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02화 (83/686)

15권

第九十九章 ― 살수대첩(殺手大捷)

“그렇습니까?”

왕 대인, 왕분은 남경을 되찾겠다는 장기린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정말로 그게 가능하겠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쌀 삼천 석 정도가 필요하겠군요. 내드리겠습니다.”

쌀 삼천 석.

종팔품 말단 관료의 일 년 녹봉이 사백 석쯤 되는데, 그것만 해도 민초들에겐 큰돈이다. 쌀 한 석이면 한 가족이 한 달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슷한 것을 따지자면 종이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일 년에 받는 녹봉이 삼천 석 정도가 되는데, 즉 일국의 재상이 그 정도를 받는다는 뜻이니 매우 큰돈이었다.

“…….”

장기린은 왕분의 흔쾌한 반응에 일시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렸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런 거금을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고 서슴없이 주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없다.

원래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나는 법.

천하의 거부(巨富)든 평범한 농민(農民)이든 내 돈 아까운 건 똑같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것을 어려울 때 한 번 도와줬다는 이유로, 그것도 본인이 대가는 필요없다고 직접 말을 하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쉽게 내놓을 수가 있는 것일까?

“쌀은 현물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지역에 있는 저희 가문의 지부에서 그때그때 찾아가시겠습니까?”

“다른 지역에 지부가 있소?”

“은공께서 열 수레의 쌀을 마다하셨을 때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기억…… 하고 있소.”

그 당시에 왕분은 역시 은공과 자신의 인연은 쌀 열 수레의 인연보다 큰 것 같다며 이제 전장을 만들 테니 그곳에서 액수가 얼마가 되든 무제한으로 사용하라고 말했다.

‘그때는 이런 식으로 도움이 필요하게 될 줄을 몰랐지.’

장기린은 원래 그 보답이라는 것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는 그때 그 열 수레의 쌀을 가지고 전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객잔의 이름을 따서 풍운전장(風雲錢牆)인데…… 다른 곳보다 좀 더 높은 이율을 쳐주고 회수 날짜를 좀 더 넉넉하게 쳐줬더니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지부를 하나씩 늘렸더니, 최근에는 그 지부가 백 개가 되었습니다.”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장이 백 개!

쉽게 생각하자면, 즉 풍운객잔을 각 지역마다 하나씩 차려서 백 개를 채웠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굉장한 숫자이며,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뤘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성세였다.

“즉, 나에게 줄 돈으로 전장을 차려 보았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어차피 은공께 드릴 돈으로 차린 전장이니 은공의 것이나 다름없지요.”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가 않소. 어차피 처음에 고사했던 돈이며, 전장이 성세를 이룬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을 다루는 사람의 능력 덕분이오. 그러니 그 돈은 나와는 상관이 없소.”

“하나…….”

“지금의 나에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쌀 삼천 석은 감사히 받겠소.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분명히 치를 것이오.”

애초에 왕분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한 것은 과거의 별것 아닌 은혜를 이용해 먹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저 그때의 인연을 발판 삼아 만석지기인 왕분에게서 잠시 돈을 빌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따지신다면, 은공께선 저에게도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왕분은 마음이 넓고 베푸는 것을 좋아해 인덕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강단 또한 있는 사람이었다.

장기린이 불편한 심산으로 지그시 미간을 좁혔으나, 왕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곰 한 마리 잡아다 준 것뿐이었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지요. 인근의 모든 사냥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림에서 초빙한 고수들도 실패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은공은 어디선가 살아 있는 곰을 떡하니 잡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과한 대가라고 생각하오.”

“그건 은혜를 갚는 사람 쪽에서 결정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서로 이득을 안 보려고 하는 기묘한 싸움이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장기린과 왕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길 잠시, 장기린은 이 이야기가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왕 대인.”

“말씀하시지요.”

“난 그 큰돈을 고작 곰 한 마리 잡아 준 대가로 받을 수 없소. 그리고 왕 대인은 그에 대한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로 하나씩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

“즉, 나는 곰을 구해 준 대가로 나중에 필요한 걸 부탁하겠소. 그리고 지금 내가 요청한 것은 그와는 별개의 부탁이오.”

“으음……!”

“쌀 삼천 석에 대한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 아니, 혹시 부탁할 것이 있다면 지금 말을 해도 좋소. 최근 들어 힘이 없다면 곤란한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오.”

장기린이 그 이상은 절대로 용납지 않겠다는 듯 표정을 굳히자, 왕분의 표정도 미묘하게 변화했다.

“이거참, 은공께선 정말 특이하십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무언가를 내준다고 했을 때 어떻게든 더 큰 이득을 보려고 애를 쓰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어떻게든 더 가진 걸 내주려는 왕 대인도 특이하지 않소.”

“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저도 아무에게나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분은 두툼한 볼 살이 떨리도록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를 들으신 모양이군요.”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나이 든 하인이 말해 주었소.”

그 하인은 현재 왕분이 처한 상황과 그가 현재 어떤 것에 대해 근심을 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허, 그 사람 참…… 쓸데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왕 대인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았소.”

“오랫동안 가문에 있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왕분은 아무리 자신의 하인이라고 해도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 하인을 말할 때의 따뜻한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송구한 일입니다만, 어디까지 들으셨는지요?”

“왕 대인의 형님분께서 관직에 나가 있으며, 현재 그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후우, 그것 때문에 최근에 근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왕분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저의 형님은 가문의 종손으로서 학문에 매진하여 현재 한림원에 들어가 계십니다.”

“한림원에……?”

장기린은 놀랐다.

한림원.

현재 명 제국의 문사들 중에 문재(文才)가 특출난 인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한림원이었다.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명의 실질적인 재상인 내각대학사를 배출하는 곳 또한 한림원이다.

한마디로, 시대를 이끄는 학사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본래 과거시험이라는 것이 가문의 세도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나, 사실 가문의 재산이 넉넉하여 살림 걱정 없이 글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어야 합격하는 게 가능했다.

즉, 과거를 통과해 한림원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왕분의 가문이 어떤 곳인지 대충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이곳이 본가(本家)가 아니었소?”

“예. 저희 본가는 남경에 있습니다. 집안에선 선대처럼 모두가 관(官)에 투신하길 원하셨으나, 저는 농사나 상업 쪽에 관심이 있었기에 항주 쪽에 자리를 잡고 독립했습니다. 하하, 집안에선 못난 아들이지요.”

남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종손을 한림원에 보낼 수 있는 가문.

즉, 남경에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수 깊은 세도가라는 뜻이었다.

‘의외로군.’

왕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어떤 특별한 계기로 졸부가 된 집안이라고 생각했지 그런 명문가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왕분이 너무 권위의식없이 수더분하고 소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가가 남경에 있다면…… 혹시 이번 난에 변을 당한 것은 아니오?”

“다행히 그때 집안사람들은 모두 북경에서 치러진 큰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혹한 일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가문에 남았던 노복(奴僕)들은 변을 당했습니다만…….”

노복의 안위를 이야기할 때 왕분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래도 가족들이 살아남은 것은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지요. 그 이후로 본가의 분들은 모두 북경에 쭉 체류하고 계십니다.”

“북경…… 이라면 별로 문제가 없는 것 아니오? 현재 가장 안전한 곳이 북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소만.”

장기린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북경엔 황제가 거하고 있다.

금의위나 동창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곳도 북경이며, 삼만의 정예 군사가 항상 번을 서며 지키고 있으니 무림인들조차 함부로 운신할 수 없는 곳이다.

한림원 학사로서 그런 곳에 머무르는데 어째서 형이 위험하다는 말인가.

“은공께선 아직 모르시는군요.”

왕분의 눈빛은 어느새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재 북경은 비상사태로 인해 특급 경계령이 내려진 지 오래입니다. 이유는 밤에 세도가들의 저택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흑화보라는 살문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흑화보!”

장기린은 그제야 납득이 갔다.

최근 장기린의 정신은 오직 삼호방을 상대하는 일과 그다음에 도독부에서 얻은 군사로 어떻게 남경 공략을 하는가 궁리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천맹엔 오왕(五王)이 있다.

장기린이 그중 한 사람인 삼호방주를 쓰러뜨렸다고는 하나, 북천맹엔 아직도 여전히 나머지 사왕(四王)이 건재한 것이다.

‘녹림, 사혈방, 흑화보, 황산파라고 했지. 다들 구대문파에 버금가는, 아니, 오히려 능가할 수도 있는 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무리 흑도 거파라고 해도 그 땅에서 지지받는 민심이나, 오랜 세월 쌓아올린 인맥과 속가제자들의 힘 같은 걸로 따지면 정파인 구파일방을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흑도 문파에겐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집요함과 불법적인 일로 모은 막강한 재력이 있기에, 구대문파를 상대로도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호남제일살문인 흑화보는 명 황실의 중요한 대신들을 암살하고 있어서 큰 위협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지. 그래도 그동안은 강남 쪽의 대신들만 위험하다고 했는데…… 이젠 북경에서도 암약하는 것인가?’

호남의 살문이던 흑화보가 호북을 넘어 북경에서까지 암약한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현재 북천맹의 세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왕 대인의 형님분께서는…….”

“예. 형님께선 최근에 황실에서 중임을 맡으신 터라 목표가 된 듯합니다. 특히 지금은 남경 쪽으로 오고 계신데…… 그 여로에서 흑화보 살수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살수에게 습격당하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천운이 아니오?”

“예. 함께하고 있는 금의위의 부장이 아니었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왕분은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심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흑화보의 살수들은 포기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고관대작들의 첨예한 경계도 뚫고 암습을 하던 자들인데…… 더군다나 익숙지도 않은 전장에 가신다고 하니 걱정부터 앞서더군요.”

“잠깐. 지금 전장이라고 하였소?”

“예. 형님께선 지금 남경을 공략 중인 파강장군의 진영에 황실과의 연락책으로서 파견되셨습니다.”

“……!!”

장기린은 탄식했다.

과연 인연은 인연이다.

장기린이 앞으로 남경을 도모하려면 그곳을 지키고 있는 원회와 협력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분의 형이 원회가 이끄는 부대에 연락책으로 오게 될 줄이야.

‘운화가 신은 믿지 않아도 사람 사이의 인연은 믿는다고 했던가?’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지만, 사람 사이의 인연이 존재함을 나타내는 증좌는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왕 대인.”

“말씀하십시오, 은공.”

“그럼 왕 대인의 형님을 흑화보의 손에서 무사하게 만드는 것으로 쌀 삼천 석의 은혜를 갚아도 되겠소? 사실 그걸로도 부족한 듯하나, 이것 말고는 당장 내가 치를 수 있는 대가가 없는 듯하오.”

왕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초에 쌀 삼천 석은 과거에 그를 구명해 준 것에 대한 은혜로 대가없이 내주려고 한 것이다. 거기에 그의 형님을 구해 준다면 오히려 이쪽이 한 번 더 은혜를 입는 것일 터.

그런데도 장기린은 굳이 일을 그렇게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내.

남들에게 대인 소리를 듣는 왕분으로서도 그가 무척이나 큰사람으로 느껴졌다.

‘절대로 자신이 한 일 이상의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 거기에 그것이 남에게 폐가 된다면 더더욱. 설령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하지 않는다. 군자(君子)구나. 초야에 군자가 숨어 있었어.’

왕분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저는 형님에 대한 것은 그것과는 별개로 부탁을 드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대가로 다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쌀 삼천 석 말고는 필요하신 것이 없으십니까?”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그리고 이 이상의 서로 간에 물고 물리는 은원이 있어 봐야 피곤해질 뿐 아니겠소?”

“하나…….”

“나는 나중에 다시 객잔을 차릴 때, 왕 대인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오. 그때 허물없이 도움을 요청하려면 마음의 짐이 더는 없는 게 좋을 것 같소.”

왕분의 눈빛이 그 순간 복잡하게 변화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마 이분의 성품상 그때가 되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나 이렇게까지 말하시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왕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은공, 염치불구하나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의 형님을 구해 주십시오.”

왕분은 그대로 놔두면 오체투지의 예까지 취할 것처럼 극도의 공경을 보이고 있었다.

장기린이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그러지 마시오. 이건 내가 받은 도움에 대한 정당한 대가요. 이런 식으로 과례를 받으면 내 마음이 오히려 편치 않소.”

“은공…….”

“삼천 석은 살수와 관련된 일을 처리한 뒤에 받겠소. 사흘 안에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사흘 안에 그 일을……. 아니, 은공께서 잘 알아서 해 주시겠지요. 그 안에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장기린은 그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왕 대인, 대륙 곳곳에 전장이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북경 쪽에도 지부가 있소?”

“예? 아, 예. 가장 중요한 도시인만큼 큰 지부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다면 인근에서 몇 가지를 찾아 주었으면 하오만…….”

“말씀하시면…… 아니, 꼭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전장에 이어 표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니, 어려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왕분은 제발 일을 맡겨 달라는 듯,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장기린은 그의 그런 예를 다시 한 번 만류하며 몇 가지를 부탁했다.

“설명이 상세하니 쉽게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쌀을 찾으러 오실 때에 맞춰 함께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흑룡강 유역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먼데, 그렇게나 빨리 가능하겠소?”

“하하, 풍운전장의 성세가 상당합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사실 급속도로 발전하여 괴물 같은 기세로 대륙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풍운전장은 ‘성세’라는 말 정도로는 부족할 정도였으나…… 지금의 장기린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장기린은 왕분의 저택을 떠나갔고, 왕분은 그런 장기린을 손수 입구밖까지 마중하는 예를 보였다.

파강장군 원회의 대대적인 남경 공략전이 머지않은 날, 항주의 외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왕분의 저택을 빠져나온 장기린은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왕분의 저택은 안 그래도 농지와 가까운 쪽에 위치했기에 한낮이 아니라면 사람 그림자도 찾기 힘들 만큼 황량한 곳이 많이 있었다.

장기린은 길 한 켠에 자라고 있는, 적어도 나이가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노송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아니, 날이 어두운 한밤중이니 그늘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등불 하나 없이 어두운 곳에서도 달빛까지 가려서 더더욱 어두운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장기린은 노송 아래로 다가가 조용히 나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라. 잠시 이야기를 좀 하지.”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광경이었으나, 장기린의 눈빛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벌써 열흘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와라.”

장기린이 노송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가끔 몸을 떠는 노송일 뿐이나, 그 속에는 예전에 낭화의 곁에 붙어 있던 이망 이상의 은밀한 기척이 숨겨져 있는 상태였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되고, 풀잎이 흩날리면 풀잎이 된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림십대고수 급이라도 방심하고 있다면 기척을 잡아내기 힘들 만큼 은신술의 경지는 지고했다.

“나오지 않을 건가?”

철컹!

장기린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육 척짜리 무인창으로 변신한다.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나오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밖에 없을 터.

“어쩔 수 없군. 이 일은 네가 자초한…….”

장기린의 말이 이어지려는 그 순간!

쉬이이익―!

날카로운 칼에 창호지가 갈라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노송의 잔가지 위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간을 양단해 왔다.

어두운 밤, 달빛조차 가려진 곳에서 떨어지는 그것은 검은색 묵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칼날에 먹을 칠해 날붙이의 반사광을 아예 없애 버린 것이다.

굉장한 속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무인이라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막지 못할 만큼 빠르고 군더더기없는 일격이었다.

쩌어엉!!

“흠!”

하지만 상대는 장기린이었다. 달빛조차 가르는 듯했던 찰나의 순간, 무인창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검격을 막아 낸 뒤, 곧바로 창끝을 휘돌려 반격까지 가했다.

고오오오―!

가볍게 손목만 살짝 움직인 듯했으나, 무인창에 실려 있는 경력은 그야말로 폭풍이 휘감긴 듯 어마어마했다.

따다다당!!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그 풍압만으로도 거대한 노송이 흔들리는 듯한 일격이었다. 장기린의 반격을 막아 내기 위해 암습을 가한 상대는 허공에서 무려 네 번이나 칼을 휘둘러야 했다.

그는 그러고도 여력이 모자라 노송의 가지를 몇 개나 부러뜨리며 허공으로 튕겨졌다.

후두두둑.

새파란 솔잎이 청아한 향기를 남기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화아악―!

장기린은 머리에 달라붙는 솔잎들을 기파만으로 튕겨 내며 곧바로 그 뒤를 쫓으려 했으나, 튕겨지던 그림자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며 창을 휘둘러야만 했다.

품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이미 장기린에게도 익숙한 모습의 가죽 주머니들이었던 것이다.

움직임으로 봐선 대륙 최고의 살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사용하는 독분이었다.

얼마나 지독하고 치명적인 독일지 충분히 상상이 되질 않는가.

게다가 장기린의 안력에 비친 주머니들은 그 숫자가 무려 십여 개나 되었다. 각기 다른 십여 종의 독분을 저자는 아끼지도 않고 일제히 쏟아부으려고 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저 정도 양이면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고도 남을 터.

장기린의 손이 바빠졌다.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 살수와 장기린, 두 사람 모두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어 내며 삼 장 간극의 싸움을 이어 나갔다.

쉬쉬쉬식―!

십여 개의 가죽 주머니가 각기 다른 속도로 날아왔다.

어떤 것은 매우 빠르게, 어떤 것은 조금 느리지만 휘어지는 듯한 투로로. 또한 어떤 것은 머리 위쪽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주머니를 내던진 것만으로도 허공에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낸 듯한 모습이다.

그 모습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투척술을 지고한 경지까지 연마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터.

파파파팟!

후우우웅―!

하지만 장기린 역시도 일연적룡무를 통해 극쾌와 환을 모두 가미한 창술을 익히고 있었다.

허리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채 시선은 무심하게 정면을 향한다.

그 상태로 마치 천수여래가 이 땅에 강림한 듯 양팔만이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육 척 길이의 무인창이 오른쪽으로 휘는 듯하다가 왼쪽을 때리고, 왼쪽을 찌르는 듯하다가 오른쪽을 휘감는다.

빠른 속도의 쾌공 같으면서도 무거운 중검의 묘리를 품고 있고, 그러면서도 이화접목의 유술(柔術)로 상대의 힘을 흘려보낼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던 독낭(毒囊)들이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졌다.

창끝만으로 만들어 낸 신기(神技).

길고 단단한 창을 마치 수족처럼 다루지 못하면 불가능한 경지의 기술이었다.

쉬시시식―!

퍼펑!

“이런……!”

한데, 문제가 생겼다.

독낭을 집어 던진 살수가 마치 장기린이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놀라운 비도술로 바닥에 놓인 독낭들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화아악―!

독낭은 미리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만들었는지, 비도가 꽂히자마자 마치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활짝 펼쳐지며 독분을 허공에 내뱉었다.

십여 개의 독낭에서 뿜어진 독분들이 허공에서 뒤섞이며 커다란 구름을 형성했다.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각양각색의 독분이 뒤섞이자, 놀랍게도 새카만 독운(毒雲)이 만들어져 허공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옆에 있던 수백 년을 살아 온 노송이 말라 죽어가는 것과 동시에 멀쩡했던 땅이 새카맣게 변하며 타들어 갔다.

치지지직……!

장기린은 그 새카만 독운의 강력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독은 본래 흙을 태우지는 못한다.

그런데 저것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만독의 상위에 있는 흙마저 까맣게 태운단 말인가.

만약 사람이 저 독운에 닿았다면 독에 중독되기에 앞서 육신이 지글지글 끓으며 타들어 갈 것이 분명했다.

‘대단한 독이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질인만큼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저 정도의 독을 만들어 내려면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그 값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해 볼수록 놀라울 뿐이기에 장기린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뿐.

장기린에게 있어 독이란 놀랍기는 하나 승부를 결정지을 수는 없는 무기였다.

스으으―

“흐으으읍!”

장기린은 창을 앞으로 겨눈 채 지그시 독운을 응시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꿈틀거리며 새카만 독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독운을 위에서 아래로 짓눌러 흙바닥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듯한 모습이다.

장기린의 눈에서 푸른빛의 신광이 번뜩였고, 그의 몸에서 뿜어진 기세가 주변을 압도했다.

치이익…… 치지직……!

독운은 마지막까지 흙을 태우며 저항했으나, 결국 바닥을 새카맣게 물들이며 바닥에 짓눌려 사라져 버렸다.

강력한 ‘의지’만으로 행하는 기적.

장기린이 일전에 맹호도 방극을 상대로 보였던 일연적룡무의 마지막 세 번째 초식이 초현된 것이다.

“이럴 수가……! 운사독(雲死毒)이……!”

노송 가지를 부러뜨리며 튕겨 났던 살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운사독.

그것이 이 독의 이름인 모양이다.

장기린은 휙― 하고 무인창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뒤, 곧바로 번개처럼 앞으로 달려들었다.

찌이익―!

살수는 달려드는 장기린을 보며 입고 있던 상의를 찢듯이 벗어 던졌고, 그러자 그 속에서 수십 종의 암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슈슈슉―!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전신에서 돋아난 암기들이 장기린 한 사람을 노리고 쏘아졌다.

수십 종의 암기.

개수로는 수백 개나 되는 양이다.

폭우침(暴雨針), 상문정(喪門釘), 부용금침(芙蓉金針), 조핵정(棗核釘), 비황석(飛蝗石) 등등…….

온갖 종류의 암기가 쏘아져 오는데, 이게 만약 장기린 한 사람이 아니라 전장에서 사용했다면 수백 명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굉장한 양이었다.

한 사람에게 몰아서 사용하기엔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양.

하나 장기린은 그것을 좌측에 있던 노송을 일격에 박살 내는 것으로 모조리 막아 냈다.

콰아앙!!

콰드드득―!

꾸우웅!!

족히 오 장 길이는 될 법한 노송이 밑단이 박살 난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땅이 울리고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장기린을 노리고 날아온 암기는 태반이 그 노송의 몸에 꽂혀 막혀 버렸고, 빠르게 날아온 몇 개는 장기린이 직접 창을 휘둘러 쳐 냈다.

싸움을 위해 거대한 노송을 쓰러뜨렸고, 땅이 까맣게 타들어 갔으며, 그 뒤에도 흩날리는 솔잎과 뿌연 흙먼지로 주변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대단하군.’

장기린은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무인창을 휘두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껏 이망과 그 외의 몇몇 특급 살수들을 보아 왔지만, 이 정도로 강한 살수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특급 살수를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

그야말로 초절정고수도 틈만 노리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살수계의 정점을 보고 있는 것이다.

터엉!!

장기린은 노송을 쓰러뜨려 암기를 막아 낸 뒤에, 몸을 날려 섬전처럼 정면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삼 장이 넘는 거리였으나 상대에겐 마치 한 걸음 만에 좁혀 오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채채챙!!

장기린은 그 짧은 순간에도 반응해 비도를 날려오는 살수의 공격을 모조리 차단한 뒤, 육 척 길이의 무인창을 크게 옆으로 휘돌렸다.

후우웅―!

“……!”

장기린이 사정없이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살수가 운신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무림오존 수준의 막대한 경력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빠름, 강함, 치밀함.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공격이다.

쩡! 하고 칼날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살수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하게 비틀어지며 옆으로 날려갔다.

장기린은 그제야 살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온통 검은색 복색에 두건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왼쪽 어깨 쪽에 검은색 광석으로 만들어진 새를 장식으로 달아 놓고 있었다.

어깨에 매달린 검은색 새[黑鳥].

왠지 눈에 선명하게 박혀드는 모습이다.

쉬이익―!

장기린은 살수가 쓰러진 노송에 쿵! 하고 처박히자마자 그 앞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끝까지 비도를 날리려는 살수의 목을 왼쪽 손아귀에 덥썩 움켜쥐고 노송에 뒷덜미를 다시 한 번 처박은 뒤 무인창을 아래로 내려쳤다.

꽈아앙!!

거센 충격과 함께 쩍 벌어진 노송의 파편이 사방으로 후두둑― 튀어나갔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는 속으로 열을 센 뒤에야 조금 가라앉았다.

드디어 살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바로 옆에서 터진 충격파에 고막이 떨려 몸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는데다, 목에 무인창이 닿아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덤벼온 살수의 숫자가 스물다섯.”

장기린은 복면 위로 차갑게 굳어져 있는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대부분이 죽었고 몇몇은 도망쳤지만, 그래도 오늘처럼 강한 살수가 찾아온 적은 없던 것 같은데.”

“…….”

“본래 오늘 야조탑의 탑주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하군. 탑주가 직접 왔으니.”

장기린은 살수의 왼쪽 어깨에 달려 있는 검은색 야조(夜鳥)의 훈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표식이야말로 야조탑주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복면을 쓴 살수, 아니, 야조탑주는 그 상태로 장기린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무엇인가?”

호북을 제압한 호북제일살문의 주인은 의외로 평범한 촌부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대화를 할 건가?”

“…….”

장기린은 야조탑주의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하겠다는 걸로 받아들이지. 만약 한 번만 더 공격을 하거나 도주하면…… 그때는 팔이나 다리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야조탑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실 그는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김에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장기린 같은 자는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한 번이라도 더 공격을 시도하면 정말로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조탑에 나를 의뢰한 것은 삼호방일 테지?”

“…….”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지금 나는 너를 죽이려다가 살려 준 것이다.”

장기린이 지금 바라는 것은 대화였지, 일방적인 말상대가 아니었다.

야조탑주는 한참을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다.”

“삼호방은 이미 멸문되었다. 주요 인물들 중엔 살아남은 사람도 없지. 그런데 왜 이 일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지?”

“당연하다. 그것이 살수 문파의 신의(信義)이기 때문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대답하는 야조탑주의 목소리에선 당당함이 느껴졌다.

“신의? 살수 문파에 신의가 어디에 있지?”

“……우리를 모욕하는 건가?”

“모욕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거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게 살수다. 상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의뢰가 들어오면 죽여야 하지. 그런데 거기에 무슨 신의가 있다는 거냐?”

군문의 병사들은 똑같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는 명분과 숭고한 신의가 있었다.

하지만 살수는 아니다.

돈.

오로지 돈을 위해 싸우는 만큼 다른 신념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문파들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으면…….”

“살수들의 의뢰는 끝나기 전까지는 비밀이라고 알고 있는데, 야조탑이 나를 습격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누가 안다는 말이지?”

“…….”

야조탑주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이 일은 잘못된 점이 많았다.

의뢰를 한 삼호방은 이미 멸문해 버렸고, 선금을 받긴 했지만 장기린이 가진 막강한 실력 때문에 희생된 살수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었다.

문파의 이득을 생각하면 진즉에 손을 뗐어야 하는 것이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야조탑주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삼호방이 무너져 버린 뒤에도 야조탑주인 그가 직접 살행을 시도한 것도 사실 그의 자존심 때문이다.

특급 살수 중에서도 특급 살수.

만약 살수 중에서 최강을 가리자면 그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장기린이라는 막강한 자를 상대로 살행을 시도하고 만 것이다.

“본론만 말하지. 나에게서 손을 떼라.”

“…….”

야조탑주의 눈빛이 독해졌다.

“그럴 수는 없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라. 현재 북경에 있는 관리들이 흑화보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원래 흑화보가 북경까지 관리하던가? 내가 듣기로 그곳은 야조탑의 권역이라고 들었는데.”

“…….”

“내가 한 번 설명해 볼까?”

장기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본래 야조탑과 흑화보는 하북과 하남을 양분할 만큼 세가 비등한 곳이었는데, 흑화보가 북천맹에 들어가면서 세가 강해져 버린 거다. 예전엔 비등했던 힘의 균형이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 버렸으니 지금 북경의 영역을 침범당했는데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즉, 야조탑은 약하고, 흑화보가 더 강하다는 뜻이고.”

야조탑주의 눈에서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웃기지 마라. 흑화보 따위는 살수의 기본도 모르는 멍청이들뿐이다.”

야조탑주의 목소리에는 삼엄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면서 가만히 있나?”

“…….”

“게다가 그런 상황임에도 탑주는 북경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직접 이곳까지 내려와 나를 노린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지 않나?”

야조탑주는 입을 꾹 다물었으나, 이미 장기린은 일의 선후를 파악한 뒤였다.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장기린의 눈동자가 야조탑주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현재 야조탑은 흑화보에게 명성과 실력, 두 부분에서 크게 밀리고 있으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

야조탑주의 눈빛이 떨렸다.

장기린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지금 강호에는 무쌍귀와 귀마대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바로 이때 무쌍귀를 죽이면 야조탑은 큰 관심을 받으며 강한 저력을 가지고 있는 문파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것이다.

무림강호에서 명성은 곧 힘.

야조탑으로선 북천맹이 너무 강대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안됐지만…… 야조탑주, 그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

“야조탑의 능력으론 나를 쓰러뜨릴 수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야조탑주가 장기린의 내심을 탐색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비록 장기린이 그의 목숨을 살려 줬다고는 하나 겨우 그런 것에 의미를 두기엔 야조탑주는 힘든 무림 세파를 너무 많이 겪었던 것이다.

살려 둔다고 다가 아니다.

살려 둬 놓고 독을 먹이거나 약점을 잡아서 이용해먹는 경우도 부지기수인 것이다. 멋모르고 어리바리하게 굴다가는 어떤 면에서는 곧바로 죽이는 것보다 더 처참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다. 당신은 어째서 북천맹에 들어가지 않았지?”

“……그건 왜 묻지?”

“내가 듣기론 북천맹은 딱히 오는 자를 막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대세에 따라 북천맹에 가입했다면 오왕의 자리 중 하나를 꿰어찰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렇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야조탑주는 얼버무리며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눈빛만이 그가 지금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줄 뿐이다.

“거짓말을 하는군.”

“뭐라……!”

“야조탑주. 본명 곽삼. 장가구 인근 화전민 출신으로, 원 나라 잔당들의 수탈을 견디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때문에 원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다고 하더군. 원에 대한 반감 때문에 북천맹에 들어가지 않은 게 아닌가?”

“너…… 너……!”

야조탑주는 얼마나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다만 당신이 비록 흑도에서 살수의 일을 하고 있는 자라도 명 나라 사람이라는 인식이 똑바로 박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장기린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심유한 눈빛으로 야조탑주를 응시했다.

야조탑주는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게…… 왜……?”

“북천맹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원 나라에 대한 반감때문이라면 아직 우리는 대화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일 테지. 난 이제 앞으로 남경을 빼앗아 올 것이다.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북천맹과 적대해야만 한다는 소리다.”

“……!”

남경을 빼앗는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말이지만 최근에 삼호방을 멸문시킨 장기린이 말하니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명 나라 사람으로서 명 나라 사람에게 말하겠다.”

“……!”

“지금 명 제국에 있어서 남경을 되찾아 오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그러니 당신은 마땅히 나를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건 당신에게도 이득이다. 나를 죽이고 공을 세우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 북천맹을 무너뜨리면 자연히 흑화보의 힘도 약해지게 되지 않겠나.”

복면으로 가려져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조탑주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혹시 구원이 있나? 살수들이 나에게 죽은 것에 대해 원망이 있는 건가?”

“……그건 아니오.”

물론 복수를 해 주지 못한다면 문파 내부에서 체면이 안 서겠지만, 워낙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라 내부에서도 고위 살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애초에 살수들은 죽음을 달고 사는 존재다. 야조탑 쪽에서 먼저 죽이고자 덤빈 것이기에 원망이라 할 것까찌도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의뢰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으며, 대의로서는 마땅히 북천맹을 적대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나를 고집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렇…… 소.”

결국 야조탑주는 수긍을 하고 말았다.

장기린의 거대한 존재감에 짓눌려 주도권을 빼앗긴데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를 도울 방법을 말해 주지. 현재 남경 공략을 준비하고 있는 파강장군 원회의 진영에 황실에서 연락책으로 관리를 파견했다. 그중 왕 씨 성을 지닌 사람이 흑화보의 목표가 되어 있다더군. 그 때문에 현재 그 사람은 중상을 입고 목숨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들었다.”

“흑화보가 이곳으로……?”

“그렇다. 그러니 그 사람을 흑화보의 손으로부터 지켜 주면 된다. 야조탑의 이름으로 설욕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

“흑화보가 아무리 대단한 살수를 보낸다 해도 당신이 지키려고 한다면 아무도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은 한 치도 보태거나 빼지 않은 장기린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야조탑주는 장기린조차 쉽게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암습에 있어서 지고한 경지에 올랐으니, 흑화보주가 직접 오지 않는 한 정말로 상대할 자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야조탑이 그에 대한 일을 승낙하는 순간부터 장기린은 더 이상 왕분의 형에 대해 걱정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만약 야조탑이 흑화보로부터 그 관리를 무사히 지켜 낸다면…… 내가 직접 대륙 전역에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주지. 야조탑이 흑화보가 노리는 관리를 지켜 줬다고.”

“…….”

장기린은 야조탑주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야조탑이 흑화보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야조탑주가 현재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절실한 문제였다.

“당신은…….”

야조탑주는 복잡한 기색이 역력한 채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정말 괴물이군.”

마치 말로 형용할 길이 없다는, 겨우 끄집어낸 어휘가 그것이었다.

야조탑주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흑화보와의 정면 대결을 승낙하는 야조탑주.

야조탑은 왕분의 형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결국 살해당하도록 내버려 두고 말 것인가?

작다면 작은 그 일에 대륙제일의 살수 문파가 어디인지를 가르는 자존심이 걸리고 말았다.

이로써 대륙제일의 살수 문파가 어디인지를 가르는 전무후무한 살수대전(殺手大戰)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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