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三章 ― 기책압도(奇策壓倒)
드러난 빈틈을 먼저 노리지 않는다면 군사로서 자질이 없는 것이다.
싸움판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과 작은 약점을 파고들어 큰 균열을 만들어 내는 전술.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결합되는 것이야말로 싸움의 진정한 미학이라고 섭우생은 생각했다.
전략과 전술, 즉 작은 흐름과 큰 흐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보통 사람들은 전략과 전술을 착각하곤 한다.
대충 싸움의 계획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하니 착각하는 것인데, 사실 알고 보면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전략이란 거대한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이며 계획이고, 전술은 그중 한 싸움에 대해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책들을 모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전술이 작은 거고, 전략이 큰 거다.
전술에선 ‘힘’과 ‘속도’가 중요하다.
병사들의 전투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래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인근의 지형은 어떤 모습이며 무기는 어떤 것을 사용하고 장거리에서 어떤 공격을 취할 수 있는지 등등, 그런 식의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한 요소다.
한편, 전략에선 ‘정치’가 중요하다.
적군과의 관계, 국내에서의 보급, 군단의 배치.
흔히 전술을 확대해 놓은 것이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것 또한 틀린 말이다. 숫자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 당연히 거기엔 실정을 책임지는 ‘관인’이 생기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니 전술을 짤 때와는 전혀 다른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삼 년 전 흑룡강 동부에서 있었던 보급 전투를 들 수 있다.
그 당시 적룡기마대는 명의 보급을 끊으러 오는 몽고 병사들 오천 명을 상대로 기습을 통해 대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첫 싸움이 끝난 다음 날, 적룡기마대는 본군으로부터 급박한 전령을 듣게 된다.
인근 관아에 큰 피해를 끼쳤으니 당장 싸움을 멈추고 돌아와 심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보급을 끊으러 오던 몽고 병사들의 수장은 약탈을 하겠다고 인근 마을과 관아에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는데, 그 때문에 인근의 현령 한 사람이 어떻게든 피해를 줄여 보고자 몽고 병사들의 부대에 협상을 위해 찾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적룡기마대는 부대를 급습해 대부분을 몰살시켰고, 전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현령은 그 틈에 끼어 죽고 말았다.
명의 군사가 현령을 죽인 것은 큰 죄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현령도 명의 관인임에도 불구하고 적병인 몽고인들의 부대에 몰래 들어가 있었으니 법을 어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세상사라는 게 법만으로 해결이 되던가.
한 번 싸움이 나 병사들이 짓밟고 가면 그 한 해에 끼니를 걱정하며 굶어 죽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민초들의 삶이다.
명의 병사들이 매일같이 보초를 서 주는 것도 아니고, 몽고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언제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모르는데 법에 따라 손 놓고 떨어져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히려 적병의 소굴로 용감하게 들어간 현령을 칭찬해 줘야 할 판국이다.
결국, 다음 날 적룡기마대는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음에도 흑룡강 서부의 다른 지역으로 좌천되듯 배치되고 말았다.
현령을 죽인 것에 대한 처벌인 셈이었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적룡기마대의 입장에서 승리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패배라고 봐야 할까.
전술을 사용한 전투에선 승리했으나, 정치가 엮인 전략에선 큰 손해를 본 것이다.
물론 현령이 몰래 부대를 찾아갔다는 불운이 겹친 일이었으나, 전략과 전술을 짜는 섭우생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으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처럼 전술과 전략은 다르다.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을 사용해 이긴다고 해서 반드시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전략을 수립해 두었다고 해도 작은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그 전쟁은 승리할 수 없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섭우생은 귀군사(鬼軍師)라는 별명에 걸맞은 전술로 적의 일부를 말살시켰으나, 여기서 만약 희생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나오면 다음 전략에 지장을 주게 된다.
전술을 짜는 것에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발사.”
섭우생의 나직한 명령에 적룡기마대원 서른 명의 손에서 쏘아진 단창이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지금 전황을 살피는 섭우생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하게 고조되어 있었다.
그는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만에 날아간 단창과 그 경로를 계산하고 그 밑에 있는 자들의 능력을 가정해서 피해를 산출해 낸 뒤 곧바로 다음 단계로 이동했다.
“자, 갑시다!”
선두에 서서 몸을 날리는 섭우생을 따라 서른 명의 적룡기마대원도 망설임없이 몸을 날렸다.
푸푸푹!
“으아악……!”
비명 소리는 그 뒤에 들렸다.
단창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들이 이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중간에 잔살겸의 입에서 피하라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그 말에 반응할 수 있던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저놈들……!”
“저 새끼들 잡아!!”
단창에 부상을 입었거나, 혹은 옆에 있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흑도 무인들의 눈에서 분노가 타올랐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빙 돌아 적룡기마대워의 뒤를 쫓았다.
구덩이가 워낙 크다 보니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좁았다.
섭우생과 적룡기마대원들은 그들이 옆 통로로 진입하는 순간, 휙― 하니 몸을 다시 돌렸다.
“발사!”
피슈슈슉―!
까강! 푸욱!
“으아앗……?!”
일제히 날아가는 서른 개의 단창은 사냥꾼의 화살처럼 집요했다.
물론 이번엔 대비를 하고 있다 보니 절반 이상이 날아오는 단창을 막아 냈으나, 나머지 절반은 워낙 좁은 길을 지나는 탓에 제대로 피해 내지 못하고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이동!”
조금 무리하면 한 번 쯤 더 공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섭우생은 그걸로 미련없이 후퇴를 지시했다. 그들이 바람처럼 빠져나가자 흑도 무인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특히, 좁은 길을 거칠게 헤치고 나와 선두에 선 거구의 사내가 가장 분노했다.
“이놈들―!”
흉신악살을 연상케 하는 험악한 인상에 하관을 덮은 덥수룩한 수염은 잔뜩 엉켜 있고, 손에 든 것은 성인 남성이 양손으로 붙잡아도 모자랄 것처럼 커다란 육모철곤이다.
안휘 쪽, 중산 근처에선 상대할 자가 없다고 알려진 중산마웅이 직접 나선 것이다.
무게가 적어도 칠십 관은 나갈 것 같은데, 그걸 어깨에 짊어졌으면서도 그는 무거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그가 적룡기마대원들을 거의 따라잡자 섭우생이 뒤쪽으로 빠져 중산마웅의 앞으로 나섰다.
“네놈이 대장이냐!!”
후우웅―!
우렁찬 목소리가 화탄이 터지듯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휙하니 어깨에 짊어졌던 육모철곤을 앞으로 내려찍는데, 육중한 무기와 거구의 체격에 안 맞게 그 속도가 굉장했다.
쩌어어엉!!
“……!”
그런데 그런 묵직한 공격이 고작 두 뼘짜리 철섭선에 막혀 멈춰 섰다.
지켜보던 모든 흑도 무인들이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뿐인가.
거대한 육각철곤을 쳐 낸 철섭선이 촤악― 펼쳐지며 부채질을 하는데, 그 순간 거구의 중산마웅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샤아악―
예리한 소음과 함께 중산마웅의 목덜미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이런……!”
중산마웅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숨통이 끊어질 뻔하지 않았는가. 고작 두 뼘짜리 철섭선에 실려 있는 경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직까지도 육각철곤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저릿저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노옴―!”
뒤늦게 중산마웅이 크게 분노하며 포효했지만, 첫 일격이 실패한 순간부터 섭우생은 어느새 다시 뒤를 돌아 달리고 있었다.
어찌나 신법이 빠른지 눈 깜빡할 새에 이미 길목의 끝까지 가 있었다.
자신의 피를 보고 눈이 뒤집힌 중산마웅은 앞뒤 재지 않고 미친듯이 그 뒤를 쫓아갔다.
“거기 서랏―!”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당연히 섭우생과 적룡기마대원들에게 설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뒤를 쫓아오는 것은 숫자가 조금 줄었다곤 하나 그래도 여전히 이백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다.
섭우생은 경신법까지 사용해 따라붙는 흑도 무인들을 피해 저택의 후문까지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그리고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곳에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몸을 반전해 제자리에 우뚝 섰다.
“무슨 생각이냐!!”
앞서 오던 중산마웅이 인상을 더욱 사납게 찌푸리며 소리쳤다.
섭우생은 접어 둔 철섭선을 허공에 휘저으며 명령을 내렸다.
“발진!”
명을 받은 적룡기마대원들이 어딘가로 달려가 검으로 두꺼운 밧줄을 끊어 냈다. 그러자 활시위가 튕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담장 위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촤르르륵―!
“……!!”
새가 날개를 펼치듯 허공에서 활짝 펼쳐지는 것은 두꺼운 그물이었다.
흑도 무인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걸렸다.
힘 좋은 산짐승을 잡는 데에나 쓰일까, 무인들을 상대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 그물이다. 게다가 지금은 싸울 준비를 마치고 무기까지 빼 들고 있는데 그런 잔 수가 가당키나 한가.
“차핫!”
가장 먼저 중산마웅이 커다란 육각철곤을 휘저어 그물을 걷어 냈다.
이어서 뒤따르던 흑도 무인들도 온갖 무기를 꺼내 들고 그물을 아예 허공에서 잘게 잘라 버렸다.
산산조각난 그물이 아무런 의미 없이 비산했다.
기껏 날려 보낸 그물이 어떤 효과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섭우생의 눈빛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좋아, 지금입니다.”
섭우생의 신호를 받고, 적룡기마대원들이 다시 한 번 단창을 집어 던졌다.
중산마웅을 필두로 한 흑도 무인들은 모두 비웃음을 지으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단창을 던지는 공격은 기습일 때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쏘아대면, 어지간한 투창술의 대가가 아닌 이상 무인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다.
“어엇……?”
“몸이…… 왜……?”
그런데 뒤쪽에 있던 무인들 중 무공이 약한 자들부터 이상을 나타냈다.
푸푸푹!!
“끄악……!”
“컥……!”
평소대로라면 가볍게 쳐 낼 공격이었음에도, 그들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것을 느끼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단창에 꿰뚫렸다.
살을 꿰뚫는 섬뜩한 소리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흑도 무인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서, 설마……?”
“독!! 독이다! 마비산이야!”
“이런……!! 설마, 아까 그 그물에……?”
무공이 약한 자들 중에는 일시적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섭우생이 미리 준비해 둔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귀한 천잠사로 만든 그물이 아닌 이상 무인들에게 그물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그물에 듬뿍 묻혀 둔 마비산이다.
그렇게 되면 그물이 허공에서 잘려 나가거나 손쉽게 찢어지더라도 함정으로서의 역할은 다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야비한……!”
평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흑도의 무인들이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크게 분개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발사.”
하지만 섭우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심한 공격 명령뿐이었다.
“이노옴―!”
다시 한 번 서른 개의 단창이 허공을 갈랐으나, 그 중 십여 개는 선두에 서 있던 중산마웅이 육모철곤을 미친 듯이 휘둘러 바닥으로 떨궈 버렸다.
물론, 나머지 스무 개의 단창은 여전히 마비되어서 뻣뻣하게 움직이고 있는 흑도 무인들을 꿰뚫었다.
“이런…… 이런 짓까지 하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무인이냐!!”
중산마웅은 분을 참지 못하고 절규했다.
“무인?”
섭우생은 철섭선을 촤악― 하고 펼치며 싸늘하게 웃었다.
“누가 무인이라는 겁니까? 이건 전쟁입니다. 싸움 끝에 누가 살아남느냐 하는 목숨이 걸린 전쟁 말입니다.”
“……!”
“목숨이 걸린 마당에 무슨 예의고 법도를 따집니까? 아니, 애초에 흑도의 무인이라는 자들은 원래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정저지와(井底之蛙)로도 모자라 자신의 본분마저 잊어버린 겁니까?”
정저지와.
우물 안 개구리를 말함이다.
중산마웅은 일시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혼자서 싸울 때는 무슨 수를 써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단체 전투에서 당신들은 이상하게도 정정당당함을 고집합니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경험도 없겠지요. 그게 당신들의…… 패인입니다.”
섭우생은 그 말과 동시에 몸을 날려 중산마웅에게로 달려들었다.
쉬이익―!
누군가가 앞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빛살 같은 움직임이었다.
중산마웅이 기다렸다는 듯이 육모철곤을 휘둘렀다. 쿵! 하고 땅이 울리고 철곤을 휘젓는 움직임에 마치 광풍이 부는 것처럼 주변 대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쩌어엉!
섭우생은 접은 철섭선으로 철곤을 옆으로 밀어내고 가까이로 접근했다.
문사복의 치렁치렁한 소매가 춤을 추듯 허공에서 휘날렸다. 그 순간, 짧게 끊어 치는 중산마웅의 철곤과 섭우생의 철섭선이 순식간에 십여 차례나 교차했다.
따다다당! 따당!
“상황이 괜찮았다면 서로 좋은 승부를 나눴을 텐데, 안타깝군요.”
촤르륵―
섭우생의 섭선이 활짝 펼쳐졌다.
“당신 역시도 이미 마비되었습니다.”
“……!”
후우웅―!
섭우생의 철섭선이 마치 중산마웅에게 바람을 부쳐 주듯 살랑거리는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산마웅의 덥수룩한 수염이 흔들렸다.
바람은 바람이되, 그것은 지옥에서 불어오는 죽음의 바람이었다.
중산마웅의 가슴이 대각선으로 쩍하니 갈라지고, 철곤을 잡고 있던 양손과 양팔에서 나선을 그리며 타고 오른 상처가 순식간에 목까지 뻗어 왔다.
푸우우욱―!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중산마웅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원통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더듬더듬,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필살나선선풍(必殺螺線煽風)…… 끄륵, 섭가…… 섭가라니…….”
그렇다. 그는 섭우생의 본 가인 섭가의 무공을 알아본 것이다.
절정지경의 고수답지 않은 허무한 죽음이었으나, 그 역시도 별호에 마(魔)자가 붙을 만큼 평소에 악행을 저질러 오던 자였다.
결국, 악인에 걸맞은 최후였다.
“이런 시러배 자식이―!!”
뒤쪽에서 낭아추를 든 또 다른 거한이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마비산의 효력이 그 건장한 육신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지 부릅뜬 호안과 이리저리 휘젓는 팔다리에서 뻣뻣한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함산거마.”
쩌엉!
섭우생은 함산거마의 낭아추를 철섭선으로 막아 내며 뒤쪽에서 여전히 뻣뻣하게 움직이고 있는 흑도 무인들을 바라봤다.
거듭된 공격으로 백육십여 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이쪽이 오십 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처음엔 다섯 배의 인원이었으나, 이젠 세 배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이 되었다.
“자, 이제 때가 됐습니다.”
“무슨 개소리냐!”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들의 최후는 이곳이라고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
섭우생의 확신 어린 얼굴을 보는 순간, 함산거마는 송충이가 등을 타고 거슬러 올라오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을 느꼈다.
“네놈…….”
함산거마가 뭐라고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는 등 뒤에서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두두두두―!
“헛……?”
“뭐, 뭐야?”
흑도 무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뒤를 돌아봤다.
스물두 명.
선두에 선 쌍둥이 형제가 나란히 달리는 것에 이어, 각각 열 명으로 구성된 두 개의 조가 선두의 호흡에 맞춰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공겨억―!”
“와아아―!”
거대한 함성이 마비산을 들이켠 흑도 무인들의 심신을 뒤흔들었다.
“뒤, 뒤에서……?”
“대체 어느 틈에?!”
대체 어느 틈에 뒤로 돌아왔단 말인가.
그들은 몰랐지만 지금 이원과 이사는 그들이 달려온 경로를 크게 한 바퀴 더 돌아서 뒤를 따라잡은 상태였다. 이것 역시도 섭우생의 계획대로다.
처음에 거꾸로 출발했을 때부터 이원과 이사는 무인들이 마비산에 중독되는 바로 이 시점에 후방을 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인들이 달리는 속도와 이원과 이사를 필두로 한 기마병의 속도, 그리고 그들이 함정을 발동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모든 것을 손안에 쥔 듯 정확하게 알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성사시킬 수가 없지.’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었어. 괴물이야, 괴물.’
이원과 이사 형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무기인 길고 날카로운 태도(太刀)를 뽑아 들었다.
“챠하앗―!”
“타하앗!!”
마치 커다란 망치로 정을 때려박듯이 이원과 이사를 필두로 한 기마대가 무인들의 숲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며 돌격했다.
푸화악―!
일격에 목이 날아간 시신들이 피를 흩뿌리며 풀썩 쓰러졌다.
이원과 이사는 소리를 질렀다.
“목을 내놓아라!”
“이원과 이사 형제가 나가신다―!!”
마치 적룡기마대의 막내인 진구를 쌍으로 모아놓은 것처럼 호전적이고 격렬하게 싸움을 즐기는 것이 이원, 이사 형제의 특징이다.
그들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듯 날뛰며 돌진했고, 두 사람의 투기에 반응하듯 뒤따르던 스무 명의 적룡기마대원도 함성을 지르며 냉정하면서 절도있는 공격으로 흑도 무인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날카롭고 조직적인 공격에 뻣뻣하게 굳어져 있던 무인들은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졌다.
물론 중간에 마비가 덜된 자나 금방 풀린 자들이 반격을 취하려고 했으나, 상대는 몽고 기병들과 속도를 논하던 기마 부대였다. 흑도 무인들이 겨우겨우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하려고 하면, 어느새 저 멀리까지 휩쓸며 지나가 버려서 그들에겐 반격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스무 명이 각자 두 명씩만 죽였어도 사십 명의 생명을 거둘 수 있다.
후방에서 습격해 비스듬하게 꿰뚫고 지나간 이원과 이사부대는 어느새 오십이 넘는 피해를 입히고 유유히 정면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 뭉쳐! 뭉쳐라!”
“각자 싸우면 안 돼! 옆에 있는 놈들과 호흡을 맞춰!”
중간에 조금 생각이 있는 자들이 협력을 꾀하려고 하였으나, 애초부터 개인적인 성향이 워낙 강한 자들이다 보니 도통 협력이 되질 않았다.
힘을 합치려 해도 서로 호흡을 맞출 줄을 모르니 모든 게 허사였다. 서로 주공(主攻)을 맡으려다 오히려 몸이 부딪치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거추장스럽게 서로의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다.
채챙! 푸화악!
한편, 섭우생과 모방, 개원을 필두로 한 서른 명의 기마대원은 이원과 이사 형제 이상으로 강력함을 뽐내며 흑도 무인들을 휩쓸고 있었다.
상대가 온전한 무공을 갖추고 있었다면 모를까, 마비산에 당해서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오히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쉬운 상대였다.
“이, 이놈들……!”
“이런 치졸한 술수만 아니었어도 네놈들쯤은……! 크아악……!”
죽어가는 몸으로 원망을 내뱉는 자들도 있었으나 동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의 일은 전쟁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채채챙! 푸확! 쿠쿵!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이제 적은 고작 오십여 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방, 개원!”
선두에서 조금 뒤쪽으로 내려온 섭우생이 두 사람을 불렀다.
“옛!”
“무슨 일이오!”
섭우생은 철섭선을 접어 손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웃었다.
“대원들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적의 수괴를 처치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시길.”
모방과 개원은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능숙하게 양손을 사용해 포권을 취했다.
“이럇!”
히히힝―!
고삐를 잡아당기자, 섭우생의 말인 홍오(紅悟)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재빨리 튀어나갔다. 홍오는 힘은 그리 좋지 않지만 힘껏 달리는 중에도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명마였다.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하여 원하는 지점으로 가는 것은 수월했다.
두두두두―!
이원과 이사 형제는 거꾸로, 모방과 개원은 정면으로 짓쳐 들어 흑도 무인들을 쓰러뜨리는 가운데, 섭우생은 홀로 흑도 무인들이 모여 있는 중심을 향해 쳐들어갔다.
이미 흑도 무인들은 오십 명도 채 남지 않았다.
반면에 적룡기마대는 단 한 사람의 손실도 없으니 섭우생이 세운 전술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저 사람만이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지.’
섭우생의 시선이 향하는 곳.
광기 어린 눈빛을 하고 이마에 큰 흉터를 지닌 오십대의 중년 사내, 잔살겸이었다.
잔살겸 역시도 그를 향해 달려오는 섭우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촤르륵―! 탁!
섭선이 한 번 펼쳐졌다가 다시 접혔다.
“이놈! 큭큭, 와랏!”
잔살겸의 기형 낫은 잔뜩 녹이 슨데다 비뚤비뚤하게 이까지 빠져 있었지만, 그만큼 흉물스럽고 무섭게 보였다.
잔살겸은 자세를 낮춘 채 그 기형 낫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섭우생이 먼저 공격하면 반격을 취할 것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두두두두―
한껏 달려나간 홍오가 섭우생을 잔살겸의 코앞까지로 데려다 주었다.
그 순간, 섭우생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쉬이익―!
“엇……?”
잔살겸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그는 반격을 기다리는 척해 놓고, 선공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섭우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잔살겸은 남의 구속을 받기 싫어하는 독립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선공을 취할 확률이 구 할.”
파라락―
땅에 내려서는 섭우생.
품이 넓고 긴 소맷자락이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직접 피를 보길 좋아하고, 상처를 크게 만들기를 좋아하니 정면에서 양손으로 참격을 사용할 확률이 칠 할.”
부우웅―!
아니나 다를까, 잔살겸의 기형 낫이 비스듬하게 내려치는 참격을 날렸다. 섭우생은 마치 미리 예상했다는 듯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해 냈다.
“당신은 이미 파악되었습니다.”
후우웅― 쩌정! 쩌저정!
섭우생은 철섭선을 접은 채 앞으로 연속하여 내찔렀다. 잔살겸은 기형 낫을 이리저리 움직여 철섭선을 쳐 냈으나 철섭선은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절묘한 지점을 찔러 와서 반격을 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놈……!”
잔살겸은 당황했다.
섭우생의 행동이 마치 그의 습관이나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했던 것이다.
움직이는 발놀림이나 뿜어지는 기세를 보면 무공의 수위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분명히 가진바 능력에선 섭우생이 그와 별 차이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싸움에선 일방적으로 말려드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였다.
뛰어난 두뇌와 안목으로 싸우는 것.
그것이 귀군사라 불리는 섭우생의 싸움 방식이었다.
쉭―!
그때, 섭우생은 묵묵히 철섭선을 휘두르다가 욕심을 부리려는 듯 크게 팔을 휘저어 잔살겸의 어깨를 노려 왔다.
잔살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섭우생의 동작이 평소보다 컸다.
잔살겸의 눈엔 살을 주고 뼈를 깎는 방식. 즉,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심산으로 공격하면 섭우생의 상체를 갈라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카하앗―!”
잔살겸은 한 번 결심한 것을 망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쉬이이잉―!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채 온몸의 힘을 실어 기형 낫을 내려찍었다. 어깨를 노려오는 철섭선은 무시했다. 잔살겸의 낫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그 소리만으로도 섬뜩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섭우생이 그 투로에 살짝이라도 걸린다면 곧바로 몸이 반 토막이 났을 터.
후웅―
“……!”
하지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낫의 투로 앞에 섭우생은 없었다.
잔살겸의 필살의 각오로 기형 낫을 휘둘렀건만, 섭우생은 또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거두고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해 낸 것이다.
“무슨……!”
잔살겸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일격은 잔살겸이 일격필살의 심정으로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부은 공격이었다. 섭우생이 미리 예상했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섭우생의 무공 수준으로는 피해 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타핫!”
잔살겸이 큰 기술을 사용한 여파로 굳어 있는 사이, 처음으로 섭우생이 기합성을 내질렀다.
후우웅―! 촤아악―!
“……!”
필살나선선풍(必殺螺線煽風).
앞서 중산마웅을 쓰러뜨렸던 섭우생의 비전 절초가 펼쳐지며, 잔살겸의 온몸에서 뱀이 기어간 듯한 상처가 피를 뿜어냈다.
양팔, 양다리.
사지육신에서 시작해 치명적인 상체의 요혈들을 가르며 지나간 상처.
잔살겸은 부릅뜬 눈으로 섭우생을 노려보았다.
섭우생은…….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은 이미 파악되었습니다.”
“어…… 떻게…….”
“뛰어난 두뇌는 타고난 힘을 능가합니다. 그게 제 신념입니다.”
“…….”
잔살겸은 그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한 채 피거품을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착!
섭우생은 철섭선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상념에 잠겼다.
‘뛰어난 두뇌는 타고난 힘을 능가한다…… 하핫, 대형과 둘째 형님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두 분은 뛰어난 두뇌도 함께 가진 것 같기도 하고.’
장기린과 부운화는 남들이 보기엔 천재라고 생각되는 섭우생조차 가끔 시기심을 느낄 만큼 뛰어난 인재들이다.
그래서 가끔 그의 싸움 방식인 ‘뇌전법(腦戰法)’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었다.
“하핫, 뭐, 두 분이라면 예외라고 해도 되겠지.”
섭우생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전황을 살펴보았다. 잔살겸이 섭우생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적룡기마대원들은 어느새 하나로 힘을 합쳐 흑도의 무인들을 거의 다 격파한 상태였다.
함산거마가 꽤나 오랜 시간 버텼으나 이원, 이사 형제를 상대로 결국 가슴이 베이고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적룡기마대에 희생자는…… 없었다.
섭우생은 약속한 대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흑도 무인들 오백여 명을 전멸시킨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섭우생은 담담하게 말하며 다시 자신의 말인 홍오에 올라탔다.
“그럼, 정문으로 한 번 가 볼까요.”
히히힝―
섭우생의 뒤를 따라 적룡기마대원들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모두가 떠나간 후문엔 대답할 사람이 없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