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71화 (120/686)

第六十八章 ― 검선조우(劍仙遭遇)

초광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깊은 외지.

지도에조차 나와 있지 않은 구석진 지역으로 향하는 한 기의 기마가 있었다. 그 말은 한때 두목의 기마였던 것답게 크고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먼 거리를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귀가 축 처지고 혀를 빼물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인데도 계속해서 빠른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말의 등 위.

한 사내가 양손으로 고삐를 쥔 채 창백한 안색으로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장기린이었다.

그는 금선로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항상 태연자약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온몸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지독한 모습이었다.

볼은 움푹 파였고, 눈밑은 시커멓게 죽었으며, 얼굴은 허옇게 질린 게 마치 시체와도 같았다.

게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 그의 입술 옆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이를 얼마나 강하게 깨물면 핏물이 흐를까.

또 그렇게 이를 억척스럽게 깨물게 만드려면 얼마나 큰 고통이 있어야 할까.

천하의 장기린을 그렇게 괴롭게 만든 이유는 명백했다.

바람이 쌩쌩 부는 달리는 말 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허공에 떠 있는 한 자루의 창.

그리고 그 위에서 잠이 든 듯 정신을 잃고 있는 휘연이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큭…….”

결국 참다 못한 장기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휘청― 하고 창이 흔들렸지만, 장기린이 재빨리 정신을 집중하며 눈에서 독심 가득한 안광을 번뜩이자 허공 중의 창이 다시 균형을 되찾았다.

오늘로 이틀째.

이기어창의 수법을 잠시도 쉬지 않고 전개하고 있는 장기린은 설령 무림의 고수들이 보더라도 깜짝 놀랄 만한 끈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창을 허공에 띄워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에 실린 진기가 마치 푹신한 보료가 깔린 침상처럼 휘연의 몸을 안전하게 떠받들고 있었다. 그랬기에 몸 상태가 극히 불안정한 휘연이 이곳까지 별 탈 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장기린이 감수해야 했던 대가는 굉장히 컸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버텨라, 휘연.’

장기린은 초점이 흐릿해지려는 눈에 애써 힘을 주며 말안장에 달린 박차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히히히힝―!

갈색 말은 마지막 기력을 다해 울부짖으며 더욱 속력을 올렸다.

붉은빛의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

어느새 이틀째의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장기린이 흑신의 우문환과 신장 당 노인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뒤, 이미 해가 다 저문 다음의 일이었다.

은은한 호롱불이 일렁이던 단아한 초옥 안쪽에서 말발굽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곧바로 뛰쳐나왔다.

노년이 무색할 만큼 당당한 체구에 백발백염,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당 노인.

그리고 회색빛 허름한 마의를 입고 반백의 머리에 대춧빛처럼 붉은 얼굴을 가진 노인은 흑신의 우문환이었다.

그들은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말을 타고 나타난 장기린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객주님?!”

하지만 당 노인과 흑신의보다도 먼저 장기린을 알아보고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맑고 영롱하면서도 날카로운 면이 있는 목소리.

풍운객잔의 장기 투숙객이자 휘연을 친언니처럼 좋아하고 따르던 구양화였다.

그녀는 생기가 빠져나간 듯 초췌한 몰골의 장기린을 보며 놀라서 달려오다가 공중에서 웅웅― 거리는 진동을 토해 내며 떠 있는 창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라고, 그다음엔 그 창 위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휘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어, 언니!”

이미 장기린의 분위기를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한 구양화였다.

그녀는 떨리는 눈빛으로 당장에라도 장기린에게 달려들 듯이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어, 언니가 다쳤나요?”

장기린은 그에 대꾸하지 못했다.

휘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구양화가 반갑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과 그의 몸 상태는 화급을 다투고 있었다.

우웅…….

천천히, 공중에 떠올라 있던 창이 아래로 내려오고, 마치 장중보옥을 대하듯 조심스런 동작으로 창과 휘연을 함께 받은 장기린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휘청―

그 순간,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서 다리가 탁! 풀렸지만, 장기린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버티고 섰다.

앙다문 입술 끝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기를 다 소모하고 진원진기까지 끌어내 위험한 상황이 된 장기린.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이라 품에 안고 있는 휘연과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심각한 상태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으나 장기린은 무시무시할 만큼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쿵, 쿵!

장기린은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딛어 흑신의 우문환의 앞으로 걸어갔다.

“부탁드리겠소. 휘연을 살려 주시오.”

“자네…….”

우문환은 침중한 안색으로 자신의 그리 길지 않은 반백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의원 생활 십 년이면 웬만한 무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환자들의 안색을 살펴 성격과 생활 방식을 알아내며, 그것을 통해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것이 의원이 하는 일이다.

즉, 의원의 진료란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을 십 년쯤 하다 보면 웬만한 무당보다 훨씬 더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이 당연한 일.

우문환이 보기에 장기린이라는 사내는 태산처럼 높은 산 위에서 살아가는 한 마리의 매와 같은 사람이었다.

고고하고 강하지만, 철저하게 외롭고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스스로 장애물을 뚫고 해결책을 찾아낼 사람이지,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부탁할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그런 장기린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자결을 하라면 자결까지 할 것처럼 절박한 분위기였다.

우문환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이 격동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자네 모습도 심상치가 않아. 일단 소저를 내게 건네주게.”

우문환이 휘연을 건네달라는 듯 양팔을 내밀었으나,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저은 뒤 초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휘연을 맡기지 않겠다는 듯한 행동.

아니, 적어도 침상에 눕히는 순간까지는 그가 안고 있겠다는 듯한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

그 모습을 보며 구양화의 입에서 감탄과 신음이 섞인 소리가 흘러나오고, 당 노인과 우문환이 무거운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장기린이 조심스런 동작으로 휘연을 초옥 안의 침상에 내려놓자 그녀의 안색을 살핀 우문환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어떻게 지금껏 살아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군.”

우문환은 안 그래도 대춧빛이었던 안색을 더 붉게 물들이며 다급하게 휘연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크흠!”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당 노인은 제자리에서 뒤로 돌아섰다.

아무리 늙어 가는 노인이라고는 하나 의원도 아닌데 함부로 젊은 처자의 몸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도 적광의 제자의 솜씨군. 상처를 미리 처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생기가 너무 상했어. 구명환을 썼는데…… 보자, 한 개가 아니군. 두 개나 사용해서 억지로 명을 이어 놨어.”

이번에도 역시나 일견(一見)에 모든 것을 알아채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의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심각한 기색으로 휘연의 상체에 난 상처와 안색, 그리고 손목의 맥박을 확인한 우문환은 깊고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어째서 안 되는 것이오?”

장기린은 우문환의 난감한 표정과 슬픈 눈빛을 보고 이미 그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우문환의 말을 중간에 자른 장기린은 창백한 안색 위로 강렬한 안광을 빛내며 따지듯이 물었다.

“백연과 다를 게 없었소. 아니, 독에 중독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더 나은 상태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신의라고 불리는 분이 고칠 수가 없는 것이오?”

“으음, 상처의 경중은 사람에 따라 다르네. 같은 상처를 입어도 며칠이면 거뜬하게 일어나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반대로 그 상처에 사경을 헤매다 픽, 하니 쓰러져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지.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라네. 여기 있는 소저는 백연과는 달라.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란 말일세.”

우문환은 침중한 낯빛을 지우지 않은 채 휘연을 내려다봤다.

“이 소저는 상처를 입은 순간 이미 죽을 운명이었어. 그걸 그나마 적광의의 제자가 구명환을 두 개나 쓰면서까지 억지로 연명해 두었지만…… 이미 구명환의 기운과는 상관없이 이 소저의 진원진기, 즉 생명의 근원적인 기운이 다 소모되어 버렸네. 백연은 어릴 적부터 혈맥을 단련해서 진원진기의 크기부터가 남다른 사람이지만, 이 소저는 그렇지가 않아. 그러니 내 솜씨로는 도저히 회생을 시킬 수가 없네.”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이오?”

“의원이 하는 일이란 최대한 사람의 생기를 북돋아 주고 회복을 돕는 것이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역천(逆天)의 행위가 아닐세.”

“큭…….”

장기린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번뜩이는 눈빛.

피처럼 붉고 밤하늘처럼 어두운 기운이 장기린의 몸 주변을 잠식했다.

“헛……!”

“아앗……!”

주변에서 대번에 헛숨을 삼키는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장기린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너무나 강력하고 무시무시했다.

온몸을 타고오르는 전율.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살벌한 눈빛.

휘연이 죽게 될 거라는 결과를 들은 것만으로도 마치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버린 양 어두운 기운에 휩싸인 장기린이 그들의 눈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기운을……!’

‘도대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 소저가 죽는다면 큰 일이 벌어지겠구나!’

구양화, 당 노인, 우문환. 세 사람은 제각각 장기린의 생소한 모습에 크게 놀라면서도 속으로 불안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귀신 같은 살기를 내뿜는 장기린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얼마나 큰 피를 몰고 올 폭풍이 불어닥칠까.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으음…….”

우문환의 심각하게 가라앉은 신음 소리가 복잡한 그의 내심을 말해 주었다.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그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천명을 어기라는 천명. 이것도 또한 천운인가…….”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장기린에게 손짓을 했다.

“방법이 있을 듯하니 자네는 살기를 거두게.”

“무슨……!”

여전히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렁이는 장기린의 눈빛이 우문환을 향했다.

방법이 있다니.

그렇다면 살릴 방법이 있음에도 조금 전엔 없다고 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어째서 그것을 숨겼던 것이오?”

장기린은 대답 여하에 따라 손을 쓸 수도 있다는 듯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정면에서 그 살기를 모조리 받은 우문환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목숨을 포기한 것처럼 초탈한 모습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일세.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실패할 확률이 구 할이 넘는 방법일세. 게다가 그것도 ‘죽지 않게’ 할 뿐, 살린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한 가지 신념을 지켜 왔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내 모든 능력을 사용하지만, 절대로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나 시험적인 방식으로 환자의 생명을 다루지 않는다는 게 바로 그것이지.”

장기린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져 갔다.

하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휘연을 다치게 한 텐챠이와 하시르, 원의 잔당들에 대한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와 원망.

그 모든 것을 가슴에 애써 묻은 채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네는 어떻게든 이 소저를 살리고 싶을 테지?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닌가?”

장기린이 그에 대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우문환은 품속에서 황금색 침통을 꺼내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휘연의 몸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두개골 위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에서부터 가슴, 하복부, 회음부를 지나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까지.

온몸에 수백 개의 금침을 빼곡이 꽂아 넣는 우문환의 모습에선 마치 득도한 고승이 일만 자가 넘는 불경을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새기는 듯한 숭고함과 결연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후우…….”

우문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의까지 벗기는 바람에 같은 여자임에도 고개를 돌렸던 구양화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휘연에겐 수백개의 금침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온몸에 꽂혀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장기린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휘연이 숨을 내쉴 때 만들어지는 가슴의 기복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혹시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휘연의 숨소리가 작고 낮아질수록 그녀의 안색은 평온한 기색을 띠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오?”

장기린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묻자 우문환은 여전히 침중한 안색이지만, 또한 노인답지 않게 무언가에 도전하는 듯한 패기 넘치는 눈빛을 뿜어내며 답했다.

“사람이란 언제나 생기를 소모하며 살아가는 존재이지. 태어날 때는 생기로 충만한 원정(原情)과도 같은 상태로 세상에 나오고, 그 뒤로는 마치 등잔에 담긴 기름이 불꽃을 태울수록 점차 줄어들 듯이 생기를 소모해 가는 법이네. 사람은 그렇게 늙어 가고, 그렇게 죽는 것이지. 무공을 익히고 몸을 단련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오래 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세.”

설명을 하면서도 우문환의 손길은 멈추지를 않았다. 안쪽에서 빻아 둔 약초를 가져오고, 그 약초들을 배합하는 손놀림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능숙하고 정확했다.

“그리고 그 생기의 소모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호흡(呼吸)! 숨을 빠르고 격하게 쉴수록 타고난 생기는 더욱 빨리 소모가 되곤 하네. 내쉬는 숨이 많으면 생기도 많이 빠져나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 그런 것들은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 거북이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네. 거북이의 맥박은 사람의 것보다 훨씬 느리고 깊지.”

“그래서 휘연의 맥을……?”

“그렇다네. 일부러 맥을 늦추고, 오장육부와 신체의 활동을 느리게 만들었지. 그 덕에 생기가 소모되는 속도도 다섯 배 이상 늦춰졌을 걸세.”

사람의 호흡을 느리게 만들고, 그를 통해 신진대사의 속도 또한 늦춘다.

말은 쉽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껏 신의(神醫)로서 보여 준 그의 능력 중에서도 가장 불가해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들게.”

우문환은 자신이 직접 배합한 약초 가루를 휘연의 입속에 밀어 넣으며 갑작스런 말을 꺼냈다.

“무엇을……?”

“뭐긴 뭐겠나. 여기에 있는 소저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못 맡기는 것처럼 굴지 않았나.”

“휘연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야 하는 것이오?”

“그렇다네. 오히려 여기부터가 가장 중요하지.”

우문환은 심각한 안색으로 휘연의 안색을 살피며 이번엔 자신의 품 안에서 어떤 환약을 하나 꺼내 장기린에게 건네주었다.

“자네 역시 원정이 손상될 만큼 큰 고초를 겪어 지금 서 있기도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만, 그래도 여기에 있는 소저는 한시가 급하니 조금만 더 참아 주게. 그 환약은 몸에 혈액순환을 돕고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데 효과가 있으니 도움이 될 걸세.”

장기린은 건네받은 환약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딱딱한 곡물과도 같은 것들이 오도독 씹히며 목구멍을 통해 넘어갔다. 목을 넘어가자마자 몸이 뜨끈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신의가 지어 준 약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장기린은 휘연의 몸을 안아 들었다.

조용히, 온 정성을 다해서.

초옥 밖으로 먼저 나서는 우문환의 뒤를 따라 장기린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우문환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초옥의 뒤쪽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산이었다. 당 노인과 우문환이 함께 지내는 초옥은 명당자리의 기본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철저히 지키는 위치에 지어져 있었는데, 등 뒤에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바위산이 있고 앞에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을 만큼 힘차고 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울창하게 나 있는 수림을 지나 산줄기가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는 방향으로 이각가량 걸어간 우문환은 사람의 키만큼 자라 있는 풀과 바위들로 교묘하게 가려진 입구를 통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사람들이 찾기 힘들 만한 위치.

게다가 동굴의 입구 앞에 서자마자 온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은 범상치가 않았다.

‘빙굴(氷堀)?’

양팔로 휘연을 안고 조심스레 걸어가던 장기린은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입구는 상체를 반쯤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막상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만큼 높고 넓은 통로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안쪽에선 끊임없이 바람이 흘러나왔는데, 동굴의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을수록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냉기가 점점 강해졌다.

‘자연적인 동굴인 것 같은데, 굉장히 깊다.’

장기린은 신기함을 느꼈다.

보통 자연적인 동굴은 모두 만들어지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강의 지류가 흐르는 통로에 산이 있다든가,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가 있는 지점이라든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물’과 연관이 되어 있을 때 동굴이 생성된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아무리 봐도 구석진 곳이라 산에서 흐른 물이 고일 만한 위치도 아니고, 근처의 강물과는 산을 중간에 두고 등지고 있으니 강물이 흐를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물론 수백, 수천 년 전에 강물이 흘렀다면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강물의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동굴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이곳은 빙한지기가 자연적으로 모여드는 용굴(龍堀)일세.”

그런 장기린의 심산을 짐작한 것인지 우문환이 걸음을 내딛으며 설명해 주었다.

“용굴이 무엇이오?”

“용굴은 전설에 따르면 용이 승천을 하기 위해 살았던 동굴이라고 하지. 보통 대부분은 빗물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가짜이지만, 가끔 이렇게 자연적으로 기를 모으는 지맥(地脈)에 있는 것들은 진정 용이 살았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네.”

“용…….”

“허황되어 보이지만 실존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그리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약초의 대부분은 음한(陰寒)한 곳에서 자생하며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으니 나에게 이곳은 보고(寶庫)나 다름이 없네.”

우문환의 말대로 동굴의 곳곳에서는 밖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풀들이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기화요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요초(瑤草)는 곳곳에 있는 것이다. 우문환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풀들이 약초였다.

분명 눈에 보이는 구멍이나 통로는 없는데도, 신기하게 동굴 안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을 만큼의 불빛과 상쾌한 바람이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약초가 자생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가?’

문득, 당 노인과 우문환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당가 녀석한테도 말하지 않은 거네만, 내가 지금 개발하고 있는 의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곳이 꼭 필요하네.”

그 말을 듣자 뒤따라오던 당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당가야, 네가 만들어 준 철 상자 말이다. 기억하느냐?”

“철 상자? 아, 혹시 제련된 강철에 안에 모래를 담은 가죽으로 덧대던 그것 말이냐?”

“그래, 저것 말이다.”

우문환이 가리키는 방향엔 척 봐도 냉기가 풀풀 날리는 차디찬 물웅덩이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엔 마치 검(劍)처럼 은백색의 질감을 가진 철 상자가 놓여 있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물과 가까운 곳에 철로 된 물건을 놔두면 쉽게 녹이 슬고 변색되는데,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철 상자에선 그런 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이 빙굴에 흐르는 냉기가 묘한 기류를 타고 그 철 상자의 주변에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 만들고 나서 어깨에 짊어지고 산속에 들어가기에 미리 관이라도 짜 두는 건가 싶었는데, 이런 곳에 숨겨 두었던 거로구만.”

당 노인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자신이 직접 만든 강철 상자를 이런 곳에 두고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다니, 궁금증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우가야, 너는…….”

“잠깐, 이 소저는 한시가 급하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문환은 당 노인의 말을 끊은 뒤 일단 장기린을 이끌고 가서 철 상자의 뚜껑을 가죽을 칭칭 감은 손으로 조심스레 개봉했다.

그러자 확― 하고 밀려 나오는 냉기!

마치 뿌연 김이 서린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피어오르는 상자의 안쪽엔 모래가 채워진 푹신해 보이는 가죽과 매끄러운 비단천이 깔려 있었다. 우문환이 그 안에 휘연을 내려놓으라고 말했으나 장기린은 잠시 망설였다.

이 철 상자는 당 노인의 말대로 관처럼 생긴데다가 척 보기에도 지극히 차가워 보였다.

특히 얼음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곳에 놓인 철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자칫 피부가 뜯겨져 나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 휘연을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괜찮네. 나를 믿어 주게나.”

하지만 우문환의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눈빛을 보자 결국 장기린은 휘연을 상자 안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휘연을 내려놓으면서 슬쩍 안쪽에 덧댄 가죽과 비단천을 손으로 만져 보니, 놀랍게도 그곳에선 냉기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한 온도가 느껴졌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고 했네. 찬기운은 본래 아래로 내려가고 뜨거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는 법. 즉, 차가운 기운이 머리 위에 있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히 뒤섞이며 태극을 이룬다는 뜻일세.”

우문환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준비해 온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내 준비하기 시작했다.

약초를 말려 갈아 놓은 가루.

새카만 색깔의 고약과 흰빛이 도는 의문의 액체.

우문환은 그것들을 마치 방물장수처럼 바닥에 쭉 펼쳐 놓고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양손에 재료들을 묻히기 시작했다.

“엇……?”

지켜보던 구양화의 입에서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약물을 준비했다면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양손에 덕지덕지 처바르는 우문환의 행동은 지금껏 그가 보여 준 섬세한 의술과는 정반대로 보였던 것이다.

“쉿!”

구양화는 질문을 던지려고 했으나 당 노인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노인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문환은 신의라 불리는 사람이다. 언제 어떤 환자를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하던 사람이, 지금 자신의 양손에 약재를 바르면서는 어깨가 부들부들 떨릴 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 가, 이놈아.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당 노인은 우문환을 사십 년이 넘도록 봐 왔지만 이렇게 몸을 떨 만큼 긴장하는 모습은 미숙했던 이십대 시절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신의, 당신은…….’

장기린 역시 그런 우문환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째서 방법이 없다고 했는지, 그리고 되도록 이 시술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문환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면서까지 휘연을 살리기로 마음먹었고,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기도뿐인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면 이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간절한 심정으로 휘연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기린의 눈에 약재를 잔뜩 발라 회색으로 변한 양손을 활짝 펼치고 천천히 호흡을 하는 우문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말없는 침묵 속에서 기다린 것이 일각가량.

손에 바른 약재가 진흙이 마르듯이 딱딱하게 굳어져 갈 때 즈음, 우문환은 천천히, 그리고 결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연의 온몸에는 그가 꽂아 둔 금침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신진대사를 느리게 하고 생기가 적게 빠져나가게 만드는 침들이다.

우문환은 그 침들을 먼저 꽂았던 순서대로 한 번씩 손을 대서 반의반 푼가량 더 깊이 박은 뒤, 다시 처음에 꽂아 두었던 백회혈의 침으로 돌아와 눈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후우웅―

‘이건……?’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회혈에 꽂힌 침을 잡은 우문환의 손으로 주변의 냉기가 빨려드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건 마치 항아리에 물을 붓듯이 침을 통해 기를 불어넣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대롱으로 물을 빨아먹듯이 기를 빨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우문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결연한 얼굴로 집중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마와 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의 손끝을 통과하는 섬세한 기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었다.

‘저것도 의술인가?’

장기린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마치 와류(渦流)처럼 우문환의 손끝에서 휘돌고 있는 기의 흐름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의술이란 보통 약을 통한 처방이나 침으로 혈맥과 기를 통제하는 방법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간옹처럼 살을 찢고 꿰매는 것도 의술이겠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에 해당했다.

지금 우문환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방법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방법이 성공하고, 그 방법이 세상에 흘러나간다면 모든 의가(醫家)에서 큰 소란이 일어날 터였다.

파직! 파직!

‘불꽃?!’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양기(陽氣)와 음기(陰氣).

그 모든 것이 와류처럼 휘어지며 뒤섞인 탓일까?

우문환의 손끝에선 마치 번개를 축소해 놓은 것처럼 작은 불꽃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문환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은 그가 왜 양손에 직접 약품을 발랐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스윽―

“후우…….”

모두의 놀라움 속에서 한참이나 손끝으로 침을 붙잡고 있던 우문환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백회혈에서 침을 뽑아냈다.

이제 겨우 하나가 끝난 것이다.

우문환은 ‘스읍―!’ 하고 크게 쉼호흡을 한 번 하더니, 시선은 여전히 휘연에게 향한 채로 입을 열었다.

“당 가야, 화아를 데리고 나가 있어라. 이건 하루를 꼬박 새며 집중해야 하는 시술이다. 옆에서 시선이 있으면 방해밖에 안 돼.”

그래도 장기린더러 나가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의 깊은 애정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당 노인은 머뭇거리는 구양화를 데리고 묵묵히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깊고 차가운 빙굴 안은 고요함 속에 잠겼다.

차분히 다음 순서의 침을 잡아 가는 우문환의 손길과,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장기린의 시선 속에서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 뒤로 몇 시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기린은 심신이 모두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시술이 시작되기 직전 우문환에게 건네받았던 환약의 힘으로 지금껏 버텨 낼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자기자신이 아프고 힘든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하나하나 뽑혀 나가는 금침과 그때마다 점점 더 초췌한 모습이 되어 가는 우문환.

그리고 시술이 진행될수록 호흡이 눈에 띄게 느려지는 휘연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지켜보느라 다른 데에 신경을 쏟을 정신이 없던 것이다.

우문환의 시술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뇌전이 번뜩이는 손으로 기를 대류(對流)시키면서 뽑아내던 침이 이젠 마지막 용천혈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마지막 침이 새하얀 발바닥으로부터 빠져나오고, 그 순간, 마치 부처를 만난 것처럼 진한 후광이 휘연의 몸을 덮었다가 마치 신기루처럼 곧바로 사라졌다.

꾸웅.

기력이 다한 것일까.

우문환은 용천혈의 침을 뽑자마자 휘청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숨을 쌕쌕거렸다. 하룻밤을 꼬박 새면서 집중을 하였으니 더 이상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자신의 시술이 성공했는지 확인하겠다는 집요한 신념으로 끝까지 목을 쭉 빼고 철 상자 안의 휘연의 안색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되었소?”

가까이 다가와 묻는 장기린의 목소리는 가뭄 때의 논바닥처럼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우문환은 잠시 끈질기게 눈을 번뜩이다가 이내 뒤로 풀썩 쓰러졌다.

“성공…… 했네.”

“그렇다면……!”

“아니,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우문환은 몸을 대자로 눕힌 채 안타까운 듯이 장기린을 응시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 살아났다고는 할 수 없네. 더 이상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혈맥을 폐문했지만, 원래 남아 있는 생기가 너무 적으니 정신을 차리긴 힘드네. 내가 한 일은 이대로 계속해서 숨이 붙은 채로 버틸 수 있게 만든 것뿐일세.”

우문환의 얼굴에선 큰 시술을 성공했다는 성취감과 그럼에도 완전히 치료하진 못했다는 실망감이 동시에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반면, 장기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의가 하룻밤을 꼬박 새며 의술을 행했건만, 그래도 살리지를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확실히 살릴 방법은 없소?”

“딱 하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있네.”

“그게 무엇이오?”

“극음의 기운으로 신진대사를 늦춰 두었으니 극양의 기운을 가진 영약으로 육신을 상충시켜야만 사람의 생기를 채워 넣을 수 있네. 극양의 기운을 가진 영약이라면 만년화리의 내단, 또는 천년설삼이 있지. 둘 다 생기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영약일세.”

장기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삼은 인삼을 말하는 것일 테고, 만년화리는 무엇이오?”

“만년을 살았다는 물고기지. 이제껏 발견된 적은 극히 드물고, 입소문을 타고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오는 영물이네.”

장기린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대륙에 하나나 둘밖에 없는 보물이란 말이오?”

“그렇다네.”

“그 보물을 찾아오면 휘연을 살릴 수 있소?”

“구 할 이상 확신하네.”

우문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래도 자신감있게 말했다.

장기린은 고민했다.

영약이란 것에 대해서는 동료들에게서 이야기로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으나, 자신과는 절대로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약이라는 것은 몸이 허약하고 부족할 경우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껏 그 흔한 고뿔 한 번 걸린 적이 없는 장기린으로서는 앞으로도 영약을 먹거나 구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년설삼이나 만년화리는…… 어디서 구할 수 있소?”

“…….”

“모르는 것이오?”

우문환은 침중한 기색으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구할 수…… 없네.”

“……그게 무슨 뜻이오?”

“그런 영약들은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 백 년에 한 번 얻을까 말까이고, 대부분 세상에 나와 둘 중 하나로 흘러들어 가네. 무림이나 관부이지. 그 정도 영약이라면 무림에선 가장 큰 방파인 소림이나 무당에 흘러들어 갔을 테고, 관부라면 황실의 보고에 들어가 있을 걸세.”

“소림, 무당, 황실…….”

장기린은 우문환에게 들은 장소들을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

셋 중에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황실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보고에서 그 귀한 물건을 가져올 수 있을까?

황실 보고는 말 그대로 황제만이 열람할 수 있는 명 제국 최고의 보고였다.

그런 곳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오려면 황제의 재가를 받는 것이 최우선.

‘하지만 나는 군으로 돌아오라는 황제 폐하의 제의를 거절했다.’

당금의 황제, 태종은 인재를 아끼지만 결코 인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조카를 몰아내고 황위를 차지했으며, 그 뒤에 온 제국이 들썩거릴 만큼 피의 숙청을 이뤄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황제에게 평범하게 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돌아간다고 해도 황제가 그의 가치를 만년화리의 내단이나 천년설삼만큼으로 인정해 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황제가 그를 조금 아낀다고 해서 그런 것을 믿고 얄팍한 심산으로 뭔가를 얻으려고 하다가는 그 열 배가 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당금의 황제 태종은 그런 인물이었다.

‘게다가 기껏 황실에 가서 부탁을 했는데 황실 보고에 그런 물건이 없을 수도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때 가서 됐다고 하고 뒤돌아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황실을 상대로 감히 장난을 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황실모독죄로 구족이 멸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장기린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소림이라는 곳은 전혀 모르겠고, 무당…… 은 운화가 인연이 있지만 보물을 얻으려는 건데 거기에 기대기는 힘들다. 결국 황실인데…… 황실 보고에서 보물을 꺼내려면…….’

순간, 번뜩이는 장기린의 눈.

그는 보리수 아래 대오각성을 이룬 석가모니처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공(功)! 그래, 공이다. 공을 세우면 돼. 황실의 안위, 제국의 안위에 직결되는 공을 세우면 황실 보고에서 원하는 보물을 하사받을 수 있다. 황실 보고에 만년화리의 내단이나 천년설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없더라도 찾아라도 줄 것이다. 황제 폐하는 절대 빚지고는 못 사는 심성이시니.’

한 번 생각의 방향이 트이니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장기린은 평소에 어떤 일이든 되도록 간섭하거나 끼어들지 않으려는 무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그 누구보다 머리회전이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장수 노릇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텐챠이는 분명히 뭔가를 노리고 있다. 삼대천과 함께 있고, 아직은 모르지만 병사들도 대규모로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건 원의 재건을 위한 명 황실에 대한 반기. 명 제국 내에서의 역모(逆謀)일 게 분명해.’

역모는 곧 황실에 대한 위협.

황실에 대한 위협을 막는 것은 황실을 지킨 것에 해당하는 구국(救國)의 공이다.

‘복수다. 휘연의 복수를 하면 그것이 곧 황실을 지킨 공(功). 그 공을 통해 만년화리의 내단이나 천년설삼을 얻는다. 이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장기린은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너무나 촘촘히 짜여 있는 듯한 운명의 사슬을 느끼고 하늘을 원망했다.

전장에 있던 시절의 숙적이 지금 그의 가장 소중한 여인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었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 곧 그 여인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가 내던져 버리려고 했던 과거가 그의 뒤를 쫓아온 셈이다.

마치 누군가가 과거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는 한, 네게 새로운 삶은 없다고 경고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늘이여, 그게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반드시 끝까지 돌파해 보이겠소. 나를 막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무너뜨리고, 부순 뒤 반드시 휘연을 살리고 보란 듯이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고 말 것이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휘연이 마지막에 당부한 말이니,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반드시 지킬 것이다.

후우욱―!

분노와 살기를 함께 불태우는 장기린.

하늘의 뜻을 깨닫고 확실한 목표가 생긴 그에게 이젠 거칠 것이 없었다.

살검을 뽑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몇 십, 몇 백, 아니, 몇 천, 몇 만의 피를 보더라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붉은 악귀니까.

휘연을 되찾고 평범한 삶을 되찾는 그 순간까지, 그는 살기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휘연…….”

장기린은 철 상자 속에서 잠든 것처럼 편안히 누워 있는 휘연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아 두기 위해서였다.

백옥처럼 뽀얗고 매끈한 피부, 오똑하면서도 그리 크지 않은 콧날과 윤기가 흐르는 입술. 비록 호수처럼 큰 눈과 그에 담긴 따뜻한 눈빛은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의 그 모습만으로도 평생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장기린은 그녀의 모습을 가슴 깊숙이 품은 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목에 은색의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스륵―

두 사람의 이름을 상징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목걸이는 마치 관처럼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철 상자 안에 누워 있는 휘연에게 한 가닥 인연의 끈을 남겨 주었다.

휘연과 장기린.

두 사람의 정표인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은 목걸이를 목에 걸지 않았다. 목줄을 세 번이나 감아 손목에 매달았을 뿐이다. 휘연이 직접 목에 걸어 주고 싶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앞으로 휘연이 깨어나기 전에 이 목걸이가 장기린의 목에 걸리는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줘.”

장기린은 나직하게 말한 뒤 고개를 숙여 휘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녹아 버릴 것처럼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은 따스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

아마 이 감촉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쿡. 쿡.

행복한 감촉을 느꼈건만, 가슴속 폐부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진작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작 손을 마주 잡고, 진작 입을 맞추고, 진작 둘이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면…….

그럼 설령 이렇게 되었더라도 더 좋은 추억들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포기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

그 후에 장기린은 등을 돌려 빙굴을 빠져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몸에서 하늘조차 찢어발길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두 눈에선 감히 맞받을 수 없는 패기가 줄기차게 쏘아졌다.

우문환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 그런 장기린을 멍하니 바라볼 뿐,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 ☆ ☆

장기린은 빙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보니 시간은 정오. 그가 말을 타고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어 가는 초저녁이었으니 하룻밤을 꼬박 샜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니, 이틀일 수도 있겠지.’

빙굴 안에선 시간의 흐름을 몰랐기 때문에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도 정오는 오고 이틀이 지나도 정오는 온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당 노인과 구양화가 있는 초옥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바로 떠날 셈이었다.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러려면 텐챠이와 삼대천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항주로 되돌아가야 했다.

숙적들을 생각하는 장기린에게서 무서운 살기가 표출되었다.

파스스.

발밑에 닿는 풀들이 불길에 그슬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잘게 부스러졌다. 누렇게 죽고 회색으로 바스라진 풀들에게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인가.

주변의 나무들이 활활 타는 불꽃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길을 만들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잎사귀와 넝쿨들을 쳐 내면서 가야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박, 사박.

주변의 생기를 불태우며 걸음을 걷던 붉은 악귀 장기린.

그가 마침내 당 노인과 우문환의 거처가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원래는 항상 소박한 물레방아 소리와 당 노인의 망치질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각한 일이 있던 만큼 거처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장기린이 그렇게 생각하며 거처로 다가가려는데…….

“살기가 짙은 놈이로다. 그 과한 살기를 품고 밖으로 나가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느냐?”

“……!”

장기린은 깜짝 놀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경륜이 묻어나면서도 청수한 목소리였다.

얼핏 들어선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는데, 그 안에 담긴 강한 패기와 지극한 현기는 듣는 사람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장기린은 황급히 몸을 돌려 우측을 바라봤다.

당 노인의 거처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좁은 소로가 있는데, 그곳에 백발의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검은색 비단 장포에 흰색 실로 수놓아진 국화와 검의 문양이 매우 화려했다. 이마와 눈가엔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고랑이 파였으나, 얼굴에는 젊은이 못지않게 팽팽한 피부가 윤기를 내고 있다.

척 봐도 일흔이 넘은 나이임이 분명한데 지금도 여인의 방심을 흔들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용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팔자로 기른 콧수염과 밑으로 가지런히 뻗은 턱수염 역시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젊었을 적 대단했을 용모를 짐작케 해 주는 노인이었다.

“당신은……?”

“이야기는 다 들었다. 직접 보기 전엔 믿기지가 않았다만, 오히려 들은 걸론 부족한 녀석이구나. 세상에 나가선 안 될 종자다, 네놈은.”

장기린은 싸늘한 얼굴로 노인을 마주 봤다.

놈에 종자라는 심한 말을 둘째 치고, 노인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장기린은 몸을 돌렸다. 나이 많은 노인과 드잡이를 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휘연의 복수를 하려면 한시가 아까웠다.

이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

그 순간, 장기린은 너무나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몸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이! 전혀 보지 못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시야에서 놓친 것은 나이 스물이 넘은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기린은 눈앞의 노인이 상상을 뛰어넘는 강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사람인가?’

귀신이나 도깨비에 홀린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마치 옛이야기에서 산신령을 만난 나무꾼이 된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너는 세상에 나가선 안 된다. 이곳에 있어라. 지금 네가 밖으로 나간다면 세상은 큰 악귀를 맞아 혼란에 빠질 것이다.”

노인의 눈빛과 말투는 진지했다.

‘악귀라니. 게다가…….’

장기린은 본능이 경고를 하는 것을 느꼈다.

값비싼 비단 장포를 입고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

보면 볼수록 무위의 깊이가 보이지 않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서 있는 발 모양, 다리 품새, 뒷짐을 진 채 어깨를 편 각도까지.

그 어느 곳도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으나, 또한 단 한 군데도 허점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호흡을 하는 순간 몸이 움직인다. 흡(吸)기와 호(呼)기. 합쳐서 호흡(呼吸)이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호흡을 하는 순간엔 폐가 부풀거나 쪼그라들고 그에 맞춰 가슴이 들썩이면서 완벽했던 자세에 허점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겉만 봐선 마치 호흡을 하지 않는 듯했다.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려 놓은 인물화 같았다. 눈앞에 있지만 또한 눈앞에 없는 느낌. 그건 온통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듯했던 하시르와 비슷한 듯하지만, 노인에게선 하시르에게는 없는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난 이 노인을 이길 수 있을까?’

장기린은 자신이 갑옷을 입고, 흑룡을 탔으며, 진청룡을 들었다고 상상했다.

결과는 쉽게 나왔다.

필패(必敗)였다.

열 번을 싸우면 열 번을 진다.

지금의 지친 몸 상태가 아니라 최상의 상태를 가정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허점이 없고 가진 힘은 비할 바 없이 막강했다. 장기린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노인이…….’

장기린은 깊게 침잠한 눈빛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장.”

“왜 그러느냐?”

“비켜 주시오. 나는 꼭 가야 하오.”

애써 부드럽게 말하였으나 노인의 의사는 단호했다.

“못 간다.”

“가야 하오.”

“난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 역시도 그렇소.”

노인만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장기린도 전장에서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반복한 적이 없다.

그 당당한 대답에 노인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어…….”

깊게 고랑이 파인 이마가 눈썹과 함께 꿈틀하고 움직였다.

당금 무림.

아니, 꼭 무림이 아니라 천하 어딜 가도 그에게 맞먹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노인의 정체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굳이 동등한 위치를 찾자면 다 같이 늙어 가는 다섯 중 나머지 네 사람 정도일까. 가문으로나 실력으로나 인품으로나, 그는 어디서든 극진한 공경을 받았다. 설령 그의 정체를 모른다 해도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과 기품이 그를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장기린은 그를 동등하게 대했다.

노인의 위엄과 기세를 느꼈으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놈이로구나. 처음엔 혼만 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너는 앞에 앉혀 두고 가르쳐야 할 놈이다.”

“나는 지금 무언가를 배울 만한 시간이 없소.”

“좋아, 그렇다면 묻겠다. 네가 그리 급한 것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냐, 아니면 복수를 위해서냐?”

“……둘 다요.”

“아니, 복수를 위해서겠지. 누군가를 구하려는 놈은 너처럼 살기에 불타고 있지 않아. 좀 더 절박하지. 네 얼굴은 누군가를 처참히 죽이고 시산혈해를 만들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이놈아.”

장기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구명과 복수.

지금 상황에서 굳이 어느 쪽에 가깝냐면, 노인의 말대로 복수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른다. 하지만 사내자식이 살면서 은원(恩怨)을 갚지 못하면 그건 사내가 아니지. 은원이란 정정당당하게 갚아야 하는 법이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어떤 목적이 있든 간에 여기서 살기를 씻고 가라. 지금의 네놈을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다.”

“대체 노인장이 누구이기에……!”

“그건 알 것 없지.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서 있는 한 너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대화가 점점 격해졌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고, 장기린은 노인의 눈빛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고집스러움과 꼿꼿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장기린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하는 미약한 열기도 알아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십전 십패.

패배가 약속된 싸움이라고는 하나 장기린은 이미 빙굴에서 휘연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몸이었다.

그의 앞길을 막는다면 무엇이든 부수고 간다.

그게 설령 약속된 패배라도 그것조차 부수고 나갈 수 있어야만 했다.

쉬익―

장기린은 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옆으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어른 팔뚝만 한 나뭇가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의 손은 나무에 닿지도 않았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나뭇가지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집어다 주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장기린의 손에 잡혔다.

“허어……!”

노인은 감탄성을 터뜨렸다.

허공섭물.

장기린이 강하다는 것은 느꼈으나 설마 무학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허공섭물까지 이뤄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장기린은 손에 잡힌 나뭇가지를 바닥을 향해 한 번 휘둘렀다.

파앙―!

이번엔 강한 파공음과 함께 굵은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잔가지와 나뭇잎 수십 장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남은 것은 살짝 구부러진 굵은 나뭇가지 하나뿐.

결이 고르거나 꼿꼿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끝이 낭창낭창하게 구부러진 나뭇가지였지만, 장기린의 손에 들리자 그건 훌륭한 한 자루의 목창이 되었다.

살짝 굽힌 무릎과 꼿꼿하게 세운 상체.

양손을 적당한 거리로 벌려서 잡은 거창 자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도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결국 해보자는 뜻이렷다.”

마치 노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노인은 이 상황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닌 듯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주변을 눈으로 한 번 슥― 둘러보더니, 무릎 높이까지 자란 잎대를 하나 뽑아 들었다.

갈대를 닮은 평범한 잡초.

나뭇가지라고도 할 수 없는 빳빳한 잎줄기에 길쭉한 잎사귀 하나가 달려 있는 풀이었다. 노인은 그 풀줄기에서 잎사귀만 떼어 낸 뒤 줄기로 장기린을 겨눴다.

싸우는 데 풀줄기라니.

어린아이들끼리 놀 때도 풀줄기는 무기로 쓰지 않을 것이다. 한데 노인의 손에 들려 있으니 달랐다. 마치 천하의 명검을 들고 있는 것처럼 풀줄기로 겨눴을 뿐인데도 한 걸음만 삐끗하면 온몸이 난자당할 것만 같은 예리한 기운이 그물처럼 장기린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런 자가 있나!’

장기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은…… 왜 나를 막는 것이오?”

장기린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며칠간 피로가 중첩된데다 풀줄기의 끝에서 뿜어지는 예기를 버텨 내기가 힘에 부쳤던 것이다.

“살귀가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막는 데 이유가 필요하겠느냐?”

“난 아무나 죽이지 않소.”

“어떤 이유든 관계없다. 온몸에서 하늘이라도 찢어발길 듯한 살기를 내뿜는 놈은 세상에 내보낼 수 없어. 더군다나 내 눈에 띄었는데 못 본 척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노인은 그 말과 함께 천천히 풀줄기의 끝부분이 향하던 방향을 장기린의 명치에서 미간 쪽으로 옮겼다.

움찔.

장기린은 그 작은 변화에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두 걸음을 뒤로 내딛지 않았다면 미간이 꿰뚫렸을 거란 환상이 보였다. 장기린이 싸울 때 보는 환상은 어김없이 현실로 되기 마련이었다.

슥―

장기린이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나자 이번엔 풀줄기의 끝이 미간에서 조금 내려와 목젖이 있는 부분을 향했다.

장기린은 다시 묵묵히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이미 기세에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전력을 다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야.”

노인은 씩 웃었다.

칠순이 넘은 노인이 분명하건만, 강건한 사내 같은 강인한 웃음이었다.

그 모습, 그 기세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제껏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인세에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존재였다.

세상을 초탈한 듯한 모습.

그러면서 범인(凡人)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자.

‘신선(神仙).’

장기린은 자연스레 그 말을 떠올렸다.

그는 신선을 만난 거다.

그것도 검을 든 신선이었다.

휘연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고 빙굴에서 복수를 다짐한 순간, 장기린은 검선(劍仙)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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