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九章 ― 심중세정(心中洗淨)
싸움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바람이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할 수 있다. 개울가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화사하게 핀 목련의 꽃잎을 두 사람 사이에 떨어뜨리는 순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장기린의 목창이 이미 시공을 가르며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욱―
마치 허공에 구멍이 뚫린 듯 바람이 빨려 들어가고,
쑤아아앙―!
엄청난 파공음은 그 뒤로 따라붙듯이 들려왔다.
손에 들린 것이 급조한 목창, 그것도 구불구불한 모양에 무게중심조차 안 잡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관(貫)의 묘리였다.
꿰뚫는 일격을 최대로 극화시키면 이런 모습이 될까?
마치 창의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것 같은 일순간에 목창은 정면 일 장 앞을 내찌른 뒤 돌아왔고, 지금은 창을 내찌르기 전과 전혀 변함이 없는 듯한 자세로 장기린의 손에 들려 있었다.
보통 사람은 알아보지 못할 테지만 창은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손아귀의 힘과 앞으로 내뻗는 어깨의 힘이 창을 회전시킨다.
회전력이 극을 이루는 순간이 찌르기가 끝나는 시점이고, 그 반탄력으로 다시 반대로 회전하면서 창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작은 끝났지만 그 여파는 창을 회수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목창에 꿰뚫린 공기.
주변이 폭풍이라도 불어온 것처럼 울렁거리고 우수수 떨어지던 꽃잎들은 바싹 마른 낙엽처럼 허공에서 팟! 하고 터지며 부스러졌다.
만약 사람이 장기린의 창에 찔렸다면 몸통이 절반 이상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철갑옷에 방패를 들고 있는 장수라도 마찬가지. 모든 게 박살 나고 몸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장기린의 일격은 그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품고 있었다.
‘위험하다.’
장기린은 기습적으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을 해 보았으나 노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 공격을 받아 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풀줄기를 든 채로 서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공격은 노인에게 닿지 않았다.
옆으로 반 보(步).
마치 구름을 밟는 듯한 가벼운 동작 뒤에 풀줄기를 크게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장기린의 공격이 만들어 낸 여파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런 뒤에 다시 장기린의 미간을 겨누는 노인.
그건 손자의 재롱을 보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큰 호령과 함께 가르침을 내리는 훈장 선생 같기도 했다.
‘역시 안 통한다.’
장기린의 눈에서 번쩍! 하고 안광이 빛났다.
방금 장기린이 내찌른 공격은 일기관천(逸驥貫穿)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대장군 공손웅에게 배웠고, 적룡기마대원들이라면 누구나 익힌 기술인데, ‘전진’하는 경우가 많은 전장에선 가장 유용하게 쓰였다.
공격이 빠르니 실패할 확률도 적고 무기의 회수가 빨라서 설령 실패하더라도 뒤탈이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기술마저도 신선 같은 노인에겐 통하지 않았다. 일격으로 필살을 하지 못했으니 다른 수가 없다.
힘으로 안 되면 빠르기로 승부해야 한다.
휘리릭―
장기린은 왼발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오른쪽 어깨와 팔은 최대한 뒤로 당겼다. 양손으로는 목창을 가볍게 감싸 쥐고 있으니 자연히 비스듬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그 상태에서 왼손은 손바닥 두 뼘 정도를 내려 잡고, 오른쪽 손바닥은 쫙 펼친 채 목창의 뒤쪽 끝부분을 받쳤다.
쿵!
장기린은 그 상태에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찌르르 울리는 충격이 발바닥, 발목,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허리에선 강한 회전력을 만들어 냈다.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의 관절들.
몸에서 꺾일 수 있는 모든 부분들이 모두 꺾이며 번개 같은 광채를 토해 냈다. 온몸의 탄력을 십분 살린 찌르기였다.
앞으로 내찌르고 다시 회수하는 일이 눈 깜빡할 새에 수십 번이나 반복되었다. 창의 모습이 수십 개로 늘어나며 거친 파도처럼 노인의 몸 전체를 휩쓸었다.
후우웅―
노인이 든 풀줄기에서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작은 별무리가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도도히 흐르는 성하(星河) 같기도 했는데, 중요한 건 그 빛무리가 ‘검’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검날의 길이는 두 척. 손잡이는 한 척짜리 장검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노인은 그 보이지 않는 검을 앞으로 휘둘러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장기린의 창격을 모조리 막아 냈다.
따다다다당―!
풀줄기와 나무토막의 만남인 데도 불구하고 마치 쇠솥 두 개를 연신 맞부딪치는 것처럼 시끄러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노인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휘두르는 검의 궤적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했고,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슥― 내뻗는 공격은 천하의 장기린이 기겁을 할 만큼 미세한 빈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창과 같은 장병(長兵)의 이점이 무엇인가.
바로 간격이었다.
검과 같은 단병(短兵)이 접근할 틈도 주지 않는 게 장병의 가장 큰 장점인 것이다.
하지만 노인에겐 그런 병기의 이점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기이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검은 창보다도 멀리까지 공격할 수 있었고, 구름을 밟는 듯한 노인의 움직임은 장기린이 아무리 거리를 둬도 마치 발목끼리 끈으로 묶어 놓은 것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따다다당―!
잔상조차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수십 번의 공방이 연이어졌다.
그동안 장기린은 노인의 소맷자락을 딱 한 번 스칠 수 있었을 뿐, 공격이 몸에 닿은 적은 없었다.
반면, 노인의 공격은 장기린의 몸에 매번 닿았다.
비록 겨우 피가 배어 나올까 말까 한 옅은 자상일 뿐이지만 어깨, 팔목, 허벅지에 걸쳐 십여 개나 되는 상흔이 남았다.
‘이것이 무림인인가.’
둘째인 부운화가 무당파 출신이었다.
하여 장기린은 그동안 운화를 통해 사람들이 ‘무공’이라 부르는 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심신을 단련하는 양생술에 사람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합친 것이다.
초식이라는 것은 칼을 서로에게 겨눌 때 몇 수 앞을 더 내다보고,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효율적일지 연구해서 나온 결과다. 신법이니 검술이니 하는 것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주로 일대일의 비무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며, 무기는 주로 검을 쓴다. 소림이나 무당이란 곳에선 생불이 되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무공을 수련한다고 했다.
장기린도 몸을 단련하고 창술을 배웠지만, 무공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가 배우고 익힌 것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뿐이었다.
싸움도 일대일이 아니라 일 대 다수가 기본이며, 어떻게 하면 일격에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일수에 더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생불? 신선?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장기린은 사실 무공이란 것을 우습게 본 면이 있었다.
직접 접해 보지 못한 탓도 있지만, 평생 무공을 수련하던 부운화가 전쟁터에서 몇 번 싸워 본 뒤에야 쓸 만하게 변하는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장기린은 무공의 극의를 깨닫고 정상에 오른 자를 눈앞에 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전장에 나온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장병이 아니라 짧은 소도 한 자루만 들고 있더라도 일천 병력쯤은 파죽지세로 뚫고 나가리라.
몽고 최강의 전사라는 텐챠이도, 심지어 삼대천 세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 노인에게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따당! 따다당!
콰직! 파파파팡!
때리고, 부수고, 베어 내고,
찌르고, 찢고, 갈라 낸다.
장기린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토해 냈으나, 신선 같은 노인은 풀줄기 하나만을 든 채 그 모든 것들을 유유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합(合)은 옆에서 보면 꼭 미리 맞춰 둔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부수고, 깨지고, 폭발하듯이 움푹 파인 땅바닥이 그들의 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증명해 주었다.
장기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반면, 화려한 흑색 비단 장포를 입은 노인은 때때로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움직임에서 여유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콰앙! 쩡! 쩌정!
바위가 박살 나고, 아름드리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때 즈음, 당 노인의 거처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온 산을 떨쳐 울릴 만큼 큰 굉음이 터져 나오고 있는데 사람이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가장 먼저 당 노인이 뛰쳐나왔고, 그 뒤를 이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백연이 걸어 나왔다. 구양화는 백연을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이, 이런……!”
세 사람은 하나같이 경악하고 있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울고 땅이 움직이는 싸움이었다. 평범한 무인들로서는 그 경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싸움이 펼쳐지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쩌어엉!
수평으로 휘두른 창이 튕겨 나온 뒤, 장기린은 자신의 숨이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공격이 성공하질 못하니 마음이 흐트러지고, 마음이 흐트러지니 호흡이 엉켰다.
기력으로 뚫고 나가야 할 순간이지만, 지금은 며칠이나 밤을 새며 무리한 탓에 남아 있는 힘이 없었다.
‘이걸로는 안 돼. 이 노인은 강하다. 제압하려고 해선 이길 수 없어. 죽여야 한다. 앞을 가로막는 자.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싸워야 돼.’
생각을 마쳤으니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두 눈을 핏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하는 장기린.
그의 몸에서 마치 막혔던 둑이 터져 나가듯 거대한 살기가 뻗어 나갔다.
지독한 살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만큼 강대한 살기가 넘실넘실 피어오르니, 주변의 초목들이 마치 불길에라도 닿은 것마냥 누렇게 죽어 가며 몸을 움츠렸다.
“이놈……!”
노인은 대경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그전까지는 장기린이 강하게 공격을 하면 할수록 즐거워 보였으나 이젠 아니었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듯이.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온 산과 들을 덮을 듯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대는 장기린을 보며 노인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
사신(死神)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장기린일 터였다.
후웅!
천천히, 목창이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지더니 만근거력을 품고 아래로 내리찍었다.
“안 돼요!!”
구양화의 절규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초신속의 세계로 들어와 눈앞에 노인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장기린에겐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콰아앙―!
목창을 내리찍자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일격필살.
목숨을 취할 의도로 내려친 일격이었다. 당연 인의나 자비따윈 없었다. 오로지 사혈을 노리고 날아간 공격은 처음으로 노인의 옷자락을 길게 갈라 놓았다.
사아악―!
예리한 소음과 함께 노인이 입고 있던 흑색 비단 장포가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렸다.
“악귀로다! 눈에 띄는 생명을 모조리 죽일 셈이냐!”
노인이 분노를 담아 일갈했으나 장기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격에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
육신은 지쳤으나, 오히려 그 덕에 정신과 살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사선으로 빙글 회전하여 목창의 끝을 겨드랑이에 끼운 장기린. 그 자세 그대로, 발을 쿵! 하고 구르며 몸 전체를 우측으로 돌렸다.
후우우웅―!
매서운 바람이 일며, 세상이 위아래 두 쪽으로 갈라졌다.
“타핫―!”
처음으로 노인이 기합성을 내뱉었다.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검세.
풀줄기를 감싸고 있던 흰빛의 기운이 이젠 그 두께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얼핏 봉처럼 보일 만큼 두꺼운 패검의 모양이었다. 게다가 겉표면에서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기운은 단단한 강철도 두부처럼 갈라 버릴 만큼 강력했다.
따앙! 따다당!
노인은 장기린의 일격을 네 번의 검격으로 비껴냈다.
바람처럼 표표하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신비로운 움직임이었다.
노인이 장기린에 비해 많이 움직였다고 해서 공격의 위력이 네 배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린의 횡참격은 살기가 닿는 범위의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만큼 강력했지만, 노인이 휘두르는 검에 실린 기운도 그에 못지않았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다.
장기린은 일격필살을 생각하지만, 노인은 일격, 일격이 더해 갈수록 점점 더 위력이 강해지는 무공을 생각했다.
중원의 무학이란 그와 같았다.
기수식에서 시작.
한 번의 공격으로 발경(發經)을 얻고, 그 발경을 토대로 다음 공격에선 처음 공격보다 더욱 강한 힘을 얻는 것.
그런 식으로 눈덩이를 굴리듯 점점 힘을 모아 최후엔 상대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는 것이 바로 무(武)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전장에서 일평생 살검만을 익히고 발전시켜 온 장기린.
장기린의 두 배가 넘는 시간 동안 무림에서 검을 닦아 온 노인.
살검과 활검의 비교는 언제 어느 시대에서든 논란을 일으키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노인이 더 강했다.
장기린의 창술은 막강했지만, 노인이 휘두르는 검술은 하늘 그 자체처럼 넓고 웅혼해서 한 번 바람에 휩쓸리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파파팟!
결국 손에 들려 있던 반 장 길이의 목창이 절반 크기로 줄어들었다.
목창은 부러진 게 아니라 터져 나갔다.
마치 폭약에 맞은 듯 창끝부터 가루가 되어 산산이 비산했다.
“큭……!”
장기린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조차 오시할 수 있는 살기와 기운이건만, 노인의 검에 실린 거력은 버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강한 힘은 더 강한 힘에 부서지는 법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힘에 손목까지 날아가지 않은 것은 그나마 장기린이 끈질기게 버텼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아.”
이미 온몸의 진기가 가닥가닥 끊어지고, 내부가 진탕되었다.
정신이 혼미해서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지만, 그래도 장기린의 두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장기린은 결연한 자세로 끈질기게 목창을 휘둘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창의 움직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빈사 상태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쉬익―!
빛나는 검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장기린은 그 순간까지 멍하니 창만 휘두르고 있었다.
꼼짝없이 미간이 꿰뚫리나 싶어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빛나는 검은 휙― 하니 방향을 틀어 장기린의 거궐혈(巨闕穴)과 그 주변의 혈도들을 일시에 가격해 버렸다.
퍼억!
검을 휘둘러 상처를 남기지 않고 혈도를 제압한다.
지극히 높은 경지의 검공이다.
끝까지 강렬한 광채를 발하던 두 눈에서 급격히 빛이 빠져나가고,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몸은 앞으로 꼬꾸라졌다.
노인은 장기린의 몸이 땅에 닿기 직전 손을 뻗어 신형을 받쳐 주었다.
정신을 잃어 가는 장기린. 그의 귓가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려왔다.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로다. 앉혀 놓고 가르치는 데 더 오래 걸리겠어.”
☆ ☆ ☆
“할아버지, 언제까지 객주님을 잡아 두실 거예요?”
“…….”
“할아버지!”
구양화는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날카롭게 추궁했으나 나무 평상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정말! 계속 아무 말도 안 해 주실 거예요?”
“화아야.”
그러다 처음으로 대꾸가 나왔다.
구양화는 눈을 반짝이며 노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네, 할아버지.”
“이 할애비도 이젠 늙은 모양이다. 조심성 없게 다치지를 않나, 게다가 젊었을 적 같으면 일각 만에 나을 상처가 계속 쑤시는구나. 이젠 죽을 날도 머지않은 모양이야.”
노인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노인처럼 자기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구양화는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노인.
검과 국화 문양이 그려진 흑색의 화려한 비단 장포를 입고, 무려 장기린을 풀줄기만을 든 채 일각 만에 제압한 초강자의 정체는 구양화의 조부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문파가 존재하는 무림강호에 이름만 대면 대륙의 모든 무인들이 한 수 접고 존경을 표하는 여섯 개의 세가가 있다.
구양가.
남궁가.
팽가.
당가.
모용가.
황보가.
그중 첫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구양세가였다.
다른 세가들은 구파일방에 비해 조금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구양세가만은 달랐다.
그 이유는 바로 단 한 사람.
이 노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검선(劍仙) 구양재인(九陽在認)!
검선, 또는 검존(劍尊)이라고 불린다.
무림오존(武林五尊)으로 손꼽히는 전대 고수 중 한 사람이며, 멀고 먼 검의 길에서 이미 신선의 경지를 넘보는 지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기에 모든 무인들이 ‘존’자를 붙여 공경을 표했다.
그의 위치는 현 무림에서 별호에 ‘왕(王)’ 자가 붙은, 일명 십대고수라고 불리는 무인들보다도 더 위에 존재했다.
무림오존은 무림오존들끼리밖에 상대할 수 없다.
이미 무극의 경지를 넘어선 그들이 누군가와 싸워 다친다는 것이 있기나 한 말인가. 그러니 늙어서 아픈 몸이 잘 낫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저잣거리의 뜬소문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구양화로서는 조부의 엄살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구양화를 귀여워해 주던 조부였다. 검선 구양재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또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어린 시절부터 손녀인 구양화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그런 조부가 검선이라는 지고한 위치답지 않게 이렇게 엄살을 피울 때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깨를 주물러 달라는 것.’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마음도 들었지만, 검선이란 사람은 원래 이랬다.
범인의 잣대로는 재단할 수 없고, 호쾌하고 직선적이어서 원하는 것은 그 순간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꾸욱. 꾸욱.
결국 구양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양재인의 어깨를 주물렀다.
“시원하세요?”
“아이구, 좋다. 역시 손녀의 손만큼 좋은 게 세상에 없구나.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이쪽은 어떠세요?”
“으음, 거기도 좋구나. 역시 화아의 손이 최고다.”
구양재인은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럼 말씀해 주세요. 왜 객주님을 잡아 두고 계신 건지. 그리고 복수를 방해하면서 안 놓아주는 이유가 뭔지.”
“으음, 화아야.”
“네?”
“넌 저 녀석이 복수를 했으면 좋겠느냐?”
구양화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지?”
“휘연 언니는 저를 친동생처럼 대해 줬어요. 언니는 무공도 몰라요. 그런 언니를 저렇게 다치게 한 사람…… 용서할 수 없어요.”
비록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지만 그녀는 무가의 자식이다. 검을 휘두르는 자, 검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복수를 원한다.
구양화는 휘연을 다치게 한 자가 자신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다.
“우리 화아도 다 컸구나, 다 컸어.”
검선 구양재인은 씁쓸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왼쪽 소매를 걷었다.
“이 상처가 보이느냐?”
“네, 할아버지.”
“내가 일신에 상처를 입은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구나. 공화존(空華尊)과의 싸움이 마지막이니…… 한 십 년 쯤 된 건가?”
검선 구양재인.
그 정도의 위치가 되면 직접 검을 겨룰 일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져도 상처를 입는 일은 불가능했다.
검선이자 검존이란 이름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선계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는 절세고수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구파일방에서도 장문인 급이 나타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객주님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말인가요?”
“강하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하지. 불가해(不可解)야.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백연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검선은 나무 평상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초췌한 인상의 청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강한 사람입니다. 그동안 짐작은 했지만…… 어제 검선께서 보여 주신 검공에 부딪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 대단한 놈이지. 그런데 그놈의 검선 소리는 안 하면 안 되겠느냐? 너는 내 손자다.”
“…….”
“쯧쯧, 고지식한 녀석.”
백연은 무당파의 제자이지만 또한 구양세가의 양자이기도 했다. 백연의 어린 시절, 그의 성품과 재질을 마음에 들어 한 구양재인이 가주에게 양자로 삼으라고 종용했고, 가주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무당파와 구양세가는 둘 다 정도무림의 거목이다.
무당파에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는 일.
백연도 기쁜 마음으로 구양가주를 아버님이라 불렀으나 유독 구양재인에게는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백연에게 있어서 ‘검선’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선인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장기린이 그런 검선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며 몸에 상처를 입혔으니.
백연은 질시도 아니고 존경도 아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 단언컨대, 저놈은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아니, 확실해. 나와 싸울 때 저 녀석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걸 감안하면 분명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니야.”
“…….”
“못 믿겠느냐? 그건 이 할애비를 우습게 보는 것이구나. 내가 십대고수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한 놈에게 상처를 입을 것처럼 보이더냐?”
짐짓 노한 듯한 음성에 백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 내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저만한 무공, 저만한 힘을 가지고 하늘조차 오시할 살기를 내뿜는데…… 어떻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내보낼 수가 있겠느냐?”
“하지만 제가 알기로 객주님은 함부로 인명을 살상할 인물이 아닙니다. 복수를 원한다면 그 복수에만 힘을 쓸 분입니다.”
백연이 장기린을 변호하자, 여전히 검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구양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할아버지. 객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허허, 그 녀석이 너희의 신망을 단단히 얻어 두었구나.”
“믿을 만한 분이니까요.”
구양화는 단호히 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초옥 앞에서 망치를 든 채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당 노! 당 노도 뭐라고 말해 봐. 객주님이 가고 나서 계속 칭찬을 했잖아.”
구양화는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당 노는 슬쩍 한발을 빼놓았다.
“커험! 내가 언제 그리 칭찬을 했느냐, 욘석아.”
“그랬잖아! 잘 만들어진 칼 같은 녀석이라느니, 시간만 좀 더 있으면 분명 신검이 될 수 있다느니 하면서 칭찬했잖아!”
“아니, 그건…….”
“그러니 우리 할아버지한테 잘 말해 줘. 객주님은 좋은 사람이니 믿어도 된다고 말이야.”
“으음…….”
당 노인은 난감한 듯 신음을 흘리다가 한마디만 덧붙인 뒤 몸을 홱 돌렸다.
“구양 늙은이, 그 녀석은 괜찮은 녀석이지만 또한 위험한 녀석이기도 하다. 알아서 해.”
“아앗! 당 노! 배신하는 거야?!”
“커험!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구양화가 빽! 소리를 지르자 당 노인은 난감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공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구양화는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따지고 싶은 듯 어깨를 들썩였으나, 차마 어깨를 주무르다가 가 버릴 수는 없어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무튼. 할아버지, 객주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장기린은 무뚝뚝하지만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속정이 깊은 사내다. 그런 것은 구구절절 말로 늘어놓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는 법 아니던가.
“안 된다.”
“할아버지!”
하지만 구양재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한곳만을 보는 녀석은 위험해. 그 앞을 가로막는 것, 옆에서 귀찮게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 녀석도 마찬가지야. 마지막에 살기를 실어 공격했을 때, 상대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
이번 질문은 백연을 향해서였다. 백연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장기린을 변호할 수가 없었다. 검선과 장기린의 마지막 격돌 때, 사실 그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상대가 자신이었다면? 내가 장기린을 상대로 싸웠다면 멀쩡히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안 돼. 무리야.’
백연은 멀쩡한 몸으로 무당 무공을 극성으로 전개하더라도 살기를 뿜어내는 장기린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검선을 상대로 보여 주었던 그의 힘은…… 그 정도로 위험했다.
“저놈은 너무 위험하다. 아예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직접 만나고 나서는 절대로 가만히 둘 수가 없지. 마음을 다스려 놓아야 돼.”
“하지만…….”
“우가 늙은이가 휘연이라는 아이는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하더구나. 어차피 인명은 재천이다. 저 녀석이 순간 들끓는 혈기로 밖으로 나가서 살겁을 저지르게 두느니 지금 이렇게 잡아 두고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더 나아.”
“…….”
“둘 다 탐탁지 않아 보이는구나. 너희도 복수를 하고 싶은 게냐?”
검선의 시선은 두 사람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구양화와 백연은 서로를 흘깃 쳐다본 뒤 입을 꾹 다물었다.
복수?
당연히 하고 싶다.
비록 식객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이미 마음만큼은 풍운객잔의 가족이 되어 버렸다.
따뜻한 누이 같던 휘연.
시끄럽지만 쾌활한 강운찬 숙수.
말을 잘하고 섬세한 남궁휴.
애교있고 눈치 빠른 아칠과 아팔.
두 사람에겐 그들 모두와 웃고 떠들며 보냈던 시간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고, 또한 그 속에서 생긴 끈끈한 정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변고를 겪고, 휘연이 사경을 헤매며 누워 있는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수란 무엇이냐?”
가슴에서 들끓는 노화를 애써 삭이던 두 사람에게 구양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엔 직접 경험한 듯한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끼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순간엔 너무나도 절실하지만 지나고 보면 또한 만고에 쓸데없는 행동이 바로 복수다.”
“아…….”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니라. 여기서 부모나 사부가 바른길로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끝없는 살겁에 휩쓸려 결국은 비참하게 죽게 될 터.”
“그 말씀은……!”
그 순간, 백연은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그래?”
“화 매, 검선께선…….”
구양화는 백연의 귓속말을 들은 뒤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림에 이름이 난 무인들 중 천재가 아닌 사람이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구양재인은 한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천재였다.
그가 하는 행동엔 모두 적합한 이유가 있다.
아직 삶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구양화와 백연은 몰랐지만, 검선은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고 그것을 서슴없이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검선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장기린에게 부모이자 사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장기린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 주고 이끌어 주기 위해, 귀찮고 어려운 길을 감수하려고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감격한 구양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선은 지금의 가주에게도 별다른 정성을 쏟지 않았던 사람이다. 세속에 얼마나 관여하지 않으면 별명이 검에 미친 신선이겠는가.
그런 인물이 이렇게 직접 가르침을 내리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수를 막으려는 것은 아니야. 다만 준비가 되었을 때 내보낼 것이다. 지금은 너무 위험해.”
허허 웃는 조부를 보며 구양화는 그의 어깨를 성심성의껏 주물렀다.
잠시나마 조부를 야속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안마에 온 힘을 다했다.
“허허, 시원하구나. 역시 우리 화아가 최고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피로가 싹 가시는구나.”
“할아버지, 객주님을 잘 부탁해요. 휘연 언니에 대한 복수는 꼭 성공해야 해요. 객주님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구양화의 눈빛이 뜨겁게 빛났다.
“허어! 화아가 이 할애비에게 부담을 주는구나.”
“피이, 할아버지는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알았다, 알았어.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합당한 일이면 나중에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돕도록 하마. 대신 이렇게 자주 어깨를 주물러 주어야 한다.”
“그럴게요.”
천하제일세가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가문의 힘까지 언급되었다.
이 얼마나 큰 결정인가.
구양화는 더욱 감격하여 손아귀에 힘을 더했고, 그럴수록 검선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진해져만 갔다.
꽝―! 꽈앙―!
그렇게 조손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디선가 쇳덩이를 두들기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초옥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망치질 소리는 좀 더 맑고 청량한 느낌이 드는데, 지금의 소리는 육중한 철추로 땅을 후려치는 듯한 둔중한 소리였다.
“허어, 벌써 깬 건가. 예상보다 일각이나 빠르구나.”
검선 구양재인은 혀를 끌끌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정을 알고 있는 백연은 너무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칠성지(七星指)로 한 점혈이 그렇게나 쉽게……!”
“후후, 역시 특별한 놈이다. 재미있지 않느냐?”
구양재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는 여기에 가만히 있거라. 아마 반 시진쯤 걸릴 것이야.”
“아……!”
구양화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검선의 신형은 바람처럼 앞으로 쏘아져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둘만 남은 평상에서 황량한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 ☆ ☆
당 노인과 흑신의 우문환이 함께 지내는 초옥 근처엔 빙굴 말고도 또 다른 동굴이 하나 있었다. 빙굴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굴이지만, 그 동굴은 달랐다.
시굴(試掘)이라는 게 있다.
광맥을 찾기 위해 지리적으로 괜찮다 싶은 곳을 시험 삼아 파 보는 것인데, 주로 지하나 산의 지맥 사이를 오 장 정도 파는 게 일반적이다.
구리든, 금이든, 은이든.
오 장 깊이를 파서 광맥이 발견되면 일확천금의 부자가 되는 것이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관아에서는 광산에 대한 것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이런 시굴은 보통 관(官)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게 몰래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도광(盜鑛)에 대한 처벌이 엄해지기 전, 즉, 송나라 이전에는 단번에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이런 시굴이 몰래 많이 행해지고는 했다.
당 노인의 거처 인근에 만들어진 동굴도 그 당시에 만들어진 굴이었다.
깊이는 정확히 오 장.
몇 백 년 전에 누군가가 시굴을 했고, 힘들게 단단한 땅을 파 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에 단념하여 굴을 파는 일을 중단했다.
당 노인은 그 누군가를 바보라고 비웃었다.
만약 그가 끈기를 갖고 시험 삼아 딱 일 장만 더 파 내려갔으면 아마 대단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동굴엔 한철(寒鐵) 광맥이 흐르고 있었다.
한철은 일반적인 철광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한철은 질감이 서늘하고 색이 가지런하며, 제련했을 때 보통 철의 몇 배나 되는 강도와 유연성을 가진다.
강도와 유연성.
병기를 만들 때 그만큼 중요한 요소도 없다.
그러니 한철은 병기를 만드는 자라면 누구나 목을 맬 정도의 보물이었다.
같은 무게의 금과도 바꾸지 않는 귀한 물건.
그런 광맥을 눈앞에서 놓쳤으니 몇 백 년 전의 그는 얼마나 운이 나쁜가.
하지만 당 노인은 달랐다. 그는 이 지역을 보자마자 지세를 보고 단번에 광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시굴의 흔적을 찾아내 거기서 딱 일 장만 더 파 내려가서 한철의 광맥을 찾아내었다.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인부들을 끌어 모아 광산을 만들었을 테지만, 당 노인은 이미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재주를 가진 장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한철을 캐내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료를 사용했다. 우문환과 함께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러한 이유도 컸다.
약초의 보고(寶庫)인 빙굴.
한철 광맥이 흐르는 시굴.
두 개가 함께 있는 지역은 그야말로 두 사람을 위해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었다.
검선 구양재인은 그중 시굴에 들어와 있었다.
시굴에는 한철을 캐낼 수 있는 광산이라는 것 말고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데, 그건 바로 시굴의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너비와 높이가 일 장 남짓한 작은 크기의 감옥(監獄)이었다.
당 노인과 구양재인은 젊은 시절 어떤 목적을 위해 한철로 만들어진 감옥이 필요했고, 당 노인의 도움으로 동굴의 구석에 감옥을 만들어 냈다.
그곳은 바닥, 천장, 벽이 모두 한철로 만들어져 있다.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한철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검선인 구양재인도 그곳에 갇힐 경우 빠져나올 자신이 없는데, 누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검선은 동굴 특유의 습하고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꽝! 꽈아앙―! 꽝! 꽝!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정신을 차린 천둥벌거숭이는 분노와 살기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맨손으로 쇠창살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삼십 년 전의 누군가처럼.
저곳에 갇히면 누구든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지. 하필 똑같이 성질 더러운 녀석 둘이 이곳에 갇힌 것이겠지.’
검선은 과거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의지가 일면 몸이 움직인다.
심즉동(心卽動)의 움직임으로 바람처럼 앞으로 나아간 검선은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을 보고 제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졌다.
꽝! 꽈앙! 꽈아앙!
한철로 만들어진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고 있었다. 무식하게 맨손으로 후려친 쇠창살이 폭풍을 맞은 대나무처럼 휘청거렸다. 한철이 탄력이 좋고 아무리 휘어져도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감옥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철로 만들어진 쇠창살은 직경이 세 치나 된다.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휘어지게 하려면 만근거력으로도 부족할 터.
웬만한 전각도 지탱할 수 있을 법한 쇠창살이 맨손에 얻어맞고 휘청거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일 텐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아직 이립(而立)도 되지 않은 청년이 행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난폭했다.
무작정 손바닥으로 때리고, 휘청거리는 창살 사이로 몸을 끼운 뒤 미친 듯이 몸을 비틀었다. 창살이 휘청거렸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있었다.
손바닥, 손등, 팔목, 팔꿈치.
피투성이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리 진기로 보호한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
이렇게나 미친 짓을 하는데 몸이 배겨날 리가 없었다.
“이런 놈이 있나!”
검선은 창노한 음성을 터뜨리며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쒜에에엑―!
슬쩍 발로 걷어찼을 뿐이지만, 걷어찬 사람이 검선이다 보니 웬만한 암기 못지않은 위력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노리는 곳은 미간.
장기린은 황급히 철창 사이에서 몸을 빼 손을 휘둘렀고, 손바닥에 얻어맞은 돌멩이는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장기린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검선을 쏘아보았다.
어찌하여 계속해서 그를 방해하느냐는 듯한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이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했거늘! 어찌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냐!”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
몸에서 나는 털 하나도 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상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곧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장기린은 번뜩이는 눈빛을 죽이지 않은 채 답했다.
“효경(孝經)? 나는 부모가 없소.”
“허어, 효경을 아는 놈이 그런 말을 해!”
이번엔 구양재인의 눈이 빛났다.
효경을 안다.
살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망나니 인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배움이 적지 않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효를 보일 대상이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오. 그보다 나를 놓아주시오. 나는 이런 곳에 갇혀 있을 시간이 없소.”
“시간이 왜 없느냐? 빨리 가지 않으면 네 원수가 죽기라도 하는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가 노인에게 이야기는 다 들었다. 그 휘연이라는 아이는 최소 삼 년은 버틸 수 있다고 하더구나. 즉, 네가 복수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삼 년이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그럼 설명해 보아라. 어떤 점이 어렵고, 어떤 점이 복잡한지. 아니, 아예 어쩌다 원수가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구나.”
검선은 아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듯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고급스런 비단옷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굉장히 소탈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러는 것이오?”
“왜?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하더냐?”
“그렇소. 당신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오.”
검선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오.”
“내 이름은 구양재인이다. 무림인이 아니라니, 모를 테지.”
“…….”
분노가 들끓던 장기린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검선의 이름을 알아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성.
구양이라는 성씨가 한 소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구양화의 조부시오?”
“그래. 화아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지.”
“…….”
“어때? 이제 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냐?”
검선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장기린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편, 장기린도 검선을 지그시 응시했다.
처음에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선 불같이 화를 내더니, 어느새 눈을 빛내며 웃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이었다.
‘구양화의 조부라…….’
그 영악하리 만치 머리가 좋은 소녀의 조부라니.
구양화는 풍운객잔의 식구나 다름없는 아이니 그 조부 또한 장기린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친한 소녀의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난 시간이 없어.’
하루속히 휘연의 복수를 해야 한다.
텐챠이, 삼대천, 그리고 준동을 시작한 원의 잔당.
부운화와 섭우생, 진구가 항주에 있고,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지 상상이 안 될 만큼 급박했다.
그러니 그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큰 공을 세우려 한다면 더더욱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철로 만들어진 감옥은 도저히 그의 힘으로 부술 수 없고, 설령 감옥을 부수고 나간다 해도 앞에 있는 노인은 꺾을 수 없다.
결국 밖으로 나갈 방도가 없는 것이다.
“노인장.”
“왜 그러느냐?”
“나를 보내 주시오.”
무례하지는 않게.
하지만 활활 불타는 분노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안 된다.”
“도대체 왜……!”
“동경(銅鏡)이라도 가져다주랴? 네 꼴이 어떤지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화려한 비단 장포 위로 위엄이 넘치는 눈빛이 쏟아졌다.
“네놈의 살기는 주변의 생기를 모조리 말살시키는 수준이다. 나무, 풀, 미물인 벌레들은 물론이고, 동물이나 사람들까지 지금 네 주변으로 다가가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런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만나는 생명은 보는 족족 죽여 버릴 셈이냐?”
“……그럴 리가 없소. 설마 사람까지 죽을까.”
“죽는다. 건장한 사람이라도 네놈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주저앉을 것이고, 허약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다. 지금의 네놈은 존재 자체가 재앙이란 말이다!”
호통 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장기린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휘연을 잃는 순간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껍질이 깨어졌고, 그 뒤로 온몸에서 살기를 과도하게 뿜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말한 것처럼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였기에 이런 신선 같은 노인이 나타나 그를 막으려 했구나, 라고 납득도 되었다.
‘휘연…….’
장기린은 손목에 감겨 있는 은색의 장신구를 매만졌다.
포기해선 안 되는데…….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그걸 통해 휘연을 살려야 하는데, 이 노인은 지금 그가 살아 있는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오?”
장기린의 입에서 드디어 한 풀 꺾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선은 그런 장기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현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어 내라.”
“……살기를 씻어 내란 말이오?”
“그래. 마치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으로 되돌리거라. 그러면 이곳에서 너를 꺼내 밖으로 내보내 주마. 뿐만 아니라 네 복수가 합당하다면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 수도 있다.”
장기린은 잠시 침묵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씻어 내려 해 보았소.”
“언제? 객잔을 하면서 말이냐?”
“그렇소. 그 덕에 많이 좋아졌으나 그건 겉모습일 뿐이오. 결국 내 몸속 깊은 곳에 있는 살기는 없앨 수 없었소.”
그랬다. 없앤 것이 아니라 감췄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면의 껍질이 깨어지자마자 살기가 충천할 리가 없다.
‘난 본래 그런 사람인 거다.’
살기가 진흙처럼 뭉쳐서 만들어진 영혼.
피를 볼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을 지닌 생명.
몽고인들이 지어 준 별호가 딱 맞았다. 그는 악귀였다. 그것도 피로 물든 붉은 악귀.
“나를 내보내 주시오. 되도록 인적이 드문 곳을 다니며 복수의 대상만을 죽이겠소. 무고한 생명은 거두지 않겠소.”
“으음……!”
검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안 된다.”
“노인장!”
“생명을 아끼려는 네 마음은 기껍게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말을 잘 듣거라.”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한철 광맥에서 캐내어진 돌덩어리였다.
파삭!
새카만 돌멩이에 금이 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모래처럼 바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느니라. 이 돌을 녹이고 다듬어서 날을 세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 될 테지. 하지만 그 검을 물에 담가 놓으면 오래지 않아 녹이 슬고 부스러져서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버린다. 그 가루가 흩어져 흙에 섞이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그곳에선 풀이 자라고 새로운 생명이 태동한다.”
검선의 눈이 번쩍번쩍 빛을 내뿜었다.
신광(神光)이었다.
웃음 한 번으로 불법을 전파했던 염화미소처럼 장기린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 주고 깊은 깨달음을 전해주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지금 네놈은 잘 벼려진 칼이다. 칼날이 너무나 잘 갈려져서 누군가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칼이지. 하지만 그런 칼이라도 흐르는 물에 내던져 두면 예기(銳氣)를 잃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다.”
“아…….”
“씻어 내거라. 흐르는 물에 몸을 내맡기듯 오욕칠정(五慾七情)과 사심(邪心)을 모조리 털어 내면 너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명심해라. 복수를 하는 것보단 앞으로 살아갈 일이 더욱 중요하다. 살아가기 위해 소중한 삶을 지키는 싸움은 필요하지만, 그건 네가 몸에 깃든 살기를 다 지워 낸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깊게 엮어진 인연. 네가 복수와 살인을 위해서만 칼을 드는 일은 앞으로 나, 검선 구양재인이 용납지 않으리라.”
쿵!
장기린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예전에 부운화가 했던 말이 있다.
살기를 지워 내야 한다는 말. 폭포를 맞는다는 심정으로 살기를 씻어 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저 살기를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돌이켜 보니 그런 뜻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맡긴다.
폭포를 맞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을 타고 흘러가는 폭포수에 가진바 모든 것을 내맡기고 흘려보내는 게 중요했다.
또 있다.
당 노인의 말.
무의미한 살인의 반복으로 마병이 되어 버린 병기는 부수고 녹여서 신병으로 다시 탈바꿈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모두가 같은 맥락이다.
버려야 한다.
살기, 복수심, 집착.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오로지 ‘삶’ 하나만을 남겨야 한다.
“아아, 아아……!”
눈에서 초점이 흐려지고, 연신 튀어나오는 감탄성에 검선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포기하지 마세요.”
휘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따뜻한 빛으로 물든 노을의 모습도 생각났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이미 그때 모든 것을 깨달았던 것이거늘.
크나큰 깨달음이 한순간의 폭풍처럼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양쪽 손을 마주 잡았다. 주종의 예, 사승의 예다. 장기린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부디 청하오니, 저에게 살기를 씻을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껏 장기린이 존댓말을 사용한 것은 오직 두 사람밖에 없다.
한 사람은 황제.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대장군 공손웅이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이 더 늘었다.
검선 구양재천.
그는 스승이다. 하늘이 보낸 사자처럼 갑작스레 나타나 깊은 인연이 맺어졌다. 장기린을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니 어찌 그만한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기린.”
“예.”
“앞으로 너에게 몇 가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건 무공이고,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심공(心功)이다. 내가 무림을 떠돌던 시절에 도문(道門)에서 배워 두었던 건데, 딱히 우리 구양세가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앞으로 평생 내가 가르친 것들을 잊지 말고 올바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알겠습니다.”
깊이 읍(揖)하는 장기린을 보는 검선의 눈길이 따스해졌다.
“살기가 짙은 게 흠이나, 그걸 제외하곤 은원이 확실하고 인의를 알며 사리분별을 할 줄 아니 모든 게 마음에 든다. 좋은 심성이다. 인연을 맺기를 잘했어.”
“과찬이십니다.”
“인생사 과유불급(過猶不及)이며 새옹지마(塞翁之馬)라, 마음이 급하더라도 조금만 참고 내실을 다지며 기다려라. 때론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를 때도 있는 법이다.”
검선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장기린을 보며 무릎을 탁! 하고 쳤다.
“그래. 그럼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에, 너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자.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첫 번째가 아니겠느냐. 너의 인생을 들려다오.”
“저는…….”
잠시 머뭇거리던 장기린이었으나, 곧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부터 털어놓기 시작했다.
풍운객잔, 휘연, 구양화, 당 노인, 우문환, 그리고 검선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법.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깊어지는 인연과 함께, 장기린은 크나큰 변화의 시간을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