 들었을 때 그가 씁쓸하게 말했던 과거의 별명이다. 그 말만으로도 그들이 장기린의 과거 때문에 찾아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휘연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하게 삿갓사내를 마주 봤다.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는 신비로운 눈빛의 사내.
잠시 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삿갓사내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변했다.
“그 심성, 그 용기. 악귀의 여인이라기에 어떤 사람일까 했더니…… 대단한 여인이었군요.”
휘연은 손에 들린 목걸이를 꽉 움켜 쥐었다.
“객주님은 악귀가 아니에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보통 사내죠.”
“보통 사내라…….”
“저를 죽일 건가요?”
“……글쎄요.”
삿갓사내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했다.
휘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인질로 삼을 생각이라면 지금 죽여 주세요.”
“그건…… 부탁입니까?”
“그래요, 부탁이에요.”
비록 안색은 창백하나 치켜뜬 봉목, 결연한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임에도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그녀.
그녀의 세상이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질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과연…….”
감탄한 듯 탄성을 내뱉은 사내가 시선을 돌려 장내의 상황을 확인했다.
함성, 굉음, 신음 소리.
어느새 쌍도와 철선을 든 두 사내가 더 나타나 싸움은 혼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연신 들려오는 폭음과 굉음이 인세의 싸움 같지 않았다.
“표풍검, 귀군사(鬼軍師), 전귀(戰鬼). 역시 적룡기마대는 이곳에 있었군요.”
새로 나타난 두 사람을 응시하는 삿갓사내의 목소리엔 왠지 모를 아련함마저 담겨 있었다. 씁쓸한, 하지만 뭔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객주님…… 객주님…….’
휘연은 죽음을 직감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정표를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문 채 닥쳐올 고통을 기다렸다.
북쪽에서 시작된 질긴 인연이 남쪽의 대지, 항주의 한 평범한 객잔 안에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니.
한 사내가 객잔의 대문을 박차고 장내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상황은 절정으로 치닫게 되었다.
쿵!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머리를 등 뒤에서 질끈 묶고, 새하얀 백창의를 입은 사내.
장기린은 객잔 안에 발을 딛는 순간, 그의 불안함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너진 벽의 앞쪽. 아칠과 아팔이 쓰러져 있다. 운찬이 다리가 뒤틀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으며, 피범벅이 된 채 가슴에 화살이 꽂힌 남궁휴는 생사가 불투명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현실이 되어 버린 악몽.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현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스으으―
천천히, 뒤뜰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우르칸, 자이혼, 그리고 하시르.
마주 대하는 순간, 저절로 무기에 손이 갈 악연들이었다.
“그런가, 삼대천인가.”
텐챠이를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짐작해야 했거늘.
장기린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부운화, 섭우생, 진구도 보였다.
그가 진심으로 아끼는 형제들이 뒤뜰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시르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우르칸과 자이혼이 길을 열어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삼 대 이의 격전은 그야말로 백중세.
부운화와 자이혼은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섭우생과 진구는 우르칸 한 사람을 맞아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장기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한 사람.
휘연과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아요.
직접 말을 한 것도, 심지어 입을 벌린 것도 아니지만, 눈빛으로 의지가 전해져 왔다.
“객주님.”
슬픔에 촉촉하게 젖은, 하지만 장기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한 줄기 기쁨의 기색을 띤 눈빛이 장기린에게 향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사방에서 폭음과 굉음이 들려와도 그 목소리만큼은 귀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하시르의 쌍도가 위로 들렸다.
장기린은 몸을 날렸다.
포기하지 말라?
무엇을?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안 돼.”
이해할 수 없다. 휘연의 담담한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나 절박한데, 어떻게 그렇게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가.
일단 살려야 했다. 그런데 거리가 너무 멀었다.
초신속, 무박자.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시르의 일도보다 빠를 수는 없다.
“안 돼…… 안 돼……!”
시간이 느려지는 흑백의 공간에 진입해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휘연을 향해 달려갔다.
이십 장이 넘는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하지만 하시르의 도는 무심하게 휘둘러지고,
푸화악―!
선명하게 붉은 피가 만개한 매화처럼 하늘에 흩뿌려졌다.
“휘연―!”
쩌적.
그 순간, 장기린의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깨졌다.
처절한 운명.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무수히 많은 지인들이 마찬가지로 그의 곁에서 죽어 나갔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거. 끝없는 윤회의 고리.
그 속에서 장기린은 그가 가장 처절했던 시절, 한 없이 강했고, 너무나 고독했던 ‘붉은 악귀’로 회귀했다.
콰아아아아―!
둑이 무너진 강물이 쏟아지듯, 전혀 자제하지 않고 뿜어진 살기가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밀도 깊은 감정이 항주 금선로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내딛는 발, 보보(步步)마다 주변의 풀들이 말라 죽기 시작했다. 어두운 구름이 낀 것마냥 사위가 어두워지고, 진하게 엉겨 붙은 공기 속에서 감히 숨도 쉬지 못할 압력이 근처 모든 이들을 짓눌렀다.
이것이 장기린.
전장의 사신(死神)이며, 북방 십만 기병들을 홀로 압도했던 무적의 군신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붉은…… 악귀…….”
하시르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
악귀?
아니, 이 정도면 악귀가 아니라 악마, 마신(魔神)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새 모든 싸움이 멈춰 있었다.
부운화, 섭우생, 진구.
그리고 우르칸과 자이혼까지.
너무나 압도적인 기파에 싸움을 멈추고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이 아니라 강제다. 단 한 사람의 존재감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비켜라.”
지옥 유부에서 흘러나온 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앞에 선 자.
하시르.
삼대천의 우두머리였으나 장기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가슴과 상복부를 길게 가른 상처를 입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여인에게만 못 박혀 있을 뿐이다.
“큭…….”
하시르는 옆으로 물러났다.
압도적인 살기. 그야말로 파멸적인 위압감.
마치 절대적인 명령을 들은 듯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장기린에게는 존재했던 것이다.
하시르의 두 눈엔 짙은 혼돈과 패배감이 함께했다.
도를 쳐낸다?
안 된다.
지금의 그에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막상 싸우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싸움을 걸 마음조차 들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감에 질려 버렸다.
저벅. 저벅.
하시르의 곁을 지나친 장기린은 휘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하늘조차 찢어발길 것 같던 살기가 감쪽같이 수그러들었다.
“휘연.”
곧바로 가슴의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으나, 상체를 거의 갈라놓다시피 한 상처는 그 정도로 회복될 상세가 아니었다.
“객…… 주님…….”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
애써 미소 짓는 듯 담담한 얼굴이 장기린의 눈에 아프도록 박혀들었다.
“무사히 돌아…… 오셨네요…….”
“말하지 마.”
“이걸…….”
천천히 장기린에게 내미는 손.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곱고 새하얀 손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아주자 그 속에 쥐여 있던 따뜻한 물체가 그의 손바닥에 건네졌다.
“이건?”
“정표…… 예요.”
“정표…….”
“헤헤, 하나…… 갖고 싶어서 무리…… 했어요. 괜…… 찮죠?”
장기린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휘연의 시선은 이미 장기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 과도한 출혈과 충격으로 눈앞이 캄캄할 터. 그럼에도 웃는 모습을 보자 울컥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지. 얼마를 쓰든 상관없다.”
“그러면…… 안 돼요. 객잔은…… 절약을…….”
“난 그런 걸 모른다. 앞으로도 네가 관리하면 되지 않나.”
휘연의 입가에서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목걸이…… 직접 걸어 드리고 싶었는데…….”
“나중에. 일어나서 걸어 주면 된다.”
“객주님…….”
“휘연.”
“포기하면…… 안…… 돼요…….”
서서히, 감싸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장기린은 그 손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마치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휘연…… 휘연…….”
불러도 대답이 없다.
항상 무심했던 장기린의 얼굴에서도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건…….”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시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아…… 아아……!”
하늘 위, 슬프도록 하얗게 빛나는 별들을 보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연신 내뱉는 신음엔 깊은 고뇌와 고통이 담겨 있었다.
“천도(天道)…… 가 어긋났습니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혀졌건만, 오히려 드러난 것은 적살(赤煞)에 가로막히는 짙은 어둠뿐. 대사(大事)의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하시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우르칸과 자이혼이 그를 쳐다봤지만 하시르는 여전히 혼탁한 눈빛으로 스스로를 자책했다.
“실수였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제 실책으로 북천(北天)의 천도를 틀어 버리다니,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 것인지……. 아아…… 아아……!”
창백한 안색이 되어 버린 하시르는 마침내 내상을 입은 것처럼 울컥, 핏덩이를 토해 놓고 말았다.
그는 차마 앞을 볼 수 없다는 듯 삿갓을 푹 눌러써 눈을 가렸다.
“돌아갑니다.”
“하시르?”
“돌아갑니다. 지금 당장.”
하시르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졌던 우르칸과 자이혼이지만, 그들은 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하시르를 따라 객잔 밖으로 나섰다.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아.”
장기린은 휘연이 마지막에 해 준 말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너무나 큰 슬픔에 당장에라도 울분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래도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는 휘연의 목숨도, 다른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부우욱―
자신의 상의를 찢어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휘연의 상체를 꽉 감아 묶은 뒤, 장기린은 휘연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돌리자 침통한 얼굴의 부운화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대형, 저는…….”
부운화의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이 상황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슬픔과 분노였다.
“운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
“대형…….”
“일단 우생, 진구와 함께 객잔 식구들을 수습해라. 그리고 나를 따라와.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먼저다.”
“……예!”
장기린이 명을 내리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부운화, 섭우생, 진구. 세 사람이 촌각도 지나기 전에 각자 객잔 식구들을 수습해 들쳐 업은 모습을 확인한 뒤, 장기린은 휘연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몸놀림을 주의하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대형,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는 의원이 있다. 일단은 그곳으로.”
항주 금선로의 뒷골목.
얼마 전에 만났으며 그 능력에 감탄했던 숨겨진 신의(神醫)가 있는 곳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하나의 인연인 바, 장기린은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만약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잘못된다면…….”
“대형?”
“그땐 원의 잔당 따위…… 이 땅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 것이다.”
나직한 말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분노.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는 옆모습에서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아아…….’
부운화는 전율했다.
살기가 사라졌다? 평범한 삶을 살면서 무뎌졌다?
다 헛소리다. 이 그릇, 이 무력은 시간이 조금 흐른다고 해서 녹슬 만한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면서 더욱 강해진 듯 보였다.
원의 잔당. 텐챠이, 삼대천.
이 사내와 함께라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장기린.
전장을 지배하는 붉은 악귀는 이미 천하를 향해 새로운 발돋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