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一章 ― 북천도래(北天到來)
북경의 왁자지껄한 시장통.
하늘은 별도 뜨지 않을 만큼 칠흑같이 어두워졌으나, 대륙삼대시전으로 꼽힐 만큼 활성화된 북경의 야시장은 불야성처럼 그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길거리엔 온갖 먹거리를 파는 시전 상인들의 호객 소리로 시끌벅적했고, 서역에서 가져온 물건이나 온갖 신기한 잡동사니를 파는 자들,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추는 춤꾼이나 차력을 보이며 약을 파는 약장수들이 한 데 어우러진 모습은 그야말로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만선(滿船)을 이룬 배가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을 쓴다는데, 이 야시장을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야시장의 한구석.
활기찬 공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의 한 사람이 마치 깎아 놓은 장승처럼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평범한 갈색 무복을 입고 허리엔 긴 장검을 찬 사내였다. 얼굴은 죽립으로 가렸으나, 죽립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이품(二品) 도어사(都御司) 감택(邯澤)을 모시는 호위무장 이원승(李原承)이 그 사내의 정체였다.
이원승은 주기적으로 길 건너편에 있는 그와 똑같은 복색의 사내와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그때마다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여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원승은 지금 꽤 큰 도관(道館)의 정문에서 야시장으로 내려오는 계단 입구에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굵직한 통나무로 만든 도관의 대문에 몸을 숨기면서 야시장 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수상한 사람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항상 주변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호위무장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어떤 특별한 사건이 생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도어사 감택의 보표 일을 맡은 후 지금껏, 삼 년가량 암습은커녕 시비 비슷한 것도 걸려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굳이 꼽자면 가끔 감택의 정체를 모르는 자들에게 윽박질러 길을 비키게 하는 정도랄까.
정이품의 직위란 가히 황제를 제외하곤 고개 숙일 일이 거의 없는 무상의 직위였다.
당연히 보통 민초들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고관대작이라는 이야기.
게다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특색이 없는 감택의 성품 탓에 딱히 정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 더더욱 직접적인 위험은 없었다.
이원승은 종남파에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무인이었다.
종남파의 일류 무공을 수련했고, 자질 또한 나쁘지 않아 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며, 나름대로 한 성(城)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때때로 그 당시에 알던 사람을 만나면 무림강호에 몸을 담근 무인으로서 뭣 하러 이런 심심한 일자리를 맡고 있느냐고 비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원승은 그건 모르는 자들이나 지껄이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무인이라고 해서 굶고 거지처럼 살면서 검만 휘둘러야 하는가.
제대로 인간답게 먹고살려면 다 돈이 필요한 법.
게다가 고관대작의 보표 일처럼 대우가 좋으면서 편안한 직업은 세상에서 찾기 힘들었다.
월봉도 은자로 스무 냥이나 된다.
보통 농지를 가진 농민이 한 달을 뼈 빠지게 일해서 은자 두 냥을 벌까 말까 하는데, 그는 아무것도 안 하고 곁을 지키며 보초를 서는 것만으로 그 열 배를 번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했다.
조만간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가정도 꾸릴까 생각 중이다.
물론 받는 돈이 있으니 위험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
위험이란 벌어지고 난 뒤엔 늦는 법이니, 항상 감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조심해야 했다. 생명이 위험할 일도 조심만 하고 있다면 미리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피곤하게, 왜 하필 이런 번잡한 곳을 약속 장소로 잡아 가지고.’
이원승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어사 감택은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이곳 북경 야시장의 구석에 있는 도관에서 비밀 만남을 갖곤 했다.
감택은 유한 성격 탓에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깨끗하고 청렴하진 않았다.
이 도관에서 비밀리에 하는 만남에 어떤 비리가 연루되었을지, 어떤 큰 이권이 걸려 있는지 이원승으로서는 모르는 일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게 있어 이곳이 그를 보호하기에 최악의 조건을 갖췄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야시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죽립 속에서 이원승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인만큼 얇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팔목이 없는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 한 손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여러 가지 물건이 든 바구니를 든 여인, 먼 길을 온 듯 등 뒤에 봇짐을 멘 허름한 복색의 나그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근처 기루에서 잠시 구경을 나온 듯 샛노란 비단옷을 입고 살랑거리며 걸어 다니는 기녀들까지.
불과 호흡을 길게 몇 번 할 정도의 시간 동안 지나간 사람들만 해도 그 정도였다.
이원승은 그들 하나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유심히 살폈다. 무기를 소지하거나 무공을 익힌 자는 없는지, 이쪽을 노리거나 신경을 쓰며 몇 번이나 같은 길을 왕복하는 자는 없는지.
피곤한 일이지만 무공으로 단련되고, 보표 일을 하면서 경험이 쌓인 안목은 그런 특이점을 한눈에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원승은 주기적으로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흐르는 인파 속을 계속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니,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한쪽에서 경극단이라도 나타났는지 그쪽으로 인파가 몰려 도관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휴우…….”
이원승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으로 뻣뻣해진 뒷목을 스스로 주물렀다.
사람이 좀 줄어드니 살 것 같았다.
그는 길 건너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 죽립의 무인과 신호를 주고받은 뒤 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감 대인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역시 감 대인이에요!”
인상이 강한 중년인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내가 나란히 서서 내려오고 있었다.
인상이 강한 중년인은 제법 유서 깊은 북경 지역 상가(商家)의 가주였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내 쪽이 정이품 도어사를 맡고 있는 감택이었다.
감택의 뒤에는 이원승과 똑같은 복색을 갖춘 죽립의 사내가 둘이나 붙어 있었다.
감택은 중년인과 서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나눈 뒤 이원승이 있는 쪽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것을 보니 결론이 좋은 쪽으로 난 모양이었다.
이원승은 몸을 비스듬하게 돌려 감택에게 길을 터 준 채 야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경극단에 몰려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내가 갑자기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팔뚝이 굵고 어깨가 넓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원승은 바짝 긴장했다가 그가 감택에겐 별 관심 없이 다른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근처를 지나는 사람은 또 있었다.
샛노란 비단옷을 입고 살랑살랑 움직이는 기녀들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방향(芳香)과 볼록한 곡선을 그리는 뒷태가 두 눈을 사로잡는다.
이원승은 그녀들이 별다른 기색 없이 까르르 웃고 지나가자 다시 감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소심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잠시 조심해서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나았다.
감택은 웃는 모습 그대로 계단을 내려와 야시장에 들어섰고, 마차를 세워 두었던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 순간,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죽립의 보표가 다가왔다.
감택을 지키는 보표는 감택의 뒤에 시립해 있는 두 사람과 이원승, 그리고 길 건너편에서 망을 보던 사람까지 합쳐서 총 네 명이다.
이원승은 뒤는 나머지 세 사람에게 맡긴 채 감택의 세 걸음쯤 앞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는 이제 불과 오 장 남짓.
제법 인파가 한산해진 야시장에서 그 오 장 거리 내에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손에 커다란 왕만두를 들고 우적우적 씹고 있는 소년이 한 명, 함께 여행을 온 듯 주변의 노점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는 젊은 사내가 두 사람, 그리고 폭죽이라도 터뜨리려는 것인지 길쭉한 통을 하나 들고 연신 화섭자에 불을 붙이려는 연인이 한 쌍이었다.
이원승은 화섭자에 불을 붙이려는 연인을 신경 써서 주시했다.
폭죽은 언제나 신경을 분산시키는 원인이 된다.
폭약, 그 자체로도 무기가 될 수 있으며, 폭음과 불꽃으로 신경을 분산시킨 뒤 덤벼드는 암습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의 눈에 느릿한 걸음걸이로 걷는 탓에 아직도 시야에 보이는 한 떼의 기녀들과 등에 물지게를 지고 있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하인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리 큰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원승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연인을 계속 주시했다.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뒤에 있는 감택과 다른 보표들도 걸음을 늦추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들은 불이 붙지 않는 화섭자에 짜증이 났는지 화섭자를 집어 던지고는 함께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왕만두를 먹던 소년은 먹을 것을 다 먹고 멀리 떨어진 당과 노점으로 달려가 버렸으며, 근처를 구경하던 젊은 사내 둘은 살랑거리며 걷는 기녀들을 보고 흥이라도 돋았는지 기녀들을 쫓아 멀어져 갔다.
‘내가 너무 긴장했나?’
이원승은 자책하며 눈에서 힘을 좀 뺐다.
이제껏 암습 한 번 없었건만, 너무 과한 걱정을 한 모양이다.
마차까지는 이제 불과 다섯 걸음. 위협적인 요소도 다 사라진 판국에 걱정할 것은 없을 듯했다.
휘청―
‘어……?’
그런데 저렇게 호리호리한 몸으로 어떻게 물지게를 들까 생각했던 하인이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다리가 꼬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등에 지고 있던 물통에서 물이 넘쳐 주변에 뿌려졌다.
하인이 있는 곳은 이원승으로부터 한 걸음 앞.
자칫 뒤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원승은 물론이고, 뒤따라오던 감택의 몸에 물이라도 묻을 상황이었다.
“이봐, 조심하지그래.”
이원승은 이런 몸으로 어떻게 하인 일을 할까 싶을만큼 왜소한 체구에 연민을 느끼며 휘청거리는 물지게를 붙잡아 주었다.
철퍽.
이미 바닥에 제법 물이 고였는지 발밑에서 질척한 느낌이 들었다.
하인은 고맙다는 뜻인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원승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어……?”
입에서 경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코끝을 스치는 아릿하고 달콤한 향기, 그동안 무공을 익힌 세월이 무색할 만큼 휘청거리는 다리.
이원승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독……!!’
달콤한 향을 맡은 것과 육체가 마비된 것이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었다. 물지게에 담겨 있는 물에 독이 담겨 있을 거란 추측이 가능했다.
뒤쪽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보표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원승은 스스로의 육신을 점검했다.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고, 마치 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감각.
양귀비. 앵속류의 독이 분명했다.
진기를 끌어올려 독기를 밀어내려 했으나, 단순한 독이 아닌지 쉽사리 몸에서 빠져나가지를 않았다.
여전히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으려니, 눈앞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듯한 앙상한 체구의 사내가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휙― 회전했다.
촤앗―!
“안 돼!!”
이원승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으로 나선 보표 두 사람이 물지게에서 쏟아진 물을 맞아 버린 것이다.
“윽……!”
“큭……?!”
물을 맞은 보표 두 사람은 이원승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인은 바로 그 순간에 움직였다. 물지게의 지지대에서 길쭉한 검을 뽑아 들더니, 감택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든 것이다.
이원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마침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던 암살 시도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인의 손에 들린 것은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뾰족한 협봉검이었다. 보표들이 독에 당했음에도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눈빛이 너무나 냉정하고 치밀하다.
“크읏……!”
이원승은 이를 악문 채 강력한 의지로 독기를 이겨 내고 감택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보표들은 이원승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독에 당했던 보표 두 사람은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술에 취한 사람처럼 허우적대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 독에 당하지 않은 보표가 하나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도 영 못미더웠다.
쉬익―!
달려드는 하인은 마치 몸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몸놀림이 가볍기 짝이 없었다.
구름을 밟듯 땅바닥을 몇 번 박차더니, 순식간에 코앞까지 쏘아졌다.
그러면서도 검을 들고 있는 어깨와 자세는 미동도 없으니, 얼마나 강한 자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이원승은 다급해졌다.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맨몸으로 칼침을 맞아 줄 수는 없고, 어떻게든 맨몸 박투로 승부를 봐야 했다.
‘태을신수(太乙神手)!!’
수중에 검이 없이 맨손이 되고 보니 생각나는 것은 오직 종남에서 배운 그 무공뿐이었다.
왼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오른손은 허공에 크게 갈지자를 그린다.
그는 살수의 검을 오른손으로 잡아채면서 왼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때려 검을 빼앗을 요량이었다.
상황은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살수는 오로지 목표인 감택을 죽이는 것만이 목적인 듯 보표들에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휙― 찔러오는 검에는 결연한 살기가 부족했다.
이원승은 재빨리 양손을 허공에서 교차시켰다.
오른손으론 칼등을 잡아채 아래로 내리면서, 왼손으로는 상대의 손목을 올려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칼날이 손에 닿는 듯했던 순간, 눈앞에서 달려들던 살수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휙― 사라지더니,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치밀어올랐다.
“크윽……!”
이원승은 피가 솟구치는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꾹 누르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허공으로 뛰어오른 건지, 그의 어깨를 타 넘은 살수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전력을 다해 아래로 내리찍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
이원승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상대는 살수의 기술로서 절정에 오른 고수였다. 독을 쓸 만큼 철저하면서 검술 실력 또한 대단한 자라는 뜻이었다.
월봉 스무 냥짜리 보표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대였다.
“크앗……!”
펄쩍 뛰어내리는 살수의 일격에 감택의 앞을 막아섰던 마지막 보표는 가슴이 길게 베이며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그 뒤는 바로 감택이다.
감택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사, 살려……!”
당연한 일이지만, 감택의 애원은 살수에게 통하지 않았다.
“안 돼―!”
이원승은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 겨우 억눌러 두었던 독이 온몸에 확― 퍼져 버린 탓에 다리가 마음껏 움직여 주질 않았다.
살수는 이미 뒤로 쓰러지고 있는 마지막 보표를 발로 짓밟으며 허공에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야말로 ‘빛살만큼’ 빠른 속도로 검을 감택의 목에 찔러 넣고 말았다.
푸욱―!
“……!”
감택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내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 내며 무릎을 꿇고 뒤로 쓰러져 버렸다.
명 제국의 정이품 도어사인 감택이 북경의 야시장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내일쯤이면 도성 안이 난리가 나겠구나라고…….
이원승은 독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휘익―
살수는 목숨을 잃은 감택을 무심하게 내려다본 뒤, 검에 묻은 핏물을 허공에 한 번 털어 내고는 감택의 몸에 둥그렇게 뭔가 상처를 남겼다.
“꺄아악―!”
“으앗! 살인이다! 살인이야!”
주변에선 그제야 비명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스릉―!
이원승은 흐릿한 시선으로 잔뜩 몰려드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멀쩡한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감택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그때는 이미 살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의표를 찌르는 위장술로 갑작스레 나타나 목표를 유유히 격살하고, 이번엔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허…….”
이원승은 허탈하게 웃었다.
독은 효과가 강한 대신 일회성이었는지 서서히 몸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독에 취해 바닥에서 허우적대던 보표 두 사람도 비틀거리긴 했으나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 하는가.
이미 한 사람의 보표와 지켜야 할 사람이 모두 죽고 말았거늘.
“흑화보……!”
이원승은 감택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살수가 마지막에 새기던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무릎을 털썩 꿇고 신음을 흘렸다.
죽은 자의 가슴에 새겨진 한 송이의 꽃.
바로 호남제일살문 흑화보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 ☆ ☆
“뭐라? 도어사가 죽어?”
본래 남경을 포위하고 있는 명군의 진지에 있고 싶어 했으나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로 결국 북경의 자금성으로 돌아온 황제는 급박하게 날아온 보고를 듣고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예. 어제저녁 북경의 야시장에서 암습을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도어사에게는 내가 친히 내린 명령이 있었을 텐데?”
“그 명령을 수행하던 도중 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국자감(國子監)의 제주(祭州)가 어제 자신의 침실에서 죽었고, 육부(六府)의 관료 중 셋이 귀갓길에 암습을 받아 죽었다고 합니다.”
“……모두 한날에 죽었다?”
“예, 폐하.”
“흉수는?”
“시신의 가슴에 꽃을 새겨 놓은 점이나 암습의 방식을 볼 때 흑화보로 추정됩니다. 흑화보는 호남제일살문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두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흑화보? 그놈들은 분명…… 남경의 그자들과 한패라고 하지 않았나?”
“예, 폐하. 원의 잔당과 야합한 역적의 무리입니다.”
“호오, 그놈들이……!”
“폐하, 그뿐만이 아닙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황제와는 달리 백택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무심하고 차분했다.
황제의 곁에 있으려면 그는 항상 차분한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동창의 대정 태감과 금의위의 공보하 부장에게 들은 정보들을 담담한 목소리로 이어 나갔다.
“산서공가의 혼사행이 녹림에게 습격당했으며, 사천유가의 큰아들이 백주대낮에 길거리 폭한에게 습격당해 죽었습니다. 영무왕(永戊王)께서 이끄는 금주상단은 녹림의 무조건적인 습격과 상품의 탈취로 큰 손해를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인가?”
“예, 폐하.”
황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살수에 녹림이라……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그래서 대신들의 반응은?”
“상당히 동요하는 듯 보였습니다. 내각대학사인 이선장이 여론을 가라앉히고 있긴 하나, 대신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가진 권력에 비해 담은 쥐꼬리만큼이나 작은 자들이니.”
황제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죽거나 피해를 입은 자들은 모두 짐이 황실로 불러 밀명을 내렸던 사람들이다. 그걸 다 알고 있었다면 남경의 역도들에겐 꽤나 정확한 정보망이 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겠군. 관부라기보단 ‘그쪽’ 같아. 그렇지?”
“예. 무림 쪽의 정보망을 이용하는 듯했습니다.”
황제는 그가 앉은 태사의에 깊게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톡. 톡. 톡.
태사의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남경 공략은 어찌 되어 가나?”
“파강장군 원회에게 이만의 군사를 주었고, 지금도 각지에서 출자한 병력이 모이고 있는 중이나…… 아무래도 역부족일 듯합니다.”
“그런가.”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원회에게 남경 공략을 서두르라 지시하도록.”
“폐하! 남경은 능히 열 배의 병력도 막을 수 있는 요새입니다. 파강장군의 역량과 지금의 병력으론 역부족…….”
“하지만 원회는 지금 비어 있는 대장군의 자리에 후보로 올라 있지. 그렇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차기 명 제국의 대장군이 될 자라면 이 정도의 시련쯤은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백택은 거기서 황제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험…… 아니, 이건 축출이라 불러야 하는가?’
황제는 원회에게 과한 문제를 던져 주고, 그 결과에 따라 중용을 결정할 것이 분명했다.
남경 공략을 성공한다면 단번에 그 업적을 인정받아 대장군의 자리에 오를 것이고, 만약 실패한다면 원회는 반대로 엄청난 추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병사 이만을 담보로 차기 대장군의 자질을 시험하다니, 과연 폐하라고 해야 하는가.’
병사 이만의 목숨이 중요할지, 아니면 차기 대장군의 자질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지.
그 정도의 대범한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백택이 받아들이자, 황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곧바로 화제를 다음으로 넘겼다.
“역도들이 창궐한 이후, 지금까지 피해가 얼마나 되지?”
“……남경을 빼앗긴 것까지 감안한다면 그 피해는 막심합니다. 남경을 통과하는 상로(商路)가 모조리 막혔으니 국가의 상공업에도 지장이 크고, 남경에서 들어오는 조세가 명황실의 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올해의 결산 때는 삼 할 정도의 피해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삼 할이라…….”
한 해 국가 재정이 삼 할이나 피해를 입는다면, 그 수치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묵과할 수 없는 수치로군.”
황제는 결단을 내린 듯, 용안(龍眼)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작은 힘으로 큰 효과를 내는 것에 탁월한 놈들이다. 몇 안 되는 살수들을 이용해 황실의 대신들 전부에게 큰 공포심을 심어 주었고, 산발적으로 녹림들이 행패를 부려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며 대명 황실의 일에 방해를 놓는다. 참으로 간특한 놈들이야.”
“치시겠습니까, 폐하?”
“물론. 모조리, 단 하나의 후환도 남기지 말고 다 없애야 할 것이다. 하나하나 팔다리를 끊어 낸 뒤, 남경을 점령한 본진까지 일거에 쓸어 버려야 한다. 짐의 말을 알겠느냐, 백택.”
“예, 폐하.”
백택은 묵묵히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무림인이라는 자들 중에, 특히 살수 문파나 녹림도 같은 것들은 쥐새끼처럼 재빨라 발본색원을 하기가 쉽지 않을 테지.”
“황실 금의위와 동창이 힘을 합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폐하.”
“그야 그렇지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팔다리를 끊어 내는 것은 황실이 할 일이 아니다.”
“그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백택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세상천지의 수많은 지식. 거기에 대해보다도 깊은 황제의 내심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 저쪽이 무림강호의 인물들을 이용한다면 황실도 그들을 이용한다. 서로 잘 아는 상대끼리 싸우며 본진을 드러내면, 황실은 그때 모두를 한꺼번에 쓸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황제는 백택에게 명령을 내렸다.
현재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을 부르도록.
“청월루의 총관을 불러와라.”
☆ ☆ ☆
남경의 황성.
본래대로라면 문무백관이 공손히 예를 표하는 가운데 황제가 정무를 봐야 할 대전(大殿)이지만, 지금은 민초들을 다스리는 관리도, 황제도, 심지어 그들을 보필하는 환관이나 궁녀들마저 없었다.
높은 계단 위, 처참하게 박살 난 태사의가 지금 남경의 처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텐챠이는 부서진 태사의 앞에서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있었다.
허리는 꼿꼿이 세웠으나 한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다리는 바닥에 쭉 편 편안한 자세였다.
법도도, 양식도 없는 태도.
하지만 온몸에서 뿜어내는 태산과도 같은 기파가 감히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텐챠이는 강렬한 안광이 불타는 눈으로 계단 아래쪽 대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앞쪽엔 원의 삼대천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이 제각각 편안한 태도로 서 있었다.
하시르, 우르칸, 자이혼.
예전보다 더욱 강대해지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들의 뒤쪽에는 척 봐도 한인(漢人)인 다섯 사람이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수염을 길렀고, 어떤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졌으며, 어떤 사람은 우르칸에 못지않은 거구를 지니고 있다.
가진바 능력도, 특성도, 배움도 다 다른 자들.
각양각색의 그들에게도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무림강호의 정점이 십대고수라고 하였는가?
만약, 흑도나 사파의 마두들도 차별없이 평가를 받았다면 이들은 충분히 십대고수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비록 삼대천과 일천 명의 텐챠이 수호대에게 무릎을 꿇고 반란에 참여했으나 그들은 가진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자들뿐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자.
우르칸 못지 않은 거구에 사납기 이를 데 없는 더러운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상체엔 가봉도 하지 않은 호랑이 가죽을 통째로 두르고 있고, 허리춤엔 보통 사람들은 양손으로 들기도 힘들 대부(大斧)를 양쪽으로 두 개나 차고 있었다.
자이혼의 외날 도끼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그의 도끼는 양쪽으로 날이 달린 쌍날부라는 점이 달랐다.
타고난 신력에 마도(魔道)의 무공까지 합해져 무쌍의 파괴력으로 쌍부를 휘두르니 천하에 막을 자가 거의 없었다.
광살부마(狂殺斧魔) 함대웅(含大熊).
그 이름은 흑도에서 공포의 상징이다.
함대웅은 본래 수로녹림삼십육채였던 호걸들의 집합소에서 ‘산적이면 산적다워야지!’라고 외치며 당시 녹림맹주였던 녹림대호(綠林大豪) 장수범(張垂範)의 머리를 쪼개고 녹림을 장악했으며, 수로맹의 총표파자였던 장강용왕 추묵환과 대등한 일장 격투를 벌인 뒤 맹에서 탈퇴해 버렸다.
무림십대고수인 장강용왕 추묵환과 대등한 무력을 지닌 거마(巨魔)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는 그를 따르는 난폭한 녹림도들을 규합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전까지 녹림의 산적을 만나면 어느 정도 합당한 통행세만 내면 통과시켜 주는 것이 관례였다면, 광살부마가 녹림왕이 된 뒤로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전부 빼앗는 게 당연시되어 버렸다.
물론 나름대로 소신있는 산적이나 지방의 허약한 산채들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겠지만, 적어도 광살부마가 있는 광호채(狂虎埰)는 그렇게 행동했다.
물론 종종 정파의 무인들이나 허약한 관군들이 그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으나 역부족.
그들은 광호채에 오르는 족족 모조리 머리가 쪼개진 채 녹림의 거름이 되고 말았다.
광살부마는 강하다.
그걸 부정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아무도 두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던 광살부마.
그런 그가 지금 역도들의 소굴인 남경의 황성에 있으며 텐챠이와 삼대천을 강자로서 인정했으니, 아마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놀랄 것이다.
광살부마는 살벌한 눈빛으로 대전에 모인 나머지 네 명을 쭉 둘러본 뒤 걸걸한 목소리로 시비를 걸 듯 말했다.
“보아하니 평소에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놈들뿐이군. 그동안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면상들을 내밀었나?”
그 말에 나란히 서 있던 나머지 네 명은 모두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광살부마가 강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나머지 넷 중 그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 척 장신의 건장한 체구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팔자수염을 깔끔하게 기른 중년인이 미간을 좁힌 채 앞으로 나섰다.
“산적질이나 하던 놈이라 그런지 말투가 저속하군. 말조심해라, 광살부마. 이곳에 너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착 가라앉은, 심상치 않은 목소리였다.
“뭣? 이런 때려죽일……!”
“죽인다고? 정말로 똥오줌도 못 가리는 작자로군.”
“이놈이……!”
광살부마는 손을 허리춤의 도끼로 가져갔으나 계속해서 손잡이만 건드릴 뿐, 뽑아 들지는 않았다.
자리가 자리이기도 했거니와, 중년인의 말대로 이곳에 광살부마보다 아래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하수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혈방주(沙血房主), 네놈을 지켜 보겠다.”
광살부마는 으르렁거리듯이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광살부마는 성질이 폭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다. 싸울 자리와 상대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다.
중년인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비웃음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는 일단 참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다. 보복을 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적사왕(赤蛇王) 맹욱(孟旭).
강북 지역의 흑도 방파는 사혈방이 다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대하고 유서 깊은 흑도의 명문이 바로 사혈방이었다.
관리하고 있는 사업체의 숫자만 해도 수백이 넘었고, 넓은 상권에서 나오는 자릿세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맹욱은 그 사혈방을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완전히 물려받았고, 그 뒤 흑도 특유의 피튀기는 상잔과 권력 싸움을 모조리 이겨 낸 뒤,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는 마침내 무림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리며 별호에 왕(王)의 칭호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무림십대고수.
그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니었다.
무공만 강해서는 안 된다. 광살부마나 이곳에 있는 다른 세 명이 그렇듯이 흑도나 사파로 완전히 낙인찍혀 마인(魔人)으로 분류가 되면 절대로 무림에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림에서 무공이 강한 한 승려가 갑자기 주화입마로 정신이 돌아서 십팔나한을 모조리 도륙했다고 해 보자.
그럼 무림인이 그자를 십대고수로 쳐주겠는가?
아니다. 그건 그냥 마두다.
간악하고 사악한 마두.
무림인들이 눈에 띄는 족족 척결해야만 하는 악인으로 분류가 된다.
그러니 흑도 방파를 물려받은 맹욱이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사혈방의 거대한 재력과 지난 이십 년간 호협한 일을 하며 부단히 쌓아온 노력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적사왕 맹욱은 사실 자신은 이 자리에 있는 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는 뛰어난 문인에게서 제법 글도 많이 배웠고, 그 뒤 무림십대고수에 들기 위해 정당한 일을 많이 해서 정사 양도의 고수로 추앙받았다.
여기 있는 ‘완전한 마두’들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녹림에 삼호방, 흑화보까지. 전부 악랄하기로 유명한 곳 아닌가. 그나마 황산파가 정사 양도에 가깝지만…… 쯧. 사무혁, 그놈만 아니었어도……!’
맹욱은 문득 다시 드는 생각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단오 때 벌어졌던 항주의 혈사.
거기서 벌어졌던 황제의 암습 시도에 사무혁이 일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얼마나 놀랐던지…….
사무혁은 홍화객잔의 총관이고, 홍화객잔은 사혈방의 사업체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무림에 식견이 있는 자들 중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무혁이 역모에 가담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역모에 털끝만큼이라도 관련이 되었다간 구족이 멸하는 험악한 세상이다. 이미 황실의 입장에서 사혈방은 역모를 꾸민 사악한 흑도의 무리가 되어 있었다.
맹욱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주장해 봐야 소용없었다.
무림십대고수로서 쌓은 명성 따윈 역범의 입장이 되자 어린애가 만든 모래성만큼이나 쉽게 무너졌다.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 온 흑도의 거파는, 그렇게 한 사람의 과오로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만 것이다.
분노한 맹욱은 사무혁을 일 장에 때려죽이기 위해 황급히 찾아다녔으나 그는 이미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도주해 버린 뒤였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맹욱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
하지만 이미 역모의 무리로 낙인찍힌 사혈방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하거나, 아니면 정말로 역모의 무리가 되어 관에 반기를 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때 그의 선택을 도운 것이…… 일천 기병을 이끌고 사혈방을 급습한 삼대천이었다.
‘대단했지. 삼대천이란 자들…… 각자가 십대고수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자들뿐이다. 게다가 그 무지막지한 기병들까지 합쳐지면 역천(逆天)도 꿈은 아니야.’
명 황실을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 지역을 제패해 소국(小國)을 세우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힘이었다.
맹욱은 광살부마를 제외하고 그와 함께 서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을 쳐다봤다.
정사 양도의 문파인 황산파(黃山派)의 장문인, 태양검군(太陽劍君) 종조기(宗彫起).
호남제일의 살수 문파 흑화보(黑花堡)의 보주, 무영사신(無影死神).
강서성의 흑도 명문 삼호방(三虎房)의 방주, 파갑수(破鉀手) 강추산(姜錘山).
겉으로만 봐선 구파의 무인처럼 정명하게 생긴 장년인, 얼굴과 몸을 온통 검은색 천으로 꽁꽁 감싸서 감춰 놓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 키는 작고 왜소하지만 쭉 찢어진 눈에서 범상치 않은 살기를 흘리는 중년 사내.
누구 하나 만만한 자가 없었다.
무림강호는 넓고 세상에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지만, 이렇게나 강한 자들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각자의 무위만 해도 능히 십대고수와 자웅을 겨룰 수 있으며, 가지고 있는 세력은 구파일방이 사력을 다해 덤비지 않는 한 도저히 꺾을 수 없을 만한 위치를 구축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건, 이런 자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을 따르게 만들어 버린 텐챠이와 삼대천의 능력이지.’
삼대천의 능력만으로도 경악을 했건만.
맹욱은 그들이 ‘장군’이라 부르며 지도자로 인정하는 텐챠이를 처음 봤을 때 시간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일찍이 본 적 없는 기질.
패왕의 자질에 태산처럼 우뚝 서서 주변을 모두 자기 중심의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듯한 대단한 존재감마저 갖춘 자였다.
능력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있다면 삼대천 같은 자들이 윗사람으로 모시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일단 조금 지켜보자.’
맹욱은 광살부마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을 확인한 뒤, 팔짱을 끼고 서서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황제가 앉는 태사의의 앞.
텐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겠군.”
텐챠이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그렇게 말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힘이 가득한 목소리.
유창한 한어였다.
“본래는 넷이었으나 이젠 다섯이 되었다. 이름은 오왕(五王)이다.”
뜬금없이 느껴지는 말에 나란히 서 있던 다섯 사람이 제각각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시르, 부연 설명을 해 주도록.”
“예, 장군.”
텐챠이보다 한 계단 아래쪽에 있던 하시르는 빙글 몸을 돌렸다. 쓰고 있던 삿갓을 살짝 위로 올리자 까무잡잡한 얼굴과 별빛처럼 맑은 눈빛이 드러났다.
“여러분들은 모두 무림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입니다. 명에선 흑도나 사도로 불리며 경원시 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저는 여러분이 십대고수들보다 오히려 더욱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하들의 세력 또한 구파의 아래가 아니지요.”
맹욱과 광살부마를 포함한 다섯 명은 서로를 흘깃 쳐다봤다.
“명에선 비록 범죄자로서 배척을 받지만, 원 제국에선 아닙니다. 대초원은 강자들을 그 무엇보다도 존중합니다. 세상은 강자가 지배해야 합니다. 무림이든 관이든, 가장 강한 자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황산파 장문인, 태양검군 종조기가 멋들어지게 기른 하얀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관직이라도 주겠다는 뜻이오?”
“물론입니다.”
망설임이 가득한 태양검군의 질문에 하시르는 즉답을 하였다.
다섯 명의 안색이 확 변화했다.
“그저 그런 관직이 아닙니다.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새롭게 세워지는 원 제국에서 여러분은 왕(王)의 직위를 얻어 오왕(五王)이라 불리게 되실 겁니다.”
“허……!”
“여러분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담담한 하시르의 말에 다섯 사람은 격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왕(王)이다.
남아로 태어나 한 번쯤 왕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
무림에서 불러 주는 단순한 왕(王)이란 별호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인정하는 진정한 왕의 직위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사내로서 가슴이 뛰는 일이냔 말이다.
“파하하핫!”
가장 먼저 광살부마 함대웅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럼! 그래야지! 이 함대웅 님이 하는 일인데, 적어도 왕의 칭호 정도는 줘야지!”
광살부마처럼 크게 드러내진 않았으나, 태양검군, 무영사신, 맹욱 역시도 입가의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무림(武林)과 관(官)의 일체화. 저는 이것을 강호관직론(强豪官職論)이라 부릅니다. 두 세계가 분리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강한 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게 당연한 일이며, 그건 관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세울 새로운 제국의 다섯 기둥이 되어 주십시오.”
하시르의 설명이 끝나자 대전 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무겁고 부정적인 의미의 침묵이 아니라, 들뜨고 열의에 찬 침묵이었다.
왕이란 칭호가 준 열기가 아직 가시질 않은 것이다.
하지만 마냥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다섯은 무림에서 온갖 세파와 암계(暗計)를 뚫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자들이었다. 그들이 익히 알고 있듯 세상일이란 그리 만만치 않다.
모든 일엔 항상 반대급부가 있는 법.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이득이 있으면 손해가 있다.
힘에 눌려 반쯤 어거지로 한패가 되었고, 그 뒤에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것에 혹해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약속했던 부귀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가도 분명히 크지 않겠는가.
“질문이 있소.”
사혈방주 맹욱은 하시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왕이라…… 좋소. 하지만 그렇다면 왕을 다스리는 황제는 누구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오?”
맹욱의 질문은 나머지 네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시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황제는 없습니다.”
“뭐…… 요?”
“원 제국의 종통은 쿠빌라이 가문이 되어야 하나, 그 후손은 이미 끊기고, 그나마 남은 혈통은 이미 서방(西方)에서 독자적인 나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장군께서 쿠빌라이 가문의 유지를 이으셨으니, 황제는 아니나 새로운 나라의 지배자가 되실 겁니다.”
맹욱은 잠시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그의 식대로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다.
“어찌 됐든 저분이 지배자가 된다는 뜻이군.”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나라는 어떤 식의 모습이 되는 것이오? 황제가 없음에도 여전히 제국이오?”
“제국이 아닙니다.”
하시르가 이어서 대답하려 했으나, 텐챠이가 그의 발언을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말하지.”
“예, 장군.”
“황제는 없으나 원 제국의 유지는 잇는다. 그 유지가 이어지는 곳은 이곳 남경이며, 무림과 관의 일체화를 중심 사상으로 세웠으니 곧 이 땅의 방식에 맞춰야 한다는 뜻.”
하시르는 나란히 서 있는 다섯 사람과 한 사람씩 눈을 마주쳤다.
텐챠이의 눈길을 받는 순간, 다섯 사람은 제각각 전율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천명이 땅에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맹(盟)이다. 맹세이며 또한 같은 뜻을 함께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북쪽 대초원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름은 북천맹(北天盟). 나는 맹주가 될 것이며, 삼대천인 하시르, 우르칸, 자이혼은 나를 보좌하는 호법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다섯은 맹을 지탱하는 다섯 명의 왕, 오왕(五王)이 될 것이다. 호법과 오왕은 대등한 발언권을 가진다.”
북천맹주.
그리고 삼호법과 오왕으로 이어지는 지배 구도라는 뜻이었다.
“으음……!”
“크흠……!”
머릿속에서 그 구도가 실현된 모습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던 다섯 왕은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할 수 있다.
텐챠이와 함께라면.
텐챠이, 삼대천, 일천 명의 정예 기병을 시작으로, 그들 다섯 왕의 힘이 합쳐지면 명 황실이라도 뒤집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명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 그들에게 텐챠이는 힘찬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림이라는 강대한 힘을 가진 집단을 무방비하게 내버려 두었으며, 관과 무림을 분립시키는 기묘한 사상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런 허점을 누구도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림인들은 어째서 권력을 노리지 않았는가? 살수 문파의 살수들은 능히 황제나 다른 고관들을 없앨 능력이 되고, 이름난 문파에선 웬만한 장수보다도 훨씬 강한 무력과 일당백의 무인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관을 습격하지 않는가? 어째서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는가?”
“……!!”
“나는 하시르를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고, 마침내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잠시 말이 멈춘 사이 다섯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텐챠이의 말을 최고조로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강호관직론에 이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이 가진 사상을 완전히 뒤엎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인의 힘을 두려워해 무림인 중에 관료를 뽑지 않는 명의 견제! 명 황실의 잔인한 보복을 두려워한 무림인들의 고정관념! 그 두 가지가 합쳐져서 이러한 기묘한 공존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니오? 자칫 관군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황실의 보복으로 삼족이 멸할 텐데…….”
태양검군 종조기가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그는 곧 무시무시한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 듯한 텐챠이의 눈을 마주 봐야 했다.
“큭……?”
어마어마한 기세.
태양검군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그것이 당연한가!”
텐챠이는 분노하고 있었다.
“한 성(城)에 배치된 병력이라고 해 봐야 이름난 무림 문파가 급습하면 충분히 도륙할 수 있는 수준이다. 수뇌부만 갈아치울 거면 그 정도도 필요없지. 무림엔 그럴 능력이 되는 문파가 적어도 수십 개. 그렇다면 수십 개의 성에서 일제히 관청을 습격하고 병권을 장악하면 쉽게 끝나는 문제가 아닌가!”
“……!!”
다섯 명은 모두 경악하였다.
그런 식의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하, 하지만 그 뒤엔 큰 보복을…….”
“일단 각 성, 그리고 주(州)를 장악하고 나면 명의 대부분의 토지가 손에 들어오는 셈이다. 그 뒤에 황실에 뭐가 남지? 북경을 지키는 군사? 국경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일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남경을 제압한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황실을 지키는 금의위와 동창? 무림문파가 모두 힘을 합치면 그 정도는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텐데?”
“……!!”
“내가 듣기로 이미 무림엔 무림맹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패권을 노리지 않다니…… 하나같이 멍청한 자들뿐이다.”
대단한 사고(思考)였다.
이렇게 듣고 보니 명 황실의 힘에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황실의 힘이 무조건 절대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명 제국의 백성들 중에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틀을 깬 생각’인 것이다.
‘듣고 보니…….’
‘확실히 일리가 있다. 실제로 남경도 이런 식으로 점령하지 않았는가.’
‘명 황실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가진 힘으로도 충분히 황실은 전복시킬 수가 있어.’
오왕들은 제각각 깊은 상념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칭칭 감고 있던 무영사신이 마치 쇳가루를 입힌 듯 거친 목소리로, 하지만 극도의 공경을 담아 말문을 열었다.
‘무영사신이, 말을……?’
‘게다가 어째서 이렇게 공손하지?’
흑화보의 보주는 실어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영사신은 말이 없기로 유명했다. 때문은 다른 오왕들은 놀라서 무영사신을 쳐다봤다.
“정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이해한다 해도 명분을 중요시해 절대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말했다.”
텐챠이는 무영사신의 지적에 순순히 수긍했다.
“이 계획의 유일한 문제점이 그것이다. 정파. 나에게 있어선 명 황실의 무방비함만큼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자들이다. 어째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 않으려고 하는가. 어째서 굳이 무림이란 좁은 틀에 갇혀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가. 어떻게 스스로 무림이란 곳의 정의를 지키는 자라 자부할 수 있는가.”
“……!”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나, 그 힘만큼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오왕이 필요하다.”
텐챠이의 시선이 다시 오왕들을 향했다.
“흑도와 사파라 불리는 자들을 모조리 끌어모아라. 힘의 논리에 따라 강자에게 관직을 수여한다고 하면 모여드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당금의 명 황제는 민심을 많이 잃었지. 어쩌면 정파에서도 합류하려는 자들이 생길지 모른다.”
“아……!”
“새로운 바람! 새로운 시조! 새로운 사상!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작만 하면 그 추종자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무림인들은 스스로의 힘을 쓸 곳을 찾고 있는 자들이다. 자신들을 진정한 지배자로 인정해 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왕들은 지금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사상은 새로운 파벌을 만드는 법.
텐챠이의 말대로 강한 무공을 지닌 자에게 강한 권력을 주는 세상이 온다면 무림인들의 입장에선 그보다 좋은 조건이 없을 것이다.
여인은 사랑에 목숨을 바치고,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이다.
정사마(正邪魔)를 불문하고 사내라면 그 누가 자신의 무(武)를 인정받고 싶지 않아 할까.
하지만 정파라는 기득권층은 쉽사리 인정하지 않으려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싸움이 된다.
북천맹이 모은 무림인들과 정파의 무림인들의 싸움이다.
작게는 무림의 패권을 두고.
크게는 명 제국의 존폐가 걸린 싸움이 될 터.
‘사상 초유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무림인에 의한 세상의 지배. 멋지군. 충분히 목숨을 걸 만한 사상이야.’
‘텐챠이의 말 그대로야. 이런 사상이 퍼져 나간다면…… 그에 목숨을 거는 무인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터.’
그 순간, 오왕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난세(亂世)!
명 황실은 지배권을 잃고, 각지에서 힘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단순히 무림의 문파가 아니라, 관(官)의 권력마저 노린다.
그리고 그런 난세의 끝에는…… 무림인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자, 여기까지가 새로 만들 나라의 모습이다. 질문이 있나?”
“…….”
“없다면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들은 북천맹의 의지를 따르겠는가? 진정한 오왕(五王)이 되어 세상을 바꿔 보겠는가?”
텐챠이는 냉엄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만감이 교차하여 침묵을 지키는 다섯 사람.
그중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무영사신이었다.
“맹주의 뜻을 받들어 왕이 되겠습니다. 북천맹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흑화보의 모든 살수들이 맹주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무영사신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하는 오체투지의 예를 보였다.
황제에게나 보이는 극도의 공경.
무영사신은 북천맹과 텐챠이를 향해 주종의 예를 보인 것이다.
“한 가지만 묻겠소. 그 힘의 논리는…… 맹주와 호법에게도 적용이 되나?”
건들거리는 말투로 묻는 것은 광살부마 함대웅이었다.
텐챠이는 냉엄한 눈빛으로 광살부마를 마주 보며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맹주가 맹의 논리를 지키지 않아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자신이 있다면 언제든 덤벼라.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 순간 맹주가 될 터. 하지만……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덤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절대적인 자신감과 강렬한 기파.
텐챠이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고. 언제든 주인의 목을 벨 심정으로 단련하는 자가 아니라면 이 텐챠이를 따를 자격이 없는 거라고.
“파하핫! 걸작이군! 최고야! 최고!”
광살부마는 텐챠이가 최고라는 건지, 북천맹의 방식이 최고라는 건지 모를 말투로 연신 그 말만을 외치더니,
“맹주의 뜻을 받듭니다. 이 광살부마, 오왕의 일원으로서 북천맹에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산적놈들을 다 마음껏 쓰셔도 좋습니다.”
놀랍게도 광살부마는 무영사신과 똑같이 오체투지의 예를 취하며 공손하게 충성을 맹세했다.
“허헛! 이 나이에 충성을 맹세하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소!”
그다음엔 태양검군 종조기였다.
그는 무영사신의 옆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양검군 종조기가 북천맹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음지의 모든 염상(鹽商)들과 황산파는 항상 북천맹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어느덧 충성을 맹세한 것이 세 사람이 되었다.
이제껏 별말 없이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삼호방주는 호랑이 세 마리가 그려진 검은색 무복을 입고, 왜소한 체구를 움직여 텐챠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왕이 되면 그 밑의 약한 것들은 모두 나의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오? 약탈, 수탈…… 모든 것이 가능하오?”
삼호방주 강추산은 날카로운 눈매를 더더욱 살벌하게 치켜뜨며 물었다.
“물론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 삼호방의 강함만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면 영지(領地) 내의 일은 간섭하지 않겠다.”
텐챠이의 대답에 삼호방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삼호방주 강추산, 북천맹과 맹주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삼호방의 녹을 먹는 흑도의 모든 낭인들이 북천맹의 힘이 될 것입니다.”
앞선 자들과 똑같은 오체투지의 예였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
사혈방의 방주이자 한때 무림십대고수였던 적사왕 맹욱이었다.
“으음……!”
맹욱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북천맹은 천하를 지배할 수 있겠소?”
텐챠이는 이 역시도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왕이 제 역할만 잘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알겠소.”
맹욱은 육 척 장신의 체구를 움직여 텐챠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혈방주 적사왕 맹욱, 북천맹과 맹주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사혈방의 이름 아래에 있던 모든 상인(商人)들과 흑도의 호걸들이 북천맹을 따를 것입니다.”
텐챠이는 제자리에 당당하게 선 채 그들 다섯 명의 극진한 예를 받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북천맹의 발호!
강호관직론의 전파!
세상을 뒤엎을 변화의 시발점인 것이다.
화아악―!
텐챠이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주변을 짓누르고, 강한 힘이 실린 목소리가 대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왕은 각자 남경 밖으로 나가 세력을 불리고 그 사상을 전파하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죽여라. 근처의 정도 문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너뜨리며, 관료들을 죽이고 성의 관청을 빼앗아라. 힘이 모자란다면 여기에 있는 삼대천과 일천의 수호대가 그대들을 지원해 줄 것이다.”
두근― 두근―
북천맹 다섯 왕의 심장이 거세게 약동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일성(一城)의 패주가 되어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북천맹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대들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
북천맹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한 다섯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각 강렬한 기파를 뿜어냈다.
남경의 황궁 대전에서 이루어진 북천맹의 발호.
텐챠이와 삼대천.
그리고 오왕의 이름이 세상에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