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87화 (70/686)

第八十四章 ― 삼호패호(三虎牌號)

“무림맹과 함께하지 않겠소.”

임춘삼은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인. 그럼 무림맹과는 접촉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가는 방향으로…….”

“아니, 접촉을 안 하는 건 아니오.”

“예?”

“지금의 북천맹을 상대로 남경을 탈환하는 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오. 무림맹에 소속되지는 않을 것이나…… 서로 간의 협력은 하는 것이 좋을 테지.”

“아……!”

협력(協力)과 소속(所屬)은 다르다.

장기린이 만약 무림맹에 소속되어 함께 싸우려면 여러 가지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출신, 무공 내력을 밝혀야 하며 무림맹의 사정에 따라 싸우는 방식을 제한당할 수도 있다.

그건 여러 가지 면에서 장기린과 적룡기마대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검선의 제자라고 밝히면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과도하게 주목을 받아서 좋을 것도 없고.’

이미 검선 구양재인에게 마음껏 이름을 써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장기린은 그 이름을 가능한 한 써먹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검선의 이름은 자유이자 구속이다.

잠시간은 자유로울 수 있으나, 그 말이 퍼져 나가면 장기린은 온 무림천하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버린다.

“즉, 동맹 상태에서의 협력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럼 그 접촉은 누구와…… 아!”

임춘삼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스스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장기린은 그 생각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소. 나는 청월루에 가 보려 하오.”

☆ ☆ ☆

“이게 누구야!!”

온 전각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여래사에 있는 대종(大鐘)을 친다고 해도 이만한 소리가 날까 싶은, 커다랗고 호쾌한 목소리였다. 칠 척 장신의 거구가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오더니, 장기린의 앞에 멈춰 섰다.

“이런 썩을……!”

처음의 반응이 반가움이었다면, 이제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였다.

꽉 다문 두툼한 입술.

밤송이처럼 뾰족뾰족한 수염 사이로 대노한 음색이 터져 나왔다.

“왜 도움을 안 청했냐!!”

웅웅―

창호지로 막아 놓은 창이 덜덜 떨렸다.

“히익……!”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옆방에서 다기를 치우던 시녀 하나가 쟁반을 떨어뜨리고 신음을 흘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깨진 찻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왜 나를 안 찾아왔느냐는 말이야!!”

철우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 내더니, 분이 안 풀리는 듯 발을 쿵쿵 굴렀다.

덜컹. 덜컹.

거력이 담긴 발구름에 복도가 무너지기라도 할 듯 흔들렸다.

“오랜만이오.”

“뭐?! 오랜만이오오―?!”

철우는 ‘이걸 죽여, 살려?’ 하고 고민하는 듯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잠시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 장 객주. 너무한 거 아니야? 난 그동안 풍운객잔에 꽤나 정을 쏟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 되는 거였어?”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차나 한잔 주시오.”

“……차?”

“아까 낭화가 달여 주던 차가 맛있어서 말이오. 왠지 오늘은 차가 마시고 싶군.”

너무나 태연한 기색의 장기린은 얼핏 뻔뻔하고 능글맞아 보일 정도였다.

“낭화를…… 만났나?”

“객촌에 들렀었소.”

“잘했군. 지난 이백 일간 낭화는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았어. 마음이 텅 비어 보였지.”

“…….”

“허허…….”

그제야 머리가 조금 식은 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 자네…… 변했군.”

장기린은 별말 없이 빙긋 웃었다.

“그렇소?”

“그래. 그 웃음도 말이야, 예전엔 그렇게 웃지 않았다고. 좀 더 뭐랄까…… 얼음덩이가 애써 웃는 듯이, 웃을 줄 모르는 놈이 힘겹게 웃음을 따라 한다고 할까? 그런 느낌으로 웃었단 말이야.”

“그럼 그런가 보지. 차는 줄 거요, 안 줄 거요?”

“……기가 차는구만. 집어쳐! 차는 무슨! 여기에 낭화만큼 차 끓일 수 있는 계집애는 없다. 호사스런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술이나 처마셔!”

철우는 버럭 화를 내더니,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거의 화를 내듯이 백주를 가져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백주는 시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왔다.

철우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자, 마셔라.”

쪼르르륵―

제법 큼직한 잔에 독한 백주가 한가득 채워졌다.

장기린은 두말 않고 그 술을 받아 마셨다. 평소라면 술을 안 마시겠다고 사양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받아 마셨다.

“따라 주면 좋겠소?”

“됐어. 난 잔에 안 마신다.”

철우는 팔뚝만 한 호리병을 들어 올리더니,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카아―! 역시, 이 맛이지. 술은 이 맛에 먹는 거야.”

철우는 그 말을 하며 안주로 나온 닭 한 마리를 찢지도 않고 통째로 집어서 한입 베어물고는 뼈까지 우적우적 씹었다.

“이봐, 장 객주.”

“왜 그러시오.”

“아가들은? 다들 잘 있어?”

철우는 장기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의 투박한 배려였다.

불편한 이야기를 할 때는 시선조차 불편하기에, 아예 다른 곳을 바라봐 버린다.

“다들 잘 있소. 아, 운찬은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었소.”

“뭐야!! 어쩌다가!”

“웬 힘센 놈이 주먹질을 하는데, 그걸 발로 막으려고 했던 모양이오.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다더군.”

“…….”

쪼르르―

철우가 말없이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장기린은 그 술잔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다른 녀석들은? 무사한가?”

“휘연은…… 깨어나지 못했소.”

“…….”

“걱정 마시오. 죽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귀한 걸 구해야 살릴 수 있어서 고생을 좀 해 볼까 싶소.”

장기린은 청량한 기운을 흩뿌리며 선선히 웃음지었다.

철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거다.

이것이었다.

장기린이 변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뭐가 변했는지는 몰랐는데, 이젠 그 이유를 알겠다. 장기린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항상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것이다.

마음을 확고히 한 사람은 웃을 수 있다.

기쁠 때 기쁜 마음으로 웃을 수 있고, 슬플 때는 슬픈 마음으로 울 수 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슬프고 어려운 일을 말하면서 진정으로 웃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백 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철우는 깊어진 눈빛으로 장기린을 지그시 바라보다 호리병에 남은 백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아―! 이봐! 여기 백주 좀 더 갖다줘!”

“예에!”

버럭 소리를 지르니 이번에도 지나가던 하인이 섬전 같은 속도로 주방으로 뛰어간다.

그 뒤, 순배가 세 번이나 돌도록 두 사람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장기린이었다.

“철우.”

“왜?”

“도움이 필요하오.”

“말만 해. 뭐든지.”

“철우로서가 아니오. 항우로서 도와주시오.”

콰작!

철우의 손에서 호리병이 박살 났다.

부릅뜬 눈. 쩍 벌린 입이 그의 동요를 나타냈다. 그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지금…… 뭐라고…….”

“가면철왕(假面鐵王) 항우. 무림십대고수의 일인이자 무림맹의 맹주 호법으로서 나를 도와주시오.”

장기린은 담담한 눈빛으로 철우, 아니, 항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십여 년 전, 산서 태원부에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초패왕 항우의 가면을 쓰고 맨손, 맨몸으로 일성(一城)을 평정한 고수가 있었다.

그는 칠 척 거구를 지녔으며 항상 왕이나 입을 법한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어느 날부터 산서 내의 무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문도 모른다.

익힌 무공이 뭔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그가 정말로 초패왕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가진 천하장사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무공을 보는 안목, 공격의 흐름을 찾는 법까지.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마냥 그는 혼자서 완벽한 무공을 선보였다.

혼자서 하는 비무로도, 여럿이 달려드는 합공으로도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큼직한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검이 꺾이고 창은 부러졌다. 문파로 쳐들어갈 때면 항상 대문을 박살 냈다.

맨주먹으로 대문을 박살 내고, 그대로 가로막는 자들을 때려눕히며 일직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쳐들어가, 마침내 가주전에서 가주를 쓰러뜨릴 때까지는 절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솔직한 싸움법인가.

처음엔 경원시하던 사람들도 한 번 싸움을 보고 나면 모두가 매료되어 그의 이름을 선창했다.

사람들은 그를 항우라고 불렀다.

초패왕의 환생이라고.

한고조 유방의 환생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꺾일 일이 없을 거라며 그와 그가 쓰고 있는 가면을 향해 환호성을 보내 주었다.

마침내 그가 산서를 넘어 천하에 이름난 고수들과 겨룰 때는 사람들이 산서에서 대단한 고수가 나왔다면 먼 길을 떠나 응원을 올 정도였다.

진주언가가 꺾였고, 하북팽가에서 다음대 십대고수가 될 거라고 이야기되던 팽무극도 항우의 가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쯤 항우가면은 가면철왕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별호는 주변 군웅들이 불러 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왕이란 칭호를 얻는 자는 곧, 무림에서 인정하는 고수가 되었다는 뜻.

가면철왕은 무림십대고수가 되었고, 천하가 좁다 하고 날뛰며 비무행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면철왕의 행보가 멈추었다.

무림오존.

전대의 절대고수인 다섯 사람 중 무림맹주인 공화존 백무양을 만났던 것이다.

비무가 밖으로 공개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결말을 알 수는 없었으나, 그날 이후로 항우가면이 공화존의 호위를 자청하였으니 그 결과가 어떤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공화존에게는 무림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고수인 보표가 생겼다.

항우가면은 어딜가나 공화존의 등을 지켰고, 만약 그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항우가면을 넘어서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연왕이 제위에 오르고 무림맹은 해체되었다.

그날 이후 바람처럼 속세를 떠난 공화존과 함께 가면철왕이 쓰던 항우가면의 모습도 더 이상 무림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다…… 알고 왔군.”

철우는 커다란 덩치처럼 미련한 자가 아니다. 오히려 여우라고 해도 모자랄 만큼 민첩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기린이 묻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깨진 호리병에서 남아 있던 백주가 콸콸 흘러넘치는데도 철우는 손을 치울 생각도 않고 가만히 뚫어져라 장기린만 응시하고 있었다.

후우우욱―

그리고 어느 순간, 철우로부터 강맹한 존재감이 흘러나왔다.

마치 차가운 빙굴을 눈앞에 둔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운이었다.

철우는 무표정했다.

평소처럼 호탕한 웃음을 짓지도, 일부러 사나운 눈빛을 하지도 않은 채 마치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다.

태산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부술까.

철우는 그런 느낌을 준다.

부숴도 부숴지지 않을.

넘어서고 싶어도 넘어설 수 없는.

그런 대자연의 모습과 같은 앞도적인 힘과 무게를 느끼게 해 준다.

“술이 한 병 더 필요하지 않겠소?”

태연한 목소리였다.

장기린은 철우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심지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말했다.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장기린을 노려보던 철우.

그는 곧 청월루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하핫! 파하핫!”

그 웃음은 평소의 웃음소리와는 달랐다.

커다란 존재감은 그대로지만, 호탕하다기보단 진중하고 무거웠다.

“과연.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이놈은 난 놈이다!’ 싶었지.”

철우는 씩 웃더니, 근처의 하인에게 백주를 한 병 더 시켰다.

“돕지. 단, 무림의 평화에 해가 되어선 안 된다.”

“물론이오.”

“알고 있겠지만, 나는 맹주를 지키는 보표다. 맹주의 안위가 위험할 시에는 근처를 떠날 수 없어.”

“그것도 잘 알고 있소.”

장기린이 선선히 수긍하자 철우는 그의 잔에 다시 한 번 백주를 부어 주었고, 이번엔 그 자신도 백주를 잔에 따랐다.

“자, 그럼 우리의 진실된 만남을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약조의 술잔이다.”

철우는 잔을 들어 올렸다.

장기린도 잔을 한 번 들어 올린 뒤,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술을 단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캬아―! 좋다!”

어느새 철우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술병을 들고 술을 물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 보면 의문이 든다.

무표정한 항우의 모습이 진짜일까, 아니면 평소의 털털하고 호탕한 철우의 모습이 진짜일까?

‘왠지 철우의 모습이 진짜인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데 말이야…….”

철우는 툭, 하고 술병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정체가 다 까발려졌는데 장 객주는 정체를 안 밝힌단 말이지. 이쯤에서 스스로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정체 말이오?”

“그래.”

“나는 전(前) 풍운객잔의 주인이오.”

“푸흡!”

철우는 마시던 술을 내뿜은 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장기린을 노려보았다.

“어이.”

“내 정체가 그리 놀랍소?”

“……어이.”

“흑룡강 유역. 북로전쟁. 공손 대장군을 아시오?”

장기린은 담담하게,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말을 꺼냈다.

“공손 대장군…… 알지. 북(北)대장군이자 원의 잔당을 성공적으로 정벌한 명장이라고 들었다.”

“맞소. 대단한 분이셨지. 나는 그분의 밑에 있었소. 나름대로 공을 세웠고, 군문을 떠나기 전엔 차기 대장군의 제의도 받았소.”

“뭐야, 그럼 높으신 분이 될 수도 있었단 소리야?”

“어차피 될 마음이 없었소.”

“도대체 왜? 대장군이면 만단위의 병력을 통솔하는, 황제를 제외하곤 그 누구의 명도 듣지 않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군벌이잖나. 모든 사내들의 꿈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나는 전쟁터랑 맞지 않았소.”

“허어…….”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볍소, 전쟁터에선.”

“……!”

철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장기린의 그 말.

깊이있는 도인의 말과도 같다. 자신이 승려라면 평생 머릿속에 담아 둬야 할 하나의 화두일 터.

사람의 목숨이 가볍다.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왜 장기린이 그렇게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발악을 해 왔는지, 어째서 입신양명의 기회를 차 버리고 이런 곳에서 객잔이나 하며 사는지.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살려고 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 아니, 오히려 전쟁터에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소.”

장기린은 얼굴 가득 쓴웃음을 보였다.

어느새 해가 진 방 안, 일렁이는 등불에 장기린의 뭉개진 오른쪽 귀가 선명하게 철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그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 하오. 도와주시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철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림맹을 다시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소.”

“……!”

철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그런데…….”

“현재 남경의 북천맹에는 맹주가 있고 삼호법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파나 흑도 방파들로 이루어진 오왕의 세력이 있고, 그 외에 원의 잔당 중에서도 최정예인 일천 명의 기병이 있소.”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지난 이백여 일,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소.”

“허어……!”

놀라움에 놀라움을 더하는 장기린의 능력이다.

철우는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능력을 가늠할 수가 없구만. 내 정체를 안 것도 그렇고, 북천맹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

“그래서? 내가 도울 일은?”

이번엔 장기린이 철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나에겐 따르는 동생들이 있소.”

“누구? 강 숙수랑 남궁 아가?”

“그 애들도 있고…… 군문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동생들도 있소.”

“허어, 그래서?”

“난 동생들과 힘을 합해 북천맹으로부터 남경을 빼앗을 생각이오.”

“……!!”

철우는 이제 놀랄 기력도 없어서 헛웃음만 흘렸다.

“동생이 몇인데?”

“백오십이오.”

“…….”

“전장의 사선에서도 살아남은 동생들이니만큼 매우 강하오. 그들 중엔…… 당신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도 몇 있소.”

철우의 얼굴에서 허탈함이 사라지고 호승심과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이봐, 자네는 내 진신 실력을 본 적이 없어.”

“맹호도를 만났소. 그를 보고 나니 대충 추측이 가능하오.”

“뭣? 맹호도를 만나……?!”

“중요한 건 내 동생들이 강하다는 것이오. 나는 그 동생들의 힘으로…… 일단, 새로 북천맹의 주력이 된 오왕의 세력부터 하나씩 정리할 생각이오.”

철우는 진지한 기색이 되었다.

오왕의 세력을 정리한다.

즉, 머리를 쳐내기 전에 팔다리 사지를 끊어 놓겠다는 생각이다.

‘쉽지 않을 텐데…….’

현재 무림맹을 재건하려는 무림 명숙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는데, 문제는 오왕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본래 양지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암흑가의 재력과 무력은 구파에 필적했다.

녹림십팔채, 삼호방, 흑화보, 황산파, 사혈방.

다섯 곳 중 하나를 없애는 것만 해도 구파일방 중의 하나가 문파의 사활을 걸고 덤벼야만 가능했다.

북천맹엔 그런 데가 다섯 곳이 모였으며, 지금도 그들이 선언한 ‘강호관직론’에 혹해 모여드는 무인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상황이 아닌가.

‘과연 가능할까……?’

머리로는 절대 불가능이라고 생각되었다.

한데, 본능적인 느낌으론 ‘이자라면 해낼 것이다!’라는 묘한 확신마저 들었다.

“이봐, 장 객주.”

“왜 그러시오?”

“솔직히 말하겠는데, 내가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대할 것 같으면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을 거야. 근데 친구로서 말하자면…… 그건 좀 무모한 것 아닌가? 무림십대고수라고 해서 수백 수천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야.”

철우는 장기린을 향해 ‘친구’라고 표현했다. 그는 진심으로 장기린에게 우정을 느껴고, 웬만하면 사지로 가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차라리 무림맹에 합류하는 건 어때? 능력이 있다는 건 아니까, 구파와 힘을 합해서…….”

“아니, 그건 거절하겠소. 따로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장기린은 단호한 말투로 거절했다.

“으음…….”

“괜찮소. 하오문과 남궁세가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그 다섯 문파 중 하나가 상대라면 오 할 이상의 확률로 내가 승리할 수 있소.”

“허어……?”

철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 다섯 문파를 상대로 승리한다?

즉, 그 말은 구파를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장기린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백오십 명의 힘으로 구파 중 하나를 멸절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구파의 힘이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일까?’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철우는 일단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장기린의 성품상 허튼소리를 할 위인은 아닌 것이다.

“좋아, 그렇다 치고. 그럼 자네가 무림맹에 바라는 건 뭐지?”

“무림맹이 본진이라면 우리는 유군(遊軍)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오.”

“유군?”

유군이란 노는[遊] 군대[軍]라는 뜻처럼 군략이나 전략에서 제외되어 완전히 독립된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를 말했다.

하지만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간의 작전과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최선의 싸움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관계였다.

“철우, 당신이 백 총관에게 말해 주시오. 무림맹은 우리에게 등을 맡길 수 있고, 우리도 등을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어 달라고. 그래서 우리가 둘 이상의 문파와 상대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등을 받쳐 달라고.”

“……!”

서로의 등을 맡긴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어렵고 중요한 조건이다.

‘즉, 등 뒤를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지.’

장기린이 오왕 중 하나와 싸우는 사이, 무림맹을 믿을 수 없게 되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설마 무림맹이 장기린을 직접 공격하진 않겠지만.

무림맹이 나 몰라라 하며 방치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장기린은 뒤가 텅 비어서 앞뒤로 공격당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무림맹이 방패가 되어 준다면 장 객주의 세력은 칼이 되어 오왕의 세력을 하나씩 없앤다, 그 말이군.’

철우는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하지. 백 총관님께 말씀드리긴 하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선 확실히 약속해 주겠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데, 장 객주의 뒤는 우리 무림맹이 지킨다.”

“……믿어도 되겠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 듯한데.”

“어이, 그때는 철우로서 약속한 거야. 이번엔 가면철왕 항우로서 약속하고 있는 거다.”

철우는 믿어 달라는 듯 큼직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럼 믿어도 되겠소?”

“물론이다.”

“알겠소. 믿지.”

서로를 보며 씩 웃는 두 사내.

가면철왕 항우와 장기린은 서로를 향해 다시 한 번 잔을 들어 올렸다.

☆ ☆ ☆

어두운 밤.

화광이 충천하고 비명과 병장기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진다.

고요했던 밤공기를 찢으며 짙은 악의(惡意)가 넘실넘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서성 남경 남부 모산(茅山).

도교의 성지이며, 전진파의 후신인 모산파가 존재하는 곳이다.

모산파는 무공보다는 기기묘묘한 술법으로 유명했다. 오행도(五行道), 뇌격(雷擊), 화천(火天)의 술법과 황색 부적을 통해 사용하는 제령, 식귀의 술은 기문법술이 많은 무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상단전을 이용하는 무학인 탓에 익히기도 까다롭지만, 대신 그만큼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것이 모산파의 법술이다.

감여나 풍수에도 능해, 제법 세도가 있는 가문이나 문파에선 뭔가 건물을 지을 때나 사람이 죽을 때마다 모산파의 도사를 초빙해 명당을 찾고 묏자리를 택하니 재력도 풍족했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모산파의 무공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한때 구파의 이름 안에도 포함되었던 곳이 바로 모산파.

오래된 전진 도교의 역사는 그만큼 깊이있는 무학 또한 남겨 준 것이다.

채챙! 채채챙!

“으아악……!”

그런데 그 모산파의 본파가 화광이 피어오른 채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싸움.

처절한 전투였다.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자들이 용감하게 서로를 향해 달려들지만, 항상 피를 흩뿌리며 넘어지는 쪽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새하얀 도복을 입은 모산파의 도사들뿐이었다.

상대는 탁한 황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옷깃과 소매는 검은색이고, 가슴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수놓아진 무복이다.

삼호방(三虎邦)!

강서성 흑도의 명문이자, 최근에 북천맹 오왕 중 일인의 일파로 더더욱 유명해진 방파의 이름이었다.

모산파의 도사들은 깊이있는 무공을 배웠으나, 그보다는 술법에 더욱 치중하고, 술법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 힘을 빌려 주는 일에 더욱 치중하는 사람들이었다.

무공에만 집중할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비무나 실전 경험도 적으니 가진바 실력도 다 못 펼쳐 보지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반면에 삼호방은 온갖 귀계와 치열한 혈투를 거쳐 명문의 자리를 차지한 흑도의 방파였다.

날렵한 싸움 실력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목숨을 끊어 놓는 독심도 모산파에게 있어선 큰 위험이었다.

그나마 부적을 사용한 기기묘묘한 술법으로 근근이 버텨 왔지만, 더 이상은 삼호방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산파의 도사들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지, 외전을 버리고 내전으로 뛰어들었다.

“후퇴! 후퇴다!”

“내전으로 들어가! 서왕진(西王陳)을 펼친다!”

도사들이 뒤쪽 전각으로 우르르 도망친 뒤, 모산파 내부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화했다.

우르릉―!

갑자기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앞줄에 있던 삼호방의 무사들이 움찔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눈앞에서 허연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모산파니 가능하다.

드드드드―

“허엇!”

심지어는 땅이 울렁이고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진동까지 느껴졌다.

삼호방의 무사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확히 세 걸음.

세 걸음을 물러서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이 고요해졌다.

“어……?”

삼호방의 무사들은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한 걸음만 내딛어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고 지축이 흔들리건만,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선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쯧쯧, 멍청한 놈들. 비켜라.”

삼호방의 무사들은 황급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비켰다.

삼호방주 파갑수 강추산의 등장이다.

왜소한 체구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봤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쭉 찢어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범상치 않은 눈빛처럼 그는 평범한 무인들은 감히 일 초도 받아 낼 수 없는 절대고수였다.

“모산파…… 무공은 줄고 잡재주만 늘었구나. 이봐! 벽력탄을 가져와라!”

왜소한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몇 명이 각자 양 손바닥만 한 목갑을 들고 강추산의 옆으로 다가왔다.

“진법? 그건 사람한테나 통하는 거지, 이런 물건한테는 안 통하는 법이지. 아까 보니…… 저쪽이 내전이렷다?”

강추산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목갑을 열고 거무튀튀한 철덩어리를 꺼내 어깨를 뒤로 쭉 뺐다.

딸깍!

뭔가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쒜에에엑―!

강추산의 손에서 날아간 벽력탄이 진법을 뚫고 안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꽈과과광―!

드드드드―!

“우왓……!”

폭음이 들리고 땅이 쿵쿵 울린다.

이번엔 진법에 의한 환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강추산에 옆에 시립해 있던 무인들이 당황하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안개가 뿌옇게 피어오르던 진법이 웅웅― 떨리며 휘청거렸으나, 잠시 후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벽력탄이 타격을 주기는 했으나 완전히 진법을 무너뜨리진 못한 것이다.

“호오, 제법 버틴다, 이건가?”

강추산은 양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두 개.”

“예?”

“두 개 달란 말이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쭉 잡아 째진 눈 사이로 살벌한 살광이 번뜩이자, 목갑을 들고 있던 무인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벌벌 덜었다.

강추산에게 잘못 보이면 그 순간 목이 뜯겨 나간다. 때문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두 개면 되겠지.”

강추산은 씩 웃은 뒤, 이번엔 처음에 던졌던 것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두 개를 한꺼번에 던져 냈다.

그러자,

꽈과과과광―!

“으아악……!”

우지끈―

“피해라! 무너진다! 으아악!!”

우우웅―!

팟!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진법이 만들어 내던 환상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앞을 가로막는 안개가 사라진 상황.

모산파 내전의 모습은 참혹했다.

역사가 깊은 전각은 두 개나 무너져 내렸고, 그 속에 있었거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폭발에 휩쓸려 사지육신 중에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멀쩡한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이 죽거나 크게 부상을 입고 있었다.

“이, 이노옴―! 삼호방주! 관에서 금용된 벽력탄을 쓰다니! 네놈이 미쳤구나!”

모산파의 장문인, 벽운(碧雲) 진인은 크게 분노하여 고래고래 외쳤다.

화기(火器)는 군용물품으로서 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 만약 민간인이 화기를 사용하다가 발각될 경우 참형을 면치 못하는 큰 죄였던 것이다.

“금용? 하!”

삼호방주 강추산은 비웃음을 날렸다.

“멍청하구나, 벽운. 나는 왕이다. 관청 따위가 뭐라고 감히 나에게 뭐라고 한단 말이냐!”

“뭐, 뭣?”

벽운 진인은 황당한 듯 말문이 막혔다.

“북천맹의 오왕 중 한 명이 바로 이 몸이란 말이다. 항상 강서성에 함께 지내면서 모산파가 거슬렸지. 영광인 줄 알고 죽어라. 모산파는 앞으로 천하를 지배할 이 몸의 첫 번째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 무슨……!”

벽운 진인은 황당했다.

강호관직론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자들은 진심으로 그걸 믿고 있단 말인가?

관과 황실을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모산파 다음은 강서성 성주를 죽일 것이다. 이 몸이 강서성을 갖는 거야.”

“이, 이런 미친놈……!”

“벽운, 도사답지 않은 말투로군. 낙성(落星) 진인과 칠성군(七星君)이 떠난 뒤로 모산파는 정말로 다 끝난 모양이야. 예전에 구파에 들었단 말이 거짓말 같아.”

“……!!”

벽운 진인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만큼 흥분했다. 전대 장문인이었던 낙성 진인.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문파의 주축이었던 칠성군을 데리고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그 뒤로 모산파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구파에서 제명되었고, 지금은 문파의 존립을 위험받는 상황이었다.

낙성 진인과 칠성군.

그들은 모산파의 치부였던 것이다.

“크윽……!”

벽운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격장지계에 당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뒤쪽에 모여 있는 삼백 명가량의 문도들에게 명을 내렸다.

“천방진(千方陣)을 펼쳐라! 각자 혈부(血附)를 꺼내!”

“옛!”

도사들은 결연하게 외치며 진형을 바로잡고, 품속에서 시뻘건 홍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소도로 손가락 끝을 베어 낸 뒤, 일제히 그 홍지 위에 기묘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웅우우웅―

혈부란 목숨의 생기를 사용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주술이다.

본래는 쓰지 않는 것이 옳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아껴선 아니 될 터.

도사들이 각자 진언을 읊자 혈부에서 붉은빛이 서서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끈끈한 기운이 모여들더니, 천방이라는 이름처럼 천 개로 갈라지며 마치 그물과 같은 기의 흐름을 형성했다.

“천방―! 개(開)!”

벽운 진인의 일갈.

모산파 도인들의 전면으로 마치 피로 만든 듯한 칼날들이 수백 개나 떠올랐다.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묘한 모습.

게다가 당장에라도 피가 뚝뚝 흘러내릴 것처럼 살벌한 형상이니, 삼호방의 무인들은 가슴이 섬찟해지는 것을 느꼈다.

“쯧쯧, 미련하기는.”

강추산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일말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벽운! 벽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등 뒤를 돌아봐라. 그곳에…… 맹주님의 칼날이 떨어진다.”

“뭐? 무슨 소리냐? 등 뒤는 절벽…….”

벽운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두두두두―!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한 굉렬한 소리와 함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한 떼의 기마병이 내려오고 있었다.

“끼요옷―!”

“끼햐앗―!”

기묘한 기합성.

놀라운 승마술로 기마일체의 모습을 선보이는 그들은 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온 것이다.

촤아악―! 푸확! 콰광!

“으, 으아앗?!”

“끄아앗!”

절벽을 내려오면서 한층 가속도가 붙은 기마병.

그 무게감과 파괴력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던 도사들의 육신을 그야말로 ‘부숴’ 버렸다.

푸화악―!

피가 튀고 육편이 날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온 기마병의 숫자는 일백.

그들은 모산파의 도사들을 학살하듯이 죽이며 장문인인 벽운 진인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츠츠츠츠―

팟!

“크학! 쿨럭……!”

삼백여 명에 달하는 도사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전개하던 천방진이다.

뒤측의 도사들의 조력이 사라지자 남은 도사들은 천방진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제히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허공에 떠 있던 피로 만든 칼날도 사라졌다.

모산파의 장문인 벽운 진인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이 무슨…… 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다니!”

웬만한 무인도 움직이기 힘든 지형이거늘, 어찌 말을 타고 내려올 수가 있단 말인가.

중간쯤에 있던 도사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든 채 기마병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그들은 기마술뿐 아니라 도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다.

일격, 일격이 목숨을 건 것마냥 강맹했다.

무위에서도, 기세에서도…… 모산파의 도사들은 일백 기마병을 이겨 내지 못했다.

“이럴 수가……!”

학살당하는 도인들을 차마 끝까지 쳐다보지 못한 채 벽운 진인은 멍하니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피의 칼이 사라지며 훤히 드러난 길.

강추산과 삼호방의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고 있었다.

“다 죽여라! 재물을 빼앗고 약탈해라! 여도장이 있다면 겁탈해도 좋다! 먼저 갖는 놈이 임자다. 모든 것을 빼앗아라!”

“흐흐흐! 약탈이다!”

“크하핫!”

강추산의 명령에 삼호방의 무사들이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자비없이 휘두르는 검에 도사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간다.

유서 깊은 전각에서 온갖 물품들이 밖으로 꺼내지고, 무공을 익히지 못한 여도장들과 시녀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짐짝처럼 옮겨진다.

그 모습에 눈에서 빛을 되찾은 벽운 진인.

마지막으로 삼호방주라도 죽이고 죽겠다는 심정으로 달려들었으나…… 그는 삼호방주의 상대가 아니었다.

쩌저정! 콰직!

“크흡!”

청람수(靑嵐手).

푸른 아지랑이가 감도는 수공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몰랐다.

검기가 실린 검날을 맨손으로 후려치는데, 단 일격에 만근 거력이 느껴지고 좌우로 휘돌리는 손놀림에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물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싸움에서의 경험부터 차원이 달랐다.

첫 합부터 바닥을 차서 모래를 흩뿌리고 변칙적인 각법으로 주의를 산만하게 하니, 손발이 흐트러져 버렸다.

삼 초.

삼 초였다.

비록 이름을 날린 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모산파의 장문인이건만, 벽운 진인은 강추산에게 삼 초를 버티지 못하고 손목을 내주어야 했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손목과 검이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 비겁한……!”

벽운 진인은 아찔한 고통에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이를 갈았다.

삼호방주는 십대고수에 필적할 만큼 강하다. 실력으로 붙었어도 백 초 안에는 승부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비겁한 수를 서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손발이 꼬였고, 제 실력도 보이지 못한 채 손목이 잘리고 말았다.

“멍청하긴.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나.”

콰드득!

마지막은 파갑수(破鉀手)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청람수. 그 끝에서 번뜩이는 적색의 살광 끝에 벽운 진인은 목을 내줘야만 했다.

죽은 뒤에도 부릅뜬 눈.

핏발이 선 눈동자에서 원한이 절절이 배어 나왔다.

“크하핫! 모산파는 멸문했다! 삼호방이여! 승리의 함성을 울려라!”

“우와아아아―!”

강추산의 종전 선언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모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원한과 혈향이 짙게 피어오르는 밤.

삼호방이 북천맹의 일원으로서 치른 첫 전투가 끝나 가고 있었다.

☆ ☆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모산에는 새로운 방문자가 찾아왔다.

모산파는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무너지고 불에 탄 전각.

바닥에는 부서진 물건들로 가득했고, 원한으로 눈조차 감지 못한 시신들이 그새 딱딱하게 굳어 시퍼런 시광(屍光)과 함께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지옥이 현세에 하강한 듯한 광경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십장 밖에서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 터.

하지만 새로운 방문자들은 이런 모습이 익숙한 듯, 차분한 눈길로 사방을 살피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단서들을 종합했다.

“삼호방은 오백이 넘는군요. 개개인이 제법 강합니다. 외전에 남은 시신을 보니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싸움을 많이 겪어 본 놈들이에요.”

“지독하네요. 불타는 전각에서 녹아내리는 황금까지 뜯어 갔어요. 재물욕이 대단합니다.”

“이쪽은…… 간살입니다. 그것도 여럿이서. 쯧, 더러운 면은 다 갖고 있는 놈들이구만, 이거.”

제각각 흩어져서 상황을 살피고 그 속에 남은 정보들로 상대의 역량과 성향을 추리해 낸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겹치는 부분 없이, 차분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정확한 사실만 뽑아내었다.

“이쪽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정적으로 승부를 가른 이 공격…… 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왔어요. 그 힘을 실어서 그대로 돌진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래도 텐챠이 수호대 같습니다.”

“숫자는?”

처음으로, 보고를 받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일백, 일백입니다.”

“삼호방에는 텐챠이 수호대가 일백이 배치되었다는 건가?”

“예.”

푸르륵―

말의 투레질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울렸다.

“텐챠이 수호대…… 더욱 강해졌군. 예전과는 또 다르겠어.”

우두머리 사내.

일백오십 명 적룡기마대의 지배자인 장기린은 천천히 말을 몰아가며 절벽에 남은 흔적을 살핀 뒤, 적룡기마대원들에게 외쳤다.

“텐챠이 수호대가 더 강해진 모양이다! 어때? 상대가 되겠나?”

“흐하핫!”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주님, 그 무슨 섭한 말씀을.”

“달자 놈들이 강해져 봤자 달자 놈들이지요.”

“그놈들이 강해지는 동안 우린 놀고 있었답니까? 아예 이번에 확 눌러 버려야겠습니다. 숙적이니 어쩌니 말도 못 꺼내게 말입니다.”

장기린은 그 말에 씩 웃었으나, 그래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엔 텐챠이 수호대랑만 싸우는 것도 아니다. 삼호방 놈들도 함께 싸워야 돼.”

“괜찮습니다!!”

“자신있나?”

“물론입니다!!”

일제히 터져 나오는 함성과 함께 정련되어 쏘아지는 강렬한 군기(軍氣).

장기린은 그 기운을 어깨에 실으며 씩 웃었다.

“좋다. 그럼 적룡기마대…… 출진이다!”

<1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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