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六章 ― 와신상담(臥薪嘗膽)
“호오, 뭐야, 그 신기한 몽둥이는!”
마적 떼의 대장은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난 무인창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스스로 모습을 변환하는 무기. 즉, 기병(奇兵)이다.
무림 고수가 아닌 바에야 마적들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무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여벌로 하나 더 가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몽둥이라…….”
장기린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편안하게 양팔을 늘어뜨렸다.
창과 몽둥이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휘연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만큼 쓸데없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죽여야 하나?’
마적 스무 명.
승부를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쉬운 상대였으나, 휘연이나 마차 안에 숨은 마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려면 조건이 조금 까다로웠다. 괜히 상대를 살려 주면서까지 빈틈을 보일 여유가 없는 것이다.
‘당 노인이 그랬지, 신병과 마병의 차이는 생각에서 만들어진다고. 나는 지금…… 휘연을 지키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 죽여도 괜찮은 것 아닐까.
더구나 상대는 마적. 앞으로 이들에게 당할 미래의 피해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모조리 없애 버려야 옳은 것이 아닐까.
‘아니, 아직은 아니야.’
휘연이 살아날 수 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아직 사람을 죽여 다시 손에 피를 묻힐 때가 아니었다.
장기린은 마음을 정하고 몸을 움직였다.
쿵! 하고 내딛는 발.
앞으로 쏘아지는 몸이 신속(神速)의 경계를 찢었다.
후우욱―!
검은색 그림자가 어두운 밤공기를 갈랐다.
한 걸음에 거리를 단축하자 공작 깃털 투구를 눌러쓴 털보장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장기린의 급격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아직까지 마차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장기린은 창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아채며 쾅! 하고 발을 강하게 굴렀다.
히히히힝―!
“으헛……!”
놀라서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갈색의 말.
마적 떼의 두목은 갑작스런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고 고삐를 놓친 채 튕겨 나듯이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뭐, 뭐얏!”
두목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덥수룩한 수염 위로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마차 앞에 있던 장기린이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란 모양이다.
게다가 강렬하게 빛나는 장기린의 눈빛을 정면에서 접하자 이제껏 이죽거렸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까진 장기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이제야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이다.
“무, 무슨……!”
거세게 흔들리는 눈에 드러난 것은 주체할 수 없는 공포.
다급하게 커다란 박도를 뽑아 들고 휘둘렀지만 이미 그건 공격이라기보다 공포에 질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쩌엉―!
장기린은 박도를 일격에 부숴 버렸다.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는 칼날.
두목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지만, 장기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냉정한 얼굴로 무인창을 휘둘렀다.
빠악! 빠각! 퍽!
“끄아아아……!”
무인창은 이름 그대로 칼날이 없는 창이지만, 그 대신 어떤 칼날에도 상하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이 있다. 병기를 부수고, 사람의 뼈를 박살 낼 수 있는 경도(硬度)는 가히 신병(神兵)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터.
북쪽 전장을 호령하던 무예에 신병이 합쳐졌으니, 애초에 마적 떼의 두목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후우웅― 부우웅―
힘차게 바람을 가르는 무인창.
장기린은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살려 주는 우(愚) 또한 저지르지 않았다.
다리를 부수고, 대퇴부를 부러뜨렸으며, 양쪽 상박의 근육을 파열시켰다.
평생 사지육신을 온전히 쓰지 못할 상처였다.
“끄어어…….”
장기린은 너무나도 큰 고통에 비명도 못 지른 채 숨만 꺽꺽거리는 두목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죽이지는 않는다. 하나, 앞으로는 무고한 자들을 괴롭히며 살아온 네 죗값을 짊어지고 살아라.”
털보장한은 결국 혀를 길게 빼물고 기절해 버렸다. 눈에는 흰자가 드러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적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더 덤빌 건가?”
장기린에게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대부분의 마적들은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으나, 대장의 곁에 있던 두 명은 달랐다.
“으아앗……!”
“히얏!!”
도끼와 창.
각각 다른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찌들어 있었다. 그래도 반사적이나마 무기를 휘둘렀으니 칭찬을 해 주어야 할까.
장기린은 무인창을 가볍게 수평으로 휘둘러 두 사람의 무기를 부쉈다.
쩡!
도끼날이 깨져서 흩어지고,
빠각!
창대가 중간에서 뚝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번개처럼 찌른 창끝에 얻어맞은 두 사람이 각자 가슴을 붙잡고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 커…….”
“커허……!”
장기린은 숨을 헐떡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무심하게 무인창을 내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멎었다. 뇌해혈(腦海穴), 목 뒤 후뇌의 침골(枕骨)을 얻어맞고 기절한 것이다.
세 사람이 덤볐으나 모두 무기가 박살 난 채 기절하여 쓰러진 셈.
장기린은 천천히 무인창을 거둔 채 마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렬한 안광, 살기 가득한 기세가 뭉글뭉글 피어올라 밤하늘을 뒤덮었다.
“도, 도망쳐! 상대할 수 없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적을 시작으로, 스물가량의 마적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렸다.
“괴물이다, 괴물이야!”
“두, 두목은……?”
“상관 마! 도망쳐!”
우르르―
히히힝―!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마적들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쫓으면 잡을 수 있을 테지만, 장기린은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바닥에 나란히 널브러져 있는 마적단 간부 삼인조를 내려다봤다.
‘시간만 낭비했군.’
장기린은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두목 쪽도, 그렇다고 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부하들 쪽도 모두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장기린이 자신이 내뿜는 기세가 어떤 건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인간이 아닌 듯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게다가 믿고 있던 두목까지 일격에 격살―그들의 눈에는―된다면, 웬만한 정예 무사들이 아닌 바에야 도망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철컹!
무인창을 다시 삼 척짜리 지팡이로 되돌린 장기린은 휘연에게로 돌아가다가 문득 얼굴이 굳어지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휘연!”
어자석에 눕혀져 있던 휘연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이마의 체온을 재 보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이었고,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약해져 있었다.
‘생기(生氣)가……!’
생기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
그것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장기린은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마지막 구명환을 쓸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약통을 열고 정신이 번쩍 드는 청아한 향기를 맡으며 휘연의 입을 벌려 혀 밑으로 약을 밀어 넣었다.
약의 효과가 금방 도는 것이지, 창백했던 휘연의 안색이 약간이나마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체온이 상승하면서 숨결도 약간이나마 강해진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구명환을 먹인 휘연은 부러진 칼을 땜질로 잠시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한 장애물을 만나거나 거친 바람을 맞으면 곧바로 다시 부러져 버릴 것이다. 이젠 정말로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차로는 안 돼.’
잔뜩 지친 말이 끄는 마차로는 절대로 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었다.
다급하게 방법을 찾으려는 장기린의 눈에, 주인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 탓인지 초조하게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덩치 큰 갈색 말이 보였다.
“마차를 부탁하오!”
“어…… 엇? 예에?!”
조용히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피던 마부가 놀라서 얼굴을 내밀었다.
장기린은 지팡이를 겨드랑이 사이에 낀 채, 양팔로 휘연을 끌어안고 곧바로 마적단의 두목이 타고 있던 말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히히힝―!
말도 등 뒤에 탄 사람이 일세의 영웅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인가.
두목의 말은 반항하지 않고 장기린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자, 잠깐만요! 손님!”
“지친 말들을 쉬게 해 준 뒤 원래의 목적지로 와 주시오.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하지만 그 아가씨는 환자가 아닙니까! 말을 타고 가면 충격이……!”
“괜찮소. 끝까지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던 방법이지만…….”
장기린은 휘연을 조심스레 한 팔로 끌어안고 지팡이 상태인 무인창을 휘연의 등뼈를 받치듯이 갖다 댔다.
그리고 눈을 반개(半開)한 채 지그시 무인창을 응시했다.
‘이걸로는 안 되겠군. 창의 모습으로…….’
지팡이의 모습으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장기린에게 있어 수많은 병기들 중 일생의 동반자를 고르라면 역시 창(槍) 하나뿐.
길고 장중한 그 모습이어야만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철컹!
“후우우…….”
무인창을 창의 모습으로 변환시킨 뒤 장기린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온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했다.
손바닥과 손끝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
울컥, 울컥.
피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으로 아랫배에서 시작된 묵직한 기의 흐름이 가슴, 심와(心窩)를 지나 어깨, 상박, 손바닥을 통과해 마침내 창대로 이어졌다.
우웅―!
순간, 창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情)과 기(氣)가 하나로 합쳐져 마침내 한 몸[身]이 된다.
병기와 정기신을 일체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신병합일(身兵合一).
비록 뜨거운 피는 흐르지 않지만, 집중된 의지와 약동하는 기(氣)의 다발로 그 흐름을 대신했다. 장기린은 손에 잡힌 창을 한 몸의 일부로 느끼고, 그 몸의 일부에게 명령했다.
‘떠올라라!’
우우우우웅―!
마침내.
창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기린이 손을 놓았음에도 무인창은 마치 누군가가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눈앞까지 올라와 수평상태를 유지했다.
창대로 허리를 받치고 있던 휘연의 몸이 평상에 누운 것처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휘연은 침상에 누운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창대의 폭은 좁았으나, 그 속에 흐르는 강력한 기의 흐름이 휘연의 몸을 푹신하고 안정감있게 감싸 안고 있었다.
“세상에……!”
옆에서 지켜보던 마부는 입을 쩍 벌린 채 말문이 막혀 있었다.
창과 사람이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르다니.
세상에 두 번 보기 힘든 광경을 보고 있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뚝, 뚝…….
하지만 그런 기사(奇事)는 공짜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장기린의 이마에는 송골송골하게 땀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는 내 천(川) 자 형태의 주름이 새겨졌고, 양손으로 고삐를 틀어쥔 그의 손등 위론 새파란 핏줄과 힘줄이 튀어나왔다.
백 명의 병사를 베고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장기린이었으나, 지금의 이 기술은 부담이 컸다. 최근에 텐챠이와 마지막 전투를 벌일 때쯤에야 습득한 기술이기에 손에 익지 않은 상태. 이렇게 잠시 버티는 것도 벅찬데 하루를 온종일 버티려면…… 차마 입을 열고 잡담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아……!”
장기린은 멍하니 그를 응시하는 마부에게 인사 대신 마지막으로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낸 뒤, 곧장 고삐를 잡아당겨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히히힝!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갈색의 말.
“꿈인지 생신지…….”
멍하니 서서 장기린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마부는 발밑에서 끙끙 앓고 있는 세 마적의 신음 소리를 듣고 현실감을 되찾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언제 마적들이 패거리를 끌고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마부는 황급히 마부석에 앉아 장기린이 달려간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어둡고 음산한 공기가 감도는 항주의 뒷골목.
남궁세가 뇌안각 항주 지부장, 남궁연은 다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누워 있는 거지와 부랑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각 전.
풍운객잔이 습격을 받고 객잔 식구들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놀라서 객잔으로 달려갔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객잔의 대문 안쪽은 이미 반파(半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박살이 나 있었고, 바닥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흥건했다.
이제껏 많은 싸움을 봐 온 남궁연으로서도 도대체 어떤 무지막지한 자가 날뛰었기에 이런 모습이 된 것인지 아연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부서진 객잔을 보러 나와 있던 ‘관리들’이었다.
항주 관청에서 나왔다는 육품계 이하의 관리들이 각각 병사 몇 명을 데리고 부서진 풍운객잔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남궁연이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말을 돌릴 뿐, 이유를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한 말이라고는,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소.”
“어허, 끈질기시군. 더 묻지 말고 돌아가시오.”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제 풍운객잔은 관청의 관할이 될 것이오. 아무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소.”
누구에게 물어도 한결같이 같은 말들뿐이어서 남궁연은 일단 그곳을 빠져나왔다.
책임 소재에 민감한 관리들은 원래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자들이 너무나 빨리 행동한다면, 그건 분명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는 뜻. 남궁연은 그것이 의아했다.
‘일처리가 유례없이 빨라. 대체 누가? 왜? 어째서 이 사건을 은폐하려 하지?’
남궁연은 그 시점에서 이 사건이 단순히 풍운객잔에 대한 원한 관계나 사적인 공격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이런 짓을 하는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해답은 쉬웠다.
항주 금선로를 항상 주시하고 있는 남궁연보다도 더 빨리 사건을 알아채고, 게다가 이런 정치적인 대응까지 했다?
남궁연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조각들이 맞춰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려 냈다.
‘흉수. 그래, 흉수야. 풍운객잔을 습격한 흉수가 직접 이 일의 은폐에 손을 대고 있어. 그래야만 이렇게 조직적인 일처리가 말이 돼. 하지만 그러면 큰일인데. 객잔의 식구들 전부를 노렸으니까, 이렇게 은폐 작업이 시작되면 그다음 대상은…….’
남궁연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곧장 뇌안각의 지부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풍운객잔의 식구들이 뒷골목의 숨겨진 명의(名醫)라 불리는 간옹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객잔 식구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직접 간옹에게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허름하고 지붕 없는 흙집…… 여기야!’
남궁연이 명의라는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뛰어들려는데, 그 순간 활짝 열린 대문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손바닥이 튀어나왔다.
“누구……!”
팟! 하고 뒤로 몸을 튕기듯이 물러나며 남궁연은 허리춤에 요대처럼 매고 있던 연검에 손을 가져갔다.
‘이만큼이나 가까이에 있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남궁연은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상대가 그녀의 목숨을 노렸다면 어땠을까?
막아 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장본인이 눈에 보이는 위치까지 걸어 나왔다.
“당신은…… 남궁세가의 소저군요.”
“……나를 아나요?”
“알고 있습니다. 풍운객잔에 있는 남궁 소협의 동생이시죠.”
남궁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탐색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귀티나는 외모에 잘생긴 얼굴, 게다가 지적인 눈빛까지 겸비한 청년이었다.
반면 차림새가 특이했는데, 검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무복에 양 팔목엔 가죽으로 만든 비구를 차고, 허리엔 보통 무인들이 쓰지 않는 커다란 장군검을 두 개나 차고 있었다.
무위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강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특히 청년의 몸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기운은 남궁연의 경지로는 도저히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결코 잊을 리가 없을 텐데.’
남궁연은 더더욱 경계하며 연검의 손잡이로부터 손을 떼지 않았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누구인지를 밝히세요.”
“제 이름은 부운화. 별호는 없습니다.”
“……!”
남궁연은 상대가 무림의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어째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해하는 남궁연에게 부운화는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대형, 아니, 장 객주님의 의동생입니다.”
“객주님의……?”
“예. 그리고 자리를 비우신 대형을 대신해 객잔의 식구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순간, 남궁연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의동생이라면 하루 이틀 된 인연이 아닐 터.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가려져 있던 장기린의 과거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키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뜻이군요?”
남궁연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부운화는 대답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잠시 남궁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남궁 소저도 알고 계시는 사실이잖습니까?”
“……무슨 뜻이죠?”
“그러니 다급하게 달려오셨겠죠. 치밀하고 냉정하며 정보를 다루는 자질이 뛰어나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은 많이 아끼는 것이…… 뇌안각 항주 지부 지부장의 성품이라 알고 있습니다.”
부운화를 시험해 보려던 남궁연은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 남자…….’
젊은 나이로 보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선 마치 백전(百戰)을 연마한 장수 같은 노련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나는 몰랐는데 말이지. 분하지만…… 완패야.’
첫인상으로서도 패배.
정보전으로서도 패배.
‘대단한 인재야. 도대체 어디서 이런 실력을 닦았을까?’
남궁연은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듯한 부운화에게 패배감을 느꼈으나, 이내 그 감정을 극복하고 밝은 얼굴로 물었다.
“좋아요, 내가 졌어요. 그럼 제가 먼저 묻죠. 오라버니는 무사한가요? 그리고 풍운객잔을 습격한 자들은 대체 누구죠?”
“……생각보다 솔직하시군요.”
“진 건 진 거니까요. 고집을 피울 시간도 없고요.”
부운화는 잠시 남궁연이라는 여인을 파악하려는 듯 예리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눈빛을 단 한순간도 피하지 않았다.
“말씀드리죠. 다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
남궁연은 깔끔한 동작으로 뒤로 살짝 물러나는 부운화를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운화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부운화는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대화를 나누는 내내 바깥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주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는 뜻.
반면에 남궁연은 놀라서 뒤로 물러서고, 설전을 벌이는 내내 대문 앞에서 주변의 시선에 노출된 상태였다.
정보를 다루는 입장에서 어느 쪽의 대처가 더 뛰어났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 졌어. 이젠…… 화가 나려고 하네.’
남궁연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운화를 왠지 화난 듯한 걸음걸이로 따라갔다.
☆ ☆ ☆
“으음…….”
새하얀, 아니, 상당히 누렇게 변색된 천을 보며 남궁휴는 눈을 떴다. 처음에 드는 생각은 눈꺼풀이 무겁다는 것, 그 뒤를 이어 느낀 것은 온몸이 무거운 돌더미에 깔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눈을 깜빡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몽롱하게 가라앉은 머릿속은 낡은 수레바퀴처럼 삐꺽거리면서 좀처럼 돌아가지가 않았다.
“깨어났어?”
“강…… 숙수님?”
“역시 안 죽었네. 저 근육질 의원이 확실히 실력은 좋은가 봐.”
운찬은 마치 남궁휴가 일어난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툴툴거리는 말투였지만, 두 눈 가득 안도감이 떠올라 있었다.
강운찬.
풍운객잔의 숙수.
남궁휴는 운찬의 얼굴을 보자 급격히 현실감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안 죽었다…… 근육질 의원…… 간옹…… 그리고……!”
그 순간,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 하나.
남궁휴는 급격히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서려고 상체를 일으켰으나, 이내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는 다시 침상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크…… 으윽……!”
남궁휴는 숨을 헐떡였다.
잠깐 몸을 일으키려 한 것만으로도 폐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 것이다.
“야야!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고 철화살을 다섯 개나 가슴에 꽂았던 놈이 뭘 믿고 일어나는 거야?”
운찬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억지로 남궁휴의 어깨를 침상에 붙였다.
남궁휴는 잠시 버둥거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점차 기억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생각났던 것이다.
“객잔은……?”
“…….”
운찬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강 숙수님…… 객잔은, 아니, 객잔의 식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꼭 알아야겠어?”
“예…… 알아야 합니다.”
남궁휴는 입으로는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항상 밝고 쾌활했던 운찬이 강 밑의 진흙처럼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어두운 안색과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을 종합해 보면…… 슬프게도 그 답을 알 수밖에 없었다.
“아칠과 아팔은 무사해. 삿갓을 쓰고 있던 그놈이 칼등으로 친 모양이야. 놀라고 충격을 받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나서 지금은 평소랑 다를 바가 없어.”
“그렇…… 습니까?”
기쁜 소식이었으나 남궁휴는 웃지 못했다.
아픔이 가득한 운찬의 표정은 그 뒤에 이어질 슬픈 소식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도 괜찮다고 했어. 지금은 안 계시지만, 근육질의원이 너는 천운으로…… 뭐라더라? 요, 요혈을 다 피해 갔다고 하더라고. 왼팔도 깔끔하게 부러져서 무리하지 않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고, 화살이 관통한 것도 환부의 처리가 다 끝났으니 앞으로 약으로 내상만 다스리면…….”
“강 숙수님.”
“아참, 의원을 불러와야겠네. 네가 깨어나면 알려 달라고 아까 말을 했…….”
“강 숙수님!”
침상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 게다가 지친 기색이 완연했으나, 남궁휴는 강한 눈빛으로 운찬을 응시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셨습니까?”
“……침모님이, 다쳤어.”
“침모님이……!”
운찬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아칠과 아팔이 쓰러지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똑똑히 기억이 나. 삿갓을 쓴 놈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더니, 침모님과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뒤에 객주님이 나타났는데…….”
“예? 지금 객주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객주님이 나타나셨어. 거짓말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났단 말이야.”
“그런데도…….”
“그래, 그런데도…… 그런데도…….”
운찬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남궁휴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의 기억 속의 장기린은 무적이었다.
아직 만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이나 상황도 쾌도난마로 헤쳐나갈 수 있는 초인(超人)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데도…… 그 정도로 그자들이 강하단 말인가!’
갑작스레 풍운객잔을 덮쳐 왔던 세 남자.
삿갓의 사내, 거구의 사내, 이국적인 복장의 사내.
남궁휴는 그들을 보자마자 강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지만, 잠깐 싸우고 곧바로 쓰러져 버렸기에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장기린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장기린에게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대적(大敵)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침모님은……?”
“일도에 가슴이 갈라지셨어. 의원은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상세라며 사흘을 버티기도 힘들다 했고…….”
“사흘이라니……!”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백연을 열흘이나 살려 놓았던 것이 간옹이다. 그런데 그가 사흘이라 말했다면 진휘연의 상세는 얼마나 지독했다는 말인가.
“아아, 침모님……!”
남궁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풍운객잔의 침모, 진휘연.
그녀는 풍운객잔의 진정한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객잔 식구들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녀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단다.
객주님은 얼마나 슬프고 초조하실까. 살아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도록 자신은 무엇을 했느냐는, 극심한 자괴감이 남궁휴를 덮쳤다.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단련을 해 왔던 겁니까!”
한때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한때는 객주님을 대신해 객잔을 지키기 위해.
하지만 그중 무엇도 이뤄 내지 못했다.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강 숙수님……?”
“너는 그래도 모든 것이 회복이 될 거야. 앞으로 객잔을 지킬 만큼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운찬의 목소리는 마치 애써 울음을 참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남궁휴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가 정신을 잃기 직전, 거구의 사내에게 용감하게 달려들어 걷어차려고 했으나 주먹에 얻어맞고 다리가 처참하게 꺾어지던 운찬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마……!”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는 남궁휴.
그의 눈에 하얀 천으로 칭칭 감겨 있는 다리와 다리를 대신해 그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는 긴 지팡이가 보였다.
“뼈가 부러지면서…… 근육과 신경을 모두 끊어 놨대. 다행히 다리를 잘라 낼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도 평생 똑바로 걷기는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 방도가 없는 겁니까?”
“자기가 알기론 없다는데, 아마 저 사람이 모르면 방법이 없다는 거겠지.”
“……!”
누가 봐도 신의(神醫)의 경지에 거의 올라선 간옹이었다.
그런 만큼 그가 모른다면 세상 의원들 대부분이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괜찮아. 나는 숙수고, 요리를 하는 데는 양팔만 멀쩡하면 충분하니까. 하지만…… 정말 그걸로 되는 걸까?”
마지막 말에 섞인 운찬의 감정을 남궁휴는 너무나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몸으로…… 객잔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괜히 형님께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강 숙수님, 약해지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어. 그자들을 봤는데……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꼈는데…….”
질끈.
남궁휴는 결국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말았다.
도저히 지금은 운찬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거기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은혜를 갚고 싶은 자.
진실된 가족에게 있어 짐이 되는 입장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아픈 느낌이었다.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잔인하고 강한 형벌(刑罰)이었다.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말.
한때 무인이었고 지금도 무공을 수련하는 입장에서 그만큼 뼈저리게 가슴에 파고드는 말이 또 있을까.
‘무인. 즉, 무공…….’
그 순간, 남궁휴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쓸개를 씹는 듯한 지독한 고통과 함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기운.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의 호연지기(浩然之氣)였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남궁휴는 눈을 번쩍 떴다.
이래 봬도 무가의 자식.
아무리 집나간 탕아라 해도 근본이 되는 심성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된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다음을 기약하고 버텨 내는 것이…… 그가 미워하면서도 존경해 마지않는 그의 아버지 창천대협(蒼天大俠) 남궁무원의 가르침인 것이다.
“사람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게 상인이라면 돈일 것이고, 관리라면 권력, 무인이라면 강력한 무(武)가 될 것입니다.”
“뭐……?”
“강 숙수님, 당신은 무인입니까?”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바로 운찬을 응시하는 남궁휴.
운찬은 질문의 내용에 놀라 움찔 놀라며 허둥거리다가 이내 석상이 된 것처럼 멍하니 굳어 버렸다.
“무인? 내가?”
운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난 숙수라고. 요리를 하는 숙수. 평생 칼이라곤 요리를 할 때 쓰는 식칼을 제외하곤 써 본 적도 없어.”
“저는 하인입니다. 평소엔 식칼은커녕 싸리비와 걸레 말고는 손에 무언가를 들 일이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무인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무인이라 말하는 남궁휴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슴속에 강한 신념을 가진 자들 특유의 곧은 눈빛이 운찬에게로 향했다.
“너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넌 무림에서 유명한 남궁세가의 자식이었잖아? 그러니 무공도 배웠을 테고…….”
“무공이라…… 그렇게 따지면 강 숙수님도 무공을 배웠습니다.”
“어? 내, 내가 언제?”
“설마 무공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옥룡파의 파락호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항주 금선로의 파락호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다른 지역의 파락호들처럼 단순히 완력이 좀 강하다고 해서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걷는 법, 숨 쉬는 법,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법까지. 저는 그것들을 익히고 엄청난 무공의 증진을 이뤘습니다. 객주님께선 그게 무공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럴 리가 없죠.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을 뿐, 대단한 신공절학일 것이 분명합니다.”
“잠깐, 그게 다 무공이었다고?”
“예. 강 숙수님은 그것을 배웠고, 그 덕분에 옥룡파의 파락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겁니다. 강 숙수님은 이미 무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운찬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장기린이 가르쳐 주는 것들도 오로지 활검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배웠던 운찬이다.
그에게 있어서 무공이나 무림인이라는 것은 전혀 별세계의 이야기였을 터.
남궁휴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크…… 으우으……!”
“휴! 너……!”
운찬이 황급히 말리려고 했으나 남궁휴는 강한 눈빛으로 그를 제지했다.
다친 부위에서 느껴지는 고통.
분명 굉장히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가 느끼는 무력감보다 괴롭지는 않았다.
“크으으으으……!”
남궁휴는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 실핏줄이 터질 만큼 고통스러웠으나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놀란 얼굴로 남궁휴를 쳐다보는 운찬.
남궁휴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고통을 곱씹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의지를 불태웠다.
“강 숙수님.”
“어?”
“아니, 강 형.”
“……!”
남궁휴의 말투가 바뀌었다.
장난을 칠 때조차 고수했던 ‘하인’으로서의 공손함을 버리고 그 대신 목소리에 의형제 사이와 같은 친근함이 담겼다.
“침모님은…… 살아나기 힘드시겠죠? 그리고 그때의 침입자들에 의해서 풍운객잔도 영업을 하기 힘들 만큼 부서진 것 아닙니까?”
“그건…….”
운찬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 힘든 듯 대답하지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럼 지금 당장은 풍운객잔을 다시 열기는 힘들 겁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침입자들은 우리들 모두를 노렸습니다. 분명 멀쩡히 장사를 시작하면 다시 우리를 노릴 겁니다.”
“그건 개, 객주님이 어떻게든…….”
“아뇨, 이번엔 힘듭니다.”
남궁휴는 단언했다.
“이번 일은 객주님께서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적은 객주님만큼이나 강하고 그분에겐 지켜야 할 ‘짐’이 있습니다.”
“……!”
“강 형은 그걸로 된 것입니까? 숙수라는 자리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나는…….”
“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객잔의 ‘식구’로서…… 도움은 못될망정, 제가 그 짐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 번에 많은 말을 내뱉은 탓일까, 남궁휴는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저는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지금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제대로 된 비기(秘技)들을 배워 객주님이 없더라도 풍운객잔을 지킬 수 있는 무공을 키울 것입니다.”
“……그래.”
운찬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어? 아니, 뭐, 잘 생각했구나 싶어서…….”
“강 형도 같이 가시죠.”
“……어? 뭐라고?”
“함께 저희 가문으로 가시죠. 저는 가문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지만, 그래도 강 형 한 사람 정도는 책임질 수 있습니다.”
“무, 무슨 소리야?”
“함께 무공을 익힙시다. 강 형은 숙수가 천직이지만, 동시에 무인이기도 합니다. 객주님께 짧은 기간 배웠는데도 그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을 보면 재능도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제대로 된 무공을 돌탑을 쌓듯이 기본부터 하나하나 쌓아 나가면 분명 크게 될 수 있습니다.”
운찬은 잠시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날 더 괴롭게 만들지 마!”
“강 형…….”
“내 나이가 벌써 이십대 중반이야. 무공 같은 건 어릴 때 시작해야만 하는 그런 게 있잖아! 나도 옥룡파 놈들을 때려눕히고 잠깐 들떴지만…… 이젠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나는 그런 괴물들을 봤다고. 내가 아무리 잘 몰라도 그게 노력을 좀 한다고 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
“…….”
“게다가 내 다리를 봐! 의원이 나는 앞으로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다고 그랬어! 그런 놈이 무공은 무슨! 그나마 손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 숙수로서의 기술이나 연마해야 한다고!”
운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분한 마음은 똑같지만 운찬은 남궁휴에게는 없는 장애를 몇 가지나 더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에 시작하지 못한 무공.
불구가 되어 버린 한쪽 다리.
게다가 얼마 전에 목격해 버린…… 너무나 절망적으로 차이가 나는 괴물의 존재.
숙수가 그의 천직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객잔의 남자 식구로서 객잔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남궁휴는 그런 운찬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강 형, 남궁세가에는 식객(食客)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식객?”
“세가 안에서 함께 지내면서 세가의 일들을 돕는 분들인데, 그중 독각풍권(獨脚風拳)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독각이라면……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거야?”
“예. 다리 한쪽이 잘려서 불구가 되신 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빠른 각법과 권법으로 호북제일권(湖北第一拳)의 칭호를 얻으신 분입니다. 양다리가 멀쩡한 놈은 제자로 안 받겠다면서 이상한 고집을 세우고 계신 분이죠.”
“……!”
“제가 부탁드리면 제자로 받아 주실지 모릅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남궁세가가 가진 무공 중에 강 형에게 어울릴 것을 골라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아까 말했듯이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남궁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어안이 벙벙해진 운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함께 강해집시다, 강 형.”
“휴……!”
“와신상담(臥薪嘗膽)입니다. 쓸개를 씹는 고통을 견디고 우린 강해져야만 합니다.”
아직 잘 안 움직이는 몸을 애써 움직이며 천천히 손을 내미는 남궁휴.
운찬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남궁휴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마주치는 눈동자.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엔 앞으로 강해지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거기까지 말한다면 이야기는 쉽겠네요. 잘 결정했어요, 오라버니.”
“연……?!”
놀라서 돌아보는 두 사람.
남궁휴와 운찬의 눈에 지금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남자의 무복을 걸쳤으나, 누가 봐도 여성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지적인 눈매의 아가씨.
남궁연.
남궁휴의 동생이자 남궁세가의 정보를 담당하는 뇌안각 항주 지부의 지부장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