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三章 ― 남경번천(南京륙天)
항주에서 단오의 혈사가 벌어지던 술시(戌時) 무렵.
본래 한 성의 관문은 해가 지면 출입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마침 해가 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남경으로 입성한 한 무리가 있었다.
마차 스무 대.
수레는 서른 대였다.
얼핏 보기에도 수행 인원만 오십 명이 넘어 보이는 대규모 상행(商行)이었는데, 그들은 마차와 수레에 삼각형의 도형 위에 황(黃) 자가 새겨진 깃발을 매달고 있었다.
황산파(黃山派).
안휘성 황산에 위치한 사도(邪道)의 명문이자, 염상(鹽商)을 통해 굉장한 부(富)를 축적했다는 유명한 문파였다.
관문을 지키던 관병들은 곧바로 그 깃발과 이번 상행의 책임자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니, 호 당주. 오늘만 해도 황산파의 상행은 네 번이나 다녀갔는데 또 오는 것입니까? 남경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상행의 책임자인 황산파 호우량(胡友諒) 당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금화부의 대인들께서 이번 단오절에 필요한 물건이 워낙 많다고 하니 난들 어쩌겠소. 주문이 들어오는 족족 이렇게 상행을 나갈 수밖에. 장 위사도 아시다시피 내가 직접 나설 정도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외다.”
“허어, 금화부 대인들이 변덕스러운 건 알았지만, 그 정도였습니까?”
“지금 안휘성의 본 파는 난리도 아니라오. 나는 이 물건들을 전달한 뒤 곧바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소이다.”
“그 정도씩이나! 허허, 황산파 당주라서 떵떵거리고 지내실 줄 알았더니, 당주로 지내는 것도 마냥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본래 황산파는 남경의 유명 토호(土豪)들과의 인맥을 쌓고, 몰래 암상(暗商)을 운영하는 문파였기에 남경의 관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몇몇 단체 중 하나였다.
특히 금화부는 남경을 주름잡는 큰 손들만 모여 있는 황금의 땅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소? 그보다 장 위사, 내 사정이 이러하니 부탁 좀 합시다. 지금 한시라도 빨리 금화부에 이 물건들을 전해야 한다오. 수색은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통과시켜 줄 수는 없겠소?”
“크흠, 내 호 당주의 사정을 알긴 하지만, 최근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슬슬 수염이 허옇게 바래기 시작한 장 위사는 난감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괜히 마차를 끌던 말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이 말, 대단한 명마구려. 아니, 자세히 보니 다른 말들도 다 대단한데……. 왜 이런 말들을 마차나 끌게 하고 있습니까?”
장 위사는 별 의미 없이 흥미 본위로 물은 것일 테지만, 그 순간 호우량의 눈빛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지금 본 파의 사정이 말이 아니오. 워낙 상행을 대규모로 보내다 보니 말이 부족해서 우리 문주님께서 아끼는 말까지 데려다 마차를 끌게 했다오.”
“허어, 그럼 이게 황산파 문주님의 말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하하, 그 가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장 위사의 안목이 대단하오.”
장 위사는 칭찬이 싫지는 않은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새삼스런 눈빛으로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을 쳐다보았다.
보통 마차를 끄는 말은 잘 달리는 말보다는 투박하고 힘이 좋은 농경마(農耕馬)를 쓰는데, 지금 황산파 상행을 이끄는 말들은 하나같이 준마들뿐이었다.
몸이 눈처럼 흰 백마도 있고, 신비로운 푸른빛 갈기를 흩날리는 말도 있었다.
몸매가 날렵하면서도 근육이 튼실한 것이,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바람보다도 빨리 달릴 것 같은 명마들뿐이었다.
이 정도의 말이라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터.
노년이 다 되도록 겨우 관문지기나 맡고 있는 장 위사가 언제 이런 말을 구경할 수 있을까.
그의 눈에서 부러움과 탐욕이 동시에 맴돌았다.
“커험, 장 위사?”
산전수전 다 겪고 이런 쪽 일에 능통한 호우량이 어찌 그런 장 위사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그는 슬쩍 장 위사에게 다가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묵직한 전낭을 건네주었다.
“장 위사,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내 문주님께 말씀드려서 장 위사께 좋은 말 한 마리 선물해 드리도록 하겠소. 매번 우리 황산파의 상행이 무탈하도록 신경 써 주시는데 어찌 그깟 말 한 마리가 아깝겠소?”
“그, 그 말이 진짜입니까?”
“물론이오. 남아일언중천금이거늘,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소?”
장 위사는 손에 묵직한 전낭을 든데다 최소한 은자 백 냥은 호가할 것 같은 말을 선물받는다고 생각하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장 위사는 관문앞을 막아선 채 돌아가는 상황을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치며 손짓을 했다.
“황산파는 믿고 보낼 수가 있다! 어서 길을 열어 드려라!”
“아…… 예!”
관병들은 서둘러 관문을 열고 길목을 비켜 주었다.
“고맙소, 장 위사! 내 이 일은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
“허허, 살펴 가십시오.”
호우량이 이끄는 황산파의 상행은 장 위사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관문을 완전히 통과했다.
잠시 후, 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호우량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욕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동안 해먹은 게 얼만데 꼬장꼬장하게 굴어? 이제 슬슬 위사를 바꿔야 할 모양이군.”
황산파가 공명정대한 일만 했다면 어찌 사도 문파일까.
호우량은 황산파로 돌아가자마자 살수를 보내 장 위사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말했던 ‘이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말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호우량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욕을 하며 분을 삭인 뒤, 그가 직접 몰고 있는 마차의 안쪽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커험. 대인(大人), 남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어찌할까요?”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황산파의 당주 호우량이 황산파 문주에게조차 보여 준 적이 없는 극도의 공경을 보이며 묻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간다. 금화부의 저택으로 가도록.”
마차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엔 태산처럼 묵직한 존재감이 담겨 있었다.
호우량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굽히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계속해서 마차를 몰아갔다.
다그닥― 다그닥―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지나 남경의 금화부로 들어가자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금화부에 사는 사람들 중 부유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에 기름이 떨어질 날이 없는 것이다.
당금의 황제가 북경으로 천도를 명했으나, 그래도 아직은 남경과 함께 두 개의 수도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남경에 축적된 인력이나 금력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짧은 시간 내에 그것들을 모두 북경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황제는 북경에서 반년, 남경에서 반년을 지내며 정무를 보고 있으니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신들이나 세도가가 여전히 남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금화부 내에서 가장 외진 곳.
장원의 크기는 크지만 내부의 전각은 그리 크지 않은 저택으로 호우량은 마차를 이끌고 들어갔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구백 명의 사내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지금 도착한 마차에 숨어 있던 일백 명까지 합하면 텐챠이 수호대 일천 명이 다 모인 셈이다.
그들은 장원의 양쪽으로 쭉 도열한 채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호우량은 자신이 끌고 온 마차의 문을 연 뒤, 황산파에서 온 무사와 일꾼들을 모아 한구석으로 물러났다.
마차에선 네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텐챠이와 삼대천이다.
건장한 체구에 묵직한 기파를 내뿜고 있는 텐챠이가 가장 먼저 내리고, 그 뒤로 하시르, 자이혼, 우르칸이 마차에서 내렸다.
일천 명의 전사로도 채워지지 않던 커다란 장원이 텐챠이를 비롯한 네 사람이 도착하자 그제야 꽉 채워지는 듯했다.
텐챠이는 그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기마는 어찌했는가?”
먼저 장원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독두파의 두목, 흉월이 대답했다.
“장원의 뒤쪽 연무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장군.”
“이제부터 우린 큰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모두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예!”
이번에도 역시 흉월만이 대답했다.
이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작전이니만큼 전사들에게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미리 당부를 해 놓은 상태였다.
“좋다, 지금 곧바로 출발한다. 그리고 하시르.”
“예, 장군.”
까무잡잡한 피부에 머리에 삿갓을 쓴 남자.
하시르가 대답했다.
“네가 바라던 것, 지난 이백여 일간 다 이루었나?”
“예, 이루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하시르에게선 풍운객잔을 무너뜨린 이후로 보였던 혼란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담담한 미소, 평온한 눈빛 아래에는 예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시르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이혼과 우르칸에게서도 예전과는 또 달라진 막강함이 은연중에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쓸 수 없으면 그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터.”
“앞으로 건설될 원 제국의 첫 번째 신하가 될 자들입니다. 오는 길에 황산파를 보셨겠지만, 그들은 능력이 있습니다. 믿고 맡겨도 좋을 것입니다.”
“모두 몇 곳이라고 했지?”
“녹림십팔채, 사도염상(邪道鹽商) 황산파, 강서 흑도 명문 삼호방(三虎幇), 호남제일살문 흑화보(黑花堡). 총 네 곳입니다.”
“좋다, 믿어 보지.”
히히힝―!
텐챠이는 자신의 애마 창풍(蒼風)에 올라탔다. 허리엔 신응도(神鷹刀)를 찼으며 갈색의 가죽옷 위로 튼튼한 갑주를 착용했다.
그리고 거기에 공작의 깃털이 꽂혀 있는 청회색의 투구를 쓰면 끝이다.
전장에 나서는 창천랑 텐챠이.
북부 몽고 초원 최강의 전사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다.
푸르륵―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장원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말에 올라탄 텐챠이 수호대가 조용히 텐챠이의 명을 기다렸다.
텐챠이는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하늘에 빛나는 북두성(北斗星)을 올려다보았다.
원의 패망 이후,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일당백의 전사들 일천 명을 모으고 조련했다. 거기에 텐챠이 자신과 삼대천이 있으며, 무림의 방파들도 네 곳이나 끌어들였다.
그동안 명(明) 천하에 숨어 지내느라 얼마나 답답했던가.
이젠 그 모든 한을 풀어 버릴 시간이었다.
남경의 배부른 돼지들은 깜짝 놀라고 경악하리라. 외부도 아니고, 내성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일천 명의 기병들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대초원의 전사들이여.”
푸르륵―
병사들을 바라보는 텐챠이의 눈에서 시퍼런 신광이 번뜩였다.
“이것은 우리의 초원을 지켜 내기 위한 싸움이다. 칼간에서 벌어졌던 부모와 형제들의 처참한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벌판을 떠올려라. 우리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잃어버린 초원을 되찾는 길이 될 것이다.”
쿵! 쿵!
대지를 떨쳐 울리는 발구름도, 천하를 진동시키는 함성도 없었으나, 일천 명 텐챠이 수호대의 소리없는 외침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에 호응하듯 삼대천의 몸에서 각기 강렬한 기파가 뿜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텐챠이.
그는 일천 기병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감으로 강력한 군기를 뿜어 냈다.
“자, 그럼…….”
히히힝―!
텐챠이의 말, 창풍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격이다.”
텐챠이와 일천의 기병.
그들의 앞에 남경의 황성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 ☆ ☆
사례교위(司隷校尉)라는 직위가 있다.
원래 사례라고 불리던 이름이 한무제 때 바뀐 것인데, 한때 사례교위는 수도와 그 주변의 치안을 담당하며 모든 범죄자를 검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서 대신(大臣)에 못지 않은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이제는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병사들이나 훈련시키는 한직(閑職)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우습게 볼 직위는 아니었다. 녹봉도 일천 석은 되는데다, 남경에 역도의 무리들이 나타날 경우 사례교위가 다스릴 수 있는 병력은 무려 일만이나 되었다.
남경은 큰 도시다.
인구는 사십칠만. 가장 바깥쪽 외성의 둘레는 일백팔십 리나 되고, 내성인 응천부성은 둘레가 육십육 리. 직경으로 따지면 그 너비가 십 리나 되는 큰 성이었다.
그 큰 성의 치안을 지키고 황성을 수호하기 위해 무려 일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항상 녹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현(現) 남경의 사례교위 장철패는 한때 대장군의 직위도 노렸던 촉망받는 무장이었다.
홍무제 시절에는 남옥 대장군의 젊은 부장으로서 운남 지역 정벌에서 공을 세운 적도 있었지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인지라.
누가 알았겠는가, 오히려 그 빛나는 경력이 발목을 잡을 줄은.
남옥 대장군이 역모로 몰려 참수당하고, 그 구족이 멸했으며, 관련된 군부의 인물들이 무려 일만 오천 명이나 줄줄이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나마 장철패는 그 당시 동해안에서 왜구들과 싸우고 있었기에 그 변을 피해 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한때 남옥의 부관으로서 친분이 있었다는 꼬리표는 무슨 짓을 해도 떼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최후에 도달한 곳이 바로 남경의 사례교위였다.
직위의 이름은 그럴듯하고 수도인 남경에 산다니 좋아 보이지만, 사실 겉만 그럴듯하지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생각해 보자.
남경이다.
북쪽 장성과 맞닿아 있는 북경도 아니고, 일천 년을 이어 온 도읍지인 남경이란 말이다.
반군이든 원의 잔당이든 왜구든.
명 황실을 적대하려는 자들 중에 어느 누가 감히 남경을 직접 노리겠느냐는 말이다.
사례교위라는 직위도 남경을 노리는 적도들이 있을 때나 할 일이 있는 것이지, 그런 일이 벌어지기는 요원(遙遠)한 이상 그는 이름만 거창한 뒷방 늙은이에 다름없었다.
이제 그의 나이 오십.
한 오 년만 더 지나면 장년기를 넘어 슬슬 노년기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매일같이 몸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최근엔 부쩍 힘이 부치는 것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특히 동창이나 금의위가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모반의 여지가 있는 자들은 동창에서 사전에 싹 다 잡아들이고, 혹시나 있는 암살 시도는 금의위가 다 막아 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사례교위라는 직위는 그들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은 회의감마저 드는 것이다.
‘이제 슬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가?’
장철패는 어린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부모님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왔던 광주의 고향집을 떠올렸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에 안 돌아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자신이 늙어 나이가 들어가자 그때의 기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옛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다 정리하고 내려가자.’
장철패의 눈빛에 짙은 향수가 가득 차올랐다.
“교위님! 사례교위님!”
그때, 황성 입구에 있는 그의 집무실 안으로 날 듯이 달려오는 젊은이가 있었다.
이제 막 스물다섯이 된 젊은 부관.
관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능력은 있지만 가문이 보잘것없어서 출세를 못하고 있는 불쌍한 친구였다.
“무슨 일인가?”
“큰일입니다. 지금 남경의 사대문(四大門)에서 각각 녹림방도로 보이는 산적 떼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장철패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산적? 녹림?”
“예!”
“사대문에서 각각? 동시에 그런단 소리냐?”
“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놈들이 미쳤나? 산적이면 산에나 있을 것이지 왜 뜬금없이 남경에 온 단 말이냐?”
“그건 저도 잘……. 아무튼 지금 대문의 수문위사들이 각각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제각각 수백 명이 넘는 산적들이 막무가내로 남경성 내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허, 그것참.”
“어떻게 할까요, 교위님? 병사들을 이끌고 증원에 나갈까요?”
말투는 심각했으나 젊은 부관, 관중의 눈빛은 호기심과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허허, 하긴. 한창 열정이 들끓을 나이지.’
그 자신도 젊었을 땐 저랬던가, 하고 웃음을 짓게 만드는 흐뭇한 모습이었다.
“그래, 병사들을 데리고 한 번 가 보…….”
가 보자는 말을 꺼내려던 장철패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생각에 입을 꽉 다물고 말았다.
‘잠깐, 왜 녹림의 산적들이 단체로 사대문을 건드리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
장철패는 어느새 자신이 아무 탈 없는 무사태평한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남옥 대장군을 따라다니던 시절.
목숨을 칼끝에 올려놓고 살았던 그 시절엔 절대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원래 ‘이상한 일’에 대한 사소한 방심이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다.
그는 오랜 전장 경험으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관중, 증원은 나가지 않는다.”
“예?”
관중의 눈에 의아함과 아쉬움이 함께 담겼지만, 지금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장철패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이 일은 징조가 범상치 않았다.
“관중, 증원은 나가지 않는다. 전령만을 보내라. 곧바로 사대문을 폐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만약 산적 놈들이 밀고 들어오려고 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으라 해. 어차피 그놈들, 나중에 몰살을 당하기 싫으면 절대로 관병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사, 사대문을 폐쇄하란 말입니까? 교위님, 잘못되면 도찰원에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진심으로…….”
“어서!”
장철패가 호통을 치자 관중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을 굳힌 채 전령을 보내기 위해 달려갔다.
상황 파악이 빠르다.
역시나 사례교위의 부관으로 평생을 썩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내 예측이 틀려야 할 텐데…….’
“교위님! 전령을 보냈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관중의 낯빛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관중.”
“예!”
“지금 응천부 외곽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하고,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병사들이 얼마나 되지?”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천오백…… 아니, 교대조까지 합하면 이천 정도는 될 겁니다.”
“삼천. 아직 훈련 중인 예비대까지 동원해서 삼천을 모아. 창만 들 수 있으면 일단 다 모으도록 해. 황성에 최후의 보루를 만들어야 한다.”
“교위님, 이 일은…….”
“괜찮아. 내가 책임진다. 그보다 빨리빨리 움직여! 내 예상이 맞다면 오늘 분명 큰일이 벌어질 거다.”
관중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병력을 집결시키기 위해 달려 나갔다.
“녀석…….”
장철패는 그를 걱정하는 관중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지난 십 년간 쓰지 않던 사례교위의 권한을 오늘 모조리 다 사용하고 있었다.
독단으로 사대문을 폐쇄하고, 황성 앞에 삼천 병력을 집결시킨다.
이 일은 자칫 한 발만 삐끗해도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심상치가 않아…….”
다가온 전투의 공기를 느끼는 장철패.
그는 어느새 남옥 대장군을 따르던 그 시절, 경험 많은 장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 ☆ ☆
“장군, 제법 싸울 줄 아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산적들에게 황성의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아예 사대문을 폐쇄해 버렸군요.”
황성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텐챠이의 뒤에서 청색 갈기가 흩날리는 명마를 타고 있는 하시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지금 황성의 정문에 집결해서 그들을 향해 창검을 곧추세우고 있는 삼천여 군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저건 싸울 줄 안다기보다도 감이 좋다고 표현해야 하겠지. 남경에 처박혀 있는 수문대장이라기에 고지식한 신출내기일 줄 알았더니, 경험이 풍부한 자였던 모양이다.”
텐챠이는 숫자가 세 배나 차이 나는 적을 앞에 두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남경 사례교위 장철패. 예전에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남옥의 부장이었다고 하더군요.”
“남옥? 그 운남 정벌의?”
“예. 경험이 많은 장수인 듯합니다.”
“그래서 그랬군. 감이 좋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장수가 전장도 아니고 겨우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나?”
“남옥이 모반 혐의로 처형된 것 때문에 피해를 본 모양입니다.”
“……난 역시 명 나라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남옥 같은 장수를 역모 혐의로 몰아 일만 오천의 무인들과 함께 죽이다니.”
“대신 그 덕분에 지금은 꽤나 황제의 권력이 막강하다더군요.”
“정작 가장 중요한 국력을 깎아먹었는데, 황제가 권력이 강하면 무엇을 하나? 다 쓸모없는 짓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황성에선 난리가 나고 있었다. 황성의 정문이 닫히고, 안쪽에선 경계의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이제 시간이 얼추 다된 듯합니다.”
“그런가.”
“사대문의 위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다 죽여라.”
“예, 녹림에는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문을 열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르가 아무도 없는 정면을 향해 손을 흔들어 뭐라 신호를 보내자, 보이지 않는 성벽 너머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뭔가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황성의 정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텐챠이 수호대! 무기를 들어라!”
척. 척.
텐챠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천 기병이 일시에 무기를 뽑아 들었다.
“황성의 내부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손속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마라.”
“예!”
“가자.”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텐챠이가 선두에서 파랗게 빛나는 신응도를 뽑아 들었다.
두두두두―
“끼요오아앗―!”
기묘한 기합 소리와 함께 힘차게 달리는 일천 명의 기마병.
그들은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황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남경 사례교위 장철패는 두 눈을 부릅뜨고 황성의 내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황성 정문을 닫았다.
만약을 위해 일천의 병력은 남겨 둔 채, 나머지 이천의 병력을 황성의 성벽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황성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성문 뒤쪽에서 버팀목을 지키라고 명령한 스무 명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이렇게 허무하게 성문이 열린단 말인가?
“모두 내려간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장철패는 고함을 쳤고, 관중은 들고 있던 깃발을 흔들어 이천 명의 병사에게 뜻을 전달했다.
“회군! 회군!”
그리 높지 않은 성문에서 내려오는 데는 반 각이면 충분했다.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황성의 성문을 확인한 장철패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앞에는 스무 명의 병사가 시신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병사들을 도륙한 것으로 보이는 흑의인이 다섯.
흑색 삿갓을 머리 위에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검은색 무복을 입었으면서도 가슴에 검은색 실로 대국(大菊) 꽃을 수놓은 특이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얇은 유엽도엔 병사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물이 묻어 있었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장철패가 고함을 쳤지만, 검은 무복의 사내들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열린 성문 밖으로 뛰쳐 나갔다. 마치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저, 저놈들이……!”
당장에라도 뒤쫓아가서 요절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저 멀리에서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막강한 원나라의 기병들이.
“닫아! 빨리 문을 닫아!”
“예!”
속도가 붙은 기마병들을 문이 열린 채로 정면으로 맞으면 보병들은 그대로 몰살당할 수도 있을 터.
가장 앞쪽에 있던 병사들이 다급하게 달려가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성문을 채 반도 다 닫기 전에 문이 박살 나며 십여 명의 병사들이 마치 공깃돌마냥 가볍게 뒤로 날아가 버렸다.
꽈아앙―!
퍼억!
“아아!”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장철패는 탄식했다.
날아간 자들 중 대부분이 땅바닥에 처박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가장 앞에 선 자.
키가 팔 척은 될 것 같은 괴물 같은 체구의 거한이다.
그가 앞에 나서서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퍽퍽 뒤로 튕겨 나갔다.
악마들로부터 불전을 지킨다는 금강동인의 모습이 이러할까.
옆에서 병사들이 창으로 찔러도 보고, 달려들기도 했지만, 마치 온몸이 강철로 되어 있는 듯 거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끔 거한이 귀찮다는 듯이 거대한 손바닥으로 무기를 잡아채면 오히려 무기가 박살 나거나 우그러졌다.
“으아악!”
“크악! 막아! 막아라!”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하지만 정작 가장 두려운 것은 괴력을 지닌 거한이 아니었다.
거한이 옆으로 비켜서며 앞으로 나선 자.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명마를 탄 그자는 철 갑옷과 공작 깃털이 꽂힌 투구를 썼으며, 푸른빛이 감도는 대도(大刀)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는 왼쪽 눈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깊은 흉터가 있었는데, 그가 오연한 시선을 주변으로 돌아보는 모습에선 패왕(覇王)을 대하는 듯한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으아앗! 죽어라!!”
팔 척 거한이 아니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근처에 있던 병사가 창을 내찌르며 달려들었다.
만용.
상대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에 할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푸화악―!
공작 깃털 투구를 쓴 자는 그저 가볍게 손목을 비틀었을 뿐인데, 그 작은 동작에서 파생된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달려들던 병사의 상체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허리 위로 비스듬하게 갈라진 육신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피와 육편을 흩뿌렸다.
믿을 수 없는 위력.
어찌 도를 휘둘러 사람의 몸을 화탄을 터뜨리듯이 폭파시킬 수 있단 말인가.
히히힝―!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그 장수의 움직임은 활화산처럼 거칠고 난폭했다.
그가 타고 있던 명마가 앞에 있던 병사들을 앞발로 걷어차며 뛰쳐나왔다.
명마는 스스로가 대단한 장수인 양 느끼는지 기세등등했다.
거칠게 발을 구르고, 말 등 위에서 한 번 푸른빛이 번뜩일 때마다 무기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처참하게 박살 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콰직! 쾅! 콰드득!
“으아아악!”
핏물이 분수처럼 치솟고,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얻어맞은 육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절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바로 앞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흥분했던 병사들조차 할 말을 잃고 공포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 사람의 기세에 밀려 일천의 병사들이 물러난 것이다.
일기당천(一騎當千)!
천하에 상대할 자가 없는 진정한 괴물이 이곳에 있었다.
“허허…….”
병사들을 무인지경으로 박살 내며 달려 나오는 장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경 사례교위 장철패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관중아.”
“예, 예?”
“금화부에 보낸 전령은 어떻게 되었지? 그들이 사병을 내놓겠다던가?”
“그것이…….”
관중은 얼이 빠진 듯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을 우물거렸다.
보아하니 그가 적들을 발견하자마자 보낸 전령에게서 답이 없던 모양이다.
장철패는 금화부로부터 대답을 영영 들을 수 없을 것을 직감했다.
적도들은 산적 떼를 보내 황군을 분산시키고, 계획적으로 남경을 침공해 온 치밀한 자들이다.
게다가 황성의 문을 닫았을 때 귀신처럼 나타나 다시 문을 열어 버린 흑색 무복의 살수들 또한 마음에 걸렸다.
저런 기괴하고 대단한 자들이 적이라면…… 아마 그가 보낸 전령들 또한 제대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다 죽임을 당했으리라.
‘아무래도 고향에 돌아가긴 틀린 것 같군.’
장철패는 머릿속으로 가을이 되면 주변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고향의 풍요로운 대지를 떠올렸다.
“관중아.”
“예, 예?”
“관중!”
짝! 소리와 함께 관중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얻어맞은 곳이 금세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강렬한 일격이었다.
놀란 눈으로 되돌아보는 관중에게 장철패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교, 교위님?”
“금화부로 보낸 전령은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여긴 이미 틀렸어. 누군가가 반드시 밖으로 탈출해서 원의 잔당에게 남경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
“황성 내부 황궁으로 들어가라. 대전(大殿)의 태사의를 좌측으로 밀면 지하 통로가 나온다. 들어가서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 향하면 아마 외성 밖의 도독부 근처로 나올 수 있을 거다.”
황궁을 지키는 사례교위로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알고 있는 기밀 정보였다.
고문을 당해도 내놓지 않을 특급 정보를 순순히 말해 주는 장철패.
그걸로 그의 의중을 깨달은 관중의 눈빛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교위님! 어째서 그런 말을 제게……!”
“네가 가라. 나는 이곳에 남을 거다.”
“교위님,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도망치는 동안 저 장수는 내가 상대한다. 그동안 하는 일도 없이 받은 녹봉의 값은 해야지.”
장철패는 왕년의 호연지기를 되살리며 허리에서 장군검을 뽑아 들었다.
“관중!”
“예, 예! 교위님!”
“항상 널 내 아들처럼 생각했다. 이번에 살아남으면 이딴 한적한 데서 썩지 말고 차라리 싸울 수 있는 전장에서 병사로라도 종군해라. 넌 크게 될 수 있는 놈이야.”
“교위님―!”
관중은 비통하게 절규했으나 괴물 같은 장수에게 달려드는 장철패의 호탕한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황궁을 향해 뛰어가는 관중.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장철패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앞에 이제껏 만나 본 적 없는 최강의 장수가 있었다.
운남, 묘강.
기기묘묘했던 적들 중에서도 만나 본 적이 없던 막강한 적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불태우기엔 부족함이 없는 상대구나!”
후우웅―!
장철패는 양손으로 붙잡은 장군검을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열 살 때 처음으로 검을 잡고, 그 이후 사십 년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휘둘러 온 검이다. 거기다 생명을 버릴 각오를 담은 검격은, 말 위에서 날아오는 막강한 도격을 정면으로 맞받아 튕겨 내는 데 성공했다.
쩌엉!
“크윽……!”
간신히 막아 내긴 했으나 어마어마한 충격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장철패는 마치 거대한 망치로 온몸을 얻어맞은 듯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장군검은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 한쪽으로 굽어졌고, 손바닥이 찢어졌는지 호수구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대…… 단…… 하다……!”
하지만 결코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구부러진 장군검을 들고 끝까지 상대를 향해 겨누는 장철패.
그런 노장의 결연함을 느꼈음인가.
말 위의 장수가 능숙한 한어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장철패인가?”
“나를…… 아는가?”
“그 기백, 아깝군. 어째서 초원의 전사로 태어나지 않았나.”
비록 그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속에 숨어 있는 호의만큼은 죽음을 각오한 장철패를 기쁘게 만들었다.
“고맙군! 하지만 나는 명 제국의 신하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가.”
“이름을 알려 다오!”
“텐챠이. 초원 최고의 전사라 자부한다.”
“그거 영광이군!”
장철패는 호탕하게 웃었다.
비록 텐챠이의 뒤에서 세 명의 무장과 막강한 기병들이 압도적으로 그의 병사들을 휩쓸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미워할 수 없는 무언가가 텐챠이에겐 있었던 것이다.
“타하앗―!!”
힘찬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 장철패.
그는 삼 합을 버텨 낸 끝에 목이 잘려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만면에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남경의 황궁은 거대하고 화려했다.
붉은 융단과 금색 장식의 조화는 그 어떤 색의 조합보다도 눈을 사로잡았다. 주변에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서 있는 도자기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수백 냥을 호가하는 보물들뿐이고, 특히 백 개의 계단 위에 만들어져 있는 태사의는 아무런 장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저벅저벅.
텐챠이는 태사의로 이어지는 백 개의 계단을 올라 그 위에 앉았다.
태사의에선 넓은 대전과 참석해 있는 신하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본래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이는 대전이지만, 지금 이곳엔 오로지 네 명뿐이었다.
삼대천과 흉월.
그들이 감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것참, 묘한 기분이다.”
“……정말 그렇군.”
“이런 식으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죠. 북쪽에서 밀고 내려와 당당하게 점령하게 될 줄 알았는데…….”
패망한 제국의 부흥을 노리는 입장에서 명 나라의 황궁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건 항상 내심을 표현하지 않던 텐챠이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한참이나 태사의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시르.”
“예, 장군.”
“궁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했지?”
“병사들은 모두 죽이고, 하인이나 시녀들은 한곳에 몰아 놨습니다.”
황궁을 지키던 병사들의 숫자만 해도 일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삼천이 죽었고, 별다른 구심점도 없이 흩어져 있던 병사들은 결국 자신들의 십분지 일밖에 안 되는 숫자의 적에게 사냥당하듯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그래, 잘했다.”
텐챠이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궁이 넓은 만큼 관리하는 자들의 숫자도 많았을 테지만, 하시르는 잘 처리했을 것이다.
“다른 쪽은? 금화부는 어떻게 되었지?”
“금화부에는 삼호방이 갔습니다. 인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해 두었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인만큼 지금쯤 약탈을 하고 있을 겁니다.”
“흐음, 금화부의 저택엔 사병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삼호방은 강서성을 지배하는 흑도의 거파입니다. 숫자도 많고, 강한 자들도 많으니 괜찮을 겁니다. 특히 삼호방주는…… 굉장히 강합니다.”
직접 일천 기병을 이끌고 삼호방으로 쳐들어가 방주를 무릎 꿇린 하시르가 하는 말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대문은 녹림이 장악했나?”
“예. 위사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외성 쪽의 도독부는?”
“황산파입니다. 장문인인 태양검군(太陽劍君) 종조기(宗彫起)가 직접 갔으니 그쪽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도 강하나?”
“비무라면 황산파 장문인이 강합니다. 전투라면 삼호방주가 유리합니다.”
삼호방주에겐 목숨을 건 실전에서만 쓸 수 있는 숨겨진 비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텐챠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흑도나 사파의 무림인들을 관의 싸움에 끌어들이자는 발상은 하시르가 했다.
어차피 관부와 척을 지고 제멋대로 사는 자들인데, 거부할 수 없는 재화(財貨)와 부귀영화를 약속해 주고 써먹자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런 들짐승 같은 자들을 믿을 수는 없으니 힘으로 한 번 눌러 줘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이백 일간 삼대천과 일천 명의 기마병이 한 일이 그것이었다.
각지의 쓸 만한 흑도나 사도 쪽 문파를 추려서 최종적으로 몇 군데를 뽑은 뒤, 직접 찾아가 힘을 과시하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개중엔 격렬하게 반항해서 결국 멸문시켜야만 했던 곳도 있었고, 순순히 투항을 하니 오히려 못 미더워 죽여야 했던 자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림인들을 상대로 싸워 보면서 삼대천과 일천 기마병에게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의 실전은 백 일의 연공보다 더 배울 점이 많은 법이다.
이제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일만이 남았군.”
“예, 그렇습니다.”
“흑화보. 믿을 만한가?”
닫혀 버린 황성의 대문을 연 자들이 바로 흑화보의 특급 살수였다.
호남제일살문 흑화보.
청부를 당한 자의 가슴에 검은색 꽃이 그려져 있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텐챠이가 세운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에는 그들이 꼭 필요했다.
“예. 사실 흑화보주가 원 제국 출신이더군요. 의외로 쉽게 이야기가 통했습니다.”
“하늘이 돕는군.”
“예. 정말 하늘이 돕는 듯합니다.”
텐챠이는 태사의의 손잡이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아직 황제와 명군은 건재하고…… 또한, ‘그’가 아직 나오지 않았어.”
텐챠이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붉은 악귀 장기린.
결국 마지막까지 원수가 되어 버린, 하늘이 내린 텐챠이의 대적을 뜻함이다.
‘장군, 계획은 완벽합니다. 설령 그가 나타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시르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굳이 텐챠이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믿겠다.”
스르륵―
텐챠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며 번개같이 신응도를 뽑아 휘둘렀다.
쩌저적!
위아래, 절반으로 쪼개진 태사의가 비스듬하게 흘러내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태사의란 곧 명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물건.
상징적인 과시였다.
텐챠이는 지금 태사의를 벤 것처럼 머지않아 명제국의 황제도 베어 버릴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 우리의 하늘은 열렸다.”
나직한 그의 선언과 함께 남경의 하늘이 뒤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