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77화 (62/686)

第七十四章 ― 남궁재인(南宮在人)

안휘성 합비.

태산북두 소림사가 버티고 있는 하남과 남경의 사이에 위치하며, 상권(商圈)으로 따지면 황금어장이나 다름없는 지역이 바로 안휘성이었다.

그중에서도 성도인 합비는 남경에서 중부 지방으로 뻗어 나가는 상로(商路)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관문이었다.

큰 도시는 사람이 많이 드나든다. 사람이 많이 드나든다는 것은 곧 돈이 많이 움직인다는 뜻이고, 돈이 많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지역의 이권(利權)을 가지면 챙길 수 있는 금전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곳 같으면 파락호 단체든 흑도나 사파 무림 방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혈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기름진 고기가 떡하니 눈앞에 있는데 굶주린 들개가 그것을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합비에서만큼은 모른 척 지나가야 한다.

기름진 고기가 있긴 하지만, 그 한 걸음 뒤에서 커다란 사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원 말기 시절부터 근 이백 년 가까이 무림에서 최고의 무가(武家) 자리를 놓치지 않은 명문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 바로 합비였다.

남궁세가는 안휘성 전체에서 마치 왕(王)과 같은 권위를 지녔다.

금력(金力), 무력(武力), 권력(權力).

세 가지 힘을 고루 가지고 있었고, 거기다가 당대의 가주인 창천대협 남궁무원은 천품(天品)을 지닌 대협 답게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초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람들을 갈취하는 파락호가 나타나면 곧바로 남궁세가에서 파견된 무인들에게 박살이 났으며, 가뭄이나 태풍 때문에 기근(饑饉)이 오면 창고를 활짝 열고 아낌없이 쌀과 금전을 베풀었다.

그러니 민심(民心)이 안 따를래야 안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관에서 임명한 성주가 종종 부임되어 오지만, 실질적으로 관아에 세금을 내는 지역 유지들이나 민심이 오로지 남궁세가만을 따르니 성주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가주 남궁무원이 무림십대고수 안에 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성세를 누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대대로 안휘성을 지켜 온 전통과 민심.

그것은 무림십대고수의 강대한 무력보다도 더욱 큰 무기였던 것이다.

합비의 번화가 인근에 위치한 남궁세가는 그 크기부터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서쪽 담에서부터 동쪽 담까지의 거리가 무려 삼 리(里)에 달하고, 대문은 세가의 성세만큼이나 높아서 크기가 이 장이나 되는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전각들은 웬만한 궁궐이 부럽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장원은 안휘성주가 지내는 관사와 관청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이미 가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마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세가의 담장 안쪽엔 남궁 씨의 직계와 방계, 거기다가 최중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가신들의 가문인 오가(五家)가 함께하고 있었다.

한가(瀚家), 정가(鄭家), 단가(湍家), 사마가(司馬家), 위지가(違旨家).

제각각 특색을 가지고 있는 다섯 개의 가문은 남궁세가를 떠받치고 있는 큰 기둥이었다.

남궁가와 오가, 총 여섯 개의 성씨가 한 담장 내에서 생활하니, 그 인원을 다 합치면 물경 이천에 달했다.

그만한 인원을 먹여 살리는 금액은 어디서 나오는가.

다른 세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거대한 가문의 역량은 가지고 있는 토지와 표국이나 상단 같은 사업체에 있었다.

남궁세가의 이름 아래에 있는 논밭만 해도 십만 평이 넘고, 그 휘하의 사업체는 안휘성 안에서 활동하는 물류 전체의 삼 할 가까이를 관장했다.

남궁(南宮) 자가 새겨진 깃발을 세운 마차들이 성 밖을 드나들 때마다 한 궤짝을 가득 채운 금은보화가 세가로 들어왔다.

그렇게 남궁세가는 하루하루 욱일승천의 기세로 점점 그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었다.

남궁세가의 대문을 지나 외원으로 들어서면 우선 양쪽에 탑처럼 솟아 있는 높은 전각을 보게 된다.

사마가와 위지가.

외원을 총괄하는 두 개의 가문이 있는 곳이었다.

사마가는 남궁세가로 들어가는 물건이나 금전을 총괄하는 일을 맡고 있고, 위지가는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위나 감시,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나서야 할 일을 주로 관리했다.

그리고 붉은색 단사로 옻칠을 한 중간문을 지나면 중앙에 둥그런 공터를 중심으로 세워진 세 개의 전각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사마가와 위지가를 제외한 나머지 오가(五家), 즉 한가와 단가, 정가의 전각이 있는 중전(中殿)의 모습이었다.

세 개의 건물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한가의 전각이 제일 크고 화려하고, 그다음은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건물을 지은 단가, 그리고 가장 허름한 것이 정가였다.

한가는 의약(醫藥)을 관리했다. 단가는 검이나 농기구 같은 쇠붙이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가문이었고, 정가는 남궁세가 소유의 농토를 관리했다.

이렇듯 다섯 개의 가문은 제각각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남궁세가가 부흥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어 주었다.

아무리 남궁가가 비전 절학의 무공을 가지고 창천대(蒼天隊)나 뇌공대(雷公隊) 같은 일류 무인들의 집단을 거느리고 있어도, 오가의 힘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안휘성 전체를 호령하는 거대 세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전(中殿)에 있는 세 개의 가문 중 가장 인적이 드문 곳. 그러면서도 가장 시끄러운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곳이 바로 단가(湍家)다.

땅, 따당! 땅! 땅!

튼튼하게 지어진 전각 안쪽으로 솜씨 좋은 검장(劍匠)들이 사시사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망치를 두드린다.

뜨거운 풀무질의 열기가 전각 전체를 후끈하게 데우고 있으며, 사내들의 시큼한 땀 내음과 쇠가 녹는 텁텁한 냄새가 가득해서 단가에 처음 오는 사람은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채 등을 돌려 나가 버리곤 했다.

그 단가의 중심부.

화력이 높기로 소문난 백탄(白炭)을 사용하는 최상급의 가마 앞에서 어디로보나 눈에 띄는 한 청년이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척 보기에도 단가의 사람이 아닌 듯했다.

기루에서 미녀를 옆에 끼고 술을 마셔야 어울릴 법한 잘생긴 얼굴에 매끈한 외모였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흉터가 가득한 육신에선 표범처럼 날렵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평생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한 몸매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분명 외인(外人)이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내려치는 망치질 솜씨만큼은 웬만한 단가 사내만큼이나 능숙해 보였다.

땅! 따당! 땅! 따다당!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며 내려치는 망치질이 한참이나 계속되자, 근처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던 단가의 사내들이 청년의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들어 작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생각보다 제법…….’이라든가 ‘이럴 수가, 망치 끝이 살아 있어!’ 같은 말들을 나누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평생 모루와 망치밖에 모르는 단가의 사내들은 평소에 가만히 놔두면 하루에 한두 마디밖에 안 하는 과묵한 성격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제각각 눈에 열기를 띠고 감탄을 토해 냈다.

지금 망치질을 하는 청년의 신분이 그만큼 특별했던 탓이다.

“이놈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남가표국에 들어갈 숫자도 못 맞춘 놈들이 뭐 잘났다고 구경 중이야! 빨리 안 돌아가?”

“헛, 가주님……!”

“어서!”

단가 전각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엔 뱃심이 가득 실려 있었다.

키는 작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에 여인네의 허벅지만 한 팔뚝을 가지고 있는 오십대의 중년 사내였다.

그가 호랑이 같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주변을 노려보는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둥그렇게 모여 있던 사내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바로 주변에서 땅땅! 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혀를 쯧쯧, 차면서 고개를 젓는 중년 사내.

그가 바로 단가의 가주, 단욱(湍郁)이었다.

사십대에 단가의 가주 직을 물려받아 십여 년째 그 직무를 잘 수행해 왔으며, 비록 천하에서 알아주는 명장(名匠)은 아니지만 만들어 내는 물건에 자신의 혼을 실을 줄 아는 진정한 장인이었다.

그는 큰 소란에도 여전히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 청년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땅! 따당! 땅! 따당!

망치질을 하는 박자에 운율이 섞였다.

청년은 그로부터 일각가량 망치질을 계속한 뒤에야 벌건 쇳덩이를 차가운 물속에 단번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뿌옇게 올라오는 수증기 사이로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에 단욱은 크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참, 징하구나, 징해! 달포가 넘게 죽치고 있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우리 단가의 망치질을 훔쳐 배우려고 그랬구려!”

“하하, 단가주님께서 보시기엔 괜찮았습니까?”

“괜찮긴. 한참 멀었소. 철의 숨소리도 듣지 못하고, 편강과 접쇠도 형편없고…… 하지만 망치질을 하는 박자 하나만큼은 특이하더이다.”

청년에게 가까이 다가간 단욱은 찬물에 급격히 몸을 식힌 철덩어리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늘게 뜬 눈사이로 장인 특유의 집요한 안광이 번뜩였다.

“역시, 망치질의 박자가 일정해서 그런지 쇠의 분포가 고르군. 제법이오.”

“오! 그거, 칭찬인 겁니까?”

“칭찬이지요. 망치질을 보아하니 보통 사람들보다 묘하게 반 박자 정도가 빠르던데, 그건 우리 같은 대장장이에게 있어서는 비전(秘傳)의 기술이외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소?”

단욱의 얼굴엔 짙은 호기심과 함께 의구심이 들어있었다.

반 박자가 빠르다는 것.

말은 쉽지만 단가의 비전이 될 만큼 간단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그런 것을 대장간에 들어온 지 불과 달포밖에 안 된 청년이 해낸다는 게 단욱은 믿기지가 않았다.

“하하,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습니다. 망치질에도 응용해 보니 잘되는군요.”

“아니, 그럼 장인이 아닌 사람한테 그걸 배웠다는 것이오?”

“예. 객잔의 주인한테 배웠지요.”

“객잔의 주인이라니……!”

단욱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보시오, 대공자. 지금 한낱 객잔 주인에게 단가의 비기를 배웠다는 것이오?”

“아, 드디어 대공자라고 불러 주시는 겁니까? 그동안 하도 호칭을 안 불러 주셔서 저도 제가 대공자인 줄 잊고 있었습니다.”

대공자라 불린 이.

남궁세가의 장자, 남궁휴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단가주 단욱은 호랑이 같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장난치지 마시오, 대공자. 우리 단가의 비기(秘技)를 객잔 주인에게 배웠다니, 만약 그 말이 농담이라면 우리 단가를 모욕한 것이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객잔의 주인에게 이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으니, 객잔 주인분도 그런 기인이사였다는 뜻입니다.”

“으음……!”

“단가주님, 그보다 제 망치질이 쓸 만했다면 하실 말씀이 하나 있으실 텐데요?”

“끄응……!”

단욱은 난감한 얼굴을 신음을 토해 냈다.

“대공자,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셨소? 그 얘기에 대해서는 첫날 이미 대답을 했던 것 같소만.”

“하하! 약관을 지난 장부가 한 번 뜻을 세웠는데 어찌 쉽게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鄭)가주님이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저에게 지원을 약속하셨듯이, 단가주님도 그렇게 하게 만들 테니 각오를 해 두십시오.”

“허어, 정가주, 그 깐깐한 양반을 어떻게 설득했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은 거였소?”

단욱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가주님은 제가 논밭을 직접 매겠다고 달라붙으니 열흘 만에 승낙을 하셨습니다. 처음엔 완강하게 버티셨지만, 계속해서 농터로 찾아가니 결국 패배를 선언하셨지요.”

“으음, 논밭을 매다니……. 진정, 직접 논밭을 매려고 하셨소?”

“예, 그랬습니다. 하려고만 한 게 아니라 한 밭뙈기 정도는 제가 매었습니다. 하하, 올해 수확이 기대되는군요.”

단가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남궁휴를 응시했으나, 이내 그의 두 눈에서 거짓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 허헛! 허허허!”

그의 웃음엔 허탈함과 함께 기꺼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남궁세가의 대공자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던가.

비록 명 황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소국(小國)의 왕자 정도 되는 엄청난 권위와 힘을 가진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신분을 가진 공자가 직접 논밭을 맸단다.

거머리와 미꾸라지, 개구리, 지렁이 같은 것들이 득실거리는 진흙에 직접 발을 담그고 허리를 굽힌 채 뙤약볕에서 잡초를 뽑고 모종을 심었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욱 자신도 논밭에 직접 들어가는 것은 싫었다. 차라리 하루에 검 열 개를 제련하는 게 낫지 진흙탕에 몸을 빠뜨리는 것은 대장장이로서의 자긍심을 버리는 것 같아서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남궁세가의 첫째 아들이 체면불구하고 그걸 했다는 뜻이 아닌가.

‘대단하다, 대단해. 남궁세가에서 지금의 가주보다 더한 천품(天品)이 나타날 줄이야! 본디 아랫사람의 고충을 모르는 군주는 치세를 잘하지 못하는 법. 아마 이공자 같으면 목에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논밭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 또한 우리 단가에 와서 망치를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둘째, 남궁혁의 성품을 떠올린 단가주 단욱은 눈을 질끈 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달포 전에 갑작스레 나타난 남궁휴가 그에게 청한 것은 그를 남궁세가의 후계자로서 밀어 달라는 것이었다.

남궁세가는 오가(五家)의 뜻을 존중한다.

세가의 후계자가 되려면 반드시 가문회의 때 오가 중 세 개의 가문에게 지지를 받아야만 했다.

처음엔 이미 후계자는 남궁혁으로 결정된 마당에 왜 갑자기 분란을 일으키려나 싶어서 단칼에 거절했던 단욱이었으나 그 후로 매일같이 단가를 찾아와 넉살 좋게 웃으며 망치질을 하는 남궁휴를 보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진정으로 수하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진흙탕이든 험한 대장간이든 가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에 다시없을 성군(聖君)이 될 것이고, 정반대로 그 모든 게 치밀한 계산하의 행동이라면 천하에 다시 없을 효웅(梟雄)일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남궁세가를 물려받기엔 충분하고도 넘치는 인재였다.

‘대공자…… 방탕한 망나니라더니, 소문이 틀렸군. 천하에 다시없는 인재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굴뚝같아도 단욱은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대공자는 겉만 멀쩡했지 허영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공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그릇이다. 하지만 이공자에게는 이미 가신들로 이루어진 세력과 든든한 외가의 힘이 있으니…… 정가주만이라면 몰라도 나까지 대공자의 편을 들었다가는 자칫 세가가 큰 분란에 휩싸이는 것은 아닌가?’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가 세가를 물려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란을 피해 세가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단욱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고민을 느낀 것일까.

남궁휴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욱을 불렀다.

“단가주님.”

“……왜 그러시오?”

“분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격하고 안하무인의 성품을 지닌 제 동생이 가주가 되고, 외가인 이씨세가가 남궁세가를 장악하게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단욱의 호안(虎眼)이 부릅떠졌다.

단욱은 예전에 남궁휴가 이화 부인과 외척 세력에 눌려 쫓겨나는 순간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원망과 악이 하늘에 닿았을 그 순간까지도 남궁휴는 동생이나 이화 부인에 대한 비난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그런 남궁휴가 이젠 단순히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정도가 아니라, 남궁혁과 이화 부인의 세력을 남궁세가에서 몰아내야 하는 악적처럼 말하고 있었다.

단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물었다.

“대공자, 아무리 외척인 이씨세가가 강성하다고는 해도 감히 남궁세가를 장악할 수는 없소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씨세가가 남궁세가에 귀속될 수는 있겠소.”

단욱의 목소리에선 남궁세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가 남궁혁이라는 후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굳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묵묵히 있던 것은 그런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궁세가는 강하다.

그렇기에 다른 세력 따위가 감히 장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이씨세가가 우리가 알고 있듯 관(官) 쪽의 명문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당혹해하는 단욱에게 남궁휴는 미리 준비해 온 서찰을 하나 건네주었다. 단욱은 서찰을 받아 들고도 머뭇거렸으나 이내 서찰을 펼쳐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이런! 이런 일이……!”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부릅뜬 눈에서는 노화가 불타올랐다.

“예당주 진호패, 사(死). 차기 예당주 이진중. 뇌공삼대 대주 장환, 사(死). 차기 뇌공삼대주 이진철. 총관부 제이총관 주용태 귀향(歸鄕). 차기 제이총관 마상태…….”

“아시다시피 이진중과 이진철은 이화 부인의 사촌들이고, 마상태는 평생 이씨세가를 모신 가신입니다.”

“으음, 그밖에도 스무 명이나 더 있다니. 이게 정말 사실이오? 혹시 많은 일들 중에 이화 부인의 세력에 대한 사실만 여기에 모아 둔 것일 수 있지 않소?”

“이 년 사이에 스물세 명이 죽거나 사라진 것이 우연일 수는 없습니다. 그 서찰에 적혀 있는 사람들 외엔 직위에서 물러나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겨우 다섯 명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으음……!”

“이씨세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뒷배경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하나하나 확실하게 남궁세가를 장악해 가고 있던 것입니다.”

단욱은 신음을 토해 내며 낯빛을 침중하게 굳혔다.

“그런데 어찌…… 세가에서 이러한 사실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이오?”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대공자?”

“특히 총관인 남궁무회 숙부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마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이씨세가와 모종의 협약을 맺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주이신 아버님께는 이 사실을 숨겼을 겁니다.”

“그런……!”

남궁세가의 총관, 남궁무회.

그는 어릴 적엔 자상한 숙부였고, 약관이 될 때쯤엔 그를 타락시킨 장본인이었으며, 지금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미워하는 원수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단욱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가…… 정녕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단가주님께서 알아보시면 이틀 내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허허, 허허…… 대공자, 이제 보니 나는 그동안 장님으로 살았던 모양이오.”

쿵. 쿵.

단욱은 자책하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데 왜 진작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소? 그랬다면 대공자가 달포나 고생할 것도 없이 바로 결정을 내렸을 것을.”

“그래서야 제가 후계자의 위(位)에 오를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제가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부터 꺼냈다면, 믿는 것은 둘째 치고 저를 후계자로 지지하는 것보다는 이 문제부터 해결하려 하셨을 겁니다. 저는 단가주님이 진심으로 저를 믿고 제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허어……!”

“이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저를 후계자로 지지해 주시겠습니까?”

남궁휴는 망치질을 하면서 온몸이 땀과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런 추레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눈빛과 꼿꼿한 정광만큼은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허허……!”

단욱은 감탄했다.

이제 약관을 조금 넘은 청년이 이렇게나 생각이 깊고 성실할 줄이야.

그의 눈엔 훗날 온 천하에 남궁세가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대공자.”

“예.”

“우리 단가는 앞으로 대공자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단가주 단욱은 양손을 모은 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궁휴 역시 정중하게 마주 예를 표했다.

서로를 향해 허리를 굽힌 두 사람.

가마에서 불꽃이 튀고, 그을음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몰골이었으나 두 사람의 얼굴은 경건하고 진지했다.

☆ ☆ ☆

남궁세가에는 연무장이 총 일곱 개가 있다.

내전(內殿)에 있는 대연무장과 오가(五家)가 각자 가지고 있는 가문의 연무장, 그리고 외전에 머무르는 식객(食客)들을 위한 연무장이 바로 그것이다.

식객이라는 것은 단순히 밥을 얻어먹는 손님과는 의미가 달랐다.

식객은 전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전통과도 같은 문화였는데, 웬만큼 세도가 있는 부유한 가문에선 그 가문의 주인이나 가문을 흠모하여 찾은 손님들이 지낼 수 있는 접객용 별채를 하나씩은 보유하고 있었다.

이름난 문인(文人)이든, 검을 갈고닦는 무인(武人)이든, 아니면 악곡을 연주하고 시서화를 그리는 예인(藝人)이든 상관이 없었다.

가문의 주인은 재주가 있는 자는 누구든 식객으로 받아들이고, 그들끼리 토론을 벌이며 재주를 뽐낼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다 식객들 중에 유명한 인물이 나오면 그건 곧 가문의 이름값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궁세가에서 기거하던 문인이 과거를 통과해 큰 벼슬에 올랐다거나, 또는 남궁세가에서 한 수를 배워 무예를 닦던 무인이 한 지역을 차지할 만한 문파를 세웠다면?

그들을 포용하고 키워 낸 남궁세가는 더욱더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맺은 인연은 큰 사고가 없는 한 영원히 가는 법이라, 남궁세가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땐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즉, 식객들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뛰어난 자들이 있는가에 따라서 가문의 역량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전 한(漢) 말기에 원소의 식객이 오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의미가 짐작이 되지 않는가.

원소는 그 식객들의 다재다능한 능력을 바탕으로 거병하였고, 한때나마 중원의 패자로서 야망을 불태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궁세가에도 식객은 이백 명가량이 있었다.

무가(武家)이다 보니 대부분의 식객들이 무인이지만, 그들 중엔 나름 명필(名筆)이라 소문난 문인도 있었고, 사람을 다루고 정치를 할 줄 아는 모사(謀士)들도 있었다.

저벅저벅.

남궁휴는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불이 켜져 있는 접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접객당에 딸려 있는 식객 전용 연무장으로 가고 있었다.

쉭― 팡! 파팡!

가까이 갈수록 연무장에선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휘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가득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빵! 하고 터뜨리는 소음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올수록 남궁휴의 얼굴에서 웃음이 짙어졌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까지 이렇게 독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이백 명이나 되는 식객들 중에서도 단 한 명밖에 없던 것이다.

“강 형.”

쉬쉬쉭―!

남궁휴가 불러 봤으나, 이미 무아지경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던 청년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강 형!”

쉬쉬쉭―! 파팡! 팡!

더 크게 불러 봤으나 마찬가지.

오히려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가는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휴는 스스로도 흥이 났는지 입고 있던 비단 장포를 벗어서 옆으로 던져 버렸다.

“좋아! 그럼 갑니다!”

휙― 하고 달려드는 남궁휴의 움직임은 한줄기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한없이 자유로웠다.

남궁세가의 비전 신법, 무한보(無限步)였다.

남궁휴는 무아지경으로 몸을 비틀고 있는 강운찬의 정면으로 쏘아져 나갔는데, 하필 강운찬이 내뻗은 주먹이 막 극점에 치달으려는 장소였다.

“흡……!”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인영에 강운찬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게 남궁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오히려 내뻗는 주먹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파앙!

남궁휴는 목을 옆으로 살짝 꺾으면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냈다.

살벌한 경풍이 얼굴을 때리고, 펑! 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으나, 남궁휴는 오히려 그게 좋다는 듯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좋아, 좋습니다! 천왕삼권(天王三拳)이 벌써 권풍(拳風)의 경지에 올랐군요!”

남궁휴는 곧바로 몸을 잠시 숙이는가 싶더니, 날아오는 주먹을 향해 쫙 펼친 손바닥을 연속해서 세 번이나 연거푸 내밀었다.

펑! 펑! 펑!

남궁세가의 독문 무공, 천뢰삼장(天雷三掌)이었다.

강운찬의 권법은 무겁고 강력했으나, 남궁휴가 사용하는 장법도 빠르고 강맹해서 둘이 부딪치자 경력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상쇄되었다.

독각풍권(獨脚風拳) 황보숭의 무예를 이은 강운찬은 무서운 속도로 강해졌고, 또한 지금도 점점 강해지는 도중이었지만, 남궁휴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세가로 돌아와 제대로 무공을 배우겠다고 선언한 뒤, 가주인 남궁무원에게서 제대로 된 비전 절기를 배운 것이다.

지난 이백여 일간 남궁휴는 미친 듯이 무공을 익히고 몸을 단련했다.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혹독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지금의 남궁휴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압―!”

“하앗! 타핫!”

기합과 기합이 마주치고, 단단한 주먹과 넓은 손바닥이 부딪쳤다.

일 권(一拳)과 삼 장(三掌)이 부딪치자 강운찬의 기세가 변했다.

그는 천왕삼권의 나머지 두 초식을 연거푸 펼쳐 내더니, 이번엔 쓰지 못하는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를 취하며 양손을 좌우로 날개처럼 벌렸다.

남궁휴는 경시할 수 없는 한 가닥의 불안감을 느끼며 몸을 낮췄다.

금계독립의 자세에서 시작되는 권법.

벽력신권(霹靂神拳)이었다.

남궁휴는 처음엔 차이가 많이 났던 강운찬의 무위가 나날이 근접해 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비무를 치렀지만, 그때마다 벽력신권은 남궁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었다.

독비풍권 황보숭이 무림에서 일류 고수로 대접받으며 명성을 날린 것이 바로 이 벽력신권 덕분이었다.

은은한 뇌성과 함께 주먹이 내뻗어지면 바위가 박살 나고, 쇳덩이가 우그러졌다.

패력(覇力)의 권법.

강운찬의 성취는 벌써 육성에 이르고 있었다.

“차핫!”

스스스―

금계독립의 자세로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는 오른손, 태산과도 같은 장중함 끝에 왼손이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슈아악――!

“핫!”

이것이 검격인지 권격인지 모를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종이를 때렸다면 아마 종이가 잘렸을 것이다.

남궁휴는 등이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힌 뒤에야 강운찬의 일권을 피해 낼 수 있었다.

일권을 피했으나 방심하진 않았다.

남궁휴는 알고 있었다.

벽력신권은 이격(二擊)부터가 진짜다.

일격은 말하자면 위협이자 인사.

물론 그 일격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쾌권(快拳)이지만, 이격부터 시작되는 육중한 위력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우르릉!

은은한 뇌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처음에 반원을 그렸던 오른손이 아래쪽에서 턱을 노리고 솟구쳐 올랐다.

서 있는 사람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면서도 무지막지한 위력을 품고 있는 주먹이었다.

남궁휴는 이번엔 피하지 않고 양손을 번갈아 휘둘렀다.

대연십구식(大衍十九式).

총 열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궁세가의 금나수였다.

솔(率), 반(反), 착(捉).

쫓고 뒤집고 붙잡는, 손과 손가락의 기예였다.

즉, 힘으로 이겨 낼 수는 없으니 붙잡아 관절을 꺾으려는 심산이었으나, 벽력신권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손목을 잡으려던 손이 되레 뒤쪽으로 튕겨 났다. 위에서 팔을 쳐올리기 위해 내밀었던 손바닥은 마치 돌덩이를 후려친 듯 얼얼했고, 붙잡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에 격중당할 지경이었다.

“큭…….”

다급해진 남궁휴는 물고기가 물위로 튀어오르듯 허리를 튕기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

아슬아슬하게 스친 권력에 머리카락 몇 올이 끊어져 허공에 흩날렸다.

만약 머리를 얻어맞았다면 목뼈가 부러지며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

남궁휴는 전력을 다해야겠다는 심정이 되어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우우웅―

온몸에 활력이 돌며 남궁휴의 눈에서 뇌광(雷光)이 번뜩였다.

팟!

남궁휴의 양 주먹이 섬전 같은 속도로 연신 앞으로 쏘아졌다.

구벽신권(九劈神拳).

단번에 사람의 몸에 위치한 아홉 군데 요혈을 노리는 필살의 권법이었다.

폭풍처럼 뻗어 나간 주먹이 일순 전면을 뒤덮는 듯하자 강운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고는 휙, 하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뚝 떨어져서 발등으로 발목을 노려왔다.

강운찬의 사부인 황보숭이 독각풍권(獨脚風拳)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단순히 다리가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리 하나로 펼치는 각법.

마치 곡예를 부리듯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펼치는 오행각(五行脚)이 일절이었기에 그런 별호를 얻은 것이다.

남궁휴가 급히 구벽신권의 방향을 틀어 아래쪽을 노렸으나, 어느새 발목을 노려오던 강운찬은 다시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라 있었다.

쾌(快)이면서 환(幻)이었다.

일 회전, 이 회전, 삼 회전…….

한 번 회전할 때마다 각법이 터져 나왔고, 남궁휴는 그때마다 구벽신권으로 맞상대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발력으로 강운찬은 계속해서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다.

남궁휴는 주먹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쳐냈으나, 그에 맞상대하는 강운찬도 만만치 않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모습이 이러할까.

한 사람은 공중에서.

한 사람은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게다가 둘 다 장기린으로부터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서로의 박자를 끊으며 공격하려 해도 서로 맞물릴 뿐,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손끝이 얼얼하다.’

남궁휴는 속으로 감탄했다.

지금 그는 천뢰제왕신공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당연히 구벽신권을 전개하는 그의 주먹에도 천뢰제왕신공의 무한한 힘이 깃들어 있을 터.

그런데도 남궁휴는 오히려 손끝이 아릿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힘이 센 것이 아니라 내공도 늘었어. 이건 내가중수법에 못지 않다. 하하, 엄청나군. 강 형이 이 정도의 무재(武才)였다니. 진작 무공에 입문했다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 되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자신을 능가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궁휴는 구벽신권의 마지막 초식인 만뢰(萬雷)를 펼친 후에 뒤로 휙 물러났다.

“후우…….”

천천히 거칠어졌던 숨을 고르는 남궁휴의 눈에 한쪽 다리만으로 사뿐히 바닥에 내려서는 강운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중간에 비무를 멈춘 것이 불만스러워 보였다. 한창 기세를 타고 올랐으니 좀 더 화끈하게 싸워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야 안 되지. 이 이상 했으면 한쪽은 다쳤을 테니.’

남궁휴는 빙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이젠 두 주먹으로는 강 형을 이길 수가 없겠습니다. 이거, 실력이 너무 빨리 느는 것 아닙니까?”

강운찬은 칭찬에도 불구하고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그게 문제야. 휴, 너는 검(劍)이 전문이잖아. 주먹으로도 승부를 낼 수 없다니. 아직 한참 멀었구만, 이거.”

강운찬의 길게 내뱉는 한숨이 들려왔다.

남궁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 형,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입니다.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권풍을 뿜어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그 이상을 바라면 어떡합니까?”

“대단하긴. 너 하나도 못 이기고 있는데.”

“허어, 제가 그리 만만해 보이십니까? 이래 봬도 밖에 나가면 웬만한 후기지수들은 다 쓰러뜨릴 자신이 있습니다만?”

남궁휴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남궁세가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금청검이라 불리며 제법 주목받던 후기지수인 남궁혁을 쓰러뜨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무공이 강해졌으니, 솔직히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를 만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남궁휴였다.

‘풍운객잔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실감각이 무뎌진다니까.’

남궁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강운찬이 바라는 목표는 너무나 높다.

도저히 가진 능력의 끝이 보이지 않던 장기린.

그리고 그에 결코 못해 보이지 않던 의동생 부운화와 객잔을 급습했던 무시무시한 삼 인방.

그들 모두는 일찍이 무림강호에서 무수히 많은 고수들을 보아 온 남궁휴로서도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강운찬은 바로 그들을 목표로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러니 초조한 마음에 스스로가 부족해 보일 수밖에.

“강 형.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특히 무공에 있어서 지나친 과욕은 주화입마를 부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끄응,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해도 실력이 잘 안 올라서 그래. 오행각이 십성이 되면 마치 구름을 밟듯이 허공에서 마음껏 운신(運身)할 수 있고, 벽력신권이 칠성이면 뇌성에 이어 벽력(霹靂)이 들려온다고 했어. 그런데 그게 좀처럼 안 된단 말이야.”

강운찬은 인상을 찌푸린 채 한 발 뛰기로 제자리에서 몇 번 발을 굴렀다.

“강 형, 아까도 말했지만, 무공에 입문한 지 일 년도 안 된 사람이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조금만 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십시오.”

“사부는 미치고 싶으면 마음껏 미쳐 보라고 하던데?”

“그야…… 끄응.”

남궁휴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강운찬의 사부인 독각풍권 황보숭은 특이하고 과격한 성품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최근 들어 얻은 제자가 물을 빨아먹는 솜처럼 무공을 익혀 나가는 게 즐거운지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는데, 제자의 성취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자정이 넘어서까지 수련에 매진하는 강운찬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휴식도 수련이라는 말이 있거늘…….’

남궁휴는 지나침이 화가 될까 봐 걱정이 되었으나, 외인(外人)의 입장에서 사부의 가르침에 참견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 형, 단식(斷食)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엉? 그거…… 굶는 걸 말하는 거 아냐?”

“예. 구파, 특히 도문(道門)의 제자들은 주기적으로 단식 수행이라는 것을 한다더군요.”

“으음, 먹을 게 없다면 모를까, 그런 걸 왜 하는 거야? 이 세상에 한 끼 먹을 식사도 없어서 배를 곯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거 아냐?”

운찬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보면 그렇습니다만,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자는 데에도 육신의 힘이 소모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루나 이틀 정도 단식을 하면, 매일 움직이고 힘을 쓰며 긴장해 있던 내장(內臟)이 그 시간 동안엔 휴식을 취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

“그렇게 내장은 휴식을 취하면서 손상된 부분이나 기력을 보충하고, 쌓여 있던 독기를 체내에서 빼낸다더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걸 체내의 자정(自淨)이라 부른답니다.”

“흐음…….”

강운찬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쉬라는 거 아냐?”

“맞습니다. 때론 휴식이 수련보다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몇 시진이나 수련을 해도 도무지 길이 안 보이던 것이 한 시진 정도 푹 쉬고 나선 갑자기 생생히 보일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남궁휴의 말은 생생하게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강운찬은 매일매일, 광기(狂氣)에 가까울 정도로 무공에 집착하여 수련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건 무공의 성취 면에선 나쁜 일이 아니기에 실제로 상당한 소득을 보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단점도 있었다.

‘벽에 부딪쳤는데…… 쉬다 보면 그 벽을 넘는 방법이 보일지도 모르지.’

강운찬은 남궁휴가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간,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강운찬은 툴툴거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냥 앉으면 흙먼지가 잔뜩 묻을 맨바닥이었지만, 강운찬은 개의치 않았다.

“휴, 객주님이랑 침모님은 잘 계실까?”

강운찬이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은 남궁휴의 가슴을 쿡, 하고 쑤셨다.

“……그럴 겁니다. 잘 계시겠죠.”

대답은 긍정적으로 하였으나 남궁휴의 안색은 편치 않았다.

“네 동생은 아직 아무것도 못 찾았대?”

“안타깝게도…… 찾지 못한 듯합니다. 신의(神醫)를 중심으로 찾는 중인데, 쉽사리 단서가 잡히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다만 구양 소저가 말한 신의가 흑신의일 확률이 높다는 것까진 알아냈다고 했습니다.”

남궁세가에서 운영하는 뇌안각은 대륙 전역에 상당한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뇌안각이 알아내지 못했다면 누구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걱정되네.”

강운찬의 낯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장기린과 진휘연을 걱정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어서야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남궁휴가 정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힘을 실어 말했다.

“일단은 수련입니다. 뭔가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날 때까지는 우리의 본질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너 좀 달라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천뢰제왕신공을 익힌 탓일 겁니다.”

“아니, 그뿐이 아니라 성격도 좀 달라진 것 같아. 자신감이 가득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남궁휴는 객잔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광명정대하고 당당하다.

이젠 그 누가 봐도 명문세가 후계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혹시 보기 안 좋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 절대 그렇지는 않아. 좋은 쪽의 변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남궁휴는 씩 미소 지었다.

“그보다, 후계자 싸움은 어때? 좀 진전이 됐어?”

“쉽지는 않지만, 확실히 진전이 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오가(五家)를 설득한다고 했지?”

“예. 두 곳은 설득을 했는데, 나머지 세 곳이 걱정입니다. 하나는 완전히 저쪽 편이고, 나머지 두 곳은 철저히 중립을 지킬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으음, 저쪽 편인 곳이 어딘데?”

“위지가입니다.”

남궁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낯빛이 침중해졌다.

위지가.

오가 중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곳이었다. 외원에서 출입하는 사람을 통제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일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소속된 무사들의 숫자가 상당해졌다.

위지가에 소속된 무사들만 해도 이백에 달했다. 또한 그들에게 전수된 가전 무공의 위력도 만만치 않으니, 남궁세가의 무력에서 상당 부분은 위지가가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으음, 왜 하필이면 위지가가 저쪽 편인 거야?”

“위지가주의 부인이 이씨세가의 사람이어서 그렇습니다.”

“뭐? 진짜?”

“예. 알면 알수록 대단한 집안입니다, 이씨세가는.”

한 명은 남궁세가의 안주인.

다른 한 사람은 남궁세가의 기반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위지가의 안주인이 되었다.

정략적으로 시집보내기의 일인자를 꼽으라면 이씨세가의 가주를 꼽아야 할 지경이 아닌가.

“굉장하네, 그 집안.”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면 상당히 노골적인데, 어째서 가주님은 모르실까? 아니, 정말로 모르는 것 맞아?”

“…….”

남궁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자 강운찬이 움찔하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혹시 내가 말실수를 했어?”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 가주님이 둔하다거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해서…….”

“예, 이해합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강 형.”

남궁휴는 강운찬에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내심은 머릿속을 차갑게 식힌 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가주가 이만한 일을 모른다라……. 사실 나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정말로 아버님은 모르고 계실까?’

풀리지 않는 의구심.

감출 수 없는 의혹이었다.

실체를 캐내면 캐낼수록 너무나 노골적이고 거대하기에 남궁휴로서는 도저히 상황을 다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어?”

“음……?”

그때, 연무장의 저편으로부터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색 무복을 입은 자.

위지 가문의 무사였다.

그는 외전(外殿)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무사였는데, 이 시간대에 접객당의 연무장을 관리하기에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무슨 일입니까?”

남궁휴가 묻자 그 무사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한 뒤 말을 꺼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 시간에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남궁휴는 의아해졌다.

자정이 넘어가는 이 시간에 누가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 손님이 누구입니까?”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한 가지를 말하면 알 거라고 했습니다. ‘풍운객잔에서 왔다’고 전해 달라 하던데요.”

“풍운객잔……?”

눈을 크게 뜨며 자신도 모르게 강운찬을 돌아보는 남궁휴.

강운찬 역시 놀란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쩍 벌리더니, 남궁휴를 바라보며 둘은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설마……?”

“설마……!”

두 사람의 시선이 당혹감과 반가움을 담은 채 허공에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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