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七章 ― 상원수한(上元水旱)
“뭐? 몸을 사려? 그게 무슨 소리냐?”
삼호방의 둘째 아들 강산호는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그게…… 지난 이틀간 그놈들이 강서성에 있는 흑도 문파들을 싹 몰살시킨 모양입니다. 완전히 처참하게 당한지라, 흑도의 무인들이 다들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지룡파, 혈종파, 흑수파, 대붕파, 거기에 갈룡파까지 멸문당했다.
그것도 단순히 싸움에서 이긴 정도가 아니라, 생존자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전멸시켰다고 했다.
그러니 흑도 무인들이 간이 떨려서 앞으로 나설 수가 있겠는가.
다른 곳은 몰라도 지룡파와 갈룡파라면 강서성을 이 등분하다시피 하고 있던 제법 큰 흑도 문파였다.
그런 곳이 순식간에 멸문당했다면 상대는 구대문파 급의 무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소심한 시러배 자식들이!”
쾅!
강산호가 돌덩이 같은 주먹을 내려치자 자단목 다탁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흑도에서 좀 논다는 것들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싸워 보기도 전에 꽁무니를 뺐다, 이거야? 그 새끼들은 자존심도 없어!”
‘당연히 꽁무니를 빼지. 당신 같으면 죽을 게 빤한데 나서겠어?’
삼호방의 강서성 지부장인 공지탁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객잔에서 강산호를 만났을 때부터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흑도의 무인들 중에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거의 없다.
이번에 흑도 무인들이 몰려온 것도 잘만 하면 강호관직론을 통해 큰 이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 강산호라는 자는 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뻑하면 의리 또는 자존심을 찾는데, 솔직히 흑도 무인들 중에 누가 의리나 자존심을 따라 목숨을 걸겠는가.
‘삼호방도 다됐군.’
강산호라는 자가 세를 끌어모은다는 것은 방주와 큰 공자에게 뭔가 신변상의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 두 사람이 멀쩡했다면 자질이 부족한 둘째를 통해 세력을 모으는 것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리라.
공지탁은 자신도 빨리 살길을 마련해 도망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나 모인 거지?”
“본래 삼호방에 적을 둔 정예 무인 이백 정도입니다. 장호당은…… 큰 공자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절대로 명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식객으로 모였던 흑도 무인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오십 명 정도 남았습니다.”
“뭐? 오십?!”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오백이 넘는 인원이 있었고, 그 뒤로도 사람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는데 이젠 고작 오십이라니, 강산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삼호방이 패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게다가 방주님께서…… 크흠, 보이지 않으시니 여러 가지 억측이 많아서 사람들이 몸을 사리는 듯합니다.”
공지탁은 말을 가려서 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아버님은…… 건강하시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실 뿐이야.”
“예, 그러시겠죠.”
‘거짓말하고 있네. 분명히 잘못됐어. 나도 빨리 가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큰일이군.’
공지탁은 나가는 문을 흘깃거리며 쳐다봤다.
“그래서, 다 모아 봐야 이백오십이다, 이거야?”
“예, 일단은 그럴 것 같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장 집결시켜. 곧바로 출격한다.”
“……예에?!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강서성주의 저택이지.”
공지탁은 잠시 ‘이거, 미친놈 아니야?’ 하는 눈빛으로 강산호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눈빛을 감췄다.
“저기…… 둘째 공자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곳은 바로 이틀 전에 일천 명의 흑도 무인들이 쳐들어갔다가 실패한 곳으로…….”
“입 닥쳐라. 난 바보가 아니다.”
강산호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공지탁은 움찔 몸을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네놈이 계속 내 옆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가 무리한 싸움을 하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 마치 병신을 보는 듯한 눈빛은 집어치우란 말이다. 자꾸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면 눈알을 파 버리고 싶으니까.”
“힉……!”
그랬다. 강장호가 평했듯, 강산호는 결코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자존심이 세고, 고집불통일 뿐이다.
공지탁이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도망칠 궁리만 하는 것도, 주변의 사람들이 지금 그의 출격을 미친짓으로 볼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이다!’
언제 강장호가 밑으로 내려올지 모른다. 아버지 강추산의 심각한 상세가 호전되려면 한참이나 더 시간이 걸릴 테지만, 솔직히 강산호는 강장호가 조만간 내려와서 마주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워낙 괴물 같은 인간이라 어떤 짓을 해낼지 예측할 수가 없다.’
강산호는 벌떡 일어섰다.
“잘 들어라. 이제 내 시야 밖으로 나가면 너는 죽는다. 내 명을 곧바로 수행하지 않아도 죽는다. 알아듣겠나?”
“두, 둘째 공자님!”
“당장 남은 병력을 모두 집결시켜라. 그때까지 항상 내가 동행한다.”
“예, 옛!”
공지탁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봤다.
그 말을 하는 강산호가 주먹에 청람수를 옅게 두르고 있는 것을.
만약 대답이 늦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곧장 청람수로 자신의 가슴을 깨부쉈으리라.
‘강씨 집안…… 정말 무서운 일족이다.’
강장호보다 머리가 조금 안 좋다고 해서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을 치를 뻔했다. 공지탁이 벌벌 떨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빠져나가고 나자 강산호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일각 후, 강산호는 마당에 모인 이백오십 명의 병력을 데리고 출격했다.
모두가 빠져나간 비밀 연무장.
가슴이 부서진 공지탁의 시신만이 홀로 오롯이 남아 있었다.
☆ ☆ ☆
강산호는 강서성주의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그를 주시하는 집요한 시선들을 느꼈다. 그중 몇몇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다른 자들은 그가 아무리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숨어 있었다.
강산호의 수준으로도 찾을 수 없는 자라면 은신술이 경지에 오른 자일 것이다.
강산호는 처음엔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엔 편안한 자세로 그저 묵묵히 걸음만을 옮겼다.
사흘 만에 다시 찾은 강서성주의 저택은 많이 황량해져 있었다.
사람이 연신 지나다니던 저택 인근의 대로엔 사람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치운다고 치웠지만 바닥을 흥건히 적셨던 핏자국은 검은색 무늬로 남아 깊은 얼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강산호는 만났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정문에서 조용히 서 있는, 압도적인 한 사내를.
“강산호가 왔군. 아버지와 형은 어디에 있나?”
뭉개진 귀, 야성적으로 묶어 둔 머리.
칼날이 붙어 있지 않은 창.
바로 장기린이었다.
삼호방주 강추산을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린 희대의 천재.
무쌍귀라 불리는 장기린 본인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꿀꺽.”
강산호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무인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무쌍귀.
최근에 흑도를 위진시키고 있는 이름이었다.
특히 최근 이틀간 강서성에서 연이어 벌어진 흑도 문파의 몰살은 정보가 빠른 자들을 경악시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없다.”
“어째서 그렇지?”
“말이 많군. 싸울 건가, 말 건가?”
강산호는 말을 하면서 주변에 있는 삼호방의 정예 무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혼자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한없이 강하기만 했던 강추산조차도 일대일로 이기지 못한 자를 자신이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장기린만 따로 떨어뜨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장기린이 스스로 홀로 떨어져 나와 준 것이다.
스스슥―!
채챙! 챙!
확실히 삼호방주가 직접 이끌고 다니던 정예 무인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이백여 명이 전부 움직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숨 한 번 들이켤 정도가 전부였다. 각자 무기를 빼 드는 것도, 그 무기로 적을 겨누며 진형을 잡는 것도 너무나 능숙했다.
‘과연, 산호당이랑은 전혀 다르다.’
산호당과 인호당의 무사들은 많이 수련을 시켰음에도 아직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어쩌면……!’
이백 대 일이다.
이번에 저자를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 아버지가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조차 몰랐다는 것인가?”
그때, 장기린의 목소리가 그런 강산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너의 아버지가 이 정도의 포위진을 꿰뚫는 데는 반 각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떨 것 같나?”
“……!!”
강산호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그게 무슨! 거짓말하지 마라! 정예 무인 이백이다!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도…….”
푸화악―!
“……!!”
일격.
단 일격이었을 뿐인데, 포위망의 일각이 허물어졌다.
장기린은 지금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추진력은 없지만, 대신 안정적이며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린은 그대로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진했다.
관(貫)의 일격이 다섯 명을 꿰뚫고, 그대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빙글 회전하는 횡방향의 참격에 세 명의 육신이 통째로 부서져서 날아가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잡자 천수여래가 지상에 하강한 것처럼 창이 수십 개의 잔영으로 갈라지며 주변의 무인들을 내찔렀다.
푸푸푸푹!
퍼어억!!
“으아악……!”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창끝에 맺힌 기운은 마치 폭약처럼 사람의 육신을 부숴 버리고 있었다.
장기린이 이백이나 되는 정예 무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강산호의 앞으로 다가오는 데는…… 반 각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정도면 시간이 좀 남은 듯한데.”
“……크윽!!”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장기린의 눈빛은 차갑고 냉정했다.
강산호는 크게 분노했다.
장기린의 그 눈빛,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차가운 기세!
그것이 강장호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크아아앗―!”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강산호는 청람수와 파갑수를 연달아 펼쳤다.
푸른 청람빛과 붉은색의 강기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작상보의 효용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그를 순속의 세계로 이끌었다.
쩌엉―!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장기린이 한 손으로 가볍게 휘돌린 창에 막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절정고수가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다 해도, 애초에 급이 다르다면 상대가 안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단 일 합이지만, 이미 강산호의 능력에 대한 파악은 끝났다.
장기린은 무인창을 허공에서 크게 휘저어 아래로 내려치고 있었다.
살아남은 나머지 정예 무인들이 달려들고 있지만, 그들로서는 강산호가 죽기 전에는 이곳에 도착하지도 못할 터.
마음 놓고 사용한 기술이다.
우지직!
무인창의 강력한 파괴력이 강산호의 청람수를 박살 내고 팔목을 부러뜨렸다.
강산호가 비명을 지르고 싶은 듯 입을 쩍 벌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우웅―
신속(神速)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흑백으로 물든, 시간조차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안에서 강산호는 천천히 몸을 비틀고 있었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팔목을 부러뜨린 장기린의 창이 이번엔 강산호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앗―!
기름으로 가득 채운 화로에 불을 붙이듯, 등 뒤에서 시뻘건 열기가 치솟았다.
“……!”
작상보.
그것도 극성으로 펼쳐진 신속의 세계에서의 작상보였다.
장기린은 순간적으로 강추산이 살아 돌아왔나 싶었으나, 정작 눈앞에 드러난 적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바로 강장호였다.
장기린과 또래이며 항상 감정이 없는 것처럼 냉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가 청람수를 전개해 장기린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쒜에에엑―!
약점이라면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상황. 장기린은 현재 강산호를 향해 전력을 다한 마지막 일격을 전개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을 선점당한데다 선공까지 당한 것이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신속의 세계에서 장기린이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강장호는 그러한 무게감 속에서 얼마나 빨리 기습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둘의 싸움이었다.
쩌어엉!!
장기린은 강산호로부터 손을 거둬 겨우 강장호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장호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발끝을 쭉 뻗는 파미각으로 정강이 부분을 노리고, 곧바로 다시 한 번 작상보를 펼쳐 장기린의 목덜미를 노려 왔다.
이제 막 초절정 경지의 초입에 올랐으면서도 신속의 세계에서 보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까아앙!
다시금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장호는 분투했으나 금방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신속의 세계에서 두 번이나 신법을 사용한 대가였다.
사지육신에 철추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몸이 휘청거리고, 장기린의 움직임을 쫓으려는 눈동자는 항상 반 박자 정도 느리게 그를 쫓아왔다.
‘끝이군.’
쉬이익―!
장기린의 무인창이 강장호의 가슴을 노리고 쏘아졌다.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도.
싸움은 그걸로 끝이 나는 듯했으나 강장호는 놀랍게도 왼팔을 스스로 무인창에 갖다 대는 것으로 그 공격을 막아 냈다.
푸화학―!
하지만 스스로 갖다 댄 팔이 날아가는 것만큼은 강장호도 어쩔 수 없었다. 무인창에 실린 강력한 회전력은 철판조차 뚫어 버릴 정도. 당연히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지며 강장호의 왼팔은 어깨죽지까지 날아가고 말았다.
“…….”
그런 상황임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강장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큰형……?!”
반면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산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잔뜩 찌푸린 눈으로 강장호를 응시했다.
초신속의 세계에서의 싸움은 그야말로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강장호가 장기린의 등을 노리고, 장기린이 그에 반응해 몇 번을 겨룬 뒤 왼팔을 날리는 순간까지.
강산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게 끝나 버린 것처럼 보였다.
“멍청한 녀석…….”
강장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강산호에게 말했다.
물론 시선은 장기린에게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내가 분명히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자살이라도 하러 온 것이냐?”
“큰형……! 어째서……!”
“나도 모른다. 그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다.”
그 말을 하는 강장호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 없는 무표정이었으나, 강산호는 그 얼굴에서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따스함을 읽었다.
‘큰형도 사람이었구나.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야!’
충격과 감동은 잠시, 극심한 자책감이 그를 잠식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삼호방이 멸문의 위기에 처한데다가 큰형이 한 팔을 잃다니……!’
강산호의 눈빛이 끊임없이 떨렸다. 그는 도리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나를 구했소! 그냥 도망가서 재기를 노려야지!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말했잖나.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젠장, 빌어먹을……!”
강산호는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발을 쿵쿵! 굴렀다.
“아버님은!”
“…….”
“아버님은 어떻게 되었소?!”
“방금 전에 돌아가셨다.”
“젠자아앙……!”
심각한 중상을 입은 강추산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강장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듣더니 껄껄 웃으며 스스로 혈맥을 끊어 버렸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그래도 산호를 미워하지 마라’라니.
강장호로서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썅!”
강산호는 미친 것처럼 바닥에 머리를 쾅쾅! 들이받더니,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채로 장기린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방어는 도외시한 채였다.
용감을 넘어 무모한 동작이었다.
“날 죽여라! 무쌍귀! 그리고 큰형은 보내 다오!”
“강산호!”
“큰형은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다. 만약 내 말을 무시한다면 내 원령이 되어서라도 평생 따라다니며 네놈을 저주해 주마!”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죽이라는 식으라 가슴을 내미는데, 씹어뱉 듯이 말하는 강산호는 제법 기개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형제의 우애가 감동적이다?
큰형만큼은 살리려는 희생정신이 마음을 움직였다?
다 개소리다.
장기린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 둘이 정상적인 가정의 평범한 형제였다면 아마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동생도 건드리지 않고 치료까지 해 준 뒤 돌아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이들만큼은 살려둘 수 없다.
삼호방의 후계자로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지시했으며, 그 뒤로도 계속 악행을 저지를 계획으로 가득한 놈들이었단 말이다.
이미 장기린은 하오문과 뇌안각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다 알아본 뒤였다.
파륵삼호의 막내인 강인호는 이미 밝혀졌듯 임신한 어미를 발로 차서 죽일 만큼 잔혹한 놈이고, 강산호는 밥을 먹다가도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죽이는 것이 취미인 미친놈이다.
그리고 맏이인 강장호는,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지육신을 비틀고 머리를 박살 내 버리는 냉혈한이다.
이들을 살려 줘야겠는가?
겨우 자기들끼리 우애 놀이를 좀 한다고 해서 겉모습에 속아 이들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가?
“웃기지 마라.”
장기린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둘 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당연한 것 아닌가.”
“이노옴……!”
“죽을 짓을 했다면 죽어야지. 사람을 잘못 봤군. 나는 그런 빤한 경극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다.”
장기린이 무인창을 휘두르자 황급히 작상보를 펼친 강장호가 청람수로 막아섰다.
쩌엉!
“큭……!”
막아 낸 시점은 좋았지만 왼팔을 잘린 뒤 불완전한 몸으로 펼친 무공이었다.
강장호는 가차없이 뒤로 밀려났고, 장기린의 강력한 공격은 강장호의 방어를 밀어낸 채 강산호의 어깨를 후려쳤다.
빠각!
“크악……!”
강산호가 어떻게든 장기린의 다리라도 붙잡아 보고자 몸을 날렸다.
장기린은 허공에서 무인창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그러자 휙― 하니 쏘아지는 창끝에서 밝은 빛이 빛났다.
그리고…….
퍼억!!
강산호의 머리가 잘 익은 꽈리처럼 폭발하여 터져 나갔다.
“산호야!!”
강장호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두 눈에서 극렬한 분노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이제 그의 가족은 모두 죽었다.
강산호가 죽음으로써 집안 식구들은 자신만 빼놓고 모두 죽은 셈이다.
“큭……!”
강장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삼호방의 무인들 중 아무도 생존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시선을 장기린에게로 돌렸다.
어느새 나온 것일까.
적룡기마대원들이 잔당들을 처리하고는 두 사람의 대치를 빙 둘러 지켜보고 있었다.
“삼호방주가 죽었다고?”
“그렇다.”
강장호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너는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왔지?”
“따로 갈 곳이 없었다.”
“지하로 숨어들어 세를 모아 삼호방을 재기시키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장기린은 강서성에서 흑도를 모두 멸살시켰으나, 흑도무림의 특성상 한 번 딴 지역으로 건너가 작정하고 숨어서 세를 키우면 그걸 잡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기린은 솔직히 그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섭우생이 가장 먼저 한 충고가 그거였다.
미련을 버리라고.
강장호처럼 머리가 좋은 자는 금방 해법이 무엇인지를 알 테니, 찾아내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저 순리대로 풀라고 하였다.
그런데 강장호와 강산호는 굳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죽게 될 것을 알면서, 마치 목숨을 버릴 작정을 한 것처럼 장기린을 찾아왔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강장호는 더 이상 삶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삼호방은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것에 얽매여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가?”
“그래. 어쩌면 나는…… 이십 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지.”
이십 년 전.
장기린은 알지 못했으나, 강장호, 강산호, 강인호, 삼 형제가 맹견과 한방에 가둬져 맏이인 강장호가 살기 위해 맹견을 때려죽였던 그 순간이다.
그때 이후 강장호는 생에 대한 집념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을 체험하고, ‘살해’라는 개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열심히 살아 봤자 무엇 하는가. 어차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헛것이 되어 버릴 텐데.
강장호는 이미 그 시절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감정이나 욕망에 치우치지 않고 지극히 이성적으로만 살아왔다. 외울 게 있다면 외웠고, 배울 게 있다면 배웠다. 써먹을 게 있다면 배우거나 외운 것들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하지만 진정한 ‘나’는 그 속에 없었다.
그는 그저 주변의 환경이 원하는 ‘인물상’을 연기했을 뿐이다.
답답했다.
이런 삶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가족이라는 인연이 모두 사라져버렸을 때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죽을 수 있다.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강장호에게 있어서 그건 하나의 해방이었다.
지긋지긋하고 의미도 없는 삶을 끝낼 수 있는 면죄부였다.
그가 강산호를 구한 것도, 딱히 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다.
잘못된 것일까?
만약 강장호가 사람으로서 잘못되었다면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강장호를 이렇게 만든 아버지, 강추산?
아니면 이십 년 전의 그날, 그를 죽이지 못했던 어설픈 맹견?
“너는…… 만적과 정반대의 존재로군.”
장기린은 반야혼의 정체성을 한눈에 알아봤듯, 텅 비어 있는 강장호의 내면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만적이라면……?”
강장호는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들은 적이 있다. 몇 달 전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며 북경의 황실에까지 쳐들어갔던 반역 무리의 장수였던 것 같은데?”
“맞다. 그 녀석이야.”
“그자와 내가 반대라고? 그걸 어떻게 알지?”
“상원수한(上元水旱)이라는 말이 있다.”
“상원수한…… 달을 보고 그 해의 강우량을 안다는 그것 말인가?”
“그래.”
장기린도 섭우생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해의 비가 얼마나 내릴지는 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인생은 어린 시절을 보면 그 최후까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사람의 인생은 어린 시절에 이미 다 완성이 된다고 하더군.”
“…….”
“너는 정반대다. 반야혼은 처음에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다. 하지만 자기 내면의 무언가를 꺼내 텅 빈 것을 채워 넣었고, 결국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너무 충실해서 터지기 직전의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버렸다.”
강장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채워 넣었다? 자기 내면을 꺼내서?”
“그래.”
장기린은 잠시 강장호가 생각할 틈을 준 뒤 말을 이었다.
“반면에 너는 텅 비어 버린 것을 밖에서 빌려 와서 채워 넣었다. 빌린 것을 돌려줄 즈음이 되면 다른 곳에서 또 빌려 와서 채워 넣고, 그걸로 부족하면 또 다른 것을 빌려 와서 채워 넣었다.”
마치 수렁에 빠진 것처럼 무한한 반복이다.
자신만의 진실된 가치를 찾지 못하고, 결국 빌려 온 것들로만 무언가를 만들면 그건 아무리 대단해 보이더라도 결국 나의 것이 아니다.
“빌린 것은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그게 세상의 진리야.”
“……!”
장기린의 말은 강장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너는 지금 최후의 순간, 절망의 끝에 서 있다. 빌린 것은 다 갚았고 세상의 모든 연은 끊어진 지금, 너에겐 무엇이 남아 있지?”
강장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의식이 그의 내면으로 침잠되었다.
일 년 전, 이 년 전, 삼 년 전…….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침내 그에게 거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던 이십 년 전 그날에 도착했다.
크르르릉…….
맹견이 살기를 뿜으며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동생 둘은 당황하며 옆으로 기우뚱 넘어져 버렸다. 특히 둘째인 산호는 입을 뻐끔거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던 것 같다. 서 있는 것은 오직 자신, 강장호뿐이다.
그는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에 앞서 일단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옆에 있는 것을 손으로 더듬어 들어 올렸다.
그게 철불(鐵佛)이다.
그사이 맹견은 목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고, 그는 왼손을 뻗어 목 대신 물리게 만들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졌지만, 그 당시엔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들린 철불로 몇 번이나 내려쳤다.
퍽! 퍼억! 퍽!!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냐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내려치자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달되던 것이 기억난다.
투툭…….
얼마 동안 그랬을까.
어느 순간부터 왼손을 물고 있던 맹견의 입에서 힘이 빠지더니 팔목에 박혀 있던 송곳니가 밖으로 툭, 하고 빠져나갔다.
뭉개져 버린 머리에서 색이 탁해진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었다.
맹견은 죽었다.
일곱 살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강장호는 자신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였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잠자리의 날개를 찢는다거나, 개구리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철불이라는 무기를 휘둘러 사투 끝에 생명체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그 기분을, 그 감각을 대체 세상의 다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톡, 톡, 톡…….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강산호와 강인호는 맹견이 죽은 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개에 관심을 보였다.
애초에 죽음이 뭔지, 시체가 뭔지에 대한 개념도 불분명한 나이였다.
아이들은 금세 죽음에 적응했고, 그저 내면의 뭔가가 무뎌진 채 죽은 개의 시체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인호는 꼬리를 잡아당겼다.
산호는 여전히 푹신한 개의 배를 깔고 누워 졸리는 지 눈을 끔뻑거렸다.
반면에 강장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산호와 인호가 놀자고 잡아당겼는데도 가만히 서 있었다. 동생들이 지겨워서 잠이 들 때까지 어린 강장호는 자신이 죽인 시신을 보고, 또 보고, 나중에 하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설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없어.”
현재의 강장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어. 내 안은 텅 비어 있다.”
장기린은 별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강장호는 손가락을 꼽았다.
“어떤 목표도 없고.”
“…….”
“삶에 대한 애착도 없고.”
조금이지만 입꼬리를 올려 웃는 강장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그렇다고 대단한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아무것도 없어. 나는 무(無)다.”
장기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과 거의 흡사한 삶을 살아 온 반야혼과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물며 정반대의 삶이라면, 분명 그 내면 깊숙한 곳에 장기린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
강장호는 그 한 가지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럼…….”
장기린은 무인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강장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무(無).”
장기린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교차되는 웃음 사이로 밝은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퍽!
둔중하며 명쾌한 소리.
털썩.
그리고, 그 사내는 진정으로 무(無)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