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90화 (72/686)

第八十七章 ― 살수명부(殺手名付)

강서성주 저택의 서쪽 구릉.

울창한 수림 사이에 몸을 숨기고 한쪽을 노려보던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개안공(蓋眼功)을 익혔다.

덮을 개(蓋), 눈 안(眼).

눈을 덮는 무공이라는 뜻이다. 기(氣)로 눈을 덮고 심결을 외우면 십 리 밖의 글귀도 읽을 수 있다고 하여 개안공이라고 하는데, 강장호는 그 무공을 익힌 덕에 의외의 곳에서 여러 가지 이득을 얻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안공을 이용해 백 장이나 떨어진 강서성주 저택의 내부를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처음 저택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얼굴은 선명하게 확인했다.

두 사람의 인상.

두 사람의 외모.

오십여 명의 삼호방 무인들을 압도하는 경이적인 무공도 확실히 눈에 새겼다.

‘괴물들이군.’

강장호는 강추산의 무공을 절정으로 익힌 후 세상에 적수가 몇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인 강추산조차 앞으로 경륜만 조금 더 쌓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한데 오늘 그 생각이 깨졌다.

아직 젊은 나이, 강장호보다 어리면 어렸지 결코 많지 않은 나이의 두 사람이 강장호보다 더욱 뛰어난 무예를 보여 준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이쪽을 알아차린 듯한 그 눈빛…… 소름이 끼쳤다.”

거리가 백 장이나 떨어진데다 어두운 밤이니만큼 들킬 확률은 희박했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기엔 마지막에 그를 향한 시선이 너무나 명확했다.

‘대단한 자다. 주의해야겠어.’

강장호는 두 사람의 얼굴과 인상착의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구릉 안쪽의 수림 내부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풀 사이, 일부러 베어 내어 만든 평탄한 땅 위에 일단의 무리가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강장호는 그중 가장 상석에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 저택이 함락되었습니다.”

“으음……!”

강장호의 보고에 삼호방주 강추산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결국 네 말대로 되었구나.”

“죄송합니다.”

“클클, 아니다. 숨겨진 적을 알게 되었으니 투호당 하나면 싸게 먹힌 셈이지. 다만 궁금한 게 있다.”

강추산은 강장호의 장대한 체구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 되는 키였으나, 그가 한 번 눈을 사납게 치켜뜨자 강장호보다도 훨씬 큰 거인처럼 보였다.

“어째서 투호당이었느냐? 오장명은 내가 삼호방을 세울 때부터 함께 한 가신인데다 절정고수다. 더군다나 투호당은 우리 삼호방의 경호를 맡기던 곳이지. 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느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강장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조리있게 말했다.

“투호당주 오장명은 능력에 비해 욕심이 과합니다. 무공은 절정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으며, 거기다 자신이 방의 시작부터 함께한 공신이라는 생각이 있어 방의 재물을 은닉한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삼 년 내에 삼호방에 해가 될 인물입니다.”

“허어, 그래?”

“예. 그리고 적어도 그 정도 인물이 아니라면 적의 진신 전력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절정고수가 있어야 상대도 절정 이상의 실력을 꺼낼 터.

그러니 적어도 오장명 정도의 고수는 남겨 둬야 미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가 있다는 게 강장호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개파공신을 미끼로 써서 처리한다? 클클, 잘했다. 그래, 지도자는 그래야 하는 것이다. 냉철하기가 한겨울에 쇳덩이 같아야지.”

“예, 아버님.”

“그래서? 오장명을 희생시켜서 얻은 게 있더냐?”

강장호는 고개를 저었다.

“투호당주가 얼마 버티지 못하여 알아낸 것이 적습니다.”

“……얼마 버티지 못했다?”

“예. 십 초식 정도를 버티고 곧바로 가슴이 베였습니다.”

이제껏 여유를 잃지 않고 있던 삼호방주 강추산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절정의 고수인 오장명을 십 초식 만에? 그럼 초절정이라는 뜻일 터. 무림십대고수라도 왔다는 게냐?”

“초절정의 고수인지, 아니면 실전에 강한 무공 덕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십대고수라고 보기엔 너무나 젊었습니다.”

“젊다니, 몇 살이나 먹었기에?”

“……이립이 안 되어 보였습니다.”

“뭐라? 이립도 안 돼?”

강추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단둘이서 오십여 명의 삼호방 무인들을 압도했고, 그중 한 명이 투호당주를 십 초식 만에 쓰러뜨렸습니다.”

“둘이라니, 그런 놈이 둘이다?”

“예.”

“크음……!”

강추산은 불편한 신음을 흘리며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만만치 않겠군. 도대체 그런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냐? 혹시 구파인가?”

강장호는 잠시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무공을 떠올려본 뒤 고개를 저었다.

“구파…… 는 아닌 듯했습니다. 구파라 보기엔 무공에 살기가 너무 짙었습니다.”

“네 눈이라면 정확하겠지. 한데 구파도 아닌데 그 나이에 그 경지라? 이해할 수가 없군.”

“어디 출신인지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알아봐라. 왠지 심상치 않은 놈들이야.”

“예, 아버님.”

“그나저나 귀찮게 되었군. 강서성주를 없앴으니 다음은 군권인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어.”

강추산은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제게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아버님.”

“말해 봐라.”

“흑도에는 흑도의 방식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호오?”

강추산은 흥미가 생기는 듯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네 말은 설마……?”

“예. 설령 무림십대고수라도 피해 갈 수 없는 것. 더군다나 정체도 불분명한 뜨내기들이라면 더욱 치명적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더군다나 우리는 피해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예, 일석이조입니다.”

강장호는 옆에 있던 무인에게 지시를 내려 지필묵을 받은 뒤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굵고 선명하면서 특징을 절묘하게 묘사하는 필체.

강장호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인물화에도 능통함을 보였다.

“그게 그 두 놈의 얼굴이냐?”

“예.”

“한 놈은 귀티가 나고 한 놈은 사납게 생겼구나. 그런데 이 둘이 십대고수 수준이라고?”

“예, 아버님.”

“흐음…….”

강추산은 두 사람의 인물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강장호에게로 돌려주었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강장호는 자신이 그린 인물화를 품속에 넣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자들에게 흑도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 ☆ ☆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하군요.”

“그래, 이상해. 어쩐지 이 말을 이틀 연속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장기린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어제와 달라.”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유는?”

“……알아볼까요?”

“아니, 나중에 따로 알아보지. 어제 있던 일을 보통 사람들이 알 리는 없지 않나.”

장기린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오늘은 강서성에서의 싸움이 있던 다음 날.

그리고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상점과 사람들이 밀집한 강서성의 중심가였다.

물론 최근 삼호방의 행패로 통행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지만, 그래도 생계가 걸려 있는 탓에 상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상점의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하나같이 장기린과 부운화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습이 특이한가?”

“아뇨. 상당히 평범하지 않습니까?”

“으음…….”

“옷도 일부러 평범한 무복을 입었고 화려한 장식도 없습니다. 실제로 사흘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같은 복장이라도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부운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주변과 별로 구분도 되지 않는 평범한 갈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무기도 부운화는 장군검을 봇짐처럼 천으로 싸서 등에 짊어졌고, 장기린의 무인창은 애초에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지팡이로 보였다.

또한 장기린은 이제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청정한 도향을 내뿜어서 가끔 도사가 아니냐고 착각을 받을 정도였다.

물론 때때로 잘생기고 귀티나는 부운화가 주목을 받기는 하지만, 이번엔 그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이 명백히 뭔가를 ‘아는 듯한’ 눈빛으로 경계심이 가득한 채 그들을 주시하는 것이다.

“……뭔가 있어.”

하룻밤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장기린은 주변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식료품을 파는 시전으로 다가갔다.

오늘 장기린과 부운화가 중심가로 나온 이유는 백여 명의 일행이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건장한 사내들이다 보니 먹는 음식의 양도 많았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어도 모자라는 장정들인데다, 한 끼에 밥을 한 공기씩만 먹어도 사람 수가 백이나 되니 그 숫자가 무려 백 공기였다. 평범한 집에서 한 달은 먹을 양식이 고작 한 끼 만에 날아가는 것이다.

처음엔 저택의 창고에서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으나, 삼호방이 어찌나 철저하게 약탈을 했는지 도저히 남아 있는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장기린이 식량을 사서 돌아가면 굶주림에 지쳐 눈에 불을 켜고 있을 장정들이 백이나 있는 것이다.

‘별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만약 식량을 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상인에게로 다가갔다.

“식량! 건량! 건포! 건육! 종류별로 팝니다! 오세요! 오세요! 싸요! 싸!”

“이보시오.”

이제 갓 이립을 넘은 듯, 꽤나 젊은 얼굴의 상인은 반가운 얼굴로 장기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상인은 장기린과 부운화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장기린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건량과 건육을 좀 사러 왔는데…….”

“건량은 작년 가을에 말린 걸로 이쪽에 있고, 건육은 소금을 친 것과 안 친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가격은 어떻게 되오?”

“건량은 두 되에 동전 열 전, 건육은 소금을 안 친 건 한 근에 동전 서른 전이고, 소금을 친 건 한 근에 동전 서른다섯 전입니다.”

“소금을 친 게 비싸군.”

“아이쿠, 그럼요. 요새 정세가 하도 시끄럽다 보니 소금 값이 올라서 이 정도 받아도 남는 게 없습니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북천맹의 여파는 이런 곳까지 뻗어 있었다.

상인이 남는 게 없다고 하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믿어선 안 되는 말이지만, 아마 소금값이 올랐다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난이 일어나면 치안이 어지러워지고, 치안이 어지러워지면 물자의 유통이 어려워진다. 게다가 북천맹에 가입한 역적 중에 하나가 녹림이니 더욱더 그렇다.

“저희 가게에서 파는 건육은 씹는 맛도 좋고 부드러워서 많은 분들이 찾습니다. 맛 좀 보시겠습니까?”

“아, 고맙소.”

상인은 꽤나 큼직한 육포 하나를 맛을 보라며 내밀었다. 오랜 시간 상인일을 해 온 듯 손님의 관심을 끄는 게 매우 능숙해 보였다.

장기린은 그걸 둘로 나눠 부운화에게 건네주고 자신도 씹었다. 씹자마자 짭짤한 맛과 함께 건육 특유의 진한 고기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상인의 말대로 꽤나 품질이 좋은 물건이었다.

“건육은 대량으로 사려고 하오.”

“대량이라면 얼마나……?”

“한…… 백 근 정도.”

“백 근이나요?!”

건육은 그리 싸지 않은 물품이다. 그렇기에 상인은 그걸 백 근이나 산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재고는 있소?”

“아, 예. 때마침 엊그제 건육을 들여왔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가격 협상을 합시다.”

“가격…… 협상이요?”

“설마 대량으로 사는데 제값을 다 받으려고 했던 거요?”

장기린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태도.

상인은 물론이고, 부운화 역시도 깜짝 놀라며 장기린을 쳐다봤다.

“대형……?”

“저기, 그럼 가격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시는지……?”

장기린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건육이 담긴 포대를 뒤적거리며 물건을 살폈다.

“안쪽엔 소금이 덜 뿌려져 있군.”

“예? 아니, 아닙니다. 상등의 건육이니만큼 소금도 듬뿍 뿌렸습니다.”

“이것 보시오. 소금이 안 붙어 있지 않소? 게다가 아래쪽엔 색깔이 변한 것도 있군.”

“아, 그건 자연적인 현상으로, 드셨을 때 지장은…….”

“먹는 데 지장이 없더라도 변색이 되었다는 건 좋지 않은 뜻이지. 재고가 다 이런 식이라면 별로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소.”

“아, 제가 안쪽에 있는 재고까지 합쳐서 좋은 걸로 골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좋겠소. 가격은…… 근당 서른 전으로 해 주시오.”

상인은 어깨를 떨며 화들짝 놀랐다.

“예에? 그렇게 되면 저는 이 할 가까이 손해를 봅니다.”

원래 가격이 한 근당 서른다섯 전.

백근이면 삼천오백 전이고, 그걸 한 근당 서른 전짜리로 바꾸면 상인은 오백 전을 깎아 주는 셈이다.

“대량으로 물건을 사는 손님이 이쪽에서 흔치 않을 것 같소만. 게다가 원래 상점의 구매가와 소금 값을 생각해도 근당 서른 전이면 충분히 남지 않겠소?”

“……!!”

상인은 급소를 찔린 것마냥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쪽……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객잔을 운영했소.”

“으음, 역시 그러셨군요.”

상인은 잠시 난감해하다가 이내 낯빛을 결연하게 굳혔다. 물론 얼굴에 상인 특유의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최근에 소금 값이 많이 올라서 정말로 저도 곤란합니다. 서른세 전으로 하시죠.”

“그건 너무 비싸군. 대량으로 구매하는데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저희 가게의 건육은 워낙 품질이 좋아서 소량으로 팔아도 잘 팔립니다.”

“그러니 대량으로 재고를 다 팔고 물건을 더 갖다가 소량으로 또 팔면 이득이 두 배 아니겠소?”

“……으음, 서른두 전으로 하시죠.”

“난 이 건육 말고 쌀도 살 것이오. 물론 한 섬 이상살 것이오. 서른한 전. 그 이상 받으려 하면 다른 상점으로 가겠소.”

칼을 들고 싸워야만 전투가 아니다.

세 치 혀로 치열하게 가격 경합을 벌이는 것은 이미 상전(商戰)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으음…….”

부운화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

마침내 상인은 졌다는 듯이 양손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서른한 전으로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

“하하, 그럼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상인이 육포를 새 포대에 담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자, 옆에서 부운화가 신묘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대형, 언제 그렇게 세상 물정을 알게 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처음에 객잔을 살 때는 바가지를 쓸 만큼 세상물정에 어두우셨으면서 지금은 상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흥정을 잘하시니 하는 말입니다.”

장기린은 소리없이 웃었다.

“사람은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

“……이왕 달라질 거면 장군 직에 올라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평범한 생활이 좋은 거다.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어.”

비록 나라의 대소사를 논하는 게 아니라 동전 몇 문을 놓고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해도, 그는 이런 평범한 생활 쪽이 더 좋았다.

부운화 역시도 그런 장기린의 마음을 알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인!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사십대 정도 되는 장한이 장기린의 것으로 보이는 육포 포대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미는 포대는 매우 묵직했다.

“누구시오?”

“아, 저는 이 가게의 주인입니다. 아까 그 녀석은 제 조카이지요.”

“……그렇소?”

“예. 듣자하니, 한 근당 서른한 전으로 타협을 보았다던데…… 대단하십니다. 하하, 지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잔돈이 충분하니 은자와 동전을 합해서 쓰겠소.”

“예. 그러면 저희야 좋지요.”

잔돈이라는 것은 언제가 되었든 큰 문제다.

작은 화폐는 작은 화폐대로, 큰 화폐는 큰 화폐대로 무게도 많이 나가고, 항상 필요한 만큼 구비해 두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전장에서 발행하는 어음을 많이 쓰는데, 그건 따로 수수료를 내야 해서 손해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잔돈이 필요없는 현금을 가진 손님은 귀중한 존재였다.

장기린은 육포 포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품 안의 전낭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달그락거리는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렇게 장기린의 한 손이 품안에 봉해지는 순간,

촤악―! 하고 육포 포대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살수(殺手).

살수가 나타난 것이다.

‘알아채지 못했다!’

장기린은 정말로 놀랐다.

습격을 가한 살수들은 실력이 대단한 자들뿐이었다.

은신술, 탄신공, 찰나를 노리는 쾌검술이 전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장기린과 부운화가 둘 다 습격 직전이 될 때까지 그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 대단함이 절로 상상이 되지 않는가.

덮쳐 온 살수들은 몸이 경계를 푸는 절묘한 시점을 아는 자들이었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심지어 근처에 사람들도 많은 곳에서 살수가 습격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장기린은 한 손을 품안에 넣은 채로 그대로 철판교의 수법으로 뒷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몸을 뒤로 젖혔다.

쉭―!

섬뜩한 소음과 함께 장기린의 왼쪽 옷깃이 잘려 허공에서 나풀나풀 떨어졌다.

육포 포대를 찢고 솟아오른 살수가 남긴 흔적이었다.

간신히 한숨 돌렸으나 살수의 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이 있었다. 위쪽. 상점의 햇빛을 가리는 차양막에 숨어 있던 살수가 검을 마치 창처럼 꼿꼿하게 세운 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쉬이익―!

이번 공격은 좀 더 날카로웠다.

신검일체(身劍一體).

온몸의 무게를 실어 필살의 심경으로 날리는 공격이었다.

이미 허리를 젖히고 있던 장기린은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창을 휘둘러 공격을 쳐 냈다.

채앵―!

급작스런 공격에 잠시 당황했으나 장기린은 유연한 대처를 보였다.

허리를 젖힌 자세 그대로 뒤로 미끄러지듯이 물러났다. 한 보 반을 뒤로 물러선 뒤 허리를 다시 꼿꼿하게 세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살수들 역시 그걸로 포기하지 않았다.

육포 포대에서 튀어나온 살수가 양손에 길쭉한 대나무 통을 들고 겨누는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사광이 눈부시게 빛났다.

퉁!

피슈슈슈슉―!

“……!!”

폭우침(暴雨針).

대나무 통 안에 화약을 이용한 기관장치를 만들어두고 그 반탄력으로 독이 묻은 수십 개의 독침을 쏘아내는 암기였다. 수십 개의 독침이 날아오는 모습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폭우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기린은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철컹, 하는 쇳소리와 함께 무인창이 육 척짜리 창으로 변하고, 휘리릭― 휘돌리는 창술에 폭우침들이 마치 커다란 천에 휘말린 것처럼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사이 천장에서 떨어졌던 살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뽑아 든 비도를 직접 던지더니, 품속에서 수상쩍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장기린에게 투척한 것이다.

“어딜!”

이번에 나선 것은 한 보 뒤에 떨어져 있던 부운화였다.

부운화는 어느새 봇짐에서 꺼낸 장군검을 뽑아 들고 날아오는 가죽 주머니를 장군검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휘리리릭―

태극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움직임.

은광을 번뜩이는 장군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자, 어느새 사나운 기세로 날아온 가죽 주머니가 마치 가벼운 낙엽처럼 칼날의 끝에 살포시 얹혀 있었다.

암기로 내던진 주머니를 날카로운 칼날로 받아 내는 신기(神技).

힘의 흐름을 이용하는 이화접목의 극을 보여 주는 한 수였다.

지이잉―

부운화의 검날이 정면을 겨눴다. 그때, 공세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자세를 바로 잡은 장기린도 무인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급습은 실패로 끝났다.

이젠 본격적인 대결만이 남았을 터.

“취잇!”

그런데 살수 두 사람은 기묘한 쇳소리를 토해 내더니, 바닥에서 펑! 하고 터지는 연막탄을 내던진 뒤 느닷없이 도망쳐 버렸다.

“이런……!”

연막과 함께 공격을 하는 줄 알고 긴장했던 두 사람은 연기가 가라앉았을 때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허탈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뒤늦게 쫓으려 해도 도주와 은신의 전문가인 살수들이 작정하고 도망친 만큼 흔적을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딱 두 번 공격하고 급습이 실패하니 곧바로 도주라…….”

“철저한 살수입니다. 절대로 무공으로 싸우지 않는군요.”

살수는 무공으로 싸우지 않는 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찰나의 빈틈을 파고들어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살수들의 싸움 방식인 것이다.

최적의 시점을 잡아 최고의 공격을 하고, 그게 실패하면 곧바로 미련없이 등을 돌린다.

무인의 자존심이나 오기 따위는 없다.

살수는 그런 종족이었다.

“특급 살수였어. 대단한 놈들이었다.”

장기린은 잘려 나간 옷깃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특급 살수를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객잔에 있을 때 만나 본 적이 있어.”

이망.

낭화에게 집착해 청월루 안에서 몰래 숨어 지내던 특급 살수가 떠올랐다. 암기, 독분, 금강석 가루를 묻혀서 만든 금강사까지…… 예측할 수 없는 무기들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몸놀림이 은밀하고 빨라 직접 대결하면 상대하기가 까다롭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겨뤄 보니 더하군.’

확실하진 않지만, 이번에 그를 급습한 두 사람은 그때의 이망보다 더 강한 살수인 것 같았다.

검선과의 훈련마저 끝낸 ‘지금의 장기린’이 무려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없어졌군요.”

“……아, 그렇군. 그럼 주인이라던 말도 거짓말이었던 건가?”

연막탄을 터뜨리며 도망친 것은 살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나타나 포대를 건네주던 사십대의 장한도 이제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처음의 그 상인은……?”

“그 사람은 한통속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장기린과 부운화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황급히 가게 내부로 뛰어들어 갔다.

“읍……! 읍……!”

두 사람은 가게의 구석에서 입에 재갈을 물고 양손과 양발이 밧줄로 꽁꽁 묶인 젊은 상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부운화가 다가가 밧줄을 풀어 주자 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파하! 하아, 하아…… 그, 그 사람은 갔습니까?”

“으음, 그게…….”

“도, 도대체 아까 그 사람은 누굽니까? 가,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팔다리를 묶고 재갈을 물리더니…….”

상인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눈빛은 흔들리고 말도 더듬는다.

시전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으로서 언제 이런 험한 꼴을 당해 봤겠는가. 이런 일은 살아생전 처음 있는 일일 것이 분명했다.

“후우, 애써 한 흥정이 소용이 없겠군.”

장기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은자 두 냥이오.”

“예……?”

“이래저래 사건이 많았잖소. 건육에 대한 값과 오늘 있던 일…… 이걸로 계산을 끝내는 게 어떻겠소?”

은자 두 냥은 동전으로 사천 문.

본래 줄 삼천백 문에서 구백 문을 더한 값이었다. 조금 전 살수들의 습격으로 포대도 찢어졌고 근처의 상품 중 일부도 땅에 흩어졌다.

살수의 습격 자체가 장기린을 노린 것이 분명한 이상, 그는 상인에게 보상을 해 줘야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

아무리 당황하고 황망해도 상인은 상인이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확 변하더니,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고는 은자를 받아 들며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하, 이게 뭐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고. 사지육신 멀쩡하면 된 겁니다. 곧바로 포대에 담아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상인은 활기를 되찾고 후닥닥 안쪽의 창고로 뛰어들어갔다.

놀라운 돈의 힘이었다.

잠시 후, 창고에서 상인이 낑낑대며 가져 나온 육포 포대를 받아 들며 장기린은 안쪽을 주의 깊게 살폈다. 혹시 또 살수가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육포 값을 깎았다고 벌 받은 겁니다, 대형.”

“시끄러워.”

그렇게 두 사람이 툭탁거리며 웃는 사이, 상인은 쭈뼛거리며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말을 걸었다.

“저기, 손님.”

“음, 왜 그러시오?”

“혹시, 여기에 그려진 초상화가 손님들 아닙니까?”

“그게 무슨……?”

장기린과 부운화는 상인이 건네는 초상화를 받아 들고는 눈을 부릅 뜨고 말았다.

“이건……!!”

“이게 어디서 났소?”

초상화 속에는 상당히 정확하고 세밀하게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특징을 잘 잡아 두어서 누가봐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장기린과 부운화는 다급한 심정이 되어 상인에게 캐물었다.

그러자 상인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아침에 삼호방의 망나니들이 다녀갔습니다. 이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뭘 팔지 말라고 하더군요. 만약 하나라도 물건을 팔면 가게를 뒤엎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삼호방에서……!”

장기린은 어제 느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밀하게 느껴지던 시선.

그 시선의 주인공이 장기린과 부운화의 얼굴을 그려 온 시전에 돌려 버린 장본인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물건을 팔았소?”

“삼호방 놈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놈들, 어찌나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지…… 그놈들이 팔지 말라고 하면 더 팔아 버려야죠. 안 그렇습니까?”

상인은 삼호방에 원한이 있는 듯 숨을 씩씩거렸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소.”

사람들이 많은 시전에서 살수를 상대로 일장 활극까지 벌였다. 애초에 따가운 시선을 받던 두 사람이니, 시전 내에서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하, 그놈들이 뭐라고 하면 돈도 못 받고 물건을 빼앗겼다고 하면 되지요. 마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상황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어차피 내일 잠시 가게를 닫고 물건을 떼러 멀리 다녀와야 합니다.”

“으음…….”

“삼호방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손님들은 뭔가 대단한 분들이겠죠. 삼호방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십시오. 그러면 된 겁니다.”

대범하게 씩 웃는 상인에게서 삼호방에 대한 증오와 상인으로서의 애환이 느껴졌다.

강서성 사람들이 지금 삼호방에 대해 얼마나 큰 반감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상황.

장기린은 그저 고맙다고 말하며 밖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된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삼호방 놈들,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 듯합니다.”

두 사람은 상인에게 받아 온 자신들의 초상화를 다시 한 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군.”

주변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돌려 고립시키고, 특급살수를 고용한다.

흑도 문파의 방식대로 보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촤르르릉―

푸화악!!

“큽……!”

억눌린 신음과 함께 측간의 분뇨 통 속에서 칼날을 들고 솟아오르던 살수가 머리가 박살 난 채 다시 분뇨 통 속으로 잠겨 들었다.

허리춤이 풀린 채로 창을 휘두른 장기린은 잔뜩 미간을 좁힌 채 불쾌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젠 하다하다…….”

첫 습격을 당한 날로부터 사흘째.

한창 주변 삼호방의 지파들과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보일 수밖에 없는 아주 잠깐의 틈을 노리고 살수들이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상점에서의 첫 습격이 실패한 후 살수들은 물량 공세로 작전을 바꾼 모양이었다.

실력이 좋은 특급 살수를 보내지 않는 대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살수들을 보냈다. 적룡기마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래도 공격이 뜸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항상 대원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용변을 볼 때.

살수들은 장기린이 혼자가 되는 시간만을 노려서 집요하게 공격을 했다.

방식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잠이 든 장기린을 향해 장거리에서 독침을 쏘아 날리고, 어떨 때는 평범한 행인을 가장하여 지나가다가 극독을 뿌려대기도 했다.

사람은 습관적인 생물이다.

일정한 행동 양식에 장애가 생기면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과 성향이 우울하거나 예민하게 변해 버린다.

살수들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몸이 흐트러지고, 몸이 흐트러지면 예상치 못한 빈틈이 생겨나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에 습격이 있을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항상 혼자가 있을 때만을 노리는 듯하다가도, 어떨 때는 동료와 함께 있는 대낮에도 절묘하게 암습을 가하기도 하고, 또 지금처럼 분뇨 통 안에 숨어 있는 지독함을 보이면서 암습을 하기도 했다.

“……어서 대책을 강구해야겠어.”

장기린은 쓸모없는 창호지로 무인창에 묻은 분뇨를 닦아 내며 치솟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최근 들어 많이 예민해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인지.

마치 전장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밤을 새며 주변을 경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삼호방을 없애든, 아니면 살수 문파를 없애 버리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군.’

장기린은 마음을 정하고 강서성 번화가로 걸음을 옮겼다.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각자 할 일이 있는 동료들은 모두 강서성주의 저택에 두고 왔다.

혼자가 되었으니 암습의 위험이 더욱 커졌을 테지만, 아무리 살수 문파가 지독하다고 해도 지금 그가 향하는 곳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인가…….”

일각가량을 걸은 후 장기린은 꽤 정갈하게 만들어진 객잔 앞에서 멈춰 섰다.

겉보기엔 주변에 있는 건물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객잔이지만, 딱 하나, 객잔의 대문 앞에 ‘파란색 연등’이 걸려 있다는 점이 달랐다.

“……어느 지역을 가든 입구에 파란 연등이 달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시면 저나 제가 지시를 내린 사람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드릴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끼이익―

장기린은 꽤나 뻑뻑한 대문을 열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가 한창일 시간인데도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삼호방의 여파였다.

삼호방이 장악한 후 강서성을 통행하는 사람이 극도로 줄어들었고, 그 때문에 객잔과 같은 가게도 영업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장기린이 텅 비어 있는 객잔 내부를 잠시 살펴보고 있으려니 안쪽에서 제법 영민하게 생긴 십대 후반의 점소이가 달려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장 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젊은 점소이의 입에서 장기린을 아는 듯한 말이 나왔다.

“이곳엔 누가 와 있소?”

“장 대인께서 아는 분이 와 있습니다.”

하오문에서 장기린과 안면이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니, 즉, 임춘삼 점주가 와 있다는 소리였다.

젊은 점소이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푯말을 밖에 내걸고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방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데, 놀랍게도 주방의 항아리 두 개를 치우자 그 밑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숨어 있었다.

저벅, 저벅.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장기린은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살폈다.

“임 점주가 이곳에 와 있소?”

“죄송합니다만, 저는 말씀드릴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알려줄 수 없다니? 아까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와 있다고 했잖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실질적인 인명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보 집단 특유의 깐깐한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기린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젊은 점소이도 구태여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하 통로는 삼십 보쯤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횃불이 밝혀져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자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계단을 다 올라 어느 방 안에 도착하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단단한 나무 바닥과 고급스런 집기들이 가득한 기풍이 있는 다실(茶室)이었다.

“저는 이만…….”

젊은 점소이는 거기까지만 안내한 뒤 다시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다.

장기린은 자리에 앉았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다실.

앞에는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 대인.”

예상했던 대로 하오문 제이지점의 점주 임춘삼이었다.

본래 악양루의 점주였으나 지금은 장기린을 전담하게 되어 항상 뒤를 따라다니며 보필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반갑소, 임 점주.”

“예, 저도 반갑습니다, 장 대인. 그리고 이쪽은……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장기린은 임춘삼의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람을 응시했다.

고급도, 싸구려도 아닌 적당한 푸른색 비단 무복을 입었다. 남장을 하고 관모를 썼는데 그게 전혀 어울리지 않고, 곱상한 얼굴과 새하얀 피부 때문에 여자라는 사실이 훤히 드러났다.

“오랜만이네요, 장 가가.”

“남궁연……!”

장기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연을 이곳에서 볼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를 안내해 준 젊은 점소이가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남궁연.

남궁세가의 정보 집단인 뇌안각의 항주 지부장이자 남궁휴의 유일한 여동생.

풍운객잔 시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곤 했던 여인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반갑군. 하지만 항주 지부는 어쩌고? 왜 여기에 와있는 거지?”

“어? 부 공자에게 못 들으셨나요?”

“부 공자라니? 운화?”

“네. 그분께 제가 뇌안각 ‘총괄 당주’가 되었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승격이 된 덕분에 이제 항주에만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남궁연은 자신감과 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연은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기품과 내숭이 없는 솔직한 태도, 그리고 지혜로운 눈빛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활짝 웃자 꽃이 만개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총괄 당주라……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 이름인데?”

“뇌안각의 다음 대 후계자 정도 되는 직위예요.”

“흐음, 그렇군.”

“오라버니가 출세한 덕을 좀 봤죠.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드렸지만…… 장 가가, 오라버니를 도와주셨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남궁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만둬. 가족끼리 도왔을 뿐이야.”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남궁연은 사내처럼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장 가가, 총괄 당주는 가진바 권한도 상당해요. 앞으로 장 가가가 할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도와드리겠어요.”

“고마운 이야기군.”

“장 가가가 지금 왜 하오문을 다시 찾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남궁연은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최근에 살수들의 공격으로 괴로우시다면서요?”

“……그래,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장애가 많다.”

“살수들은 한 번 의뢰를 받으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아요. 살수계의 신용이나 이름값이 걸려 있으니까요. 싸움이 중단되는 것은 살수들이 모두 죽거나 또는 의뢰주가 없어질 경우뿐이죠.”

“결국은 그렇게 결론이 나는 건가…….”

“네. 그리고 남궁세가와 뇌안각은 장 가가의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친분 때문만이 아니라, 정도무림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그건…… 그래, 알겠다. 받아들이지.”

방금 남궁연의 말은 남궁휴의 여동생으로서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일원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공식적인 발언이니만큼 받아들여야 했다.

“그 뒤는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총괄 당주님.”

“물론이에요. 그렇게 하세요, 임 점주님.”

두 사람은 서로 깎듯하게 대하면서도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남궁연이 허락하자 임춘삼을 앞으로 나섰다.

“장 대인, 야조탑(夜鳥塔)을 아십니까?”

“들은 적이 있소. 호북에서 제일가는 살문…… 아니오?”

“예, 맞습니다. 지금 북천맹에 가입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는 문파가 호남제일살문 흑화보입니다. 그리고 원래 흑화보와 경쟁하며 호북제일살문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문파가 바로 야조탑입니다.”

“흐음……. 즉, 그 말은…….”

“예. 지금 장 대인을 노리고 덤벼드는 자들이 바로 그 야조탑의 살수들입니다.”

호북제일살문 야조탑.

호남제일살문 흑화보.

그 두 곳의 이름은 장기린도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을 만큼 유명했다.

“야조탑이 삼호방의 의뢰를 받은 것이오?”

“최근에 삼호방주의 첫째 아들이 야조탑주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럼 확실하군.”

장기린의 눈에서 차가운 분노가 번뜩였다.

“삼호방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삼호방이 흑도의 문파다 보니 하오문의 추적을 끊는 일에 익숙해서 뒤를 쫓는 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임춘삼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장기린은 새삼 삼호방의 저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천하의 하오문조차 뒤를 쫓지 못했다니.

하오문이 어떤 곳이던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벌어진 이씨세가와의 싸움도 며칠 뒤엔 소상히 알고 있을 만큼 정보 수집에 뛰어난 곳이 하오문 아니더냔 말이다.

기녀, 마부, 하인들로 구성된 정보망은 그 어떤 정보도 캐낼 수 있는 큰 무기다.

그런 하오문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장기린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삼호방은 흑도의 문파답게 수십 개의 안가(安家)를 가지고 있어요. 아, 안가는 아시죠? 흑도 문파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살수에게 습격당할 것을 대비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 두는 비밀 장소를 안가라고 해요.”

이번엔 남궁연이 다시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그 안가라는 곳을 찾을 방법은 없나?”

“몇 개는 알아냈고 실제로 탐색까지 해 봤지만, 그곳에서 삼호방 수뇌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어요. 삼호방주 강추산은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자예요. 아무래도 다른 장소에 숨은 것 같더군요.”

“으음…….”

“아마 한 번 몸을 숨긴 이상 쉽사리 흔적을 드러내지는 않을 테죠. 수뇌부를 먼저 치는 방법은 재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변에는 삼호방의 무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지만, 정작 그 수뇌부는 찾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장기린과 남궁연이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사이, 임춘삼이 다시 나섰다.

“장 대인, 생각에 방향을 바꾸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의미요?”

“사실 삼호방주가 강서성주의 저택을 내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크게 놀랐습니다. 흑도의 위신이 걸려 있는데, 설마 본진을 버릴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렇게 특이한 일이오?”

“강서성주의 저택은 지형으로 보나 표면적인 명분으로 보나 절대로 내주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강서성의 군권을 노리는 입장에선 말입니다.”

“군권……?”

장기린은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빛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군권이라니, 삼호방주가 군권을 노리고 있었소?”

“예. 남경 공략에 대한 지원군으로 대부분의 병력을내보냈지만, 여전히 강서성 도독부에는 징집만 하면 육천가량의 병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력이 있습니다. 삼호방주 입장에선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권한일 것입니다.”

“육천…… 육천이라…….”

징집병 육천.

육천이라는 숫자는 적지 않다. 한 전쟁의 책임자에게 맡기는 병력이 일만이다. 한 성을 지키고, 더 나아가 다른 지역을 공격할 경우에도 대단한 위력을 발하는 것이 육천이라는 숫자였다.

“육천이라는 병력이 있었음에도 삼호방에게 그렇게 맥없이 당하다니……!”

“관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본래 관에선 상급자가 잘못되면 하급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도가 있지 않습니까?”

임춘삼의 말이 정확했다.

그것이 바로 관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철저한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기에, 이렇게 소수 정예에 의해 상급자가 잘못될 경우 오히려 대처가 어눌해지는 것이다.

결과 못지 않게 절차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관이다.

만약 하급자가 임의로 자신의 권한을 넘는 행위를 할 경우, 그 결과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군법상 반역이나 하극상으로 몰려 오히려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뛰어난 하급 무관들이 그런 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도 꽤 자주 있었다.

그러니 누가 함부로 나서서 일을 벌이려 하겠는가.

괜한 정의감에 나섰다가 처참하게 처형을 당할 필요는 없다.

상급자가 잘못되었다면 황실에서 새로운 관리가 임명될 때까지 몸을 사리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차라리 도독부의 군장이 과감하게 다른 지역의 군과 연계를 취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안 좋아지진 않았겠지.’

최선의 수를 눈앞에 두고도 도독부는 책임 문제 때문에 강서성의 상황에서 손을 떼어 버렸고, 결국 삼호방은 완전히 성을 장악해 버렸다.

“하지만 도독부가 삼호방주의 말을 따를 리가 없지 않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삼호방은…… 흑도 문파이니 말입니다.”

임춘삼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흑도 문파는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데 충실합니다. 이번에도 도독부 군장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협박을 하려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자식을 인질로……!”

장기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확실히 그 방법을 쓰면 도독부의 병권을 마음껏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까지 쓰는 자.

그게 삼호방주이고, 또한 흑도 문파였다.

보면 볼수록 삼호방은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망종들만 모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군권이라면…….’

장기린은 자신에게 반격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운화는 대장군의 부관이었고, 적룡기마대 대원들 각각이 백인장 이상의 공을 쌓은 인물들뿐이다. 더군다나 장기린은 철이 들 때부터 전장에서 살았고, 지금껏 일평생을 군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단언컨대, 지금 그들보다 군(軍)에 익숙한 사람은 이 세상을 다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삼호방과의 싸움은 숫자에서 밀리기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군권을 얻게 되면 달라. 오히려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킬 수도 있다.’

사방에서 모여든 흑도의 무인들이 강서성을 장악하고 패악을 부리는 상황이다.

지금까진 괜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까 봐 조용히 두고 보았으나, 도독부에 있을 병력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강서성 내의 삼호방 무인들을 일거에 쓸어 버릴 수도 있을 터.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군.”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서성의 군권을 장악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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