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 책략우생(策略優生)
한때 강서성주의 저택이었던 곳엔 피와 광기가 번뜩이는 불길한 공기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물경 일천의 병력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힘이 있는 자, 권력을 얻으리!
강호관직론이라는 파격적인 사상을 믿고 공을 세우기 위해 몰려든 흑도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패도적이고 냉혈한 성품을 지닌 자들뿐이었다.
아무리 명 황실이 남경을 빼앗기고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지만, 그래도 역천(逆天)을 감수하고 칼을 뽑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밝은 햇빛을 보고 살 수 없는 어두운 인생들.
평생 암흑가나 싸움터만을 전전하며 살았던 들쥐 같은 자들이기에 이런 일을 기회 삼아 관군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것이다.
“캬하아앗―!”
“다 죽여라―!”
무려 오백이 넘는 흑도 무인들의 기괴한 고함 소리가 연신 거리에 울려 퍼졌다.
저택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굳게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밖으로는 인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었다.
이럴 때는 몸을 낮춰야 하는 것이다. 도의를 잊은 무인들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강서성의 민초들은 앞서 삼호방의 행패를 겪었기에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기가 격해진다. 뜨거운 함성과 광기 어린 외침이 연신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싸움의 중심.
저택의 후문에선 지금까지의 싸움과는 다른 방식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원 거창!”
처처척!
붉은 갈기를 가진 명마 홍오(紅梧)에 올라탄 섭우생이 명을 내리자 오십 명의 적룡기마대원은 일제히 나무를 깎아서 급조한 단창을 들어 올렸다.
쿠웅! 쿠웅!
굵은 통나무로 몇 겹이나 덧대어진 저택의 후문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들썩거리고 있었다.
담장 너머에선 오백여 명의 흑도 무인들이 연신 웅성거리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오는 중이었다.
섭우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후문뿐만 아니라 주변의 담장 전체를 응시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
흑도의 무인들은 다들 나름대로 밑바닥에서 구르던 경험이 풍부하지만, 그래도 구심점이 있다거나 수뇌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조금이라도 더 공을 세우고 싶은 자들의 입장에선 질서정연하게 서 있기보다는 당연히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더 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싶을 게 분명했다.
“뛰어넘어!”
“이 정도 담벼락 따위……!”
“멍청이들! 뭣 하러 문을 부수고 있나!”
그 말과 함께 담벼락의 너머에서 수십의 무인들이 담벼락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림자가 마치 벌 떼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그 순간, 섭우생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던져!!”
피유우웅―!
피슈슉!
오십 명의 적룡기마대의 손에서 나무 단창이 쏘아졌다. 경험이 많은 병사들답게 각자 나름대로 구역을 맡아 두고, 그중에 한 놈을 노리고 던진 단창이다. 서로 겹치거나 빗나가는 것 없이 모든 단창들이 마치 빨려들 듯 흑도 무인들의 가슴에 꽂혔다.
푸욱! 푸푸푹!
“컥!”
“큭……!”
“으악!”
비조처럼 날아올랐던 흑도의 무인들은 곧바로 돌팔매질을 당한 참새들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뛰어오른 것은 오십 명이 조금 넘는 듯했다. 다섯 명 정도가 단창에 얻어맞지 않고 담벼락을 뛰어넘었으나, 이내 적룡기마대원 몇 명이 다시금 단창을 던지자 그들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담벼락 너머로 추락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지키는 놈들이 있다! 조심해! 기습을 당했어!”
담벼락 바깥쪽이 웅성거리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비록 의리도 뭣도 없지만, 그만큼 자신의 생명만큼은 끔찍이 아끼는 것이 또한 흑도의 무인이다.
남이 죽었다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
본래 언제 어디에서 급살을 당할지 모르는 게 그들 같은 막장 인생 아니던가.
그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무려 오백 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으나 높은 담벼락과 튼튼한 대문, 그리고 미지의 적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그때, 흑도 무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그깟 단창이 뭐라고! 처음 올라간 것들은 몰라서 당했지만 우리는 알잖아! 단창이 날아올 걸 미리 알면 쳐 내 버리면 될 것 아냐! 여기서 빌빌거리려면 무공은 뭐 하러 익혔어!”
“……!”
“잘 봐라! 이 쌍모도(雙眸刀) 어르신께서 어떻게 담을 넘는지 보여 주마!”
쌍모(雙眸).
두 개의 눈동자라는 소리다.
마치 눈동자처럼 가운데가 둥그렇게 뚫려 있는 칼을 쓴다고 해서 쌍모도인데, 흑도 쪽에서는 제법 명망이 있는 고수였다.
“이원, 이사.”
“옛!”
그때, 저택의 안쪽에선 섭우생의 호명에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가느다란 턱 선에 두툼한 입술을 가진 두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엔 도저히 구별해 낼 수 없을 만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쌍둥이였다.
“모방, 개원.”
“옛!”
“예엣!”
건장한 체구에 대머리인 모방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개원도 앞으로 나섰다.
“쌍모도가 넘어오면 넷이 공격하십시오. 순서는 모방과 개원이 차례대로 창을 던지고, 그다음엔 이원과 이사가 함께 던집니다. 반드시 모든 공격은 반 호흡 안에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이원, 이사 형제, 그리고 모방과 개원은 각각 적룡기마대원들 중 간부의 자리에 가장 근접한 대원들이었다.
당연히 무공도 강하고 자신만의 개성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희 형제까지는 알겠는데…… 모 형과 개 형의 도움도 필요합니까?”
“맞습니다. 필요없습니다.”
아직 젊은 이원과 이사는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둘 모두 한창 자신의 힘에 자신하는 나이였다. 한데 고작 한 명 때문에 그들로도 모자라 동료 두 사람을 덧붙인다는 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원, 이사. 쌍모도는 강합니다. 삼호방의 직위로 따지면 당주 급. 적룡기마대에 비하자면 막내 간부 급 정도일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네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일대일로는 질 리가 없지요.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상대를 압도적으로 없애 버리는 겁니다. 다 따로 계획이 있는 일이니 군사인 저를 따라 주십시오.”
빼빼 말라 해골을 연상케 하는 섭우생이지만 군사로서 눈을 빛낼 때만큼은 어떤 무장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발한다.
이원과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면에선 나이가 좀 더 든 모방과 개원이 훨씬 나았다. 애초에 섭우생의 명이 허튼소리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미 단창을 들고 공격할 준비를 마쳐 두었던 것이다.
스윽―
모방과 개원, 거기에 이원과 이사까지 단창을 들어 올리자 담장 내부엔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섭우생은 그사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마흔여섯 명을 계획대로 뒤쪽으로 후퇴시켰다.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담벼락 위로 그림자 하나가 솟구쳤다.
터엉!
“챠핫―!”
쌍모도는 담장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사백오십여 명, 흑도 무인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는 그의 마음속은 자신감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주목받길 좋아한다. 무공이 절정에 올랐고, 무림백대고수의 후보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동안 자기 입으로 주변에 그 소문을 떠벌리고 다녔을 정도였다.
본래 위기는 곧 기회인 법.
쌍모도가 사십 년 가까이 되는 그의 인생 경험을 되돌아봤을 때 지금과 같은 기회는 흔히 오는 것이 아니었다.
흑도의 무림인 오백여 명.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흔하겠는가. 아마 이번에 실력을 확실히 입증한다면 다음날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크게 부풀어 인근 지역을 진동시킬 것이다.
‘이런 기회도 못 잡다니, 멍청이들.’
그의 눈엔 멍하니 서 있는 무인들이 다 바보처럼 보였다. 단번에 일 장이 넘게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는 등 뒤에서 십자로 교차해 메고 있던 쌍모도를 허공에서 멋들어지게 뽑았다.
촤아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쌍의 기형도가 허공에 은빛을 흩뿌렸다.
쌍모도는 담장 위를 밟고 앞을 경계했다.
앞서 단창에 습격당한 무인들은 모두 담장 위를 넘는 순간 습격당했다. 그리고 날아온 단창은 한 사람당 하나. 정확히 일격일살로 무인들을 떨어뜨렸다. 쌍모도는 이미 날카로운 안목으로 그런 사실들을 살펴본 상태였다.
“자아, 와라! 공격이 온다는 것만 알면 단창 공격쯤은……!”
까아앙!!
“커헛!!”
쌍모도의 신체균형이 확 깨지며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뒤로 넘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단창은 가슴으로 날아왔고, 쌍모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휘둘러 막으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단창에 실려 있는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쌍모도는 자신이 느낀 충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나무를 깎아 만든 어설픈 단창일 뿐인데, 그 위에 무려 강기에 가까운 힘이 실려 있었다.
‘절정! 강기의 위력에 버금간다!’
절정에 오른 고수가 있었다니, 그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 아닌가.
‘하지만…… 막았다, 이거야!’
쌍모도는 히죽 웃었다. 다른 놈들은 다 급살 맞은 새처럼 창에 맞고 떨어졌는데 그는 잠시 휘청거리긴 했어도 공격을 막아 냈다.
아마 밑에서 올려다보는 흑도 놈들은 다들 이것만으로도 놀랄 것이다.
‘이제 담벼락 밑으로 내려서기만 하면…… 헉?!’
마음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던 쌍모도는 황급히 칼을 휘둘렀다.
어느새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투창이 발등 언저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발등이란 곳은 원래 방어하기가 힘든 위치 중 하나였다.
쌍모도는 황급히 칼을 반전시켜 아래로 내리그었고,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균형을 잡았던 몸이 다시금 휘청거렸다.
“큭……!”
공격은 간신히 막았으나 발등을 방어하느라 몸의 균형이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상체는 앞으로 쭉 빼고 엉덩이와 하체는 뒤로 빠진 상황. 이젠 담장 위에선 발가락 하나 얹을 수 없게 된 그때, 정확하게 그의 목젖을 노리고 창이 하나 더 날아오고 있었다.
‘이놈들……!’
처음 그가 담벼락 위로 뛰어오르고, 세 번째 단창이 날아올 때까지 시간상으로는 겨우 반 호흡밖에 지나지 않았다.
쌍모도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세 번째 공격은 버틸 수 없다.
담벼락을 넘지 못하고 뒤로 뛰어내리든지, 아니면 큰 부상을 각오하고 앞으로 무조건 달려들든지 둘 중 하나다.
‘겨우 네 놈밖에 안 되는 것들이……!’
담장 위에 올라서는 순간에 본 안쪽에는 고작 네 명의 사내만이 서 있었다. 이쪽의 인원이 오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상대도 안 되는 숫자다.
문이 열리거나 담장을 넘어가기만 하면 싸움은 순식간에 마무리되리라.
‘놈들……! 이제 곧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찰나의 순간에 잠시 고민하던 쌍모도는 결국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담장을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상황을 알았다.
밑에 있는 놈들 몇 명만 데리고 다시 한 번 뛰어넘으면 그땐 아무런 피해 없이 담장을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따아앙!!
쌍모도는 황급히 뒤로 몸을 젖히며 거의 피부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단창을 위로 쳐 냈다. 강력한 충격에 손목이 저릿하고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그는 강력한 반탄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쌍모도에 얻어맞고 튕겨 나는 단창이 허공에서 맥없이 부서졌다.
그리고 부서지는 파편 사이로…… 또 하나의 검은빛이 번뜩였다.
“어……?”
쌍모도는 순간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
어느 틈에 저게 날아왔단 말인가.
‘날아온 단창 뒤에 숨어 있었어! 미친!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던진 단창 뒤에 또 하나의 단창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고?!’
경악과 분노, 그리고 불신이 가득한 가운데 쌍모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미 추락하고 있는 상황. 방금 막 날아오던 단창을 쳐 내면서 균형이 흐트러졌기에 지금의 공격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쌍모도는 검은색 빛살이 자신의 미간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퍽!
뇌리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
그와 함께 쌍모도의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 ☆ ☆
“쌍모도가 죽었다!”
“네 방이야! 단창이 네 개나 날아왔다!”
“이럴 수가! 도대체 안에 어떤 놈들이 있는 거야?!”
밑에서 지켜보던 흑도 무인들은 웅성거리며 동요를 나타냈다. 쌍모도는 지금 모여 있는 흑도 무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런 자가 담벼락 하나 넘지 못하고 허공에서 창을 맞고 죽다니,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제깟 놈들이 강해 봤자지!”
그때, 흑도 무인들 틈에서 이마에 긴 주름처럼 수평의 흉터를 지닌 중년의 사내가 커다란 기형 낫을 들고 그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잔살겸(殘殺鎌).
무림백대고수 안에 꼽히는 자로, 쌍모도보다 한 수 위라고 알려져 있는 고수였다.
“잔말 말고 하던 대로 문이나 부숴! 미리 함정을 설치해 둔 게 빤한 길로 미련하게 뛰어드니 당하는 거야! 대문을 뚫고 오백 명이 우르르 몰려들면 저것들이 당해 낼 것 같아?”
잔살겸의 신랄한 말투는 왠지 모를 설득력이 있었다.
잔살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흑도 무인들의 앞으로 나서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중산마웅! 함산거마! 그래! 거기 너희 둘! 뭘 딴청을 피워? 빨리 안 와?”
잔살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뒤쪽에서 딴청을 피우던 거구의 사내 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은 모두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인상에 바위 같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키는 육 척.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팔뚝은 척 봐도 신력이 보통이 아니게 생겼다.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각자 자기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마두였다. 자기 땅에서 어떤 자가 이런 식으로 개 부르듯이 불렀다간 당장에 처참한 몰골이 될 테지만, 그래도 상대가 잔살겸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흑도에선 이름값이 곧 실력이었다.
한 지역의 패두와 전 대륙에 유명한 인물 사이의 격차는 그 정도로 컸다.
“뭐요?”
“왜 불렀소?”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부르긴. 머리는 장식으로 갖고 다니냐? 당연히 너희 둘이 문을 부숴야 할 것 아냐!”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왜 이걸 부숴야 하는 거요?”
“당연히 너희 둘이 여기서 힘이 제일 세니까 그렇지!”
“잔살겸은 절정에 올랐다던데, 강기를 쓰면 될 것 아뇨?”
“에잇! 하라면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내가 강기를 이깟 대문 부수는 데 써야겠어? 앙? 그런 힘은 아껴 뒀다가 안쪽에 있는 새끼들 족치는 데 써야 이쪽 피해가 줄어들 것 아냐?”
“…….”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둘 다 ‘그럼 우리는?!’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광기 어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잔살겸에게 감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안 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맞는 말이었다.
잔살겸 같은 고수는 직접 적과 맞닥뜨릴 때까지 힘을 아껴 놓는 것이 올바르다.
무작정 북천맹과 삼호방의 안내에 따라 쳐들어오긴 했지만, 안쪽에 어떤 자들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안쪽에 무서운 고수가 존재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다.
‘하긴 쌍모도도 담장을 못 넘고 죽었으니…….’
‘잔살겸이 힘을 아껴 둘 만도 하지. 그게 모두를 위해 좋지 않겠어?’
‘안쪽에 뭐가 있으려나? 위험한 건 알았지만 너무 심하면 안 되는데…….’
흑도 무인들이 제각각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채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의 생각이 같다는 것도 알고, 자신들이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제각각 무기를 들어 올렸다.
중산마웅은 양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는 커다란 육모철곤, 함산거마는 거대한 낭아추가 무기였다.
“잠깐.”
잔살겸은 그런 두 사람의 중간에 파고들었다.
“나도 같이하는 거다. 셋을 세면 내려쳐.”
왼쪽엔 중산마웅, 중간엔 잔살겸, 오른쪽엔 함산거마가 쭉 늘어선 셈이다.
잔살겸은 자신의 기형 낫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나, 둘…… 셋!”
꽈아앙!!
세 사람은 그래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인만큼, 공격의 시점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졌다.
두께가 반 척이나 되는 커다란 대문이 콰직! 하고 세로로 갈라졌다. 안쪽에 무거운 통나무를 몇 개나 덧대어 놓은 듯하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힘을 맞춰 공격하자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다.
“됐다!”
“열렸다!”
한 번 문에 틈이 생기자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흑도 무인들이 눈을 벌겋게 빛내며 서로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잔살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여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그런 잔살겸을 보며 얼떨떨하게 뒤로 물러섰다.
“흥, 멍청한 놈들. 원래 가장 어리석은 놈들이 제 능력도 모르고 앞서서 설치는 것들이지. 저렇게 날뛰는 것들은 죽기에 딱 좋아. 저런 놈들은 죽으면 미련하게 대처한 제 자신을 원망해야 돼.”
잔살겸은 중얼거리며 속도를 늦춰 걸음을 옮겼다.
사백오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드는 대열의 중간쯤이었다. 자연히 그 옆에 있던 중산마웅과 함산거마의 걸음도 덩달아 느려졌다. 그들은 왠지 앞서 가는 자들이 공을 다 차지할 것 같아서 불안했으나, 느긋하게 중간 속도를 유지하는 잔살겸을 보자 먼저 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쯧쯧, 아까 맨 먼저 담장을 넘던 놈들이 참새마냥 우수수 떨어지는 걸 봤으면서도 저러나. 분명히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제 놈들이 아무리 먼저 나서 봤자 결국은 고수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이거지.”
“아…….”
“아는 뭐가 아야? 이제야 알겠나, 함산거마?”
“……!”
함산거마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차마 뭐라고 하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잔살겸의 말 중 틀린 구석이 없는 것이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어엇! 갈림길이다!”
“어쩌지? 담을 또 뛰어넘을까?”
“멍청하긴. 왼쪽이다!”
“아냐! 오른쪽이다!”
잔살겸을 필두로 한 세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무작정 앞서서 들어온 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호오!”
“이건……?”
세 사람은 각각 감탄성을 흘렸다.
지금 그들이 부수고 들어온 것은 너비가 각각 백 장은 될 법한 대저택의 후문이다.
그런데 이 저택의 구조가 오묘해서, 후문으로 들어오면 우선 별채로 보이는 커다란 전각의 뒤쪽이 보이게 된다.
전각은 일 장 가까이 되는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후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거기서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담장을 따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전의 경험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담장을 뛰어넘어 볼 것인가.
“헛, 잔살겸이다!”
“이런, 벌써……!”
앞서 와서 우왕좌왕하던 자들은 잔살겸과 중산마웅, 함산거마가 함께 다가오자 얼굴 표정이 급박해졌다.
그들은 모두 저 세 사람에게 공을 빼앗길까 봐 달려온 자들이었다.
당연히 저 세 사람이 온다면 더 이상 느긋해할 틈이 없는 것이다.
“끄응, 난 그냥 돌아간다. 왼쪽이다!”
“난 오른쪽!”
“좋아! 난 왼쪽이다!”
앞쪽에 있던 무인들은 어느새 마음을 정하고 한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들 중 담장을 넘겠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맨 처음 담장을 넘던 자들이 단창에 가슴이 뚫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 짓을 또 하겠다면 그건 바보가 아닌가.
후문으로 들어온 사백오십여 명은 거의 절반으로 뚝 갈라져서 좌우로 나눠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너비가 백 장이 넘는 대저택이다. 제각각 양쪽으로 달려가자 그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이놈들…….”
잔살겸은 담장 너머 어느 한곳에 지그시 시선을 두었다.
“분산이라…… 제법 머리를 쓰는구만. 큭큭, 재밌는데?”
그는 이마의 휴터를 꿈틀거리며 웃더니, 휙― 하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우르르 몰려가는 무리의 뒤쪽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허어……!”
“이것참!”
한편,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살겸이 간 것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상황에서 사백오십여 명 중에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무공으로도 그렇고 경륜으로도 그렇고 잔살겸뿐이었다.
강한 자 옆에 있다면 살 확률이 높아진다.
이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진리다.
‘불안하군…….’
‘찝찝한데…….’
잔살겸 덕분에 상황을 냉정하게 되짚어 본 그들은 찬찬히 생각을 거듭했다. 처음에 오십 명이 담장을 넘다가 기습으로 죽었고, 그다음 절정고수인 쌍모도가 공중에서 단창 네 방을 막지 못하고 미간이 꿰뚫려 죽었다.
처음엔 기세등등하게 왔으나 자꾸 생각을 거듭할수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잔살겸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기분.
뭔가 거대한 위협이 다가올 것만 같은 본능적인 불안감이었다.
‘쯧, 고민해 봤자 소용없지.’
‘하긴, 위험한 줄 몰랐나? 다 알고 왔지. 어차피 삼호방 놈들이 기회를 줬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 제 놈들이 같이 싸우자고 했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게 있을 줄 알았어.’
저택의 오른쪽 길을 달려가는 내내 잔뜩 찌푸려진 두 사람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잔살겸의 모습이 어느새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 ☆ ☆
“과연…… 경험이 많은 자는 다르다는 겁니까?”
착! 하고 철섭선이 접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섭우생은 움푹 들어간 볼을 꿈틀거리며 입으로 뭔가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가늘게 뜬 눈으로 전체적인 전장의 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지금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싸움이 가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전장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나눠진 인원에 따라 벌어질 수 있는 모든 확률을 상정한다. 그리고 그 확률에 따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싸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어떤 인물이 어느 방향으로 갔으며 그에 따라 전황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그 인물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그 횟수가 십 단위가 넘어가고, 백 단위가 넘어가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오차를 줄인 채 머릿속의 싸움을 그대로 현실에 실현시킬 수가 있다.
“……좋아. 계산은 끝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번쩍, 섭우생의 눈이 빛났다.
“잔살겸, 마지막까지 이쪽을 보고 있었지요. 알려진 무위에서 이 할 정도 실력이 더 있다고 보겠습니다. 중산마웅과 함산거마, 잔살겸을 뒤쫓아갔으니 알려진 것보다 좀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예상보다 까다로워지겠군요.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곳 저택을 차지했을 때부터 이번 습격을 대비해 두었습니다.”
적룡기마대원들이 들고 있던 나무 단창, 그리고 저택 곳곳에 숨겨둔 ‘장치’가 바로 그 대비책이었다.
촤악―!
섭우생의 철섭선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잔살겸과 중산마웅, 함선거마, 그리고 사백오십의 흑도 무인들. 모두,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차가운 이성과 하늘을 꿰뚫는 지략이 시퍼런 귀광을 흩뿌렸다.
전략과 전술로 전장을 지배하는 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한 군략으로 적을 말살하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어야 하기에 몽고평원의 적들은 그 두려움을 담아 섭우생에게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귀군사(鬼軍師)라고.
귀신과 같은 전술로 상대를 말살시키는 무시무시한 전략가가 바로 섭우생의 정체였다.
☆ ☆ ☆
“빌어먹을! 뭔 저택이 이리 넓어!”
가장 앞서 가던 무인이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불만과 함께 기대감도 담겨 있다.
본래 이런 전투 후에 무사들이 얻는 이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전투에서 얼마나 공을 세웠느냐 하는 것으로 나중에 포상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싸움터에서 하는 약탈이다.
그런데 저택이 크고 넓다.
하긴, 강서성을 다스리던 성주의 저택이니 오죽할까. 그러니 저택 곳곳에 돈이 될 만한 물건도 많다는 뜻이리라.
“내가 먼저다!”
“저리 꺼져! 내가 먼저야!”
선두에 있던 무인들은 서로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앞을 차지하려고 했다. 먼저 차지하는 놈이 먹는 거다. 이 법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투닥거리던 몸싸움은 점점 격해졌고, 마침내 달리는 와중에 서로를 향해 무기를 빼 드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드드드―
“어……?”
그렇기에 몰랐던 것이다. 크게 휘어지는 길을 반쯤 지났을 때쯤 그들이 밟고 서 있던 땅이 크게 흔들렸다.
“어어……?”
“어어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몰려들던 흑도 무인들이다. 갑자기 발밑이 흔들리자 오히려 더더욱 몸이 엉키며 한 몸처럼 뭉쳐 버렸다.
한데 모인 이백여 명의 무게를 지탱하기엔 그들의 발밑을 받치고 있던 나무판은 너무나 약했다.
한데 뭉쳐서 무게가 무거워지는 순간, 지체없이 산산조각나며 바닥이 무려 반 장이나 내려앉고 말았던 것이다.
우르르릉―
콰득! 콰지직!
“으아악……!”
발목이 부러진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닥에는 뾰족하게 깎아 놓은 나무쐐기들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라도 이렇게 급작스러운 함정에 반응하려면 경신술을 전문적으로 연마했거나 절정의 경지를 지나야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이백여 명이 우르르 몰려들다 보니 서로의 몸이 엉킨 상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끄아악……!”
“이게 무슨……! 끄으윽……!”
무인들은 당황하여 커다란 구덩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그들이 나가려고 버둥거릴수록 그 안에 엉킨 사람들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 버렸다.
“끄으윽! 이 자식! 발로 차지 마라!”
“밟고 올라가지 마! 안 돼! 내가 먼저 나갈 거야!”
“거기 서지 못…… 끄아악!”
푸화악!
마침내 무기까지 뽑아 들고 공격하는 자도 생겨났다. 살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할까. 원래 흑도의 무인들이었기에 자기 혼자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명을 지르고, 무기를 휘두르고, 핏물이 튀어올랐다.
팔층 지옥의 아비규환(阿鼻叫喚) 같은 모습이었다.
경신술이 뛰어났거나, 혹은 치열하고 잔인하게 동료들을 밟고 올라서서 겨우 구덩이를 빠져나온 것은 겨우 삼십여 명.
무려 이백여 명의 인원들 중 대부분이 구덩이 속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구덩이에 남아 신음하는 자들도, 구덩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자들도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어, 어엇……?!”
구덩이 너머 정면에서 달려오던 오십여 명의 적룡기마대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단창을 집어 던졌다.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호적 소리. 갈색 빛의 단창들이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왔다.
구덩이에 빠져서 신음하던 무인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단창에 꿰뚫려 목숨을 잃어 갔다.
두 번, 세 번. 네 번…….
오십 명이 단 네 번만 반복하면 그대로 이백 개의 단창을 날릴 수 있는 법인만큼, 금방 구덩이 안은 적룡기마대원들이 던진 단창들로 빼곡해졌다.
두두두두―!
“이럇!”
“챠하앗!!”
적룡기마대원 오십 명은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달리는 기마에서 각자 무기를 뽑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삼십여 명의 무인들을 습격했다.
무인들은 깜짝 놀라며 반격을 하려 했으나, 생전처음 겪어 보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공격에 순식간에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쩌엉!!
혹여 처음에 날아오는 검격을 막아 낸다 해도…….
푸욱!!
“컥……!”
절묘한 빈틈을 파고드는 창술에는 어김없이 가슴이 꿰뚫리고 말았다.
“비, 비겁한……!”
“무인답게 싸워라! 이런 술수를 부리다니, 크아악!!”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린 채 절규했지만,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적룡기마대원 오십 명은 신기의 기마술로 말을 몰며 차례차례 무인들을 쓰러뜨려 갔다. 무감정한 얼굴로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행하는 일꾼처럼 보였다.
푸화악―!
마지막 생존자가 검에 베어진 후, 적룡기마대원들 중 반수가량이 미리 준비해 온 가죽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열고 구덩이를 향해 흩뿌렸다.
촤아앗―!
“끄으…… 어엇……?!”
“뭐, 뭐야!!”
발 밑의 함정에 상처 입고, 날아온 단창을 운 좋게 피한 자들이 경악하며 발버둥 쳤다.
적룡기마대원들이 뿌린 액체에선 콧속을 자극하는 짙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어유(魚油)였다.
생선에서 짜낸 기름으로, 주로 등불에 불을 붙일 때 쓰는 기름이다.
“서, 설마……!”
“안 돼! 살려 줘!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무인들은 절규했다.
아무리 흑도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보았다지만, 그들에게 이런 체계화된 단체 전투에 대한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구덩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나무쐐기에 몸이 찔려 있는데다 사람들 사이에 몸이 엉켜 있으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사이 적룡기마대원 한 명이 화섭자로 불을 붙여 무심하게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툭, 하고 떨어지자마자 기름에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르는 불꽃.
흑도 무인들의 비명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무인이 아닙니다.”
좌측 통로가 보이는 어두운 구석. 탁! 소리가 나게 철섭선을 접은 섭우생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대일의 격전을 벌일 때는 무인의 자긍심이 큰 힘을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과 같은 다수의 전투 때는 그런 자존심은 해가 되지요.”
흑도 무인들은 함정에 빠지고, 거기서 서로 빠져나오려고 아비규환의 사태를 벌이다가 결국 하나로 합일되지 못한 채 지리멸렬했다.
그것이 급조된 흑도 무인들의 한계였다.
개개인이 아무리 보통 병사들보다 강하더라도, 밀집되지 못한 힘은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미 섭우생의 머릿속에선 혹시 모를 변수까지 포함해 모든 결과가 나와 있던 싸움이었다.
“나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귀군사라는 별명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피의 업보를 스스로 짊어졌던가.
군사라는 위치는 그런 것이다.
작전을 세울 때,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가 몇 명이나 희생될지 머릿속으로 다 알면서도 그들을 싸움터로 내보내야 한다.
“이원, 이사, 스무 명을 맡기겠습니다. 각각 열 명씩 통솔하여 이들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갑니다. 첫 일격을 제외하곤 철저히 교전을 피하십시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됩니다. 이번 싸움은 속도가 중요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눈에서 귀광을 내뿜는 섭우생을 보며 이원과 이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로 올라섰다. 이미 열 명씩 조를 이루고 있던 대원들 중 두 조가 이원과 이사의 뒤에 늘어섰다.
“모방, 개원, 두 분과 나머지 대원들은 저와 함께 갑니다. 모두 말에서 내려 주십시오.”
“옛!”
“명심하십시오. 이번에는 절대로 단 한 사람도 사상자를 내선 안 됩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관록이 있는 모방과 날카롭고 예리한 개원.
출발 준비를 마친 이원과 이사까지.
섭우생을 따라온 오십 명 중 간부 급의 네 사람은 모두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섭우생에게 포권을 취했다.
귀군사의 명을 따르면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그건 전장에서 오랜 시간 함께한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숫자상으로는 네 배나 되는 이백 명을 상대로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한 승리를 취하지 않았던가.
그게 다 ‘귀군사’라 불리는 섭우생의 능력 덕분이었다.
“자, 갑시다!”
섭우생이 자신의 말 홍오에 올라타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적룡기마대는 두 개의 조로 나뉘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 조는 좌측 통로를 통해 안채가 있는 곳으로, 다른 한 조는 흑도 무인들이 달려온 길을 되짚어간다.
두두두두―
어두운 밤하늘. 이백여 명의 생명을 거둔 참혹한 현장을 뒤로한 채, 말발굽 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뭔가 이상하군.”
이마에 큰 흉터가 남아 있는 오십대의 중년 사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기형 낫이 그의 심란한 심정을 대변하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잔살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중산마웅이 하관을 덥수룩하게 덮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미 다 도착했단 말이다.”
잔살겸은 손가락으로 전면부를 가리켰다.
우측으로 우회해서 돌아온 그들은 어느새 옆길을 크게 돌아 안채의 뜰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요?”
“쯧쯧, 한심하구만.”
잔살겸은 혀를 찼다.
“잘 보란 말이다. 아까 절반 정도가 왼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그럼 지금쯤 도착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거지. 이건 분명히 뭔가가 이상하다, 이거야.”
그 말에 중산마웅과 그 옆에 있던 함산거마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잔살겸처럼 빨리 알아채진 못했으나, 듣고 보니 그들도 확실히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저택은 좌우 대칭으로 지어져 있다.
상식적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각각 나뉘어서 출발하면 비슷한 시간에 도착해야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저쪽에선 아무도 안 온 거지?’
중산마웅과 함산거마는 각각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 게 뭐 있나. 보나마나 오다가 당한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백 명이나 되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당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퍽!!
“흠……!”
잔살겸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다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기형 낫을 바닥에 팍! 꽂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보통 무인들은 자신의 무기를 목숨처럼 아끼는데, 잔살겸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아까 담벼락 넘으려는 오십 명을 순식간에 자빠뜨리는 거 못 봤나? 큭큭, 분산책을 쓰기에 어떤 수를 쓰려나 했더니, 한쪽을 몰살시키는구만. 대단해, 아주. 게다가 내가 있는 곳을 피해서 저쪽부터 쓰러뜨린 것도 마음에 들어.”
잔살겸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의 눈에서 광기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좋아.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제대로 확인해 보자고. 자―! 이놈들아! 주목해라!”
안채에 도착해 잔뜩 흥분해 있던 흑도 무인들이 잔살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고요하게 불이 꺼져 있는 안채를 향해 막 돌격하려던 참이었다.
이젠 적이 숨어 있다면 싸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약탈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잔살겸이 그걸 막아 세운 것이다.
“뭐요?”
“할 말 있소?”
잔살겸에게 나오는 말들은 곱지 않았다.
흑도 무인들이 그를 잠재적인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들, 말본새하고는. 네놈들 건방진 주둥이를 찢어 줄까?”
하지만 잔살겸이 눈을 부릅뜨고 안광을 쏘아 내자 감히 정면으로 눈을 맞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살겸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 차려라, 멍청한 놈들아! 우리 말고, 저쪽으로 오겠다던 놈들이 아직 안 오고 있다! 그게 왜 그런 것 같냐?”
흑도 무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그러고 보니……!”
딴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들도 그쯤 되자 정신을 차렸다.
“이런 썅, 설마 당한 거 아냐?”
“어쩌다가?! 아니, 그게 말이나 되나? 그냥 따로 약탈할 만한 걸 찾은 거 아냐?”
“이백 명이? 그것도 안채에 도착하기도 전에?”
“…….”
흑도 무인들은 제각각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퍼억!
그 침묵을 깨고, 잔살겸이 자신의 기형겸으로 바닥을 다시 한 번 후려쳤다.
“생각할 게 뭐 있냐, 멍청한 놈들. 아,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안채에 무작정 들어가지 말고 일단 저쪽으로 되돌아가서 상황을 살피자, 이거다!”
“아……!”
“그, 그렇지! 그러면 되겠네.”
하지만 장소가 어디든 반골은 있는 법이다. 흑도 무인들 중 몇 명은 삐딱한 시선으로 그런 잔살겸을 바라봤다.
“난 싫은데?”
“약탈이 먼저지. 눈앞에 안채를 두고 돌아가야겠어?”
“싸우고 싶으면 댁들이나 실컷 싸우라고. 나는 일단 한몫 챙기고 볼 테니까.”
즉, 싸울 놈들이 싸우는 동안 자신들은 돈 되는 거나 챙기겠다는 소리였다. 자기 스스로는 머리를 쓴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엔 어지간히 얕은 생각이었다.
잔살겸은 화를 낼 것도 없이 비웃어 주었다.
“큭큭, 하여간 머리 나쁜 놈들은……. 이 멍청한 자식들아, 너희들 여기에 왜 왔냐? 강호관직론을 듣고 공 좀 세워 보자 해서 온 거 아니냐? 그럼 당연히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지. 고작 좀도둑질이나 하려고 해? 에라이, 때려쳐라, 병신 같은 놈들.”
“……!”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리고…… 설령 관직이 탐나지 않는다고 해도 너희들끼리 안채에 들어가겠다? 큭큭, 좋아. 마음대로 해 봐. 대신 저쪽에서 이백 명을 소리없이 묻어 버린 놈들이 지금 어디서 우릴 노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기억해라. 너희들이 조그마한 금붙이나 챙기는 동안 그놈들이 네놈들의 등에 단창을 콱 꽂아 버릴 테니까.”
킥킥대며 말하는 잔살겸의 말은 온몸에 소름이 들 정도로 섬뜩해 보였다. 맨 처음 자신들은 남겠다고 말했던 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잔살겸의 분위기가 섬뜩하기도 했거니와, 그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지금, 이백 명을 갑자기 없애 버린 미지의 적이 이 저택의 어딘가에 귀신처럼 숨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정신 제대로 박힌 놈들은 빨리빨리 움직여! 저쪽부터 살펴보자고! 거기서 놈들을 만나면 선두는 누가 맡을 거냐? 내가 맡을까?”
기형 낫을 어깨에 툭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흑도 무인들이 서로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선두로 나서면 위험하긴 할 테지만 공을 세울 기회도 많아진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올 때부터 북천맹과 삼호방은 가장 많이 ‘목을 벤 자’에게 포상을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내가 하겠소!”
욕심이 큰 자가 손을 들며 큰 소리로 외치고,
“나도, 아니, 내가 하겠소! 선두는 내 차지요!”
“나를 빼놓고 선두를 논할 수는 없지! 선두는 이 몸이 하시겠다!”
처음엔 우물쭈물하던 무인들이었으나, 한 번 방향이 결정되자 서로 선두를 서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무작정 달려가는 무인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곳에 모여 있는 흑도 무인들은 모두 공을 세우기 위해 온 자들인 것이다.
“큭큭, 멍청한 놈들. 이렇게 안 해 주면 제 밑도 못 닦는 건가.”
잔살겸은 알아서 선두를 서기 위해 달려가는 흑도 무인들의 뒤에서 편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흑도 무인들은 좌측으로 간 자들이 올 만한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마치 누가 더 빠른지 경주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넓은 저택이었으나 중간 지점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헛……!”
“허엇!!”
경악한 무인들은 선두에서부터 급격하게 멈춰 섰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따라오던 다른 무인들이 갑자기 멈춰 선 자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그런 그들도 두 눈에 비춰지는 광경을 보고는 다른 의미로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흑도의 무인들은 모두 굳어 버렸다.
삼십여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는 근처, 커다란 구덩이 속에 목불인견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호오?”
흥미롭다는 듯 감탄한 것은 잔살겸 한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무인들은 모두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새카맣게 탄 시신들. 중간중간에는 아직까지 불이 붙어 있는 곳도 있었다.
아무리 흑도에서 구르며 온갖 광경을 다 봤던 자들이라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백여 명이 단체로 몰살당한 채 구덩이에 빠져 불에 반쯤 탄 모습은…… 꿈에서라도 보기 두려울 만큼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무인들 중 한 사람이 중얼거린 그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의 적들은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나 잔혹하고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는가?
“……나왔군.”
그때, 잔살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정면의 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이십 장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곳이다.
구덩이에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한 곳에 건장한 사내 서른 명 정도가 서 있었다.
그들이 모두 단창을 들어 올렸다.
“피해라!”
잔살겸의 외침이 터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쉬쉬쉬쉭―!
새카만 그림자가 하늘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