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93화 (126/686)

第九十章 ― 삼호방주(三虎房主)

장기린이 강서성의 군권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오문 점주인 임춘삼과 남궁세가 뇌안각의 남궁연이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최대한 지원해 준 것이다.

현재 강서성 도독부 군장의 성격, 매일 반복되는 일과와 약점이 될 만한 비사,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가족 관계…….

그리고 도독부에 징집된 병사들의 숫자와 수준, 무장 현황까지.

겨우 죽간 하나에 집약된 정보의 수준은 장기린을 경악하게 만들 만큼 대단하고 섬세했다.

이래서 거대 문파에선 꼭 정보를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어 두는 것이다.

잘 정리된 정보의 힘은 백 명의 절정고수보다도 더 쓸모가 있었다.

이렇게나 상세한 정보를 얻었으니 강서성 도독부를 손에 넣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대형, 대단하시군요! 언제 이런 인맥을 얻어 두셨습니까?!”

일의 진행을 위해 적룡기마대의 지낭인 섭우생을 두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었을 때, 섭우생은 크게 반색했다.

“제가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대형도 너무하십니다. 이런 인맥이 있었다면 진작 소개시켜 주시지그러셨습니까?”

섭우생은 평소 모습에 걸맞지 않게 짐짓 원망을 하기까지 했다.

“어이, 나도 이 사람들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얼마 전이라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심정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언젠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대가를 받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 엄청난 고생을…….”

섭우생은 흥분하자 평소 습관대로 고사성어를 인용하여 말을 길게 늘이기 시작했다. 임춘삼은 그저 허허 웃었고, 남궁연은 재밌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어.”

“……크흠! 대형께서 잘못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아쉽다는 이야기이지요.”

“됐으니까, 두 사람과 상의해서 좋은 방법이나 찾아봐.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내야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 뒤로 섭우생은 거의 하루 종일을 하오문의 강서성 지부에서 보내며 임춘삼과 남궁연, 두 사람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사이 장기린은 저택으로 돌아와 부운화와 대련을 하고, 빈둥거리고 있던 적룡기마대를 데리고 격렬한 훈련을 했다.

머리 좋고 정보를 다루는 데 전문가인 세 사람이 작전을 짜는데 그가 굳이 그 자리에 있을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대형! 대형!”

한데, 그날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질 때쯤, 섭우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저택으로 뛰어 들어왔다. 초조하고 불안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대형, 큰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어찌 드려야 할지……. 이거야말로 대실태(大失態)! 제가 부족하여 틈을 주고 말았습니다! 큭! 대형께서 저를 처벌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섭우생은 장기린을 향해 달려와 다짜고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책감이 가득한 목소리이긴 한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생, 무슨 일이지? 차근차근 말해라.”

“제가…… 너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장호라는 인물을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강장호? 그 파륵삼호의 첫째?”

“예, 삼호방주의 첫째이자 삼호방의 다음 대 후계자 말입니다. 그가 바로 흑막이었습니다. 삼호방의 실질적인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우생, 진정하라니까.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다. 강장호가 실세인데 왜? 뭐가 문제라는 거지?”

“제가 자료상으로 본 강장호는 무공은 강하지만 과묵하고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라 사람의 지도력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번에 짠 작전도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하오문이나 뇌안각에서 파악한 바로는, 강장호는 머리가 대단히 좋고 지도자로서의 위압감이 강해서 삼호방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서삼경을 떼고 오경서를 완벽히 외울 수 있어서 과거를 봤다면 장원에도 붙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인재랍니다. 그리고 육도(六韜)에 삼략(三略)을 포함한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완독한 병법의 귀재라는 겁니다.”

“…….”

“모르시겠습니까, 대형? 병법의 귀재랍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제가 짰던 전략을 다 꿰뚫어 보고 틈을 파고들 여지가 생겨 버립니다. 전략가는 전략가의 마음을 꿰뚫어 보니 말입니다.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이 위험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

추룡과 대석을 말함이다.

“추룡과 대석이 위험하다고……?”

장기린의 눈빛이 그제야 비로소 심각해졌다.

“저는 지금까지 삼호방을 점점 더 크게 키워 온 능력이 삼호방주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강장호에게 있었다고 한다면…… 저쪽은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전략을 시행할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전략이라니? 그게 뭐지?”

“설마하고 가능성을 가장 멀리 밀어 두었던 건데…… 삼호방주 강추산과 파륵삼호의 강장호, 강산호 형제가 모두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비록 방심하여 상황이 꼬이긴 했으나 섭우생의 혜안은 과연 대단했다.

제자리에 앉아서 하는 생각이 십 리 너머의 성문 밖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저쪽의 고수들이 다 추룡이 있는 쪽으로 간다? 어째서 그렇지?”

“삼호방주는 속전속결로 적의 머리부터 치는 성격입니다. 제가 이번 전략을 짠 것도 그러한 성격에 치중을 두었던 것이지요. 저는 삼호방주가 이곳 저택으로 곧장 쳐들어올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무튼, 그게 아니라 강장호가 실질적인 지배자라고 할 경우 상황이 달라집니다. 강장호는 약한 것부터 차근차근 없애 나가는 성격입니다. 팔다리를 자르고, 상대가 꼼짝할 수 없을 때 목을 베는 식이지요.”

“그런 말인즉, 강장호의 성격상 지금 밖에 나간 추룡과 대석을 먼저 노릴 것이다?”

“예, 대형.”

섭우생의 얼굴은 어두웠다.

“저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설령 그렇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강인호를 척살하고 돌아와야 합니다만…… 강장호가 병법에 능통하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쪽의 수를 꿰뚫어 보고 한 수 앞서서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

“그리고 이건 아직 가정이지만…….”

말을 끊은 섭우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을 거듭했다.

“만약 강장호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나다면…… 아마 오늘쯤 저희에게도 공격이 가해질 겁니다.”

“……양동이군.”

“예. 병력은 분명히 저쪽이 위. 성밖의 작전을 확실히 성공시키기 위해 양동과 시간 끌기를 사용할 것입니다.”

즉, 추룡과 대석을 본진으로 공격하되, 이쪽에서 함부로 나설 수 없도록 저택 쪽으로도 병력을 보내 견제할 거라는 소리였다.

“으음……!”

장기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추룡과 대석을 돕기 위해 달려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비워도 되는가?

“다녀오십시오, 대형.”

“운화?”

옆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적룡기마대의 둘째 부운화가 어느새 차분한 얼굴로 일어나 있었다.

“이쪽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대형은 추룡과 대석을 구해 주십시오.”

“……괜찮겠어?”

“예, 물론입니다. 제가 예전부터 수성전에 능했던 것을 잊으신 겁니까?”

부운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성전.

그렇다. 이건 수성(守成)이다.

그들은 지금 상대의 본진틀 빼앗은 상황이니, 앞으로는 지키는 싸움이 주가 될 터였다. 항상 유군을 이끌고 돌아다니던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대형께선 수성전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지.”

“하하, 그러니 다녀오십시오. 대형께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시원하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어울립니다.”

부운화의 웃음소리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처럼 맑고 시원했다.

“경계! 경계!”

“저택 밖에 수상한 인물들이 보입니다!”

“대로 쪽과 후문 쪽에도 나타났습니다!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한곳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숫자는 대략…… 삼백!”

“후문 쪽! 사백입니다!”

“그밖에도 대로변에 수상한 자들이 많습니다. 복색이 제각각! 무기를 들었습니다!”

삐익― 삐익―

적룡기마대원들끼리 약속해 둔 경계신호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일부는 휘파람 소리, 일부는 호각을 불고 있었다.

“벌써……!”

“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상대는 칠백에서 일천 사이군요.”

“탁 트인 대로보다 후문 쪽을 더 경계한다라…… 퇴로를 완전히 차단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요.”

부운화와 섭우생은 혼란스러운 가운데도 정확히 원하는 정보를 찾아 분석해 냈다.

전투 직전의 공기, 당장에라도 뭔가가 폭발할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저택 안을 음산하게 감돌았다.

부운화는 후문 쪽을 바라보며 입에 손가락을 두 개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이쪽으로!”

두두두두―

휘파람 소리를 듣자 일단의 말 무리가 부운화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회색빛 털을 가진 명마 은수, 부운화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최근에 장기린이 얻은 말과 섭우생의 말인 홍오(紅梧)도 있었다.

“대형, 어서 타십시오! 입구 앞까지는 엄호하겠습니다!”

“괜찮겠어? 상대는 숫자가 열 배다.”

“개별적인 강함은 이쪽이 열 배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운화는 부드럽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이렇게 때때로 매우 호탕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두두두두―

장기린은 순해 보이는 갈색 말에 올라타고 정문을 향해 질주했다.

저택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세로 폭과 너비가 각각 백 장은 되는 넓이였다. 천 명이나 되는 적들로부터 지키기에 적룡기마대 백 명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터.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부운화를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대형께서 나가신다! 대문을 열어!”

“옛!”

이미 일백 명의 적룡기마대원들은 제각각 무기를 들고 전투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대문이 열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운화는 장기린과 함께 말을 질주하면서도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말이 너무 많다! 절반은 내려! 우생이 이끄는 조는 말에서 내리지 마라!”

“옛―!”

이런 급박한 상황일수록 경험의 차이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전장에서 온갖 수라장을 겪고 살아남은 대원들은 급박하게 내려지는 명령임에도 조금도 우물쭈물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절반의 대원들이 말에서 내렸다.

기마병이라는 것은 돌진할 때 힘이 생기는 법.

한 장소를 지켜야 하는 수성전에서는 기마가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었다.

“대형, 저는 그럼 여기서 빠집니다! 옥체보중해서 돌아오십시오!”

섭우생이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탈했다.

이제 대문까지 남은 거리는 오 장 정도.

흘끗 바라보니 옆에 선 대원들이 섭우생의 지시에 따라 대열을 정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형.”

그때, 옆에서 함께 말을 달려 주던 부운화가 입을 열었다.

“삼호방에게 적룡기마대의 힘을 보여 주십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안에서도 운화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삼호방은 민중에게 포악을 부리고, 북천맹에 빌붙은 역적들이다.

게다가 사사로이는 지금 적룡기마대를 적대시하는 악적들일 터.

어찌 생각하면 오늘의 이 싸움이 ‘공식적인’ 적룡기마대의 첫 번째 싸움일 듯했다.

이씨세가나 남궁세가에서의 싸움은 그들의 일이 아니었고, 강서성주의 저택을 탈환했던 일은 야밤에 소규모로, 게다가 기습적으로 일어나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 정신없이 끝나 버렸으니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흑도의 무인이 일천 명가량 모여들었고, 곧 이 저택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싸움이 될 터.

‘적룡기마대의 공식적인 일보(一步)…… 인가.’

황제에게 인정받을 공을 세우기 위한 싸움.

휘연과 객잔 식구들을 대신한 복수의 시작.

그 모든 것의 장대한 서막이었다.

장기린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무인창으로 변화시켰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투박했던 나무 지팡이가 금세 육 척 길이의 철창으로 변화한다.

비록 칼날은 없지만…….

이 무인창은, 오늘 그 어느 날보다도 많은 피를 머금게 될 것이다.

‘어차피 보여 줄 거라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겠지.’

“운화!”

“예, 대형!”

“이곳을 부탁한다! 저택은 잃어도 상관없다! 대원들을 지켜 다오!”

“걱정 마십시오!”

언제나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딱 부러지는 부운화의 대답이 장기린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허공에서 마주치는 시선.

둘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마음에 담았다.

“가자!”

히히힝―!

그 순간, 오 장의 거리를 뛰어넘어 대문을 지났다.

아까 누가 대문에는 삼백 명이 있다고 했던가.

이젠 사백이다.

아니, 지금도 계속 무인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사백도 넘을 듯한 숫자였다.

장기린은 말의 등자에 박차를 가했다.

두려움을 모르고 달려가는 전마, 그 위에 버티고 선 장기린과 단단한 철창의 무게와 강도.

그 모든 것을 총합하여 내찌르는 일격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자.

거처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낭인인 듯, 이빨이 듬성듬성 나간 거치도와 몸 곳곳에 온갖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자가…… 불행히도 세상에 다시 재림한 붉은 악귀의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

쉬이이익! 푸화아악!!

“……!”

부운화의 검술은 완전무결하다.

추룡의 용왕십삼기는 사나운 파도와도 같고, 대석의 힘은 천하무쌍이다.

섭우생의 섭선술은 치명적인 요혈만 노리는 극도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으며, 진구에겐 야생 짐승과도 같은 터질 듯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다면 장기린은 그중 누구와 닮아 있는가?

정답은…… 모두였다.

모두의 장점을 합친 자, 그게 장기린인 것이다.

후두두둑!

수많은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밤하늘에 핏물과 살점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장기린의 일격은 거치도를 들고 있던 사내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던 세 명까지 휩쓸어 버렸다.

일격에 세 명을 휩쓸어 버리는 무공은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막강함을 품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주변에 있던 사백 명, 흑도 무인들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터엉!

히히힝―!

장기린은 그들이 움찔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해 사백 명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심장을 두드리고, 허공에서 완벽한 투로를 그려 내는 한 자루의 철창은 모두의 눈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쒜에에에엑! 푸화악! 푸확!

호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기관천(逸驥貫穿)에 다시 한 번 세 사람의 육신이 꼬치에 꿰이듯 뚫려 허공에서 흩어졌다.

주변에 있던 다섯 명이 멍한 눈빛으로 있다가 다급하게 칼을 들어 올려 다리를 찌르려고 했다.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으나, 장기린이 시선을 여전히 정면으로 고정한 채 무인창을 수평으로 크게 휘두르자 다섯 명의 가슴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촤아아악!! 쩌억! 푸확!

“커허……!”

“크르르……!”

가슴이 터지고 육신이 부서져 나갔다.

참혹한 모습.

장기린은 침중한 표정이었으나 과감한 손속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없었다.

“막아! 다리를 노려!”

“상대는 하나다! 겁먹지 마!”

뒤에서 그러한 외침들이 나왔지만, 다들 말뿐이었다.

실제로 장기린과 마주하게 되면 이미 죽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있는 듯한 무력함을 느꼈다.

“아, 악귀……! 악귀다!”

“상대할 수 없어. 못 이겨!”

전장에서의 별명이 장기린을 모르는 흑도 무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누구든 지금의 장기린을 보면 똑같이 느끼리라.

스스로의 존재조차 잊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

무심한 눈빛 아래 숨어 있는 극한의 살기를 보면 그 누구나 몸이 얼어붙는다.

천적을 조우한 듯한 느낌일 터.

자신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지고, 그사이 상대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이다.

“마, 막으라니까!”

“저걸 어떻게……! 이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

오늘 저택을 습격한 자들은 다들 북천맹이 외친 강호관직론에 혹해 모여든 흑도의 낭인들이었다. 재주껏 익힌 무공으로 한몫을 챙겨보기 위해 왔을 뿐, 삼호방에 대한 의리도, 그들을 모두 이끌 구심점도 없었다.

히히히힝―!

“으아악……!”

“피해! 피하…… 커헉!”

푸화아악!!

또 한 번의 일격 끝에 사백 명의 중심이 뻥 뚫려 버렸다.

한 사람의 돌진에 사백 명 이상의 무인들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 대열을 지킬 줄도 모른다. 대열이 없으니 싸우려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이 서로 부딪치고, 동선이 흐트러지며 극심한 혼란을 만들어 냈다.

장기린은 우왕좌왕하는 사백 명의 중심을 관통하며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수많은 무인들의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말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찰박거리며 튀어 올랐다.

압도적인 광경.

북로전쟁 당시 붉은 악귀의 재림이다.

그리고 포위망을 완전히 빠져나오는 순간, 갑자기 장기린의 동작이 변했다.

치리리링― 쉬익!

피슉! 파파파팟!!

압도적이고 강한 모습을 보여 주던 움직임에서 탈피해, 절정고수의 창술과도 같은 유려한 동작이 뻗어져 나왔다.

일연적룡무(一衍赤龍舞).

검선의 도움으로 창안된 무상의 절기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치 천수관음이 하강한 듯 주변으로 수십 개의 잔상이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수백 마리의 뱀처럼 앞으로 뻗어 나간 창끝이 주변에 있던 십여 명의 가슴과 어깨를 관통했다.

“큭……!”

“끄악!”

이전처럼 막강하지는 않지만, 이건 또 나름의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아름답고 유려하며, 빈틈이 없다.

이전까지의 장기린이 ‘괴물’이라면, 지금의 장기린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초상승 고수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을 쓰러뜨린 뒤, 장기린은 삼십 장가량의 거리를 격해 여전히 대문을 막아선 채 서 있는 부운화와 눈이 마주쳤다.

‘이 정도면 됐겠지?’

‘충분합니다, 대형.’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져 온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 머리를 돌려 박차를 가했다.

“이럇!”

히히힝―!

갈색의 전마는 장기린을 등에 태우고 쏜살같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역시 대형은…….”

장기린이 떠나간 뒤, 부운화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갈수록 막강해지는 무력.

부운화 자신도 나이 또래에 비해 과한 힘을 갖고 있는 편인데, 장기린은 그야말로 천도를 벗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비상식적인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뒤를 따를 기분도 나는 거겠지.’

그 정도는 해 줘야 적룡기마대의 대주가 될 수 있다. 부운화에게 대형 소리를 들으려면 그 정도 무력은 갖춰야 하는 것이다.

“대형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원들을 정렬시키고 옆으로 다가온 섭우생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아무리 구심점이 없다고 해도 나름대로 무공을 익힌 무인 사백 명인데…… 한 번의 돌파로 삼분지 일이 무너지는군요. 상산 조자룡이 저랬을까요?”

“상산이라기보단 관운장이지. 일기관천으로 단번에 돌파하는 걸 봤잖나?”

“하긴,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만부부당이군요.”

만부부당(萬夫不當).

일만 명이 맞상대해도 당해 낼 수 없다.

그야말로 장기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섭우생은 말을 이었다.

“드디어 주인공들이 납시는군요. 조금만 빨랐어도 상황이 꼬일 뻔했습니다.”

일찍부터 섭우생이 말하는 ‘주인공들’을 주시하고 있던 부운화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텐챠이 수호대, 드디어 만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들을 남경 근처에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다. 텐챠이 수호대였다.

북천맹에서 삼호방에게 지원해 준 텐챠이 수호대 일백 명.

초원을 달리던 준마를 타고 경갑을 입었으며, 놀라운 승마술과 쾌도술로 전장을 주름잡던 독종들이 강서성주의 저택에 나타난 것이었다.

“강장호라고 했던가, 이 전략을 짠 녀석이?”

부운화는 텐챠이 수호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삼호방주의 첫째 아들입니다.”

“알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절묘해.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흑도 무인들 일천과 텐챠이 수호대 일백을 함께 보내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사려 깊게 행동해야 했는데.”

섭우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명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하는가, 한 사람의 능력조차 꿰뚫어 보지 못해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거늘.

“자책하지 마라, 우생.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어떻게 만회하느냐지.”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섭우생의 눈빛이 강해졌다.

보통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걸 만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우생은 얼마나 행운아인가?

이렇게 곧바로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가.

“둘째 형님, 제가 후문을 맡겠습니다.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막아 내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는 정문만 신경 쓰면 되겠군.”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저 섭우생을 믿어 주는 부운화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씩 웃은 뒤, 각자 몸을 돌렸다.

“그럼 무운을, 둘째 형님.”

“조심해라. 텐챠이나 삼대천도 없는 이런 곳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가만히 안 둘 거다.”

서로를 향하는 말에 따뜻한 마음이 가득 전해진다. 섭우생은 자신의 말에 올라타며 대원들에게 외쳤다.

“기마를 탄 자는 모두 나를 따른다! 후문으로 가자!”

“옛!”

두두두두―

기마를 탄 적룡기마대원 오십 명이 섭우생을 따라 일제히 후문 쪽으로 향했다.

부운화는 말에서 내려 각자 칼과 창을 뽑아 들고 있는 나머지 오십 명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싸움이야 질리도록 겪어 봤으니 뭔가를 말할 필요는 없겠지?”

“옛! 그렇습니다!”

“딴 건 몰라도 텐챠이 수호대는 절대 놓치지 않아야 된다. 나중에 저놈들이 텐챠이 밑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그땐 큰 위협이 될 거야. 이렇게 알아서 떨어져 나와 줬으니 오늘은 우리에게 큰 기회라는 거다.”

“알겠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엔 전의가 가득했다.

적룡기마대와 텐챠이 수호대.

그 둘은 오랜 숙적이자 숙원이다. 그 숙원을 풀 기회가 생겼으니 전의가 생기지 않고 배기겠는가.

“숫자는 두 배인데…… 상관없지?”

이번엔 대원들도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너무한 말씀이십니다.”

“두 배는 무슨, 세 배는 돼야 할 맛이 날 텐데요.”

“저놈들이 우리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대원들은 왁자지껄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목숨을 건 싸움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태도였다.

“그럼 됐고. 다들…… 정렬!”

“옛!”

부운화가 대문의 앞을 가로막고, 나머지 오십 명이 부운화의 양옆에 마치 사열식을 하듯 늘어섰다.

일차적으로 부운화가 적을 맞아 싸우고, 부운화의 옆을 지나쳐서 빠져나오는 자들은 마치 긴 대롱 속을 지나가듯 쭉 늘어서 있는 대원들에게 협공을 받는 구조였다.

사냥감을 너무 궁지에 몰면 반항을 하듯이, 싸움이라는 것도 너무 꽉 틀어 놓아서는 안 된다.

적당히 틈을 보이고, 그 틈을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공격해서 자연스레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투의 왕도(王道)인 것이다.

스으읍―

부운화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 쌍의 장군검을 뽑아 들고 막강한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부운화.

그는 돌격 준비를 하고 있는 텐챠이 수호대와 우물쭈물하며 그 뒤를 따를 준비를 하는 삼백 명가량의 흑도 무인들을 쏘아보았다.

“그럼…… 와라!”

두두두두―

“끼요오옷―!”

“캬하앗―!”

“와아아―!”

텐챠이 수호대의 기묘한 기합성과 함께, 물경 사백이 넘는 인원이 저택의 대문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규모는 작지만, 텐챠이 수호대가 있고 적룡기마대가 있으니 이건 북로전쟁의 연장인 셈이다.

오랜 숙적들의 부딪침과 칼날이 만들어 내는 불꽃 속에서, 강서성주 저택에서의 싸움은 한층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이 수풀을 불태우고, 바람이 불 때마다 훅― 하고 끼쳐 드는 열기에 얼굴이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큽……!”

쉬이익―!

채챙!

추룡은 이를 악물고 황룡창 언월도를 휘둘렀다.

갈수록 점입가경이 되어 가는 싸움.

서른 명의 적룡기마대원들을 살리려면 그가 가진바 이상의 능력을 보여야만 했다.

앞에 서 있던 무인이 황룡창의 참격을 아슬아슬하게 받아 내고 빈틈을 노려 허벅지를 찔러 왔다.

추룡은 황룡창의 손잡이로 그 무인의 머리를 후려쳐 버렸다.

‘안 돼. 이건 무리야. 빠져나가야만 돼.’

지금 주변을 둘러싼 삼호방의 무인들만 해도 오십 명 이상. 게다가 하나같이 추룡이 오 초식 안에 쓰러뜨리기는 힘든 상당한 강자들뿐이었다. 서른에 불과한 자신들과는 숫자에서부터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삼호방 놈들은 혹시 수풀 사이로 도망칠까 봐 불까지 놓았다. 미리 기름이라도 먹여 두었는지 순식간에 확대된 화염은 온 산맥을 다 태워 버릴 듯한 기세로 점점 그 열기를 더해 가는 중이었다.

좌우엔 불타는 산맥.

앞에는 삼호방의 수뇌부 삼인방.

뒤에는 삼호방의 정예 무인 오십.

어느 쪽이든 퇴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도독부에서 뭔가 조치를 취할 만도 한데…… 저놈들, 벌써 도독부에 뭔 짓을 해 둔 건가?’

추룡은 성질 더럽게 생긴 삼호방주와 음침하게 생긴 큰아들을 노려봤다. 정말 기가 막힌 함정을 파 두었다. 뒤쪽의 오십 명을 상대하자니 수뇌부 삼인방이 등을 공격할 것만 같고, 그렇다고 수뇌부를 공격하자니 오십 명의 파상 공세가 너무나 강맹했다.

추룡은 삼호방의 무인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연수 합격을 해대자, 간신히 막아 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삼호방주, 강장호, 강산호, 이 세 사람은 아직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이쪽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한 미끼인지.

어느 쪽이든 이쪽에 있어서는 굉장한 기회이건만, 정작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지금의 포위망을 뚫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대석!!”

추룡은 대석을 불렀다.

삼 장 정도 떨어진 거리.

백 리 밖에서도 보일 법한 거구를 미친 듯이 움직이며 대석이 분투하는 중이었다.

“왜 부르는 거유!”

“교차! 교차다!”

멀리서 양손에 각각 철추를 하나씩 들고 휘두르던 대석이 눈을 번쩍 빛냈다.

추룡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대석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고군분투를 하던 서른 명의 적룡기마대원도 모두 그 말을 들었다.

모두가 전장에서 호흡을 맞춰 온 전우들이다.

누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각자 대열을 정돈한다.

앞에 있던 대열은 말 머리를 비스듬하게 돌리고, 뒤쪽에 있던 대열은 말 머리를 똑바로 세우며 무기를 거세게 휘둘러 주변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 순간, 추룡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가아아자아아―!”

“와아아―!”

함성을 지르는 서른 명의 적룡기마대원.

특히 그들 중, 후미열에 처져 있던 열다섯 명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비록 삼 장의 짧은 거리지만 말이 전속력으로 가속하기 위해 그것은 충분하고도 남는 거리였다.

앞으로 달려가는 속력에 육중한 말의 무게, 거기에 그 위에 올라탄 기수가 그 모든 무게를 실어 창칼을 내려쳤다.

쩌저정! 푸화악!

“으아아……!”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삼호방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쪽에서 쏜살같이 달려나와 무기를 휘두르는 적룡기마대는 그야말로 포탄과도 같았다.

무기로도 막을 수 없고,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압도적인 파괴력이 실려 있으니 아무리 무공을 전개해도 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강장호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기마병의 파괴력이라는 게 어떤 건지.

돌진을 할 경우 기마병의 힘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그리고 대열과 진형이라는 것은 집단 전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삼호방 무인들은 각자가 상당히 뛰어났지만, 대열이나 진형을 만들 줄을 몰랐다.

추룡은 득의의 미소를 띠며 선두로 나섰다.

전장에서 단련된 명마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추룡은 돌진력을 이용해 가까이에 있던 무인 하나의 허리를 베어 냈다.

써걱! 하고 기분 나쁜 감촉과 함께 핏물이 솟아올랐다.

“이대로 뚫는다! 속도를 줄이지 마, 짜식들아! 계속 달린다! 사진(斜陳)으로 비스듬하게 베어 내!”

“와아아아―!”

교차하면서 뒤로 빠졌던 대석과 나머지 열다섯 명도 일제히 추룡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 온 만큼 서른두 명이 한 무리로 뭉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상대는 이제 서른 명 남짓 남은 상황.

추룡은 서른 명 정도의 포위망은 눈 깜짝할 새에 뚫어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실제로 삼호방 무인들은 적룡기마대가 추룡을 선두로 대열을 갖춰 습격해 오자 일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황망해하고 있었다.

이제 승부에 쐐기를 박기만 하면 될 터.

그런데 그런 추룡의 앞으로 갑작스레 한여름의 녹수(綠樹)처럼 푸르른 청람빛이 번뜩였다.

꽈아앙!!

“……!”

추룡은 일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파괴력.

간신히 창날로 막아 내긴 했지만, 자칫했다간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순간이었다.

두두두…….

히히힝―!

선두에 서 있던 추룡이 방향을 유지하지 못하고 옆으로 틀어지자 뒤따르던 적룡기마대도 마찬가지로 대열이 흐트러져 버렸다.

그런 적룡기마대의 주변을 남은 서른 명의 삼호방 무인들이 둘러쌌다.

그들은 기세가 올라 있었다.

눈앞에 그들의 주인, 삼호방의 최강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썅, 피잖아.”

추룡은 코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을 소매로 슥 닦아 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머리를 노리는 공격을 창날로 막아 내긴 했는데, 그 여파까지 막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추룡은 황룡창을 앞으로 겨누며 경계했다.

그의 눈앞에 왜소한 체구에 살벌한 눈매, 그리고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분명히 말을 달리기 시작할 때는 뒤쪽 태사의에 앉아 있었건만, 어느새 앞으로 와서 그를 가로막은 것인지 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호야, 너도 아직 멀었구나. 하마터면 이 녀석들이 빠져나갈 뻔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삼호방주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삼호방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나서려고 한 듯 근처까지 다가와 있던 강장호가 삼호방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클클, 괜찮다. 사실 네 잘못이 아니지. 이놈들의 조직력과 힘이 생각보다 강하구나.”

“어찌 됐든 저의 불찰입니다.”

“그래, 반성하거라.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왕은 성장해 가는 것이지.”

후계자인 강장호가 왕이 될 거라 말하는 것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동창의 귀에 들어갔다면 구족이 멸했을 말이건만, 삼호방주 강추산은 스스로도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네 녀석, 이름이 무엇이냐?”

삼호방주는 추룡을 향해 물었다.

“알 것 없어.”

“……재밌는 놈이로고.”

추룡은 아예 바닥에 가래침을 퉤, 하고 뱉어 버렸다. 대번에 주변에 있던 삼호방 무인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런 무례한 놈을 봤나……!”

“방주님, 제가 쳐 죽이겠습니다!”

성질 급한 무인 한둘이 나섰으나, 그들은 오히려 삼호방주의 추상같은 눈빛에 찔끔하고 뒷걸음질쳐야만 했다.

“쯧쯧, 한심한 놈들 같으니. 그런 눈은 뭐 하러 달고 다니느냐. 아예 뽑아 버리지.”

“힉……!”

“네놈들이 쓰러뜨릴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러니 주제를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그 이상 입을 여는 무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삼호방주는 클클 웃으며 추룡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장호에게서 저택에 있는 놈들 중에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놈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땐 반신반의했거늘, 지금 너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그러니 묻겠다. 저택에 있는 놈들 중에 나를 즐겁게 할 만한 놈이 있느냐?”

삼호방주의 눈엔 호승심과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아니라…… 시체를 갖고 놀며 즐거워하는 미치광이의 장난기였다.

“즐겁게 할 만한 놈이 있냐고?”

추룡은 코웃음 쳤다.

그는 태생적으로 삼호방주와 같은 자를 싫어했다. 그에게 힘만 있었다면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당장 목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우리 대형께서 나서시면 당신 같은 작자는 곧바로 이승을 하직하는 거야. 그나마 나를 만난 걸 다행으로 알도록 해.”

“뭐라……?”

삼호방주의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이놈……! 뭘 몰라서 하는 말인가 본데, 참고로 나는 무림십대고수를 눈아래로 두고 있다. 아마 내가 전력을 다하면 백 초 안에 무릎을 꿇릴지도 모르지. 구파의 장문인들도 나에게는 한 수를 접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가 그걸 모른데? 영감 강한 건 잘 알고 있어. 뼈저리게 말이지.”

추룡은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우리 대형은 말이지, 무림십대고수를 삼 초식 만에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이야. 당신 같은 작자는 즐겁기는커녕 피똥 싸게 발악을 해 봐야 결국 대형에게 죽게 되어 있단 말이야. 알아들어?”

“이놈! 거짓말하지 말거라!”

“못 믿겠어? 못 믿겠으면 말고. 내 답을 못 믿을 것 같으면 왜 물어보고 지랄이야.”

추룡은 사실을 말했으나 그곳에 있던 자들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십대고수를 삼 초 안에 무릎 꿇리는 무공.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무림십대고수는 무림의 최정상 십인을 뜻하는 말이다.

삼호방주가 무림십대고수를 백 초 안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공헌한 것만 해도 경천동지할 만한 충격적인 일이거늘.

그런데 무림십대고수를 삼 초식 안에 쓰러뜨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가 알을 깨고 나온다는 말처럼 아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림십대고수를 삼 초 안에 쓰러뜨리다니. 그럼 그 자가 무림오존의 수준이라고? 아니,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리가 없지. 이 녀석이 격장지계를 쓰는구나.’

강장호와 삼호방주는 추룡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편, 추룡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떻게든 탈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여전히 주변의 숲에선 엄청난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제 삼호방주, 강장호, 강산호까지 모였으니, 퇴로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좋을 터.

‘결국 여기까지인가.’

추룡은 최후를 직감했다.

애초에 그리 좋은 머리도 아니지만, 그래도 전장에서의 경험을 되새기며 생각해 볼 때 이 자리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대형, 난 여기까지인가 보오.’

문득 장기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장에서의 그는 항상 무표정하고 뭔가를 고민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싸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인상을 굳히고 있던 사람이 바로 장기린이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이 군문에서 나가고 고작 일 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싱긋싱긋 웃게 되었다.

인정도 깊어졌고,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사내로 변해 버렸다.

도대체 어떤 술수를 쓴 건지…….

최근엔 추룡도 평범한 삶이 그렇게나 좋다면 자신도 한 번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 헛된 꿈이었지. 칼밥 먹고 사는 놈이 결국 칼밥 때문에 죽는 게 당연한 것을.’

추룡은 킥킥대며 웃었다.

갑작스레 그가 웃자 앞에 서 있던 삼호방주와 강장호, 강산호 형제가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셋째 형……!”

추룡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대석이 평상시에 잘 열지 않는 입을 열어 어눌한 말투로 추룡을 불렀다.

추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석은 물론이고, 나머지 적룡기마대원들이 있는 뒤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살리고 싶어질까 봐 그렇다.

쳐다보면 멍청한 동생 놈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 테고, 그런 욕심을 부리려고 하면 괜히 허점을 보여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자필생(死者必生) 생자필사(生者必死)라는 말이 있다.

죽고자 한 자는 살 것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는 뜻이다.

꼭 살려는 희망을 생각지 않더라도 지금 이 자리는 살려고 해선 안 되는 자리다. 목숨을 버리고 장렬하게 싸우다 보면…… 어쩌면, 만약이지만, 살 수 있는 놈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는 확실히 죽겠지만.’

어느 쪽이든 추룡은 확실히 죽게 되리라.

추룡은 자신의 목숨을 토대로 한 놈이라도 살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때였다.

“아아, 난 말이지, 집구석이 지긋지긋했어. 부모는 만날 죽어라 싸워대지. 가난한 집구석에서 애는 또 무지하게 많이 낳아서 다들 굶어 죽기 직전이고 말이야. 아마 내가 나온 걸 모르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입 하나 줄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 정도 갖고 뭘. 여기에 있는 놈들 중 반절은 그런 경험이 있을걸?”

“당연하지. 험악한 인생사 자랑하려면 오칠이 놈한테 물어봐. 그럼 진짜로 험한 인생이 뭔지 산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말이야.”

“큭큭, 그렇게 심해?”

“눈물 없이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참고로 난 철들고 나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핑 돌았어.”

“도대체 어떤 이야기기에……?”

“하나만 말해 주자면, 마른 멸치 한 마리로 한 가족이 사흘을 버텼다는 이야기야.”

“뭣……!”

“아아, 그날 이후로 나는 심심하면 멸치를 씹게 됐어. 그런 막장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만하면 잘산 거지 뭐. 나태해졌다 싶을 때 멸치를 씹으면 그걸 다시 떠올릴 수 있다니까?”

“나참, 나도 평생 생각나게 생겼네.”

“큭큭, 하나 줄까? 난 지금도 멸치를 갖고 있다고.”

“미친놈.”

“아아, 그래도 아쉬운 건 하나 있다. 혼인은 해 봤어야 하는데.”

“헛소리하는구만. 잘도 너 같은 놈한테 시집올 여자가 있겠다.”

“야, 이래 봬도 내가 인기가 많았던 놈이야. 내가 지나가면 시전에서 장보던 여자들이 고등어를 질질 흘렸어.”

“지랄한다. 멸치나 씹어, 이 자식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른 명 전원이 낄낄대며 웃었다.

삼호방의 사람들은 그런 적룡기마대를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왜 하나같이 미친놈처럼 웃어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자식들……!’

한편, 선두에 서서 등을 보이고 있던 추룡은 울컥하는 감정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적룡기마대원들.

다들 추룡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 함께 죽겠다는 뜻으로 저렇게 말하며 웃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살아남으라고 하면 절대로 말을 안 들을 것이다.

이들은 다 같이 죽을 생각이다.

추룡이 걱정할 필요 없이, 다들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했다.

‘하하, 내가 동생들 하나는 잘 뒀지.’

“어이, 영감.”

“……나 말이냐?”

“여기 영감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 이제 슬슬 덤비지그래? 계집애들처럼 말 많은 건 좀 그렇지 않아?”

“쯧…….”

삼호방주는 혀를 찼다.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다면…… 할 수 없지.”

“참고로, 죽는 건 그쪽이 될 수도 있다고.”

“내가 나서 주는 건 네놈에게 영광이니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자꾸 욕 나오게 하지 마, 영감. 난 애써 품위 지키려고 참고 있다고.”

추룡은 씩 웃으며 황룡창을 앞으로 겨눴다.

날카롭게 빛나는 은백색 칼날이 삼호방주의 목을 노렸다.

죽음을 각오한 추룡이다.

화아악―!

그 순간, 추룡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힘차게 내리찍는 언월도, 공간을 가르는 은백색 칼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굉음을 내뿜었다.

쩌어어엉!

꽈과광―!

삼호방주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언월도가 바닥에 움푹 파인 흔적을 만들어 냈다.

동료를 지켜야만 한다.

저 녀석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추룡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절실할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추룡은 평소의 그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삼호방주의 정면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삼호방주의 청람수가 허리 부근에서 폭죽이 터지듯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추룡은 날아오는 공격을 피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와 방향이었으나, 믿기지 않는 유연성으로 땅을 기듯이 몸을 젖히며 그 공격을 피해 내고 상체를 일으키며 곧바로 황룡창을 비스듬하게 그어 올렸다.

촤아아앙―!

칼날이 떨리며 삼호방주의 옷에서 잘려 나간 옷소매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삼호방주는 처음으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삼호방주와 추룡의 격차는 명백하거늘, 설마 자신이 옷에 손상을 입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놈이……!”

분노한 삼호방주가 양손을 한꺼번에 휘둘렀다.

그저 양손을 휘둘렀을 뿐인데, 벼락이라도 치듯 공기가 요동쳤다.

따아아앙!!

칼날에 다가와 부딪치는 경력이 무시무시했다.

“큭……!”

추룡은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꾹 눌러삼키며 팔을 좌우로 흔들어 밀려드는 경력을 간신히 해소했다.

쿵! 하고 내딛는 진각, 있는 힘껏 회전한 허리로부터 강력한 와류가 발생했다.

후우우웅―!

힘차게 휘둘러진 언월도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불꽃이 번쩍이듯 삼호방주의 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작상보(炸上步).

싸우는 사람이 보기엔 축지법이라도 쓰는 듯, 주변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움직임이었다.

추룡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히는 순간!

쉬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번뜩이는 청람수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놈! 그걸 피해!”

삼호방주는 짐짓 이 싸움을 재미있어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초절정의 고수.

언제든 상승의 경지에 진입해 추룡을 격살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이 싸움이 놀이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추룡이 평소 이상의 힘을 좀 낸다고 해서 뛰어넘을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큭……!”

추룡은 애써 치미는 분기를 억누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아직 그에게는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

절정의 끝자락.

초절정, 신속의 경지를 잠시나마 재현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만 되면 일시적이나마 삼호방주와 맞먹는 힘을 낼 수 있다.

중요한 건 시점이다.

어느 순간, 어느 때에 그 힘을 발동해야 할지.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인 이상 그는 신중하게 그 힘을 이용해야 했다.

“왜 그러나? 강맹했던 건 처음에 기세뿐이었나?”

파아앙!

“큭……!”

추룡은 목을 노리는 청람수를 피하며 뒷걸음질쳤다. 순간, 치이익― 하고 목덜미 근처의 머리카락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청람수의 강력한 경력에 휘말린 결과였다.

‘조금 흔들어 볼까?’

이대로 정면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터.

추룡은 뒤로 훌쩍 물러나는 듯싶다가, 갑자기 몸을 뒤로 휙 돌려 옆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삼호방 무인 두 사람의 가슴을 베어 냈다.

푸화악―!

“아닛……!!”

모두가 경악했다.

삼호방주가 나서서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려 했는데 공격을 가하다니.

삼호방 무인들 전체가 우르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싸우자!”

“와아아―!”

흥분한 것은 적룡기마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당황하는 삼호방 무인들의 틈새로 파고들어 무기를 찔러 넣었다.

“끄아악……!”

“싸워라! 죽여라!”

“와아아아―!”

시끄러운 함성과 함께 난전이 유도되었다.

☆ ☆ ☆

“이놈……!”

삼호방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는데, 그 장난감이 반항을 하며 놀이를 방해한 셈이다.

“거기 서랏!”

작상보, 극상의 경신법이 펼쳐지며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나타난 삼호방주가 추룡을 향해 청람수를 펼쳤다.

콰아아―!

이번엔 소리부터가 이전과는 달랐다.

극성으로 펼쳐진 청람수.

바람을 강제로 끌어오는 듯 육중한 소리와 함께 새파란 아지랑이가 전에 없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쩌어엉!!

간신히 공격을 막은 추룡.

그는 창날을 부러뜨려 버릴 듯한 강맹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뒤로 튕겨져 나갔다.

터어엉! 파바밧!

삼호방주의 작상보는 뒤로 날아가는 추룡의 몸을 허공에서 따라잡았다.

추룡은 아직 경력조차 해소하지 못한 상황.

그의 몸을 날려 버린 당사자가 허공에서 그를 따라잡아 버렸으니 반항할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삼호방주의 청람수 중 파갑수의 일격이 붉은빛을 발하고,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해 낸 추룡은 왼쪽 어깨에 긴 상흔을 입은 채 바닥에 처박혔다.

쾅! 콰드드드! 터엉!

“크…… 으우……!”

추룡은 입으로 들어온 모래를 뱉어 내며 기침을 쿨럭쿨럭 토해 냈다.

하지만 멍하니 있을 틈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있던 삼호방의 무인 하나를 언월도 창날로 길게 베어 냈다.

푸화악―!

“이놈이, 그래도!!”

저항을 끝내지 않는 추룡.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추룡을 보며 삼호방주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고, 그 속에서 진득한 살광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삼호방주의 손속이 더욱 매서워졌다.

얼마나 살기가 강했는지, 청람수 푸른빛이 핏빛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추룡은 삼호방주의 주먹이 그의 머리를 노려오는 순간, 두 눈을 번뜩였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굳이 삼호방주를 도발한 것이었다.

후우우욱―

두근! 두근!

허공의 한 점으로 주변 세상의 빛이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온몸이 묵직한 무언가에 둘러싸였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큰 기력이 소모되었다.

오래 유지할 수는 없는 감각.

주변 세상의 모든 것이 느려져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도, 눈에 비치는 세계의 모습도 다 느려졌다.

저벅, 저벅…….

추룡은 그 세계 안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삼호방주의 뒤로 돌아갔다.

천천히라고 해도, 밖에서는 잔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속도일 것이다.

추룡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 삼호방주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언제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초절정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추룡은 장기린을 만나러 오기 전, 장강수로맹의 본단이 있는 동정호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팔 년 만에 만났던 아버지, 장강용왕 추묵환.

무림십대고수의 일인인 그는 어땠던가.

다 이겼다 생각하고 칼날을 목에 갖다 대려는 순간에, 갑작스레 초속의 세계로 들어와 그를 때려눕히지 않았더냔 말이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같은 실수는 두 번 하지 않는다.

추룡은 군더더기없는 동작으로,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빠른 움직임으로 삼호방주의 등을 길게 베어 냈다.

스으으―

언월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삼호방주의 뒷목을 노렸다.

물을 헤엄치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칼날.

그 끝의 첨단이 삼호방주의 목덜미에 툭, 하고 닿는 순간,

휙!

“……!”

삼호방주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뒤로 돌려 뒤에 서 있던 추룡을 노려봤다.

추룡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심을 느꼈다.

‘웃기지 마! 내가 더 빨라!!’

추룡은 이를 악물고 내려치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미 칼날이 목덜미에 닿아 있는 상황.

여기서 그어 내리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리 삼호방주라도 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화아아악―!

“……!”

한데, 삼호방주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대한 기파를 느끼는 순간, 그 생각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삼호방주가 몸을 돌리고 있었다. 초속의 세계에서, 뒷목부터 앞가슴으로 이어지는 붉은색 상처가 생겨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휙 돌려 버렸다.

정면과 정면.

추룡과 삼호방주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 삼호방주의 몸에서 붉은색 불꽃이 확! 하고 피어오르는 듯하더니, 삼호방주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작상보! 이럴 수가! 초속의 세계에서도 신법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 모습은 추룡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초절정의 세계는 온몸에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듯한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다.

무공을 전개하기는커녕, 똑바로 걷는 자세를 취하는 것도 힘든 것이 이 세계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작상보를 사용하다니.

추룡은 자신의 두 눈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순식간에 눈앞에서 몸이 사라질 정도로 평소와 별반 다름없는 수준으로……!

‘안 돼. 이길 수 없다. 이자는 너무 강해. 십대고수를 눈 아래로 본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야.’

추룡은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돌리는 몸.

본능적으로 배후를 빼앗겼다고 생각해 등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삼호방주가 바로 한 걸음 앞에서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퍼어억!

“……!!”

그 순간, 추룡은 복부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활처럼 굽어지는 허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청람수가 둘러져 있지 않은 평범한 주먹이 복부의 정중앙을 때리고 있었다.

후우우욱―

상체가 앞으로 쏠린 채 충혈된 눈으로 쿨럭대는 기침을 토해 내는 순간, 세상에 빛이 돌아왔다.

“파하……! 크학, 크흑……!”

물밑에서 강제로 물 위로 끌어올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과한 박탈감과 함께 온몸이 축 늘어졌다. 추룡은 숨을 헐떡거렸다.

실패했다!

오직 그 생각만이 추룡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발역전의 기회를 사용했으나, 장렬하게 실패해 버린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폐가 찌부러진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추룡은 입을 쩍 벌린 채 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대기만 했다.

“아주 제법이었다. 설마 초절정의 경지에 거의 올라 있었을 줄이야. 그것만큼은 인정하지. 나도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끄…… 으…… 이…… 자식……!”

“아직도 그 성질은 죽지 않는 건가? 대단하군.”

삼호방주는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이제 주제 파악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자, 봐라. 네 동료들 역시도 곧 너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장호와 산호가 있는 이상 삼호방이 질 리가 없다.”

“…….”

추룡은 흐릿한 눈으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을 응시했다.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개개인의 힘과 집단 전술에 있어서는 적룡기마대가 위.

하지만 삼호방엔 대단한 고수 두 사람이 있었다.

강산호와 강장호.

그 둘을 맞상대하기엔 적룡기마대의 대원들로는 부족한 것이다.

다행히 삼호방의 무인들은 이제 열 명도 채 남지 않았으나, 적룡기마대원들 중에서도 몇몇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사상자가…… 있었나……?’

추룡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대석에게로 돌렸다. 대석은 두 개의 철추를 하나의 쌍룡창으로 변환시킨 채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크게 휘돌리는 창.

육중한 철추들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정작 대석의 몸엔 곳곳에 상처가 안 난 곳이 없었다.

땅이 움직이고 하늘이 놀라는 경천동지의 싸움이 벌어지고는 있으나, 부딪칠 때마다 피를 흘리며 상처를 입는 쪽은 항상 대석인 것이다.

‘상성이 안 좋아. 게다가 저놈…… 강하군.’

몸집이 건장한 사내.

아버지를 쏙 빼닮아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는 냉막한 인상의 사내는 바로 강장호였다.

강장호는 강했다.

삼호방주로부터 물려받은 청람수와 작상보, 붉은빛이 번뜩이는 파갑수는 이미 그가 발하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무공의 진수가 녹아들어 있을 만큼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잔상조차 남지 않는 작상보의 움직임.

언제 어떤 자세에서도 두 주먹으로 자유롭게 펼쳐 내는 청람수.

둘 다 강력한 힘과 파괴력으로 승부를 보는 대석과는 상성이 좋지 않은 무공들뿐이었다.

게다가 굳이 상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강장호는 강했다.

강장호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휙 사라져서 대석의 뒤에서 나타나곤 했는데, 추룡은 그걸 보자 강장호가 초절정의 초입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게 유지할 수는 없지만 초속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는 있다. 나보다는 위…… 그리고 운화 형님보다는 조금 아래인가. 저놈도 대단한 놈이었군…….’

추룡은 핏물을 울컥 토해 냈다.

손바닥에 토해 낸 핏물을 보니 내장 조각이 섞여 있다.

조금 전 복부에 당한 충격으로 내장의 일부가 파손되었다는 뜻이었다. 삼호방주에게 받은 내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게다가 대원들 쪽은…… 강산호, 저 자식인가.’

절정의 끝자락에 올라 있는 강산호.

파륵삼호의 둘째이자 장대한 체구를 지닌 거한은 적룡기마대원들을 상대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적룡기마대원이 세 명이나 다섯 명이 모여서 강산호를 상대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상황은 상당히 위태로웠다.

“크…… 으윽……!”

추룡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죽는 순간까지 싸워야만 한다.

“재미가 없구나.”

삼호방주는 그런 추룡을 보며 혀를 찼다.

“고통에 신음하고 비명을 좀 지르면서 살려 달라 빌어야 재미있을 텐데, 네놈은 그런 재미가 없어.”

“큭, 미친 영감탱이.”

추룡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러는 영감도…… 젊었을 땐 빌빌거리며 살았던 때가 있었겠지?”

“뭐라?”

“초심을 잃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

“멸치나 씹어, 영감.”

삼호방주는 무슨 말인지를 모르니 멍한 표정이었다.

추룡은 몸 상태만 허락한다면 큰 소리로 웃어 주고 싶었다.

“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추룡님의 마지막 싸움이다. 끝까지 어울려 달라고.”

“……죽을 때가 되니 미친 모양이로군.”

삼호방주가 들어 올린 오른쪽 주먹에서 여전히 시리도록 선명한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추룡은 황룡창을 크게 한 바퀴 휘돌린 뒤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칼날을 삼호방주를 향해 겨눴다.

마지막 순간이다.

추룡은 그가 가진 최고의 무공을 펼치며 죽기로 마음먹었다.

용왕십삼기의 최후 절초, 해일(海溢).

‘대석…….’

우연이었을까.

마지막을 생각하며 대석을 한 번 쳐다보자, 대석 역시도 추룡을 쳐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이게 마지막인가 보다.’

항상 어눌한 말투로 말하는 대석을 보면 짐짓 화를 냈지만, 그때마다 그 순박한 모습에 미소를 짓곤 했다.

대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추룡이 군에 들어간 뒤, 딱 한 달 뒤에 대석이 들어왔다.

천하무쌍의 괴력, 백 리 밖에서도 눈에 띄는 거구를 지닌 주제에 뭘 그리 눈치를 보는지, 어깨를 움츠린 채 터덜터덜 걸어오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

사실 동료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흔한 전장에서 한 달 차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추룡은 어떻게든 형 대접을 받고 싶어서 대석에게 자신은 이미 반년이나 더 먼저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대석은 아마 지금까지도 추룡이 반년 먼저 군에 들어온 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석은 그 정도로 순박한 녀석이었다.

‘그동안 네 덕분에 재미있었다.’

추룡은 씩 웃었다.

대석 역시도 추룡의 그러한 마음을 느낀 것인가.

일순, 강장호를 상대로 휘두르는 창에 무시무시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빠르고 강맹한 공격이다.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했는지 강장호 역시도 쉽게 반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무위는 강장호가 더 뛰어나지만, 역시 파괴력만큼은 대석이 훨씬 위였다.

백 근짜리 쌍룡창을 정면으로 받았다간 아무리 청람수를 극성으로 전개해도 가차없이 박살 나서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짜식, 그 기세로 살아 봐라, 인마.’

추룡은 삼호방주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 간다! 마지막이다, 영감!”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황룡창을 휘두르는 추룡.

찌르고, 베고, 끌어오는 용왕십삼기의 마지막 초식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그 사이를 청람수의 육중한 힘이 파고들어 왔다.

“안 돼에에―!”

그때, 대석이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추룡에게 달려왔다.

강장호는 갑자기 등을 훤히 드러내는 대석에게 당황했는지 공격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었다.

대석은 미친 듯이 달려와 추룡의 앞을 막아섰다.

삼호방주는 불쾌하게 미간을 좁혔으나, 일단은 선선히 물러나 주었다.

“너, 인마. 미쳤냐? 왜 여길 와?”

“셋째 형이 죽으려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수?”

“어차피 다 죽는 거야. 뭐 하러 이런 짓을 해?”

“어차피 죽는 거면 같이 죽으면 좋지. 혼자 갈 생각 마시우, 섭섭하니까.”

“이 자식이……!”

추룡은 목이 메여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정말 질리도록 순박하고 멍청한 놈이다. 어째서 마지막에 멋지게 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방해를 하느냔 말이다.

“……좋다. 그럼, 끝까지 같이 싸워 보자. 내 등은 네가 지켜.”

“잘 생각했수. 그래야 광견(狂犬)이지.”

“이놈이, 언젯적 별명을……!”

광견 추룡.

흑룡강 유역 전장에 있을 때 그에게 붙었던 별명이다.

삼호방주는 이제 질린다는 듯 지겨운 표정을 지으며 추룡에게 다가왔고, 멀찍이 있던 강장호 역시도 미뤄 뒀던 승부를 마저 내자는 듯 대석에게로 다가왔다.

추룡과 대석.

두 사람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아직 운명은 두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히히힝―!

활활 불타오르는 수풀 사이.

불꽃을 뛰어넘으며 나타난 일단의 기마대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추룡 형님! 대석 형님!!”

낭랑한 목소리, 앳된 말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삼호방주, 강장호, 강산호.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를 주목시키는 목소리였다.

이글거리는 열기 사이로 단단한 체구의 갈색 말을 탄 까무잡잡한 청년이 새카만 철창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하하! 형님들끼리 놀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저도 끼워 달라고 왔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게 한판의 놀이라고 생각하는 듯 천진난만한 말투였다.

살수를 전개하려던 삼호방주와 강장호도…….

그 살수에 목숨을 내놓으려던 추룡과 대석도 일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추룡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 눈엔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어?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이 자식아!”

“하하, 그럼 돌아갈까요?”

“……너, 나중에 내가 죽여 버린다!!”

추룡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진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해 추룡과 대석에게로 다가왔다.

진구의 뒤로는 스무 명가량의 적룡기마대원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하하 웃는 진구와 달리, 뒤따라오는 대원들의 얼굴은 살벌하게 굳어 있었다.

싸움터 곳곳에서 적룡기마대의 피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잠깐! 네놈은 가까이 갈 수…….”

“뭐야, 너는.”

푸화악!!

앞으로 나선 삼호방의 무인 하나가 진구를 막으려고 했지만, 진구는 추룡을 대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단숨에 무인의 가슴을 꿰뚫어 버렸다.

“커허……!”

진구의 적룡창은 작살처럼 십자형으로 칼날이 교차되어 있는 형태였다.

꿰뚫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무기.

당연히 진구의 특기 역시 ‘찌르기’였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듯한 쾌공.

진구의 창술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 일류에 불과한 무인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는 뜻이다.

“가자, 삭풍.”

히히힝―

진구는 무인의 가슴을 꿰뚫은 채 그대로 말을 계속 걸어가게 시켰다.

다그닥― 다그닥―

진구의 애마인 삭풍(朔風)은 적룡기마대의 명마들 중에서도 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말이었다.

강인한 뒷발로 퍽퍽, 땅을 걷어차며 걸어가니, 창에 꿰뚫린 무인은 마치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마냥 밑으로 핏물을 쏟아 내며 질질 끌려갔다.

퍼억!

마침내 추룡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 진구가 귀찮다는 듯이 창을 옆으로 털어 내자, 이미 한참 전에 절명했던 무인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슴 부위의 상처는 손바닥만 했으나, 등쪽에 난 상처는 머리통보다도 크게 뚫려 있었다.

작살과도 같은 적룡창의 생김새.

그리고 일기관천의 한 수에 실려 있는 강력한 회전력이 만들어 낸 상흔이었다.

“추룡 형님, 대석 형님.”

진구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고생하셨어요. 우생 형님이 말한 게 딱 맞았네요. 만약의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지켜보라고 했는데…….”

“……그래?”

“형님들, 이 늙은이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요?”

“으음……!”

추룡은 신음을 흘렸다.

진구가 진심으로 화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구는 항상 웃는다. 아파도 웃고, 즐거워도 웃지만…… 이렇게 극도로 화가 났을 때는 싱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다.

“이놈이……!”

진구의 분노 섞인 발언은 삼호방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추룡 역시도 우려 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구는 강하다.

타고난 재질이 뛰어난데다 머릿속이 온통 ‘무공’밖에 없는 녀석이라 강해지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실제로 간부들끼리 붙게 되면, 아마 섭우생보다도 강할 것이다. 어쩌면 대석보다도 강해 추룡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진구가 항상 부운화나 장기린에게만 덤비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만약 추룡이나 대석, 섭우생과 대련을 했다가 이겨 버리면 나중에 대하기가 껄끄러워지지 않겠는가.

진구는 항상 형들보다 자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숨기려고 했다.

물론 자기는 숨긴다고 숨겼지만, 적룡기마대라면 이미 누구나 눈치를 채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구, 너는 안 돼.”

그렇기에 추룡은 더욱 진구를 말렸다.

진구의 무에 대한 자질이 대단한 만큼, 그런 인재를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 않겠는가.

“왜요?”

“저 영감이 보기보다 강하거든.”

“…….”

“네가 왔으니 살 확률이 올라갔다. 도망치자.”

추룡은 진구를 달래며 물러서려고 했다. 그래서 진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뒤로 당겼다.

한데, 진구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구, 너…….”

“도망칠 필요 없어요, 형님들.”

진구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추룡이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물으려고 할 때, 옆에서 보다못한 삼호방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이……!”

쩌렁쩌렁한 외침이 고막을 울렸다.

“누구 마음대로 도망을 간다는 거냐! 네놈들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웅― 웅―

“큭……!”

초절정 고수가 강렬한 기파를 내뿜으며 외친 소리였다. 이미 내상을 입은 추룡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심기상인(心氣傷人)이라고 했던가.

울컥, 하고 속에서 핏물이 치밀어 올랐다.

막강한 기파에 속이 진탕되는 느낌.

추룡은 자신의 내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아까처럼 마지막으로 용왕십삼기의 해일을 전개할 수나 있을지 의문일 터.

‘이거, 정말 위험하겠는데…….’

어느새 주변의 싸움은 멈춰 있었다. 살아남은 대여섯 명의 삼호방 무인들이 삼호방주의 뒤에 도열하고, 강장호와 강산호 형제가 각각 좌측 후방과 우측 후방을 맡아서 퇴로를 차단했다.

겨우 세 명이 서 있을 뿐인데도 그물망에 갇힌 것처럼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적룡기마대는 아직 스무 명가량이 서 있었지만, 대열을 짜서 싸우면 모를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도움이 되기 힘들 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삼호방주, 저 영감탱이가 멀쩡하다는 거다. 괴물 같은 늙은이……!’

이 자리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삼호방주라는 초절정고수가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강장호의 예상외로 강한 무력 또한 큰 걸림돌.

결론은 도주조차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암담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형님들.”

그런 추룡의 마음을 읽었는지, 진구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이 늙은이한테는 아직 제가 부족하죠. 한 몇 년만 있으면 모를까…… 쩝, 아무튼, 이 늙은이를 쓰러뜨리는 건 제가 아니에요.”

놀랍게도 진구는 스스로가 삼호방주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

“하하, 누구겠어요, 형님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서로를 쳐다본 추룡과 대석.

“설마……?”

“설마……!”

두 사람은 서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삼호방주와 강장호, 강산호 형제도 의아해하는 가운데…….

히히힝―!

“……!”

어디선가 한 마리 말의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다그닥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적룡기마대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추룡과 대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위기가 완전히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나직한 목소리.

언뜻 무심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격렬한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히히힝―!

갈색 준마를 타고 나타난 사내는 여전히 말에 올라탄 채로 추룡과 대석을 위협하는 삼호방의 무리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특히나 삼호방주.

처음엔 여유로웠던 삼호방주였으나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내와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북천맹을 향한 첫 번째 싸움이다. 그 첫 번째 승리…… 당신의 목숨으로 받아 가지.”

절박한 순간에 처한 적룡기마대원들에게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은 온 대륙을 질타할 큰 신화의 서막이었다.

말에서 내려 내미는 창에는 칼날이 붙어 있지 않았다.

추룡과 대석을 구하는 자.

전장의 붉은 악귀.

장기린이 도착한 것이다.

<1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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