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五章 ― 남궁비사(南宮秘史)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대문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남궁휴와 강운찬은 그곳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깨끗한 검은색 무복을 입고 머리엔 영웅건을 써서 깔끔하게 의관을 정돈한 장기린이었다.
남궁휴와 강운찬은 이미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오다가 삼 장쯤 남은 거리에서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개, 객주님?”
“형님, 형님 맞죠?”
남궁휴와 강운찬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장기린은 그들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길게 내려왔던 앞머리를 걷어 버리고 눈을 드러냈는데, 놀랍게도 거기선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위기부터가 전혀 달랐다.
그들을 마주 보는 장기린의 표정은 온화했고, 그 주변으론 도복을 입혀 놓으면 도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 외의 모든 것이 전혀 딴사람 같았던 것이다.
‘이게, 객주님……?’
‘진짜? 진짜 형님인가?’
두 사람의 불신 가득한 표정을 보면서 장기린은 입가에 작게 미소를 떠올렸다.
“오랜만이다. 운찬, 휴.”
남궁휴와 강운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모습과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이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객주님!”
“형님!”
두 사람은 장기린에게로 달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싸안았다. 지난 이백여 일은 그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난스런 시간이었던 바, 이제 와 다시 만난 세 사람 모두의 심정이 격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잠시 후, 남궁휴의 거처에 모인 세 사람은 잠시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객주님, 저기…….”
남궁휴는 입을 열었으나, 좀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휘연에 대해 묻고 싶은 거겠지?”
“……예.”
장기린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휘연은…… 깨어나지 못했다.”
눈치를 살피고 있던 강운찬이 고개를 휙― 들며 눈을 부릅떴다.
“어, 어째서……. 형님, 정말 침모님이…… 침모님이……?!”
강운찬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장기린은 그런 운찬을 따뜻한 눈으로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휘연은 죽지 않았다. 다만, 깨어나지도 못했어.”
“예? 그게 무슨……!”
“신의는 뭐라고 했습니까?”
남궁휴는 크게 동요한 강운찬과 비교했을 때 훨씬 차분해 보였다.
물론 휘연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궁휴는 눈빛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으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휴에게는 분노의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기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었다.
“내가 신의에게 휘연을 데려갔을 때는…… 이미 생기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신의로서도 손쓸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깨우려면 구하기 힘든 물건이 필요하다더군.”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남궁휴는 곧바로 되물었다.
남궁세가는 큰 가문이다. 웬만한 물건은 곧바로 구할 수 있는 재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년화리의 내단, 또는 천년설삼.”
“그건……!”
남궁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객주님, 그건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백 년에 한 번 세상에 나올까 말까 한 귀물이라…… 하늘이 돕지 않는 한 절대로 구할 수가 없을 겁니다.”
장기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도 소림이나 황궁 보고가 아니면 구하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
“소림! 아니, 소림에는 없을 겁니다.”
남궁휴의 말투는 묘한 확신을 가진 듯했다.
“소림에선 얼마 전에 황실의 요구로 영약과 무공을 내놓았다더군. 그때 창고에 있던 보물은 모두 빼앗기거나 미리 써 버려서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들었다.”
“아, 예, 예. 맞습니다.”
남궁휴는 얼떨떨한 얼굴로 긍정했다.
“그래서 나는 황궁 쪽을 노려볼 생각이야.”
“황궁이라면…… 혹시 인맥이 있으십니까?”
“그래. 하지만 황궁 보고에서 뭔가를 얻기 위해선 그에 준하는 공을 세워야만 돼. 마침 지금 명 제국엔 공을 세울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남궁휴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혹시, 지금 남경에서 벌어진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다. 만약 내가 남경을 되찾아온다면, 폐하께서도 그에 걸맞은 포상을 내려 주실 거다.”
“……!”
남경을 되찾는다.
일개 범부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건만, 장기린이 말하자 그것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 목표처럼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장기린은 일개 객잔의 주인일 뿐인데, 그에게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크나큰 존재감이 있었다.
‘게다가, 방금 폐하라고 하셨지?’
보통 사람들은 황제를 일컬을 때 폐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직위와 계급에 익숙해져 있는 관리나 군인들뿐이다.
‘그런가, 객주님은 군부에 계셨던 것인가.’
남궁휴의 눈빛이 강해졌다.
장기린이 만약 군인 출신이라 황실이나 관리들 쪽에 인맥이 있다면, 그가 말한 대로 남경을 되찾을 확률이 더 높아진 것 아니겠는가.
“객주님, 제가 도울 일은 무엇입니까?”
“엇? 휴?”
옆에서 강운찬이 놀라서 되물었다.
아직 장기린은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후계자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남궁휴가 먼저 돕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너…….”
“…….”
강운찬과 남궁휴는 서로 복잡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강운찬은 뭔가를 묻는 듯했고, 남궁휴는 그런 눈빛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장기린만을 응시했다.
장기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그저 담담히 바라봤다.
“사실 너희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휴, 너는 후계자 싸움 때문에 바쁠 텐데, 괜찮나?”
“괜찮습니다. 객주님에 관한 일이 먼저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장기린은 심유한 눈빛으로 그런 남궁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객주님?”
“이씨세가의 숨겨진 저력은 구파일방에 필적한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게다가 세가 내부의 요직에는 총관인 남궁무회의 사람들뿐이고, 속(束) 오가(五家) 중에는 겨우 정가나 단가 정도밖에 힘을 빌려 줄 만한 사람이 없지. 그런 상황인데도 나를 도울 여력이 있다는 거냐?”
“개, 객주님?”
세가 내부의 정세를 줄줄이 읊는 장기린을 보며 남궁휴는 그야말로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 그걸 다 어떻게……?”
“집안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남의 일을 도울 수 있을 리가 없지. 다행히 남경의 일은 처리하려면 꽤 오래 걸릴 테니 시간은 충분하다. 내가 돕지. 휴, 네가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돕겠다.”
“……!”
장기린이 말하면 그건 곧 현실이 된다.
남궁휴는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 이 감각.
도박 빚에 매여 죽은 목숨이 되었던 그를 장기린이 새로운 인생으로 이끌어 주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아, 아니, 그래서야 안 되지!’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남궁휴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객주님, 제가 객주님을 도와드려도 모자랄 판에 제가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제 가문의 일은 어떻게든 저의 힘으로…….”
“휴, 내가 네 빚 문서를 찢으며 했던 말을 기억하나?”
“……!”
“너는 풍운객잔의 가족이다. 네 일은 나의 일과 같아.”
남궁휴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때 장기린이 했던 말은 지금도 단 한 자도 빼먹지 않고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객주님……!’
큰 감동이 가슴 속을 휘몰아쳤다.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된다. 나도 네가 빨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내 일을 돕는 것이 좋으니 하는 일이다. 오히려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되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후계자가 된다면 가진 힘은 객주님을 위해 모두 쓰겠습니다.”
“이번 일만이다. 풍운객잔을 다시 세우는 그날까지만 도와줘.”
“……예!”
남궁휴는 격동을 감추려 노력하며 최대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장기린은 풍운객잔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으려고 한다.
거기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남궁휴에겐 진정한 가족으로서 인연이 깊어진 것 같은 뿌듯함을 주었다.
“그리고 운찬.”
장기린은 강운찬에게도 시선을 향했다.
“예, 예?”
“강해졌구나.”
“아직 부족해요.”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장기린의 칭찬에 운찬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너의 도움도 필요하다. 도와줄 수 있겠나?”
“당연하죠! 그걸 위해 지금까지 수련을 한 건데요!”
“미리 말해 두겠지만, 원의 잔당들을 몰아내는 일은…… 휘연을 살리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복수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 복수라 하면…….”
잠시 말의 뜻을 곱씹던 운찬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때 그 괴물들이……!”
“원나라의 장수였던 자들이다. 그때의 세 명은 삼대천이라고 불렸지.”
“아……!”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풍운객잔을 무너뜨리고 휘연을 빈사 상태에 몰아넣었으며, 남궁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강운찬의 한쪽 다리를 뺏어 간 자들이 원의 잔당들이었다니.
즉, 그에 대한 복수가 곧 휘연을 살리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남궁휴와 강운찬의 눈에서도 강한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객주님, 죄송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
“지금 세상은 남경에 대한 일로 크게 시끄럽습니다. 분노한 황제가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리도 들리고…… 이곳 안휘성주에게도 싸움에 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원의 잔당들이 객주님이 나서실 때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남궁휴의 걱정은 타당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백이면 백, 남궁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남경을 빼앗겼지만, 그뿐이다. 곧 명 제국이 남경을 다시 탈환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휴, 명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최대 얼마인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삼백만이야.”
“그렇게나…!”
상상을 뛰어넘는 숫자였다. 남궁휴는 삼백만이라는 인원이 병력으로서 모여 있으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남경의 주민 전체 인구를 다 모아 봐야 오십만이 안 된다. 그런데 삼백만이라는 인원을 모아 놓으면…… 지평선부터 지평선 끝까지 온 시야에 오로지 사람만 보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우와, 형님! 숫자가 그렇게 많으면 남경은 금방 되찾겠네요!”
“아니, 그렇지가 않아.”
“에? 어째서요? 삼백만이나 있는데?”
운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국가의 존폐 위기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병력을 끌어모을 때 삼백만이라는 소리지, 명 제국이 항상 그만한 병력을 유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식비에 무기, 갑옷, 거기다가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까지 합하면 일 인당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아. 국가의 재정에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만약 삼백만의 병력을 내키는 대로 운용했다간 한 달도 되기 전에 파산해 버릴 거다.”
“아……!”
“실제로 명 제국이 항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오십만 정도. 그밖의 각 지역을 지키는 병사들이나 관료들의 사병을 합하면 대략 백만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걸 잘 봐.”
장기린은 이참에 제대로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손가락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이게 명 제국이다. 그리고 이곳이 어딘 줄 알아?”
“그곳은…… 몽고군요.”
“그래, 대초원 너머 명 제국 국경의 밖에 있는 푸르른 땅이다. 여기엔 아직도 원 제국의 과거를 잊지 못한 몽고족들이 살아가고 있지.”
“아…….”
“그리고 이곳은…… 알고 있나?”
“운남과 묘강 아닙니까?”
“그렇지. 한때 명 제국의 영토였고,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그렇지만, 대월국과 남만의 영향력이 더 큰 곳이라 명의 지배는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봐야 하는 곳이다.”
“……즉, 군사를 보내 지켜야 하는 곳이라는 뜻이군요.”
“그래. 그리고 산둥과 절강, 복건에 항상 대기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수군(水軍)들도 있지.”
“그 말은…….”
“즉, 현재 명 제국이 사용할 수 있는 백만의 병력 중에 대부분은 국경의 방어를 위해 발이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십만 안쪽. 차라리 북경이었다면 국경에 있는 병력이라도 움직여 보겠지만, 남경은 그 정도가 한계야. 그나마도 반란의 위험 같은 것을 생각하면 오만 정도밖에 못 움직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오만이면 충분히…….”
“남경의 성벽은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다. 능히 열 배의 병력도 막아 낼 수 있을 터. 게다가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몰라도 지금 남경엔 녹림의 산적들이 가담해 있다고 하더군.”
“……!!”
남궁휴와 강운찬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녹림이면…… 삼만 명…….”
“아니, 어떻게? 어째서 녹림이 원의 잔당에게?!”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나운 녹림도 삼만에 텐챠이와 삼대천이 이끄는 천 명의 기병이면 이미 내전(內戰)이라고 봐야겠지. 등 뒤에서 칼을 맞은 거나 마찬가지야. 굉장한 전략가가 절호의 순간에 확실한 한 수를 두었다.”
그 전략가란 아마 십중팔구 하시르일 터.
대부분의 병력이 묶인 상태에서, 이걸로 명 제국은 남경을 다시 빼앗으려면 큰 피해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버렸다.
외적을 상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호랑이의 몸속으로 들어온 기생충이 호랑이를 죽이듯이, 명 제국은 내부로부터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앞으로도 계속 위협을 가할 큰 적을 내부에 가지게 된 것이다.
“원의 잔당들은 절묘한 틈을 파고든 거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남경은 쉽게 뺏을 수 없어. 싸움은 장기화될 거고, 병력을 모으고 농성전을 벌이려면 최소한 반년…… 그 정도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야.”
“아……!”
남궁휴는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객주님,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쓰러뜨릴 겁니까?”
“생각해 둔 게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 믿고 따르겠습니다.”
남궁휴가 장기린에 대한 신뢰로 눈을 빛내며 말하고, 운찬은 옆에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하지만 일단은 남궁세가부터다. 이곳을 시작으로 모든 게 시작하는 거야.”
“예!”
두 사람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휴, 일단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한곳을 안내해 주었으면 하는데.”
“예? 어디를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가까운 곳이다.”
장기린은 담담한 얼굴로 한 장소를 말했고, 남궁휴는 그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개, 객주님, 그건 좀…….”
“괜찮다. 그렇게 해야만 해.”
단호한 장기린의 말에 남궁휴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남궁세가 가주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단출하고 검소했다. 크기는 종횡으로 삼 장 정도. 방의 중심에 제법 고급품으로 보이는 자단목 탁자가 있긴 하지만 그밖에는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딱 하나, 황색 벽지가 발라진 벽에는 전대 가주들이 사용했던 검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나마도 별다른 장식도 없이 걸려 있으니 명검의 빛이 바랠 정도였다.
일성의 패주라고 할 만한 자의 집무실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당대의 남궁세가주 남궁무원이 얼마나 검소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장기린이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마침 남궁무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검을 닦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검날을 비춰 가며 꼼꼼하고 세밀하게 검을 닦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천하에 다시없을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경건했다.
‘특이하군.’
남궁무원을 처음 본 장기린의 감상이었다.
하오문에서 들은 정보로도 그렇고, 남궁휴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도 남궁무원은 무공에 딱히 큰 재질이 있거나 관심이 있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천상 타고난 검사(劍士)였다.
보검도 아니고, 그저 평범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검을 닦고 있는데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
장기린은 남궁무원의 내면에 날을 시퍼렇게 세운 장대한 검 한 자루가 숨겨져 있는 것을 본 듯했다.
“반갑습니다. 장기린이라고 합니다.”
장기린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남궁휴는 자신이 하인이라고만 생각하는 듯하지만, 장기린은 그를 다른 적룡기마대의 간부들처럼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의 부모.
즉, 자신의 부모이기도 하다.
당연히 예를 갖춰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특이하군.”
그런데 놀랍게도 장기린의 예를 받은 남궁무원의 첫마디는 장기린이 그를 보면서 느낀 첫인상과 똑같았다.
“나를 찾는 손님은 모두 총관을 통해서 오게 되어 있는데…… 오늘은 휴, 네가 직접 모시고 왔구나. 그것도 사전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아버님.”
장기린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남궁휴는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회에게 알리지 않고 온 것에 이유가 있느냐?”
“……예.”
“그건 네 생각이더냐, 아니면 장 객주의 생각이더냐?”
장기린을 객주라고 부를 때 남궁휴의 눈이 잠시 반짝 빛났지만, 남궁무원의 시선은 여전히 그가 닦고 있던 검에만 못 박혀 있었다.
“객주님의 생각입니다.”
“그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도저히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남궁무원은 기름을 먹인 가죽에 검을 감싸는 것으로 손질을 마무리한 뒤 그제야 장기린을 쳐다봤다.
“반갑네. 휴의 아비인 남궁무원일세.”
장기린의 눈빛이 잠시 번뜩였다.
남궁무원은 그 한마디로 지금 장기린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남궁세가주가 아니라 휴의 아버지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저는 남궁세가의 가주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군. 총관을 통해 제대로 된 약속을 잡는 것이 어떻겠나?”
“의외로 고지식하시군요. 그렇게 듣지 않았습니다만.”
“세가라는 큰 곳을 운영해 나가려면 확고한 규칙이 필요하네. 그리고 규칙이란 모든 이들이 그것을 지킬 때 빛을 발하는 법이지. 가주라도 예외는 아닐세.”
검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앉은 남궁무원은 온화한 인상이었으나, 한 번 원칙을 세우자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듯한 고집이 느껴지고 있었다.
장기린이 고작 객잔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편견을 갖고 깔보지 않지만, 또한 세가주라는 직위가 가볍지 않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과연, 그런 사람이었나.’
장기린은 그에게서 문사의 향기를 느꼈다.
나라가 패망하면 원수가 있는 쪽으로는 평생 고개도 숙이지 않을 위인이다. 괴짜라면 괴짜요, 인물이라면 인물인 특이한 성정.
다만 타고난 인성이 온후하고 협의지사의 기질이 있기에 희대의 대협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충고할 것은 충고해야 한다.
그게 한 가족인 휴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 규칙을 변명 삼아 눈과 귀를 막고 계실 겁니까?”
옆에 있던 남궁휴가 깜짝 놀랐다. 장기린의 말이 너무 과격하다 싶었던 것이다. 장기린을 가만히 마주 바라보고 있던 남궁무원도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흘려들을 수가 없군. 그건 무슨 말인가.”
“밖으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위기에 빠진 자들을 구원하며 대협 소리를 듣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집안의 관리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순리대로 풀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에 너무나 중요한 것을 무방비하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세가에 문제라도 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
장기린은 묵묵히 입을 다무는 남궁무원을 보며 속으로 놀랐다.
‘이 사람, 알고 있다?’
남궁무원은 세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눈치였다.
그런 느낌은 장기린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남궁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반응에 눈을 크게 뜨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크지.”
천천히 흘러나오는 남궁무원의 목소리에는 가주로서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남궁세가는 일성의 패주라 자부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속 오가와 그 휘하 백여 개의 가문과 사업체들은 이미 하나의 작은 나라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남궁무원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남궁휴를 바라봤다.
“게다가 나에겐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는데, 가장 능력이 있는 녀석이 그동안 자신을 숨기고 살았기에 가신들의 세력이 분열되어 버렸네.”
“아버님……!”
남궁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궁무원이 그를 인정하듯 칭찬해 준 것은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아들이 숨어 살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인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내 탓이지. 대의를 따른다는 미망에 빠져서 가정을 너무 돌아보지 않았어. 휴가 가문에서 쫓겨나듯이 나가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 것도, 연아가 자기 살길을 위해 뇌안각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한 것도 모두 나의 탓일세.”
놀랍게도 남궁무원은 세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대부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엔 장기린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남궁휴가 극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남궁무원에게 묻고 있었다.
“아버님, 다 알고 계시면서…… 어째서 다 아시면서 그동안 가만히 두고 보신 겁니까?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이는, 적어도 연이만큼은 보살펴 주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궁휴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그의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는 중이었다.
남궁휴는 자신은 불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후계자 문제가 걸려 있었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다 자신의 운명이라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대 세가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면서도 금지옥엽으로 사랑받으며 크기는커녕 새어머니의 눈치만 본 동생은?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항상 남장을 하고 어두침침한 뇌안각에서 서찰들과 씨름이나 하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꽃다운 나이입니다. 한창 스스로를 가꾸고 또래의 소녀들과 즐겁게 살아갈 나이입니다. 그런데 지금 연이를 보십시오. 뇌안각에 처박혀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 아이가 선택한 길이다.”
“아버님!”
“이해할 수가 없구나. 연아는 지금 너를 돕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에게는 오히려 연아가 뇌안각에 있어서 다행이 아닌가?”
남궁휴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것이 믿기지가 않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버님의 딸입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가장 행복한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걸 위해 정성과 애정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네가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예!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명문가와 세도가에선 딸들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하는지!”
“……가만히 듣자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연아가 스스로 원한 일이다.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가신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뇌안각에 넣어 주었단 말이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니던가?”
“아버님은 여전하시군요!”
남궁휴는 들끓는 울분을 참느라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연이가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게 정말 자의였겠습니까?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 주지 않는 가문의 차가운 분위기가 그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던 겁니다!”
“세상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세상에 나가 보면 그 정도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도 없다. 더 치열하고 지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아.”
“그러니까, 어째서 당신의 아이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느냐 이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맞물리지 못하고 있었다.
각자의 사상이 너무 다르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가 너무 달랐다.
남궁무원은 모든 것을 ‘순리’대로 풀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식이 각자 자신의 살길을 찾아 자생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반면에 휴는 좀 더 인간적인 관심과 애정을 바랐다. 밖에서 대협 소리를 안 들어도 좋으니, 가족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는 좋은 아버지이자 가장이 되어 주길 바란 것이다.
“휴, 그만해라.”
“큭……!”
남궁휴는 손끝을 덜덜 떨 만큼 흥분해 있었으나, 장기린의 말에 순순히 감정을 억눌렀다.
장기린은 남궁무원을 바라봤다.
아들이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음에도 그는 얼굴에 분노나 실망의 기색을 떠올리지 않았다. 마치 그런 표정을 지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겠지.’
장기린은 남궁무원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가주님, 당신은 아까 하던 말을 끝맺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휴와 그 동생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가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에 관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휴와의 관계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장기린의 말투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정중한 듯하면서 무례하고, 무례한가 싶으면서도 둘의 사이를 걱정해 주는 정(情)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가주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장기린은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남궁무원은 놀란 눈으로 장기린을 탐색하듯이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남궁무원은 묘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가진 능력의 끝이 보이지 않는군. 어째서 휴 같은 녀석이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자처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아.”
남궁무원은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는 힘이 없네.”
대남궁세가의 가주가 힘이 없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부족하다고 해야겠지.”
“남궁무회의 세력을 쓰러뜨리기엔…… 말입니까?”
단번에 알아듣는 장기린을 보며 남궁무원의 눈빛이 또 한 번 빛났다.
“그렇다네. 남궁무회와 이씨세가. 둘의 연합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아직 힘이 더욱 필요하네.”
“잠깐, 아버님. 그럼 숙부와 외가의 연합을 쓰러뜨리기 위해 지금까지 힘을 기르고 있었다는……!”
흥분해서 나서려는 남궁휴를 장기린이 손을 들어 말렸다.
평소에 휴는 객잔 식구들 중에 가장 차분했는데, 오늘만큼은 운찬보다도 더 다혈질이 된 것 같았다.
“휴, 일단 듣자.”
“……예.”
잠시간의 소란 후, 남궁무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둘의 연합을 알게 된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네. 혁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 그때까지만 해도 세가 밖을 돌아다니며 협행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어느 순간 내 동생 무회가 가주의 공무를 다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가주의 인장까지 마음대로 가져다 썼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밖을 돌며 세가의 이름으로 협행을 하고, 무회는 총관으로서 가문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일세.”
장기린은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에 그가 남궁무회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갑작스런 감찰로 객잔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마침 항주에 와 있던 남궁무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남궁무회는 남궁휴가 눈에 띈 것만으로도 크게 분노하며 살기를 뿜었고, 장기린은 그런 그에게 경고를 한 뒤 장기린은 남궁휴를 객잔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 경고했던 대로 되어 버렸군. 휴가 가문으로 돌아왔고, 후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으니…….’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가문에 돌아와 보고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가주인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 뇌공대는 이미 무회나 이씨세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창천대는 일대(一隊)를 빼고는 모두 무회에게로 넘어갔던 거야.”
남궁무원은 지금도 그때의 충격이 떠오르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가주의 세력은 창천일대뿐입니까?”
“그랬지.”
말투가 과거형이다. 장기린은 호기심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다릅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육 년이나 기다리지 않았을 걸세.”
남궁무원은 육 년을 말했다.
그가 가문의 변고를 깨닫고, 그 일을 해결하기 시작한 것이 육 년 전이라는 뜻이었다.
“설마…… 아버님, 제가 나가거나 연이가 뇌안각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보신 게……?”
“…….”
남궁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긍정의 분위기를 읽은 남궁휴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육 년 전부터였다면 그와 남궁연이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기 전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인 남궁무원이 갑자기 서자의 여부에 상관없이 남궁휴를 후계자 후보로 삼겠다 했고, 이화 부인의 견제가 시작되었으며, 숙부인 남궁무회가 그를 기루로 데려가 화류계로 빠지게 만들었다.
“아, 아아……!”
큰 충격에 휩싸인 남궁휴.
그는 지금껏 아버지의 모든 행동들이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략혼으로 남궁연을 가문에서 내보내 버리려는 이화 부인을 막기 위해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뇌안각에 넣어 주었고, 어떻게든 남궁휴를 가문에서 완전히 축출시키려는 여론을 피해 그를 항주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망나니 아들에게 정이 떨어져 버린 것 같은 냉정한 태도였지만 사실은 아들에게 어떻게든 후계자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남겨 두려는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크읏……!”
남궁휴는 이를 악물고 시큰해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단 한 번도 변명을 한 적이 없기에 더욱 슬펐다. 절박한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아들의 자리를 지키려던 아버지인데…….
그는 그것도 모르고 철없이 아버지를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남궁무원은 잠시 따뜻한 시선으로 남궁휴를 쳐다본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저쪽도 준비할 게 많은지 먼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져 버렸네.”
“휴가 가문에 나타난 것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저들은 휴의 존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래도 이백 일이나 아무 일이 없던 것은 가주님의 노력 덕분이었겠지요.”
“…….”
이번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남궁무원.
장기린은 하오문을 통해 들은 정보로 알고 있었다. 남궁무원은 휴가 가문으로 돌아온 뒤 계속해서 구파일방이나 다른 오대세가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그들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휴와 운찬이 지금껏 무사히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장기린은 여기서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꺼냈다.
“남궁혁은 가주님을 따릅니다. 어떻게든 가주님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하고 있죠. 만약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 말했다면 이쪽 편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
“남궁혁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항상 온화한 평정을 유지했던 남궁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로움. 슬픔. 분노. 난처함.
그 모든 것을 담은 눈빛으로 남궁휴를 한 번 흘깃 쳐다본 남궁무원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굳이 자식을 내부 정쟁에 끌어들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나.”
“아니, 그건 답이 안 됩니다.”
“답이 안 되다니…….”
“자식들은 이미 정쟁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그걸 알아야…… 여기에 있는 휴도 마음을 확실히 정할 수가 있습니다.”
남궁무원은 눈을 크게 떴다.
“자네……!”
“…….”
“……자네는 나를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군.”
남궁무원은 체념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애써 남궁휴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으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네. 혁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데엔 다른 이유가 있네.”
장기린은 묵묵히 듣고 있었고, 남궁휴는 얼굴에 짙은 호기심을 떠올렸다.
“혁은…… 내 자식이 아닐세.”
“무……!”
느닷없는 고백.
거대한 충격에 말문이 막힌 남궁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혁은…… 무회와 이화 사이에서 난 자식이네.”
“……!!”
남궁휴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장기린은 미리 짐작하고 있던 것이 진실로 되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으나, 남궁휴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부인이 남편의 동생의 아이를 낳았다.
패륜이다.
비천한 하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난리가 날 판국인데, 손꼽히는 명문세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휴는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화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젊고, 아름답고, 요염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치렁치렁한 홍의를 입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정말 예뻐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무회 숙부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
비록 이화 부인이 그와 그의 여동생에게 잔인하게 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문가에서 자라난 기품과 학식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남궁무회는 또 어떤가?
성질이 불같고 고집스럽다거나 벽창호 같은 면은 있지만, 세가의 규율을 어긴 적이 없는 본보기가 되는 총관이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그런 패륜을 저질렀다니.
게다가 모른 척 입을 다물고 혁을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 준비를 하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의심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까?”
“…….”
“아버님,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님!”
남궁휴가 다그치자 남궁무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사실이다.”
“아…… 아아……!”
남궁휴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화는 본래 무회의 연인이었다더군. 하지만 장자와의 혼인을 원했던 이씨세가의 뜻에 따라 나와 혼인하였고, 나는 밖의 일에 치중하느라 집안에 없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었겠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런 패륜을……!”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남궁세가를 노리는 이씨세가와 가정에 무관심했던 나. 모두의 잘못이다.”
남궁무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오랜 시간 이 문제로 참오를 거듭한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그릇 때문인지.
남궁무원은 부인의 부정과 세가의 비사를 이야기하면서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나는 다 이야기했네.”
“남궁혁이 당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외모와 성품을 보고 알았지. 혁은…… 무회의 어린 시절과 판박이였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부족하지.”
“…….”
“종종 무회와 이화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날짜를 계산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네. 그 부분에 의심의 여지는 없어.”
임신, 날짜.
이화와 남궁무회의 접촉 시기.
남궁무원이 더 이상 자세히 말하는 것은 꺼려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젠 내가 물어볼 차례 같군. 자네는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육 년간 고민해 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정체는…… 딱히 없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장기린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단호하고 명쾌했다.
“더 큰 힘으로 부숴 버리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