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86화 (69/686)

第八十三章 ― 무림난세(武林亂世)

쪼르륵―

백색의 찻잔을 채우는 찻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듯한 옅은 갈색이었다.

알맞게 우려낸 농도, 적당한 물의 온도까지, 차를 제대로 끓이려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 장기린의 앞에 놓인 차는 끓인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는 정갈한 작품이었다.

“맛있군.”

“아직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차를 끓여 준 사람이 약간의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끓여 준 사람의 정성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어.”

“……그런 말씀도 할 줄 아셨나요?”

“자주 하는 말은 아니야.”

“그 말, 자주 듣고 싶네요. 쏟아붓고 싶은 정성이 많이 남아 있으니 자주 찾아와 주세요.”

장난스런 농담 속에 그를 향한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다. 장기린은 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찻물을 입에 살짝 머금었다.

전해져 오는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온도의 물.

그 속에서 쌉싸름하면서도 달큰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향기가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역시, 맛있어.”

“기루에서 배우는 것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에요. 다도(茶道)라는 건 깊이가 있죠. 배우다 보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요.”

“글쎄, 그럴까?”

“무슨 말씀이시죠?”

“도(道)는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법이지. 같은 다도를 배워도 낭화처럼 도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 거야.”

“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낭화는 대단하군. 딱히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녀로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빈 잔에 찻물을 다시 채워 넣는 낭화의 손이 조금 떨렸다.

장기린은 정말로 많이 변했다.

사별삼일괄목상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난 이백 일간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던 것인지.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이렇게 도를 깨달은 도인처럼 능수능란한 말솜씨라든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는 점들이 낭화에게는 너무나 놀라웠다.

‘거인이야. 거인이 되었어. 이젠 일견즉통이란 이름을 버려야겠어. 장 객주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보이지가 않아.’

일대 종사를 논할 만한 그릇이 되어 버린 장기린.

그녀는 그런 장기린에게 더욱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왠지 멀어져 버린 듯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게 아까우시면 데려가 주세요. 제 꿈은 단란한 가정에서 집안일을 하는 거랍니다.”

“…….”

상당히 노골적인 발언이었건만, 장기린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계속 이런 식이다.

그녀가 때론 은근히, 때론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장기린은 묵묵부답의 목석이 되어 버린다.

낭화는 그런 장기린이 야속했으나, 겉으로 그 심정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장 객주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낭화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풍운객잔이 무너지고, 장기린과 그 식구들이 실종된 지 이백 일 만에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녀를 찾아온 건…… 안타깝지만, 그녀를 보고 싶어서는 아닐 터였다.

“낭화.”

“네.”

“청월루의 총관과 철우의 정체를 말해 줘.”

“……!!”

낭화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단정하게 일자로 자른 흑단과도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짙은 봉목이 흔들렸다.

“어째서…… 제가 알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일견즉통이라 불리는 여인이 낭화 아니던가?”

“…….”

“낭화는 나에게 말했지, 어째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그런 말은 도와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야. 낭화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던 거겠지.”

“맞…… 아요.”

낭화는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큰일을 준비하고 있어.”

“어떤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남경. 황실에 남경을 되찾아 줄 생각이야.”

“……!”

낭화는 또 한 번 놀랐다.

하루에 이렇게 몇 번씩이나 크게 놀란 적이 이전에 있던가 싶을 만큼 계속해서 장기린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남경을 되찾겠다니…… 설마, 그 원의 잔당들이 거병했다던 역도들을 물리치겠다는 소리신가요?”

“그래, 맞아.”

“세상에……! 어째서…… 혹시, 풍운객잔을 습격한 자들이 그들인가요?”

낭화는 역시나 일견즉통이란 이름을 가질 만한 여인이었다.

짧은 단서만 가지고도 장기린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려는 건지를 추리해 냈다. 게다가 낭화는 거기서 한 가지를 더 끌어 냈다.

“하지만 객주님은 단순히 복수 때문에 남경을 뺏지는 않으실 거예요. 뭔가를 얻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이 다 알 만한 공적을 쌓아 이뤄야 할 일이 있으신가요?”

장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떤……?”

“휘연이 중상을 입었어.”

“……!!”

“내가 과거에 쌓아 둔 원한 때문에 당했지. 신의라 불리는 자에게 치료를 부탁했으나 특별한 약재가 없다면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다고 하더군. 나는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서 황실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을 부상으로 받아야만 해.”

낭화는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렸으나,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다.

장기린의 그 말만으로도 내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던 것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진 소저, 너무하네요. 그건 너무 치사하잖아요. 그렇게 다쳐 버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기나요?’

휘연이 다쳤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여인으로서 드는 아쉬움과 야속함이 더욱 컸다.

휘연은 크게 다치는 대신 장기린의 흔들림없는 마음을 얻은 것이다. 낭화에겐 그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부러웠다.

‘게다가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남경을 탈환한다니,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세상을 뒤엎을 각오까지 하는 남자…… 이 세상에는 없어요. 진 소저, 정말 부럽네요.’

그녀는 휘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객잔에서 마치 쟁탈전을 벌이듯 장기린을 두고 은밀하게 싸웠다. 순수하면서 귀엽고, 마치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장기린을 품어 줄 수 있는 여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장기린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의동생으로 삼고 싶은 여인.

그 순수함에 이끌려 자신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휘연과 유치하게 다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젠 부럽고 질투가 난다.

더 이상 뺏어 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장기린의 마음을 빼앗아 간 것 같으니 쓰린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낭화의 입에선 그녀의 그런 심정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백 총관님과 철우 공의 정체,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그 이외에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어요.”

“낭화…….”

“진 소저를 살려야죠. 위험한 건 걱정되지만, 그럴수록 제가 더욱 도와야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장기린으로서도 그 정도로 무조건적인 호의는 예상치 못한 듯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낭화는 우울한 기색을 지워 버린 채, 평소의 차분하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연적인 휘연을 돕는 일이다.

즐거울 리가 없지만,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장기린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녀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백 총관님과 철우 공의 정체는…….”

천천히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청월루의 비밀.

그 놀라운 진실에 장기린은 숨도 쉬지 못하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 ☆ ☆

“장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기린은 낭화와 헤어지고 도착한 금선로의 한 객잔에서 임춘삼을 만났다.

악양루의 하오문 점주였던 사람.

장기린이 검선과의 수련을 끝내고 나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며, 그에게서 도움이 되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오?”

장기린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한 지점의 점주라는 직책은 결코 가볍지 않다. 때문에 한 번 그 자리를 맡으면 대부분 죽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장기린은 당연히 이곳에서 하오문의 ‘항주 지점’ 점주를 만날 거라 예상했지, 설마 임춘삼을 다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문주님과 총타의 결정입니다. 앞으로 장 대인에 관한 문제는 제가 다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잠깐, 그 말은…….”

“항상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가능한 한 장 대인의 행로를 따라가려 합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 입구에 파란 연등이 달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시면 저나 제가 지시를 내린 사람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드릴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임춘삼은 매우 공손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제발 따라갈 수 있게 해 달라는 듯한 분위기에 장기린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할 것까지는…….”

“장 대인께서 벌이시는 일은 작게는 가족의 복수지만, 크게는 나라를 구원하는 영웅의 행보입니다. 당연히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수? 영웅?”

“예, 장 대인. 이씨세가의 오백 명을 없애고, 남궁세가에서 남궁무회, 그리고 위지가와 사마가의 가주가 죽은 건 대인의 위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장기린은 말 그대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정보에 밝다는 문파가 세 곳이 있다.

하오문. 개방. 동창.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검교들을 이용한 동창의 힘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하오문과 개방의 힘은 사흘만 주어지면 대륙 끝에 있는 작은 어촌의 소식을 알 수 있을 만큼 신속하고 방대했다.

장기린은 하오문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몰래 일을 처리했던 이씨세가의 일과 남궁세가 내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모까지 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오문의 진가를 잠시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대인!”

눈썹이 꿈틀거리는 장기린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임춘삼은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할 일이 아니오. 대단하군.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소.”

“대인, 송구하오나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저희 하오문뿐만이 아닙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오?”

“이씨세가의 오백 명이 인적이 드문 관도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뭔가를 준비하듯 무인들을 모으며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개방도 그 일에 대해 알고, 동창도 물론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 알고…… 있다?”

“예. 게다가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일은 무림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총관 남궁무회가 반역을 꾀하다가 전사했고, 가주 창천대협이 그를 돕던 반도들을 모두 제거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지요. 대부분이 창천대협이 보여 준 의외로 냉철한 면과 강한 무위에 주목했지만, 그중 몇몇은 그 당시에 가주를 도왔던 의문의 기마병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으음…….”

“숫자는 일백오십. 모두 기마를 타고 철기를 갖췄으며,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대규모 전투에 익숙한 모습을 보임.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개개인이 일류 고수 급의 무인으로 파악됨. 이씨세가 오백과 위지가, 사마가의 삼백 무인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으니, 무림 거파의 그 어떤 무력 단체와 겨뤄도 손색이 없음.”

장기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임춘삼이 말하는 내용은 상당히 정확하다.

하오문뿐만 아니라 개방과 동창도 이 정보를 알고 있다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빨랐어.’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고, 그걸 각오했기에 대원들을 데리고 전투에 나선 것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그들의 이름이 퍼지는 것이 빠르니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그들의 정체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내…… 동생들이오.”

“……그렇습니까?”

임춘삼이 원하던 답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시켰다.

“무림의 많은 인물들이 대인과 대인의 동생분들께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소 문파 같은 경우엔 사활이 걸려 있으니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왜 그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말이오?”

“이씨세가의 일류 무인 오백이면 웬만한 중소 문파 하나쯤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숫자입니다. 그런 그들을 몰살시킨 단체라면…… 그들의 입장에선 미리 알아 두고 싸움을 피해야 할 상대입니다.”

즉, 적룡기마대가 강하다는 뜻이었다.

중소 문파의 입장에선 강하기에 신경을 써야 하고, 싸움을 피해야 했다.

그걸 원해서 정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군.”

장기린은 납득했다. 그 정도의 상황이라면 임춘삼이 그의 목적을 눈치챈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인께서 풍운객잔이라는 곳을 운영하셨고, 이백여 일 전 그곳이 어떤 삼인조에 의해 부서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삼인조는…… 최근 들어 흑도나 사파 쪽에서 자주 이름이 들려오는 자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흑도? 사파? 그들이 그쪽에서 활동한단 말이오?”

“예. 그들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대인께선 혹시 남경 공략을 준비하고 계신 겁니까?”

“……그렇소.”

“역시 대인이십니다. 일세 영웅만이 노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돕겠습니다.”

장기린은 이런 무조건적인 호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낭화에게서였다.

그녀에 이어 두 번째로, 가진바 모든 것을 던져 돕겠다는 듯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일단 남경의 상황과 현재 무림의 상태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대인.”

“괜찮소.”

“예. 현재 남경은 삼만 명의 녹림도들에 의해 봉쇄되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세도가와 수많은 민초들은 참혹한 꼴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명백한 반역이나, 명 황실에도 국경의 방어 때문에 여력이 없는 탓에 병력을 끌어모아 남경을 포위하고 있을 뿐, 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남경의 성벽은 열 배의 병력도 막을 수가 있을 테니.’

장기린은 깊어진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그런 고착 상태가 지속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최근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역도들이 강호무림의 모든 문파들에게 북천맹(北天盟)을 개파한다는 배첩을 전해 온 것입니다.”

“……!”

북천.

북쪽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장기린은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몽고 초원에서 온 창천랑 텐챠이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사상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현재 그 때문에 무림은 물론이고, 관부마저 벌집이 들쑤셔진 것마냥 혼란스럽게 변해 버렸습니다. 관과 무림을 합친다. 힘이 있는 자들이 세상을 다스리자. 그게 북천맹이 밖으로 내건 기치입니다.”

“관과 무림을 합친다?”

“강호관직론(强豪官職論). 그게 그 사상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무공이 강한 자들이 관직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무(政務)를 우습게 보고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지만…… 칼을 든 자들 중에 한 번쯤 그런 꿈을 꿔 보지 않은 자가 없기에 사방에서 큰 호응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건…… 큰일이군.”

“예. 특히 원래 관부와 척을 지고 있던 흑도나 사파의 무리들은 그 사상에 열광하며 북천맹에 하나둘씩 가입을 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가장 세력이 큰 흑도의 주인 다섯이 북천맹에선 오왕이라 불리는 듯하더군요.”

임춘삼은 옆에서 붉은색 단지(丹紙)로 감싸 놓은 특급 서찰을 꺼내 펼쳤다.

“북천맹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아직 드러나진 않았으나 맹주라는 자가 있고, 한동안 수백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흑도나 사파를 습격하고 다녔던 삼호법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삼호법과 동등한 직위에 오왕이 올라 있습니다.”

“……!”

“풍운객잔을 습격했던 것은…… 이 삼호법이 아닙니까, 대인?”

장기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과 구원이 있으십니까?”

“…….”

“실언이었습니다. 대인, 그럼 오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임춘삼은 붉은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오왕은 모두 흑도와 사파에서 악한 일을 해 왔기에 십대고수로 뽑히지 않았으나, 실력으론 십대고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강자들뿐입니다. 가장 먼저 녹림십팔채의 채주 광살부마 함대웅이 있습니다. 성품이 포악하고 잔인해 대마두로 불리고 있는 강자입니다.”

장기린은 묵묵히 임춘삼이 말하는 이름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서성 삼호방의 파갑수 강추산. 갑옷을 부수는 강맹한 수공으로 유명합니다. 호남제일살문 흑화보의 보주, 무영사신. 그림자도 볼 수 없는 신법과 무음일살의 쾌검술로 그런 별호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안휘성 황산파의 장문인 태양검군 종조기. 극양의 심공을 통해 붉게 달궈진 검을 휘두르기로 유명합니다.”

광살부마 함대웅.

파갑수 강추산.

흑화보 무영사신.

태양검군 종조기.

장기린은 그 이름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가만히 임춘삼을 응시했다.

아직 마지막 다섯 번째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북 최대 방파 사혈방의 방주, 적사왕 맹욱이 있습니다.”

“적사왕 맹욱? 그는 십대고수가 아니오?”

“맞습니다. 다만 최근에 항주에서 있은 반역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북천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림에서 인정받는 무림십대고수였다가 느닷없이 반역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하고, 거기서 아예 마음을 바꿔 북천맹이라는 역모 무리에 가담한다.

‘그쪽도 쉽지 않은 삶을 사는군.’

장기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맹욱의 이름 또한 집어넣었다.

임춘삼은 오왕에 대해 설명한 뒤, 가만히 붉은색 종이를 덮었다.

“대인, 지금 북천맹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글쎄, 모르겠소.”

“육만입니다. 본래 녹림도를 합쳐 봐야 삼만에 불과했던 자들이 며칠 새에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대부분이 어중이떠중이인 낭인들이고 관부와 척을 진 범죄자뿐이라고는 하나 그 세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황산파, 삼호방, 흑화보, 사혈방의 문도들과 그 문도들이 관리하는 산하 무관이나 사업체들 역시 북천맹의 세력이라고 봐야 합니다.”

“……대단하겠군.”

“그렇습니다. 지금의 북천맹은 과거 사도맹(邪道盟)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권역은 이제 대륙 전체를 총괄하며, 사파와 흑도의 종주가 되어 온갖 악인들이 북천맹의 그늘 안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임춘삼의 목소리는 더없이 심각했다.

“이건…… 어쩌면 정사대전이 다시 일어날 조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오.”

“예?”

“북천맹은 관과 무림의 일통론을 내밀었소. 그럼 관부 역시도 위험하겠지.”

“그 말씀은…….”

“관과 무림은 더 이상 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란 말이오. 흑도나 사파의 무리들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오.”

“……!!”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략가가 있다면 당연한 일일 테지.”

임춘삼이 충격에 휩싸인 사이,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무림맹에 대해 말해 주시오.”

“예, 예?”

“과거에는 무림맹이 있었으나 현재는 해체되어 각파로 되돌아갔다고 들었소. 그에 대해 말해 줬으면 하오.”

“아…….”

임춘삼은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의 점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정보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한 발 앞서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하거늘, 오히려 장기린에게 끌려가며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가.

‘대단한 사람이다. 생각이 격식에 얽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워. 그러면서도 핵심을 짚는 능력이 있다.’

임춘삼은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무림맹은 원의 패압과 한민족 억압 정책에 대항하고자 모여들었던 협사들의 모임이었습니다. 홍건적을 규합한 태조 홍무제를 돕기도 하였지요. 한데 태조가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뒤, 나라가 안정을 찾자…… 개국공신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

부우덕(傅友德)과 풍승(馮勝).

남옥의 변까지.

태조 주원장은 황권의 강화와 나라의 안정을 위해 큰 힘을 가진 대신(大臣)들이 탄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개국을 함께한 공신들을 차례차례 죽이기에 이르렀다.

각 대신들이 반역으로 몰려 죽을 때마다 함께 죽은 인원만 해도 삼만에 이르렀다.

그때는 강력한 황권이 절정에 올라 있었고, 신하들의 입장에선 매번 궁에 들어갈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암흑기였다.

“하여 무림맹은 몰살을 당하기 싫다면 배를 납작 깔고 엎드려 몸을 낮춰야만 했습니다. 홍무제가 노년을 맞이하고 혜제가 즉위할 때는 평화가 오는가 싶었으나…… 그때, 연왕이 난을 일으켜 즉위하였습니다.”

“과연, 그래서 해체한 것인가.”

“당금의 황제 태종은 태조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만큼 전제주의가 강한 분입니다. 함부로 도당을 결성했다간…… 그야말로 관계된 자 전부의 구족이 멸족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장기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

애초에 그런 말이 성립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명 제국 내에서 황제의 말은 절대적.

그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은 그에 대항하는 모든 것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관이 어디에 있고, 무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리저리 섞여 살아가는 게 세상이거늘.

황제가 만약에 소림의 현판을 내리라고 한다면 내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숭산 소실봉이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살려면 몸을 낮춰야만 했다. 도당을 결성하지 않고, 조용히 심산유곡 본파에서 무공을 연성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던 것이다.

“무림맹을 해체할 당시 맹주였던 분이 바로 무림오존 중 한 분이신 공화존(空華尊) 백무양 대협입니다. 소림의 속가제자로서 무극의 경지에 오른 일세의 무인이자 민중의 안녕을 바라는 뛰어난 지도자셨습니다.”

공화존 백무양.

장기린은 검선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답답할 만큼 고지식한 놈이니라. 나이에 걸맞은 융통성이 조금도 없는 바위 같은 놈이지만, 그렇기에 남들을 이끄는 자리엔 더없이 어울린다. 역근경으로 만든 내공은 끝이 없고, 일 격 일 격에 백보신권의 경력을 담은 아라한신권과 허깨비처럼 픽픽 사라지는 건곤대나이신법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직접 만나게 되면 되도록 상대하지 말거라.”

‘과연, 백씨인 건가.’

희한하게도 최근에 백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백무양, 백 총관, 그리고 백연.

“무림맹은 해체되었으나 공화존의 아들이 여전히 무림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천형(天刑)의 체질을 가져서 무공은 익히지 못했으나 그 대신 어려운 일을 스스로 자청할 만큼 인의가 깊은 자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오?”

“백상일. 백상일 대협입니다.”

“그자가 청월루의 총관을 하고 있지 않소?”

“……!!”

임춘삼은 잠시 놀랐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습니다. 청월루에서 원 제국의 준동과 사파 흑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과연…….”

“예?”

“그럼 백연은? 백연은 공화존의 친족이오?”

“예, 조카뻘이 됩니다. 그리고 백 소협은 차기에 무림맹이 발족할 경우 공화존의 뒤를 이을 유력한 맹주 후보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임춘삼은 장기린이 백연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

장기린에 대해 얼마나 깊이 조사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장기린은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청월루의 총관이 무림맹주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무림맹주의 조카인 백연은 차기 무림맹주의 후보라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풍운객잔을 하던 시절, 주변에 있던 인물들이 다 무림맹의 핵심 인물이었다니.

‘항주 금선로에 모든 게 모여 있었군. 역시 이름이 잘못되었어. 풍운객잔이라니, 그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던 거다.’

장기린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대인, 북천맹을 막으려면 무림맹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파와 흑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파. 정(正)의 기치를 내걸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정도 문파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북천맹을 타도해야만 합니다.”

“맞는 말이오.”

“벌써 대륙 천지에서 북천맹 휘하의 문파들의 행패가 지나치다고 민원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인, 그러니 선택하셔야 합니다. 무림맹의 재발족을 종용하고 그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따로 남경을 노리시겠습니까?”

“…….”

“저는 어느 쪽에서든 대인을 도울 것입니다.”

장기린은 깊이 생각했다.

이것은 무림의 싸움이다.

북천맹이 무림의 힘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상 무림맹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무림난세(武林亂世)!

힘이 있는 자가 패권을 쥘 테니, 그러한 기회를 노리는 자들도 많이 나타날 것이다. 사파와 흑도의 힘이 모여든 북천맹은 점점 거대해질 것이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지 않으면 대항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

여기서의 선택은 장기린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었다.

무림맹과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따로 떨어져서 홀로 싸울 것인가.

각기의 장단점을 떠올리며 고민의 끝에,

“나는…….”

장기린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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