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六章 ― 맹호조우(猛虎遭遇)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죠?”
이른 아침의 내원.
남궁세가의 대사(大事)가 결정되는 본당(本堂)에서 뾰족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셨습니까, 대부인.”
“대부인이라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내가 그 호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집무를 멈추고 일어나 예를 표했던 남궁무회는 미간을 찌푸린 채 굽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날카로운 인상에 침중함이 깃들었다.
최근 들어 이화의 막무가내식 행동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짜증과 분노로 일관하며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 소리를 지르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와 그녀는 남들 앞에선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사이이거늘, 최근엔 그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남궁무회는 옆에서 뻣뻣하게 굳어진 채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문사들에게 손을 내저어 밖으로 내보냈다.
비록 완전한 그의 사람들이고 입이 무겁다고는 하나 본래 작은 구멍 하나가 커다란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었다. 치부는 적은 사람이 알수록 좋았다.
“이화, 이러면 안 되는 거 잘 알 텐데, 왜 이러지?”
하대를 하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곱지 않았다. 이화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왜 이러냐구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휴에 대한 문제라면 아직은 좀 더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왜 우리가 참고 기다려야 하느냐구요! 난 하루하루가 괴롭고 지긋지긋해요! 우리 혁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요? 그놈한테 당한 이후로 방 안에서 꼼짝도 안 한다구요!”
“쯧, 모자란 놈.”
“뭐라구요? 어떻게 그렇게 냉랭할 수가 있죠? 당신 아이인데! 당신 아들이 고작 그런 비천한 첩실 소생한테 당하고 와서 침울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이봐!”
남궁무회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말조심해. 이런 이야기가 나돌면 큰일 나는 거 몰라?”
“소문이 나라면 나라죠! 그러면 이참에 아예 다 뒤집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저는 지금 당장 살수라도 고용해서 남궁무원과 그 눈에 거슬리는 첩실 소생들을 싹 다 죽여 버리고 싶다구요!”
소리를 지르는 이화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남궁무회는 애써 분을 가라앉혔다.
그까지 화를 내면 사태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남궁세가가 정파의 한 축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형의 아내와 내통하고 자식을 낳았으며, 거기다 가주의 위(位)를 찬탈했다는 이야기가 절대로 밖에 흘러나가선 안 되는 것이다.
‘이 일이 밖에 새어 나가면 구파일방과 나머지 오대세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승냥이처럼 달려들겠지. 정파는 곧 명분이야. 명분을 주면 안 된다. 그러면 남궁세가는 곧 패망하게 될 터.’
남궁무회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화를 달랬다.
“이화, 조금만 더 참도록 해.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아무 탈 없이 부드럽게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때를 노리고 있는 거야.”
“하지만! 혁이와 제가 너무 괴롭다구요. 당신은 우리의 괴로움은 조금도 신경이 안 쓰이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어? 나도 괴로워.”
“그럼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는 거죠? 이제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형이…… 가주가 잔꾀를 부리고 있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차례대로 만나면서 계속 무림의 시선을 끌고 있더군.”
“그렇다 해도……!”
“걱정하지 마. 이제 그건 끝났으니까. 안 그래도 때가 되었다 싶었지. 남궁휴가 오가(五家)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영향력을 키우려나 보던데, 이 이상 설칠 수는 없게 만들 거야.”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
“하루하루가 얼마나 초조하고 괴로웠는지……! 주변에서 그 첩실 소생의 이야기가 들려오거나, 남궁무원과 마주하는 날엔 얼마나 서러운지……!”
이화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처지를 토로했다. 그녀는 집 안에 있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특히 그녀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남편인 남궁무원과 종종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궁무원은 항상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대했다.
사랑도, 증오도 아닌 무심.
그것이 이화를 더욱 괴롭게 했다. 남궁무원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죽여 버려야 해.’
그녀가 일생의 반려로 먼저 택한 것은 남궁무회.
하지만 남궁무원에게도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혼인을 치르고 몇 년간은 그야말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어 즐겁게 살았으니 어찌 정이 없을까.
다만 애초부터 어긋나 있던 인연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비뚤어진 마음을 갖게 했다.
죄책감, 괜한 분노, 자괴감.
그런 마음들이 한데 뭉쳐 하루라도 빨리 남궁무원과 그 첩생들을 없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증폭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화.”
“흑……!”
남궁무회가 손을 뻗자 이화는 낭창낭창한 몸을 날려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남궁무회는 아찔함을 느꼈다.
몸에 닿는 부드러움, 가슴에 닿는 숨결, 그리고 콧속으로 파고들어 뇌리를 자극하는 방향(芳香).
그녀의 짙은 체취는 이미 몇 번이나 몸을 섞었고, 부부처럼 살아온 그를 매번 동요시켰다.
‘요물이야.’
남궁무회가 평생 동안 억누르고 있던 야망이 되살아난 게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그는 무재(武才)를 타고나 남궁무원보다 강했지만, 전대 세가주는 인품을 더 중요시했기에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그는 그 사실에 분노했다. 무림의 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하는 게 바로 강자존(强者存)의 법칙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강한 그는 가주가 될 수 없고, 그보다 약한 형은 가주가 된다니. 젊고 혈기방장한 나이에 그에 대해 납득할 수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남궁세가에 나타났다. 한때 연인이었던 여자. 하지만 정략적인 결혼으로 형의 부인이 되어 버린 여인이다.
남궁무회는 그녀를 보자 욕심이 생겼다.
형의 여인을 빼앗고, 남궁세가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은 야망과 욕정이 몸 깊은 곳에서 꿈틀대고 피어올랐다.
남궁무원이 밖으로 나간 날, 밤중에 그는 이화를 찾아갔고, 이화는…… 너무나 쉽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계획된 행동이었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남궁세가를 삼킬 계획에 동조하던 이씨세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화가 남궁무원에게 시집올 때부터, 아니, 강호에서 우연히 만나 남궁무회와 연인이 되었던 그 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어차피 내딛은 발걸음이다. 이 여인과는 한 배를 탈 수밖에 없을 테지.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는 이곳 안휘성의 왕이 된다.
나약한 가주를 끌어내리고 남궁세가를 안휘성뿐만이 아니라 무림 전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바꿀 것이다.
“회 랑! 빨리 이곳 남궁세가를 빼앗아 줘요. 남궁무원을 죽이고 그 첩실 소생들을 없애 줘요!”
표독스럽게 외치면서 마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남궁무회의 가슴 부위를 살짝 깨무는 이화.
남궁무회는 찌릿한 쾌감을 느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이제 때가 되긴 했어. 오가를 들쑤시고 다니는 남궁휴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 크흐, 이제 곧 승부가 난다. 남궁무원이 죽든, 세가가 멸망하든. 둘 중의 하나가 결정될 터.’
남궁무원은 서서히 가슴에서 목으로 올라오는 뜨거움을 느끼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화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 아아……!”
번식에 대한 욕구는 본래 생명이 위험한 순간 불타오르는 법. 두 사람의 숨이 섞이고, 뜨거운 체온이 하나로 변했다.
☆ ☆ ☆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남궁휴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눈빛이 흔들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머릿속에선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일어나셨습니까?”
방문 밖,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앞마루 너머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남궁휴는 그 사내를 알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사내는 뇌공대(雷攻隊)의 대주 유자항이었다.
남궁세가에서 대연검법(大衍劍法)을 배우고 그것을 극성으로 익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된 강자.
그리고…… 지금은 가주가 아니라 남궁무회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유 대주님이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남궁휴는 거짓으로라도 반가움을 보이지 않았다.
유자항의 정중함이 가식적이듯, 그가 반가움을 표시해 봤자 겉치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안 인사…… 로는 안 되겠습니까?”
“하하, 유 대주님이 농담도 하는 분이셨군요.”
“…….”
“그래서, 이곳엔 왜 오신 겁니까?”
남궁휴는 마루에서 내려가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본당에서 꽤나 떨어져 있는 구석진 곳의 별채였다. 당연히 평소엔 인적도 드물어서 하인들조차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별채 주변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다.
눈으로 대충 훑어본 결과, 오십 명.
노란색 바탕에 가슴에 검은색으로 일자 줄이 새겨져 있는, 남궁세가 이대무력 중 하나인 뇌공대였다. 그중에서도 정예만 데려온 듯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뇌공대 오십 명이라…… 혹시 오늘 무슨 싸움이라도 있습니까? 일류를 넘은 고수 오십 명이면 전대 대마두라도 때려잡겠는데요.”
농담을 던지듯 가벼운 말투에 뇌공대 대주 유자항은 침중하게 낯빛을 굳혔다. 남궁휴의 말속에 뼈가 있었던 것이다.
“힘이라는 것이 꼭 대마두를 잡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습니까? 저는 아버님께 가진 힘은 꼭 협의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만 쓰라고 배웠습니다. 대마두가 아니라면…… 혹시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협하는 자라도 나타났습니까?”
“……말장난은 이쯤 하도록 하지요.”
“말장난? 협의와 가문의 명예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말장난이라니요.”
순간, 가벼워 보이던 남궁휴의 기세가 일변했다.
차갑고 냉철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귀족’으로서의 기품이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강렬한 눈빛이 주변을 훑자 묵묵히 서 있던 오십 명의 뇌공대원이 몸을 움찔했다.
“유 대주님은 제 말이 우습습니까? 협의와 가문의 명예가 말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대답하십시오! 당신에겐 남궁세가의 명예나 정의지사로서의 협의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까!”
껍질을 깨고 나오듯,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남궁휴.
그는 세가의 후계자로서 걸맞은 그릇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개는 아무리 커도 개고, 사자는 아무리 어려도 사자일 수밖에 없다.
남궁휴는 세가의 명예와 협의를 언급했다.
가주가 아닌 남궁무회를 따르는 뇌공대주 유자항을 돌려서 질책한 것이다. 유자항은 서릿발 같은 남궁휴의 기세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가 항주에서 도박에 미쳐 있던 모자란 화화공자라고? 그럴 리가! 다 속았다. 이런 그릇이라니…… 남궁혁과는 비교가 안 돼.’
새파랗게 젊은 녀석한테 일갈을 당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건만, 유자항은 왠지 화가 나기보다는 최근에 실망만을 안겨 주던 남궁세가의 진면목을 본 듯 후련했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유자항은 정중하게 사과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실언이라…… 잘못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잘못이라고 하신다면 잘못이겠지요. 대공자, 제가 남궁세가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잘못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남궁휴와 유자항 사이에서 표면적인 의미 이상의 대화가 왕래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뜨겁게 맞부딪쳤다.
“대공자, 저에게 주어진 명령은 대공자와 그 일행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호위라니요. 세가 내에서 호위가 웬 말입니까?”
“글쎄요. 저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요?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습니까?”
“대공자의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대공자께서는 저와 어딘가로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
남궁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남궁무회……!’
한동안 조용하기에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느닷없이 이렇게 선수를 친 것이다.
“어딜 가자는 것입니까?”
“연무장입니다.”
“……연무장?”
“대공자의 연무를 돕고, 그 주변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그게 무슨……!”
남궁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호위지 남궁휴가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지켜보겠다는 감시 선언이다.
게다가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어딘가로 데려가겠다는 것은 강제적인 호송이다.
“제가 안 가겠다고 한다면?”
“곤란하군요. 반드시 대공자를 모시고 오라는 총관님의 명이 있으셔서.”
“…….”
“걷기 힘드시면 마차나 가마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 그리고 뒤의 분들도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남궁휴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엔 어느샌가 두 사람이 함께 나와 있었다.
장기린과 강운찬.
지금 남궁휴의 ‘손님’으로 있는 사람들이다.
“그쪽이…… 독각풍권 황보숭 대협의 제자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뇌공대주 유자항입니다.”
“강운찬.”
운찬은 포권을 취하는 듯 마는 듯 설렁설렁하게 인사했다.
그는 건들거리는 몸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자항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과시하는 듯 보였다.
유자항은 그런 강운찬에게 시비를 걸지 않고 곧바로 다음 상대에게로 넘어갔다.
장기린.
온몸에서 마치 도사처럼 청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
유자항은 그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자, 정체가 뭐지?’
유자항이 포권을 취해 인사하자, 장기린도 짧은 포권으로 화답해 주었다.
“대공자, 이제 결정해 주십시오.”
“으음…….”
남궁휴는 고민했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따라가기를 거부한다면 뇌공대주 유자항과 뇌공대 오십 명과 일전을 벌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따라가자니 남궁무회가 어떤 함정을 꾸며 두었을지 몰랐다.
“한 번 가 보지그래?”
깊이 고민하는 남궁휴에게 믿음을 주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예?”
“연무장으로 가자는 것 같던데, 그럼 남궁세가 안이다. 따라가서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어?”
“으음…….”
“휴, 너 자신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지.”
“……!!”
충격을 받은 듯 눈빛이 흔들리는 남궁휴.
그는 이내 장기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래, 나는 객주님과 함께 있다. 웬만한 위험은 무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어. 하하, 언제부터 이렇게 소심해졌지? 혼자 있을 때는 오히려 더 대범했던 것 같은데.’
사실 오가(五家)를 설득하러 다닐 때 이미 이런 일은 각오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살수가 찾아와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던 그다. 이 정도 일에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남궁휴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지고, 입가엔 자연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강 형, 괜찮겠죠?”
“물론.”
짧게 대답하는 강운찬은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난 시간 동안 배운 무공을 한시라도 빨리 써보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 대주님,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유자항은 호쾌하게 답하는 남궁휴와 그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장기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본 뒤, 이내 몸을 돌리고 뇌공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동!”
잠시 후, 남궁휴가 지내는 별채에서 오십여 명의 인원이 단체로 연무장을 향해 움직였다.
☆ ☆ ☆
내전(內殿)의 연무장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고급스런 청색 비단 장포에 정갈한 수염을 기른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남궁무회.
현재 남궁세가의 총관이며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과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를 극성으로 익혔다고 일컬어지는 명실공히 남궁세가 최고의 무인.
그는 뇌공대가 마치 ‘호위하듯’ 데리고 온 남궁휴를 냉막한 얼굴로 맞아 주었다.
남궁휴에게 있어 남궁무회를 만나는 것은 청월루에서 장기린과 함께 대면한 뒤로 처음이었다.
남궁휴가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남궁무회는 자리에 없었고, 그 뒤로 남궁휴는 굳이 먼저 만나려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예, 오랜만입니다.”
남궁휴는 겉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으나, 눈빛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안 그래도 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날 아버지에게 들은 세가의 비사(秘史)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화 부인을 통해 이씨세가와 내통을 한 사람.
그리고 남궁혁의…… 진짜 아버지인 사람.
울컥―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를 숨기기엔 남궁휴는 아직 너무 젊었다.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감정의 파편이 눈빛에서 다 드러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고수인 남궁무회는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요새 무공에 정진하고 있다더구나.”
“남궁 성씨에 걸맞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좋은 생각이다만, 너무 늦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노력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비꼬는 듯한 말투엔 남궁휴에 대한 차가운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대기(大器)를 완성하는 데 시기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만하구나. 네가 대기라는 것이냐?”
“글쎄요? 그릇을 다 채워 봐야 알겠지요.”
“그릇을 채운다? 그러고 나면? 네가 준비가 되면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생각이냐?”
“…….”
“완성된 그릇에 남궁세가를 담을 것이냐?”
남궁무회의 시선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네 녀석이 그럴 줄 알았지. 항상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어. 내가 마지막에 했던 말,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남궁휴는 청월루에서 있던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땐, 차라리 가문을 위해 내 손으로 너를 죽이고 말 것이야.”
“단! 절대로 저 녀석이 남궁세가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해라.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말했다. 네가 남궁세가로 돌아온다면 가문을 위해 내가 직접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마치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 숨어 다가오는 은밀하고 날카로운 살기.
남궁휴는 움찔했다.
남궁무회는 두말할 것 없는 고수. 절정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를 넘보는 강자였다. 그와 정면으로 대치하자 누군가가 손으로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도 강해졌어.’
남궁휴의 몸속을 휘도는 힘은 가주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천뢰제왕신공의 도도한 기운이었다. 주눅이 들어 볼품없이 벌벌 떨었던 예전과는 다르다.
天雷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처럼 강맹하고,
帝王
제왕의 기품처럼 압도적이다.
후우욱―
신공의 힘이 움직이자 그는 장기린이 등을 받쳐 주지 않아도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었다.
꼿꼿한 허리, 번뜩이는 눈빛엔 뇌전과도 같은 강렬함이 깃들었다.
“다시 나타나면 가문을 위해 저를 죽인다고 하셨지요.”
“뭐……?”
“그게 정말 가문을 위한 것입니까? 스스로의 야망과 욕심 때문은 아닙니까? 가주께서 저에게 기회를 주셨는데 어째서 당신은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에선 젊음의 패기와 정정당당한 명분이 함께하고 있었다.
남궁무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나이 또래의 어느 누가 그에게 이렇게 정면으로 대들 수 있을까.
남궁혁?
안 된다. 그 녀석이라면 불과 촌각도 버티지 못한다.
결국 그는 눈치채고 말았다.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가 예전의 그 허약하고 방탕했던 젊은이가 아님을.
남궁휴는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재기발랄하며 남궁세가 종통(宗統)의 피를 이어받은, 타고난 ‘가주의 그릇’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마치…… 남궁무원처럼.’
호박 넝쿨을 끌어당기면 호박이 끌려오듯, 남궁무회는 남궁휴의 모습에서 그의 어두웠던 과거의 파편을 보았다.
젊은 시절, 무력은 자신이 더 강함에도 어쩔 수 없이 느껴야만 했던 자괴감과 자격지심.
그의 피를 이어받은 남궁혁과 비교가 되는 모습이기에 더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네가 감히……!”
순간, 강한 분노가 격렬하게 치솟았다.
화아아악―!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뿜어지는 기세.
현재 무림에서 십대고수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남궁무원이다. 한 번 마음속에 살기를 품자 주변의 공기를 뒤틀고, 연무장 전체를 아우르는 막강한 힘이 넘실넘실 퍼져 나갔다.
“큭……!”
남궁휴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졸지에 십대고수 수준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게 된 상황.
몰아치는 파도를 맨몸으로 버텨 내듯 밀려오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우우우웅―!
하지만 이백 일간의 연공으로 더욱 강해진 남궁휴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천뢰제왕신공의 무한한 공능이 몸속을 휘돌고, 눈에선 하늘의 번개를 닮은 뇌광이 번뜩였다. 넓은 소맷자락이 뻣뻣하게 펼쳐지고, 있는 힘껏 움켜쥔 주먹에선 굵은 힘줄이 나무뿌리처럼 돋아났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남궁무회로부터의 압박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상대를 이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압도당할 만큼 큰 차이는 아닌 것이다.
버틸 수 있다.
충분히 할 만하다.
남궁휴는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올라오는 호연지기를 큰 소리로 외쳤다.
“대답을 하십시오! 당신은 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뭣이! 이놈……!”
“대남궁세가의 총관이자 최고수라 불리는 사람이. 고작 조카의 질문을 회피하고자 힘을 쓰시는 겁니까!”
“……!”
“저는 지금, 당신이 사욕을 위해 저를 죽이려 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연무장을 뒤흔든다.
애초에 정당한 명분이 없었으며, 사람으로서의 그릇에서도 차이가 났다.
나이나 무력과 상관없이, 이 순간엔 분명 남궁무회가 남궁휴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한편, 뒤쪽에 시립해 있던 뇌공대원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약관이 지난 청년이 무려 남궁세가의 최강자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항하고 있다.
무인이라면 지금 그가 어느 편이든 상관없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광경이 아니겠는가.
‘더욱 강한 세가를 만들기 위해 총관을 따랐는데, 혹시 그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의혹과 혼란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치는 도중, 그들의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남궁무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건…… 그건, 천뢰제왕신공이 아니냐!”
천뢰제왕신공은 가주의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신공이다.
당연히, 아직 후계자가 확실히 선정되지 않았으니 가주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익히고 있으면 안 되는 무공이었다.
뇌공대주와 뇌공대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걸 네가……!”
남궁휴는 잠시 당황했으나, 어차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했다.
“아버님께 전수받았습니다.”
“가주가! 가주가 어째서!!”
“…….”
“이런! 이런……!”
남궁무회는 그 순간, 남궁무원은 남궁혁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공평하고 원리원칙을 중요시 하는 남궁무원이 어째서 남궁혁은 빼놓고 남궁휴에게만 천뢰제왕신공을 가르쳤겠는가.
‘어째서? 대체 어째서? 설마…… 그것마저 알고 있는 건가? 혁이 내 아들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남궁무원의 성품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이씨세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질 않는 바.
남궁무회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남궁무원의 숨겨진 능력과 넓은 인맥이 대단한 만큼, 그가 어떤 대비책을 얼마나 강구해 놓았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상황에서 대비해야 한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이번엔 이화가 맞았군. 명분을 만들고 죽일 시간이 없어. 일단 죽여 놓고…… 명분은 그 뒤에 만든다.’
남궁무회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금 이런 애송이와 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씨세가에 전서구를 날리고, 당장 그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을 최대한 끌어모아야 했다.
‘역시, 대비책을 준비해 두기를 잘했군.’
남궁무회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련의 사태를 남 일 쳐다보듯 무심하게 지켜보는 한 사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갈색의 무명 바지를 입고 그 위엔 구하기 어렵다는 호랑이 가죽을 옷으로 해 입은 중년 사내였다.
나이는 겉으로 보기엔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사각형으로 각진 턱에 거칠어 보이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으며, 등 뒤엔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칼날이 넓고 큰 도(刀)를 메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방극(方剋).
별호는 맹호도(猛虎刀).
사나운 호랑이처럼 난폭한 그의 도법은 천하에서 힘으로 따를 자가 없는 일절이라 불렸다.
보기와는 달리 나이가 육십에 가까운 노고수이며, 무림십대고수 중 유일하게 파벌을 형성하지 않은 괴짜 중의 괴짜가 바로 그의 정체였다.
“방극 님, 도와주셔야겠소.”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방극의 목소리엔 강력한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방극? 맹호도 방극?!”
깜짝 놀란 남궁휴가 눈을 부릅뜨며 방극을 쳐다보았다.
남궁무회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구려.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도움을 청해야겠소.”
“그러지. 내가 할 일은?”
“잠시, 그전에…….”
남궁무회는 당황해하는 남궁휴를 흘깃 일별한 뒤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뇌공대주 유자항에게 손짓을 했다.
“물러나서 연무장 주변을 지키게. 그때까지 연무장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말되, 내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그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해야 하네. 알겠나?”
“…….”
“이봐, 유 대주. 알겠나?”
“……알겠습니다.”
유자항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뇌공대원들을 데리고 연무장 밖을 빙 둘러서 포위했다. 거리는 십 장.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 이상 안쪽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위치였다.
남궁무회는 다시 한 번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남궁휴는 막상 마주해 보니 생각보다 강했다.
일류의 끝, 절정의 초입이다. 그 나이 또래에 비하면 대단한 수준이니 미래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옆에 있는 독각풍권의 제자 역시도 그 나이치고는 괜찮지만 남궁휴보다는 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무공에 늦게 입문했다고 했으니 이 정도도 대단한가?’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아직은 절정에도 오르지 않는 녀석들.
남궁무회 자신이 상대한다고 할 때, 둘 다 한꺼번에 상대해도 모두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저 장기린이라는 놈인데…….’
남궁휴의 착 가라앉은 시선이 한쪽에서 가만히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장기린을 향했다.
그의 능력으로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장기린이었다.
항주에선 전력을 다해 뿜어낸 그의 기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왠지 모를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이십대의 청년을 무림십대고수에 비할까. 무리한 상상이다. 이걸로 충분해.’
남궁무회는 방극을 향해 칼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셋을 모두…… 죽여 주시오.”
결국 내뱉어진 살인 명령.
남궁휴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하게 변했다.
각자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괴물인 무림십대고수중에서도 가장 실전 경험이 많고 싸움에 강한 자가 바로 맹호도 방극이었다.
그런 자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남궁휴는 장기린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대체 얼마만큼 강한 건지는 알지 못했다. 무림십대고수라는 이름값과 비교하니 불안이 밀려들었다.
“셋? 약속과 다르군.”
“보수는 더 쳐 드리겠소.”
“……그에 대한 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그때쯤이면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을 거외다.”
“좋아, 그럼 됐다.”
마치 돈에 고용된 낭인과의 대화 같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파벌을 형성하지 않고 홀로 십대고수의 위치에 오른 방극은 돈을 받고 대신 싸워 주는, 말하자면 정사중간의 낭인이었던 것이다.
휙―
남궁무회는 방극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연무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하는 모습이 그가 지금 얼마나 다급한 심정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
“…….”
남궁휴는 정면에서 무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방극을 보며 몸을 긴장시켰다.
무림십대고수.
대륙에 있는 몇 천, 몇 만의 무림인들 중에 정점을 찍는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저벅저벅―
그때,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남궁휴를 향해 다가왔다.
“다 좋았지만, 너무 드러냈어. 그 덕에 계획이 좀 더 빨라지겠다.”
“아, 죄, 죄송합니다.”
남궁휴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무림십대고수가 그들을 죽이겠다며 서 있건만,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 하는 장기린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던 것이다.
‘역시, 객주님 눈에 십대고수는 큰 위협이 아닌 건가?’
남궁휴는 안심하는 것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한편, 맹호도 방극 역시 이채를 띤 눈으로 장기린을 살펴보고 있었다.
태연한 기색, 깊은 눈빛, 청정한 도향(道香).
겉으로 보이는 느낌은 영락없는 도사인데, 자세히 보면 오른쪽 귀가 뭉개졌다든지, 온몸이 단단하게 단련이 되어 있는 등의 전사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처음엔 가볍게 여기고 넘어갔으나, 점점 장기린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너는 누구냐?”
방극은 우렁찬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십 장 밖의 뇌공대에게도 들릴 법한 목소리였다.
“당신에게 알릴 만한 이름은 없소.”
“뭣이?”
방극의 눈에 분노가 떠올랐다.
얼핏 들으면 겸손이지만, 어떻게 들으면 너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고 하는 듯하지 않은가.
“무례한 놈이구나.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어차피 죽이러 온 것 아니오?”
“뭣……!”
“싸워야 하면 싸우면 그뿐이지.”
맹호도 방극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사?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이런 투견 같은 놈이 도사일 리가 만무했다.
“재밌는 놈이구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씩 웃으며 대도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는 방극.
사나운 기세를 드러내는 그에게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호랑이 같은 섬뜩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린은 손을 들어 올려 그런 그를 제지했다.
“싸우는 건 내가 아니오.”
“허?”
“휴, 운찬. 너희 둘이 나서라.”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던 남궁휴와 강운찬의 안색이 확! 하고 하얗게 질렸다.
“예? 저, 저희요?”
“저희가…… 말입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너희 둘 다 그동안 많이 발전했던데.”
“그렇지만 십대고수를 상대하기엔…….”
“혼자서야 아직 무리겠지. 하지만 둘이서는 충분할 것 같은데.”
“그…… 렇습니까?”
“그래. 내 말을 못 믿겠어?”
“그럴 리가요!”
먼저 나선 것은 강운찬이다.
한쪽 다리만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앞으로 나온 운찬은 위풍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방극을 노려봤다.
그러자 난감한 얼굴로 헛웃음을 짓던 남궁휴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운찬의 옆에 섰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객주님께서 그리 말하시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극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는 두 사람.
방극의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허참!”
맹호도 방극이 누구던가?
현 무림의 정점이라는 십대고수 중 일인이다.
남궁휴와 강운찬이 제 나이 또래치곤 강한 편이라고 해도, 방극의 눈으로 보기엔 이제 갓 솜털이 빠진 애송이였다.
“운찬, 휴.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 봐라. 그러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호흡…….”
“호흡을…….”
남궁휴와 강운찬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상대와 싸워 볼 기회는 흔치 않다. 이참에 경험해 둬. 텐챠이나 삼대천은…… 그보다 강하다.”
“……!”
그 말에 두 사람의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강 형, 해보죠.”
“그래, 한 번 해보자고!”
복수를 해야 할 상대는 맹호도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로 약하지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체되어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허! 허허……!”
방극은 막 뽑아 든 대도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상대할 기회가 흔치 않다? 경험? 게다가 텐챠이나 삼대천이란 놈들이 더 강하다?”
방극은 장기린이 내뱉은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더니, 허허거리던 웃음소리를 뚝 그쳤다.
기세가 일변했다.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지도록 인상을 찌푸린 방극.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줄기줄기 쏘아졌다.
“이놈들이! 감히 이 맹호도를 뭐로 보고……!”
후우웅―!
허공에 한 번 휘두른 도에서 강력한 바람이 훅! 하고 뿜어져 나왔다.
남궁휴와 강운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딱히 공격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가볍게 휘두른 도에서 불어 나온 도풍(刀風)이 두 사람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그 한 수만으로도 방극은 자신의 무위를 증명한 거나 다름없는 일.
초절정고수의 위압감이 심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
남궁휴는 이를 악물고 천뢰제왕신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지만, 그래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압박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십대고수는 십대고수로 꼽히는 이유가 있는 법.
방극은 남궁무회와는 또 다른 경지의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실력 차가 있는데, 선기를 제압당해서야 싸움이 안 되지.’
남궁휴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수련할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뽑은 적이 없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뽑혀 나오는 칼날이 눈이 시리도록 푸른빛을 내뿜었다.
검의 이름은 벽해(碧海).
벽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의미한다고 아버지 남궁무원이 검을 선물해 주면서 해 준 말이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시간의 무상함을 잊지 말고 항상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
남궁무원은 지난 이백여 일간 한시도 그 교훈을 잊은 적이 없었다.
침식을 잊은 고련과 밥 먹는 시간마저 쪼개 가며 휘두른 검.
그 고행의 성과가…… 지금 이 순간, 맹호도라는 강적을 상대로 유감없이 선보여지고 있었다.
스스스스―
“호오……!”
방극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뿜은 기세가 남궁휴의 검끝에 닿는 순간,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형의 기세를 쪼갤 정도면 검의 예기를 완전히 조절할 수 있다는 뜻.
젊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잘만하면 남궁세가에서 검호(劍豪)가 하나 나오겠군.’
물론 그러려면 오늘 그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야만 할 것이다.
방극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좋다. 오 초, 오 초를 막아 내면 너희를 살려 주마. 이 방극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다.”
방극이 돈만 받으면 아무나와 싸우는 낭인이다?
아니다. 낭인이라는 직업은 방극이 마음껏 싸우기 위해 선택한 길일 뿐이다.
따지자면 순수한 무인.
낭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배분도, 나이도 따지지 않고 이렇게 남궁휴와 같은 새파란 젊은이에게도 투지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남궁세가의 장자, 남궁휴라고 합니다.”
“강운찬.”
두 사람은 각자 스스로를 소개한 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들었다.
오 초.
아니, 오 초가 아니라 십 초를 준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싸운다.
맹호도 방극?
그가 아무리 십대고수라고 해도 장기린이 싸워 볼 만하다고 했다면 그런 것이다.
“타하앗―!”
“하아아앗―!”
두 사람은 방극을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 ☆ ☆
후우우웅―!
꽈앙! 꽝! 꽈광!
맹호도 방극은 과연 강했다.
내려치는 대도(大刀)는 육중하기 짝이 없다. 칼날만 해도 웬만한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기형도(奇形刀)를 한 손으로 자유롭게 휘둘렀다.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 보려 하면 막강한 도풍(刀風)에 휩쓸려 온몸이 통째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불과 두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온몸이 만신창이. 단단한 청석으로 만들어진 연무장 바닥은 다섯 치가 넘게 움푹 파인 도흔(刀痕)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과연 십대고수……!’
어째서 셀 수 없이 많은 무림인 중에서 방극을 십대고수로 꼽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대해(大海)처럼 넓고 깊은 내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힘.
낭인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만전(萬戰)의 싸움 경험.
거기다가 허술한 듯하면서도 일절 허점이 없는 도법(刀法)은 마치 태산을 상대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힘겹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맹호도! 사나운 호랑이라더니, 거기다가 노련하기까지 하다!’
어떨 때는 폭풍처럼 사납게.
그리고 어떨 때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느슨하게 풀어 주며 사냥감을 몰아넣는 모습이 그야말로 호랑이 같았다.
부웅! 부웅! 부웅! 꽈앙!
천지양단(天地兩斷)의 기세로 크게 휘둘러 마치 도끼질을 하듯이 내리찍는다.
평범한 협봉검을 사용하는 남궁휴로서는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대도(大刀)와 같은 장병(長兵)을 사용하면 근거리에서는 틈이 보여야 하건만, 어떻게든 안으로 뚫고 가 봤자 방극은 기다렸다는 듯이 짧게 끊어 치는 단타(短打)로 수십 번의 공격을 한 호흡 만에 휘둘렀다.
‘또 온다!’
겨우 품속으로 한 걸음을 파고드는 순간 폭풍처럼 짧은 단타가 연이어 날아오는데, 공격의 각도가 절묘했다.
위아래 좌우, 모든 방향을 막론하고 공격이 날아온다.
피하려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가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준다면 이번엔 전력을 다해 휘두른 맹호도의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만 할 터였다.
‘항상 한 수 앞을 더 본다. 이것이 십대고수의 능력……!’
만약 이백 일 전의 남궁휴였다면 삼 초 만에 죽었을 것이다.
남궁휴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살길은 무작정 앞으로 파고드는 것뿐이다. 검을 세워 몸의 요혈을 가리고,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내딛었다.
땅! 따다당! 따다다당!
“크…… 우으윽……!”
단타로 짧게 끊어 치는 데도 불구하고 마치 망치로 전신을 얻어맞는 듯했다.
남궁휴는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충격을 겨우겨우 버텨 내면서 눈을 빛냈다.
지금이다.
방극의 신경이 남궁휴에게 쏠려 있는 바로 지금, 그의 절실한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동료의 마음에 닿았다.
“타하앗―!”
공중으로 뛰어오른 강운찬.
한 발로 뜀뛰기를 했음에도 놀라운 도약력으로 맹호도 방극의 머리 위를 타넘고 있었다.
쉬이익―!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간 몸의 회전력을 실어 쇠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발뒤꿈치가 정수리를 노리고 내리찍는다.
오행각(五行脚).
공격을 거듭하면 할수록 위력을 더해 가는 연환각(連環脚)이 시작된 것이다.
“파합!”
하지만 상대는 맹호도 방극.
쳐다보지도 않고 등 뒤로 휘두른 방극의 칼이 절묘하게 강운찬의 정강이를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발차기를 날리면 허벅지 아래쪽이 잘려 나갈 판국이다.
그런데 그 순간,
팟! 하고 공중에서 천근추(千斤錘)의 기법으로 뚝 떨어져 내린 운찬이 방극의 무릎 뒤쪽을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랬다. 운찬은 이미 그의 첫 번째 공격이 막힐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휴는 정면에서 방극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방극의 눈썹이 꿈틀하고 불쾌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찰나간의 고민 후, 방극은 운찬을 우선시하기로 했는지 몸을 정반대로 돌려 대도(大刀)를 휘둘렀다.
후우웅―!
커다란 칼을 어찌 저렇게 빨리 휘두를 수 있는지.
앗! 하는 순간 이미 칼날이 목전에 다가와 있을 만큼 엄청난 쾌도(快刀)였다. 무릎 뒤를 걷어차려던 운찬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됐다!’
남궁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의 검, 벽해(碧海)를 전력을 다해 내찔렀다.
쒜에에엑―!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남궁세가 제일의 쾌검술이다.
노리는 곳은 강운찬을 향해 대도를 내려치고 있는 방극의 뒤쪽 옆구리.
파라라락―!
남궁휴의 소맷자락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 소리를 냈다.
천뢰제왕신공의 진기에 섬전십삼검뢰.
발끝, 무릎, 골반,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 손끝으로 이어져 온몸의 탄력을 살린, 말 그대로 번개와 같은 섬격(閃擊)이다.
남궁휴는 마지막에 이런 기회가 올 줄 알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운찬과 함께 비무를 해 본 횟수만 해도 수백 번.
딱히 합격술을 연마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서로의 호흡수까지 다 꿰고 있을 만큼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운찬이 머리 위로 달려들 것.
그리고 달려드는 척하다가 바닥으로 푹 꺼져서 다리를 노릴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맹호도 방극에겐 그런 운찬의 공격을 다 간파하고 반격을 가할 능력이 있다는 것까지 예측했다.
‘대도(大刀)의 단점은 움직임의 반경이 너무 크다는 것. 강 형을 공격하던 칼을 다시 되돌려 내 검을 쳐 내려면 이미 늦어. 그때쯤이면 요혈을 베고 난 뒤!’
거기가 바로 남궁휴의 승부수였다.
그가 지금껏 갈고닦은 검술을 발휘해서 전력을 다한 힘으로 치명적인 요혈을 공격하면……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샤악―
“……!”
하지만 그런 남궁휴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누가 봐도 이미 끝난 싸움이건만.
방극은 발가락의 힘만으로 몸을 튕겨,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남궁휴의 찌르기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낸 것이다.
방극의 상의(上衣), 옆구리 부분이 잘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극은 옆으로 조금 비켜선 상태.
남궁휴는 뒤에서 검을 찔렀으나 그 검이 방극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 상황이었다.
남궁휴는 매우 당황했으나 아직 승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 아직 괜찮다! 여전히 나는 배후를 잡고 있어. 대도를 한 바퀴 돌리는 것보다는 내가 여기서 검을 위로 쳐올리는 게 더 빠른…….’
퍼억!
“……!!”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며 정신이 아찔했다.
남궁휴는 입을 쩍 벌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복부와 가슴 사이, 횡경막 부근의 갈비뼈로부터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렬한 고통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으직! 하는 소리가 난 것을 보니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세상이 오로지 두 가지 색뿐이다.
검은색과 흰색.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 가운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멈춰 있었다. 아니, 멈춘 것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남궁휴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대도의 손잡이.
마치 철환을 매달아 놓은 듯 뭉툭한 손잡이의 끝부분이 그의 명치에서 세 치 정도 오른쪽에 닿아 있었다.
‘아……!’
그랬다.
남궁휴는 납득했다.
대도를 무기로 쓴다고 해서 꼭 칼날로 상대를 베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
무인(武人)은 온몸을 무기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칼이 아니라 목검, 아니, 길목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서도 싸울 수 있어야 진정한 검사라고 할 수 있건만, 그는 어느새 상식과 편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등을 돌렸으면 대도를 휘두르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것도 편견이다.
상식에 갇힌 편협한 생각이다.
칼날을 휘두를 수 없으면 손잡이로 때리면 된다.
손잡이로 때릴 수 없다면 팔꿈치로 후려쳐도 되고, 무릎을 이용한 슬격(膝擊), 또는 뒤로 발을 차올리는 수미각(首尾脚)을 써도 좋다.
도를 쓰는 자는 도로만 공격해야 하는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만 싸우는가?
맹호도 방극은 무인은 상식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하나…… 배웠구나.’
초절정의 고수에게서 배우는 싸움의 정석.
하지만…… 그 배움의 대가는 컸다.
푸확!
“쿨럭……!”
시간이 멈춰 있던 초신속의 순간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남는 것은 다리가 풀릴 정도의 고통과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릿한 핏물뿐이다.
남궁휴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서다가 풀썩,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움직여 정면을 바라보자,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방극과 그 너머에서 칼에 어깨를 살짝 베인 채 바닥을 구르기라도 했는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강운찬이 보였다.
“이걸로 삼 초.”
맹호도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다.
남궁휴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건만, 그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기서 남궁휴는 아직은 멀고 먼, 초절정의 경지와의 격차를 느꼈다.
“한데 설마 내가 상처를 입을 줄은 몰랐군. 원래대로라면 오 초를 못 버텼으니 죽여야겠지만…… 일단은 이걸로 무승부로 할까? 남은 이 초는 이걸로 퉁치기로 하지.”
방극은 혀를 쯧쯧 차면서 허전해진 자신의 옆구리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잘려 나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살갗엔 실금과도 같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남궁휴가 남긴 상처.
갈비뼈가 박살 난 대가로 만든 마지막 흔적이었다.
방극은 그 상처가 어색한 듯 몇 번이나 만져 보다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십 년, 아니, 오 년만 더 수련하고 와라. 그땐 제법 검을 섞어 볼 맛이 나겠다.”
“감사…… 합니다.”
남궁휴는 떨리는 목소리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맹호도 방극이 대마두로 몰리지 않고 십대고수에 손꼽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가 진정한 무인(武人)이라면, 설령 자신이 그 뒷일을 다 책임지게 되더라도 훗날을 기약하며 살려 준다.
설마 남궁휴가 맹호도 정도의 무인에게 인정을 받을 줄 몰랐던 남궁무회의 실책이었다.
“네놈도 마찬가지다. 독각풍권의 무공을 뒤늦게 이었다던데, 늦게 시작한 것치곤 제법이야. 실전에서 좀 더 다듬으면 예전 황보가(皇甫家)의 명성을 되살리겠어.”
“가, 감사합니다.”
강운찬도 얼떨결에 예를 표하며 인사했다.
“하지만!”
갑자기 방극이 소리를 질렀다.
연무장 주변을 빙 둘러싼 채 눈을 빛내고 있는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였다.
“나도 의뢰를 받은 몸! 낭인으로서 그냥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네놈이 나서라! 아까 나보다 강한 놈이 있니 없니 하던데,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내 직접 알아봐야겠다. 만약 그럴 자격이 없다면…… 방금 한 말은 다 철회다.”
방극의 칼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장기린이었다.
묵묵히 서서 남궁휴와 강운찬의 싸움을 지켜보던 장기린의 얼굴에 서서히 옅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갸름한 턱 선에 사내다운 생김새.
청정한 도문(道門)의 향기에 거친 기상이 함께하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장기린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지팡이에 불과한 무인창(無刃槍)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와 망설임없이 방극의 건너편에 마주 선다.
무림십대고수에게 홀로 당당히 맞서는 무명의 청년.
이 모습을 지켜보던 뇌공대에게 강한 인상으로 박혀 드는 장면이었다.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으시더군. 기(氣)의 싸움으로 갔다면 저 녀석들도 오 초를 충분히 버텼을 텐데, 설마 박투와 무술(武術)로만 싸울 줄은 몰랐소.”
“호오, 기를 썼다면 오히려 더 오래 버텼을 거라고?”
“아직 기예(技藝)는 많이 부족하지만, 기(氣)와 박자(拍子)는 상당히 단련되었으니까. 싸워 볼 만했을 것이오.”
장기린이 선뜻 싸워 보라고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법’과 ‘걷는 법’.
그 두 가지를 가르쳤으니, 방극이 설령 강기(剛氣)를 줄줄이 내뿜으며 휘두르더라도 오히려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며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맹호도 방극이 호의를 보이며 남궁휴와 강운찬을 상대로 순수하게 기술만을 겨룰 줄이야.
순수한 싸움 기술로는 상대가 안 되기에 승부는 오히려 더 빨리 끝나 버렸다.
‘생각보다 정당한 싸움을 좋아하는 무인이다.’
장기린은 방극에게서 의외의 성품을 보았다.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시간이 없지만…… 저 녀석들에게 호의를 보였으니, 나도 호의를 보이겠소.”
“……뭐? 호의?”
“남궁무회에게 고용되었으니 당신은 우리의 적이오.”
“그건 그렇지.”
“지금부터 시작되는 싸움에서 나는 적이 된 자는 살려 두지 않을 것이오. 즉, 당신도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할 테지.”
“……!!”
맹호도 방극을 죽인다.
장기린이 가볍게 한 말에 연무장 주변에 있는 모두가 술렁거렸다.
“삼 초를 버텨보시오. 그렇다면…… 살려 드리겠소.”
무심한 목소리로 당연한 진리를 말하듯 이야기하는 장기린.
맹호도 방극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엔 죽인다더니, 이젠 삼 초를 버티면 살려 주겠다고 한다. 영락없이 고수가 하수에게 선심을 베푸는 듯한 태도였다.
무림십대고수인 방극에게.
천하에 상대할 자가 몇 없는 초고수를 향해 불과 이십대의 청년이 그런 광오한 말을 내뱉다니!
“핫! 하하하! 하하하하!”
방극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감탄과 미미한 분노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 네놈이 걸물일 줄 진즉에 알아봤지. 좋다, 그렇게 하지. 대신 네놈이 그 말에 책임질 만한 실력이 없다면…… 나는 네놈을 죽일 것이다.”
“그렇게 하시오.”
진심으로 살기를 드러내는 맹호도의 기세는 섬뜩했으나 장기린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선 장기린.
철컹―!
그의 손에서 무인창이 길어지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