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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五章 ― 급박질주(急迫迭走)
풍운객잔의 주인이자 적룡기마대의 대주였던 장기린이 항주 뒷골목의 허름한 반(半) 초가집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의원인 간옹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장기린은 거듭된 악재로 본래의 살기 어린 모습을 드러낸 상태.
그 살벌한 기세에 놀랄 만도 하건만, 간옹은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디서 또 이런 산송장을 데려왔어!!”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해 내는 그 모습에 그전 같으면 웃음을 터뜨릴 광경이었을 테지만, 지금의 장기린은 무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휘연의 상세를 살필 뿐이었다.
간옹은 휘연을 침상에 눕히자마자 뜨거운 물과 새하얀 천, 그리고 깨끗하게 말려 있는 명주실을 준비했다.
“참고로 나는 의원이지 사내가 아니야. 설마 유가(儒家)의 정조 관념 따위 때문에 환자를 보지 말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상처가 있는 부분이 휘연의 가슴 부분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명문가의 여식들 중엔 외간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면 자결을 하는 여인들이 있다. 그 때문에 명가(名家)에선 여인이 아플 때는 꼭 여자 의원이 아니면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괜찮소. 치료해 주시오.”
운화와 우생, 진구는 잠시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방 안에는 간옹과 장기린 둘뿐이었다. 장기린의 허락을 받은 간옹은 상체를 둘둘 감아 둔 천 조각을 풀고, 피투성이가 되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의를 조심스레 벗겨 냈다.
“으음…….”
간옹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기 좋은 가슴이 꽃이 만개하듯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백옥처럼 매끈한 피부 위로 소담스럽게 올라가 있는 분홍빛 유실은 사내라면 누구나 시선을 떼지 못할 광경이었을 테지만…….
지금 간옹이 신음을 흘린 것은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옷을 벗기자마자 드러난 상처.
깊은 협곡처럼 상체를 비스듬하게 갈라 놓은 도상(刀傷)은 그 상세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이다.
“쇄골 끝 중부혈로부터 반대편 허리의 경문혈까지. 일도에 상체의 온갖 요혈을 한꺼번에 파괴했어. 이 상처를 입힌 놈, 생각보다 대단한 놈인데? 사람을 일격에 죽이는 게 완전히 몸에 숙달된 놈이야.”
의원의 눈엔 그런 것도 보이는 것일까.
간옹은 혀를 쯧쯧, 차면서 감탄 아닌 감탄을 한 뒤, 뜨거운 물에 적신 천으로 휘연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알고 있겠지만, 내 능력으론 살리기 힘들어. 상처 길이가 이 척하고 일 촌, 깊이는 일 촌 반. 솔직히 몸이 반토막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칼을 휘두른 놈이 무슨 이유에선지 망설인 모양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숨을 쉬지도 못하고 있을걸?”
간옹은 피를 다 닦아 낸 상처에 특수한 약즙을 바르고, 예전에 백연에게 했듯이 깨끗한 명주실로 상처를 꿰매 봉합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소.”
“알고 있다면 얘기는 빠르지만…… 아, 잠깐만 기다려.”
순간 간옹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상처의 처리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
자로 잰 듯 정확한 손놀림.
모든 과정을 이미 머릿속에서 끝내고 차례차례 정교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그의 움직임에 망설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닌 듯 간옹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침내 마지막 한 땀까지 바느질을 마쳤을 때, 간옹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자, 이제…….”
간옹은 구석의 서랍장으로 가더니 그 안에서 금곽에 들어 있는 단약을 꺼내 왔다. 그러자 콧속으로 청량한 향기가 스며 들어왔다.
이것 역시 지난번에 보았던 물건.
간옹의 스승이 만들어서 남겨 주었다는, 구명환이라는 이름의 명약이었다.
간옹은 휘연의 입을 벌려 혀 아래쪽에 그 약을 넣어 주었다.
씹을 필요가 없다던 그의 말처럼 단약은 휘연의 입속에 들어가자마자 스르륵 녹아 목구멍을 통해 넘어갔다.
간옹은 진중하게 약이 잘 삼켜진 것인지 확인한 뒤, 투덜투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우라질, 무슨 마가 낀 건지, 최근 십 일 내에 구명환을 세 개나 쓰다니. 이제까진 평생 두 개밖에 쓸 일이 없었는데.”
하나는 백연에게, 하나는 휘연에게.
그 둘 사이에 구명환을 쓸 일이 또 한 번 있었던 모양이다.
장기린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치료가 끝난 휘연의 몸을 바라봤다.
흉측하게 갈라진 상처 위로 명주실로 꿰맨 자국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외엔 너무나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육신이기에 더더욱 눈에 띄는 상처였다.
“며칠이나 남았소?”
장기린은 휘연의 몸 위로 새하얀 천을 덮어 준 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이동할 거지?”
“그렇소.”
“아마도 사흘.”
“아마도?”
“전에 그 친구는 무공을 익혔으니 확신했지만, 이 아가씨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야. 그나마도 못 버틸지도 몰라.”
“휘연은 강한 여인이오.”
“그래? 상처의 회복엔 환자의 의지도 중요하지. 하지만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야. 이 이상은 내 손을 떠났어.”
“인명은 재천……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소. 반드시 그녀를 살려 놓을 것이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하늘이 막는다면 그 하늘까지 부숴 버릴 것이다.
강렬한 기백이 담긴 장기린의 말에 압도된 간옹이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거워진 공기.
잠시 후,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듯 간옹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의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
“살아났소. 신의를 만난 덕분이오.”
“다행이네. 이번에도 그분에게 가려는 거야?”
“그렇소.”
“으음…….”
간옹은 휘연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본래 건강한 붉은빛이 감돌아야 할 입술마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휘연의 손목을 잡고 맥을 확인한 뒤, 장기린을 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드르륵―
다만, 그는 안쪽에서 구명환을 하나 더 꺼내 왔다.
“받아. 아까 하나로 기력을 살려 놓긴 했지만, 분명…… 이동 중에 고비가 올 거야.”
“이건…….”
“지나침[過]은 독(毒)이지. 하지만 때론 독인 걸 알면서도 약으로 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일 테지?”
간옹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휘연의 상세가 심각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데도 구명환을 두 개나 내어준다. 의원으로서 사심없이 구명지로(求命之路)를 걷는 그의 성품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소.”
장기린은 약을 받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사내에겐 너무나도 깊은 은혜를 입었다. 지금 당장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걸 받으시오.”
장기린은 다만 품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금괴를 꺼내 간옹에게 내밀었다.
간옹은 지난번처럼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흔들리는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
“이건……?”
“구명환 두 개. 분명 금괴 두 개 이상의 가치에 해당할 테지만, 지금 가진 것은 이것 하나뿐이오. 하나, 그 은(恩)에 대한 보답은 돌아와서 반드시 갚겠소.”
전장에서 살아가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인의(仁義)에 무뎌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장기린은 여전히 정명한 성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노력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은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한다.
더군다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의 은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갚는다.
그게 장기린식의 정의(正義)였다.
“당신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군.”
간옹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장기린을 응시하다가 금괴를 건네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살기, 그 성품. 도통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또한 너무나도 잘 어울려.”
“…….”
“금괴는 맡아 두지. 그리고 남은 대가도…… 그 여인이 무사히 살아난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어.”
즉, 휘연이 잘못되면 그 금괴나마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구명환을 두 개나 내어주고도 초탈한 간옹의 태도에선 도인(道人)의 그것과 같은 현기마저 느껴졌다.
장기린을 보며 신기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간옹이야말로 신기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비싼 치료비를 청구하며 돈에 집착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부분에선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가.
장기린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간옹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른 식구들은 어떻겠소? 무사히 살아날 수 있겠소?”
장기린은 휴, 운찬, 아칠, 아팔을 떠올렸다.
휘연만큼 위험하진 않지만, 모두 범상치 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휴는 사경을 헤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생긴 형씨는 천운으로 요혈은 피해 갔어. 워낙 몸이 튼튼해서 조금만 신경 써 주면 곧 나을 거야. 다만, 착하게 생긴 형씨는 생명엔 아무런 지장도 없겠지만…… 한쪽 다리는 제대로 못 쓸 것 같아.”
“그렇…… 소?”
잘생긴 형씨는 휴.
착하게 생긴 형씨는 운찬이다.
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 하지만 운찬이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안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도 팔이 아닌 것이 다행인가.’
숙수로서의 생명은 끝나지 않았다.
일단은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꼬맹이 둘은 칼등으로 때린 모양이야. 아직 충격으로 기절해 있긴 하지만, 멍이 좀 크게 드는 것 말고는 별거 없어. 무사히 깨어날 거야.”
“칼등…….”
아칠과 아팔을 쓰러뜨린 자.
하시르다.
휘연을 벤 원수이며, 또한 아칠과 아팔을 칼등으로 쳐서 목숨을 거두지 않은 자.
장기린의 눈빛이 복잡하면서 뜨겁게 타올랐다.
“아무튼, 그 외엔 모두가 다 무사할 거야. 중요한 건 그 아가씨지. 꼭 살아나길…… 기원하겠어.”
“……감사하오.”
신의가 따로 있는가.
경탄을 금치 못할 능력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신의다.
뛰어난 의술로 경각에 달한 생명을 살리고, 그 환자들 모두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인다.
장기린은 간옹에 대한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그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간옹이 마차를 준비해 주는 사이, 부운화가 장기린에게 다가왔다.
“대형.”
목소리와 표정에서 부운화의 심란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운화, 너답지 않은 얼굴이다.”
“대형…….”
“삼대천을 쫓다가 온 건가, 아니면 나를 쫓아서 왔다가 삼대천을 만난 건가?”
“대형을 쫓아서 왔다가 삼대천을 만났습니다.”
장기린은 부운화와 눈을 마주치고는 그대로 가만히 응시했다.
허공에서 교차하는 눈빛과 함께 그간의 마음이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부운화와는 십삼 년 중 십 년을 함께했다. 그랬기에 서로의 눈만 봐도 충분히 내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군을 떠난 사람이다. 대장군의 유언이긴 했지만, 어쩌면 너희를…… 배신한 걸지도 모른다.”
장기린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담겼다.
적룡기마대의 형제들.
그들은 장기린에게 있어 좋은 추억임과 동시에, 먼저 전장을 떠나 버린 죄책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대원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운화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대형의 새로운 삶이 궁금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쫓아온 것뿐입니다. 저는 대형이…… 평범한 삶을 계속해서 살기를 바랐습니다.”
“……언제부터?”
“예?”
“언제부터 항주 금선로에 있었지?”
부운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일 년 즈음…… 되었습니다.”
“그래, 기억나는군. 산적들의 소굴로 갔을 때 적룡기마대의 것과 비슷한 흔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우연으로 치부했는데…… 그게 너였군.”
“산적! 거기도 오셨습니까?”
“그래. 휘연의 부모가 그곳에 잡혔다고 하여 갔지.”
“……!”
부운화는 그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운화.”
“예?”
“고맙다, 내 삶을 지켜 주려 해서.”
부운화의 눈빛이 떨렸다. 항상 보기보다 영리하고 사태 파악이 빠른 사람이 장기린이었다. 그는 지금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가끔, 이상하게도 상황이 좋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관청에서 과도한 호의와 혜택을 받거나, 객잔과의 다툼이 있었을 때 마치 누군가가 끼어든 것처럼 공격이 뚝 끊긴 적도 있었어.”
“…….”
“고맙다. 그 덕분에…… 그동안 더 행복한 삶을 지낼 수 있었다.”
“대형…….”
행복한 삶.
부운화는 장기린이 ‘그동안’과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가슴이 저릿했다.
모든 것이 과거형이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객잔 식구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그에게 평범하고 행복한 삶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듯했다.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부운화의 입에서 자책의 말이 흘러나왔다.
“좀 더 빨랐다면, 좀 더 삼대천에 대해 잘 알고 객잔 주변을 경계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대형이 아끼는 식구들이 상하는 일은…….”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너의 도움 없이도 해냈어야 하는 일이다. 이건 내 탓이야. 내 과거에 남은 업보가 지금 덮쳐 왔을 뿐이다.”
“대형……!”
“운화, 나는 앞으로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도와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부운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굳은 표정의 장기린. 차마 반가이 웃을 수는 없었으나, 그런 운화를 바라보는 장기린의 눈에는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그럼, 일단은 몸을 피해라. 삼대천이 지금은 돌아갔지만 곧 우리의 근원을 뽑으려고 할 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뒤를 쫓기라도 하면 너희 둘로는 역부족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소집은 어떻게…….”
“사정 전투 기억나나?”
“예……!”
사정(沙井).
북경의 서북쪽에 있는 북원 땅의 마을 이름이었다. 명 제국이 빼앗고, 원에 다시 뺏기고, 또다시 명 제국이 빼앗는 침탈과 수탈이 반복되던 땅. 그곳에서의 싸움은 부운화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 방식으로 한다. 중심지는 항주. 접선은 준비가 되었을 때 내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버텨라, 운화.”
“걱정 마십시오. 싸우는 것도 아니고, 버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닙니다.”
든든한 목소리로 말하며 씩 웃는 부운화. 그 속에서 강한 힘과 자유로운 기상이 느껴졌다.
그사이, 마차가 도착했는지 간옹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기린은 운화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뒤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텐챠이, 이 빚은…… 꼭 갚아 주겠다.’
복수의 싸움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
일단은 휘연의 안위가 먼저였다. 장기린은 휘연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는 마차에 올라타 휘연을 무릎 위에 눕혔다.
허벅지에 휘연의 등과 둔부를 올리고 양팔로 목과 무릎 뒤를 받친 자세였다.
그렇게 며칠이나 안고 가느니 마차에 내려놓는 게 더 안정적일 거라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의 사고방식.
장기린에게는 마차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완화시키고,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휘연을 부드럽게 안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휘연의 육체에 충격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히히힝―!
덜컹, 덜컹.
천천히 움직임을 시작한 마차가 관도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초광부. 신의(神醫)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 ☆ ☆
“풍운객잔을 쳤다고?”
항주 외곽. 인근의 사람들에게 귀견장이라 불리는 곳.
그 중심에 숨겨져 있는 가장 큰 막사에서 의혹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텐챠이.
멸망한 쿠빌라이 가(家)의 마지막 유지를 잇고 있는, 북부 초원 최강의 장수가 내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엔 강한 분노가 섞여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함부로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잠시 후, 일단 들끓는 분노를 잠시 억누른 텐챠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흉월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객잔 주인인 장기린을 제외한 모두가 큰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객잔은 절반 이상이 부서져 다시 영업을 하려면 수리 기간만 해도…….”
“그만. 영업에 관한 것을 묻는 게 아니다.”
“……예,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세에 대해서는 삼대천분들이 대답을 해 주지 않으셔서…….”
흉월은 반들반들한 대머리 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텐챠이는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인 삼대천 또한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으니, 흉월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중간에 끼인 흉월만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이혼은 어떤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고, 우르칸은 무슨 말만 하려 하면 눈을 부릅뜨며 살기를 뿜어냈다. 평소에 이런 때면 하시르가 나서서 중재를 해 주었는데, 어쩐 일인지 하시르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세정 의식이니 진혼식이니 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긴, 이런 이야기는 본인들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겠지.”
언뜻 들으면 평범한 목소리.
하지만 흉월은 그 목소리에서 잔뜩 화가 난 맹수가 달려들기 위해 몸을 낮추는 듯한 불길함을 느꼈다.
“삼대천을 불러라.”
“……예.”
흉월은 식은땀을 흘리며 삼대천을 부르기 위해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반 시진이 지난 뒤, 삼대천 모두가 텐챠이가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우르칸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자이혼은 딱딱하게 입매를 굳히고 있었으며, 하시르는 낯빛이 창백해진 채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풍운객잔에 관한 일, 설명을 듣고 싶은데?”
“…….”
텐챠이가 잠시 기다렸으나 하시르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땅을 쳐다보고 있는 하시르.
보다 못한 텐챠이가 미간을 좁히며 일어서려고 하자 하시르의 뒤에 서 있던 자이혼이 입을 열었다.
“싸움을 좀 할 줄 알던 매끈한 놈은 우르칸에게 왼팔이 부러졌고, 내 철시 다섯 발이 가슴을 뚫었다. 또 다른 젊은 놈은 우르칸에게 오른쪽 다리가 박살 났고, 꼬맹이 둘은 하시르에게 맞아 쓰러졌지. 그리고 붉은 악귀의 여자는…… 하시르가 벴다.”
“……벴다?”
“죽었다. 하시르의 도에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졌으니까.”
하시르의 도는 텐챠이 못지 않은 살검(殺劍).
일격에 요혈을 다 갈랐을 테니 가슴을 베였다면 십중팔구는 죽는다. 텐챠이가 불꽃이 튀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하시르를 노려봤다.
화가 났다.
발밑에서 시작된 분노의 불꽃이 온몸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그가 직접 장기린에게 평범한 삶을 묵인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묵약(默約)을 하시르가 깬 것이다.
일순, 배신감과 함께 모욕감마저 느껴졌다.
“어째서……!”
갈라진 목소리. 텐챠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붉은 악귀의 여인.
얼마 전엔 텐챠이 본인이 인질로 붙잡아 목에 칼을 들이댔기에 잘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잠시 만났을 뿐이지만, 장기린이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또한 그녀는 장기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장기린이 평범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의 팔 할은 그녀 덕분일 터.
즉, 반대로 말하면 그녀가 사라지면 더 이상 장기린은 평범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복수뿐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전장의 붉은 악귀로 화(化)해 텐챠이의 앞길을 막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텐챠이는…….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깐, 나는…… 그것에 기뻐하는가?’
텐챠이는 자기자신의 내면의 일부가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한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전사가 아닌 자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장기린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묵인했다.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이제 사사로운 모든 것을 접고 대의를 이루기 위해 집중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시르와 삼대천의 돌발행동 때문에 장기린이 다시 전사로 복귀하게 되었다.
‘장수로서의 나는 괜히 잠자던 대적(大敵)을 끌어들인 하시르에게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초원의 전사인 나로서는…… 숙적을 다시 전장으로 불러들인 하시르의 행동에 기뻐하고 있다.’
텐챠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마치 꿈결 속에서 듣는 말처럼 몽환적인 하시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뜻을 사람이 모두 측량할 수는 없는 법. 마찬가지로 천의(天意)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다스려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텐챠이는 하시르와 눈이 마주쳤다. 하시르는 그를 마주 보고 있지만, 마치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듯 시선이 텐챠이를 향해 있지 않았다.
텐챠이는 조금 뜨끔했다.
지금의 말은 마치 텐챠이의 내심을 들여다본 것 같은 언사가 아닌가.
‘영매(靈媒)……!’
평상시의 하시르는 더할 나위 없는 지장(智將)이지만, 가끔 이렇게 귀신과 소통하며 영매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가 한 일은 실수이지만, 실수가 아닌 것. 순간적인 변덕이었으나 그 또한 커다란 하늘의 뜻의 일부일 뿐이니…… 아아! 천의(天意)는 촘촘한 그물과도 같아서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해도 결국은 붙잡히고 맙니다. 이미 모든 결과는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시르의 영롱한 눈동자로부터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너무나 경건해서 텐챠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말투가 너무나 불길하지 않나.”
“불길(不吉)…… 길하고 길하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끝이 정해져 있다고는 해도 하늘이 내리신 저희의 천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주어진 삶과 의무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똑바로 말하라.”
“당신이 그토록 원했듯이, 당신의 대적의 등장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시고 다만 다가올 싸움을 준비해 주십시오.”
텐챠이의 내심이 흔들렸다.
대적(大敵).
장기린이다.
하시르는 그의 등장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본 그는 방관자였다. 하지만 너의 경솔한 판단으로 우리의 대사에 큰 장애물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거기에 천의를 끌어들이다니,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 건가, 하시르여. 똑바로 말하라. 이것은 너의 실수가 아니였나? 진정, 다른 미래는 없는, 이미 하늘의 뜻으로서 모두 정해진 일이었던 것인가?”
텐챠이는 강하게 하시르를 압박했다. 하시르의 이야기가 하늘의 뜻과 닿아 있다면, 더더욱 그는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하늘만 올려다보는 하시르.
보다 못한 우르칸이 뒤에서 나섰다.
“장군, 붉은 악귀를 그냥 내버려 뒀다는 건 장군도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정말로 붉은 악귀가 가만히 있었을까?”
“……그건 무슨 말인가?”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상대는 그 ‘붉은 악귀’인데, 막상 대사(大事)가 진행되면 정말로 가만히 있었을까? 싸움이라는 건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다. 붉은 악귀와는 강한 악연으로 엮여 있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싸움에 끼어들거나 우리의 앞길을 막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제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한쪽 눈만 치켜뜬 우르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텐챠이는 속으로 조금 납득하고 말았다.
그들의 목표는 황족을 비롯한 중요 인물의 암살이지만, 우르칸의 말대로 상황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법. 항주 금선로를 통째로 없애고 불태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풍운객잔 또한 그 피해 범위에 들어간다.
그때도 붉은 악귀는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의 여인을 위해 묵묵히 목숨을 내놓으려 했던 그때처럼 싸움에서 도망치고 객잔을 내버린 채 그저 자신의 안위만 챙기려고 했을까?
가만히 생각하던 텐챠이는 결론을 내렸다.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그랬다. 불안 요소가 너무 많았다.
확실한 요소는 하나도 없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의미심장한 것투성이였다.
도리어 이런 상황인데 어째서 장기린이 금선로에서 지내도록 순순히 묵인해 주려고 했는지 스스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다. 나는 정말로 몰랐나? 그런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건가?’
거듭되는 의문.
그리고 곧 텐챠이는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답을 발견했다.
그때도,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정말로 장기린을 놓아주려 했다면 이곳에서 일이 벌어질 것이니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끝까지 스스로의 끈질긴 집착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언젠가 제대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장기린을 근처에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 당시엔 장기린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승부를 내기 위해 장기린을 내버려 두었으면서 겉으로는 전사가 아닌 자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평범한 삶을 살라고 관대한 척 묵인해 주었던 것이다.
“그랬던 건가…….”
탄식하는 텐챠이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에 들었던 하시르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듯이, 당신의 대적의 등장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시고 다만 다가올 싸움을 준비해 주십시오.”
영매라는 존재는 하늘의 뜻을 전해 주는 자.
하늘은 아무리 텐챠이가 스스로를 숨기려고 해도 그의 끈질긴 집착과 전투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거군.”
다시금 깨닫는 자기 자신의 본성.
지그시 눈을 감은 텐챠이에게 우르칸의 이어진 말이 들렸다.
“어차피 싸우게 될 거라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느니 이렇게 선수를 치는 게 나은 거지. 내 생각엔 차라리 이게 잘된 거다. 이제 그놈들은 확실히 눈앞에 있는 ‘적’이니까.”
무심하고 둔하면서도 우르칸의 말은 항상 핵심을 꿰뚫는 무언가가 있었다.
확실하게 눈앞에 있는 ‘적’.
적…….
그렇다. 장기린이 아무리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그의 진정한 모습은 어쩔 수 없는 붉은 악귀.
그리고 붉은 악귀는 원 제국, 아니, 창천랑(蒼天狼) 텐챠이의 확실한 적이었다.
“하핫!”
텐챠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스르륵 뜨여지는 눈.
그의 안광이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진정한 자신을 되찾은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허물을 벗은 듯이 폭풍과도 같은 기파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화아아악―
알 수 없는 텐챠이의 행동과 강렬한 기세에 삼대천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모습을 보였다.
텐챠이는 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마도(魔道), 아니, 패도(覇道)였다.
원 제국 마지막 장군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
전사로서의 자신을 포기한 장기린에 대한 연민?
이제 그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산을 무너뜨리고 하늘을 부술 듯한 그의 기세와 정신은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뒤로한 채 정확하게 하나의 존재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붉은 악귀, 장기린.”
텐챠이가 허리춤에 걸린 자신의 애도, 신응(神鷹)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적은 절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 적을 놓쳤다면 죽일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쫓는다. 그게 쿠빌라이의 율법이겠지.”
텐챠이는 그 순간 장기린을 대적(對敵)으로 선언했다.
이제 쿠빌라이 가의 방벽인 텐챠이 수호대가 그를 쫓을 것이다. 텐챠이 수호대는 적을 놓치는 법이 없다. 죽거나 죽임을 당할 때까지 추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르릉―!
마침내 도갑으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 신도(神刀), 신응이 눈부신 은광을 흩뿌리며 칼끝으로 하시르를 향했다.
“하시르, 나의 의견을 묻지 않고 행한 것은 분명 잘못이나, 네 행동은 옳다. 그러니 그 죄를 사할 방법을 말하겠다. 끝까지 붉은 악귀와 그 동료들의 뒤를 쫓아라.”
“예, 장군.”
하시르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자이혼, 우르칸. 너희도 하시르와 동조했으니 죄는 같다. 하시르를 도와 앞으로 붉은 악귀가 우리의 일을 방해할 수 없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붉은 악귀는 혼자가 아닐 수도 있을 터. 적룡기마대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지금 훈련 중인 일천의 정예 기병 모두를 사용해도 좋다.”
척! 척!
자이혼과 우르칸은 말없이 예를 표했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전의(戰意)와 살의(殺意)였다. 백 마디의 말보다 더 강한 의미가 그들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흉월.”
“예, 예! 장군!”
“관부 쪽에 진행 중이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흉월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팔 할 정도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대사를 진행하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지장이 없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이곳에서 힘을 기르며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완벽하게 승리하기 위해서야.”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에 그들을 시험해 보도록. 포섭된 자들을 이용해 붉은 악귀와 관련된 것들은 모조리 싹을 잘라 내라.”
“모조리…… 라고 하시면?”
텐챠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객잔, 그와 관련된 자라면 구분 없이 모든 것을 지워 버려라. 항주에 붉은 악귀와 관련된 것은 돌멩이 하나라도 남겨 놓지 않아야 한다.”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흉월은 감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의 관부를 이용해 붉은 악귀를 몰아낸다. 텐챠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쿵!
텐챠이는 강하게 발을 구르며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이왕 시작한 일, 확실하게 끝을 본다. 전사들의 힘을 보여 주도록. 그리고 이 일의 선봉에는, 내가 직접 설 것이다.”
성큼 내딛는 한 걸음에 삼대천 세 사람이 모두 양옆으로 비켜 서서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껏 장원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북원 최강의 전사.
쿠빌라이 가의 마지막 유지(有志).
텐챠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 ☆
덜컹― 덜컹―!
“휘연……!”
장기린은 다급하게 휘연의 이름을 불렀다.
항주에서 출발한 지 사흘째. 함께 출발했던 마부는 사흘째 아침이 되던 날 지쳐서 기절하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틀 밤낮을 말들을 위한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말보다 사람이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만 것이다.
때문에 마부는 손님석에 누워 있고, 손님인 장기린이 휘연을 무릎과 팔 위에 올려 껴안은 채 마차를 모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마차를 모는 것까진 어떻게든 괜찮았으나, 휘연이 문제였다.
어자석에서 바람을 맞은 탓인지 급격히 안색이 안 좋아지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마른기침을 토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쿨럭, 쿨럭! 쿨럭, 쿨럭…….”
한 번 시작된 기침은 일다경이 넘도록 계속되다가 그 뒤에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나마도 기침이 멎었다기보단 기력이 없어서 기침도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 위로 긴 속눈썹이 위태롭게 떨렸다.
“휘연, 조금만 버텨라. 앞으로 이틀…… 아니, 하루만 더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지…….
장기린은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휘연을 떠받친 몸과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밤길을 살피는 일, 두 가지 모두에 신경을 쏟았다.
휘연에게 충격이 조금도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마차를 모는 것은 장기린에게 있어서도 절대로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육체보단 정신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은 게 사흘째가 되어서인지, 장기린의 얼굴에서도 피로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찰싹! 찰싹!
“핫!”
속도가 조금 떨어진다 싶어서 채찍질을 좀 해 주자 말들이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신 땅을 박차는 다리와 흔들리는 꼬리에선 처음 출발할 때와 같은 힘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장기린의 눈빛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말이 한계에 가까워졌다.’
사흘 밤낮을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달렸으니 말들도 지칠 수밖에 없을 터.
더군다나 등 뒤에 마차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는 것이니 더욱 힘이 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
그때, 말들을 쉬게 해 주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장기린은 시야를 가리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들려오는 소리로 봐선 말의 숫자만 해도 스물.
모두가 사람을 등에 태우고 있으며 움직이는 방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이 몰고 있는 마차였다.
‘마적인가?’
장기린의 의심은 언덕 너머로 말과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정해진 규율도 없는지 방만한 태도에 통일되지 않은 복장.
박도에, 창에, 검에…… 제각각 다양한 무기를 뽑아 든 모습은 장기린의 눈으로 보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었으나 그래도 집단으로 모여 내뿜는 기세만큼은 제법 살벌했다.
아무래도 제법 사람을 죽여 본 듯했다.
마적(馬賊).
말을 탄 도적이란 뜻이니, 그동안 이 길을 통해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저들에 의해 얼마나 욕을 보고 목숨을 잃었을까.
‘하필이면…….’
장기린은 초조한 마음이 되어 품 안의 휘연을 내려다봤다. 휘연의 숨소리가 시시각각 약해지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두두두두―
히히힝―!
“히얏! 멈춰랏―! 멈추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적들 중 가장 선두에서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공작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쓴 털보장한이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마차 주변을 원추(圓錐) 형태로 포위하고, 양쪽에서 긴 창봉으로 마차의 바퀴를 겨누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장기린은 일단 순순히 마차를 멈춰 세웠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여기서 괜히 마음만 앞세워 억지로 뚫고 나가려다가 자칫 휘연에게 충격이라도 간다면 그건 현명한 처사가 아닐 터였다.
“무, 무슨 일입니까?”
마적들의 소란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마차 안쪽에서 물어오는 마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별일 아니니 마차 안에서 나오지 마시오.”
“괘, 괜찮겠습니까?”
“괜찮소.”
장거리 이동을 업(業)으로 삼는 마부에게 있어서 마적은 사신(死神)이나 다름없는 무서운 존재였다. 마부는 영 불안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장기린의 단호한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야밤에 마차를 달리는 걸 보고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겠구나 했지!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걸 다 내놓거라! 괜찮은 여인이 있다면 함께 내놓고! 순순히 말을 들으면 내가 하룻밤만 안아 보고 돌려보내 주마!”
저속한 말투에 쓸데없이 목소리가 큰 사내였다.
주변을 포위한 마적들이 그에 호응하듯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어딨수! 형님만 입이우?”
“맞소! 우리도 돌아가면서 맛을 봐야지! 가만히 있어 보자, 그럼 이십 일은 있어야 하나?”
“와핫핫! 그러다 정들면 눌러 사는 거지!”
“맞다, 맞아!”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며 웃는 마적들의 눈에선 다 잡은 사냥감을 보는 듯한 잔인함이 감돌고 있었다.
별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마적들 중 둘 정도가 횃불을 들고 있긴 했지만, 마차까지 환하게 밝히기는 역부족이었다.
그 때문일까.
마적들은 잠자코 앉아 있던 장기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
나직한 목소리.
그리 크게 말한 것도 아니건만,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던 마적들 모두가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길을 비킬 건가, 싸울 건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강렬한 존재감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후우웅―
“엇……!”
가장 먼저 횃불이 꺼질 듯이 흔들리고,
히히히힝―!
“으엇! 가만히 있어!”
그다음엔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마차를 중심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스물스물 기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지한 마적들이라도 눈치는 있는 법.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압도된 그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무리의 중심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뭐어어―? 길을 비킬 건가, 싸울 건가? 이놈, 말하는 꼬라지 보소?”
천성이 둔한 것인지, 아니면 이변을 느끼고도 우두머리로서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투구에 꽂힌 공작 깃털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두목으로 보이는 털보장한이 억지로 말에게 채찍질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시러배 자식을 봤나. 넌 방금 그 말로 죽은 목숨이다, 이놈아! 확 배때기를 쑤셔서 창자를 꺼내 목을 졸라 버릴 새끼. 발모가지를 말 뒤꽁무니에 묶어서 십 리쯤 끌고 다녀 줄까? 그때도 네가 그딴 소릴 지껄일 수 있나 한 번 봐? 앙?”
욕으로 마적단의 두목을 뽑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대단한 입담이었다.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장기린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연,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끝날 테니.”
조심스레.
경건해 보일 정도의 동작으로 휘연을 어자석에 눕혀 준 장기린은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 단순한 동작에 마적 스무 명 모두의 시선이 자신들도 모르게 집중되었다.
“그 말은…….”
장기린은 어자석 밑에 깔려 있던 나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즉, 싸우겠다는 소리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철컹―!
삼 척짜리 지팡이가 육 척짜리 무인창(無刃槍)으로 변하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