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二章 ― 객촌약동(客村躍動)
항주는 대도시다.
서호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인파는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고, 동쪽으로는 상해, 북쪽으론 남경이 바로 지척에 위치해 있으니 거기서 더욱 끝을 모르고 발전해 대륙 최고의 유흥 도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장기린은 항주로 향했다.
여전히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도성은 지척에 있는 남경이 역모의 무리들에게 장악당했어도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그리움과 아릿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땅이다.
시전에서 물건을 팔고 흥정하는 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고, 거리에 늘어선 화려한 전각들은 너무나도 익숙하며, 조금 더 중심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해가 지기 전까진 조용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마 해가 지고 나면 흥청거리려는 사람들이 홍수가 난 것처럼 모여들어 지금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장기린의 눈에 깊은 감정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지난 시간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것은 다양한 감정으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런 복잡한 심정이 되어 장기린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 포기하지 않는다.’
휘연의 마지막 말.
아니, 마지막 말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그녀는 다시 살아날 테니까.
그녀의 부탁대로 장기린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특히 평범한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은 모조리 사용할 셈이었다.
저벅저벅.
장기린은 항주의 화려했던 골목을 지나 허름하고 어두운 도성의 외곽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선 두 사람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추룡과 대석.
적룡기마대에서 인상이 강하기로 따지면 최고를 달리는 두 사람이다.
추룡은 다부진 체구에 사내다운 각진 얼굴, 거기에 얼굴을 크게 십자로 가로지르는 상처까지 있다. 대석은 그에 비해선 순한 인상이지만 백 장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칠 척의 거구를 지녔다.
그런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을 뒤에 달고 다니니, 장기린에게 거리의 시선이 온통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그런 시선들을 모른 체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다 왔다.”
마침내 장기린의 걸음이 멈춘 곳은 거지 움막이나 다를 게 없는 판자촌이었다.
추룡과 대석이 잠시 흥미를 보이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내 판자촌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관심을 끊고 묵묵히 장기린의 뒤에서 시립했다.
입을 꾹 다문 그들에게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들은 이곳에 따라오면서 호위무사로서 행동해 달라는 장기린의 당부를 받았던 것이다.
추룡과 대석은 그 부탁대로 지금까지 철저하게 호위무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추룡, 대석.”
“예.”
“예에, 대형.”
다부진 대답과 살짝 어눌한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죽여서는 안 된다. 명심해.”
장기린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에게 중요한 사실을 주지시켰다.
끼이익―
장기린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그들을 향하던 시선의 주인들이 거친 경첩음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여섯 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전후좌우를 포위한 채 삐딱하게 서서 다리를 건들거리는데, 가까이서 보니 하나같이 살벌한 인상들뿐이었다.
나이는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중반까지 다양했다.
흉터가 있는 것은 기본이요, 일부러 소매를 걷어 드러낸 팔에는 무슨 뜻인지 읽을 수 없는 기묘한 묵자(墨字)까지 새겨 놓았는데, 거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외모에서 역력히 보이는 자들이었다.
스윽―
갑자기 나타난 자들이 주변을 포위하자 추룡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호위무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장기린보다 반걸음 정도를 앞에 나선 모습.
대석은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겨 장기린의 뒤를 막아섰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을 포위한 사내들이 장기린에게 달려들 방위는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거치적거리는군.”
장기린은 그들을 쭉 한 번 훑어본 뒤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말했다.
“뭐? 이 자식이! 너, 뭐야? 어디서 온 놈이야?”
“보아하니 어디서 좀 굴러먹던 놈인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는 거야? 항주 객촌이 만만한 곳인 줄 알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두 명이 째진 눈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객촌(客村).
그렇다 이곳은 객촌이었다.
항주에 화려한 유흥 도시로서의 외면이 있다면, 그 뒤에 파생된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객촌이었다.
기루에서 일하는 기녀들은 일을 하다 보면 애를 배게 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기녀들의 처지라는 게 대부분 빚이 있어서 팔려왔거나, 아니면 기루에서밖에 일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애를 키울 형편이 안 되니 대부분 독초를 먹고 애를 떼어 내려 하지만, 그것마저 안 된 기녀들은 어쩔 수 없이 애를 낳고…… 결국 일을 하기 위해 그 아이를 버리게 된다.
항주에 있는 기녀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
그러니 버려지는 아이들의 숫자도 한 해에 백 단위에 달했다.
객촌은 바로 그런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혈혈단신으로 태어나 세상의 모진 풍파를 바람막이 하나 없이 버텨 내야 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아칠과 아팔이 이곳 출신이라고 했지.’
장기린의 시선이 주변을 포위한 사내들 너머, 반쯤 열린 판잣집의 문 뒤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이쪽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보통 가정 같으면 아직 어미 품에 갇혀 살 나이인데 객촌의 아이들은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노련하고 독기가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여자아이들은 등 뒤에 갓난아이들을 업고 있기도 했다.
애가 애를 업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칠과 아팔은…… 그러고 보면 이런 곳에서 자란 것치고는 정말로 바르고 곧게 컸군.’
남궁휴에게 듣기로는 아칠과 아팔은 남궁세가로 왔다가 무당파의 어떤 도인의 눈에 띄어서 정식 제자가 되었다고 했다.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칠과 아팔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장기린의 시선이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객촌의 아이들을 돌아, 다시 눈앞에서 건들거리고 있는 파락호들에게로 돌아왔다.
“추룡.”
“예.”
“따라와.”
그 말과 함께 촛불이 꺼지듯 제자리에서 훅― 사라져 버린 장기린.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멍하니 굳어 버린 사이, 그는 어느새 포위망을 넘어 객촌의 중심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하!”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마냥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움직임이었다.
추룡과 대석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너나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셋째 형, 대형이 더 강해진 모양이우.”
“내 이럴 줄 알았지. 그새 또 뭔가 크게 변했을 줄 알았어.”
두 사람은 더욱 강해진 장기린의 모습에서 호승심과 함께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한편,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추룡은 장기린을 쳐다보았다.
장기린은 이미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을 지나고 있었다.
“따라오라고 했지?”
추룡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씩 웃었다.
퍼억!
“컥……!”
다섯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청년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혔다. 추룡의 발끝이 창처럼 꼿꼿하게 세워져서 청년의 복부를 찌른 것이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다.
이번엔 반대쪽 발로 청년의 턱을 빡! 하고 강렬하게 올려차더니, 마치 표범이 움직이듯 날렵하고 화려한 몸동작으로 청년의 전신에 온갖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퍽! 퍼퍼퍽! 퍼퍽!
단단한 주먹이 옆구리를 파고들고, 무릎으로 가슴을 찍었으며, 화려하게 회전한 발차기가 다리와 등허리에 쏟아졌다.
청년이 어떻게든 몸을 비틀고 팔꿈치를 들어 막아 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맨손 백타.
추룡이 언월도 황룡(黃龍) 다음으로 자신있는 분야가 바로 맨손 박투였던 것이다.
앞에 있던 청년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주변의 청년들이 기겁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추룡은 바위가 갈라지는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더니, 객촌의 청년들 못지않게 건들거리는 태도로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짜식들아, 싸울 상대를 잘 보고 덤벼야지.”
“이, 이런……!”
나머지 청년들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만큼 분노했으나, 우두머리였던 청년이 대번에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셋째 형, 너무 낭비가 심한 거 아니우? 그런 놈한테 뭐 하러 공격을 스무 번이나 하는 거유?”
얼굴만큼은 순박한 농촌 청년인 대석의 말에 추룡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한 방에 쓰러뜨리면 충격이 덜하잖아.”
“무슨 충격 말이우? 한 방에 쓰러뜨리는 게 더 아프지 않수?”
“끄응, 그 충격 말고. 이렇게 한 놈을 제대로 패 놓으면 주변 놈들이 쫄아서 못 덤빈다, 이거야.”
“아, 그런 거였수?”
대석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마치 자신도 추룡처럼 한 놈을 패 놓겠다는 듯이 보여서, 추룡은 황급히 대석을 뜯어말렸다.
“야야야! 하지 마, 하지 마.”
“응? 왜 그러는 거유?”
“어설프게 따라 하지 마. 네 힘으로 나처럼 패면 분명 죽는다.”
죽는다.
그 실감나는 단어에 주변에 있던 청년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대석의 거대한 덩치와 바위 같은 주먹에 스무 대나 맞으면 정말로 죽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을 듯했던 것이다.
“가자고.”
“음, 알았수.”
대석은 아쉬운 듯 큼직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추룡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청년들은 움찔거리면서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경계…… 공포…….’
장기린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객촌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삼십 장 정도를 걸으니 판자촌의 중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판자촌이지만 객촌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일 년에 백여 명씩 새로운 아이들이 버려지는데 규모가 작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객촌의 인원 대부분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일자리를 찾아 밖으로 나가지만, 그렇다 해도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항상 객촌에 상주하며 살고 있었다.
객촌의 아이들은 성장하면 대부분 유흥가 쪽에서 일을 하게 된다.
여아(女兒)는 미모가 괜찮으면 기녀, 아니면 하녀나 부엌데기 일을 하게 되고, 남아(男兒)는 몸이 튼튼하고 싸움을 잘하면 파락호들의 조직으로, 그게 아니라면 객잔의 점소이나 하인으로 취직한다.
실제로 현재 항주 유흥가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곳 객촌 출신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있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영향력이 크다는 뜻.
즉,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항주에서 객촌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객촌의 아이들에겐 부모가 없는 대신 그들끼리의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객촌에서 자라 사회에 나가 일을 하게 되더라도 꼭 객촌에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가지고 온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되면 또다시 번 돈의 일부를 객촌에 환원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아무리 악랄하기로 소문난 파락호라도 매달 기일이 되면 꼬박꼬박 자기가 번 돈을 객촌에 가지고 왔다.
객촌이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뿐인 고향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긴, 나도 다르다고 할 수는 없겠군.’
장기린은 문득, 자신도 이 객촌의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부모의 얼굴을 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부모의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 갓난아기였을 때 흐르는 강물에 버려졌고, 그걸 거지 왕초가 주워서 기르다 어딘가에 팔았으며, 그 뒤에 갖은 고생을 하다가 공손 대장군에게 거둬졌다.
그게…… 다였다.
공손대장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곳 객촌의 아이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털썩―
장기린은 객촌의 중심에 만들어져 있는 큼직한 의자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회의를 하기 위해 만든 듯 텅 비어 있는 공터에 유일하게 있는 의자였다.
장기린이 의자에 앉자 추룡과 대석이 뒤따라와서 양옆에 시립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스물…… 서른?”
장기린은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의 숫자를 세었다. 지금 나온 자들은 아까 만난 젊은 청년들과는 달랐다.
이곳 항주의 ‘진짜 파락호’들.
치열한 싸움을 겪을 만큼 겪었고, 항주 암흑계를 은퇴했거나 또는 객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마을에 남은 자들인 것이다.
이들이 객촌을 지키고, 지배하는 힘이었다.
객촌의 어린아이들은 모두 이자들의 명령을 따를 것이 분명했다.
“웬 놈들이냐!”
이번에 나선 서른 명의 우두머리는 머리가 허옇게 센 반백의 노인이었다.
나이는 육십쯤 되었을까.
정갈한 비단 화복에 자단목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젊었을 적엔 한 가락 했겠다 싶은 장대한 골격에 험상궂은 인상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버텨 내지 못하고 허리가 약간 굽은 상태였다.
장기린은 노인의 그 복장만으로도 그가 이 객촌에서 범상치 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알아보고 시비를 걸어야 하지 않나?”
한데 장기린은 반말을 썼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온대를 썼던 평소와 비교해보면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나른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선 산중대호의 그것과도 같은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이놈……!”
노인은 잠시 그 무거운 위압감에 눌려 있다가 표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우리 애들 중 하나를 피 떡으로 만든 놈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가 있어!”
“상대를 볼 줄 모르고 덤비니 그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가르쳤어야지.”
“이런 쳐 죽일 놈이……!”
“손님으로 온 거다. 차라도 한잔 내 오지그래?”
“보자보자 하니까, 이제 보니 미친 놈이었구만!”
노인은 기가 막힌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분노의 빛이 엿보였다.
장기린은 그런 노인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틀려먹었군. 객촌의 촌장 방개(方蓋)는 한때 항주 뒷골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절정고수이며 객촌에 대한 정이 깊어 온갖 이권이 밀집해 있는 항주에서 객촌을 이끄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전혀 아니야.”
“……!”
“눈치도 없고, 오만과 아집마저 보인다. 곱게 늙어야지, 노년에 그렇게 살면 쓰나?”
노인, 객촌의 촌장 방개는 그 말을 듣자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미리 많은 것을 조사하고 찾아온 자다.
그제야 그는 상대가 범상치 않은 의도로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들을 사려고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방개의 깊은 노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객촌에는 기녀로 쓸 여아를 사기 위해, 혹은 세가의 하인으로 쓸 만한 남아를 사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 자들은 은근히 힘을 과시하기 위해 꼭 문지기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세가의 위세를 보이기가 일쑤.
방개는 험상궂은 두 호위를 데리고 온 장기린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래를…… 하러 온 거요?”
“거래? 아니. 난 그저 사람을 하나 만나러 왔을 뿐이야.”
“만나러 왔다면 누구를……?”
“그걸 내가 말해 줄 필요가 있나?”
기껏 온말을 사용하며 대우를 해 주었으나 계속해서 장기린의 냉대에 부딪치자 방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마침내 참다 못한 노화를 터뜨리려는 순간, 얼음보다도 더 차가운 장기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오면서 본 아이들은 잘 먹지 못해 왜소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붙잡고 물어보니 하루에 한 끼 정도를 겨우 먹는 모양이더군. 이상한 일이야. 내가 알기로 객촌 출신의 사람들이 보내 주는 돈을 합하면 여기 있는 아이들 전원에게 세 끼 밥을 다 주기에 충분할 텐데.”
“……!”
주변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객촌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장기린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던 요점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다.
방개는 크게 당황하여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다가 변명을 꺼냈다.
“내가 왜 변명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객촌 출신의 사람들이 보내 주는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아니. 내가 알고 있는 한 명이 이곳에 매달 보내는 돈만 해도 여기에 있는 아이들 전원을 한 끼 이상 먹일 수 있던데.”
“그, 그럴 리가 없…….”
“게다가 종종 아이들을 기루나 하인으로 보내면서 받는 돈도 있지. 그것도 액수가 크던데, 만약 결백하다면 그 많은 돈이 어디로 융통되는지 설명할 수 있나?”
방개는 잠시 눈빛이 흔들리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외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봐라.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야.”
“큭……!”
방개는 장기린이 가리키는 사람들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처음엔 장기린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던 객촌의 사내들이 방개에게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개는 흥분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뭘 쳐다보는 거냐, 이 배은망덕한 놈들!”
“…….”
“내가 그동안 어떻게 객촌을 운영했는데! 내 덕분에 그동안 네놈들이 다 먹고산 거야! 그걸 잊은 거냐, 이놈들아!”
의구심을 드러내던 사람들 중 절반가량이 그 말에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개가 객촌에 애정을 갖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온갖 이권들 사이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방개 덕분에 그들이 이만큼이나 먹고살 수 있던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항주에서…… 객촌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기나 해? 무식한 것들. 조금만 돈이 된다 싶으면 달려드는 늑대 같은 놈들이 수두룩한데다, 썩어빠진 관청은 무슨 트집거리를 잡아서 돈 뜯어낼 방법은 없나 궁리만 하고 있단 말이다! 내가 그 돈을 날 위해 쓴 줄 알아? 그런 놈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느라 다 썼단 말이다! 그렇게 안 했으면 객촌은 한참 전에 없어졌어! 알아?!”
방개가 노안을 부릅뜨고 외치자 주변 사람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방개가 객촌을 이끌기 시작한 지 벌써 삼십 년 가까이가 되었다.
이 중에 어떤 이는 태어날 때 방개를 보고 자랐고, 장성한 지금도 방개가 객촌을 지배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객촌에 뿌리내린 방개의 지배력은 그 정도로 역사가 깊은 것이었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하지만 그런 방식은 객촌의 식구들에게나 통하는 일.
장기린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럼 그 비단 화복과 비싸 보이는 지팡이는 뭐지? 진정으로 객촌을 위한다면 그깟 치장을 할 돈마저 굶고 있는 아이를 위해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이건, 고관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필요한 것으로…….”
“추룡! 대석!”
장기린은 방개의 말을 끊으며 두 사람을 불렀다.
“예, 대형.”
“예에, 큰형님.”
추룡과 대석, 두 사람이 장기린의 호명에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저 늙은이를 무릎 꿇려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쓰러뜨려.”
“옛!”
장기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는 방개.
그와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 중 절반 정도가 추룡과 대석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들은 나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뒤로 튕겨 나갔다.
뻐억!
“커헛……!”
번개같이 뛰어오른 추룡의 발차기에 턱이 날아가고, 대석이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을 휘두르자 두세 명씩 공중을 훨훨 날았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조리 쓰러뜨린다.
애초에 무기를 가져오지도 않았지만, 가지고 왔어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가 죽이지 말라고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대신 손속은 최대한 간결하고 치명적으로 휘둘렀다.
상대들 중엔 날붙이를 가지고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기에 방심할 수가 없던 탓이다.
나름대로 항주에서 이름난 파락호들이었기에 아무리 추룡과 대석이라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 새끼!!”
추룡이 단도를 들고 덤비는 놈의 턱을 날려 버린 순간, 처음부터 방개의 근처에 서 있던 중년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사내의 손에는 날카로운 만도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안정된 자세.
도를 휘두르는 품새에서 허점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웃기고 앉았구만.”
추룡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만도를 든 사내, 제법 실력이 출중한 자였다. 그 말인즉, 추룡에게도 맨손으로 싸우기엔 부담이 된다는 뜻이었다.
추룡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손바닥만 한 단도를 하나 주워 들었다. 방금 쓰러진 남자가 들고 있던 무기였다.
상대의 실력은 추룡못지 않지만 그래도 ‘싸움’이라는 것은 실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추룡은 자세를 낮추고 차분하게 때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쉬이익―!
그러다 마침내 날카로운 만도가 그의 목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위험천만한 순간, 추룡은 번개같이 단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칼날의 중심을 때렸다.
까아앙!!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만도의 방향이 위로 휙― 꺾이며 만도를 잡고 있던 양손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흡……!”
놀란 사내의 눈빛이 선명하게 보이고, 시간이 느려진 듯 흑백의 세계가 명멸했다.
그 순간, 추룡의 눈이 번뜩였다.
앞으로 쿵! 하고 내딛는 발걸음.
휘두른 단도를 회수하지 않은 채 곧바로 허공에서 역수로 바꿔 쥐고 그것을 그대로 옆구리에 드러난 허점에 꽂아 버렸다.
푸욱!
“캇……?!”
사내는 그 상태로도 어떻게든 만도를 휘두르려고 부들부들 손을 떨었지만, 결국 만도를 놓치고 뒤로 물러섰다.
단도가 꽂힌 곳은 옆구리보다 위, 날개뼈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다치면 팔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들어지는 치명적인 요혈이 바로 그곳이지만 평상시엔 팔에 막혀 있어 공격하기가 어려운 급소였는데, 추룡은 허점이 드러난 찰나와 같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단도를 꽂아 넣은 것이다.
신기에 이른 싸움 실력.
항상 가진바 이상의 결과를 내는 싸움의 재능이었다.
“끄…… 으……!”
추룡은 게다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늑대처럼, 한 번 잡은 승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집요함도 가지고 있었다.
툭!
비틀거리는 상대의 다리를 발로 걷어찬 뒤,
빠악!!
관자놀이에 가볍게 쥔 주먹을 꽂아 넣어 완전히 정신을 끊어 버렸다.
“끄르르…….”
사내는 옆구리에 단검이 꽂힌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본래대로라면 쉽게 승부를 낼 수 없을 만큼 강한 상대였으나, 찰나를 가르는 재능의 차이가 이런 일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추룡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까불고 있어. 별것도 아닌 게.”
그는 습관적으로 바닥에 침을 퉤, 뱉은 뒤 아연실색한 모습의 방개를 쳐다봤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데다 값비싼 자단목 지팡이가 심적인 동요만큼이나 격렬하게 흔들렸다. 방개는 방금 쓰러진 사내를 상당히 믿고 있던 모양이다.
“이, 이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긴 객촌이다. 항주 뒷골목을 주름잡는 파락호들은 거의 다 내가 키워 냈어!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씩 웃는 얼굴 그대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방개에게 다가간 추룡은 비단 화복의 목덜미를 콱 붙들고는 노인의 무릎 뒤를 사정없이 발로 차 버렸다.
“으헛……!”
퍽! 소리와 함께 방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노인을 때리는 건 추룡의 성격에 안 맞는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예외로 했다.
장기린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불쌍한 애들의 밥 먹을 돈을 빼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나쁜 인간이지 않은가.
“이놈! 이거 놔라! 이런 쳐 죽일 불한당 같은 놈이…… 커컥!”
추룡은 시끄럽게 구는 방개의 뒷목을 손으로 꽉 누른 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영감. 누가 누구보고 불한당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나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거야. 조용히 안 하면 목을 부러뜨려 버릴 줄 알아.”
“……!!”
온몸이 찌릿찌릿할 만큼의 살기가 유형화되어 날아왔다.
거기다 실제로 추룡의 악력이 목을 조여 오기 시작하자 방개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움츠렸다.
퍼억! 퍼억!
후우우웅―! 후우우웅―!
“으아악……!”
그사이, 추룡의 뒤쪽에선 대석이 괴력을 이용해 날뛰는 중이었다.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한 사람을 마치 도리깨를 돌리듯이 허공에서 붕붕 돌리더니, 옆에서 질린 얼굴로 쳐다보던 객촌의 사내들에게로 휙 던져 버렸다.
사내들 서넛이 날아오는 힘을 버텨 내지 못하고 볏단이 베이듯 우르르 넘어졌다.
맨 처음 멱살을 잡혔던 사람은 입에서 거품을 물고 기절한 채였다.
“또 덤비면 허리를 부러뜨려 버린다!”
으름장을 놓는 말투는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시무시한 괴력을 뽐낸 대석에게 감히 맞설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으음……!”
사내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무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라 수많은 경험이 쌓여야만 가능한 관록마저 갖추고 있었다. 옆에서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던 자들도 모골이 송연해져서 절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개.”
“으……!”
그런 소란스러움의 틈을 장기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이제 차 한잔 가져다주지? 난 손님으로 온 건데.”
닥치는 대로 때려눕혀 놓고 이제는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을 터.
방개는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으나 뒷목을 짓누르는 추룡의 손에서 악력이 점점 강해지자, 결국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차! 차 한잔 가져와!”
방개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니, 뒤쪽에서 구경하던 허름한 복색의 인물들이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제 시작인가……. 빨리 왔으면 좋겠군.’
장기린은 의자에 앉은 채 객촌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좀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객촌의 촌장인 방개가 무릎을 꿇고 있고, 싸우는 와중에 얻어맞고 쓰러졌던 사내들 역시도 정신을 차린 뒤엔 방개의 옆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지금껏 촌장만이 앉을 수 있던 중앙 광장의 의자엔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 앉아 있으며 그 옆엔 외지에서 들어온 인상이 강한 사내 두 명이 서 있다.
객촌의 사람들 입장에선 천지가 뒤바뀐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무림문파에서 온 걸까?”
“왠지 무림인은 아닌 것 같지 않아?”
“아니면? 어디서 온 건데?”
“글쎄…….”
“무림문파야, 그것도 대단한. 등 아저씨는 ‘구파’ 출신이라고. 혹시 마교나 서장 밀교가 아닐까?”
“하긴, 등 아저씨를 이기려면 그 정도는 되야겠지?”
만도를 들고 싸우다가 추룡에게 당한 사내가 등 아저씨였다.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하고 있던 소년들은 열정에 들떠 얼굴을 붉혔지만, 혹시라도 들릴까 싶어 장기린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났다.
무릎을 꿇고 있던 방개와 사내들이 서서히 몸을 비틀면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할 무렵, 주변에는 객촌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광장으로 나왔는지 수백 명이 몰려들어 북적거리고 있었다.
장기린은 아까 방개의 명을 받은 누군가가 가져다준 찻물을 천천히 홀짝거리고 있었다.
시선은 정면 어딘가에 둔 채, 옆에서 보기엔 정확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장기린의 양옆에는 추룡과 대석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힘든 모습도, 지겨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멈춘 듯, 장기린과 마찬가지로 정면 어딘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왔다.”
그때, 장기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변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객촌의 입구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객촌의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니, 광장에 다 모여 있고? 큰일이라도 있었어?”
차분하면서도 맑고 신비로운 목소리였다.
장기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자 대번에 객촌의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려 우르르 몰려들었다.
“언니!”
“누나!”
양쪽으로 인파가 갈라지며 한 여인이 광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단정한 백색의 무명옷. 평범하고 값이 저렴한 옷이지만 그 여인이 입고 있으니 왠지 모를 기품이 감돌았다.
마치 명망이 자자한 가난한 학자 집안의 부인과 같은 느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평범한 옷차림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빛을 발했다.
특이하게도 앞머리를 눈썹 위에서 일자로 잘라 버리고 나머지 머리는 얌전하게 틀어 올렸는데, 새하얀 피부와 아주 새카만 머리카락의 대비가 눈에 띠었다.
여성치고는 짙은 눈썹에 쌍꺼풀이 진한 눈매, 끝이 뾰족한 콧날과 유난히 붉은 입술이 합쳐지니 한 번 보았다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미모였다.
“언니, 비녀는? 비녀는 사 왔어?”
“누나! 오늘은 당과야! 당과 사다 준다고 약속했어!”
아이들은 그녀가 찾아오는 것이 익숙한 듯, 친근하게 달라붙어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른들 뺨치게 조숙해 보이던 아이들이었으나 그녀를 만나자 그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리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그래, 다 기억하고 있어.”
차분하면서도 친절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을 만들어 냈다.
“여기. 다 가져왔어.”
“꺄아―! 역시 언니가 최고!”
“우왓! 당과다! 고마워, 누나! 잘 먹을게!”
뒤따라오던 호위가 보따리를 내려놓으니 그 안에는 비녀나 장신구, 당과나 만두 같은 먹거리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환성을 지른 아이들이 ‘잘먹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있는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분위기였다.
더 가져가려고 하거나 다른 아이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물건들을 향해 관심을 빼앗기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파 사이로 틈이 생기자, 의자에 앉아 있던 장기린과 새로이 나타난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굳어 있다가,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장기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타박. 타박.
그녀의 앞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알아챈 것이다. 장기린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군지.
“장…… 객주님?”
어딘가 몽환적이면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오랜만이야.”
장기린은 그런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
검소한 옷차림으로 객촌을 찾아온 여인.
그녀는 청월루의 간판기녀이자 항주 금선로 최고의 기녀로 손꼽히는 일견즉통 낭화였다.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검소한 옷차림으로 찾아온 그녀를 보자 지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방개의 옷차림이 더더욱 거슬렸다.
낭화는 장기린을 눈앞에 두고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리는 듯 천천히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치맛단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천녀가 장 객주님을 뵙습니다.”
“……왜 이러는 거지?”
“변고가 일어났을 때 연락도 없으셨고, 도움도 요청하지 않으셨지요. 천녀는 스스로 생각했던 만큼 객주님과 친분이 있지 않았던 듯합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격식을 차리는 낭화.
자세히 보니 그녀는 살짝 샐쭉해진 얼굴이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섭섭했던 모양이다.
“하하하!”
장기린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추룡과 대석이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기린이 ‘크게 웃는다’는 광경은 생소한 것이다.
장기린은 빙긋 웃으며 낭화를 바라봤다.
낭화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섭섭함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이런 식의 장난으로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을 해소하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사과하지. 내 잘못이었어. 낭화에게도 말을 하고 갔어야 했는데.”
“객주님……!”
낭화는 청량한 느낌을 풍기며 차분하게 웃는 장기린을 보며 심적인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객주님, 변하…… 셨군요?”
“그런가?”
“네. 많이 변하셨네요.”
낭화는 일견즉통이라 불릴 만큼 직관력이 뛰어난 여인이다.
단순히 살기를 지워 낸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장기린의 속에 있는 내면의 변화를 알아채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아……?’
예전의 장기린은 낭화를 보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면이 있었다.
눈을 되도록 안 마주치려 하거나, 정면에서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려 했다.
그건 곧 그녀에게 마음이 흔들린다는 뜻이고, 그녀의 매력이 통한다는 뜻이었기도 하기에 내심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의 장기린은 달랐다.
단순히 외향적인 느낌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
차분한 태도가 아프도록 마음을 찔렀다.
‘뭔가…… 변했어.’
낭화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꼭 누르며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런데……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낭화는 장기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십여 명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앞에 있는, 객촌의 촌장 방개를 응시했다.
“크으……!”
방개는 낭화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낭화는 객촌 출신들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객촌을 잊지 않고 매달 꼬박꼬박 들러서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갖다주고, 그걸로도 모자라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이나 장신구, 먹거리 등을 종종 가져오는 여인이었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어.”
“네? 말씀하세요, 장 객주님.”
“네가 매번 객촌에 갖다주는 액수가 얼마지?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공개를 해 주었으면 하는데.”
새카맣고 진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낭화는 그 말만으로도 지금의 사정을 다 짐작한 듯 보였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의구심을 갖고 있던 부분.
단순히 고관대작들에게 바치는 뇌물 때문이라고 하기엔 객촌에서 사라지는 돈의 액수가 너무 컸고, 그 때문에 아이들이 잘 못 먹는 모습이 마음에 계속 걸렸던 것이다.
“저는…… 매달 은자 백 냥을 객촌에 내고 있어요.”
“으, 은자 백 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함을 하며 화들짝 놀랐다.
청월루 최고 기녀.
게다가 항주 금선로에서 손꼽히는 여인이니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객촌에 은자를 백 냥씩이나 주는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웬만한 농민 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은자 두 냥이다.
은자가 백 냥이라면…… 객촌의 식구들 전원이 하루에 세 끼씩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그, 그 외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그걸론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항주목이랑 지부대인에게 바쳐 온 돈만 해도……!”
“추룡.”
장기린이 신호를 보내자 호표(虎豹)가 사냥감을 덮치듯 펄쩍 뛰어오른 추룡이 곧바로 방개의 뒷목을 손으로 콱 붙잡았다.
“크힉!”
방개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목을 움츠렸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 낭화만큼 돈을 내는 사람들도 몇이나 된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아이들이 굶어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아. 게다가 진정으로 객촌을 생각한다면…… 아이들을 굶기기 이전에 입고 있는 그 비단옷이랑 값비싼 지팡이부터 팔아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장기린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 정확한 핵심을 찔렀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객촌의 식구들도 불신에 가득한 눈초리로 방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개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낭화.”
“네?”
“이곳 객촌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욕을 채우지 않은 채 다스릴 만한 사람이 있어?”
“아…….”
낭화는 별반 망설이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오상(吳翔), 오 아저씨가 있어요. 과시를 통과해 나랏일을 했고, 지금은 은퇴해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계신 분이죠. 검소하시고 객촌을 진심으로 아끼는 분이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됐군.”
장기린은 주변에다 대고 물었다.
“오상이라는 사람이 객촌의 촌장으로서 적당하오? 그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소?”
“……!!”
설마 장기린이 의견을 물을 줄은 몰랐는지 사람들은 잠시 우물쭈물했으나, 이내 ‘오상이라면 믿을 만하지’라든가, ‘오 선생님이라면 잘해 주실 거야’라는 긍정적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잠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던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대 촌장은 오 선생이 하는 것이 좋겠소.”
“좋아요!”
“좋습니다!”
“와아―! 새로운 촌장님이다!”
주변이 시끌벅적하게 달아올랐다.
그 누구도 방개의 몰락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래서 정치란 민심(民心)이란 말이 나온다. 단순히 많이 배우고 힘이 강한 자가 다스려야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지지.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때에만 지도자로서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 이이…… 배은망덕한……!”
방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계속해서 배은망덕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초심을 잃은 채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힌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낭화를 지나쳐 방개의 앞으로 다가간 장기린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들 중 하나가 사용하던 검을 뺏어 들고 방개를 겨눴다.
스릉―
“흡……!”
마치 도사처럼 청량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나, 그 근본인 장기린은 만 단위의 사람을 죽인 전장의 악귀였다.
검을 겨누고 있음에도 무심하다.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음에도 겉으로는 아무런 살의도 드러내지 않는다.
살기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오히려 그렇기에 공포스러운 면이 있었다.
직접 두 눈이 마주친 방개는 바닥이 없는 무저갱(無底坑)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온몸에서 자유의지가 사라져 버리는 듯한 무력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짙은 절망감.
“히익……!”
입에서 절로 비명이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개는 시선을 내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는다.
정말로 죽는다.
장기린의 눈을 보자 방개는 죽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무슨……?!”
방개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감춰 두었던 돈을 다 내놓아라. 그럼 살려 주지.”
“아…….”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내놔야 한다. 그럼 여기서 계속 살든 다른 곳으로 가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방개를 죽여 버리면 부패를 척결했다는 뿌듯함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동안 숨겨 둔 돈을 다 토해 내게 만들어야 한다.
방개를 응시하는 장기린의 눈빛이 점점 더 강한 빛을 띠어 갔다.
“으, 으으……!”
방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 광장 옆에 단풍나무 뿌리 사이에…….”
“알았다.”
장기린은 만도를 들고 싸우다 추룡에게 당해 쓰러졌던 사내를 불렀다.
“등 씨라고 했던가?”
“……나를 말하는 거요?”
“당신이 나무 밑을 파 보시오. 진실을 직접 확인해야지.”
아이들에게 등 아저씨라 불리던 그는 잠시 장기린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개를 쳐다보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가 몇몇 아이들이 갖다준 삽을 들고 단풍나무 밑의 뿌리 사이를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깡!
“음……!”
땅을 파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삽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삽을 내던지고 손으로 흙을 파내자 웬만한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가 있었다. 가장자리 쪽의 흙을 더 파내고 뚜껑을 들어냈다.
그러자,
“아……!”
“우와……!”
순간, 사람들의 눈이 부시게 할 만큼 많은 은전들이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다……?”
“세상에, 천 냥은 되겠어. 이런 돈을 놔두고 애들을 굶기고 있었던 거야?”
“아니지, 반대야. 그동안 애들을 굶기면서 이런 돈을 번 거야.”
사실을 확인하자 생겨나는 것은 끝없는 분노.
모두의 날카로운 시선이 방개에게로 향했다.
“큭, 그 돈은 내가 객촌을 새로 지을 땅을 사기 위해……!”
“우우―!”
“변명이다! 집어쳐!”
“애들은 먹이면서 돈을 모았어야지!”
군중들의 반응이 험악하자 방개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사이, 장기린은 항아리 속의 은자가 아니라 다른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군. 그렇게나 죽고 싶나?”
“……?!”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모조리 꺼내 놔야 살려 준다고.”
차분하면서 냉랭한 목소리에 방개의 몸이 움찔 경련했다.
“무, 무슨 소리인지……?”
“다섯을 세지. 그 안에 숨겨 둔 것을 모조리 꺼내 놓지 않으면 베겠다.”
장기린은 검을 높이 들어 올리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다섯.”
“자, 잠깐!”
“넷.”
“아니, 정말로 숨긴 건 없어. 이게 전부…….”
“셋.”
“어, 없다니까!”
“둘.”
“그, 그게……!”
“하나.”
“……그, 그 뒤에! 단풍나무 뒤쪽에도 항아리가 더 있다!”
장기린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방개가 장소를 말하기 전에는 검을 내려칠 거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방개는 마침내 마지막 비밀을 꺼내 놓고 거친 숨을 헉헉, 내쉬었다.
주변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저거 말고도 숨겨 둔 돈이 더 있었다고?”
사람들은 이제 분노보단 허탈함이 더 큰 듯했다. 그들은 방개의 말대로 단풍나무 뒤쪽을 파 보았고, 그곳에서 앞서 묻혀 있던 것과 똑같은 항아리를 하나 더 발견했다.
그 항아리는 앞의 것보다는 조금 비어 있었다.
“더 없나?”
“어, 없다!”
“사실인가?”
“그래, 사실이다!”
장기린은 방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군.”
“큭……!”
방개는 돈을 빼앗긴 것이 억울한 듯했지만, 그를 노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시선들 속엔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던 십여 명의 사내들과 등씨까지 섞여 있었다.
그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객촌을 이끌고, 객촌을 위해 희생하던 방개는 이런 인물이 아니었거늘.
긴 세월과 나태함이 이렇게 사람을 변질시켜 놓은 것이다.
‘실망스럽군. 그나마 지금이라도 곪은 부위를 도려내서 다행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도와준 사람이…… 저 남자.’
추룡과 싸웠던 남자, 등모각(鄧模刻)은 방개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장기린을 복잡한 심정으로 쳐다봤다.
처음엔 타지에서 온 불한당인 줄 알고 싸움까지 걸었건만, 오히려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그 덕분에 객촌의 부패를 없앨 수 있었으니 앞으로 끼니를 굶는 아이들은 없어질 터였다.
“당신.”
“……나 말이오?”
그때, 장기린이 그를 지목했다.
“그렇소. 당신이 앞으로 그 돈을 책임지시오.”
“잠깐, 지금 뭐라고…….”
“큰 돈을 보았으니 그릇된 욕심을 가지는 사람도 나올 터. 그걸 지키려면 힘이 필요할 것이오. 객촌에선 당신이 가장 강하니, 당신이 지키시오.”
등모각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난 마지막까지 촌장을 따랐던 사람이오. 그런 나에게 돈을 맡기겠다는 거요?”
“지금은 따르지 않으니 괜찮소.”
“……!”
“그렇게 따지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촌장을 따랐지. 그러니 그건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가 욕심을 가지면…….”
“그럴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니 맡기는 것이오. 아이들이 당신을 거론하며 안타까워하는 걸 봤소. 그런 인망을 얻으려면 평소에 스스럼없이 아이들을 대하며 아껴 줬을 거라 생각하오.”
장기린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등모각은 그들에게도 확실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상이라는 사람과 함께 그 돈을 관리하시오. 전장에 돈을 맡겨 두는 것도 좋겠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돈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한다면 앞으로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을 것이오.”
등모각과 오상.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하면 객촌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장기린은 다시 시선을 돌려 전대 촌장이 된 방개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자는…….”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라고 말하며 객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히익……!”
등을 돌린 장기린은 방개가 겁에 질려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를 들었다.
“잡아!”
“쫓아!”
그리고 그를 쫓아 우르르 몰려드는 군중들의 소리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군웅들은 그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장기린은 거기서 관심을 끊어 버렸다. 이다음은 객촌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다. 그가 할 일은 다 끝난 것이다.
“아아악―!”
그의 귓가로 방개의 비명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