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六章 ― 본능대결(本能對決)
장기린은 강서성의 일각에 서서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장막에 마치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놓은 듯이 새어 나오는 가늘고 적나라한 별빛. 피부를 감싸는 밤공기 특유의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과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고요한 모닥불 소리.
그 모든 것이 옆자리의 허전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다. 지금은 있을 리가 없는,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연꽃향이 나는 시원시원한 웃음을 가진 여인의 존재감은 그렇게나 컸다.
“휘연.”
애써 입 밖으로 이름을 내본다.
바늘을 삼킨 듯 폐부가 찌릿해지는 감각.
말해 봤자 허공으로 퍼져 쓸모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름을 말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아아…….’
장기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들끓는 감정을 삭일 수 없어 이름을 말했는데, 오히려 그리움과 상실감만이 더해졌다.
“휘연.”
불러 본다.
“휘연…….”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기억이 선명해진다.
휘연이 일하던 모습, 얼굴, 표정…… 모든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얼마나 당당하고 재기발랄한 여인이었던가.
홍화객잔에 팔려 갈 뻔하다가 자기가 침모 일을 하겠다며 나설 때는 얼마나 영특했나.
온갖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객잔을 무탈하게 유지하고 식구들을 다독거린 것은 누구의 덕분이었던가.
휴를 청월루의 손에서 빼내 온 것도, 대죽을 이용해 저렴한 가격에 객잔을 꾸민 것도, 객잔 외부에 탁자를 둬서 한 번에 손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만든 것도…… 모든 게 다 그녀의 생각이다.
‘역시, 휘연이 없으면 안 돼.’
모든 일을 끝내고 풍운객잔을 재건한다?
휘연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녀가 빠진 풍운객잔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구해 내겠어.”
장기린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다시 한 번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말을 내뱉었다.
최근의 장기린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휘연과 연관되어 보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빛을 보면 죽어 가는 그 순간에 건네준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가 생각나고, 활기찬 거리에서 사람들이 거니는 모습을 보면 휘연과 함께 항주 거리를 걷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인정했다면 함께할 수 있던 일이 더욱 많았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움과 정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젠 그녀가 없으면 세상이 의미가 없을 것 같기까지 했다.
‘구해 낸다. 반드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너를 되살리겠어!’
장기린은 저릿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 뒤, 애써 감정을 정리하고 등을 돌렸다. 동생들에게 잠시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지 벌써 반 시진이다.
피워 놓은 모닥불이 다 타들어 갈 정도의 시간.
이젠…… 그리움은 잠시 접고 척박한 현실로 되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툭툭.
장기린은 흙을 덮어 모닥불을 꺼뜨린 뒤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갔다. 그가 내려가고 난 뒤에도 모닥불 속의 새빨간 숯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형, 오셨습니까.”
언덕의 아래쪽.
적룡기마대원들이 제각각 방만하게 흩어져 있는 중심에 간부들이 하나의 모닥불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장기린이 반 시진 만에 언덕에서 내려오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운화, 추룡, 대석, 섭우생, 진구. 모두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예를 받은 뒤 부운화가 비켜 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잘들 쉬고 있었나?”
“예. 이곳까지 꽤 강행군으로 달려왔으니까요. 다들 코를 골면서 자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부운화는 씩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고 있었다.
장기린의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는 모습이었다.
“그럼 좀 더 기다렸다가 내려올 걸 그랬나?”
“하하, 그랬다간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못 일어날 겁니다.”
“그 정도로 약해졌다고? 이거, 큰일이군. 훈련을 재개해야겠어.”
“하하, 맞습니다. 다들 다시 단련시켜야 됩니다. 최근에 오뉴월의 개처럼 늘어진 모습이, 보기에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닙니다.”
부운화의 말에 근처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 아침까지 못 일어난다니, 거짓말이다. 적룡기마대원들은 모두가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살다 보니 야습이나 습격에 철저하게 단련이 되어 있었다.
코를 골면서 자다가도 인근 십 장 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눈을 번쩍 뜨고 무기를 휘두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대장이 온 줄도 모르고 내일까지 잘 거라니, 그게 우스운 농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형.”
“말해라, 운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삼호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왁자지껄하게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삼호방.
즉, 그들이 당면한 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산파에서 내려온 후 저는 대원들 몇 명을 인근의 민가로 내려보내 정보를 캐내려 했습니다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삼호방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서성 전체에 널리 퍼져 있더군요.”
“공포에 질려 말을 안 한다는 건가?”
“예. 함부로 말했다간 자신들이 죽는다…… 라는 것 같았습니다. 상인이나 농민도 지금은 삼호방의 이름을 마치 염라대왕 대하듯이 하더군요.”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이 되는 일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관청에 호소할 틈도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삼호방의 힘이란 평범한 민초들에겐 사신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삼호방의 병력은?”
“파악된 것만 해도 일천은 될 듯합니다. 무림 쪽 소문엔 지금 이 순간에도 북천맹과 흑도 문파들에게 세력이 불어나고 있으니……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로 일천인가? 만만치 않겠군.”
“이길 수 없는 숫자는 아닙니다만, 그렇게 되면 반드시 피해가 발생하겠죠.”
“그렇겠지. 간부들을 제외하곤 위험한 상대야.”
남궁세가에서의 싸움은 모든 상황이 받쳐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창천이대와 삼대, 그리고 단가와 정가의 무인들은 약하지 않다. 만약 그 당시에 모든 고수들이 남궁가주에게 신경을 쏟느라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피해가 꽤나 발생했을 것이다.
삼호방도 마찬가지다.
흑도에서 구를 만큼 구르고 사선을 넘어온 자들이라고 들었다.
그런 자들은 명문대파의 무인보다도 위험하다.
암수, 암기, 금용 병기인 화탄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피해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움직임, 행동 방식, 약점은?”
“지금 각각 조사 중입니다만, 정보원 쪽에 한계가 있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합니다.”
“그 정보원이라는 것은?”
“남궁연 소저입니다.”
“과연…….”
남궁연.
남궁휴의 여동생이자 남궁세가의 정보를 담당하는 뇌안각 항주 지부의 지부장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인재지만 강서성 전체가 삼호방의 세력에 떨어진 탓에 활동하기에 힘이 들 터였다.
‘하오문도 최근에 난색을 표했지.’
얼마 전에 만난 임춘삼 점주도 최근에 삼호방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원래 하오문은 삼호방과 같은 흑도의 성향이 짙었다. 같은 계열이기에 오히려 자연스레 하오문도 쉽사리 운신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민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운화는 눈빛을 번뜩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무슨 뜻이야?”
“삼호방이 약탈과 폭력을 통해 강서성을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걸로 민초들의 마음까지 얻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흐음…….”
“대형, 명문정파들이 왜 명분을 중요시하는지 아십니까? 그건 그들이 고지식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민초들의 마음을 살피고 세간의 평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즉, 흑도의 방파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원히 명문정파들을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삼호방이 무조건 힘과 공포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면 삼호방을 쓰러뜨릴 정보를 얻으려는 저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죠.”
“호오……?”
장기린은 놀란 시선으로 부운화를 쳐다봤다.
“그 말은 우리를 도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소리야?”
“예.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사연이 있나 보지?”
“큰아들 내외가 최근에 안화객잔에서 변을 당한 모양이더군요. 강서성주가 피살당했던 그날 같은데, 임신을 했던 아내는 복부를 채이고 갈비뼈가 부러져 죽었고, 큰아들은 가슴이 주먹에 뻥 뚫린 채 죽었답니다.”
“……원한이 하늘에 닿았겠군.”
“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 테니 삼호방과 삼호방주를 쓰러뜨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장기린은 혀를 찼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 해도 불효건만.
거기에 자식 내외가 한꺼번에 참혹한 변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런데 방금 주먹으로 가슴을 뚫었다고 했나?”
“예, 그랬다고 하더군요.”
“강한가 보지?”
“간부들 중 한 명이 나서야 할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무공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기(氣)를 사용해 칼날에 피륙이 상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를 압축하고 또 압축해 강(鋼)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기는 자신의 병기를 절세의 명검으로 바꾸어 주거나 정신을 집중한 신체 부위를 일시적으로 강철 못지 않은 강도를 지니게 만들어 준다.
무공이 절정에 올랐다는 것은 바로 이 강기를 쓸 수 있는지의 여부로 나뉘어진다.
절정.
또는 강기지경(剛氣之境).
무공에는 절정 이전과 이후가 있다고 일컬어질 만큼 그 차이는 막대했다. 상식을 뛰어넘은 고수들의 위력은 대부분 이 강기를 토대로 만들어진다.
산과 들을 훨훨 뛰어넘는다는 무림 고수의 움직임.
맨손으로 칼날을 부러뜨리고, 맨주먹으로 바위를 박살 낸다는 괴력.
그 모든 것이 강기지경에 오르면 가능해진다.
주먹을 강화시켜 상대의 인체를 뭉개거나 부술 수도 있고, 강화된 신체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과도한 움직임으로 신체가 아프다?
기로 내부를 보호하고 강기로 외면을 감싸면 얼마든지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무공의 위력을 높이고 싶다?
끌어올릴 수 있는 기의 크기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위력을 배가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무인들이 절정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침식을 잊고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하는 것이다.
절정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 오던 무림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 대 다수.
일당백.
그 모든 것이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자연스레 가능해지는 것이다.
단, 그래도 무공의 성향과 완숙도에 따라 불가능한 일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맨손으로 인체를 ‘꿰뚫는 것’이다.
대나무를 옆으로 휘게 하거나 부러뜨리는 것은 힘만 충분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나무를 맨손으로 푹 쑤셔서 쪼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맨몸으로 사람의 신체를 뚫어 버린다는 비상식.
강한 힘과 빠른 속도.
거기에 수백 번의 고련을 거친 완성된 움직임을 합해야만 가능한 기술인 것이다.
“대형, 파륵삼호를 아십니까?”
“들었어. 삼호방주의 세 아들이라던데.”
“맞습니다. 그중 셋째인 강인호가 안화객잔에서 그 부부를 죽인 원수인 모양입니다.”
“흐음, 다른 가족들은 모두 강서성주를 습격하는데 강인호만 안화객잔에 있었다는 건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장기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째서?”
“그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인지를 알아야지. 강인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객잔에 죽치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돼.”
“죄송합니다, 대형.”
“아냐. 죄송할 건 아니고…… 다만, 뭔가가 있어. 느낌이 오는데?”
눈빛에 열기를 띠는 장기린.
부운화와 다른 적룡기마대의 간부들은 그런 장기린을 보며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장기린에겐 ‘본능’이 있다.
사리에 맞지 않는 것, 상대의 약점이 될 만한 것.
생존과 승리에 관련이 되었을 때, 장기린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상함을 찾아내는 그런 본능적인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장에서도 그 본능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경우가 허다했다.
부운화의 뛰어난 무력과 섭우생의 하늘을 꿰뚫는 지략으로도 불가능한 무언가가 장기린에게는 있는 것이다.
“대형, 제가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우생, 말해 봐.”
뼈만 남은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마른 체구, 거기에 멀대처럼 큰 키를 가진 유생이 공손하게 말을 시작했다.
“둘째 형님께서 그 일에 대해 들을 때 저도 함께 있었는데, 강인호는 아무래도 주의를 끈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의를 끌다니, 관청의 관심을 끈다는 소린가?”
“예. 듣자 하니 일부러 소란을 피워 관병들이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안화객잔으로 출동하게 만들었다더군요. 삼호방은 모든 이들이 안화객잔에 주목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잠깐.”
그때, 부운화가 섭우생을 제지하고 나섰다.
“우생,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굳이 강인호만 따로 나와서 객잔에서 소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관청을 지킬 병사들을 야금야금 빼내서 숫자를 줄인다? 나쁘진 않은 생각이지만, 삼호방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것을 생각할 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강인호가 관심을 끌기 위해 소동을 피웠다는 것 정도는 부운화도 안다. 만약 단순히 그런 이유였다면 장기린이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차라리 강인호의 특이한 성격상 별생각 없이 사고를 쳤다고 보는 게 타당한 것 같은데?”
“으음, 분명 그렇습니다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냐?”
부운화는 우물쭈물하는 섭우생의 표정을 보며 그가 뭔가를 알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능란한 말솜씨를 뽐내는 섭우생이 말을 머뭇거리는 것은, 오직 진실을 알아냈을 때뿐인 것이다.
“그게…….”
섭우생은 장기린에게 말하려다 잠시 부운화의 눈치를 봤다.
운화는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섭우생은 부운화가 모른다고 했던 것을 말하려니 뭔가 미안해서 눈치를 보는 것이다.
“우생, 여기서 네가 제일 머리가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닙니다. 둘째 형님이 문무겸전의 대가라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 해 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
부운화는 섭우생의 어깨를 툭, 쳐 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섭우생이 가장 앞으로 나선 셈이 되었다.
부운화가 섭우생이 말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음, 그러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둘째 형님도 분명히 생각해 낼 수 있으셨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저 조금 빨리 눈치챈 것뿐입니다. 관병이 목적이다? 왜? 어째서 관병을 불러내야 했을까요? 설령 불러낸다 하더라도 굳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면서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에 중점을 두고 생각했더니,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섭우생은 들고 있던 철섭선을 손바닥에 탁탁, 두드렸다. 우생이 깊이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이었다.
“발본색원(拔本塞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과 딱 맞는 말은 아닙니다만, 삼호방은 발본색원하려 했던 거라 생각합니다.”
발본색원.
뿌리를 뽑아 근원을 멸절한다는 뜻이다.
“뿌리를 뽑는다? 관군의?”
“예.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노리는 뿌리는…… 강서성의 군권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큰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군문의 비상 연락 신호. 그 밀호(蜜號)를 알아내기만 하면 명 제국 군문 전체의 뿌리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
장기린과 부운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멎었다.
군문의 밀호를 알아내는 것.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중요한 일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군문의 밀호를 노렸다. 즉, 강서성주를 죽이고 강서성을 장악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대륙 전역에서 통용되는 연락 방식을 노렸다는 건가?”
“예, 그렇게 생각됩니다.”
장기린의 눈빛이 번뜩였다.
“과연, 그거였군.”
“대형……?”
“이상했던 점은 그거였어. 삼호방주와 나머지 두 아들이 강서성주를 치는 동안 강인호라는 놈은 소란을 일으켜 군문의 연락 계통을 알아낸다라……. 그래, 그래야 말이 돼. 삼호방이 굳이 그런 번거로운 행동을 한 이유가 납득이 된다는 거다.”
장기린은 자신이 느꼈던 본능적인 이상함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삼호방은 강서성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이상으로 더욱 지역을 확장할 생각이다. 그러니 굳이 큰 싸움에서 막내를 제외시키면서까지 황실 군문의 밀호를 캐낸 것이다.
‘단순한 세력 과시나 행패가 아니었어. 치밀하게 계획된 행보였다. 텐챠이……! 북천맹은 이런 식으로 명 제국을 무너뜨릴 셈이군.’
멀리 떨어진 땅에서 텐챠이의 존재감을 느꼈다.
텐챠이의 지배력.
그리고 하시르의 지략이 합쳐진 결과였다.
처음에 북천맹이 무림인을 통해 세상을 뒤집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다.
원래 한인(漢人)들은 몽고인들을 싫어한다. 원 제국 시절에 몽고인들이 한인을 색목인보다도 낮은 계급으로 취급해 모멸해 왔기에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어떤 처음 보는 몽고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도와 명 제국에 반기를 들라고 한다면 누가 순순히 그 말을 따를까.
설령 처음엔 힘에 눌려서 따르는 척을 한다고 한들, 그런 얄팍한 조합이 끝까지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텐챠이는 해냈다.
강호관직론(强豪官職論).
인종, 계급, 인성.
그 무엇도 상관없다.
무공이 강하다면 누구나 지배자가 될 권리가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모든 무림인들에게 부푼 꿈을 안겨 주었다.
한 자루의 칼은 기껏해야 열 사람을 죽이면 고작이지만, 한 줄의 문장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했던가.
강호관직론이라는 이름으로 대륙 전역에 널리 퍼져 나간 그 사상은 많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그 여파가 커지고 있다. 무림인들의 무공에 텐챠이와 하시르의 군사적 전술. 그 둘이 합쳐진 결과는 생각보다 더욱 커.’
장기린은 시선을 돌려 강서성주의 저택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삼호방주라……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되겠군.”
“대형, 치시겠습니까?”
부운화가 옆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물어 왔다.
잠시 고민하던 장기린은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
“그래, 강서성주의 자택을 친다.”
“오오―!”
즐거운 환성이 터져 나온 것은 주변의 간부들에게서였다.
추룡, 대석, 진구.
싸움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좋아하는 녀석들이었다.
“단, 정면은 안 돼. 그 부분은 전략이 필요한데…… 우생?”
“예,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마무리만 조금 더 하면 되니 시간을 주시면 완전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섭우생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촤악! 하고 펼쳐진 철섭선 사이로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작은 눈이 날카로운 빛으로 번뜩였다.
“좋아, 반 시진 안에 끝내.”
“옛!”
섭우생은 곧바로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마 그는 정보가 적힌 서찰들과 강서성 내부의 지도를 앞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추룡, 대석.”
“예.”
“예에! 대형.”
장기린의 부름에 모닥불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재빨리 일어나 다가왔다.
“너희 둘은 강인호를 잡는다. 적룡기마대도 서른 명쯤 데려가도 좋아.”
“……강인호 하나에 저희 둘입니까?”
추룡의 얼굴에 불만의 빛이 떠올랐다.
적룡기마대의 간부들 중 자신이 강인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추산이라면 또 모를까, 강인호 같은 자에게 둘이나 붙는 것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분 나빠할 것 없어. 상대는 강인호 하나가 아니니까. 주변에 삼호방 무인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피해를 줄이기 위해 두 사람을 배치하는 거다. 미리 말해 두지만 여기서 손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상대할 진짜 적은…… 남경에 있어.”
남경.
텐챠이, 삼대천, 텐챠이 수호대를 말함이다.
추룡과 대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진구.”
“옛!”
“너는 독립 유군이다. 우생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줄 수족이 필요할 거야. 스무 명을 주지.”
“저기, 대형이랑 함께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진구는 아쉬운 듯 장기린을 쳐다봤다.
상황으로 봐선 장기린이 주공(主攻)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쪽에 따라 가는 것이 싸움을 좋아하는 진구에게는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먹이를 앞에 둔 다람쥐처럼 힐끗거리는 진구를 보며 장기린은 작게 웃었다.
“너의 기동성을 살려야지. 게다가 삼호방에는 텐챠이 수호대가 백 명 정도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야. 너는 우생의 전령 역할도 하게 될 테니 이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다.”
“……예.”
진구는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그리고 운화.”
“예, 대형.”
운화는 차분한 얼굴로 옆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예.”
부운화는 두말 않고 승낙했다.
다른 의견이나 불만도 없는 듯, 마치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던 것 같은 태도였다.
장기린과 부운화.
그리고 적룡기마대 백 명이 함께하게 된 것이다.
‘삼호방과의 싸움이라……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분명 그들은 강하지만, 싸움이란 항상 의외의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장기린은 고개를 돌려 현재 삼호방주가 머물고 있을 강서성주의 저택 쪽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저택.
어느새 장기린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아버님,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강서성주의 저택 심처.
본래 강서성주가 있어야 할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강추산을 향해 파륵삼호의 첫째, 강장호가 진중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냐?”
“오늘 낮에 회음현(淮陰縣) 쪽에서 삼호방에 대해 묻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평범을 가장했으나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야 다반사로 있는 일 아니냐. 근처 무파에서 정찰이라도 보낸 것이겠지.”
삼호방주 강추산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북천맹에 들어간 뒤로 첩자들이 정보를 캐내려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삼호방이 흑도의 문파인만큼 하오문의 개입만큼은 철저하게 막고 있지만, 개방이나 다른 문파에서 잠입시킨 무인들은 여전히 삼호방 근처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정찰은 정찰일 뿐, 실제로 우리에게 손을 쓰진 못한다. 내버려 두어라.”
“아버님,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스듬하게 누워 손을 휘휘 내젓는 강추산에게 강장호는 강경하게 말했다.
“낌새가 이상합니다. 강서성주를 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까지도 주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 석연치 않습니다.”
“흐음, 너무 반응이 없다는 뜻이냐?”
“예. 황실이든 무림이든, 어느 쪽에서든 지금쯤 경제가 들어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냥 놔두는 것이겠습니까?”
황실과 무림문파들의 정보력을 생각해 볼 때, 지금쯤 온 대륙이 삼호방이 강서성을 제압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금쯤 강서성 주변에 관군이 몰려오거나 정의감으로 가득한 정파의 무림인들이 강서성으로 물밀듯이 들어와야 정상이었다.
한데 이렇게까지 방치한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다들 정신이 없는 것이다. 남경은 빼앗겼고, 지금쯤 다른 오왕들이 각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그러니 여력이 없을 수 있지 않겠느냐?”
호북의 녹림.
호남의 흑화보.
안휘의 황산파.
강북의 사혈방.
거기에 강서의 삼호방.
강서성은 남경에서 지척이니 강추산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남경이 이미 북천맹의 본거지가 되어 주목을 받는 만큼 그 인근의 강서성은 병력을 더 투입하기 곤란한 위치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
하지만 강장호는 여전히 가슴 한편으로 미증유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성적으론 다 납득이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논리’와는 다르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굳이 따지자면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맹견과 함께 방 안에 갇혔을 때 몸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던 ‘생존’의 감각이다.
“……안 좋습니다.”
강장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안 좋다고?”
“아버님, 저를 한 번 믿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흐음?”
삼호방주 강추산은 지그시 강장호를 쳐다봤다.
강추산은 왜소한 체구를 가진 것에 반해 첫째 아들인 강장호는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혈통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모친 쪽을 닮았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강추산은 강장호를 차기 삼호방주로 확고히 결정했다.
차가울 만큼 냉정한 통찰력과 일도양단의 결단력과 같은 내심의 강건함은 강추산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좋다.”
강추산은 승낙했다.
“강장호, 너는 대삼호방의 후계자다.”
“예, 아버님.”
“네 뜻대로 해 보는 것도 좋겠지. 너를 믿어 보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강장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여긴가?”
장기린은 고개를 들고 높이가 이 장이나 되는 거대한 대문의 끝을 올려다보았다. 일성(一城)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실 소국(小國)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다.
성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생산 시설, 농민, 상점, 유흥.
그 모든 것이 집결되어 자치를 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성(城). 그리고 그 성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이 바로 성주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어째서 경계병이 아무도 없는 거지?”
장기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서성주의 저택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대문 앞을 지키는 보초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거대한 저택에, 더군다나 삼호방이 강제로 점거한 상황에서 주변의 동태를 살피는 보초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 삼호방이 강서성주의 저택을 차지한 건 불과 얼마 전인데, 그사이에 긴장이 풀렸다고?”
“확실히…… 이상하군요.”
“그래, 이상해.”
부운화 역시도 장기린과 같은 심정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삼호방이 무력으로 저택을 차지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그 경계를 이렇게나 허술하게 처리할까?
오히려 저택 주변을 몇 겹이나 보강해서 경호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뭔가가 있다!’
지금 두 사람은 말도 타지 않은 채 평범한 복장으로 이곳에 찾아온 참이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다.
여기서 보초들을 도발하고 저택 내부에 있을 삼호방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데, 이상한 상황 때문에 그 전략이 첫머리에서부터 막혀 버린 것이다.
‘대문 뒤, 마당 쪽에 있는 사람은 다섯…… 납득이 안 되는군.’
“운화.”
“예, 대형.”
“저들이 우리가 오늘 습격할 것을 알 수도 있나?”
“……!”
운화는 심각한 안색으로 잠시 적룡기마대의 행보를 머릿속에서 찬찬히 점검한 뒤 고개를 저었다.
“삼호방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민가에 내려간 대원들 중 몇 명이 눈에 띄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무림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테고, 퇴로를 신경 써서 만들어 주었으니 추적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가 습격할 계획을 아는 것 역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운화의 말 그대로였다.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삼호방이 적룡기마대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장기린은 머리로는 납득이 되는데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알아봐야겠지.”
진실이 어찌 됐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장기린은 대문을 손으로 쿵쿵, 두드렸다.
안쪽에서 이내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문 옆, 얼굴 하나를 겨우 넣을 수 있을 법한 쪽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생쥐 같은 수염에 야비한 눈매를 가진 자였다.
“누구요?”
“삼호방주를 만나러 왔다.”
“……!”
안쪽의 인물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사람은 이곳에 없소.”
“그럴 리가. 삼호방이 이곳을 습격한 게 이틀 전인데.”
“……!!”
“되도 않는 거짓을 말하지 말고 삼호방주를 불러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장기린.
그의 몸에서 장군으로서 단련된 위압감이 숨김없이 뿜어져 나왔다.
“끄응…….”
일개 하인이나 병사로서는 도저히 버텨 낼 수 있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쪽문으로 보이는 야비한 눈매의 사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신음을 토해내듯 말했다.
“존함이…… 어찌 되시오?”
“알 것 없다.”
“무례하오!”
“문을 열 건가, 안 열 건가?”
열지 않으면 부숴 버리겠다는 듯한 기백.
문 뒤의 사내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뒤쪽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투호! 투호!”
무슨 암호라도 되는 것일까?
사내가 그렇게 외치자 어디선가 몰려나온 사내들로 대문 뒤의 인기척이 많아졌다.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그들은 나오자마자 대문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대오를 정렬했다.
비록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장기린과 부운화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계 병력은 그대로군.’
‘무사들이 남아 있습니다.’
장기린과 부운화가 서로 눈빛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이 정도로 반응이 빠르다면 경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끼이익―
그 순간,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 장 높이의 거대한 문이 바깥쪽을 향해 열리고, 그 안에서 노란색 바탕에 흑색 줄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사내 오십여 명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나 들여보낼 수는 없소. 어디서 온 누구인지 신분을 밝히시오.”
생쥐 수염을 한 사내가 위세등등하게 묻고 있었다.
옆에 도열한 오십여 명의 무인들을 믿는 모양이나, 장기린과 부운화에게 있어서 그 정도 수준의 오십여 명은 시간을 잠시 끄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보시오.”
“…….”
“이보시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소!”
장기린은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저택 내부만 찬찬히 둘러보았다.
족히 백 첩은 될 것 같은 대저택. 그 대부분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대문 쪽에선 보이지 않지만, 안쪽의 내실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삼호방이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한 듯보였다.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삼호방 무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칼을 뽑아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칼은 잡았으나 뽑지는 못했다.
쩡!
칼을 뽑으려는 순간,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부운화가 검집째로 장군검을 휘둘러 그의 칼을 도로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크윽……!”
삼호방 무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근처의 무인들 모두가 경이로움과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부운화에게 보냈다.
‘보이지 않았다!’
‘중간 동작이 전혀 안 보였어. 대단한 고수!’
채챙! 챙!
오십여 명의 삼호방 무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몇몇은 칼이 아니라 낫이나 유성추 같은 기문 병기를 들었고, 몇몇은 독이 든 가죽 주머니나 암기를 손에 쥐는 자들도 있었다.
“흑도는 그런 식으로 싸우나 보군.”
장기린은 삼호방의 무인들을 향해 흥미 깊은 시선을 보냈다.
흑도의 싸움에선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전장의 싸움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 말투……! 정파에서 온 건가! 정파의 떨거지들인가!”
“그러고 보면 이자들…… 도향이 느껴집니다! 정파다! 정파의 습격이다!!”
청명경을 익힌 장기린에게선 이제 살기가 아니라 청량한 도향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부운화도 마찬가지. 직접 눈을 마주친 자는 다르게 느끼겠지만, 겉모습만 보기엔 영준한 무림의 후기지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삼호방 입장에서 보기에 그들은 정파의 습격자인 것이다.
‘하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장기린은 피식 웃었다.
철우, 아니, 가면철왕 항우와 밀약을 맺고 무림맹과 우방이 되었으니 정파의 습격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운화 역시도 애초에 무당파의 정식 기명제자였다.
“비상! 비상!”
“모두 모여라! 경계 태세다!”
뎅뎅뎅뎅―!
어디선가 징을 치는 듯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한 번 징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저택 곳곳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기들 나름의 비상 신호 법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운화.”
“예, 대형.”
“내가 하지. 너는 문을 지키고 있다가 우생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처리해.”
“예, 알겠습니다.”
부운화는 장군검을 뽑아 들며 뒤쪽의 포위망을 굳혔다.
포위망.
단 두 사람이지만 삼호방의 퇴로를 막고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다.
그사이 장기린은 영락없이 지팡이로 보이는 나무 막대를 칼날이 없는 육 척짜리 무인창으로 변환시키는 중이었다.
철컹!
쇳소리와 함께 창날이 곧게 펴졌다.
모두의 시선이 신기한 창의 모습에 집중되는 순간,
휙―!
“어엇……!”
장기린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아앙!!
“……!”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공기가 폭발하며 장기린이 나타났다. 자세는 일도양단의 참격. 양다리는 어깨너비만큼 벌린 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강렬한 한 방이 가장 앞쪽에 있던 무인의 칼을 박살 내며 떨어져 내렸다.
“크악……!”
대번에 피를 토해 낸 삼호방 무인이 뒤로 떨어져 나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족히 삼 일은 운신할 수 없는 내상을 입은 것이다.
쿵! 하고 내리찍는 진각.
칼날 없는 무인창이 묵묵히 살벌한 위광을 발했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황급히 칼을 휘둘러 반격을 해 보려 했으나, 장기린의 번뜩이는 시선을 받는 순간 뻣뻣하게 몸이 굳어 버렸다.
뱀 앞에 선 개구리가 이러할까.
나름대로 치열한 흑도무림에서 구를 만큼 구른 사내들이건만, 장기린의 눈을 보는 순간 칼 한 번 내찔러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몸놀림이 반 초식이나 늦어졌다.
반 초.
눈 한 번 깜짝할 정도의 짧은 머뭇거림이지만, 장기린을 상대로 그 시간은 매우 큰 차이였다.
내리찍은 자세에서 그대로 옆으로 돌아가는 허리.
신창일체(身槍一體)가 된 무인창이 크게 주변을 휘저었다.
화아아악―!
돌풍.
스스로 폭풍의 핵이 되어 주변을 박살 내는 것이다.
장기린의 발이 발목까지 땅에 박히고, 무인창이 큰 원을 그리며 주변을 휘몰아치는 순간, 장기린이 서 있는 공간은 진공 상태에 빠져 버렸다.
“……!!”
장기린의 창격에 무기를 부딪친 사람들은 예외없이 시간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을 부릅떠도 온 세상이 회색일 뿐, 색깔이 보이지 않는다.
오감이 마비되고 신진대사가 멈춘 것이다.
번개가 내리친 뒤 한참이 지나야 우레소리가 들려오듯, 주변의 무인들은 오감을 후려치는 고통을 잠시 후에나 느꼈다.
쩌저저정!!
푸화악―!
“크허억……!”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은 창격은 근처에 둘러싸고 있던 다섯 명의 양팔을 동시에 날려 버렸다. 본래대로라면 몸이 뒤로 넘어가야 하건만, 너무 큰 충격을 짧은 시간에 몰아서 받으니 관절이 먼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아직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신체가 허공에 비산했다.
분수처럼 뿜어진 선혈이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양팔을 잃은 무사들은 척추를 타고 오르는 격렬한 고통에 눈을 허옇게 까뒤집으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전에 없이 잔인한 손속.
한 번 과감히 손을 쓰기로 작정한 장기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삼호방은 이씨세가에 못지 않은 악한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저택으로 오는 길에 본 인근의 민가는 어떠한 꼴이었는가.
살인, 강간, 약탈.
그 모든 것이 마음껏 행해진 마을은 처참한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지 않았던가.
대문은 부서지고, 재물과 집기들을 약탈당했으며, 목숨과도 같은 처와 여식이 끌려가는 꼴을 집안의 사내들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생기가 사라진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그런 만행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낄낄 웃으며 저지르는 것이 삼호방의 무인들이었다. 살려 둬 봤자 훗날 두고두고 악행만 저지를 자들이란 소리였다.
부우웅―!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살기를 끌어올린 장기린의 손에서 염라대왕의 심판 같은 막대한 경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쉬이이익―!
콰드득!
창이 훑고 지나가자 무인들의 허리가 반으로 접히며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터져 나갔다.
칼날이 없기에 더욱 잔인한 결과.
홀로 달려들던 무인의 몸이 파리처럼 터져 나가고, 한데 뭉쳐 달려들던 무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짓이겨지듯 사방으로 튕겨졌다.
퍼어억!!
콰드득!
푸화악―!
“끄악……!”
온 사방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압도적!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단 한 사람을 적으로 맞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암기! 암기를!”
피슈슉!
뒤쪽에 있던 몇 명이 비황석이나 철접, 화살 같은 암기를 장기린의 등을 향해 쏘아댔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창을 휘돌려 그것들을 다 쳐 냈다.
독도 마찬가지.
옆에서 시류를 살펴 독분을 뿌리려고 했으나, 창을 한 번 제자리에서 휘돌리는 것만으로도 독분이 다시 돌아 나와 오히려 같은 삼호방 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 이럴 수가…… 아무것도 안 통해!”
“안 돼. 상대가 안 돼. 방주님을 모셔 와야……!”
단순히 무공의 강함만이 아니었다.
싸움에서의 경험치, 위기에서의 대처 능력이 급이 달랐다.
그토록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빈틈이 없다.
암수, 암기, 독.
어떤 것을 사용해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강함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푸화아아악―!
“으아악!”
다시 한 번 공간을 가르는 일격!
세 사람이 퍽! 하고 튕겨 나가자 이제 장기린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이 열렸다.
대저택의 내전이 훤히 보이도록,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단 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으, 으으……!”
사실, 그 오십여 명도 이젠 스무 명 남짓한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몇몇은 여전히 어떻게든 싸워 보려고 칼을 들어 올렸으나 그 손은 불쌍하리 만치 떨리고 있었다.
‘전의를 잃었군.’
장기린은 그런 그들의 내심을 꿰뚫어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툭.
그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주변을 둘러싼 무인들 전원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등불을 켰을 때 숨는 바퀴벌레들이 생각날 정도였다. 장기린은 그들을 쭉 일별한 뒤 뒤에 서 있는 부운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운화는 장기린의 뜻을 알아채고 품속에서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철쟁(鐵錚)과 곤을 꺼내 뎅! 하고 두드렸다.
“큭?!”
“으윽?!”
우우우우웅―
작은 철판에서 났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만큼 크고 울림이 깊은 소리가 저택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근처의 무인들이 귀를 막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방주는 어디에 있지?”
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쯤 장기린은 근처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무인에게 물었다.
“그, 그런 것을 가르쳐 줄 것 같나!”
삼호방의 무인은 제법 용감하게 소리쳤다.
“그래? 안쪽 내실에 없다는 뜻인가?”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시 묻지. 방주는 어디에 있나?”
슥―
그렇게 싸웠음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장기린의 창이 무인의 목에 닿았다.
무음(無音), 무박자(無拍子)의 신묘한 움직임.
무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장기린은 말없이 무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마 삼호방의 보복이 무서울지, 아니면 당장 눈앞에 있는 거대한 위협이 두려울지 고민하는 중일 터.
“바, 방주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무인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안쪽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안쪽에서 나온 것은 땅딸막한 체구에 건장한 어깨, 그리고 북슬북슬하게 난 턱수염을 가진 중년 사내였다.
투호당의 당주, 오장명(吳長鳴)이다.
강호에서 제법 알아주는 절정고수로, 삼호방의 경계를 서는 투호당을 이끄는 흑도의 무인이었는데, 그는 산적 같은 생김새와 달리 취향이 고상하고 가진바 재력을 과시하길 좋아해서 항상 값비싼 황색 비단옷만 입고 다녔다.
오장명의 뒤론 그가 직접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스무 명가량의 정예 무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강렬한 모습이, 최소한 일류의 경지는 넘은 자들이었다.
“뭐야, 젊은 놈이 아닌가!”
투호당주 오장명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쳐다보더니 의심스런 눈빛으로 장기린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무공을 통해 쌓은 공력의 깊이와 상관이 있기 때문에, 보통 젊을수록 무공이 약한 법이다. 젊은 육체와 열정만으로 헤쳐 나가기엔 무림은 만만치 않다. 때문에 그는 지금 눈앞에 널브러진 시신들이 장기린이 한 일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네놈이 한 짓이냐!”
“그렇다.”
“이놈이! 편히 죽을 생각은 말아라! 감히 삼호방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기를 부리느 오장명.
절정고수라고는 하나 장기린과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는 무력이었기에 장기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놈이 기고만장하구나! 이 몸의 칼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
“이놈이!!”
장기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저택의 좌측 담벼락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 저택에 있는 병력은 이게 전부인가?”
“뭣?”
“이쯤 되면 안쪽에서 다 튀어나와야 할 텐데, 뭔가 이상하군.”
장기린은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했다.
적대하는 자를 앞에 두고도 눈을 감는 여유.
눈앞의 오장명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 이놈이……!”
당황한 오장명은 눈을 감은 장기린을 공격하지도, 그렇다고 내버려 두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칼자루를 잡았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하길 수차례.
그러는 사이 장기린은 탐색을 마치고 눈을 번쩍 떴다.
“……왔군.”
“오오오오―!”
긴 장소성(長嘯聲)과 함께 담벼락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속속 담을 뛰어넘어 왔다.
두두두두―
“어엇?!”
히히힝―
두두두두두―
성인 남자의 어깨 높이가 넘는 담장을 뛰어넘어 일백가량의 기마대가 우르르 저택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장명과 삼호방 무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이 언제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마병을 본 적이 있었겠는가. 바람처럼 달려와 표범처럼 뛰어오르는 말과 기수의 모습은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기마병들은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음에도 말이나 사람이나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일체의 동요가 없었다. 그들은 저택에 내려선 뒤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와 방기와 삼호방의 무인들을 둘러쌌다.
포위망을 짜는 모습이 능숙했다.
맨 안쪽엔 장기린과 부운화. 그 겉을 삼호방 무인들이 포위하고, 또 그의 바깥은 적룡기마대 일백 명이 포위한 셈.
특히 삼호방 무인들은 안팎으로 갈 길이 막혀 버렸다.
“이, 이놈들이 감히……!”
오장명은 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보였으나, 주변을 둘러싼 적룡기마대의 모습이 다들 범상치 않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못한 것이다.
“우생.”
“예!”
“살펴봤나?”
“예!”
적룡기마대 일백 명을 이끌고 갑작스레 나타난 섭우생.
그는 기마를 이끌고 장기린에게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섭우생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럴수록 장기린의 얼굴은 굳어져 갔다.
“안에…… 아무도 없다고?”
“예. 제가 직접 가 본 결과, 내실 쪽은 예전 강서성주의 식솔들만 남았을 뿐, 삼호방의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장기린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시기가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필 이때에 삼호방주와 파륵삼호의 첫째, 둘째가 자리를 비웠습니다. 남아 있는 하인들에게 물어보니 몰래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죄, 제 불찰입니다.”
섭우생은 참모로서 이번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이는 섭우생.
정중한 태도에 미안함과 한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냐, 그런 게 아니야.”
“예?”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장기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다. 그들은 분명 고의로 자리를 피했어. 그리고…… 어디선가에서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겠지.”
“……!!”
“이곳의 경계 상황, 위치, 분위기, 그리고 지금까지 삼호방 수뇌부의 행동 양식으로 볼 때 그들은 지금 이곳을 비워선 안 돼. 분명히 고의적으로 우릴 피한 거다. 그것밖에 답이 없어.”
섭우생의 얼굴도 장기린을 따라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대형,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모릅니다. 저는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습니다. 장담컨대 삼호방은 저희에 대한 정보를 조금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명 제국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두뇌를 가진 책사가 바로 섭우생이었다. 그가 정보가 새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으리라.
“습격은커녕 습격자의 유무에 대한 정보도 모른다면 공격을 대비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섭우생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듯 보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머리가 아니라 느낌으로는 알았을 수도 있다.”
“느낌이라니요……?”
섭우생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느낌.
그것만큼 불확실하고 주관적이며 극히 유동적인 감각이 또 있을까?
이번 작전은 그가 직접 정보를 취합하고 적의 역량을 분석한 뒤, 지형을 파악해 만든 작전이었다. 몇 번이나 오차를 수정했고, 머릿속에서 가상 전투를 몇 십 번이나 해 보았다.
그런 것이 단순히 ‘느낌’만으로 파해되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삼호방의 수뇌부는 느낌만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느낌에 따라 망설임없이 행동했다는 것입니까?”
“그래, 그런 것 같다.”
“……있을 수 없습니다. 대형을 제외하고 그런 자는 없습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넓다, 우생. 강자와 기인이사는 모래알만큼이나 많이 있어. 그중엔 본능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겠지.”
“그런……!”
툭. 툭.
장기린은 여전히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섭우생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뒤 휙 몸을 날려 담벼락을 한 번 박찼다. 이중 도약이다. 허공에서 몸을 튕긴 장기린은 이 장 높이 대문의 문설주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의 시선 아래.
당황과 공포에 질린 사십여 명의 삼호방 무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생! 적룡기마대!”
“예엣!”
쩌렁쩌렁한 대답이 울려 퍼졌다.
“모두 죽여라!”
“옛!!”
처척!
그들에게 있어서 장기린의 명령은 곧 하늘의 명령이다.
적룡기마대가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려 중심에 있는 삼호방의 무인들을 겨누었다.
달빛에 반사되는 서늘한 칼날의 빛.
일백 적룡기마대의 군기가 확― 하고 뿜어져 나왔다.
“큭……?”
“윽……!”
처음 싸움에서 살아남은 스무 명, 그리고 절정고수인 오장명과 그를 호위하는 스무 명의 일류고수들까지 합해 총 사십여 명의 사내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는 있었으나, 이미 숫적으로도, 기세에서도 짓눌려 기가 죽어 있었다.
“크읏……! 숫자가 너무 많군. 탈출이다! 퇴로를 열어라!”
“가자! 빠져나가!”
오장명과 투호당의 무인들이 대문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날렸다.
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부운화 한 사람뿐.
그들의 눈에 가장 빠져나가기 쉬워 보이는 퇴로가 바로 대문 쪽이었던 것이다.
“비켜랏!”
쉬이익―!
가장 앞에서 달려간 오장명이 부운화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제법 날카로운 기세.
절정고수답게 칼날에 강기의 빛도 언뜻언뜻 보였다.
쩌어엉!
“허엇!!”
하지만 오장명의 칼은 일격에 튕겨 나왔다. 그는 손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반탄력에 대경하여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찌, 그 나이에 그런……. 네놈, 혹시 구파의 제자냐?”
“…….”
어느새 뽑아 든 장군검으로 오장명의 칼을 튕겨 낸 부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장명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했다.
그뿐인가, 천운이 도와 피해 냈을 뿐이지, 곧바로 반 회전하여 목을 노리던 칼날에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다. 오장명은 섬뜩한 심정으로 목덜미에 새로 생긴 큼직한 상처를 손으로 더듬었다.
“다, 당주!!”
단 일격을 겨뤘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가장 쉬운 퇴로라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오장명의 칼을 튕겨 내며 얼핏 보였던 푸른빛은 분명 강기지경이었던 것이다.
강기를 쓴다는 것은 분명 무공의 경지가 절정 이상이라는 뜻.
그것도 오장명을 일격에 내리누르려면 초절정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체 이들은 누구지?’
‘어떻게 저렇게 젊은데 당주보다 더 강할 수가……?’
뒤쪽에서 지켜보던 삼호방의 무인들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으…… 크하앗!!”
오장명은 험상궂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더니,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쩌엉! 쩡! 쩌정!
“크아압―!”
칼이 미친 듯이 휘둘러졌다.
오장명은 목숨을 걸고 분투하였으나, 불과 십 초가 지나기 전에 부드럽게 회전한 검격에 의해 가슴이 길게 베이며 무릎을 꿇었다. 부운화는 일격에 요혈을 모두 끊어 놓았다. 길어야 일각 이상 버틸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다, 당주!”
“이놈들, 감히 당주님을…… 크악!”
사방에서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찌르고, 베고, 휘돌리고.
한 쌍의 장군검으로 펼치는 태극의 검술은 바늘 하나 파고들 틈도 없이 완전무결했다. 게다가 부운화의 검술은 정교함에 인마일체를 단번에 동강 내는 파괴력까지 갖췄다.
퍼억! 푸화악!
“흐이잇……?!”
부운화에게 다가가는 족족 무인들은 핏덩이가 되어 다시 제자리로 튕겨 나왔다.
암기. 독분.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부운화는 장기린에 못지않은 괴물이었던 것이다.
“으으……!”
“무, 무리야! 못 이겨! 못 지나간다!”
“자, 잠깐, 뒤에서…… 크악!!”
부운화가 압도적인 검술로 대문을 틀어막은 사이, 사방에서 몰아친 적룡기마대원들의 공격이 등을 훤히 내놓고 있는 삼호방 무인들을 휩쓸었다.
도주를 하려다 공격을 당한 상황이다.
삼호방 무인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 채 줄줄이 쓰러졌다.
“우군(右軍)! 거창! 좌군(左軍)! 격도(擊刀)!”
“타하앗―!”
“차핫!!”
푸푸푹! 촤아악! 푸화악!
“으아악……!”
섭우생의 지시에 따라 적룡기마대원들이 오십 명씩 두 개의 군으로 갈라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우군이 창으로 삼호방의 무인들을 한쪽으로 몰아내면, 좌군이 칼을 휘둘러 베어 내는 식이었다.
숫자가 많은데다 실력까지 좋으니 승부는 순식간에 판가름 났다. 삼호방 무인들은 제대로 능력을 살려 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끝났군.”
장기린은 거기까지만 보고 시선을 돌렸다.
승부는 났다.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휘이잉―
장기린은 뒤에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높은 곳의 밤바람은 시원하다. 손바닥 한 뼘 정도 너비의 좁은 공간, 이 장 높이 문설주 위에서는 환하게 불을 밝힌 대저택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분명히 어딘가 있어.’
장기린은 마치 부엉이처럼 눈을 빛내며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상하게 텅 비어 있던 저택의 내실.
그건 장기린의 ‘본능’대로라면 누군가가 미리 알고 도주한 흔적이었다.
만약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삼호방의 요인들 중에 본능적으로 공격당할 것을 눈치챈 자가 있어서 미리 자리를 피한 거라면…… 장기린은 분명 그자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저택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곳은 두 군데다. 동쪽의 전각과 서쪽의 구릉.’
동쪽의 전각은 저택 내부에 있는 종탑이었고, 좌측의 구릉은 제법 울창하게 수풀이 자라 있는 언덕이었다.
‘찾았다! 저쪽!’
인근의 유력한 장소를 몇 군데 찾아내는 사이, 장기린은 한순간 그를 향하는 은밀한 시선을 느꼈다.
서쪽 구릉이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장기린은 분명 자신을 집요하게 쫓는 시선을 느꼈다.
“……사라졌군.”
하지만 직접 몸을 날려 쫓기도 전에 그 시선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장기린이 시선을 눈치챈 바로 그다음이었다.
시선을 보내고 다시 거두는 시점이 너무나 절묘했다.
‘거리가 백 장에 다다르는데 이쪽의 동태를 정확히 살피고 시선을 거뒀다? 눈이 좋은 건가, 아니면 감각이 좋은 건가?’
어느 쪽이든 무공의 실력 고하를 떠나 동물적인 본능이 대단한 자일 터.
“재미있군. 나와 술래잡기를 하겠다는 건가.”
장기린은 전장에 있을 때의 기억과 감각을 되살리면서 조용히 웃었다.
본능과 본능의 대결.
강서성주의 저택에서 그의 새로운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