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二章 ― 단오혈사(端午血事)
단오를 맞은 항주는 크게 흥청거리고 있었다.
항주가 어떤 곳이던가. 대륙 최고의 유흥 도시다. 최고급 주루와 객잔들이 즐비한 금선로는 둘째 치더라도, 인근의 시전 거리와 서호의 나루터 쪽은 온 거리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인파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남경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안휘, 절강, 하남에서 단오의 축제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항주로 모여들었다.
굴원이 투신한 멱라강은 보지 못하더라도, 항주 서호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축제와 야경은 꼭 구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항주 전역이 많은 인파로 붐비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한산한 곳이 있었다.
금선상로(金仙上路).
서호제일이라는 창해루의 앞이었다.
현재 그곳으로는 황궁의 앞이 아니라면 평생에 한 번 볼 수도 없을 고관대작들의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차엔 대륙 어딜 가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가문들의 상징이 각각 깃발로 매달려 있었다.
산서공가(山西孔家).
북경서가(北京西家).
사천유가(四川劉家).
낙양원가(洛陽院家).
그런 식으로 최소한 종삼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이 나온 명문세가의 깃발만 해도 수십 개였다.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마차 수십 대가 줄을 지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경계하고, 마차에서 내리는 관료를 태우기 위해 가마꾼들이 가마를 든 채 대기했다.
사실 그 모습만 해도 꽤나 장관이었으니 처음엔 구경꾼들도 제법 모여들었으나, 그들은 마차의 십 장 밖에서부터 거친 외모의 사내들에게 막혀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창해루 십 장 앞쪽을 차단한 거친 외모의 사내들.
그들은 다름 아닌 철우파였다.
철우파뿐만 아니라 창해루의 흑상파, 북화적월루의 만홍파, 청풍객잔의 독두파까지, 금선로의 오대객잔(五大客棧)의 파락호들이 모두 모여서 창해루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상한데…….”
그중 한 사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길목을 지키는 험악한 사내들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눈에 띄는 사내였다.
칠 척 거구에 덥수룩한 머리, 호랑이 같은 눈에 밤송이 수염까지 갖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호한(豪悍)이다.
그의 정체는 바로 철우파의 두목 철우.
그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파락호들로부터 세 발자국 정도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무엇이 말인가?”
누군가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대답에 철우는 깜짝 놀랐다.
“백 총관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평범한 문사와 같은 외모의 백 총관은 철우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홍화객잔 말입니다.”
“으음…….”
홍화객잔이란 말에 백 총관도 느끼는 게 있는 듯 신음을 흘렸다.
“이번 오대객잔의 논의는…… 뭔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했지.”
“원래 ‘대연회’에서 홍화객잔은 기녀를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굳이 이번엔 내빈(內賓)의 호위를 담당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영…….”
“천화의 몸이 안 좋다고 하질 않았나.”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천화가 아프면 나머지 오화(五花)라도 내보내야지요. 내빈에게 자기 객잔의 기녀들을 보여 주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데 그걸 자기 발로 차겠다고 하니…….”
백 총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우의 지적이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서호제일(西湖第一) 창해루.
천상미태(天上美態) 홍화객잔.
항주일미(杭州一味) 청월루.
주향만리(酒香萬里) 북화적월루.
비안화숙(秘安話宿) 청풍객잔.
그것이 금선로 오대객잔을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 대연회는 명 제국 최고의 귀빈들을 맞아 그런 오대객잔 각자의 특성을 다 살리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서호제일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창해루에서 연회를 열고, 최고의 미인들을 데리고 있는 홍화객잔에선 기녀들을 파견한다. 항주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청월루에선 대숙수를 파견하며, 제주(製酒)의 대가를 보유하고 있는 북화적월루에선 술을 제공하고, 비밀을 지키는 데 익숙한 청풍객잔에서 내빈을 호위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두의 장점을 총합한 최고 중 최고의 접대였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홍화객잔이 ‘오대객잔 증명패’를 이용해 공식적으로 계획의 변경을 요청했다.
그리고 천화가 아프니 기녀들을 파견하는 일은 다른 객잔에게 부탁한다며 자신이 내빈의 경호를 맡겠다고 한 것이다.
나머지 다섯 객잔의 대표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굳어 있는 사이, 놀랍게도 대뜸 청풍객잔의 객주 방태풍이 그것을 승낙해 버렸다.
당사자들끼리 동의를 했는데 누가 뭐라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빈을 호위하는 일은 홍화객잔에게 돌아간 것이다.
“미리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겠나? 홍화객잔에서 화재가 난 뒤에 청풍객잔의 방태풍 객주와 홍화객잔의 사무혁 총관이 비밀 회동을 가진 것은 유명하지 않나?”
“으음, 그래도 이상합니다. 청풍객잔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인데, 비밀 회동을 갖고 거래를 했다면 당연히 홍화객잔에서 이득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청풍객잔이 기녀들을 제공하고 홍화객잔이 호위를 맡는 것은…… 아무리 봐도 홍화객잔의 손해라 이겁니다.”
최고급 귀빈들에게 기녀들의 미태(美態)를 뽐내다 보면 그에 혹한 귀빈들이 객잔의 손님이 될 수도 있다.
최고급 귀빈 한 명을 확보한다는 것은 일반 손님 백 명을 끌어모은 것만큼이나 큰 가치가 있는 일이거늘.
홍화객잔은 어째서 그런 큰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일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청풍객잔이 그만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 아니겠나?”
“으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일단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 그곳부터 집중해야 하네.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한시도 방심해선 안 되네. ‘그곳’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는 익히 들어 왔지 않나.”
“알고…… 있습니다.”
백 총관의 말이 백번 옳기는 하지만 철우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오대객잔의 모임 때 청풍객잔의 객주 방태풍의 모습을 떠올렸다.
뚱뚱하고 비대한 몸을 가진 방태풍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조용했다. 지난번 회의 때는 앞에 나서서 사방에 침이 튀도록 시끄럽게 열변을 토했거늘, 이번에는 이상하게 꼭 해야 할 말을 제외하곤 말을 아끼는 모습이지 않던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았지.’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무인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방태풍의 겉모습은 예전과 똑같았으나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마치 방태풍이 본인이 아닌 것처럼…….
‘내가 귀신에 홀렸나?’
철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
방태풍이 방태풍이 아니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여러모로 이번 대연회의 모든 것이 석연치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백 총관님의 말이 맞다. 일단은 외부부터 신경을 써야 할 테지. 만약 그들이 연회장을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철우는 어깨에 걸린 짐이 무겁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풍운객잔이 무너진 지 벌써 이백여 일.
그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지던 부담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철우는 애써 무거운 마음을 떨쳐 내며 눈을 부릅떴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는다. 절대로 지켜 내고 말 테다!’
☆ ☆ ☆
창이 다 닫혀 있는 어두운 밀실.
드문드문 모습이 드러난 몇몇 사내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어두워서 서로가 보이지 않을 테지만 이들에겐 대낮과 별 차이가 없이 잘 볼 수 있었다.
“항주의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이미 모두의 서명은 받았고, 그들 모두 대사(大事)를 벌여 보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런 놈들을 믿어도 되겠나?”
“믿어도 될 겁니다. 어리석은 자들이니까 말이죠.”
“하긴 욕심이 많은 자들이니 반드시 걸려들 테지.”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할 겁니다. 주체와 같은 자의 밑에 있다가는 평생 일인자가 되지 못할 테니까요. 우리 쪽에선 더욱 잘된 일이지요. 그쪽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이 없으니 말입니다.”
웅장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화를 나눈다.
그중, 부드러운 목소리 쪽은 즐거운 듯 웃음기마저 감돌았다.
“그래. 부담이 없다는 것은 큰 장점이지. 좋다. 그럼 믿도록 하지. 약속 시간은 언제인가? 술시(戌時:저녁 7시―9시)?”
“예, 그렇습니다.”
“그럼 약속 시간이 되면 우리도 곧바로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았군. 이제부터 모든 게 다시 시작되는 거야.”
“오랜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게 결실을 맺을 때가 온 것이야.”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밀폐된 마차의 안이었던 것이다.
거구의 그림자가 하나 보이고, 상대적으로 그보다 작은 체구가 하나, 호리호리한 체구가 하나 있고, 거구의 그림자보다 더욱 큰,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림자도 하나 있다.
“북천의 영광을 위해.”
“북천의 영광을 위해!”
히히힝―!
네 사람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마차를 끄는 말이 울음을 터뜨렸다.
유시(酉時:오후 5시―7시) 말(末).
술시를 일각 남긴 때에 벌어진 대화였다.
☆ ☆ ☆
당금의 황제 태종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을 지배하는 군림자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연왕 주체.
한때 황제가 불렸던 이름이다.
북평에서 원의 잔당들을 토벌하는 군왕(軍王)으로 지내며 만 단위의 병사들을 통솔할 때부터 그의 자질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초원의 전사들과 밀고 밀리는 격렬한 전투를 반복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선 당금의 명 제국을 어떻게 더욱 강성하게 할지, 그리고 황제의 권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이며, 제국을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에 대한 계획이 모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정작 차기 황제로서 그가 아닌 아직 어린 혜제가 지목되었을 때 불같이 분노했던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거늘.
어째서 선선대 황제는 그의 가치를 몰라주는 것인가.
황실의 종통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황제로 세워야만 했는가?
힘이 없는 황제가 황위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가?
그 정도로 선선대 황제는 어리석었는가?
아니, 그게 아니면 북평의 지배자, 연왕 주체가 순순히 어린 조카를 황제로 모실 만큼 만만하게 보셨는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거병했고, 하늘을 바꿨다.
불만을 품은 자들은 온 대륙이 벌벌 떨 만큼 잔인하게 죽여 본보기를 보였다. 환관을 이용해 동창이라는 정보부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시했고, 반동분자들을 색출해 냈다.
이제 이 땅, 이 하늘은 그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명 제국은 그의 대에서 최고로 강한 힘을 가질 것이다. 개국공신이라며 거드름을 피우려 드는 세도가는 모조리 치워 버리고, 관부 전체를 뜯어고쳐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로 인해 백성은 풍요롭고 나라는 부강하게 될 것이며, 훗날 그 누구도 엄두를 못 낼 큰 업적이 태종의 이름 아래 남을 것이다.
건원도 지었다.
영락(永樂).
큰 업적을 이뤄 그의 이름이 영원토록 세상을 노닐도록 만들겠다는 그의 마음이 담긴 글자.
앞으로 해를 셀 때는 영락 몇 년이라는 시호를 붙여야 하리라.
그는 황제다.
천자(天子).
하늘이 내린 군림자이며, 이 세상 만물의 지배자인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동창을 맡고 있는 대정 태감(太監)이 큰 소리로 외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공손히 문을 열었다.
궁에서 보던 문무백관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많은 수의 고관대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대례(大禮)를 보이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비밀리에 벌어지는 연회였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대신들의 목소리는 온 전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제는 그들이 비워 놓은 길을 통해 태사의로 향했다.
당당하고 위엄있게 허리를 펴고 걸었다.
그가 움직이고, 그 뒤에 서 있던 백택이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좌우로 도열해 있던 대신들은 그가 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숨죽이고 있었다.
황제는 태사의에 등을 기댄 채 연회장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연회라고 해서 모인 것인데, 너무 조용하군. 악사들은 무엇을 하는가?”
한쪽 구석에 모여 있던 악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홍화객잔의 총관 사무혁을 바라봤다. 이번 내부 호위는 홍화객잔이 담당했기 때문에 사무혁이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손짓을 하자 악사들이 예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대금(大쳏)에 옥소(玉簫),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명인들이었다.
가슴을 울리는 아련하면서도 흥을 돋우는 박자가 울려 퍼지고, 황제의 양쪽에서 대기 중이던 아리따운 시녀 둘이 섭선을 부쳐 부드러운 바람을 만들어 냈다.
황제는 태사의에 나른하게 몸을 묻은 채 그때까지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대신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만들 일어나지. 이곳은 정무를 논하는 대전이 아니지 않나.”
사실 이들 모두가 최소한 한 성을 통괄하는 고위 관료들이니 아무리 상대가 황제라도 이 정도로 극도의 공경을 표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허리를 굽히고 예만 표하면 될 터인데도 이들이 이런 모습을 취하는 것은 상대가 공포로 군림하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자칫 작은 꼬투리라도 잡혔다가는 언제 역모로 몰려 가문이 몰살당할지 모르는 일.
대신들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공포와 암흑의 시대인 것이다.
슥―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자 가장 앞에 있던 두 사람이 일어섰다.
퉁퉁한 몸집과 가느다란 팔자수염을 가진 자.
항주의 지부대인이었으며 이제 곧 삼공(三公)의 직위에 오를 문표였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고집스런 얼굴에 짧은 백염을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남색의 비단 관복을 입고 옥으로 만들어진 요대를 찼는데, 그 모습이 화려하거나 과해 보이지 않고 정갈하니 기품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선장(李善長). 한때 선대 태자 주표의 스승이었던 시대의 대문인(大文人)이자 명 제국의 실질적인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내각대학사였다.
문표와 이선장.
현재 명 제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두 거물이 일어서자 둘 중 한 사람을 각각 따르는 관료들이 따라서 일어났다.
황제는 그들을 보며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문표.
불룩한 배를 내밀며 한 발자국을 내딛은 그는 볼 살이 떨리도록 큰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친히 여신 대연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삼생(三生)의 복락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표, 앞으로도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바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굽히는 허리에 깊은 공경이 묻어났다.
그것이 진심이든 연기든, 충성을 받는 입장에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일 터.
하지만 황제는 문표와 그 일파의 관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문표는 정계에서 구르던 늙은 여우답게 교활하고 교묘한 면이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충심을 보인다는 것은 황제의 백관(百官)으로서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웬만한 예인(藝人)들보다 더 연기를 잘하고 겉모습에 신경을 쓴다는 느낌이 오질 않는가.
“내각대학사.”
“예, 폐하.”
남색의 비단 관복을 입은 노신(老臣)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어떤가? 나에게 충심을 바칠 건가?”
“물론입니다, 폐하. 대명천하의 천자(天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관직에 오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노신의 목소리엔 지나친 아부나 열정이 없었지만, 대신에 그만큼의 깊이있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러자 문표의 진영 사람들이 불편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문표가 한 충심의 발언은 무시하고, 이선장의 말엔 기쁜 반응을 보이다니. 마치 문표와 그의 진영 사람들을 배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반대로 이선장의 진영에 있던 관료들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문표 쪽 진영의 관료들을 보는 눈엔 명백한 비웃음도 담겨 있었다.
“크흠!”
“커허험!”
당연히 문표 쪽 진영의 관료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단순한 인사.
사소한 일 같지만 황제의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들로서는 허투루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 포정사사께서는 신색이 훤하시구려. 내 듣기로 최근에 관에서 모르는 금맥을 발견하셨다던데, 거기서 보시는 이득이 제법 크신 모양입니다.”
“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게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그뿐 아니라 거기 계신 부도어사께서는 자제분이 바깥에 살림을 차린 것을 아십니까? 최근에 그것 때문에 호광에 말들이 많더군요.”
“뭐라?!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젊었을 적 당신의 엽색(獵色) 행각의 여파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거늘!”
“뭐요? 이보시오, 부도어사. 이십 년 전의 일을 꺼낼 생각이오?”
“못할 것은 뭔가. 그때 애라도 생겼다면 지금쯤 장성해서 약관이 되었을 텐데!”
장내는 순식간에 서로의 약점을 물어뜯는 싸움터로 변하고 말았다.
물론, 서로 언성을 높였다거나 얼굴을 붉혔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배울 만큼 배운 지체 높은 고관들이다.
게다가 황제의 면전.
겉보기엔 천하에 다시없을 막역지우를 만나 정담을 나누는 듯 보였으나, 암중으론 그런 식으로 서로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이었다.
둥! 둥! 두둥!
그때, 북소리가 변했다.
지금까지의 북소리가 예악을 뒤에서 돕는 듯한 은은한 연주였다면, 이젠 전장을 질타하는 적토의 말발굽 소리처럼 호쾌하고 기상이 출중했다.
북소리를 들은 모두가 말을 멈추고 북을 치는 악사에게 시선을 집중한 것은 당연한 일.
지금 울리는 북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스르릉―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비파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아리따운 기녀들이 구름을 밟듯 사뿐거리며 들어왔다.
청풍객잔의 기녀들.
그중에서도 최고의 미모와 기품만을 골라낸 미인들뿐이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온 것은 기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청월루의 대숙수가 직접 만든 천하진미의 음식들이 하인들의 손에 들려 줄줄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그뿐인가.
북화적월루에서 직접 만든 특급 오량액이 무려 몇 십 병이나 탁자 위로 늘어섰다. 진짜 금테가 둘러져 있는 북화적월루의 특급 오량액은 한 병에 은자 열 냥을 호가한다는 최고급의 술이었다.
그런 값비싼 술이 몇 십 병이나 놓여 있는 모습은 이곳 대연회장이 아니라면 절대로 불 수 없을 귀한 풍경이었다.
“음식과 술이 나왔으니 이제야 연회가 시작된 것 같군. 모두들 들지 않고 뭐 하나?”
황제가 나직하게 말하자 대신들은 조금 망설이면서 주연이 베풀어진 탁자로 다가갔다.
대연회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것은 절대로 연회(宴會)가 아니었다.
철혈의 황제 앞.
자칫 긴장을 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 속에 서 있는 것이다.
“폐하, 황실 이십사왕(二十四王)이 도착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였고, 막 탁자에 앉으려던 대신들은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십사왕.
그들은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으로, 각자 토지를 부여받아 각지를 지배하고 있는 군왕들이었다.
당금 황제의 일 때문에 군권(軍權)은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황족이라는 지위와 가지고 있는 토지를 통해 쌓아 둔 부(富)는 아무리 권세가 높은 대신들이라고 해도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십사왕은 사사로이는 황제의 형제들이다.
자칫 무례함을 비쳤다간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십사왕은 각자 연회의 주인인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한 뒤 별다른 말 없이 한쪽에 마련된 황족의 탁자에 가 앉았다.
황제는 가끔 뒤에 시립해 있는 백택과 몇 마디를 나눌 뿐, 그 뒤로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대신들 역시 자리에 앉았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예악과 함께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문 대공(大公).”
“예, 폐하.”
갑작스레 날아든 황제의 물음에 문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폐하.”
“나의 선친, 태조께서는 명(明)을 건국하면서 많은 것을 바꾸셨지. 그중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황제는 푹신한 태사의에 몸을 나른하게 묻은 채 묻고 있었다. 그의 표정, 그의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권태감이 묻어났다.
문표는 그런 황제의 눈치를 흘깃 살핀 뒤 대답했다.
“태조께선 무도한 원의 잔당들을 몰아내고 중원을 다시 한(漢)의 것으로 되찾았으셨며, 대명 제국을 수립하신 성군이십니다. 남기신 업적이야 무수히 많습니다만, 폐하께서 이 문표에게 그중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고 하신다면, 호구 조사와 토지 측량을 실시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대륙 전역의 토지대장)을 만들고, 수리 사업과 둔전을 통해 농업을 장려하시어 쌀의 생산량이 늘어난 것을 들겠습니다.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큰 업적이 아니겠나이까?”
미리 답변을 준비해 둔 것마냥 달변을 토해 내는 문표의 말에 연회장에 모여 있던 대신들 중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들 중엔 내각대학사 이선장의 사람들도 다수가 있었다.
원의 수탈과 연이은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던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먹고 살 수 있게 된 점.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큰 업적인 것이다.
“그러한가? 문 대공다운 답변이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다른 대신들의 의견도 듣고 싶군. 이곳은 연회장이다. 부담 갖지 말고 기탄없이 말해 보라.”
황제의 시선이 다른 대신들에게로 향하자 잠시 망설이던 몇몇 대신이 나서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황제는 이곳이 ‘연회장’이라고 말했다.
즉, 평소의 그와는 달리 발언을 약점 삼아 보복을 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향시(鄕試)에서 대과(大科)와 어전시(御前試)로 이어지는 등용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전까지 관직의 등용은 철저히 대신의 추천과 인맥을 통해 이루어졌던 바, 과거시험을 통해 가문이나 파벌, 인맥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중요시한 것이 홍무제 폐하의 가장 큰 업적이 아닐는지…….”
“위소(衛所) 제도입니다! 평상시에 경작용 농지를 병사들에게 수여하는 관행을 시행하시어 병력의 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민초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급자족을 하게 만드신 것이야말로 국력을 증대시킨 현명한 업적이……!”
“홍문관(弘門館) 학사 나복인(羅復仁)의 등용입니다! 잦은 암행(暗行)과 사찰로 선대 폐하께서 직접 가난하고 청렴한 관리를 찾아내고 상을 내리신 일화야말로 나라의 온 관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신 성군의 자질이 아니겠습니까!”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대신들은 앞을 다투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문인(文人)이란 본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족속이다.
그나마 연륜과 능력이 깊은 대신들이라 이 정도였지, 만약 백관이 모두 모인 곳에서 이런 논의가 벌어졌다면 지금쯤 시장통 못지않게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가. 그대들의 의견은 잘 들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며 상황을 정리하자 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내각대학사, 모두가 의견을 말하는 가운데 유독 그대는 입을 열지 않더군. 태조께서 행한 일 중엔 거론할 만한 업적이 없다는 것인가?”
마치 은근히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하고, 위협을 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어조였다.
하지만 내각대학사 이선장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물으신다면 대답을 하겠습니다, 폐하.”
“대답하시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폐하의 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폐하께 직접 보고가 올라가게 하는 삼권의 분립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입니다. 관리들의 부패를 막고 나라를 청렴하게 만들 수 있는 기틀을 잡은 세기의 결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담담하게 흘러나온 내각대학사의 말에 대연회장 전체가 적막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신들 모두가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사실 태조 주원장의 큰 업적이라면 ‘비리 척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하도록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행정의 부패가 민초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던 주원장은 삼권을 분립시켜 대신들의 권력을 제한했다.
비리 척결을 위해서는 개국공신들마저 죽였을 정도였다.
그러니 현재의 대신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겠는가.
따지고 보면 대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크고 작은 비리가 없는 사람이 없거늘.
만약 괜히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 황제가 비리 감찰이라도 해서 피의 숙청을 벌이면 그들만 죽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청렴하기로 소문난 내각대학사지만 작은 비리 하나 없을까.’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꺼내다니.’
대신들의 속이 타들어 가는 가운데, 그 중심에 있던 태종 영락제의 얼굴만이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과연 내각대학사답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비리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군. 잘 알았다.”
내각대학사 이선장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길엔 한 줄기 온정이 깃들어 있었다. 철혈의 황제이지만, 능력 있고 검박한 이에게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당금의 황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몸이 달은 것은 항주의 지부대인 문표였다.
얼마 전에는 갑작스레 항주에 나타난 황제를 만나 비리에 관련해 추상같은 추궁까지 듣지 않았던가.
그의 등 뒤에선 차디찬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론 안 된다!’
문표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처음엔 차분히 기회를 노리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요상했다. 목 뒤가 서늘하고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이 마치 칼날 위를 맨발로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영락없이 꼭 큰 위기가 닥친다.
정계에서 수십 년을 구르면서 생긴 오랜 경험과 본능이 그걸 알려 주고 있었다.
‘나, 문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승부사다. 이 정도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두고 봐라. 이 기회에 더 큰 것을 얻을 테니!’
문표는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깊숙이 숙인 머리 아래에서 범상치 않은 눈빛이 번뜩였으나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과연 천고에 회자될 영명하시고 위대하신 폐하이십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옛것과 과거의 교훈을 살려 새로운 것을 익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늘, 폐하께서는 이미 그 도리를 깨닫고 계시니 이 문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부디 청컨대, 이 문표에게 시대의 성군(聖君)께 술을 한 잔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청산유수로 말이 흘러나온다.
문표가 손짓을 하자 뒤쪽에서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던 듯한 하인 두 사람이 각자 술과 잔을 들고 그의 곁으로 왔다.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불충(不忠).
문표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뒤쪽의 하인 두 사람 역시 문표의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그를 따랐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던 문표가 일 장 내에 들어와서 하인들로부터 술과 술잔을 받아 들었을 때,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만.”
“폐하……?”
“대신들은 홍무 제위 기간에 이루어진 많은 업적을 이야기했지만, 짐은 그밖의 한 가지가 더욱 아쉽다. 혜제 때 폐지가 되었던 것이 잘못이야. 죽형(竹刑)은 궁중의 법도를 위해서라도 남아 있었어야 했다.”
죽형!
그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자 대신들의 얼굴은 내각대학사가 청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죽형, 죽형이라니!
죽형은 주원장 시대의 궁에 있던 규칙으로, 궁 안에서 신하가 어떤 잘못을 했을 경우 대나무 막대기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말했다.
물론 가벼운 체벌이 아닌지라 죽형으로 죽임을 당한 학자나 관리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나무 막대기로 때려죽이다니.
그 당시, 주원장이 궁궐의 문신(文臣)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송(宋) 나라가 문신들을 우대하고 무신(武臣)들을 박대했다면, 주원장의 시대에선 문신들을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쓰는 노예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연회장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비리를 이야기하고 죽형을 언급한다.
그들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 주, 죽형이라니요.”
천하의 달변가인 문표조차 이 순간엔 말을 더듬었다.
황제는 그런 문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문표에 뒤에서 쟁반을 든 채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명의 하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황제의 입에서 차가운 미소가 짙어졌다.
“문 대공, 이쯤이면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나?”
“폐하……?”
“짐은 최근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가들 중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반군 역도들의 꼬임에 넘어가 나라를 배신할 마음을 먹은 한 대신의 이야기이지. 얼마 전에 잘못한 일이 하나 있어서 불안했을 테니 그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참으로 어리석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문 대공?”
하늘의 아들, 천자.
태어날 때부터 남들의 위에 군림할 천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의 눈빛은 영악하고 노회한 정치가의 속마저 남김없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흔들리는 눈빛에서 떠오르는 감정.
그것은 극렬한 공포와 혼란이었다.
황제가 말하는 그 ‘대신’이란 다름 아닌 문표를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쨍그랑!
술잔과 술병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연회장을 울리고,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비틀 뒤로 물러선 문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 어째서…… 아니,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는 말인가? 문 대공, 그대는 짐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군.”
어느새 예악은 멈춰 있었다.
고요해진 연회장.
번뜩이는 황제의 안광을 감히 맞받지 못하고 문표는 몸을 덜덜 떨었다.
“원의 잔당이 이곳 항주에서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훗날의 영화(英貨)를 약속하며 짐에게 불만을 품은 무리들을 회유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동창의 귀는 밝고, 검교(檢校)들은 천하 어디에나 있지. 짐은 다만 그 뿌리를 뽑기 위해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
오만한 철혈의 성품은 그만한 능력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황제의 위대한 면모를 재확인한 문표는 극한의 혼란 속에서 얼굴색이 몇 번이나 변하다가 결국 그에게 남은 길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표는 둔중한 몸으로 어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와 같은 마음을 먹었던 대신들이 절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미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는 신호였다.
문표의 눈빛이 독해졌다.
황제는 혼자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호위라고는 백택이라는 허약해 보이는 사내 하나만을 달고 왔다.
연회장 내부의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지금 그의 등 뒤에는 미리 숨겨 두었던 특급 살수 두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주와 싸움 중에 어느 쪽이 살 확률이 더 높은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
결국 마음을 정한 문표는 손가락으로 황제를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도 역모이며 불충.
목이 날아갈 대죄건만, 문표는 거기서 확실히 구족이 멸족당할 단어를 입에 담았다.
“죽여! 죽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급박해진 공기.
결국 상황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던 대신들이 너무나 놀라 입을 쩍 벌린 사이, 문표의 뒤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하인 두 사람이 비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과 술을 나르던 하인들 십여 명이 갑자기 쟁반이나 탁자 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이 날래고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폐하, 몸을 피하소서!”
늙은 문사가 무슨 힘이 있을까.
황제를 노리는 살수들의 앞을 막아서려는 내각대학사의 눈에서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살수들은 충심으로 가득한 노신(老臣)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놀라운 몸놀림으로 곧바로 황제를 향해 쏘아지는 중이었다.
두 살수는 쟁반 밑에 숨기고 있던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소검(小劍)을 꺼내 들고 태사의에 앉아 있는 황제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검을 찔렀다.
쉬이익―!
황제는 검이 목전에 치닫는 그 순간까지도 태사의에 나른하게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앗!”
“으허엇!”
놀란 대신들의 경악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상대는 특급 살수였다. 일 장 내에서 달려드는 특급 살수를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황제가 꼼짝없이 암수에 당하는 듯했던 그 순간,
피슈슉―!
“큭……!”
“크흣……!”
갑자기 급살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떤 특급 살수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뜬 채 비척비척 뒤로 물러서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
연회장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살수들의 가슴엔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십여 개나 뚫려 있었다.
울컥울컥 새어 나온 핏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데 놀랍게도 정작 그런 상처를 만들어 낸 흉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화살에 맞았으면 화살이 꽂혀 있고, 검에 맞았으면 검이 꽂혀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이,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문표.
그의 시선이 자연히 황제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었던 문사복 차림의 사내에게로 향해졌다.
대신들에게 있어서 그는 도저히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호위무사라고 보기엔 너무나 무사 같지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시종이라 생각하기엔 묘한 기품이 있었다.
그런데도 항상 황제의 곁에 있으니 수많은 낭설이 떠돌았지만, 황제의 자문 역을 하는 숨겨진 문인(文人)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이었다.
‘그런데 호위무사였다니. 그것도 엄청난 무위를 지닌……!’
명 황실의 수호신, 백택.
그는 물이 담겨 있음직한 가죽 주머니를 왼손에 들고 무심한 눈길로 바닥에 쓰러진 특급 살수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문표는 그가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특급 살수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는 것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급 살수 두 사람을 저렇게 쉽게 죽였다. 안 돼. 상대할 수 없어.’
완전한 계산 착오였다.
무방비인 줄 알았던 황제는 강력한 호위를 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문표도 이 일을 계획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보완책을 마련해 두었지만, 막상 황제를 마주하자 왠지 모든 게 안 통할 것 같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도망쳐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혼란스러운 기색의 문표.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특급 살수 두 사람이 실패하자 미리 하인으로 변장해 숨어들었던 살수들 십여 명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
호위에게 몇몇이 당하더라도 어떻게든 황제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수들의 마지막 의지였다.
촤르륵―
백택은 살수 십여 명이 섬전처럼 쏘아지고 있는 상태임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다시금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리는 백택.
대신들은 드디어 백택이 어떻게 특급 살수들을 쓰러뜨렸는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이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잔에 채워지듯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백택의 오른손이 허공에 흘러내리는 물을 잡아채고, 신비한 빛무리와 함께 마치 현을 튕기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슈슈슉―!
그 순간, 물방울들이 암기처럼 사방으로 쏘아졌다.
“으악……!”
“큭……!”
“크악……!”
손을 한 번 튕겼을 뿐인데 세 명의 살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놀라운 탄지공(彈指功).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절로 쩍 벌어질 만큼 놀라운 무공이었다.
겨우 물방울을 튕겨서 이런 위력을 보인다는 것을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살수들은 긴장된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을 튕겨 공격한다는 것이 매우 놀랍긴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겨우 암기에 불과하다.
암기를 상대할 때는 한곳에 모여 있어선 안 되는 법.
경험 많은 살수들에게 그 정도는 상식이었다.
그들 일부는 날카로운 협봉검을 들어 올렸고, 나머지 일부는 품속에서 꺼낸 짧은 소도를 암기처럼 집어 던졌다.
쉭―!
따다당!
세 명이 동시에 던진 소도가 백택이 쏘아 낸 물방울에 얻어맞은 뒤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사이 나머지 다섯 명의 살수가 황제의 한 발자국 앞까지 접근해 왔다.
일제히 휘둘러지는 협봉검.
검에 깃든 살기가 날카로웠다.
칼날이 목전에 다가왔음에도 황제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제자리에서 그들을 무심히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백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다.
백택은 가죽 주머니에서 다시 한 번 물을 허공에 따라 내고, 이번엔 손으로 부채질을 하듯이 물방울을 손등으로 쳐서 날려 보냈다.
따다다당!!
“컥……!”
덩어리째로 날아간 물.
손가락으로 튕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있는 묵직한 충격이 살수들을 강타했다.
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칼날이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달려들던 다섯 명 중 셋은 이미 상체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핏물이 흐르고 흘러, 황제의 발밑을 적실 만큼이 되었다.
어느새 연회장에 준비되어 있던 살수들 중 대부분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 상황.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나머지 살수들도 백택을 견제하기만 할 뿐,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이럴 수가, 이건…… 이건……!”
문표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때 미리 문표와 뜻을 같이했던 대신들 중 다섯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문 대공!”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준비해 놓은 안배는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어차피 황제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잖습니까!”
대신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지만, 어차피 기호지세였다.
천하를 얻거나, 또는 구족이 멸살당하는 싸움.
그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섯 대신은 구석의 어딘가로 손짓을 보냈고, 그 순간 황제가 앉아 있던 태사의의 위쪽 천장이 부서지며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아앗!!”
내각대학사를 따르는 진정한 충신들이 당황하여 경호성을 토해 냈다.
설마 천장에도 살수들이 있었을 줄이야.
역모를 꾸민 이들이 진정으로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당탕탕!
“……!”
하지만 허공에서 떨어진 그림자들은 황제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바닥에 쿵! 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들은 움찔움찔 몸을 경련시킬 뿐, 제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럴까?
문표와 대신들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내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을 알아냈다.
“다리가……?!”
그랬다.
다리가 없었다.
맹수에게 물어뜯기기라도 한 것마냥 종아리 부근에서 찢겨 나간 하의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 어깨, 옆구리 할 것 없이 이곳저곳이 옷과 함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들 모두가 생각했다.
대체 천장 위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졌기에 저런 상처를 입은 것일까.
문표와 대신들은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대체 누가……!”
누군가 한 대신이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답은 천장에서 휙― 하고 뛰어내린 한 사내가 행동으로 말해 주었다.
건장한 체구, 흑의를 입고 머리엔 흑색 죽립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사내였다.
그는 터벅터벅,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태사의의 뒤로 가 백택의 옆에 버티고 섰다.
대신들에겐 그 행동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의 무사가 천장에 숨어 있던 살수들을 모조리 도륙한 것이다.
“저건 또 누구기에……!”
문표의 곁에 모여들었던 다섯 명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절망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황제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욱 거대해 보였다.
시대의 거인.
하늘의 아들.
그들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황제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무력감이 일제히 그들을 덮쳤다.
“백택.”
“예, 폐하.”
아직 살수들이 검을 들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음에도, 황제와 백택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다.
“오왕 합려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전제가 사용한 검이 어장검(魚腸劍)이었지. 그럼 저들의 검은 무엇인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꺼낸 검이 어장검이니, 쟁반에서 꺼낸 검은 쟁반검(錚盤劍)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는 스스로 말하고도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야 마땅하겠지요.”
“……자네는 그게 문제야.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줄을 모르거든.”
“송구합니다, 폐하.”
“쯧쯧. 반(半),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
황제가 질문하였으나 검은색 죽립을 쓴 사내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군. 짐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이 이렇게나 대화가 안 되어서야.”
혀를 차는 황제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각대학사의 사람이든, 문표의 사람이든.
연회장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황제의 미소를 보는 순간 전율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밑을 적실 만큼 피로 물든 태사의.
사방에선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살수들이 검을 번뜩이고 있으나, 황제는 자신을 따르는 심복과 농담을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시산혈해를 밟고서도 웃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
그 강렬한 존재감에 모두가 압도당한 것이다.
“문 대공.”
“……!”
문표는 자신을 부르는 황제의 말에 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설마 이걸로 끝은 아닐 텐데? 고작 살수 몇을 숨겨 온다고 해서 짐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큭……!”
“원의 잔당들은 어디에 있나? 짐은 그들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항주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는 것까지 생각했거늘, 이대로라면 너무나 허무하군. 짐이 그대를 너무 크게 평가했던 모양이야.”
황제는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짐을 치러 오지 그랬나? 그랬다면 진압하는 재미라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소리를 해도…….”
“이대로라면 짐이 너무 과잉 대응을 한 것 같군. 굳이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가택으로 군사를 보내 놓을 필요가 없었겠어.”
“……!!”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황제의 말에 문표와 그 뒤에 서 있던 다섯 대신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구, 군사를 보내다니.”
“우리들의 가문으로 말인가……!”
“어찌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잔인하다! 너무나 잔인하다! 영락제여!”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그들은 앞다투어 외쳤다.
하지만 철혈의 황제, 태종.
그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그들을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무엇을 그리 놀라는가? 어차피 실패할 경우 구족이 멸살당할 각오를 하고 벌인 일 아니었던가?”
“그 냉혹한 성품! 어찌 나라의 어버이인 황제가 이리도 잔혹한가!”
“더는 듣기 싫군. 대정!”
황제가 큰 소리로 외치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정 태감이 들어와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부르셨나이까, 폐하.”
“들여보내거라.”
“폐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대정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채우듯 금의위(錦衣衛) 일 백 명이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해 무과 시험을 통과했고, 황실의 지원을 받아 황실 무공을 익힌 무재들이 바로 금의위였다.
척. 척. 척. 척.
보무를 맞춰 걸어 들어온 금의위가 열을 맞춰 시립하자 넓은 연회장 전체가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금의위 일백 명을 이끌고 온 자.
금의위 부장(副長) 공보하(孔保霞)는 육 척 장신에 온몸에서 풍기는 예기(銳氣)가 대단한 자였다.
“금의위 부장 공보하 이하 일백 명, 이곳에 폐하의 부름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그는 다른 대신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황제를 향해 조용히 예를 표했다.
“보하, 역도들을 무릎 꿇려라.”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보하가 제자리에서 손짓을 하자 도열해 있던 금의위들이 대신들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몇몇 인물들을 강제로 끌고 나왔다.
미리 지시가 내려져 있던 듯, 그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어엇? 놔, 놔라, 이놈들!”
“이놈들! 나는 무고하다!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그들의 대부분은 문표의 휘하에 있던 대신들이었지만, 몇몇은 내각대학사를 따르던 자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실 이십사왕 중에서도 두 명이나 끌려나왔다.
문표의 주위로 끌려나온 그들의 총수는 사십여 명.
강제로 다리를 얻어맞고 무릎을 꿇은 그들은 매우 불만스러워 보였으나, 금의위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감히 반항하거나 대들지는 못했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공보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판장(連判狀)은? 구했겠지?”
“여기에 있습니다, 폐하.”
공보하는 품속에서 여러 겹으로 이어진 서찰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백택을 통해 연판장을 받아 그 속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쭉 눈으로 읽어 내렸다.
그 연판장이 나타난 순간부터 끌려나와 있던 사십여 명의 인물들 중에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모두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식은땀만을 흘렸다.
때때로 문표를 노려보는 것이, 어째서 연판장이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어, 어떻게……?”
특히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문표가 멍하니 되물었다.
황제는 연판장을 쭉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부인의 처소에 숨겨 두다니, 생각보다 교활했어. 부인이 황족이라고 해서 짐이 온정이라도 베풀 거라 생각했나?”
“그, 그런……!”
“한 가지만 충고하지. 네 가문은 멸망했다.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고 깨끗이 참형을 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
“마지막 질문이다. 원의 잔당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추상같은 질책이었으나 문표는 잠시 눈을 끔뻑거렸을 뿐, 흔들리지 않았다.
불룩한 배와 축 늘어진 볼 살, 인자해 보이는 웃음 뒤엔 냉혹한 뱀과 같은 정계의 거물이 숨어 있다.
문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문표! 비록 실패했지만 거사를 일으킨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잔인함을 무기로 횡포를 일삼는 영락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하리라!”
짐짓 비운의 영웅이라도 된 듯 구는 그 모습에 황제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원의 잔당과 손을 잡은 역도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공보하, 역모에 가담하 자들 중 문표를 제외한 모든 자를 죽여라.”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스릉―
공보하는 이번엔 수하를 시키지 않고 직접 허리에 찬 유엽도를 뽑아 들었다.
막연히 죽음을 각오한 것과 직접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을 본 것과는 크게 다른 법이다.
사색이 된 사십여 명의 대신들이 제각각 스스로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다짜고짜 즉참이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소! 나는 아니오! 아니란 말이오!”
“폐하, 그 연판장에 이름이 올라간 것엔 사정이 있습니다! 부디 이 공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폐하! 억울합니다! 폐…… 크악!”
가장 앞쪽에 끌려와 있던 영정왕(永正王)부터 목이 날아갔다.
황제와 피를 나눈 친형제의 목을 베면서도 금의위 부장 공보하의 눈빛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황족의 목이 달아나자 대신들은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 하였으나, 어느새 대신들의 뒤에 버티고 선 금의위들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사, 살려……!”
푸확―!
공보하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또 하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자신의 차례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대신들이 악을 썼다.
“문 대인! 어찌 된 거요! 삼책(三策)은 어떻게 되었소!”
“이대로 죽는 것이오? 그런 거요?”
“억울하다! 어찌 이리 허망하게…… 크악!”
자신을 따르던 대신들의 마지막 절규를 들으며 문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끌려 나온 사십여 명의 대신들 중 절반가량의 목이 날아갔을 때, 입구를 지키던 대정 태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폐하, 파강장군 원회가 들었사옵니다!”
“드디어 왔군.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당당한 체구에 비단 전포, 묵빛의 철갑옷을 입은 무장(武將)이 성큼성큼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코를 찌르는 혈향과 연회장 중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파강장군 원회가 보고를 드립니다. 항주의 관문 근처에서 상인(商人)으로 위장해 수작을 부리던 일천여 명의 역도 무리들을 모조리 진압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죽고 십여 명만 살아남았으며, 그들은 현재 항주 관청의 감옥에 투옥된 채 이미 그 배후가 항주의 지부대인 문표라는 점을 자백했습니다.”
“뭣……!”
원회의 보고에 대한 감상은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마지막 반전을 노리던 문표의 목소리였다.
“이…… 이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던 삼책마저 무너졌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대의 승부수를 던졌던 역천의 난(亂)은 몇 수나 앞을 내다보고 미리 처신한 황제 때문에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다.
분을 못 이겼음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문표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가.”
황제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원회.”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런데 관문 밖에서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던가? 원의 잔당들이 짐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폐하, 정찰병의 수를 일천으로 확대하여 사방 십 리를 모두 경계하고 있사오니 만약 적이 나타난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지그시 원회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겠다.”
황송하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원회.
그의 등 뒤에선 문표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대신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아악―!”
촤아악!
내려진 명령을 마치고 다시 황제의 앞으로 와서 시립하는 금의위 부장 공보하의 몸엔 사십여 대신들의 핏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사십여 명의 목을 베어 낸 공보하.
그는 자신의 살육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목각인형처럼 보였다. 그의 등 뒤로는 저마다 절규하고 분노한 표정의 머리 사십여 개가 야채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화려한 대연회장의 중심에 있기에는 너무나 참혹하고 안 어울리는 광경.
역모와는 무관한 대신과 황족들마저도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래, 짐이 죽형에 대해 이야기했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말하는 황제의 모습은 뜬금없기까지 했다.
“공보하, 문표에겐 죽형을 내리겠다. 단, 황궁에 돌아가서 내릴 것이니 지금 바로 이송하도록.”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보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예를 표한 뒤 몸을 돌려 대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 일백여 명의 금의위가 문표의 양팔을 좌우에서 붙잡고 끌고 나갔다.
“영락…… 영락제여! 내 죽는 순간까지 이 원한은…… 컥!”
발작하듯 지르던 고함이 금의위에 일격에 조용해졌다.
모든 상황은 끝났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혈향 속에서 내각대학사 이선장은 황제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 신(臣) 이선장,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아무리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좌가 나왔더라도 이곳에 모인 자들은 최소한 종삼품 이상의 대신들입니다. 나라에 법도가 있고 기강이 있을진대, 대신들을 최소한 죄의 진위조차 따지지 않고 즉시 처벌하는 것은 너무 무도(無道)한 일이 아닐런지요?”
이선장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엔 숨길 수 없는 고지식함과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말을 돌려서 했을 뿐이지, 황제의 행동이 무도(無道)하다고까지 말하는 통렬한 지적인 것이다.
철혈의 황제 영락제에게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언사.
그것도 방금 황제의 명에 의해 도륙된 사십여 구의 시신 옆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선장의 꼬장꼬장한 성품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과연 내각대학사다.”
황제는 오히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 이선장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각대학사, 그대가 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모습은 잘 보았다.”
“명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그렇지. 그러나 그 마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자들이 지금 이 나라엔 너무나도 많다.”
“그건…….”
“지금은 온화한 성군보다는 일벌백계로 본보기를 보일 패황(覇皇)이 필요한 때다.”
황제의 말에 살수가 달려들 때 이선장과 함께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대신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폐하, 너무 경황이 없어서 나설 기회를 놓쳤을 뿐, 모두들 마음만은 이 노신(老臣)과 같았을 것입니다.”
대신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변호해 주는 이선장은 그야말로 구세주와 같을 터.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그시 살펴보던 황제는 나른한 얼굴로 몸을 젖힌 채 태사의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각대학사 이선장.”
“신 이선장, 폐하의 부름을 받습니다.”
“오늘은 연회의 날이다. 궁궐과 대전의 고리타분한 규칙은 다 젖혀 두고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지.”
“폐하, 하나……!”
“비록 중간의 절차를 건너뛰었다고는 하나, 오늘 처형한 자들은 모두 그 죄가 확실한 자들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더 큰 영화를 누리고자 북의 이민족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란 말이다. 짐이 그런 자들을 한시라도 더 살려 둘 것 같은가?”
“……!”
“게다가 그들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천금 같은 시간과 아까운 국고와 인력을 소모하라고? 짐은 그런 꼴은 절대로 보지 못한다. 이번과 같은 일이 백 번이 벌어진다면 백 번 모두 오늘과 같은 결정을 내릴 터, 그러니 그대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
내각대학사 이선장은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차마 그 이상 따지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명(明)은 큰 나라다.
대신과 제후들은 각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고, 황제는 그런 왕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제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잘못이 있다고 한들, 제왕 된 자가 엄정한 법칙도 없이 수숫단을 베듯 왕의 목을 날려 버리면 어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힐 수 있겠는가.
덕이 없는 힘은 비록 지배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충심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만약 역도들이 공정한 재판을 거쳐 처형당했다면, 모든 관료들이 그에 수긍하며 명 제국에 대한 충심을 한층 더 공고히 했을 터.
하지만 이런 식의 ‘참살’은 오로지 황제에 대한 공포심만 되새길 뿐, 다른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매국(賣國)을 하려던 역도들을 잠시라도 더 살려 두지 않겠다는 명분도 맞는 말. 아아, 어쩔 수가 없구나. 이것 또한 시대의 흐름. 이제 규율만 따지는 늙은이는 조용히 사라져야 할 때란 말인가.’
삼대에 걸쳐 명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아 온 대학사 이선장은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과 삶의 무상(無常)함을 느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노신.
그런 이선장의 마음을 알았음인가, 황제는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의 마음을 위로했다.
“내각대학사, 그대가 있기에 황실이 황실다울 수 있는 것일 테지. 짐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자, 비가 내린 뒤엔 땅이 더욱 굳어지는 법. 모두들 술잔을 들라. 역도들이 사라진 명 제국은 한층 더 부강하고 청렴해졌을 터,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황제가 손을 내밀자 백택이 술잔을 건네며 오량액을 따라 주었다.
대신들은 굳은 얼굴이었으나 황제를 따라 술잔을 들어 올렸다.
발밑엔 사십여 구의 머리가 굴러다니고 공기 중엔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짙은 혈향이 감돌고 있으나, 그래도 황제가 술잔을 권하면 마셔야만 했다.
지금은 황제의 시대.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힘이 황제에게 집중된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약을 마시는 듯한 심정으로 술잔을 들이켜는 대신들의 표정은 마치 그들의 앞날을 보여 주듯 어둡기만 했다.
드르륵―
“폐하, 도독부로부터 급보입니다!”
그때, 대정 태감이 더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연회장을 가로질러 황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대정 태감은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황제의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룡강 유역 북쪽 전선에서 원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기마병 일만이 침공했으며, 항주 근교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일천의 기병(騎兵)이…… 남경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뭐라?”
황제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모든 대신들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모여들었다.
“일천으로…… 남경을?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보고로는 급습을 가한 일천 명 개개인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고 하긴 한데……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일인지라 내부에서 동조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큭……!”
황제는 탁, 하고 이마를 짚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핫! 하하하! 하하하하!”
황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단하다. 대단하구나, 텐챠이! 항주에 거주하며 짐을 노릴 것처럼 굴다가 과감히 포기하고 남경을 노렸다? 회유한 대신들을 이용해 짐의 시선을 돌린 뒤 자신은 직접 남경을 얻는다? 하핫! 짐이 미끼가 되었구나, 짐이 고작 미끼가 되었어!”
황제의 파안대소에 그의 등 뒤에 시립해 있던 백택의 얼굴이 기묘하게 흔들렸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파강장군 원회 역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하핫! 하하하핫!”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심정과 달리 감탄과 즐거움이 가득한 황제의 웃음소리는 한참이나 끊이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