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81화 (65/686)

12권

第七十八章 ― 화불단행(禍不單行)

안휘성 북부의 이름 모를 들판.

푸른빛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는 그곳에선 지금 처절한 비명과 병장기 맞부딪치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적룡기마대 백오십 명과 안휘 이씨세가의 정예 무사 오백 명의 싸움은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전개되었다.

숫자는 분명 이씨세가가 위.

게다가 그 오백 명은 모두 일류의 수준을 넘은 무사들뿐이기에 실력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상 맞붙으면 쓰러지는 건 오직 이씨세가의 무사들뿐이었다.

싸움의 경험, 집단 전술, 동료의식, 그 어떤 것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씨세가의 무사 오십 명을 이끌고 있던 제일조장은 갑자기 나타난 기마병들을 보며 당황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못 이길 상대라고 여기진 않았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무사들이 갑옷을 입은 병사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당당히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공중으로 가볍게 뛰어올라 가장 가까이로 다가온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갑옷이 단단해도 갑주의 틈새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옆구리 부근을 노리고 찔러 넣은 검이 실패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따아앙!

“헛……!”

그런데 상대 병사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날아오는 검이 옆구리 사이가 아니라 복부의 두꺼운 갑주에 부딪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놀랍도록 능숙한 대처.

갑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는 완숙한 싸움법이었다.

웅웅―!

찔렀던 검이 튕겨 나왔다. 제일조장은 당황했다. 설마 고작 기마병 하나를 상대로 그의 공격이 실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곧바로 그 뒤에 병사가 휘두른 두꺼운 대검에 목이 베일 뻔했다.

쉬익―!

“큭……!”

제일조장은 허공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겨우 목에 실금이 하나 그어지는 것만으로 마무리하고 땅에 다시 착지했다.

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일조장씩이나 되어서 장수도 아니고 일개 병사 하나에 쩔쩔맨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놈……!”

그는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승부를 다시 내기 위해서 이번엔 절대로 방심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그 어긋난 자존심이 승패를 갈랐다.

대검을 든 병사는 제일조장의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그걸로 자기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시선을 홱 돌리고 다음 상대를 찾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조장의 입장에선 ‘어?’ 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승부를 가리지도 않았는데 한 번 칼만 맞대 보고 그걸로 끝이라는 듯 몸을 돌리다니. 어찌 이런 경우가 있느냔 말이다.

“감히…… 큽!”

푹―!

그 순간, 제일조장의 가슴엔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들었다. 처음 칼을 맞대었던 대검수의 뒤로 따라붙고 있던 창수(槍手)의 공격. 마치 그림자에서 솟아난 듯 은밀하고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크릅…….”

입에서 울컥 피를 내뿜으며 제일조장은 창에 꿰뚫린 자신의 가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다봤다.

‘이인(二人)…… 일조(一組)였던가?’

으지직!

“크허…… 억……!”

창이 거칠게 회전하며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튀었다. 제일조장은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떨리는 몸을 움직여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닌 듯 그에게 창을 찔러 넣은 창수의 눈빛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다른 이씨세가의 무사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고전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제일조장이 그랬듯, 어떻게든 일격을 성공시켜 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사이 뒤따르는 창수에게 꼬치 꿰이듯 몸이 꿰뚫리며 하나하나 땅바닥에 몸을 눕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틀렸어. 상대가 안 돼.’

무공의 경지가 높고 낮음을 떠나, 사람으로서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의 경험치가 턱도 없이 차이가 났다.

백 번을 싸우면 백 번을 질 만큼의 차이다.

‘후퇴…… 해야…….’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미 그건 불가능한 바람일 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제일조장의 몸은 단단한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전마(戰馬)들의 발에 밟혀 처참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말도 안 돼……!”

이씨세가의 적통인 이중혁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일류 무사 오백 명이면 무림오존이라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기마병 백오십을 맞아 일류무사 오백 명이 싸리비에 낙엽이 휩쓸리듯 허무하게 스러져 가고 있지 않은가.

싸움이란 건 어느 정도 서로 간의 피해가 일정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

그밖의 다른 단어로는 도저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말…… 말을 노려! 병사들 말고 말을 노려라!”

이중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래도 기마 위에 올라탄 병사들은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럴 때 탈것을 없애 버리면 아무래도 싸움이 좀 더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다.

‘됐어! 말만 없어지면……!’

챙! 채챙!

“으아악……!”

하지만 그건 이중혁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상대는 이러한 싸움을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니었다. 말을 노리던 공격은 대번에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어진 반격에 무사들의 목숨만 덧없이 사라져 갔다.

푸화악―!

콰드드득―!

이중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마병의 숫자는 백오십.

이쪽의 숫자와 비교했을 때 삼분지 일도 안 되는 숫자건만.

그런데 그들이 오십 명씩 세 개의 진형으로 나눠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자 오백 명의 무사들은 허수아비가 된 듯 무참히 휩쓸리고 만 것이다.

“으아아앗……!”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기마병들이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휩쓸자 순식간에 이씨세가의 무사들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

“아…… 아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던 이중혁.

그에게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씨세가는 칠성태극교(七星太極敎)의 지부라던데, 어째서 하필 남궁세가를 택했나?”

이중혁은 고개를 휙 돌렸다.

사방이 비명과 병장기 소리로 시끄러운 가운데 그 목소리만큼은 묘하게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뭐, 뭣?”

“주변을 찾아보면 만만한 중소 문파들도 많았을 텐데, 왜 굳이 남궁세가를 골랐지? 자랑할 만한 정파의 얼굴이 필요했나?”

“……!”

이중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칠성태극교에 대한 것까지 상대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 그건 어떻게……!”

“네가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 단체가 뭘 원하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다만, 내가 아끼는 동생이 남궁세가 사람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큭……!”

이중혁은 잇몸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날 정도로 이를 세게 악물었다.

두두두두―

챙! 채챙!

“으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어느새 한 번 중심을 꿰뚫고 지나갔던 기마병들이 방향을 돌려 다시 한 번 무사들을 휩쓸고 있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핏물과 부서진 육편이 난무했다.

기마병들은 냉혹하고 능숙했으며, 특히 가장 선두에 서서 무사들을 휩쓸고 있는 몇몇 장수들은 보고만 있어도 섬뜩할 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한 쌍의 장군검을 양손에 든 젊은 장수.

정교하고 매끈한 움직임으로 이씨세가 무사들의 목을 뎅겅뎅겅 잘라 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실패다, 대실패야. 본 교에서 칠성군이나 태극존자가 직접 왔어야 돼. 이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중혁은 도주를 생각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한데, 부하들을 다 버리고서라도 도망칠 수 있을지…… 그 살길이 보이지를 않았다.

“칠성태극교는 사천 남부와 운남에서 유명한 교파라고 하더군. 중원 진출을 노렸던 모양인데, 첫 선택이 잘못되었어.”

바위에 태연하게 앉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장기린.

이중혁은 그에 반항하듯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우리에 대해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교(敎)에서 너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안 둔다고?”

장기린은 그런 유치한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중혁을 심중으로 짓누르던 차분하고 무거운 기세만 더욱 강해졌다.

“자꾸 나를 도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나는 이씨세가를 아예 없애는 게 좋을지, 아니면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이니까.”

“……!!”

이씨세가를 없앤다.

칠성태극교의 저력과 이씨세가의 숨겨진 힘까지 모두 알고 있는 이중혁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광오한 말이었으나, 장기린이 말하자 그는 왠지 진실로 그리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슥―

“큭……!”

이중혁은 움찔 몸을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장기린이 천천히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슬슬 끝이 나는 것 같군.”

“……!”

이중혁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기린의 말대로였다. 불과 이각도 되지 않은 것 같건만, 오백 명의 이씨세가 무사들이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 어째서 이렇게 허망하게……!”

이중혁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순순히 따라올 건가, 아니면 그 검…… 뽑아 볼 건가?”

장기린의 깊고 고요한 시선이 이중혁의 허리춤에 닿았다.

길이가 삼 척 정도 되는 칼날이 좁은 협봉검이다. 이중혁은 움찔거리면서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가…….

“크읏……!”

스릉―!

결국, 검이 뽑혀 나왔다.

“타핫―!”

쉬이익―!

이중혁은 칼을 뽑고 나선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짓쳐드는 신형. 바람과 같이 달려들어 화려하게 내찌르는 검끝이 매우 날카로웠다.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다가가는 경지.

남궁무회와 비교해도 그리 빠지지 않는 실력이다. 남궁무회를 상대로 백 초가량은 충분히 버틸 능력이 되는 고수라는 뜻이었다.

철컹!

“……!”

장기린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능숙하게 육 척 길이의 무인창으로 변화시켰다.

후우웅―

날이 없는 창대가 제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 회전하며 창끝을 앞으로 향했다.

꼿꼿한 허리, 곧은 시선. 양팔을 축 늘어뜨린 듯한 자연체(自然體)에서 찰나의 순간, 섬광과도 같은 찌르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따앙!

“커헛……!”

이중혁은 달려들었던 속도 그대로 뒤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웅웅웅―

덜덜 떨리는 칼날의 끝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장기린은 놀랍게도 자신을 찔러오는 검첨(劍尖)을 창끝으로 정확하게 찌른 것이다.

이중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제자리에 있는 것을 찌르는 것도 어려운데, 움직이는 검끝을 찌르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일점(一點)으로 집중된 힘과 힘이 마주쳤다.

정면 대결이 되어 버렸을 때, 한쪽의 힘과 속도가 월등할 경우 약한 쪽이 부서지는 것이 당연한 상식. 이중혁은 휘청거리는 신형을 간신히 바로잡으며 경악에 찬 신색을 숨기지 않았다.

우우웅―

“……!”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육중한 한 마리의 거룡(巨龍)이 움직이듯이, 장기린이 이중혁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천히, 빠르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이중혁은 그 모습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강하다.

압도적이다.

마치 산사태를 눈으로 목격하듯, 무시무시한 힘이 코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주었다.

다급하게 휘두르는 검.

칠성태극교에서 배운 괴호검법(傀弧劍法)이 극성으로 펼쳐졌다.

클 괴(傀).

활 호(弧).

큰 활을 쏘듯 빠르고 강력하다고 해서 괴호검법이다.

날카로운 협봉검이 등 뒤까지 쭉― 당겨졌다가, 순식간에 수십 번이나 앞으로 쏘아졌다.

쉬쉬쉬쉭―!

교묘하게 현혹시키는 움직임은 없지만, 몇 번이나 연속해서 앞으로 쏘아지는 공격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갑작스런 속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온몸이 벌집이 되고 말 터.

스으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한 눈으로 지켜보던 장기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손에서 다시 한 번 섬광이 번뜩였다.

스아앗―!

‘극쾌! 극쾌란 이런 것인가…….’

잔상조차 남지 않는다.

오로지 느껴지는 것은 뭔가가 지나간 듯한 화끈한 느낌과 얼굴 전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풍압뿐.

쩌어엉―!

손목이 탈구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중혁의 손에서 검이 날아가 버렸다.

손목이 덜렁거렸다.

강렬한 고통이 번개를 맞은 듯 등골을 타고 치달아올랐다.

이중혁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린 사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장기린이 그의 탈구된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휙―

그리고 중간에서 짧게 잡은 무인창이 그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

충혈된 눈을 부릅뜬 이중혁에게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무 큰 고통을 느끼면 이성이 마비되고 비명도 안 나오는 법이다. 이중혁은 그저 머리가 새하얗게 된 채 무릎을 털썩 꿇고 몸을 벌벌 떨었다.

처절한 고함은 속으로 숫자 서른을 셀 때 즈음에야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이중혁의 눈은 흰자가 드러나 있었다.

오른쪽 어깨뼈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쇄골뼈와 어깨 관절이 모두 나가 버렸으니 이제 앞으로는 평생 제대로 오른팔을 쓸 수 없을 터.

검을 잡는 검수에게 있어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처였다.

“그동안 저지른 죗값, 거기에 남궁세가를 노리던 헛된 야망의 대가다. 평생 속죄하며 살도록.”

“끄…… 으……!”

이중혁은 장기린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눈앞이 흐려졌다. 짙은 패배감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점차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대형, 끝났습니다.”

장기린이 앞으로 픽 고꾸라지는 이중혁을 받아 바닥에 눕혔을 때, 부운화가 그의 애마 은수를 타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다가왔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전마(戰馬)는 연신 푸르륵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뜨거운 공기가 얼굴로 훅― 하고 끼쳐 들었다. 짙은 혈향과 함께 방금 전 전투의 치열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고했어. 그런데 꽤 힘들었던 모양이지?”

“단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게 싸우려다 보니 신경 쓸 게 많았습니다.”

적룡기마대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그래도 상대는 일류의 경지를 넘은 무사 오백 명이었다.

그나마 그들이 집단 전술에 무지해서 이렇게 피해없이 끝낼 수 있던 것이지, 만약 전략에 능한 지휘관이 한 명만 있었더라면 싸움은 충분히 어렵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미안하다. 도왔어야 했는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적룡기마대가 몸풀기엔 좋은 상대였습니다.”

부운화는 깨끗하게 잘생긴 얼굴로 씩 웃었다. 사내답고 자유로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웃음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조금 긁힌 정도입니다. 심각한 상처는 없습니다.”

“그래?”

장기린은 시선을 돌려 어느새 한쪽에 도열해 있는 적룡기마대의 모습을 바라봤다.

머리와 몸통에 마갑(馬甲)을 걸친 백오십의 기마.

상체엔 철로 만든 갑주를 입고 절반은 두꺼운 대검을, 절반은 튼튼한 철창을 들고 있다.

타고 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잘 훈련된 전마(戰馬)이고, 그 위에 탄 병사들은 모두가 자유로운 가운데 엄정한 군기가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수백 번의 싸움을 겪고, 그 싸움의 숫자만큼 생존해 낸 진정한 강자들이다. 이들이 뒤를 받쳐 주는 한, 장기린에겐 그 어느 것도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데리고 다녀도 되는지 모르겠어. 철기(鐵騎)는 관(官)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대형은 그런 것을 걱정하십니까?”

부운화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제가 대장군의 행군사마입니다. 만약 문제가 될 경우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이라고 둘러대면 그뿐이지요.”

“음…….”

“마음에 걸려 하실 것 없습니다. 실제로 우린 원의 잔당들을 쓸어 버리기 위해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말은 맞는 말.

하지만 장기린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너희를 끌어들여도 되는 건지.”

“대형, 대형의 복수가 곧 우리의 복수입니다.”

부운화는 확고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뒤, 한쪽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던 추룡에게 외쳤다.

“추룡! 대형께서 너희를 괜한 일에 끌어들인 건 아닌지 걱정하신다!”

“뭐요? 형님! 아직도 그런 걸 걱정했단 말입니까?”

온 산천이 떠나갈 것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는 추룡.

그의 얼굴에 새겨진 십자(十字) 형태의 흉터가 불만스럽게 꿈틀댔다.

“적룡기마대! 형님께서 우릴 걱정하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꼿꼿한 자세로 도열해 있던 적룡기마대원들 사이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대주께서 잠시 안 본 사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오.”

“우리가 그렇게 나약해 보이나? 대주! 섭섭합니다! 우리들이 아무 데서나 죽을 반푼이로 보이십니까?”

“대주님의 원한은 우리의 원한! 당연히 싸워야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그게!”

“이거저거 다 떠나서, 우린 싸우지 않고는 도저히 재미없어서 못 사는 놈들이다, 이거야! 우리 중에 고향에서 농사짓고 싶은 놈 있어? 없잖아? 우린 이미 골수까지 미쳤다, 이거지!”

“와하하! 그 말이 딱 맞다! 우린 다 미쳤어!”

“미쳐도 제대로 미쳤지. 계집질 하는 것보다 이렇게 다들 모여서 싸우는 게 더 좋다니까?”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계집질이 뭐냐, 계집질이.”

“아니, 그럼 계집질을 계집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그러나? 아! 오입(誤入)질이라고 할까?”

“무식한 놈, 그건 전혀 다른 뜻이야.”

“뭐?! 한자가 들어갔는데?”

“한자가 들어간다고 다 좋은게 아니다, 이 무식한 놈아.”

“이놈이! 자꾸 무식한 놈이라고 할래?!”

티격태격하는 말소리가 시끄럽다.

하지만 시끄러운 가운데 그 사이엔 가족보다도 더 강하고 끈끈한 정이 숨어 있으니, 그게 곧 적룡기마대의 관계였다.

서로에게 목숨을 내맡기며 함께 싸우는 동지라는 전우애(戰友愛).

그것은 피를 나눈 진짜 형제들보다 더욱 강한 인연인 것이다.

“대형,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죽을 때가 되면 초심을 찾는 법이지요. 우리 적룡기마대의 초심이 무엇입니까?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운명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는 매우 섭섭하게 느껴집니다만?”

섭우생이 철로 만든 부채로 바람을 살랑살랑 부치며 나타나 말했다.

“맞수. 그거 되게 섭섭한 일이우.”

“대형! 저희는 이게 즐겁다고요! 오히려 돌아가라고 하면 곤란하다고나 할까…….”

큰 덩치에 순박한 인상을 가진 대석과 까무잡잡한 피부에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진구 역시도 같은 의견인 듯했다.

장기린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이들을 떼어 놓을 수는 없을 듯했다. 적룡기마대와 그는 운명적인 공동체였다.

“미친놈들.”

씩 웃으면서 말하자 주변의 적룡기마대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 이제야 대주님답네!”

“난 처음에 보고 대주님이 그사이에 도사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장기린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이중혁의 뒷덜미를 잡고 앞으로 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진구가 그걸 받아 들고 마치 짐짝을 올리듯 말의 뒤쪽에 얹어 두었다.

“묶어 두는 것 잊지 말고.”

“예이―!”

진구는 대답과 함께 이중혁의 팔다리를 밧줄로 꽁꽁 묶었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뒤 부운화에게 물었다.

“운화, 말 남는 거 있나?”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운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자 뒤쪽에서 섭우생이 튼튼해 보이는 갈색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예전에 그가 탔던 흑룡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몸이 튼실한 명마였다.

푸르륵!

장기린이 가까이 다가가 갈기를 쓰다듬자 갈색 말은 친근하게 머리를 숙였다.

“순한 녀석이군.”

“예. 전마(戰馬)로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시장에서 가장 튼튼한 녀석으로 골랐습니다.”

“괜찮아. 마음에 든다.”

히히힝!

장기린은 곧바로 몸을 날려 안장 위에 올라탔다.

곧바로 느껴지는 청량한 공기.

말 위에 올라타야만 느낄 수 있는 상쾌함과 충실함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아련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적룡기마대!”

“예!”

“그럼 힘을 좀 빌려 다오. 원의 잔당들을 쓸어 버리려면 나 혼자의 힘으론 좀 역부족인 듯해서 말이야.”

장기린은 마치 예전 북쪽 전장으로 돌아간 듯 호쾌하고 자유로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얼마든지 갖다 쓰십시오!”

“안 그래도 그동안 싸우고 싶은 거 참느라 근질근질했습니다!”

적룡기마대원들은 하나같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고맙다.”

장기린의 입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온 말.

모두들 그 말이 생소한지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옆 사람과 잡담을 떠들어댔다.

안휘성 북쪽의 이름 모를 들판.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대륙을 질타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몇 명이나 모였지?”

“창천이대, 창천삼대를 합해서 총 이백 명에, 위지가에서 이백 명의 무사를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창천일대는 여전히 가주의 편인가?”

“예. 아무래도 그들은 가주를 따르는 마음이 각별한지라…….”

“그래? 그럼 사마가는?”

“사람은 보냈지만 아직 의견은 받지 못했습니다.”

“으음, 그렇군.”

“창천대와 위지가까지 합쳐서 사백……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총관부 제이총관 마상태는 남궁무회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상태는 이씨세가의 사람으로, 전대 제이총관을 억지로 트집을 잡아 귀향시키고 그 자리에 들어앉은 사내다.

즉, 칠성태극교의 사람이라는 뜻.

칠성태극교와 이씨세가의 저력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남궁무회가 왜 이렇게 초조한 듯이 캐묻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창천일대가 아무리 세가의 정예라도 고작 오십. 겨우 그걸로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비웃는 듯한 남궁무회의 말이 이어졌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가주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나?”

“예?”

“나를 밀어내고 가주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괴로워하는 민초를 두고 보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가는 호인(好人)이라서 우습게 봤다가는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야.”

서슬 퍼런 남궁무회의 기세에 마상태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움찔하고 말았다.

“그래도…… 뇌공대도 이쪽 편인데다 이씨세가에서 지금 원군이 오고 있는…….”

“조용히 하라. 그게 아무렇게나 떠들 말인가?”

“……죄송합니다.”

“일단 다 데리고 가주가 있는 대전(大殿)으로 간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모두들 긴장하라고 해.”

“예!”

남궁무회는 두 눈에 강렬한 불꽃을 활활 태워 올리고 있었다.

‘혁이 내 아들이라는 것을 가주가 알고 있었다니…… 그랬다면 대비도 해 두었겠지. 내 시선을 피해 얼마나 준비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습게 봤다간 오히려 당한다. 뒤통수를 맞는 건 이십 년 전의 일로 족해.’

남궁무회는 살벌한 기세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뒤론 창천이대와 삼대 이백 명이 따르고 있었다.

저벅저벅.

철컹! 철컹!

정렬된 걸음에 맞춰 울리는 병장기 소리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외전(外殿)과 중전(中殿)을 지나 마침내 내전(內殿)으로 들어갔을 때, 남궁무회의 걸음이 멎었다.

앞과 옆이 소란스러웠다.

“반도들을 포위하라!”

우르르―

마치 사냥감이 그물에 걸려들었을 때처럼, 사방에서 나타난 무사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과연, 이것까지 생각해 두었다는 건가.”

남궁무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뇌공대주 유자항!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주변을 포위한 무사들 사이에서 다부진 몸에 고집스런 입매를 가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뇌공대주 유자항.

한때 더 강한 남궁세가를 만들기 위해 남궁무회를 따르려고 했으나, 남궁휴라는 걸출한 인재를 보고 마음을 바꾼 남자였다.

“나는 세가의 미래를 위해 옳은 결정을 했을 뿐이오.”

“옳은 결정? 겨우 항주 도박판에서 구르던 방탕한 놈을 고른 게 옳은 결정이라고?”

“난 총관의 강직함과 패기있는 추진력을 존경하고 있소. 그러니 그분의 진가(眞價)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분.

남궁무회는 남궁휴를 대하는 호칭만 봐도 유자항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남궁무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심이군.”

“물론이오.”

“이해할 수가 없군.”

남궁무회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유자항이 이런다는 건 남궁휴가 살아 있다는 뜻인가?’

맹호도 방극의 실력을 잘 아는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결과였다.

“맹호도 방극은 대공자를 마음에 들어 했소.”

“뭣……!”

“그분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뜻이오.”

유자항은 마치 자신의 자랑거리를 말하듯 뿌듯한 얼굴이었다.

“방극, 이놈……!”

남궁무회는 주변에 티를 내지 않게 이를 뿌득! 하고 갈았다.

방극이 남궁휴를 살려 두다니, 이건 중대한 계약 위반이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창천대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떠들 수는 없는 노릇.

남궁무회는 억지로 분을 가라앉힌 채 사람들의 이목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 해도 너무 무모한 결정 아니었나? 자네라면 세력이 많이 불리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신념을 바꾼다면 사내가 아니오.”

단호하게 말하는 유자항은 영락없이 불합리한 거대세력에 맞서는 협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고작 뇌공대 백오십으로 우리에게 맞서겠다고?”

“못할 건 뭐 있겠소.”

유자항이 호전적인 눈빛으로 남궁무회를 응시했다.

비록 남궁무회가 강하긴 하지만 유자항도 그리 쉽게 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상대는 창천이대와 창천삼대.

비록 이백 명과 백오십 명이라는 숫자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며 유자항은 뇌공대원들을 믿고 있었다.

“자네, 나를 너무 우습게 봤군.”

화아악―!

분노의 기파를 뿜어내는 남궁무회.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기세를 드러내자 마치 드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으음…….”

유자항은 신음을 흘렸다.

이것이 초절정고수의 위력이었다.

기파를 뿜어낸 것만으로도 주변 백오십 명을 주춤하게 만드는 위세.

유자항이 절정의 끝자락에 있지만, 실제로 그 벽을 넘은 남궁무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잘해야 백 초…… 인가?’

그 이상 버티기는 힘들 듯했다.

유자항은 힘의 열세를 느꼈으나, 그래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이 유자항, 한 번 신의를 맹세했으니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울 것이오.”

“으음……!”

남궁무회는 자신의 기파에도 동요하지 않는 유자항을 보며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을 찾고 계시오? 뇌공삼대주를 찾으시오?”

“……!”

유자항이 손짓을 하자 뇌공일대주가 뒤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몰매라도 맞은 듯 처참한 몰골이 되어 밧줄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나오는 자.

뇌공삼대주 이진철이었다.

남궁무회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이진철은 이씨세가의 방계로, 일부러 전대 뇌공삼대주 장환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고 그 대신 앉혀 둔 그의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남궁무회는 뇌공대를 손쉽게 포섭할 수 있었다.

“일대주.”

“예, 총대주.”

뇌공일대주는 유자항을 향해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죽여라.”

“예!”

곧바로 뇌공일대주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스릉―!

“잠깐……!”

푸욱―!

남궁무회가 황급히 말리려고 했으나, 한 번 검을 뽑아 든 뇌공일대주는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남궁무회가 뭐라고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곧바로 기절해 있던 이진철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쿨럭……!”

이진철은 눈을 부릅 뜨며 피 가래를 한 번 토해 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절명했다.

아차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

잠시 허무한 심정에 휩싸여 멍하니 서 있던 남궁무회가 불같이 노하며 노성을 터뜨렸다.

“이노옴―!”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오자 뇌공대 백오십 명의 안색이 강대한 기파에 짓눌려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감히 이런 짓을! 누가 너에게 같은 세가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주었더냐!”

“같은 세가의 사람이라니!”

뇌공대주 유자항은 노골적으로 살기를 뿌리는 남궁무회의 기파를 견뎌 내는 게 쉽지 않아 보였으나, 그래도 꿋꿋이 제 할 말을 했다.

“언제부터 남궁세가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불태우는 이씨세가의 간자(間者)가 같은 세가의 사람이 된 거요!”

“뭐, 뭐라?”

“이진철뿐만이 아니지. 예당주인 이진중이나 오가(五家)에 침투해 있던 이씨세가의 간자들은 지금쯤 모조리 축출되었을 것이오.”

“……!”

“대공자를 따르게 되고 당신의 숨은 모습을 알게 된 후로 나는 확신을 가졌소. 내 선택이 옳은 길이오. 당신은 이씨세가에 남궁세가를 팔아먹으려는 역도일 뿐이외다!”

처음으로 남궁무회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눈빛이 흔들리고, 뿜어내던 강대한 기파마저도 중심을 잃고 그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설마 이 정도로 과감한 행동을 할 줄이야……!’

남궁무회는 흐리멍텅해 보이던 가주가 이씨세가의 간자들을 단번에 뿌리 뽑는 결단을 취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심어 둔 간자들이다.

그들이 뽑혀 나갔다는 것은 타격이 컸다.

“설마……!”

“저 말이 진짜일까……?”

남궁무회를 따르기로 했던 창천대에서도 의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록 그들이 남궁무회를 따르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궁세가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무원은 덕치(德治)를 하는 덕왕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분쟁 없이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는 훌륭한 가주이지만, 무사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작금의 상황이 못내 불만이었다.

한 자루 칼을 차고 세상에 나온 무인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명예’가 아니던가.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싸움이 없다는 것은 곧 이름을 날릴 기회가 없다는 말과 상통했다.

그때, 남궁무회는 스스로 패왕이 될 것을 약속했다.

남궁세가에 밀집되어 있는 힘을 모아 강남, 사천, 강서 지역에까지 세를 넓혀 남궁세가의 이름을 무림에 위진시키겠노라는 그의 맹세를 믿고, 그들은 자칫 반역으로 보일 수 있는 작금의 행동에 동참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씨세가에 가문을 팔아먹는다는 건 사정이 다르지.’

‘이러다 남궁세가가 사라지는 거 아냐? 이래도 괜찮을까?’

창천대의 얼굴에 불안이 떠올랐다.

눈치 빠른 남궁무회가 그런 창천대의 기색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순간, 남궁무회의 눈빛이 일변하며 그의 기세가 다시 폭발적으로 되살아났다.

“유자항! 감히 어디서 간교한 술수를 쓰려는 것이냐!”

쩌렁쩌렁한 외침이 창천대의 얼굴에서 불안을 날려 버렸다.

“내 가주를 그렇게 안 보았건만, 설마 이런 이간책(離間策)까지 쓸 줄이야! 이씨세가는 현 가모(家母)의 외가다. 그런 곳과 협력을 하고 서로 힘을 모으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궁세가가 겨우 이씨세가에게 먹힐 만큼 약해 보이나? 겨우 그런 빈약한 이유를 가지고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죽여? 그게 네가 말하는 ‘정의’더냐, 유자항!”

당당하게 외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해 결백을 외치는 협사의 모습이었다.

놀라운 연기력.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순간적인 기지(奇智)는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만약 유자항도 남궁휴에게 사실을 모두 듣지 않았더라면 순간적으로 혹해 마음이 흔들릴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패왕이라 생각했거늘, 겨우 간웅도 안 되는 자였단 말인가.’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자항은 실망감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인솔력만큼은 대단하다면 대단하지만…… 그 외엔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거짓된 가면이 벗겨지자 드러난 것은 권력에 대한 추악한 욕망과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려는 가벼운 술책뿐.

남궁무회가 가진바 그릇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렇지. 총관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지.”

“가주님도 실망스럽군. 어떻게 그런 이간책을……!”

하지만 모두가 유자항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남궁무회의 당당한 외침을 들은 창천대는 눈에 띄게 밝은 표정으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회복해 가는 중이었다.

혼란이 사라졌으니 싸움에도 망설임이 없어지는 게 당연할 터.

되살아나는 기세.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뇌공대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떠올랐다.

“와아아―!”

“……!”

게다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뇌공대원들의 사기를 급격히 저하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남궁무회와 창천대의 뒤쪽에서 갑자기 위지(違旨)가의 무사들 이백 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녹색에 가까운 청람빛 무복을 입고 허리엔 붉은색 끈을 묶고 있었다.

위지가의 무사들은 창천대의 주변을 감싸듯이 퍼져 뇌공대와 대치했다.

“유자항! 당신 미쳤소? 어찌 감히 총관의 면전을 향해 검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이오?”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하는, 신경질적이고 창백한 인상의 젊은 사내. 최근에 위지 가문을 이어받은 젊은 가주, 위지광이었다.

유자항과 함께 남궁세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며, 세가의 가전 무공인 고혼일검(孤魂一劍)의 고수였다.

‘큰일이다. 위지광까지! 실력으로 따지면 위지광은 내 아래가 아닐 터.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유자항의 표정은 어두웠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남궁무회가 이끄는 창천대 이백 명이다. 그 위력이 어떠할지 유자항으로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

그것만으로도 뇌공대 백오십으론 역부족인데, 이젠 남궁세가의 외전을 지키던 위지가의 무사 이백 명까지 합류했으니…….

‘대공자……!’

유자항은 결연하게 얼굴을 굳힌 채 검의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두고 볼 수가 없군. 유자항, 당신은 반역이라도 꾀하는 것이오?”

위지광은 신경질적인 인상의 얼굴 위로 비웃음을 지었다.

“반역? 반역이라고?”

유자항은 눈을 부릅떴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군! 감히 그 입에서 반역이란 말이 나오나!”

“못 쓸 건 또 뭐 있겠소. 뇌공대의 대주가 남궁세가의 총관에게 검을 겨눈다. 충분히 반역이란 말에 가깝지 않소?”

“아니지! 총관과 위지가의 주인이 가주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반역이다!”

“허어,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소.”

위지광은 남궁무회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가 가주의 목숨을 노릴 리는 없지 않소?”

“뭣……?”

유자항이 놀라서 남궁무회를 쳐다보자, 그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남궁세가를 강하게 만들고 싶기는 하나, 가주를 해할 생각은 없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병력을……!”

“해할 생각은 없으나 유폐 정도는 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앞으로 욱일승천할 남궁세가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지.”

유폐.

남궁세가의 가주를 남들과 접촉하지 못하는 곳에 가둬 두겠다는 이야기다.

‘치욕스러운 일! 그것과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 아니,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죽이려고 할 수도 있겠지.’

유자항은 이제 남궁무회를 믿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그가 유폐를 시키겠다고 하는 말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뇌공대! 전원 검을 들어라!”

“예!”

채챙!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뇌공대 백오십 명이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각자 시퍼렇게 날이 선 협봉검을 뽑아 들었다.

“유자항, 결국 해보겠다는 거구만?”

위지광이 싸늘한 목소리를 발했다.

사백의 인원을 백오십으로 포위한 상태.

누가 봐도 이미 승부는 갈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유자항에겐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절대로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말라고 하셨다.’

시간을 끄는 일.

그게 유자항에게 내려진 특명이었다.

‘하지만…… 일각이나 버틸 수 있을까?’

대단한 고수인 남궁무회와 위지광이 있다. 거기에 창천대와 위지가의 무사가 사백이다.

저쪽에서 각자 두 사람당 한 명씩 죽여도 뇌공대 쪽은 이백 명이 죽는다. 유자항은 암담함을 느꼈다.

“멈추시오!”

그때, 장내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남궁무회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반면에 유자항의 얼굴엔 미미한 희색이 떠올랐다.

우렁차고 힘이 있는, 남궁세가의 지도층이라면 누구나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단 가주!”

“총관! 꼭 이렇게 해야 했소?”

새로 나타난 것은 단가의 가주 단욱과 오십여 명의 건장한 무인들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단가의 무사 사십 명에 정가의 무사가 십여 명이었다.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남궁무회의 입장에선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단가와 정가…… 가주의 편을 들기로 한 거요?”

“대공자의 성품과 재질을 보고, 거기에 총관이 지금껏 한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누구나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이오. 다른 일 때문에 함께 오지는 않았으나 한가의 가주도 이번에 총관이 벌인 일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라는 뜻을 표했소.”

“……!”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오, 총관. 당신은 호승심이 강하고 고집스럽기는 하나, 그래도 역모를 꾸밀 위인은 아니지 않았소?”

남궁무회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단가, 정가, 한가…… 오가 중의 셋인가…….”

남궁무회는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래 남궁가의 후계자는 속오가 중 셋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소가주의 직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남궁휴는 이미 소가주의 직위를 얻은 셈이었다.

‘참으로…… 대단하군, 남궁휴. 정말로 신경에 거슬리는 녀석이다.’

뇌공대 백오십에 단가와 정가의 무사 오십.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이곳은 아무도 없어야 마땅하건만, 이상하게도 남궁휴를 지키겠답시고 나서는 사람들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오가 중 셋을 다 버릴 것인가, 아니면…….’

저벅저벅.

쿵, 쿵, 쿵!

“아니……?”

“사마가……!”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몰고 오는 법.

사백 대 이백의 싸움이 되었던 내전의 입구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남궁가의 금전(金錢)과 물건의 출입을 관리하는 사마가.

그곳의 현 가주인 사마현이 무려 일백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 무슨 소란이란 말이오, 채신머리없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가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마가주, 여긴 어쩐 일이오!”

“그건 내가 할 말이외다. 단가주가 이런 곳엔 웬일이오? 은거한 신룡처럼 대장간에만 갇혀서 평생 살 것 같더니만.”

사마현은 탐탁지 않은 듯 불편한 시선으로 단가주를 바라봤다.

“설마 사마가주도…… 총관의 편에 붙은 것이오?”

“…….”

“사마가주!”

단가주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소리쳤다.

“그쪽은 옳은 길이 아니오! 가주와 대공자야말로 남궁세가를 이끌 참된 그릇이란 말이오!”

“……단가주, 그걸로는 부족하외다.”

사마현은 복잡한 신색이었으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이미 결정을 내린 확고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단가나 정가, 한가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마가는 원래 무가(武家)였소. 남궁세가라는 울타리에 갇혀 하루하루 우리 것이 아닌 돈이나 세며 늙어 가는 것은 이제 지쳤다는 말이오.”

“사마가주!”

단가주가 소리쳤으나 사마현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남궁 총관! 우리 사마가는 총관과 뜻을 함께하겠소!”

평화로움에 지쳐 버린 사마가의 가주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이었다.

남궁무회는 밝은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사마가주. 이제 우리 세가의 힘은 대륙 전역으로 뻗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가주는 어디에 있소?”

결정을 내리긴 했으나 아직 마음이 좋지 않은지 사마현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잘 모르겠소만, 아마 가주전에 있을 것이오. 평소처럼.”

남궁무회는 자신의 잘 정리된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자항을 바라봤다.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자네에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거기 단가의 가주와 정가의 가주에게도 말씀드리겠소. 나에게 협력하시오. 그럼 남궁세가의 깃발이 대륙 어디에서나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드리겠소.”

“…….”

“지금 바로 대답해 주시오.”

남궁무회가 인물은 인물이었다.

그것이 본심을 숨긴 연기든 어쨌든, 사람을 짓누르고 위엄을 세우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오백 대 이백이 된 상황.

남궁세가를 뒤덮은 암운이 점점 짙어져 가기만 하고 있었다.

‘복은 함께 오지 않고, 화는 혼자 오지 않는다[福無雙至, 禍不單行]더니…… 사마가까지 적이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쩐다!’

여기서 어떻게 더 시간을 끌어야 할지 고민하던 유자항이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으려는 그때,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유자항의 뒤에서 맑고 힘찬, 젊은 패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대공자!”

유자항은 확 밝아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휴.

그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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