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01화 (82/686)

第九十八章 ― 구은보답(舊恩報答)

“뭐? 삼호방이 무너졌다고?!”

최근 객잔에 무림인이 모이기만 하면 나오는 화제가 있다. 희대의 거마(巨魔)이자 흑도의 거물이었던 삼호방주 강추산이 죽고, 그 아들들인 파륵삼호가 몰살을 당해 삼호방이 아예 와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에 무림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삼호방이 어떤 곳이던가.

그동안 구파일방이 그렇게나 토벌을 하려고 했지만 뛰어난 수단을 사용해 번번이 실패하게 만들고, 강남 지방의 이권이 집결되는 알짜배기 땅에서 흑도제일문파로서 무려 십 년 이상이나 군림한 거파 중의 거파였다.

그런데 그런 곳이 하루아침에, 그것도 이름도 모르는 집단에게 당해서 떼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쳇, 말도 안 되지.”

“삼호방이 어떤 문파인데 뜨내기들한테 당해? 헛소문이야, 헛소문.”

그들은 모두 무림에 하루에 뜨고 하루에 지는 뜬소문이 많듯이 이번 일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서성이 완전히 평정되었다던데?

―삼호방뿐만이 아니야! 지룡파랑 갈룡파에…… 혈종파에 흑수파에 대붕파에…… 아무튼 흑도 문파는 아예 씨가 말랐다더라!

―이제 강서성에서 흑도 무인들은 발도 못 붙이게 되었다더군. 누군지 모르지만 큰일을 해낸 모양이야!

하지만 그러한 소문이 연이어 들려오며 오히려 더욱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삼호방이 정말로 무너졌다면?

강호관직론의 기치를 내건 뒤, 승승장구하던 북천맹의 일각이 처음으로 무너진 것이라면?

사람들은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삼호방을 쓰러뜨린 게 누군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삼호방의 생존자에게 들었어! 무쌍귀와 수호귀를 말하던데?

―숫자는 백오십 정도. 무지막지하게 잘 빠진 명마를 타고 다니는 기마병이라더라!

―집단 전술이 기가 막히대!

―간부들의 무공 실력이 대단하다더군. 특히 무쌍귀와 수호귀는 무림십대고수 급 이상인 모양이야.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절반 정도는 아무리 그래도 무림십대고수만 할까라는 생각을 했고, 나머지 절반은 삼호방주와 삼호방을 무너뜨리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극도로 관심을 가지는 사이, 소문은 증폭되고 증폭되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 이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은 귀신처럼 강한 기마병이라는 뜻으로 귀마병(鬼馬兵)이라고 불렀다.

그들 중에 가장 강한 대장은 무쌍귀.

두 번째로 강한 자는 수호귀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생생한 목격담과 그들의 정체에 대한 정보가 더욱 추가되었다.

―그들이 사실은 남궁세가의 반란을 제압했던 사람들이래!

―그럼 정도인인가? 아무튼, 원래 전쟁터에 있던 병사들이라는데…… 믿어도 되나 모르겠어. 무림강호도 아니고 전쟁터에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강할 수 있나?

―무쌍귀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아직 이립도 안 된 청년이라던데?

―무쌍귀는 삼호방주를 상처 없이 제압할 정도고, 무림십대고수를 어렵지 않게 무릎 꿇릴 수 있는 수준이라더라!

―대단한 자야! 무림오존도 그자 앞에선 긴장해야 할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청해성부터 절강, 요동까지 그 소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화를 내고 믿지 않았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사실적인 증언들이 하나둘씩 추가되니 도저히 믿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새로이 발족한 무림맹에서 대륙 곳곳에 방을 붙인 것이다.

북천맹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마음이 흔들린 무림인들이여! 각성하고 자성(自省)할 지어다! 강호관직론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공상적인 이야기는 대륙 역사상 가장 혼탁했다는 춘추(春秋)나 전국(戰國) 때도 없었으며, 무(武)로 문(文)을 다스린다는 비상식적인 사상은 훗날 나라를 큰 변고로 이끌 사이한 관념일 뿐이다.

흔들리지 말아라!

그대들이 본래 무공을 익힌 이유를 되돌아보라!

한때의 미혹(迷惑)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며, 역모로 권력을 취한 자는 역모로 그 힘을 잃는 법이다.

황실이 남경을 다시 취할 날이 머지않았다.

북(北)에서 온 자의 천명은 이미 다했다.

정도를 지키려는 무림 협사들이 북천맹을 따르던 간악한 삼호방주와 그의 무리들을 처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림 협사들이여!

맞서 싸우라!

칼로만 맞서 싸우지 말고, 정신으로 이겨 내라!

헛된 미망과 욕심을 이겨 내는 자야말로 무림맹이 자랑스러워할 진정한 무림의 협사이다.

모두 마음의 칼을 들어라.

그리고 북천맹을 타도하자!

―무림맹(武林盟).

무림맹에서 썼다는 명필과 문장의 유려함도 시선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선을 끈 부분은 오직 한 군데였다.

삼호방주가 죽고, 삼호방이 멸문당했다는 것.

이 방 하나가 바로 그동안 무림에서 떠돌던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을 밝혀 주는 증거물이 되지 않겠는가.

소문은 확신을 가졌고, 더더욱 빠른 속도로 만인에게 퍼져 나갔다. 이젠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흑도의 무뢰배들에게 고통을 받았던 평범한 민초들도 그 이야기를 분풀이 하듯이 떠들었다.

사흘 뒤, 명 제국에는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 ☆

북경의 황성.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태사의 위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백택이 오늘 그가 전해야 할 이야기들을 하나씩 털어놓고 있었다.

현재 명 제국의 상황과 각 관료들의 동향, 그리고 앞으로의 복구 계획에 대한 초안을 설명한 뒤 백택은 삼호방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폐하, 삼호방이 무너졌다고 하옵니다.”

“삼호방이? 누구에게?”

“이름은 불명. 다만 그들은 현재 무쌍귀와 수호귀, 귀마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숫자는 일백오십에 달하고, 놀랄 만큼 정교한 집단 전술과 강력한 무력으로 삼호방주 강추산과 삼호방을 전멸시켰다고 하옵니다.”

“뭣……!”

잠시 황제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하하하핫! 드디어! 드디어 움직였구나!”

호탕한 대소가 대전을 떨쳐 울렸다.

금색의 곤룡포가 소매를 펄럭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인지상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백택, 장난이 과하다. 어찌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하하, 이제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거늘, 잘되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황제는 힘이 가득한 용안을 번뜩이며 백택을 바라보았다.

“백택, 문무백관을 집결시키고, 반(半)을 부르도록.”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백택이 물러나고 난 뒤, 대전 안엔 다시 한 번 황제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하남성 등봉현.

소림사의 지객당에 모인 무림의 중진들은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일희일비하였다.

무림맹이야말로 현 무림의 중심지였다.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천맹과의 소식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무림맹인 것이다.

특히나 그중 최근에 압도적으로 화제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삼호방을 무너뜨렸다는 무쌍귀과 귀마병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객주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소림사의 지객당에서도 귀빈들만 들어갈 수 있는 안쪽 방에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던 또 하나의 젊은 목소리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형니임―! 해내셨습니다! 으하핫! 저는 이럴 줄 알았다구요!”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는 듯했다.

근처에서 차를 따르던 사미승들이 깜짝 놀라 차를 쏟고, 담당 승려에게 혼이 나는 등의 소동이 끊이지를 않았다.

결국 방 안에 함께 있던 남궁무원에게 주의를 들은 뒤에야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형님께서 사고 한 번 크게 치실 줄 알았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강 형. 드디어 세상이 객주님의 진가를 알아보겠군요.”

“으하하! 바로 그거야! 세상이 이제 형님의 진가를 알아볼 거라고!”

남궁휴는 아직도 어깨를 들썩거리는 운찬과 함께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소문으로 장기린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이 또한 새로운 느낌이 되어 두 사람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고 있었다.

“뭐냐?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두 사람이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갑자기 지객당의 문이 불쑥 열리며 범상치 않은 인상의 중년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겉으로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나이가 일흔이 넘은 노고수였다.

갈색의 무명 바지, 가봉도 하지 않은 채 통으로 걸쳐 입은 호랑이 가죽에선 야성미가 물씬 풍기고, 등 뒤에 돌려 찬 비정상적일 만큼 커다란 대도는 보는 사람에게 왠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다.

맹호도 방극.

무림십대고수 중 실전 경험이 가장 많으며, 얼마 전에 장기린에게 패배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방 대협, 이곳에는 또 어쩐 일이십니까?”

남궁무원이 인사를 건네자 방극은 형식적이나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배분은 방극이 더 높지만, 그래도 가주인 이상 예를 표해 주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남궁가주, 오랜만이로군.”

“그렇군요. 지난번에 가문에 오셨다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크흠……!”

방극은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사실 그는 지난번에 남궁세가를 찾았을 때에 반역을 일으키는 쪽인 남궁무회에게 고용되어 남궁휴를 죽이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다.

물론, 낭인으로서 한 일은 원한으로 삼지 않는 법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게 어찌 법대로만 되던가.

방극은 남궁무원에게 당당하게 굴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황하의 물은 언제나 누런 법이지요. 이미 다리 밑으로 흘러가 버린 물을 어찌 기억하겠습니까.”

“커허험! 그렇지, 그렇지. 바로 그걸세. 역시 사람들이 창천대협의 인품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드는 이유가 있었구만그래.”

남궁무원이 넌지시 지난 일은 덮어 두자는 식으로 말을 꺼내자, 방극은 곧바로 좋아하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괴팍하고 특이하지만 순수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번엔 남궁휴가 물었다.

방극이 소림사에까지 와서 이곳을 찾아올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탁이 있어서 왔다!”

“부탁…… 이요?”

“그래. 그놈을 다시 만나게 해 다오.”

“……!”

그놈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장기린.

맹호도 방극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선사한 젊은이일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왜 그러시는 겁니까? 용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남궁휴는 살짝 경계하는 눈빛으로 방극을 살폈다.

만약 그가 앞으로 장기린이 할 일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저지해야만 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커험, 좀 따라다녀 보려고.”

“따라…… 다녀요?”

“그래! 따라다니려고 그런다!”

방극은 빽하니 소리를 지르며 역정을 부렸다.

“아니,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십니까? 왜 따라다니려고 하시는데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아니, 알아야지요. 그래야 객주님께 안내를 해 드릴지, 막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끄응…….”

방극은 신음을 흘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이 어쩌다 그렇게 강해졌는지도 궁금하고, 그 무공을 싸움에선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도 직접 보고 싶다. 그런데 무작정 찾아가자니 좀 낯이 뜨거워서 말이야. 그래서 아는 얼굴 통해서 소개나 받아 따라다니자, 이거지.”

남궁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괜히 싸움 걸고, 비무하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커험, 아직은 이길 자신이 없다, 아직은.”

방극은 말해 놓고 자존심이 상하는지 ‘아직은’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였다.

“그놈이 지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그걸 방해할 생각도 없다. 난 다만, 그놈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그걸 직접 보고 싶은 게야.”

“…….”

“내 용건은 이게 다다! 그래, 데려다 줄 거냐, 말 거냐?”

방극은 숫제 빚 받으러 온 한량마냥 배 째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맹호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팍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음습하거나 남을 속이는 자는 아니다. 어찌해야 할까? 어차피 이제 객주님을 만나러 가려고 하긴 했는데…… 데려가야 할까, 아니면 막아야 할까?’

남궁휴는 고민하다가 남궁무원을 바라봤다.

“아버님.”

“다녀오거라.”

남궁무원은 두말하지 않고 승낙해 주었다.

“무림맹의 발족식에 참가도 하였으니, 가문에서 네가 할 일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오거라.”

“아버님……!”

“장기린이라는 자, 하늘이 그만한 힘을 내렸다면 분명 그에 걸맞은 쓰임새도 있을 터. 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천맹으로부터 남경을 되찾는 데 그 사람이 큰 역할을 할 것 같더구나. 너도 그 일에 한 팔을 거들어라.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영웅들이 모여야 열 수 있는 법이다.”

남궁휴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언제……?”

“말이 나온 김에 곧바로 다녀오거라. 더 지체할 필요가 있겠느냐?”

“…….”

“아니면 가기 싫은 것이냐?”

“아닙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쉬운 결정일 리가 없다.

남궁휴는 깊게 포권을 취했다.

아버지의 무뚝뚝하지만 깊은 감정이 마음속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남궁무원은 두말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운찬도 남궁무원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정중한 예를 취한 뒤, 두 사람은 몸을 돌려 지객당을 빠져나갔다.

철컥, 철컥.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그리고 그 뒤엔 거대한 대도를 철컥거리는 중년의 사내가 함께하고 있었다.

☆ ☆ ☆

남경. 서문(西門) 경계탑.

얼굴을 반쯤 가리는 삿갓을 쓴 까무잡잡한 피부의 청년이 계단을 통해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발을 내딛는 데도 불구하고 청년은 마치 나는 새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삿갓을 쓴 청년.

삼대천의 하시르가 성벽을 오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시르는 불과 다섯 걸음을 떼기도 전에 높은 성벽 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강한 바람을 묵묵히 맞고 있는 텐챠이를 만날 수 있었다.

“장군.”

텐챠이는 분명 하시르의 부름을 들었을 테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하시르는 일단 가만히 서서 기다려 보았다.

텐챠이는 반 각 정도가 지난 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하시르, 이곳에서는 강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중원의 바람은 탁한데, 신기한 일이야. 마치 초원의 바람이 떠올라.”

하시르는 오늘 따라 텐챠이가 어딘지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초원의 바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물론 그 알싸한 풀 내음과 광활한 녹평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드넓은 초원을 떠올리기엔 충분하다.”

하시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제야 알겠다. 무엇이 다른지.

오늘의 텐챠이는 어딘가 기뻐 보였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을 이룬 듯한, 속박에서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과 평온함이 엿보였던 것이다.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신기한 일이다.’

하시르는 일단 가져온 소식을 전하지 않고 기다려 보았다.

“느낄 수 있다. 내 숙적이 다가오고 있다.”

“장군……?”

“최근에 깨달았다. 어째서 그자가 평범하게 살고자 했는지. 어째서 명예로운 전사의 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서 살아가고자 했는지. 지금은 어쩐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장군……!”

하시르의 눈빛이 떨렸다.

그랬던 거다.

텐챠이가 달라 보였던 것.

단순히 기분의 변화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평소엔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아무리 집중해서 살펴봐도 평온한 바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성벽 위를 감싸는 바람과 한 몸이 되어 버린 양 텐챠이의 기세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싹!

하시르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특히나 기감이 뛰어난 영매(靈媒)다. 그렇기에 더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텐챠이가 올라 있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경지에 오른 텐챠이가 얼마나 강한 힘을 품고 있는지.

‘하늘신…… 하늘신이 강림했어. 지금의 장군은 몸속에 무신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전엔 텐챠이를 보면 승부를 결하기 힘들다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텐챠이는 그만큼 성장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남경에 자리를 잡고 맹주의 위(位)에 오른 뒤부터 뭔가 변화하는 듯하긴 했는데, 마치 번데기가 허물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듯, 이번에 갑작스레 큰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저길 보아라. 육만의 군세다. 저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텐챠이는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직사각형으로 정렬된 부대 여섯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직사각형 하나마다 일만 명.

지휘관은 파강장군 원회이며, 그 밑의 부장들과 병사들은 인근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라는 것까지 하시르는 상세히 알고 있었다.

“저들로는 우리가 지키는 남경을 되찾지 못한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

하시르는 그에 동의했다.

파강장군 원회는 병법과 용인술에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을 듣지만, 지난 북로전쟁에서 항상 보급 역할만 맡았기에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첩자들의 말로는 뛰어난 인재를 대하는 방법에 꽤나 문제가 있다는 평도 있었다.

아무리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아도 텐챠이와 삼대천이 지키는 남경이 원회에게 뚫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들을 막아 낸다 하여도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텐챠이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군,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을 막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지?”

“물론 명 나라를 무너뜨리고 황제를 끌어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은?”

“예……?”

“명 나라를 무너뜨린다. 황제를 끌어내린다. 그다음은?”

텐챠이의 질문의 의도를 잘 알 수 없었으나, 일단 하시르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그다음은…… 초원의 형제들을 불러 다시금 원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원 제국의 부활이라…… 나보고 황제가 되라는 것인가?”

“아…….”

“그럴 마음은 없다. 나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텐챠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초원 최고의 전사인 장군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 있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르지.”

“급하게 생각하실 것 없지 않습니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시르, 너는 영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알 것 아닌가. 나에게서 황제가 될 상이 보이는가?”

텐챠이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하시르를 마주 보았다.

슥―

삿갓을 들어 올린 하시르는 텐챠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하시르는 탄식을 내뱉었다.

‘변했다.’

본래 상(相)이라는 것은 시기에 따라 변하는 법. 사람이란 본래 때에 따라 기질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인만큼 성품이나 마음의 변화로 인상이 바뀌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텐챠이의 상이 변해 있었다.

예전엔 패황의 상도 언뜻언뜻 보였는데, 지금은 하늘신의 강림을 받은 막강한 무력만이 보일 뿐, 패황의 자질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습니다.”

하시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이 영혼을 더럽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럴 테지.”

텐챠이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전에는 장군이 패황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상이라는 것은 본래 시기에 따라 바뀌는 법이니 좀 더 기다려 보며 찬찬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시르, 너는 내가 황제가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하시르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지?”

“각자 개성이 강한 초원의 전사들을 이끌 재목은 장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겠지.”

“예?”

“지금이야 그렇지만, 조만간 새로운 자가 나타날 것이다. 어느 시대고 그러지 않았던가. 아무리 강한 영웅도 세월이 흐르면 옆으로 밀려나고 새로운 영웅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다음 대를 생각하기에 장군은 아직 젊습니다.”

“내 말은, 굳이 나에게만 목을 멜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

“하시르.”

“예, 장군.”

“혹시 정치가 하고 싶으냐?”

툭 던지듯 내뱉은 텐챠이의 말에 하시르는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정치.

사람의 위에 올라서서 그들을 더욱 이롭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을 다스리고, 그걸로 뭔가를 건설 해낸다.

처음엔 분명 흥미로울 테지만, 좀 더 뒤를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엔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는 초원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을 뿐이다.

“아닙니다. 그쪽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황제가 되라 하는가. 내가 황제가 되면 너희는 자연히 국가의 대신이 될 텐데.”

“으음…….”

“그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 사실,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니 그다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의외군. 하시르, 너만큼은 생각해 두었을 줄 알았는데.”

“…….”

“거대한 전쟁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치와 닿아 있다. 전쟁을 하고 땅을 빼앗는 일엔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너는 정치가 하고 싶지 않은가?”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하시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싸움이 좋고, 전쟁이 좋을 뿐입니다.”

“그런가…….”

“예전 위대한 대제께선 연이은 전쟁과 이동만으로도 대제국을 건설하셨습니다. 꼭 정착하여 지배하려 하지 않아도, 그 뒤를 따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원 제국이었지. 정말로 이 땅을 지배하고 싶다면 싸움과 전쟁으로 그칠 게 아니라, 명 나라의 근원을 뿌리까지 뽑아내 완전히 말살시키고, 그다음엔 사람들을 대초원의 전사들로 만들어야 한다. 예전의 원 제국처럼 한인들을 차별해선 안 돼. 진정으로 한 민족으로 받아들여서 융합해야만 누천년을 이어갈 대제국이 건설되는 거다.”

“……!”

하시르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거기까지…… 생각하셨습니까?”

“해 보았지. 내가 해야 될 작업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은.”

텐챠이의 시선이 다시 육만 명의 남경 공략군에게로 향했다.

“그보다 하시르, 할 말이 있어서 올라온 것 아니던가?”

“아, 예.”

하시르는 헛기침을 하여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갑작스런 텐챠이의 변화와 황제로서의 자질에 놀라 잊고 있었지만, 사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삼호방이 당했습니다.”

“누구에게 당했지?”

텐챠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렇게 되물었다.

“적룡기마대입니다.”

그래서 하시르도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삼호방주는 누구에게 당했나?”

“붉은 악귀. 장기린에게 당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확실한가?”

“예. 구 할 이상 확신합니다.”

“큭…….”

텐챠이의 표정이 변화한다.

하늘신을 가슴속에 담아 둔 막강한 사내이지만, 그 말을 듣고서까지 동요를 참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나오지 않을 리가 없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텐챠이.

그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하시르.”

“예, 장군.”

“삼대천을 불러라. 나담이다.”

나담.

축제를 뜻하는 몽고의 말이다.

대초원에서 나담은 씨름, 경마, 궁술을 뜻한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이던가.

전쟁이다.

목숨을 건 전투이며 대제국 이래 초원의 전사들에게 내려오는 영광스런 전통의 축제다.

“예, 알겠습니다.”

하시르는 미리 그럴 거라 생각했기에 군말없이 바로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텐챠이는 항상 허리에 매달고 다니는 자신의 신응도를 손으로 툭, 쳐 보았다. 흔들거리는 묵직한 무게감이 마음의 안정을 찾아 준다.

“붉은 악귀, 드디어 왔는가.”

꽤나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가 하늘신을 받아들이고 무신의 경지에 올랐지만, 아마도 장기린 역시도 그만한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늘이 내린 숙적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니던가.

한쪽이 발전하면 다른 한쪽은 더더욱 발전한다.

일방적인 것은 없다. 세상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균형을 이룬다.

지난번에 그가 상처를 입혔다면, 이번엔 그가 상처를 입을 차례다.

반대로 지난번에 그가 패배하였다면, 이번엔 그가 승리할 차례다.

“가장 중요한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군.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겠어.”

텐챠이의 시선이 정면 성벽 아래, 공성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육만의 병력을 향했다. 육만의 병력은 귀찮은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황제라…….’

하시르는 황제를 말했다.

명 제국 내부에서 초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건설되는 대제국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그가 숙적을 넘어설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일 터.

‘만약 내가 붉은 악귀를 이긴다면, 그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지.’

텐챠이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바위처럼 굴강하고 무뚝뚝한 사내지만, 지금만큼은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담이다. 어디, 오늘의 적이 얼마나 강한지 한 번 살펴보고 올까.”

텐챠이는 삼대천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볼까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가슴속에서 들끓는 호기를 참지 못하고 곧장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삐이익―

휘파람을 불자, 멀리서 신호를 알아들은 그의 말, 창풍(蒼風)이 달려왔다.

곧바로 올라타고 신응도를 뽑아 들었다.

갑주 따윈 필요없다.

상대는 허약한 명군.

붉은 악귀나 적룡기마대도 없는 마당에 그를 상대할 자가 과연 있으련가. 아니, 상대는 고사하고 일 합이라도 받아내는 자가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것 또한 좋겠지.’

텐챠이는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어라!”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명을 내리는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하고는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큰 소음을 내며 남경의 대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명의 병사들.

텐챠이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럇!”

히히힝―!

푸른 바람이란 이름을 가진 청총의 신마가 땅을 박차고, 일찍이 대초원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 평가받던 무신이 육만의 군세를 향해 홀로 쇄도했다.

“장군!”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으하하! 축제다! 나담이다!”

그 뒤를 이어 황급히 삼대천이 뛰어갔다.

삼호방이 몰락했던 소식이 전해졌던 날 남경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이날, 홀로 돌입한 텐챠이 한 사람을 맞아, 파강장군 원회는 모든 방어진이 뚫린 채 사망할 뻔 하다가 부장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겨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모든 책략이 무효.

압도적인 무력의 힘을 보여 준 대사건이었다.

☆ ☆ ☆

“삶이란 무엇일까?”

천천히 말을 몰고 가던 중 갑작스레 옆에서 나온 질문에 부운화는 말을 타기 시작한 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중심을 잃고 낙마를 할 뻔하였다.

“……대형,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도를 아느냐고 묻는 사이한 종교의 질문 같았다.

“삶은 무엇이지? 인생, 아니, 생명이란 것은 무엇이지?”

부운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래도 장기린은 진심인 것 같았다.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장기린의 두 눈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으음…….”

부운화는 난감한 듯 신음을 흘렸으나, 이내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기린은 그의 대형이며, 부운화는 그를 대형으로 모시는 동생이다.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면, 그가 마땅히 대답해야 한다.

“글쎄요, 생명이란 대자연이 준 선물이며, 사람의 삶은 하늘이 내린 숭고한 것이라 배웠습니다.”

“배웠다고? 그건 사문인 무당에서 배웠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대형.”

장기린의 눈빛이 더더욱 깊어졌다.

“대자연의 선물이며, 하늘이 내린 숭고한 것이다라…… 그럼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생명은 숭고하고 축복받은 것인가?”

“예? 으음, 글쎄요. 도경을 깊게 공부하진 않은지라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그렇지 않나? 모든 삶이 숭고하다면 어째서 사람들 중에는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고, 호의호식하며 즐거운 삶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거지?”

“……으음.”

“정말 하늘의 뜻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장기린은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매우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질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세상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지금껏 수많은 식자(識者)들이 고민해 온 화두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절간의 승려들과 도관의 도인들이 침식을 잊고 탐구하고 있는 일생일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으음…….”

부운화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 문제만큼은 그가 답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그저 솔직하게 그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대답을 해야 했다.

“대형,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 과연 하늘의 뜻은 있는지, 또는 신은 있는 것인지…… 저는 그걸 알 만큼 학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학식이라…….”

“다만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의 인연입니다. 저희를 보십시오, 대형. 전장에서 한 번 헤어졌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았으나 지금 이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다시 전투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거창하게 하늘이나 신의 뜻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사람사의 인연.

두 눈에 비치는 것만을 생각하자고 부운화는 말하고 있었다.

“그런가…….”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운화, 네가 인근까지 찾아왔기 때문이잖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 사람의 인연이라 말하면 곤란했다.

“하하, 부정할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대형. 물론 제가 대형을 쫓아서 항주까지 갔지만…… 만약 대형이 아무런 문제 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셨다면 저는 대형을 만나지 않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랬어?”

“예. 그것으로 대형이 행복하다면 된 것이니까 말입니다.”

“음…….”

“그러니 인연이란 것이 신기한 것 아니겠습니까. 원 나라를 재건하겠다며 텐챠이와 삼대천이 난을 일으키고, 그 때문에 결국 저희 적룡기마대가 다시 모이게 되고 말입니다. 만약 장소가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대형이 항주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객잔을 차리고 조용히 은거하여 살아가려 했다면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 치만 삐끗해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사 인연이라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과연 그랬다.

하늘이나 신의 뜻 같은 것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사람사의 인연만큼은 확실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인연이란 하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과의 인연이 제각각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 거대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운화,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장기린은 그의 과거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내 어린 시절과 전장에서 보낸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랐어.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이 세상에는 오직 나 혼자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고, 철저히 고립되었으니, 모든 일을 혼자 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신? 하늘의 뜻?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런 게 있다면 내 인생이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리가 없잖아.”

부운화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장기린이 속내를 꺼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려 하고 있어. 나와 닮은꼴인 반야혼이라는 자를 만났고, 최근에 만난 강장호는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삶이 있어. 그리고 그 삶에는 다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야. 그렇다면 나는? 하늘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그런 삶을 주었던 거지?”

장기린은 부운화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텐챠이가 내 숙적이고, 그를 없애야 나에게 걸려 있는 속박이 끝난다는 것.”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대형.”

부운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급하게 할 것은 없습니다. 천천히,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아.”

“하하, 의문이 좀 풀리셨습니까?”

“하나도 안 풀렸어. 하지만 기분은 좀 나아졌다.”

장기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히히힝―!

“대형!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희는 이렇게 힘든데 잡담이나 하시고?!”

“잡담이라니. 진구, 너.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부운화가 지적하자 진구는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완전 오합지졸인 삼천 명을 훈련시키면서 데려가야 한다구요! 이거, 너무 힘들어요!”

“참아. 어차피 함께 싸울 동료들인데 너희가 직접 해야지.”

“그건 그렇지만…….”

“다른 형제들을 봐라. 추룡, 대석, 우생. 전부 다 군말없이 훈련시키고 있는데, 왜 막내가 나서는 거냐?”

“으윽…….”

부운화가 말한 대로, 다른 간부들은 제각각 자신들이 책임을 맡은 병사들을 데리고 행군을 하면서 자잘한 것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기나 해! 대형과 난 선두를 이끌어야 한다!”

“칫…….”

진구는 투덜거리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기린, 부운화, 다른 간부들과 적룡기마대 백오십.

그리고 거기에 강서성 도독부에서 데려온 삼천의 병사들이 모였다.

비록 아직 오합지졸인데다 장비도 별것 없는 초병들이지만, 그래도 숫자가 늘었다는 건 곧 힘이 커졌다는 것과 같았다.

병사들을 데려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룡기마대가 나타나자 이미 삼호방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도독부의 군장이 맨발로 뛰쳐나와 인사를 했던 것이다.

게다가 부운화가 행군사마로서의 군패를 보여 주자 태도는 또다시 급변.

삼천의 군사를 어렵지 않게 얻어 낼 수 있었다.

히히힝――!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나는 잠시 할 일이 있다.”

장기린은 항주 인근에 도착했을 때 일행을 떼어 놓고 홀로 빠져나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항주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다.

항주는 남경에서 지척.

즉, 북천맹이라 불리는 군세가 마음만 먹으면 항주까지는 곧바로 진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 최고의 유흥 도시는 여전히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었고, 그런 색향을 찾는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찾아왔다.

이런 식이라면 나라가 몇 번이나 멸망하더라도 항주의 성세는 영원히 그대로가 아닐까.

쿵, 쿵.

장기린은 항주의 번화가와 금선로를 지나, 조금 한적한 지역에 세워진 커다란 장원의 문을 두드렸다.

인근의 농지를 전부 소유하고 있는 대농주(大農主)의 장원은 크고 넓었다.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안쪽에서 쪽문이 열렸다.

얼굴만 볼 수 있도록 작게 구멍을 뚫어 놓은 쪽문이다.

“누구십니까?”

이미 해가 진 시각. 약속되어 있지 않던 손님인지라 문지기의 목소리엔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장기린이라 하오. 대인을 만나러 왔소.”

“장…….”

잠시 이름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던 문지기가 뭔가를 떠올린 듯 한순간 눈을 부릅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끼이익―

대문은 곧바로 활짝 열렸다.

조금 더 번거로운 절차를 생각했던 장기린은 놀라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문지기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극도의 공경을 표한 것이다.

“주인어른께서 목숨의 은혜를 받은 분이니 본인을 대하듯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곧바로 본채로 모시겠습니다, 대인.”

“으음, 나를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주인어른께서 생명이 위급하실 때 살아 있는 곰을 직접 잡아와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덕에 주인어른께서 구명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집안사람들 사이에서 한참이나 회자되었습니다.”

문지기는 극도의 공경을 보이며 곧바로 본채의 접객실로 장기린을 데리고 갔다.

곧이어 장기린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주변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인과 하녀들이 부산을 떨며 어떻게든 장기린에게 더 잘해 주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들의 주인어른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반 각도 지나기 전에 고급스런 찻잔이 나왔고, 입에 군침이 돌게 만드는 다과(茶菓)가 나왔다.

그리고 이 저택의 주인인 거구의 사내도 황급히 달려왔다.

“은공을 뵙습니다.”

허리를 굽히면서까지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사람은 인근 주민들의 공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거부(巨富), 왕 대인이었다.

장기린은 일어나서 마주 예를 표했다.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

“그래서는 안 되지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반갑게 웃는 얼굴이지만,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소.”

“저에게는 그 일이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왕 대인은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왕 대인은 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때 한 번 큰 일을 치를 뻔한 뒤로 몸 관리를 하기 시작한 것인지, 살도 그전보다는 상당히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저로서는 인사와 한담을 건네고 싶으나, 은공께서 여유가 없으실 테니 염치불구하고 먼저 묻겠습니다. 제가 얼마를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왕 대인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아셨소?”

“은공께선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을 생각이 없으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그것도 해가 진 뒤에 찾아오셨다는 것은 상당히 다급한 일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왕 대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나, 그걸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 좋고 은혜와 도리를 아는 대인이면서, 또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뛰어난 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세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비일비재한 삭막한 세상이거늘.

자신이 먼저 나서서 은혜를 갚으려 하는 왕 대인은 얼마나 대단한가.

“삼천 명을 데리고 스무 날을 가야 할 양식이 필요하오.”

“삼천이라…….”

왕 대인의 눈이 밝게 빛났다.

“어떤 이유로 그게 필요한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요.”

장기린은 차분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남경을 되찾으러 갈 것이오.”

<1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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