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73화 (121/686)

第七十章 ― 번천지계(륙天之計)

항주에서 태호(太湖)와 반대 방향으로 한 시진쯤 말을 타고 달리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나온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질 듯한 평야와 누런 황토 위에 듬성듬성 나 있는 풀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땅이었다.

지명(地名)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강서와 안휘 지방을 가르는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고 해야 할까.

관권이 미치지 않는 땅이다 보니 가끔 곤궁한 화전민들이 어떻게든 세금을 피해 농사를 지어 보고자 이곳을 찾는데, 그때마다 경계선을 배회하는 관군들이나 마적 떼에게 잡혀서 몰살을 당하기 일쑤였다.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상당히 비옥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관권이 미치지 않는 탓에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탁! 타탁!

그 황무지에 백오십이 넘는 건장한 사내들이 모닥불 십여 개를 만들어 놓고 불을 쬐며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어떤 자들은 앞섶을 풀어헤친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고, 어떤 자들은 아예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기도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내들도 있고, 무릎 위에 무기를 올려놓고 세심하게 갈고닦는 사내도 있었다.

여러 군상들이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강하다는 것!

규율이 없는 듯 방만한 모습이지만, 제대로 된 명령 하나만 떨어지면 그들은 곧장 몸을 일으키고 진형을 정비해 무시무시한 힘을 뿜어낼 것이다.

이들은 각자가 무림으로 따지면 일류 고수에 드는 강자들이다. 옆에 세워 둔 말들도 범상치 않았다. 하나같이 혈통 좋은 말을 정성을 다해 키웠는지 명마가 아닌 말이 없었다.

강한 힘을 지니고 명마를 탄 자.

그런 자들 백오십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된 힘은 크다.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고, 어떠한 방어도 뚫을 수 있다.

적룡기마대.

그 이름 아래 집결된 힘은 전쟁터에서도 압도적인 무명(武名)을 발하지 않았는가.

비록 고향으로 돌아간 대원들 때문에 인원이 절반으로 줄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이 강하다는 것엔 아무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터였다.

“시간이 정말 빨라. 벌써 이백 일이 되어 가는군.”

부운화는 침중한 안색으로 모닥불을 응시하며 말했다. 부운화가 앉은 모닥불 주위엔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부운화, 섭우생, 진구.

그리고 그들을 따르기로 한 백오십 명의 적룡기마대를 데리고 온 추룡과 대석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육신이 차돌처럼 단단하고 얼굴에 살벌한 흉터가 있는 사내가 추룡.

육 척이 넘는 키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놓여 있는 것처럼 커다란 덩치를 지닌 사내가 대석이었다.

적룡기마대 간부 다섯 사람은 근처 마을에서 사 온 화주를 돌려 가며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부운화처럼 안색이 침중했다.

벌써 단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감히 대형을 건드린 자들.

그 뿌리를 뽑아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정작 가장 중요한 대형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백 일이나 기다렸고, 이제 원의 잔당들이 대사를 일으키려고 한다는 단오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날을 놓치면 그들에게 복수의 기회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어째서 안 오시는 걸까요? 대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진구의 불안한 목소리에 반박하고 나선 것은 추룡이었다.

그는 적룡기마대 제일의 다혈질답게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대형은 무적이다! 대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있을 수 없어!”

“하지만…….”

“그만.”

언성이 높아지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부운화가 가로막았다.

“대형은 다친 연인을 치료하기 위해 가셨다. 그 여인의 상세가 심각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 우린 좀 더 기다려 본다.”

간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들의 대장은 부운화였다. 부운화가 결정하면 따른다. 이견은 없었다.

“그런데 둘째 형님, 형수님은 얼마나 예쁜 거유? 진구 말을 들으니 월궁항아가 따로 없다던데, 정말 그렇수?”

문득 들려오는 어눌한 목소리에 모두의 얼굴에 작은 웃음기가 피어났다.

사천 지방의 말투는 원래 억세고 거칠다. 그런데 그런 억양으로 어눌하고 순박하게 말하는 대석의 목소리는 언제 어느 때고 항상 웃음을 자아냈다.

“그럼요. 예쁘죠. 내가 그렇게 예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니까요.”

진구가 마치 자기 자랑인 양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호라, 그 정도란 말이지? 이거, 꼭 한 번 뵈어야겠는데.”

“안 보면 후회할걸요? 아까 말했듯이 태어나서 처음…… 아니, 대장군 댁 아가씨만큼이나 예쁜 분은 처음 봤다니까요.”

“응? 거기서 대장군 댁 아가씨가 왜 나오냐? 너, 그 아가씨한테 마음 있었냐?”

“엑? 그 무슨 황공하고 쑥스러운 말씀을!”

“이놈, 부정 안 하는 것 보게? 어이, 다들 알고 있었어, 이놈이 아가씨한테 흑심 품은 걸?”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추룡과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도 넉살 좋게 씩 웃고 있는 진구.

“난 알았지.”

“둘째 형?!”

“대장군 댁 자녀분이 오실 때면 진구 녀석 어찌나 성화던지, 보초라도 맡길라 치면 어떻게든 도망치기 일쑤였다.”

부운화의 첨언에 이젠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핫! 이런 발랑 까진 놈을 봤나! 너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밝히다간 나중에 대머리 된다.”

추룡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진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큭, 대머리라뇨! 그러는 셋째 형이야말로 조심하라구요. 형은 이마가 넓어지는 걸 보니 벌써 조짐이 있어요.”

“뭣이?! 야, 대석아, 내 이마가 넓냐?”

추룡은 안 그래도 신경을 쓰던 문제였는지 곧장 앞머리를 위로 들어 올리며 대석에게 물었다.

“글쎄. 모르겠슈.”

“모르겠다잖아!”

“눈길 피하는 거 못 봤어요? 당연히 차마 말 못하는 것뿐이죠!”

“뭣이라? 그게 진짜냐, 대석아!”

“글쎄, 난 모르겠슈.”

“이놈은, 뭘 묻기만 하면 모른데. 대체 아는 게 뭐냐, 인마!”

추룡과 진구 사이에서 만들어진 불똥이 애꿎은 대석에게 튀었다.

세 사람이 툭탁거리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던 부운화에게 옆에서 섭우생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둘째 형님.”

“우생, 말해.”

“이제 단오는 오 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참전할지 방관할지, 슬슬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상 가만히 있다가는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 참전할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섭우생은 왼팔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게 아니라, 어깨 아래쪽으로 신경이 크게 다쳤기 때문에 그랬다.

육 개월 전, 마치 장판파의 장익덕처럼 다리를 막아섰던 세 사람은 삼대천과 텐챠이 수호대 오백 명을 맞아 힘든 싸움을 벌였다.

부운환의 눈길이 섭우생의 왼팔에 못 박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우생, 그때를 기억하지?”

“예, 물론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묻지 않는다.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운화와 섭우생, 두 사람의 기억이 함께 과거로 돌아갔다.

☆ ☆ ☆

쩡! 쩌정! 쩌엉―!

부운화와 하시르의 싸움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쌍병의 장점은 한 손으로 방어하고 한 손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양손에 무기를 들 경우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부운화는 쌍검, 하시르는 쌍도를 사용하니,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승부가 좀처럼 나질 않았다.

그사이, 뒤에서 틈을 노리던 오백 기마병이 다리를 건너려 하고 있었다.

다리는 마차 세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다 보니 파고들 틈은 충분했다. 섭우생과 진구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마병을 막으랴, 거센 빗줄기 사이로 쏘아지는 자이혼의 철시를 막으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번쩍!

“왼쪽! 철시다!”

까아앙―!

“크윽……!”

“진구야!”

왼쪽을 막고 있던 진구의 복부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어떻게 철시는 막았지만, 그에 대한 충격으로 몸이 뒤로 휘청거리며 양손이 위쪽으로 들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텐챠이 수호대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묘한 기합성을 지르며 두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하체를 노려오는 공격에 결국 복부를 내주고 만 것이다.

“이…… 자식드을―!”

푸화악―!

히히힝―!

진구가 입가로 핏물을 주르륵 흘리며 적룡창을 휘두르자 그에게 상처를 입힌 두 기마병이 말목과 함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꼬꾸라졌다.

연신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진구의 것인지, 아니면 죽은 기마병의 것인지 모를 붉은 핏물이 섞여서 흘러내렸다.

진구의 애마 삭풍이 뒤로 조금 물러섰다.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진 진구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진구야!”

섭우생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진구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변을 느낀 텐챠이 수호대가 진구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상처 입은 진구에게 너무 신경을 쓴 탓일까.

섭우생은 자신을 향해 번쩍이는 자이혼의 시광(矢光)을 보지 못했다.

쒜에엑―!

“흡……!”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섭우생이 철선을 휘둘렀으나 이미 철시의 날카로운 촉이 섭우생의 어깻죽지를 파고들고 있었다.

섭우생이 할 수 있던 것은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살의 방향을 옆으로 한 치가량 틀어 버린 것이었다.

푸확!

그 한 치 덕분에 섭우생은 왼팔이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팔이 잘리진 않았어도 어깨 아래쪽 절반 가까이가 움푹 파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다.

신경과 힘줄이 산 채로 뜯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섭우생은 몸부림쳤다.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고 입속의 혀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크…… 하아앗―!”

쩡! 쩌정! 쩡! 푸확!

상처 입은 호랑이에게 덤벼드는 들개처럼 들이닥치는 기마병들을 향해 섭우생의 철선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단단한 철덩어리가 되어 어깨를 후려치고, 촤악― 하고 펼쳐지는 부채의 날카로운 살로 상대의 목을 갈랐다.

순식간에 세 명의 기마병이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쏴아아아―

흐린 하늘에선 장대비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쏟아졌다.

부운화는 쌍검을 크게 휘둘러 하시르를 떨쳐 낸 뒤 뒤로 물러섰다.

우생, 진구.

둘 다 큰 상처를 입었다.

바닥에 십여 기의 기마병이 쓰러져 있지만, 단지 그뿐이라 더 이상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우생! 진구!”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부운화는 두 사람의 눈에서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뒤로 물러서라!”

“하…… 지만…….”

“어서!”

부운화의 쌍검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기운이 넘실넘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일 만큼 유형화된 강기(剛氣)였다. 내리는 빗물이 순식간에 타서 증발해 버릴 만큼 강력한 기운이었다.

부운화에게서 느껴지는 결사항전의 기세를 느낀 것일까.

하시르에게서도 뿌연 안개처럼 진득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하시르의 말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사이 섭우생과 진구는 말 머리를 돌려 운화의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안 그래도 계속된 싸움으로 이미 다리의 끝부분까지 밀려 있는 상황인데, 두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니 다리의 빈 공간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끼요오옷―!”

“히야앗―!”

애초에 진구와 섭우생을 노리던 기마병들은 두 사람이 물러서자 끝까지 쫓으려는 듯 운화의 옆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푸화하학―!

히히힝―!

핏물이 하늘을 수놓았다.

한 쌍의 장군검으로 마치 날개를 펼치듯 촤악! 하고 양쪽으로 그려 낸 커다란 원이 부운화의 옆을 통과하려던 기마병과 기마를 함께 두 동강 내 버렸다.

후두둑―

몸이 조각난 채로도 앞으로 달리려던 말들이 이내 육편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일검에 기마병과 기마를 통째로 갈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무공이었다.

차마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멈춰 버린 기마병들 앞에서 부운화는 강렬한 기파를 쏘아 내며 나직하게 외쳤다.

“아무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

쏴아아아―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홀로 오백 기마병을 막은 부운화는 또 다른 영웅의 표상이었다.

천하의 하시르마저 할 말을 잃고 잠시 멈춰 선 순간, 상황을 급변시키는 사건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쿵! 쿵! 쿵! 쿵!

“이놈들―!”

다리 건너.

즉, 하시르가 지키고 있는 쪽의 땅에서 강줄기를 타고 거구의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 장 거리에서도 그 육중함이 느껴지는 거구를 가졌으면서도 놀랄 만큼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삼대천의 마지막 한 사람, 우르칸이었다.

상류 쪽에 있는 다른 다리를 통해 건너온 모양.

우르칸의 뒤로는 스무 기가량의 기마병들도 보이고 있었다.

“또 지령을 어기고 멋대로 자리를 벗어났군요.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시르는 푸념을 내뱉으며 부운화를 바라봤다.

“표풍검, 어찌할 것입니까? 이젠 이 다리를 포기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정면에는 하시르와 오백기의 기마병, 그리고 멀리서 활을 겨누고 있는 자이혼.

그리고 옆에서는 우르칸과 스무 기가량의 기마병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도 다리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건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을 터.

히히힝―!

부운화는 애마 은수의 고삐를 잡아 당겨 뒤로 좀 더 물러섰다.

지금까진 다리의 끝부분을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면, 이젠 다리를 아예 넘어온 셈이었다.

“다리를 지키는 것은 이제 포기하는 것입니까?”

“아니.”

“……?”

“전투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지. 천기, 지리, 인력.”

“그건 왜……?”

“이곳에서 너는 그 세 가지 중 몇 가지를 가졌지?”

하시르는 움찔했다.

그는 잠시 부운화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는 먹구름을 올려다보고, 뒤쪽에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텐챠이 수호대를 한 번 쳐다본 뒤,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다리를 쳐다봤다.

“설마……?”

경악과 불신이 뒤섞인 하시르의 눈빛을 받으며 부운화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우르르릉―

때맞춰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으로부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석조 다리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이 느슨해진 돌 틈 사이로 순식간에 흘러나갔다. 하시르의 얼굴에서 경악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우리 군사가 그러더군, 이 지역 주민들은 이 시기만 되면 홍수가 나는 바람에 매년 다리를 새로 지어야 한다고. 상류 쪽에 둑이 하나 있는데, 그게 비가 많이 오면 매번 터져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튼튼하게 다리를 지어도 무너져 버린다고 말이야. 그 때문에 매년 관아에서 부과하는 노역이 끝나질 않는다고 불만이 많다고 했어.”

“이, 이런……!”

“영매라던데, 귀신이 이것까진 말해 주지 못했던 모양이야?”

부운화와 섭우생이 서류 더미 속에 틀어박혀 전투를 구상하던 중, 가장 싸우기 좋은 지역이라고 꼽아 놓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항주와 안휘성의 경계선이었다.

매년 이맘때 즈음이 되면 엄청난 폭우가 내리고, 폭우 때문에 강물이 불어 다리를 무너뜨린다.

수공(水攻)을 하기에 최적의 지형이자, 절묘하게 추적을 끊을 수 있는 최고의 퇴로였던 것이다.

싸움에 있어 지형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였다.

하시르는 그것에 소홀했고, 부운화에겐 이미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당했군요…….”

하시르는 탄식했다. 그는 부운화의 옆으로 파고들 틈이 있을까 해서 살펴봤지만, 그런 것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부운화는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쌍검을 양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다리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지만, 부운화에겐 그 넓이를 모조리 틀어막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

하시르는 부운화를 뚫고 나아가 볼까도 생각했으나, 자칫 잘못된 판단으로 시간을 끌다간 오백 명의 텐챠이 수호대가 홍수에 휩쓸려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전원 후퇴! 후퇴한다!”

하시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오백 기의 기마와 함께 물러서며 하시르는 마지막으로 집요하게 소리를 질렀다.

“우르카안―! 절대로 놓쳐선 안 됩니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우르칸은 아직 십오 장 거리에 있었다. 우르칸은 하시르의 말을 들었는지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그런 우르칸의 좌측.

주변의 토사를 온통 무너뜨리며 우르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있었다.

강물이었다.

몇 만 근의 무게가 실려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의 수류(水流)가 돌풍을 일으키며 달려와 어느새 우르칸을 제치고 다리를 덮쳤다.

우르르릉―!

콰과과과과―!

아무리 인간의 힘이 대단하다고 한들, 자연의 힘에 비할 수는 없다.

땅바닥을 휩쓰는 용의 모습이 이러할까.

엄청난 장대비 속에서 제방이 무너지고 쏟아져 내려온 물은 순식간에 다리를 무너뜨리고 그 주변의 흙덩어리들을 모조리 휩쓸고 있었다.

콸콸 흐르는 물.

그 속에는 상류 쪽에서 떠내려 온 통나무라든가 초옥의 잔해 같은 것들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그 속에는 어쩌면 사람도 휘말려 있을 수 있었다. 거대한 자연의 힘은 경이롭다 못해 공포스러웠다.

“뒤로! 뒤로 더 물러서!”

하시르는 악을 쓰며 병력을 더욱 뒤로 물렸다.

만약 그들이 저 다리 위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한들, 저런 어마어마한 힘 앞에선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버렸을 것이다.

“하나는 됐군.”

부운화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섭우생과 진구가 상처를 좀 입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하시르와 오백 기마대의 추격은 따돌렸다.

반짝!

쒜에에엑―!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철시가 하나 날아왔으나.

까아아앙―!

부운화는 장군검을 휘둘러 철시를 쳐 냈다.

힘을 잃은 화살은 거세게 흐르는 강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서운 기세로 흐르는 강물 너머로 부운화와 하시르의 시선이 뜨겁게 맞부딪쳤다.

“이제 마지막 하나인데…….”

부운화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카하아아앗―!”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우르칸.

몽고 최고의 괴력난신(怪力亂神).

전장에서 달려드는 전차를 맨몸으로 박살 낼 수 있는 괴물이 바로 그였다.

부운화는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추적이 끊겼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외의 방향에서 우르칸과 기마병이 나타난 것이다.

한 팔이 봉쇄된 섭우생과 복부가 길게 갈라진 진구는 제대로 싸울 수 없을 터였다.

‘내가 싸우면…… 아니, 그러면 발이 묶인다. 위험해질 수 있어.’

이미 하시르는 기마병들을 이끌고 강 상류 쪽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후퇴하는 듯이 보였지만 속셈은 빤했다. 강물의 흐름이 얕은 곳으로 가서 강을 건너 우회해 올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끄는 건 위험해. 일단 도주한다. 우생, 진구를 도와줘. 뒤는 내가 맡는다.”

“둘째 형님!”

“명심해. 절대 속도를 늦추면 안 된다. 내가 뒤로 빠지더라도 원래의 경로를 따라가. 그럼 나중에라도 만날 수 있다.”

섭우생은 부운화와 결연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진구의 말고삐를 함께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가만히 있어.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게 상처에 힘을 풀지 마라.”

섭우생과 진구의 말이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겁쟁이들! 도망칠 셈이냐!”

우르칸은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부운화는 아예 말 머리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뒤,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챙! 하고 앞으로 내민 쌍검에서 예기가 번뜩였다.

이제부터가 힘든 싸움이다.

정면으로 싸우는 것이면 모를까, ‘도주’에서 우르칸을 상대하려면 아예 접근전이 벌어지지 않도록 거리를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단병(短兵)인 장군검으론 여러모로 불리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이 괴물 같은 작자라면 검에 베이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은수의 발목은 부러뜨리겠지. 그럼 안 돼.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해야 한다.’

부운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르칸은 덩치가 크긴 하지만, 달리는 말과 맞먹을 만큼 빠르다.

게다가 본능적인 감각이 좋고 집요하니 이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또 있을까.

‘이대로면 결과는 빤해.’

잠깐은 버텨도 결국 우르칸이 상처 입을 것을 각오하고 덤비면 발목을 붙잡힐 수밖에 없다.

그럼 기마병이 섭우생과 진구를 쫓을 테고, 자칫하다간 여기서 뼈를 묻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 일단 두 사람을 먼저 살려야 돼. 내가 남으면 되는 일이다.’

부운화는 마음을 결정하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예 이 자리에 멈춰 서서 추적을 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고민할 것 없어. 내가 막아 줄 테니.”

“……?!”

갑자기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부운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관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나무 꼭대기에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사내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건장한 체구에 검은색 무복. 얼굴엔 대나무로 만든 죽립을 쓰고 있다.

사내는 나무 위에서 휙― 뛰어내려 양손과 양발을 모두 사용해 네 발 짐승처럼 착지했다. 부운화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몸놀림이 매우 가벼우면서도 힘이 있어. 무슨 무공이지? 남만족의 무공인가?’

여러 가지 무공에 식견이 있는 부운화로서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처음 보는 움직임이었다.

사내는 상체를 일으켜 머리에 쓴 죽립을 정리하더니, 곧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부운화에게 집어 던졌다.

쒜엑―!

“음……!”

부운화는 날아오는 것을 받아 들며 신음을 흘렸다.

받고 보니 빗물에 젖지 않도록 기름을 먹인 종이였는데, 이렇게 가벼운 물건을 저렇게 빠르게 던지려면 무공에 깊은 조예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고수야!’

지금도 우르칸과 스무 기의 기마병이 뒤를 쫓아 달려오는 중이었다.

하나 부운화는 급박한 상황에 나타난 이 남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안 열어 볼 건가?”

“이게…… 무엇이오?”

“열어 보기 싫으면 관둬. 다만 내가 전해 줬다는 것만 잊지 마라.”

사내는 거친 말투에도 불구하고 울림이 좋고 낮아서 매우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만 나눠도 호감이 생기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사내의 목소리일 것이다.

부운화는 빗물에 젖지 않도록 주의하며 품속에서 기름종이를 펴 보았다. 기름종이 안에는 고급스런 양피지 조각이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엔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황제무불통지(皇帝無不通知).

“허어……!”

부운화의 시선이 흔들렸다.

―황제는 모르는 것이 없다.

전지전능한 황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이 글귀를 읽자 생각되는 것은 단 하나.

부운화가 떨리는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니, 죽립의 사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등을 돌려 우르칸이 달려오는 방향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거기 쓰여 있는 사람이 날 보냈다. 구해 주라고 하였으니 구해 준다. 빨리 가 봐.”

“이분이 어째서……?”

“글쎄, 그야 나도 모르지.”

“당신은 누구시오?”

“이름은 중요치 않아. 밝히고 싶지도 않고. 다만 그쪽의 대형이란 사람과 안면은 있어.”

아군인지 적인지.

여전히 판별이 안 되는 인물이지만, 부운화는 그가 대형을 말할 때 보인 약간의 호의를 믿어 보기로 했다.

“혼자서 막는 것이오?”

“당연하지. 더 필요가 없으니까.”

“…….”

“더 할 말 있나? 이제 슬슬 싸워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부탁드리겠소. 조심하시오. 우르칸은 강하오.”

“나도 강해.”

툭 던지듯 내뱉는 그 말이 어쩐지 든든한 마음이 들게 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굉장히 빠른 속도.

빗물이 사내의 몸을 쫓아가지 못한다고 느껴질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너는 뭐냐!”

후우우웅―!

우르칸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죽립사내를 보며 다짜고짜 주먹을 내려쳤다. 빗물이 폭발하듯 흩어지고 주먹에 얻어맞은 땅거죽이 펑! 하고 터져 나갔다.

꿍! 하고 땅이 울렸다.

스치기만 해도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처럼 여전히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놀라웠으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죽립의 사내가 마치 사냥감을 덮치는 범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우르칸의 왼쪽 어깨에 달라붙은 것이다.

“곰이군.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단순해. 날렵함이 없다.”

“뭣……!”

우르칸이 오른손을 뻗어 죽립사내를 붙잡으려 하였으나, 그는 이미 왼쪽 어깨에서 내려와 팔짱을 끼고 유유히 서 있었다.

그리고 우르칸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죽립사내가 아주 잠깐 머물렀던 우르칸의 왼쪽 어깨.

단단한 근육이 바위처럼 뭉쳐 있는 그곳에 어깨와 팔뚝에서 살이 한 움큼씩 뜯겨져 나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르칸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당연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거품을 물고 기절할 만큼 고통스러웠을 터.

상황을 지켜보던 부운화 역시 크나큰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언제 저런 공격을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피부가 강철만큼이나 질긴 우르칸의 살을 맨손으로 뜯어 낼 수 있을까.

‘악력이 굉장하고 손속이 잔인해야만 가능한 일이야. 대단한 사람이다. 어째서 저런 사람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

싸움은 일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우르칸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닌 만큼 다양하고 변칙적인 공격으로 특유의 괴력을 십 할 살려 공격하였으나, 그때마다 죽립사내는 상식을 벗어나면서 빈틈을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매번 우르칸의 몸에 상처를 남겨 놓았다.

“크허어어엉―!”

우르칸은 분을 참지 못하고 포효했다.

쾅! 꽈앙! 우드득! 콰앙!

땅거죽을 뒤집고, 바위를 집어 던졌으며,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니 주변에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옆으로 픽픽 쓰러졌다.

중간 중간에 죽립사내가 위험한 순간도 몇 번이나 있었고, 옷자락이 붙잡혀 땅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으나, 그래도 결국 피투성이가 된 쪽은 우르칸이었다.

우르칸은 마치 누군가가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살점이 뜯겨 나간 상처가 온몸에 새겨졌다.

반면, 죽립사내는 매번 산짐승처럼 날렵하고 냉혹한 움직임을 고수했다. 옷자락이 군데군데 찢어지긴 했으나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부운화는 그 모습을 보며 커다란 곰을 사냥하는 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문제없겠어.’

중간에 보다 못한 기마병 몇 명이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모두 죽립사내의 손에 목이 날아가거나 같은 편인 우르칸의 주먹에 얻어맞고 피 떡이 되었다.

두 사람은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둘만의 싸움이다.

누구도 끼어들지 마라. 끼어드는 자에겐 죽음뿐이다.

부운화는 말 머리를 돌려 먼저 간 섭우생과 진구의 뒤를 쫓아갔다. 죽립사내에 대한 고마움과 황제에 대한 의문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다그닥― 다그닥―

그는 은수의 고삐를 잡고 앞으로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굉음과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 ☆ ☆

부운화는 품에서 그때 받았던 종이를 다시 한 번 꺼내 보았다.

황제무불통지.

약간 흐려지긴 했으나, 여전히 글씨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황제 폐하가 알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부운화의 얼굴에서 수심이 깊어지자 옆에 있던 섭우생의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황제 폐하의 의중이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동태를 살피고 위험한 때에 사람을 보내서 구해 주셨어. 그럼 우리를 필요한 곳에 쓰겠다는 뜻이 아닐까?”

“…….”

“왜 그래? 뭔가 떠오른 게 있나?”

“그분께서 구해 주신 게 우리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대형을 위해서였을까요?”

“으음…….”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해요.”

섭우생은 오른손으로 까칠까칠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둘째 형님, 저희는 대형을 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이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이곳에 모여 있지도 않았어.”

“그럼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부운화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섭우생은 섬세한 책략을 구사하는 책사답지 않게 이렇게 가끔 대담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같은 밀정정치 시대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우생, 너는 좀 더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이지요. 뭘 그리 피곤하게 삽니까?”

“허어……!”

섭우생의 낙천적인 반응에 부운화는 헛웃음만 흘렸다.

“우리가 지금 텐챠이와 원의 잔당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황실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형의 식구들을 상처 입혔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죠. 제 말이 틀리면 말씀해 주세요.”

“……아니, 맞아. 네 말이 맞다.”

“예. 그럼 답은 간단합니다. 침묵하는 거죠.”

“침묵…… 이라면?”

“싸우지 않는 겁니다.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서 동태만 살필 뿐, 나서지 않는 겁니다. 정작 대형께서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우리끼리 싸움에 나서는 것도 뭔가 잘못된 일 아닙니까?”

부운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할까? 우리에 대해 지켜보고 있다는 이런 서신까지 받았으면서?”

“물론 정식으로 칙서가 내려오면 거부할 수는 없겠죠.”

“으음…….”

“결정하기 어렵다면 이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분의 의중을 한 번 떠보는 겁니다.”

“의중을? 어떻게?”

“최근에 항주 외곽을 지키는 병력이 강화되었다더군요. 차기 대장군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능력있는 장수인데, 대군을 이끌고 임시로 항주의 치안을 맡았다고 합니다. 기한은 한 달. 그 장수 덕분인지 지금 항주의 경계는 굉장히 삼엄해요.”

“치안…… 한 달…… 단오절 행사 때문이군.”

“예.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죠.”

부운화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이 순간에 새로 온 장수를 거론하는 모습에서 섭우생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장군을 만나고 와야겠군.”

“예. 둘째 형님은 선대 대장군의 행군사마였으니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러 보기엔 자격이 충분하죠. 안부 차 들러서 ‘높으신 분’의 의중을 한 번 살펴보는 겁니다.”

“만약 그 장군이 나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분이 우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예, 바로 그겁니다. 반대로 그 장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땐 이번 싸움에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죠.”

부운화는 잠시 제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곧바로 가 보겠어.”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섭우생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게…… 이번에 새로 파견된 장군이…….”

“……?”

잠시 후, 섭우생으로부터 그 장군의 이름을 들은 부운화의 얼굴은 벌레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지고 말았다.

☆ ☆ ☆

“누가 왔다고?”

“공손 대장군의 행군사마였던 분이 오셨습니다.”

“……혹시 이름이 부운화 아니던가?”

“맞습니다. 아는 분이십니까?”

단정하게 꾸며진 집무실 안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사내는 부관의 갑작스런 보고를 듣고 얼굴이 벌레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는 그 상태로 숨도 쉬지 않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부관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사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할 때 즈음,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예.”

부관이 나가고 잠시 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름한 무복을 입고 있음에도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 눈에 띄는 영준한 외모였다.

적룡기마대 부대주 부운화.

사내는 부운화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면서도 얼굴에서 탐탁지 않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군.”

“지난 북로원정에서의 공으로 파강장군의 직위를 하사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이번에 듣자하니 차기 대장군의 후보에도 오르셨다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말을 들었음에도 사내의 얼굴에선 적대적인 기운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건장한 체구.

머리는 짧게 깎았고 각진 턱과 날카로운 눈매에선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의 이름은 원회.

현재 명 제국 파강장군의 직위에 올라 있으며 군문(軍門)의 젊은 유력자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장수였다.

그의 원씨 가문은 북경의 세도가들 중에서도 유명한 명문가였고, 특히 원회의 형 원찬은 황문시랑의 직위에 올라 밀정정치를 주도하는 환관들 중에서도 상급의 자리를 꿰찬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세력과 힘이 있으니 아직 불혹도 넘지 않은 나이에 대장군의 후보로 꼽힐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듯이 원회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자긍심이 너무 강해서 승부욕이 과하고 매사에 직선적인 성격 탓에 일을 부드럽게 처리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원회는 전장에서 공을 많이 세우는 적룡기마대를 질시해서 가장 많이 부딪치고 사이가 안 좋았던 한 사람이었다.

원회는 부운화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으며 답했다.

“그래서 용건은? 보다시피 나는 바쁘다. 쓸데없는 잡담을 할 시간이 없군.”

“그렇습니까? 저는 북로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동료로서 안부 인사라도 할까 해서 온 거였습니다만.”

“동료라니, 우스운 이야기군. 너희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한 번 있지 않습니까? 대평야 전투에서 함께 참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때 너희는 주공(主攻)이었고, 나는 보급 부대의 수비였지. 그러고 보면 선대 대장군은 적룡기마대를 너무 끼고돌았어. 공격할 일만 생기면 적룡기마대에게 공을 몰아 주려고 했었으니까.”

“그렇…… 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그랬다. 대평야 전투는 내가 나섰어도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어. 그런데도 선대 대장군은 오백 명도 채 안 되는 너희에게 주공을 맡기더군.”

최대한 공손함을 유지하려던 부운화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대장군 공손웅은 부운화에게 있어서도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항상 능력에 맞춰 공평하게 일을 맡겼고, 누구에게나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정을 베풀던 덕장(德將) 중의 덕장이었다.

그런 사람을 친한 사람에게만 공을 나눠 주던 사람이라 매도하다니…… 화가 났다.

부운화는 마음 같아선 한차례 시원하게 쏘아 주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게다가 대평원 전투라면 텐챠이가 직접 나섰던 싸움이 아닌가.’

몽고 측 병력은 삼만, 명 측 병력은 이만 오천.

적 측 장수는 텐챠이였고, 삼대천이 원군으로 도착했던 싸움이다.

원회가 보급과 수비에 능력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만약 적룡기마대도 없이 공격에 나섰다면……?

원회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패다.

절세고수(絶世高手)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전략의 흐름을 끊을 만큼 출중한 장수가 있으면 전투의 향방이 바뀌는 법.

텐챠이 정도의 장수가 적이라면 병력이 두 배가 되어도 불안할 텐데, 하물며 같은 급의 장수도 없고 병력까지 열세인 바에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파강장군 원회.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군.’

오기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원회는 텐챠이와 삼대천, 그리고 적룡기마대의 능력을 폄하하는 경향이 강했다.

부운화는 잠시 노기가 끓어올랐으나 그것을 꾹 참아 내고 표정에서도 들끓는 감정을 지워 냈다.

지금 그는 황제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온 거였다.

원회와 일희일비하며 부딪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최근에 항주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대군이 나서서 항주를 지키고 끊임없이 뭔가를 경계한다더군요. 덕분에 치안은 좋아졌지만, 항주의 백성들은 혹시 무슨 큰일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금시초문이군. 게다가 치안이 좋아졌는데 불안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닌 척 딴청을 피우는 원회였으나, 부운화의 날카로운 식견은 그가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해 냈다.

‘숨기려고 하는군. 조금만 더 자극해 볼까?’

부운화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듣자하니 영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몇 년 전 단오절 때도 이런 식으로 경계가 심해진 적이 있다던데…… 이번 단오절에 혹시 큰 행사라도 있습니까?”

“…….”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손이 부족할 때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회는 잠시 눈을 가늘 게 뜨고 부운화를 경계했으나,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코웃음을 쳤다.

“혼자서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혹시 적룡기마대라도 다 데리고 있나?”

“다는 아니지만 일부는 데리고 있습니다.”

“그래 봤자 필요없다. 우리에겐 충분한 병사가 있으니 너희가 끼어 봤자 쓸데없는 사족일 뿐이다.”

“그렇…… 습니까?”

“단오절에 행사가 있는 것은 맞다. 명 제국 고관들의 회합이 있지. 그 때문에 치안을 더 철저히 살피는 것이다. 물론 그 일엔 나와 내 부하들이면 충분하다.”

원회는 콧대를 세우며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운화를 내려다봤다.

마치 너희 같은 것들이 없어도 충분히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도울 일이 혹시라도 있다면…….”

“없어. 없으니까, 다신 이쪽에 기웃거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차피 군문에서도 나갔다던데, 그런 거에 신경 쓸 필요 있나?”

내뱉는 말에 무시와 경멸이 가득했다.

게다가 더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듯 원회는 자리에 앉아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만…….”

부운화는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무실을 빠져나오고, 부관이나 병사들이 보는 지점까진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였으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나오는 순간 찌푸려진 그의 얼굴에선 노기가 가득했다.

‘원회여, 원회여.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텐챠이와 삼대천이 함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필요없다고?’

적룡기마대를 필요없다고 내치다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원회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중요한 전력을 밀쳐 낸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되리라.

‘그래도 한 가지는 얻었군. 황제 폐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어. 우리에게 뭔가 전할 말이 있었다면 원회가 이런 식으로 대우할 리가 없지. 우린 자유야. 이번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한발 물러서 있을 수 있겠어.’

그가 고민하던 일 한 가지가 다행히 깔끔하게 결론지어졌다. 부운화는 한 가지 고민이 해결되자 자연스레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장기린.

혹시 길이 엇갈릴 경우에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약속된 지점에 표식을 남겨 놨으나 벌써 육 개월째 연락이 없었다.

‘단오가 지난 뒤에도 연락이 없다면…… 직접 찾아봐야겠군. 대형, 부디 무탈하시기를.’

부운화는 지평선으로부터 서서히 붉은색이 퍼져 가는 하늘을 묵묵히 올려다봤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치, 다가올 앞날의 파란을 예고하듯이.

☆ ☆ ☆

단오(端午).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불리는 명절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그중 ‘굴원설’이 정설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굴원은 전국시대의 강국 중 하나였던 초(楚)나라의 왕족이었다.

학식이 높고 언변이 뛰어나 왕족을 통괄하고 보좌하는 삼려대부(三閭大夫)의 직위에까지 올랐는데, 이때 굴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여인의 자태를 묘사하는 데 뛰어난 시인이자 풍류재자(風流才子)라 불리는 중국 최고의 미남 송옥(宋玉)이다.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진(秦)나라가 한창 강성해지던 시절, 초나라는 진나라와 친해질 것을 주장하는 파벌과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옆의 제나라와 동맹을 맺자는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굴원은 그중 제나라와 동맹을 맺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굴원은 그때 뛰어난 언변과 능력을 살려 제나라와의 동맹을 거의 성사시켜 놓았으나, 항상 승승장구하던 굴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간신들이 초나라의 왕과 굴원을 이간질시켜 결국 굴원을 나라에서 추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세상이 혼탁하여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라는 말과, 어째서 함께 취하지 않고 괴로워하느냐는 말에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세속에 몸을 더럽힐 수는 없다’라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초나라는 굴원이 거의 성사시켰던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진나라에게 화평을 청했는데, 나중에 마각을 드러낸 진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초나라 오백 년 도읍지인 영성이 함락되었을 때, 여전히 초나라의 안위를 바라던 굴원은 품속에 돌을 끌어안고 멱라강(汨羅水)에 뛰어들었다.

나라의 배신을 받고 쫓겨났음에도 죽는 그 순간까지 나라를 걱정하던 희대의 충신.

어찌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백성들은 굴원의 시신을 물고기들이 훼손할까 걱정되어서 강물에 주먹 찰밥을 던졌고, 매년 굴원이 죽은 날에는 그를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고 창포 뿌리를 빻은 웅황주(雄黃酒)를 액막이용으로 마셨는데, 그게 바로 단오절이다.

오월 오일.

춘절, 원소, 중추절과 함께 명 제국의 사대명절에 들어가는 날인 것이다.

끼이익―

악양루(岳陽樓)에서는 단오절이라는 대목을 맞아 모든 일꾼들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액막이 술인 웅황주와 찹쌀, 대추, 팥 등을 섞은 종자를 먹기 위해 악양루의 입구 밖으로 무려 십 장 가까이 사람들이 줄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는 말이 딱 맞았다.

특히 악양루의 점소이장(長), 임춘삼(林春衫)은 온몸이 땀에 젖을 만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점소이들은 일을 잘하는지, 혹시나 실수해서 안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는 손님은 없는지.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 중에 차례가 잘못된 사람은 없는지.

임춘삼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일만 해도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너무나도 많았다.

“맛있었네. 춘삼이, 자네가 있어서 이곳에 오게 된다니까.”

“역시 악양루야.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네.”

나가는 손님들이 한마디씩 남겨 주는 칭찬이야말로 임춘삼의 삶의 보람이자 활력소였다.

그가 겉으로 하는 일이든,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이든.

힘들고 지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진심이 담긴 칭찬의 말을 듣고 나면 모든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악양루 최고의 점소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악양루를 찾는 손님들의 팔 할 이상이 임춘삼의 고정 고객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진 대인이 차를 다 마시고 나가시는군. 그럼 특급 자리가 하나 비고, 그 자리에 들어갈 다음 차례는…… 아! 팽가의 둘째잖아. 이 사람은 까탈스러운데……. 용정차가 준비되어 있었나? 할 수 없지.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 일단 데리고 와서…….’

임춘삼은 머릿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이나 떠올리는 손님들의 정보를 정리하며 팽가의 둘째 공자를 안내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려는 참이었다.

“어……?”

그런데 진 대인이 나간 자리를 치우러 간 하인들이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임춘산의 눈에 포착이 되었다.

악양루 안의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규칙과 흐름을 가지고 움직인다.

특히 악양루에서 일하는 점소이나 하인들은 절대로 그 흐름을 깨선 안 되는 법.

임춘삼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진 대인이 머물렀던 특급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임춘삼은 손님들에겐 지극한 공경을 보이는 하인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겐 염라대왕보다도 더 무서운 지휘자였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하인들에게 호통을 칠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 허엇!!”

하인들에게 호통을 치려던 임춘삼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방금 진 대인이 비운 자리이니 텅 비어 있어야 마땅하건만, 황당하게도 그 자리엔 처음 보는 사내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 화로 위에 얹혀 있는 찻주전자, 찻잔, 먹다 남은 떡들이 다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이었다.

임춘삼은 하인들이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한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특급 자리는 개인실이다.

귀한 손님들이 비밀스런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독립된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즉, 바꿔 말하면 하인들과 점소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정식 입구를 통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밀실이라는 뜻도 되었다.

그런데 그런 특급 자리에 못 보던 사내가 들어와 있었다.

하인들로서는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많은 점소이와 하인들의 눈을 다 피해 내다니, 대단한 고수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임춘삼은 그 사내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손님, 저는 악양루 점소이들의 장을 맡고 있는 임춘삼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쩐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사내는 대답 대신 임춘삼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순간, 임춘삼은 깜짝 놀랐다.

눈빛이 너무나도 맑았다.

맑고 깊어서 그 깊이를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었다.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몸인데, 이 사람의 그릇이나 능력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임춘삼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내가 거물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입고 있는 검은색 비단 장포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지만, 그 재질로 보아서 분명 명문가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눈빛이 맑고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에선 절도가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쉬이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도사들이 이런 느낌을 풍기던데, 혹시 도가(道家)쪽 사람인가?’

만약 그렇다면 젊은 사내가 옆에 지팡이를 하나 비스듬히 기대어 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도가의 도사들은 산을 탈 때 지팡이를 많이 쓰니까 말이다.

“당신이 점소이장이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이 악양루의 점소이장, 임춘삼입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 대인이 썼던 찻잔을 탁! 하고 다탁 위에 거꾸로 엎었다.

찻잔의 바닥이 위로 올라온 상태.

그는 그 위에 저금 한 쌍을 이(二) 자로 나란히 올리더니, 다탁 옆에 장식용으로 놓아 둔 소국(小菊)을 한 송이 떼어 찻잔 위에 올려 두었다.

“헛……!”

설마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임춘삼이었으나, 모든 것을 마친 뒤 이제 됐느냐고 묻는 듯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는 사내를 보며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임춘삼은 그때까지도 멀뚱멀뚱 서 있던 우둔한 하인들을 황급히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바깥에서 들여다볼 수 없게 문을 꼭꼭 닫아 버렸다.

성질 더러운 팽가의 둘째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악양루에는 특특특급 경계령을 내려도 모자랄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임춘삼은 한달음에 사내의 곁으로 다가와 극도의 공경을 표하며 포권을 취했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하오문 총타 제이지점 점주, 임춘삼이라고 합니다. 검선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이(二) 자로 놓인 저금과 그 위에 놓인 소국은 구양세가의 상징인 검과 국화를 나타낸다.

거기에 그 상징을 거꾸로 뒤집은 찻잔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오직 한 사람, 검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오문과의 밀마였다.

“그분께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배웠소.”

“아……!”

하오문 총타 제이지점 점주, 임춘삼은 크게 격동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검선에게 몇 가지를 배웠단다.

즉, 제자란 의미였다.

구양세가의 직계에게도 가르침을 내리지 않기로 유명한 그 검선의 제자라니.

임춘삼은 개방과 정보제일문(正報第一門)을 다투고 있는 하오문에서 천하제일인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검선이 제자를 뒀다는 사실을 지금껏 알지 못했다는 게 정녕 믿기지가 않았다.

만약 검선 본인만이 알고 있는 밀마를 먼저 보여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진위 여부를 크게 의심했으리라.

하지만 이젠 정반대였다.

아마 검선이 제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쪽 세계에서 그가 최초로 알게 된 정보일 터.

임춘삼은 도저히 격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실(內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쪽에서 편안히 하시지요.”

“알겠소.”

스르륵―

사내가 일어서며 옷자락이 펄럭이자 임춘삼은 새벽녘의 청량한 바람이 그에게 불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다! 이 사람은 진짜배기야!’

임춘삼은 이 사내가 조만간 무림에 큰 풍파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먼저 길을 안내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대인의 성함을 물어도 될는지요? 앞으로 대인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성함을 알아 두고 싶습니다.”

임춘삼은 거절당할 것을 대비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선선히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사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 이름은 장기린이오.”

<11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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