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74화 (60/686)

11권

第七十一章 ― 적룡출도(赤龍出道)

노을이 진다.

새파란 하늘을 은은한 적색으로 불태우는 노을이다. 하루의 수명을 다하고 죽어 가는 해의 마지막 절규는 무척이나 뜨겁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면 정오의 따가운 햇살보다도 오히려 더욱 강렬한 면이 있다.

어째서 그럴까.

양광(陽光)의 세기로만 따지면 절반도 안 될 텐데.

한 번 본 노을빛은 기억에 남는다.

정오의 햇살은 쳐다보기도 싫지만, 노을녘의 햇살은 가던 길을 멈추고서라도 묵묵히 지켜보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마 노을빛엔 많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은은한 적황색 하늘엔 하루 온종일 세상을 밝혔던 태양의 뜨거움이 남아 있지만, 앙상한 노인의 손과 같은 쓸쓸함 또한 남아 있다.

상반된 그 두 가지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원인일 터.

거기다 장기린은 노을을 보면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텐챠이와 벌였던 북방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다.

수백, 수천의 생명이 사라지는 잔혹한 곳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한 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순간, 장기린은 그때 하늘을 뒤덮은 노을빛을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순간,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장기린은 텐챠이에게 이전 같으면 절대로 입힐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혔다.

아즉물(我卽物) 물즉아(物卽我).

무념무상(無念無常).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관조하자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린은 지금 다시 그 단계에 올라 있었다.

이전처럼 우연히 오른 것이 아니라, 지난 이백 일간 체계적으로 무공과 심공에 대해 배우고, 도경(道經)에 대해 참오하면서 스스로 언제든 그 경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기린은 지극히 평온한 심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엔 분노도 없고, 살기도 없으며,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집착마저 없었다.

무아지경(無我之境).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몰아(沒我)되어 자연과 동화되어 버렸다.

부우웅―

지금 그의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좌우, 위아래 할 것 없이 파란 불빛이 그물망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중이다.

장기린은 흐름에 몸을 맡겼다.

바람의 소리를 듣고.

노을이 말해 주는 조언을 새겨듣는다.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어 내자 그물처럼 주변을 뒤덮었던 검기(劍氣)들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 주었다.

툭.

장기린의 수도(手刀)가 검선의 목에 닿았다.

마침내 모든 검기를 뚫고 이백 일 만에 처음으로 검선의 몸에 손을 댄 것이다.

“아…….”

장기린은 드디어 성공했다는 기쁨을 잠시 만끽하였으나, 이내 가슴에 닿아 있는 묵직한 감촉을 느끼고 탄식하고 말았다.

검선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는가?

큰 착각이다.

장기린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검선의 수도(手刀)는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역시, 아직은 부족한가 봅니다.”

장기린이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하자 검선 구양재인은 잘 다듬어진 자신의 백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 말거라. 겨우 이백 일 만에 이 정도 수준에 오르다니, 네 성취가 참으로 놀랍다. 이젠 팔성의 공력으로는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검선의 목소리에선 뿌듯한 자긍심마저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장기린의 이러한 성취는 모두 검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매일같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장기린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그는 이백 일간 온갖 정성을 들여 장기린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넌 처음부터 완성에 가까워져 있었다.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가진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몰랐을 뿐이야.”

몸 둘 바를 모를 칭찬.

장기린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무리(武理)로는 이미 내 수준에 근접했다. 앞으로 공력만 충분히 쌓으면 천하에 상대할 자가 몇 없겠어.”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다. 검선의 평가야.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다 검선 덕분이라는 듯 정중히 예를 표하는 장기린에게선 도인들에게나 느낄 수 있을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검선의 눈빛이 지긋해졌다.

“청명경(靑明經)은 얼마나 익혔느냐?”

“이제 절반 정도 익힌 듯합니다.”

“절반? 허허, 겨우 절반을 익혔는데 살기를 모두 지우고 도향을 내뿜는다? 과연 묵오자(墨烏子) 늙은이가 내놓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이유가 다 있었던 모양이다.”

검선과 함께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전대 기인. 풍마존(風魔尊)이라 불리는 묵오자의 이름이 나왔다.

장기린에게 전수된 청명경 일천 자(字)는 검선이 묵오자에게서 내기 승부로 따낸 귀물(貴物)이었던 탓이다.

“너는 내 무공에 대한 깨달음과 경험을 다 빼앗아 갔구나. 이제 나에겐 아무것도 안 남았느니라.”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린아.”

“예.”

“이제 곧 단오다.”

“…….”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 나라의 잔당들이 꾸미는 음모가 심상치 않다. 네가 나가서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스승님, 그럼……!”

장기린은 검선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구양세가의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으니 사부는 아니지만, 무공보다 더욱 큰 가르침을 준 사람에게는 스승이란 말밖에 어울리는 단어가 없었다.

“이제 너를 내보내도 괜찮을 것 같구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기린아.”

“예.”

“복수는 할 것이냐?”

장기린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일단 휘연을 구하는 것만 생각할까 합니다.”

“그래, 그 어떤 것보다 네가 아끼는 생명이 먼저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예.”

“만년화리의 내단이나 천년설삼이라…… 세가의 창고에 있다면 바로 내줄 텐데, 안타깝구나. 우 노인의 말대로 황실 보고에나 있을 법한 귀물이다. 네 생각대로 공을 세우는 것밖에 방도가 없겠어.”

검선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젠 엄연히 명(明)의 천하인데 감히 원의 잔당이 다시 설치려고 하다니, 무인이라면 마땅히 모두가 분개하여 일어서야 마땅할 사건이거늘.”

“예전에 무림과 관부는 별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무림인이 무공을 배우는 것은 모두 협(俠)을 지키기 위함이다. 협이란 관에서 다 들어주지 못하는 민초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 그 협이라는 것이 주로 부패한 관리들과 부딪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것이지, 전혀 다른 세계라는 뜻이 아니야. 오히려 협을 지키지 않는 무림인은 파락호와 다를 게 없다!”

검선의 준엄한 일갈엔 미미한 분노마저 담겨 있었다.

협을 지키지 않는 무림인은 힘이 센 파락호일 뿐이다.

최근 무림엔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어떻게든 가진 힘을 과시하려고 나서는 어린아이 같은 작자들뿐이었다.

“협을 지키지 않는 무림인은 파락호다…….”

장기린은 검선의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보았다.

“마음 같아선 내 직접 나서고 싶으나, 내 나이와 위치 정도가 되면 보이지 않는 제약이 많은 법이지. 내가 움직이면 별호에 존(尊) 자를 붙이고 있는 나머지 네 늙은이도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질 것이야.”

“무림오존이 다 움직이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괜히 내가 나섰다가 그 난리를 만드느니, 네가 나서서 처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요령들은 다 기억하느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은 거리낌없이 모조리 사용하거라. 네가 나의 대리자다. 검선의 이름이 통하는 곳에선 얼마든지 힘을 가져다 써.”

호탕하게 말하는 검선에게 장기린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장기린이 검선에게 배운 것은 청명경과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무림이라는 곳의 상식.

강호에서 해야 하는 행동.

무인들의 능력이 세상 곳곳에 얼마나 뻗어 있으며,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까지.

검선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장기린에게 가르쳐 주었다.

“내게 네 나이 또래의 손녀만 있었다면 사위로 맞았으련만…….”

“…….”

“어때? 화아는 너무 어린가?”

장기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안다, 알아. 네놈에겐 그 휘연이란 아이뿐이지. 하지만 뭐 어떻느냐, 능력만 있다면 장부에게 삼처사첩은 흠이 아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농담이니라. 아,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농담은 아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구양세가로 들어오거라.”

자신의 손녀를 본처가 아닌 첩으로 맞아도 괜찮으니 구양세가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장기린은 거기서 검선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다.

검선은 장기린을 이용하고 싶다거나 그런 이해타산적인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장기린과 좀 더 깊은 관계를 맞고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정(情)을 느낄 수 있었다.

‘귀한 인연을 맺었어.’

십 년을 함께해도 정이 안 가는 자가 있고, 고작 사흘을 함께 해도 친혈육처럼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장기린에게 검선은 후자였다.

첫 만남은 과히 좋지 않았으나 그 뒤에 이어진 인연은 그 어떤 만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많은 것을 배웠고, 검선과 함께한 이백 일은 매 순간이 항상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처럼 경이로웠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생판 모르는 남을 붙잡고 옳은 길로 가도록 만들기 위해 이백 일이나 정성을 쏟을까?

더 좋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화려한 말재주가 없는 장기린으로서는 그 이상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검선은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로 받아 주었다.

“기린아.”

“예.”

“중도(中道)다. 어떤 일에서든 중용(中庸)과 중도를 잊지 말거라.”

짧은 말속에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다.

장기린은 깊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채 한참 동안이나 일어설 줄을 몰랐다.

변화를 인정받고 지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날, 잠시 조용히 몸을 눕히고 있던 적룡(赤龍)이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

“장 대인, 괜찮으십니까? 생각할 게 있으시다면 잠시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악양루 점소이장(長) 임춘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오문 총타 제이지점의 점주인 임춘삼은 비밀스런 자리로 안내를 하자마자 갑작스레 생각에 잠긴 장기린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이런 손님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장기린은 그런 임춘삼의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한가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악양루까지 온 값어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검선에게 강호의 전반적인 상식에 대해 배웠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바로 개방과 하오문이었다.

개방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거지들을 이용해 정보를 모은다. 온 동네에 동냥질을 다니면서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거지들은 듣는 것이 많다.

마을에서 누가 제일 돈이 많은지, 어젯밤에 누가 싸웠고, 어느 집에 밥그릇이 몇 개 있는지까지도 알고 있다.

하오문도 마찬가지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기녀들이 다 듣고 있다.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나오는 고급 정보든 일꾼들의 신세한탄이든 기녀들은 모두 듣고 있다. 그 외에도 마부, 도곤들 같은 하류 인생들이 온갖 정보들을 하오문으로 물어 온다.

그리고 개방이나 하오문에서 정보 분류에 뛰어난 인재들이 그런 방대한 정보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뽑아내면…… 그게 동창이나 금의위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얼마나 감탄했던지…….

지금의 장기린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정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다. 예전처럼 관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도 없는 이상, 그에게는 하오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예, 말씀하시지요.”

“내가 점주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 항주의 동향과 몇몇 사람의 행방이오.”

“항주의 동향이라면……?”

“원의 잔당이 항주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워, 원의 잔당이 준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임춘삼은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렇소. 분명 뭔가 큰일을 노리고 있는 듯한데, 아직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찾아왔소. 하오문이 그걸 알아봐 주길 바라오.”

“원의 잔당…… 그럼 반란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으음, 죄송하지만, 그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말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실언이었습니다. 거짓을 말하셨을 리가 없겠지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임춘삼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큰일을 노린다…… 큰일…… 항주에서 큰일이라면…….”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하던 임춘삼은 이내 뭔가가 떠오른 듯 방의 한구석으로 가서 서찰 중에 붉은색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을 집어 들고 펼쳤다.

그리고는 그중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게 있었군요. 찾았습니다, 장 대인.”

임춘삼의 호들갑스런 행동에 장기린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무슨 일입니까?”

“단오날. 항주로 고관대작들이 모여들어 큰 연회가 있다고 하는군요. 이건 기밀 사항인데, 황제 폐하와 황족들도 모이는 자리라고 합니다.”

“……!”

장기린은 듣는 순간 ‘그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제국의 고관들이 일시에 몰살당한다면 나라는 붕괴된다.

텐챠이와 삼대천, 그리고 원의 잔당들이 충분히 노릴 만한 일이지 않은가.

“그걸 노리는 자들의 움직임도 조사할 수 있겠소?”

“아마 연회장 인근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능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소.”

“이렇게 심각한 사안이라면 대인께서 말하지 않으셔도 전력을 다해 조사해 봐야 할 문제이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금에 대한 것은…….”

“대금이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춘삼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 게다가 나는 이 이후에도 사람을 찾는 일에 관해 도움을 청해야 하오. 부담 갖지 말고 필요한 금액을 말하시오.”

“괘념치 마십시오. 검선께서 지금 저희 문주님의 생명을 구해 주셨던 일을 아십니까? 아무리 저희 하오문이 이재에 철저하다고 해도 구명지은을 입은 은인에게까지 이문을 따지지는 않습니다. 검선께 제공되는 정보는 대가를 받지 않는다. 문주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그렇소?”

“예. 그러니 찾는 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대답해 드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음, 내가 찾는 사람은…….”

장기린이 이름과 인상착의 등을 이야기하자 임춘삼은 아는 것은 최대한 자세히, 모르는 부분은 삼 일 안에 알아보고 서신을 전해 주겠다고 답했다.

장기린이 서신을 어디서 받으면 되냐고 묻자, 임춘삼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세상 어디에 있든지 알아서 찾아갈 테니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오문의 정보망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만.”

용무를 마친 장기린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를 입구까지 배웅했던 임춘삼이 다시 비밀 접선 장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은자 열 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기어코 정보비를 내놓고 간 장기린.

임춘삼은 빛나는 은자들을 보는 순간, 그동안 하오문에서 검선에 대해 은연중에 떠돌았던 소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검선이 하오문에 나타나면 모두가 정보비를 안 받으려 하지만 그가 떠난 뒤에는 어김없이 귀신이 놓고 간 것마냥 은자 열 냥이 남겨져 있다고 했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검선은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곤 했다.

‘이런 것까지 똑같다니. 검선의 제자가 확실해. 곧장 총타에 전서를 넣고 본 문의 전력을 기울여 도와야겠어.’

임춘삼은 곧바로 상황을 알리는 전서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뒤 특특급 지령을 나타내는 금실과 홍실이 뒤섞인 매듭을 묶어 전서구를 날렸다.

구구구구―

건강한 비둘기가 긴 울음을 터뜨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하늘을 가르는 전서구의 신형과 함께 무림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항주의 입구는 총 네 곳이다. 동서남북 사위(四圍)의 관문이 그것인데, 그중 북문은 북경과 남경으로 이어지는 대로(大路)로, 동문은 상해, 서문은 안휘와 하남, 남문은 절강과 강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 서문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흑의를 입고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무인 같아 보였으나, 무기라고 할 것은 없고 마치 노인처럼 지팡이를 들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는 마차와 사람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더니, 관문의 근처에 나있는 나무들만 줄곧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표로 하던 것을 찾았는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송(老松)이었다.

키가 장장 오 장(丈)이나 되는, 관문 주변에선 가장 큰 나무였다.

사내는 그 나무의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다가 정면의 가장 굵은 뿌리 사이를 지팡이로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흙을 다섯 치 정도 파내자 누군가가 고의로 파묻었음직한 돌이 하나 묻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넓적한 돌이었다.

윗부분의 흙을 치우자 그 가운데엔 네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경계(境界).

안(安). 항(杭).

“그랬나…….”

사내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속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그는 찬찬히 글씨를 다시 한 번 눈에 새긴 뒤 그 돌을 다시 뿌리 사이에 파묻었다.

한데, 처음과는 반대 방향. 글씨가 쓰여져 있는 부분이 바닥을 향하게 묻었다.

손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낸 사내가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사라진 자리.

노송 아래에는 누군가가 새로이 흙을 덮은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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